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어록-우주와 신비 본문
다석어록-우주와 신비
●우주의 신비와 사람의 영성(靈性)은 한없이 깊은 곳에, 한없이 신비
한 곳에 깊숙이 담겨져 있다. 이것이 사람의 본체(本體)이다. (1956)
●하늘과 땅은 한 우주 안에 있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으로 들어간다
는 것과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다 같은 것이 아
닐까?하늘과 땅을 달리 보려는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추상이 다를
때에 한한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 하늘 땅이다. 우주에는 그런 구별이
없다. 지구도 우주 안에 떠있는 하나의 천체(별)이다.
그러나 달리 볼 때에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이다. 땅에 대하여 하
늘은 아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상대세계에 있다. 상대세계
에 사는 동안은 우리는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
므로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1956)
●우리는 태양계 안에 살고 있다.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해는 모든
힘(氣)의 원동력이 된다. 달(月)은 다름(異)을 뜻한다. 달은 날마다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 우주 안에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자꾸 달라진
다. 산도내도 나무도 풀도 사람도 달라진다. 그래서 돌아가게 되어 있
다. 해속에 '달리 돌림'이다 그래서 자연이 제 가운데 있게 된다. 이를
가운데(中)란 뜻인 가온(『.』)으로 나타내었다. 저절로 제 가운데로 들
아온다는 뜻이다. 얼도 이와 같다. 우주와 사람은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모순된 것, 그리고 못된 것을 다 버리고 돌아가면 마
침내 가온(『.』)으로 돌아간다. (1956)
●하늘 지붕에 달린 등불인 태양은 거짓된 빛이다. 태양의 빛이 들어
가서 비뚤어져 빚어진 이 세상을 영원에서 보면 아주 못된 것이다. 사
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는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면 책망을
받는다. 책망은 사람이 책임을 못한 데서 생긴다. 책임을 못하면 그것
은 빛인 것이다. 태양 빛 빛들어 빛어진 세상은 빚진 세상이다. 이 빚
은 빗어 내야 한다. 머리 빗으로 머리에 묻은 때나 먼지를 빗어내는 것
처럼 빛들어가서 빚어진 빚진 세상은 빗으로 빗어야 한다. 빗으로 빗어
모든 빚이 없어지고 또 다시 빛나는 세상이 될 때 비뚤어진 세상은 바
른 세상이 된다. 그렇기 위해서는 빚을 빗어 낼 수 있는 참빗이 필요하
다. 참빗은 생명의 빛이요 성령의 빛인 얼빛이다
빛과 빚과 빗은 다 같은 말이며 다 다른 말이다. 빛에서 빚이 나오고
빚에서 빗이 나온다. 빗이 있는데 빚을 덜게 되고 빚을 덜게 될 때 빛
이 비친다. (1956)
●우리가 우주인의 관념을 가진다면 주소라는 게 어디 필요하겠는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우주에 산다고 하면 그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우주 공간에 태어난 것으로 알면
어디에서도 잘 수 있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적어도 태극천하(太
極天下) 그 어디에 갖다 놓아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주를 삼킬 듯이 돌아다녀야
한다. 공연히 집 없다 걱정, 병 날까 걱정, 자리 없다 걱정, 그저 걱정
하다가 판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주 여행가가 되어 우주선
타고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
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고향에서 40리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생
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능히 우주인으로 사는 것
이 된다. (1956)
●사실 우리의 몸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혈액은 슁 없이
자꾸 돌고 있으며 우리의 호흡으로 태울 것을 죄다 태우고 있다. 그리
고 우리의 몸을 실은 지구 또한 굉장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
다.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허공(우주 공간)에서 본다면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는 순간 순간 지나쳐 간다.도대체 머무르는 곳이 어디
에 있는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서 이제 여기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그 한 점 그것이 이제 여기(now and
here)인 것이다. 그 한 점이 영원이라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이렇
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이제 여기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룹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참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오랜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가온찍기(『.』)이다.이 점이 나가는
것의 원점(原點)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이다. (1956)
●우리는 일정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 그래서 무주(無住)이다. 머무를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일 뿐이다. 우주 공간이 우리의 주소이다.사
람들은 모두 머무를 곳을 찾는다. 그러나 머물면 썩는다.주(住)라야
살 것 같지만 무주(無住)라야 산다. 머무르면 그쳐 버린다 산다는 것
은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1956)
●우리 몸은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60조
의 살알(세포)이 하나로 뭉치어 유기체(有機體)를 이를 때에 여기서
개성(個性)이랄까, 성격이랄까 한 인격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신비
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60조 살알(세포)이 저마다 정신을 차릴 때에
놀라운 전체 정신인 영원한 인격이 구성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그
런 뜻에서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게
하는 모체인 것 같다.나는 40억(현재는 60억)의 인류가 뭉친 이 우주
위에는 하나의 신격(神格)인 영원한 정신이 꼭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唯一神)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우주 만물을 하
나의 죽은 물질로만 취급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우주가 단순히 죽은
물질이라고 푸대접할 수는 없다.내 몸의 살알(세포) 하나하나가 살은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의식(絶對
意識), 절대신격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은 만
물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1956)
●옛날 중국의 육상산(陸象山)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우주가 무엇이냐
고 물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웃
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육상산은 다른 사람에게서 우주가 허공이라는
말을 듣고는 "우주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어린 육상산은 우주가 허공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가 우주와 한통
속인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은 자기의 분수(分數)를 알아야 한다. 나는 몇 억만 분의 하나라
는 지극히 작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영(零)이 아니다.
영(0)에서 훨씬 떨어진 영점 아래의 소수이다. 육상산은 분수를 기분
(己分)이라고 했다. 나는 기분(己分)이고 전체가 하느님이다. (1956)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향내라 할 수 있는 신비를 느껴
한다. 신비를 느끼려면 자신의 무지(無知)와 부지(不知)를 알아야
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자(小子)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
(一)를 하느님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 삶의 길이다.(1956)
●우리가 유일신(唯一神)을 따라서 퍽 밝은 세상에 사는데 우주라는
것을 아주 무생물 취급을 하는 수가 많다.우주를 산 것이 아닌 생명
없는 것으로 알고 물건 취급을 한다. 우주가 사람들에게 퍽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주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든 못받든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다. 유일신을 받드는 사람으로서는 만유신론(萬有神論)범
신른(汎神論) 같은 것을 아주 싫어한다.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하나
님뿐이다.
사물(事物)에 신(神)이 있다고 하면 당장 반신른(反神論)이라고 단
정을 하고 내던진다. 그래서는 사람이 참되게 살 수가 없다. 성경 가운
데도 하늘과 땅이 맹서하는데 입회를 하고 하느님을 모른다고 할 때
돌멩이를 증거로 삼았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12사람 보고 바다 밑
에 돌을 줍게 하여 하나씩 짊어지고 건너 땅에 가서 그 돌을 일으켜
세우고 모세가 마지막으로 백성을 가르칠 때 이 돌 앞에서 맹서하게
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한 하느님을 섬기라고 한 것은 참(진리)으로서 섬기란 것이지 다른
것을 무시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되지 못하고 밝지 못한 정신을 가지
고서 코로 제법 숨을 쉬니까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소리
를 한다.그것도 절대인 영원한 정신의 그리스도를 완성하겠다고 늘 그
러한 소리를 하면 혹 모르겠다. 그렇지 못하고서 자기만 옮고 다른 것
은 모두가 틀렸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만물도 하느님의 말씀
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부속물이다. (1956)
●신비(神秘)와 과학에 대하여 말하기를 "신비 아닌 것은 과학이 안
된다. 신비를 생각하는 것이 신비인데 한 껍질만 알면 신비가 아니다.
모르니까 신비이지 알아 버리면 신비니 뭐니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찾아내 밝히면 알게 되어 신비가 없다는 이는 잘못 생각하
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이 과학의 지경이고 어떤 지경이 신비인지 따지
고 보면 너무나 겉껍질이 여러 겹이라 잡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려
고 하는 원인과 결과는 신비에 귀결된다. 귀결되는 신비를 들춰 놓고
과학을 한다고 한다. 원인과 결과는 아무리 찾아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
는다. 원인도 끝이 없고 결과도 끝이 없다.그래서 또한 신비이다. 이
사람은 일찍 이러한 신비주의를 가진 사람이다. 이지적(理智的)으로
윤리적(倫理的)으로 이렇게 가는 이 사람이다. 절대자 당신이 알고 싶
을 때 당신 존재를 좀 인식하고 싶다. (1956)
●우리는 결국 신비 (神秘)를 좇고 가는데 그 결과 아직도 신비라는 것
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다. 그
러나신비파니 신비주의니 해서 잘못 알아들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자
칫 잘못하면 폐단이 따른다. '모두가 신비다. 추리이고 학문이고 과학
이고 소용이 없다. 이것을 해 가지고는 신(神)을 만날 수 없다. 신(神)
이 내려올 것이다. ' 이렇게 되면 개 돼지와 같은 처지가 된다. 그 지
경이 되면 윤리 도덕이 다 없다고 하는 것이 되어 희망조차 없게 된다.
직접 신(神)에게 접촉한다며 황흘경에 들어가서 인식세계를 부인하는
지경에 간다. 이러면 이 신비주의는 대단히 불행한 것이 되고 만다. 그
렇게 되면 이 상대세계에서 겹치기로 불행을 맛보게 된다. 이것이 남녀
가 함부로 접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그것이다.
이런 것이 성력파(性力派) 교회에는 다 있다. 무당과 같이 신(神)이
내리는 교리가 많이 있는데 중세기에 한 번 크게 일어났다가 없어진
일이 있다. 우리나라 요새 교회는 더욱이 이러한 경향으로 홀러가고 있
다. 방황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은 경이원지
(敬而遠之)해야 한다. 하느님과 너무 가까우려 하면 몸의 욕심이 가서
붙게 되어 안 된다. 모르는 하느님의 신비는 무한하기에 사상이 있고
신앙이 있다. 신학(神學)은 궁신지화(窮神知化)가 학문인데 어떻게 보
면 신비주의로 볼 수 있다. (1956)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빛은 자연계를 비치는 해와 달의 빛이 아니
라 우리의 마음속에 비치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진리의 빛이다. 이 빛을
가지고 인류가 깨어나 대우주의 무한히 찬란한 빛처럼 이 세상에도 찬
란한 정신문명의 얼빛이 밝아졌으면 한다.
이 무한한 대우주를 쳐다보면 너무 넓어서 까마득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허공에 태양처럼 빛나는 광명체가 너무 많아서 그것이 하
나의 별구름(星雲)이루고 그 별 구름의 모습이 마치 가지가지 꽃으로
만발한 꽃밭과 같다. (1957)
●태양이 크다고 클 태(太)를 써서 태양이라고 한다. 큰 대(大)에 점
을 하나 더 찍고 한 번 더 크다는 뜻으로 이같이 쓴다. 엄청나게 크다
고 태양이라 하는데 그게 뭣이 그렇게 엄청나게 큰 것인가? 성경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완전한 빛을
보았는가?태양은 하나의 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빛이라고 하
는 것이다.
저편 산에 해가 지면 왜 캄캄해지는가? 얄팍한 구름 한 점에도 가리
워지면 왜 어두워지는가?무슨 광명이 흑암에 진단 말인가?우주는 호
대(浩大)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그 밖에 발광체가 하
고 많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몰아내었는가? 갇힌 몸으로 생각하니 그
정도밖에 생각이 안 된다. 예수가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했는데 하느님의 얼빛을 우리는 본 일이 없다. 대부분 흑암
속에서 어물어물한다. 태양을 크다고 하다니 그러한 망발이 어디 있는
가? 태양은 결코 큰 것이 못된다. 호대(浩大)한 것은 흑암이요 태양
광체란 미미한 것이다. 특히 태양광선을 받고 나타나는 현상(現象)이
란 더욱 지극히 미약한 것일 뿐이다. (1957)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은 알지만 해 아래가 어두운 것을 잘 모른다.
해 때문에 해 없는 밤에 보이는 별들이 안 보인다. 태양은 큰 등잔에
지나지 않는다. 해 아래는 어둡다는 것을, 해조차 어두운 것을 모르는
사람의 지혜는 혼미(昏迷)하니까 쌀만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미신(迷
信)은 쌀만 먹고사는 것을 믿는 것이라 하기도 했지만 애써 입에 풀칠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미신에 빠져 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참나
를 깨달아야 한다. (1957)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아
무리 영광을 받으셔도 또 아무리 존귀하게 계시더라도 그 아들된 내가
그 아버지께 이르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1957)
●인생은 한정된 곳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정 없는 곳에 뜻이 있
다. 정신과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살려는 사람은 이것을 절실히 느낀
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
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을동을 느
껴야 한다. 하늘로 머리를 두고 있는 인간은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에서
생명의 고동을 느끼면서 살라는 것이다.
●모든 상(像)속에는 생명과 을동이 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상이요 우
주가 상이다. 악기에서 음률이 나오는 모양으로 우리는 삼라만상 속에
서 생명의 고동을 느낀다. 따라서 상(像)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다. 따라서 우리는 상 위의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 상의 핵심 속에
들어가서 그 주인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마음속에 좇아 들어가 신격(神
格)이신 하느님의 정신을 알려고 한다. 사람이란 껍질(몸)로만 반죽되
어 있는 것이 아니다. (1957)
●사람은 이상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기 존재가 언제나 문제
가 되는 동물이다. 이것이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점이다. 사람이 어찌
하여 자기 존재가 문제가 되느냐하면 사람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하느
님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공자(孔子)는 60살에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나이 60이면 하느님의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공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갈라디아서 5:22, 로마서 12:1 참고)
●대우주(大宇宙), 대전체(大全體)를 장자(莊子)는 대괴(大塊: 큰 덩
어리)라고 했다. 대우주는 언제나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다. 대우주를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계속 변해간다는 말이다. 계속 변하여 자기가 없
어지는데 그런데 대우주는 여전히 대우주라는 것이다. 곧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고 하면 대괴(大塊)
는 변(變)을 가지고 상(常)을 삼는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된
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변위상(以變爲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변해야 한다. 자꾸 변하면서 불변이 된다. 그래서 능변여상(能變
如常)이다. 이는 절대생명(얼나)을 붙잡고 그 뜻에 따라 상대생명(몸
나)으로는 변화를 하는 것이다. (1957)
●사람은 천문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아야 한
다. 보통 상식으로도 별자리들은 기억할 만큼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고 올라가는 것이 어렵다고 할 것 같으면 안 된다.
별하늘을 쳐다보고 그 다음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위(하느님)까지
쳐다보아야 한다.
이와는 달리 짐승은 머리를 땅으로 숙이고 횡행(橫行)한다. 천하를
횡행하고 싶다는 영웅들도 죄다가 짐승들이다. 사람의 마음에 물욕이
횡행하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끊어진다. 마르크스·엥겔스가 처음에
는 공평하게 먹어야 한다는 이상은 좋지만 먹을 것에 횡행하면 고만
짐승 노릇밖에 될 수 없다. (1957)
●그믐이나 초하롯날 밤에는 하늘에 그득한 밝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눈은 가까운 데서만 볼 것이 없다. 멀리 내다보는 우리 맘에
는 어떤 정신의 빛이 별빛처럼 쏟아져 온다. 그것이 하느님의 얼이다.
석가가 새벽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 그래서다. (1957)
●즉주(卽周)는 둘레 곧 우주의 허공(빈탕한데)이다. 즉조(卽照)는 반
딧불 곧 태양이다. 영원무한한 허공에서 보면 태양은 아무것도 아닌 반
딧불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반딧불에 비친 것에 맘을 일으키
고 돌아보다가 현혹되고 집착하면 안 된다. 즉세(卽世)해야 한다. 즉세
(卽世)는 벗어버릴 것 다 벗어버리고 나가는 것이다. 세상 일 다 보면
즉세(卽世)했다고 한다.
등잔에 석유가 떨어져서 불이 차차 꺼질 무렵 다된 불기운이 거의
배나 불이 환해지면서 아주 꺼진다. 에너지가 있는 대로 다 나와 버린
것이다.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 성냥불도 켜보면 가끔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람도 죽음 직전에는 도로 기운이 난다. 그리하여 이제단는
다 낫다고 할 때 그 이튿날 아주 죽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끝을 남
기지 않는다는 것 곧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는 것으로 잔신(殘燼)이라
고 한다. 우리는 이처럼 잔신 즉세(卽世)하여 우주의 허공으로 돌아가
는 것이다. (1957)
●한숨만 쉬는 버릇도 못쓰나 큰 숨 아니 쉬지 못할 때 한숨을 쉬지
말라는 그러한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큰 숨 쉴 때 크게 쉴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이 좋다. 한숨 쉴 때에 땅이 꺼질 때까지 쉴 수 있는 세상
이 옳은 세상이다. 한숨 쉬는 것을 막는다든지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세
상은 옳은 것이 올라갈 수 없는 세상이다.
시간과 공간 덩어리인 이 우주가 "한숨"이라고 하는 일도 있다. 시
간 공간을 알지 못하니까 한숨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은 직
감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1957)
●우리가 움직이는 틀(機)로 보면 하늘은 아래로 땅은 위로 움직인다.
그 사이에 우리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사람의 일생이란 취생몽사(醉
生夢死)로 하룻밤 자러온 셈이다. 잠시 꿈틀거리다가 휙 없어진다. 우
리는 그러한 꿈의 틀인(꿈틀)이다.
사람은 그냥 주위만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나 땅 밑같이 보
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곳까지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
늘 위를 천당(天堂)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천상(天上)과 지하(地下)
를 생각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사는 것이다. 그것을 나타낸 것
이 사람의 머리는 둥글고 발은 편편하게 생긴 것이다. (圓頭足方) 이렇
게 생긴 것은 하늘 꼭대기까지 땅 아래까지 이 우주의 존재하는 의미
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상(天上) 지하(地下)조차 깨트
려 나가서 천상(天上) 허공의 얼님(하느님)에게까지 이르러야 한
다. (1957)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 부분
은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
를 아버지라면 부분이 아들이다. (1960)
●이 만물(萬物)이란 떡의 곰팡이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귤 껍
질의 울룩불룩한 것이 세균에게는 산(山) 같을 것이다. 물건 제 자신은
장한 체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1960)
●관(觀)은 둘이 있는데 비관 아니면 낙관이다. 나도 젊을 때는 이 세
상을 낙관하려고 해봤다. 이제는 철저한 비관이다. 이 우주란 혹이다.
사람은 그 혹 위에 붙어 있는 물것(물껏)이다. 내가 이런 철저한 비관
에 이를 줄은 몰랐다. 이것은 내가 우주를 심판하는 것이다. (1960)
●이 우주는 지금이 여름이다. 이 여름을 지내는데 벌레도 많지만 열
매가 달리고 자라려면 여름이라야 한다. 마침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을
것이다. (1960)
●주인 일을 모르고 가면 종이고 알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일을 알아
서 해야 한다. 그래야 참으로 복음이다. 예수는 이 우주혁명 우주해방
을 하러 오신 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아들임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종
노릇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나는 죄만 짓는 종이올씨다라고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이게 무슨 답답한 일일까?바울이 예수의
종이라고 한 것은 하느님 아들의 자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 뜻
이라면 아들이라 하나 종이라고 하나 같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믿는
다는 이들은 진짜 종이다. 성경 공부는 이렇게 수천 년 떨어진 것을 한
번에 모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제 맘에 맞는 성경 한 구절만 뽑아서
교리를 만들어 놓는 건 성경 공부도 예수 믿음도 아니다. 성령이란 다
른 게 아니다. 정직하게 살도록 하는 힘이다. (1960)
●하늘이라면 파란 하늘을 생각하지만 요새 사람들의 하늘의 뜻은 여
러 가지다.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하늘의 뜻이 다르다. 나는 하늘
을 한(大) 늘(永遠)이라고 생각한다. 한량없는 공간과 한량없는 시간
의 이 우주다. 무(無), 공(空), 태공(太空)이다. 한늘 한 동그라미(太虛
空)는 부정할 수 없다. 안도 밖도 없는 한 동그라미(太虛空)는 아버지
의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에 순종하면 한 동그라미가 내 것이 된다. 공
상하면 못쓴다지만 이런 한 동그라미에 대한 공상은 해야 한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한 동그라미만은 예수 석가만큼 생각할 수 있다. 관
(觀)이라는 것은 한 동그라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같은 몸을 지녔지만
넓게 혹은 좁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은 관(觀)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한 집에 살아도 생각은 다 다르다. 같은 크기의 방이라도 넓게 혹은
좁게 생각하며 살 수 있다. 같은 세상에 같이 살아도 관(觀)이 다르면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긴한 말이
다. 나는 지금 노동자 복장을 하고 밖에 나가라면 나가겠지만 부자의
복장을 하고는 못나간다. 다 관이 다르니까 그렇다. 제가 가진 관은 떠
나기가 싫다. 사람들은 한 동그라미 테 밖에 나와서 하느님을 잊고 땅
바닥에 있을 걱정만 한다. (1960)
●나 조그마한 게 멍텅한 데가 있다. 멍텅(渾然)이란 좀스러운 것과는
반대다. 이 우주란 멍텅한 거다. 어린이에게는 할아버지가 수염을 땡겨
도 멍텅하게 있으니 멍텅구리로 보일 것이다. 이 우주는 멍텅하다. 우
주가 나기 전의 빔(空)은 멍텅하다. 나는 이 조그만 육체가 아니다. 이
것만이 나라면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 천지를 거느리는
얼나가 내 바탈(性)이다. 이것이 내게 맛있다. (1960)
●모르는 줄 알아야 한다. 종교도 철학도 초우주적인 불가사의 (不可思
議)에 이른다. 절대계(하느님 나라)란 우리 판단이 미칠 수 없는 데다.
주께서는 모르는 게 없는 줄 압니다라고 했지만 예수 자신도 모르는
게 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고 하느님 아버지
께로 가야 한다. 성경구절 같은 것은 외우지 말라고 한다. 뜻을 먹은
뒤에는 말은 아무런 쓸데가 없다. (1960)
●큰 얼(성령의 하느님)을 높이 돌게 하느라고 이렇게 태양계라는 공
장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조그마한 우리도 쓸데없는 일을 왜 하느
냐고 하는데 저 점잖은 태양이 쓸데없는 일을 하겠는가? 우리가 이렇
게 움직이라고 또 모든 게 활동하라고 태양이 비춘다. 대자연이 아무리
우리에게 봉사해 주려고 해도 주인되는 내가 뜨거운 맘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1960)
●해가 빛이 안 된다는 이건(이사야60장 17절) 참으로 성경에만 있는
훌륭한 시상이다. '참나'란 이 생명의 본 자리가 바로 영광이다. 이렇
게 된다면 해(태양)도 더럽게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 밖에 훈장
명예가 무슨 영광될 까닭이 없다. 조금 있다가 서쪽으로 지고 수증기
(구름)가 가리면 어두워지고 하는 게 무슨 빛인가? 조금 다치면 아프
고 조금 일하면 피로하고 그러다 시시하게 죽고 마는 이 몸을 무슨 생
명이라 하겠는가?(1960)
●이 세상에 제일이란 없다. 다 그게 그것이다. 독수리가 나는 것이나,
연을 날리는 것이나, 비행기가 나는 것이나 다 같은 것이다. 이 지구도
하나의 연 날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로 장난이
다. 이게 영원할 것 같으면 내가 장난이라고는 안 할 것이다. 이건 오
래 안 가서 없어질 것이다. 이 우주도 이러다가 마는 거다. 이 우주도
정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장난이라고 하는 것이다. (1960)
●한 10년 전에는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분명하다.
나는 태양계를 부정한다. 결코 참 생명은 해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몸뚱이는 날마다 다른 생물을 잡아먹어야 한다. 우리 몸의 입이란
열린 무덤이다. 식물·동물의 시체가 들어가는 문이다.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 우리 몸을 더럼타지 않게 한다고 씻고 씻지만 이 몸은
자체가 온통 더럼이다. (1960)
●내 사상은 통히 부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태양계를 부
정하는 거다. 이 세상은 물질로 된 더러운 데다. 거룩을 구하는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다. 별 양(陽)자가 거짓양자라고 한 것은 한 40년 전
에 얘기했는데 나는 거기서 시작했다.
태양의 빛은 가(假) 빛이다. 태양의 빛은 가리는 빛이다. 우리 눈앞
에 전등불을 바짝 대는 것과 같다. 먼지라는 장난꾼 때문이다. 먼지가
빛을 받아 우리 눈에 넣어주기 때문에 우리는 가까운 것만 보고 먼 것
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풍광(風光)이라는 장막 속에 갇혀 있다. 그런
데도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경치를 좋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
은 눈이랄 것이 못된다. 영원한 소식은 저 멀리 무수한 별에서 오는데
저 별들을 태양이 가리고 못 보게 한다. 이 세상은 온통 먼지의 허영에
홀린 것이다. 거짓 것은 온통 이 세상에 있다. 이 가짜 빛 같은 우리의
원수는 없다. 이것을 실감으로 느껴야 한다. 진리는 이치만이 아니라
실감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온통 먼지다. 태양도 알고 보면 큰 먼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참빛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다. 태양은 빛
이 아니라 빛깔(色)이다. 별빛은 영원에서 오는 점자(點字) 통신이다.
영원한 님(하느님)을 잊지 말고 찾으라는 통신이다. 우리는 소경처럼
더듬어 영원의 소식을 짐작해야 한다.
우리가 알자는 것은 참빛이다. 빛의 근원은 밝음이다. 거룩한 것은
밝은 것이다. 거룩한 님 (하느님)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믿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안다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깔(色)의 꾀임을 받아 하느
님 아버지께로 바로 들리게 하지 못하고 비뚤어져 막히고 갇혀 있
다. (19do)
●위대한 사상은 밤에 별을 보고 얻었다. 옛 사람들이 만든 책력(冊
曆)도 별빛 소식을 알아 가지고 만든 것이다. 태양이 밤낮 우리 눈앞에
있었다면 그것도 못해 아직 철도 나지 못했을 것이다. (1960)
●이 해 아래 있는 것은 낮은 것이다. 낮아졌으니 올라가자는 것이다.
빔(空)이 낮아진 것이 빛이고, 빛이 낮아진 게 몬(物)이고, 몬이 낮아
진 게 몬지(먼지)이고 이 먼지로 된 것이 빛깔(色)이다. (1960)
●이 무한 우주의 테두리가 이 내 속에 있는 한 점(얼)과 같다. 이 무
한 우주의 중심이 내 속에 있는 한 점이다.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이 한 점이 바로 된 데가 본 내 자리다. (1960)
●인도 사람도 애굽 사람도 모두가 맨 처음에 의식(意識: 생각) 하나
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의식이 심심해서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생각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란 뜻이다. 맨 처음에
어쩔 수 없이 어떤 뜻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1960)
●이 우주는 모두 3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밤낮 남의 얼굴과
제 얼굴만 보고 살면서 제 낯짝만 내려고 한다. 4차원은 뭐냐 하면 명
령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시간은 4차원이라고 했는데 시간을 안
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알 것이다. 4차원은 천명(天
命)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4차와 아인슈타인의 4차가 일치하
는 게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나는 과학은 모른다. 그러므로 책임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는 느낌을 그저 얘기했을 뿐이다. (1961)
●(재건국민운동중앙위원 위촉장을 받고서) 새삼스레 재건이 뭔가?우
주혁명이라고 하는데 우주재건이라고 해야 한다. 석가나 예수는 우주
재건을 가르친 이다.
이 우주 자체는 자연이다. 그러니 이건 내버려두고 이 나부터 혁명해
야 한다. 우주혁명이란 인간혁명이다. 뚜렷함이란 분명히 하느님 아들
의 자각이 뚜렷해야 한다. 불경을 보는 이는 불성(Dharma)을 뚜렷한
거로 느낀다. 하느님 아들이나 불성은 다 같이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
다. 얼나가 뚜렷할 것 같으면 인생혁명이 된다. 얼나가 뚜렷하기만 하
면 된다는 것이다.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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