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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중용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柏道 2019. 7. 16. 14:08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2,400여 년 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용』이라는 책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주인공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을 “최고의 수양 서적”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자 조선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중용』을 통해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자사 공급.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편찬했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중용』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중용』이라는 책은 애초에 중국에서 이념투쟁의 도구로 탄생했다. 유교는 초기부터 도가, 묵가, 법가, 불교와 사상적으로 싸워야 했다. 사상투쟁을 치르면서 유교의 논리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조선에서도 『중용』은 사상투쟁의 무기로 활약했다. 조선 초기 선비들은 『중용』을 이용해 불교세력을 공격했다.

두 진영 간에 공방전이 치열했으나 세종과 성종 대를 지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수준이 크게 높아져 불교세력은 완전히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조선의 사회문화적 주도권은 성리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16세기 조선에는 성리학을 위협할 만한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했다. 『중용』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할 토대를 발견한 것이다. 큰선비 이언적은 『중용』 20장에 나오는 ‘구경설(九經設)’에 주목했다.

구경설이란 공자가 정치를 하는 아홉 가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수신(修身)이 가장 먼저고, 어진 이를 존중하고(尊賢), 나와 가까운 이를 친애하고,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고, 백성을 자녀처럼 대하는 것 등이다.

“공자가 말한 통치의 요체는 자신을 바로잡고 근본에서 시작하여 말단에 이르며,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 곳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언적과 같은 선비들은 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성리학적 이상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선비들은 구경설을 통치 철학의 핵심이라고 확신했다.


개인의 수양이 더 중대하다고 여기는 선비들도 『중용』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정치적으로 혼탁한 조정을 떠나 초야에 머무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군자가 되기 위한 수신의 철학을 『중용』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조익 같은 선비들이 시종일관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 위해 『중용』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16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으면서 선비들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들은 앞선 세대가 이루어놓은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결합해 예학(禮學)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냈다. 김장생 등은 『중용』에서 ‘예禮’의 중요성을 발견해 예학적 질서를 수립했다.

중용 열풍, 그리고 중용이 드리운 그림자

15세기 이후 『중용』의 열풍은 대단했다. 율곡 이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오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익 같은 학자는 주희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폈다.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17세기 후반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보수화 경향이 심해졌다. 일상적으로 엄격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다. 주류 선비들은 주희의 주장을 글자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신봉했다. 그들에게 주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윤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새롭게 저술했다. 윤휴는 『중용』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상으로 끌어내렸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을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윤휴의 이러한 시각은 송시열과 같은 보수적인 선비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대부분의 선비들은 주희의 저작을 숭배했고, 한 치라도 벗어나면 마녀사냥을 당했다. 윤휴를 비롯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몇몇 선비들은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난을 면치 못했다.

정조 대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중용』에 큰 기대를 걸었다.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기도 하고, 경전에 대한 논술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정조는 주희의 주석을 그대로 따랐다. 초야에 묻혀 주희의 주석서를 깊이 연구한 시골 유생들을 발굴해 높은 벼슬을 주기도 했고, 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어전에서 『중용』에 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문체를 검열하고 중국에서 서적을 구입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정조는 특정한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중용이 조선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살펴본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한 사회가 특정 이념에 몰입할 때 어떤 폐단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멀지 않은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1990년을 전후해 와르르 무너진 동구권 국가들, 즉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소련,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의 패망 원인을 뒤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때로 진취적이고, 때로 구태의연했던,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

유교 경전 가운데서 『중용』은 가장 난해한 책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용』을 해석하는 관점은 실로 다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용』의 개념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장유, 윤증, 김창협, 이덕무, 홍대용 등 뛰어난 선비들이 『중용』에 관해 품었던 의문과 대답을 들어보면 『중용』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17~18세기 조선 사회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탄압했다. 그럼에도 개성 있는 선비들은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중용』을 편찬했다. “윤휴가 편찬한 새로운 『중용』은 주희의 것보다 논리적으로 세련되었다. 그의 설명에는 군두더기가 없고, 주장도 체계적이고 일관적이었다.”

윤휴의 연구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호 이익과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성호 이익은 실증적이고 비판적으로 『중용』을 연구해 『중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잘못 알려진 통념과 개념에 대해서도 바로잡았다.

일례로 이익은 4대를 제사 지내는 조선의 풍습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다. 공자와 맹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밖에도 이익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 많은 학문적 결실을 거두었고,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용감하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산 정약용 초상 (출처 : 위키백과)

당대 최고 수재로 손꼽힌 실학자 정약용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실시한 친시(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시험)에서 정약용이 작성한 답안지를 옛 문헌에서 발견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통해 저자는 출제자 정조의 의도와 정약용의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용』의 핵심을 묻는 45개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답안은 제외하고 정약용의 독특한 의견을 담은 답안 5개를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의 논평을 덧붙여 두었다.

과연 정약용은 어떤 답안을 제출했을까. 저자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꼼꼼히 살핀 결과 그가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조정은 보수적이었고, 창의적인 대안보다는 주희의 학설을 더 철저히 익히도록 독려했다.

정약용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성호 이익을 계승한 학자로서 형이상학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람들이 절대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생활에 빠지기 쉽다고 서술했다.

“정약용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면 모순적이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주류 성리학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이탈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갈등을 명백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왜 『중용』에 주목해야 하는가

18세기 이후 지배층의 보수성이 더욱 완고해지자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감록’ 반란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여러 지식이 융합해 동학이 태동한다. “동학은 『중용』의 하늘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곧 하늘이었다.

최시형은 만물이 다 하느님이요, 너도 하느님, 나도 하느님, 사람도 물건도 본질적인 차이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하겠다.”

『중용』은 조선 선비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회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중용』이 숨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선비들은 『중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지구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중용』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제야말로 또 한 번 중용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중용은 위기의 시대마다 늘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21세기라고 무엇이 크게 다를까.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이기를 바란다.”


“최고의 수양 서적”, 『중용』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역사가 백승종이 안내하는 조선의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


                                   

• 지은이: 백승종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각 시대마다 중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같은 내용이라도 입장에 따라 어떻게 해석이 달라졌는지, 중용에 대해 선비들이 품었던 의문은 무엇인지, 중용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며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이 책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책 속으로

선비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서 또는 그들이 당면한 현안이 달라질 때마다 『중용』에서 새로운 답을 발견했다. 『중용』은 당대의 현실에 어울리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 것이었다.

500년 동안 『중용』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성찰과 사색의 실마리를 추적하다 보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교 경전을 기준으로 매사를 결정했다. 특히 신진사류들이 진을 치고 있던 대간, 곧 사헌부와 사간원이 그러했다. 성종은 잇속에 밝은 기득권층, 곧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신진사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시대에는 경연이 부쩍 활기를 띠었고, 조선 사회는 성리학적 이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때가 되면 조정 분위기는 침체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중용』의 역사를 조용히 읽노라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성종은 학식이 높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마음껏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성종은 『중용』과 『대학』에 관하여 대신들이 단체로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주문했다. 대신들은 『중용』에 나오는 성性, 도道, 교敎에 관해 토론했다. 『중용』과 『대학』이 서로 안팎이 되는 이유도도 따졌다. 알다시피 『대학』은 제왕학의 핵심이라 불릴 정도로 통치철학에 초점을 맞춘 책인데 비해, 『중용』은 그 이면을 깊이 파고들어 인격을 수양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인간이 천명(天命)에 부합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용』에 언급된 이기理氣의 선후 문제도 점검했다. 이어서 천문과 물시계, 달력과 주역 등에 대해서도 서로 묻고 답했다.

그 연회는 노래하고 먹고 마시며 춤추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성종 치세에는 학문의 향연이 성대하게 베풀어질 때가 빈번했다. 조선이 화려한 귀족의 나라에서 선비의 나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 성종만큼 기여한 왕은 드물었다.

연산군은 본래 공부에 취미가 없는 임금이었다. 사실 다른 나라 같으면 전혀 문제도 안 될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달랐다. 신진사류들은 연산군을 심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경연에 나아가 왕에게 『중용』과 『대학』을 진지하게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연산군은 끝내 경연을 귀찮게 여겼다. 그는 신진사류의 간언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겠지만 그의 재위 기간에는 사화가 두 번이나 일어났다.

조광조는 중종을 ‘군사君師’, 임금이자 백성의 스승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후세 사람들은 조광조가 너무 성급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생각은 달랐다. 함부로 서두르는 일이야말로 그가 가장 싫어했다. 천천히 조금씩 조선의 사회문화적 풍토를 바꾸는 것이 그의 정치적 목표였다. 실제로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선비 사회에서 『소학』이 새로 유행했고, 성리학에 대한 선비들의 진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만약 중종이 조광조의 정치‧문화적 이상에 공감했더라면 그의 치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득권층과 적당히 타협하며 안락하게 사는 것이 목표인 평범한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임금에게 쓸데없이 공을 들인 셈이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회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중용』이 숨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식으로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조선 사회는 『중용』의 어느 한 구절에서 필요한 답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선비들은 『중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서적을 토대로 형이상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들의 시야는 한층 넓어졌고, 철학적 사유는 고매해졌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었다. 그러나 그들 덕분에 성리학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하나의 독특한 사유체계로 완성되었다. 유구한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16세기의 선비들은 지성사에 새 장을 썼다고 할 만하다.

16세기 후반 조선의 선비들은 『중용』을 통해 큰 용기를 얻었다.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실패로 인해 정치사회적 전망은 어두웠다. 많은 선비들은 비관론에 빠져 있었다. 이때 『중용』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 곧 ‘나 한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이 책의 주장은 선비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와도 같았다. 이제 그들은 추악한 정치‧사회적 현실 앞에서도 결코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신적 자양을 얻었다.

『중용』 서문에서 주희는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잘 설명했다. 도심은 하늘이 준 본성이므로 착하지만 인심은 삶의 조건에 좌우된다고 했다. 주희는 맹자의 성선설을 계승하면서, 그런데 왜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는지를 해명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이는 주희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의리를 존중하면 누구나 도심을 얻게 되고, 자신을 욕망의 흐름에 맡기면 인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경계했다.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도 많은 선비들이 이 주제를 연구했다. 그들은 이황과 이이의 견해를 계승했다. 큰 틀에서 보면 17세기 이후에는 독창적인 연구 결과가 거의 없었다.

17세기 조선 사회가 예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 세기 전만 해도 형이상학이 선비들의 총아였으나 그것으로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구현할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때문에 선비들은 새로운 희망을 예학에서 찾고자 했다.

서른 살의 청년 선비 송시열이 속리산에서 윤휴를 만났다. 당시는 병자호란의 폭풍이 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뒤라, 젊은 지식인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그때 열혈 청년 송시열은 지금까지의 공부가 과연 현실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때마침 그는 윤휴라는 젊은 선비에 관한 풍문을 들었다. 상상을 초월한 빼어난 인물이라는 거였다. 반신반의 끝에 송시열은 속리산으로 윤휴를 찾아갔다. 윤휴는 그보다 무려 열 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었다. 그 이듬해 두 사람은 다시 만났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학문을 토론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극찬했다. 자신의 30년 독서가 가소롭게 여겨질 정도라며 감탄했다.

약관 28세의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저술했다. 그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자의대로 변형한 것이었다. 장과 절의 순서도 바꾸었고, 주희가 채택한 주석도 자신의 견해에 따라 바꾸거나 빼버렸다.

송시열은 경악했다. 주희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중용장구집주』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될 성스러운 경전이었다. 송시열의 거듭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윤휴는 자신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중용』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정조는 자신의 성리학 실력을 통해 시중의 의미를 확고하게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1793년(정조 17) 5월 25일에는 신하들 앞에서 이런 말도 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일곱 가지 감정은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격분하면 나머지도 모두 움직여서 절도를 잃는다. 그러므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지나침도 없고 어긋남도 없는 시중이 얼마나 중요한가.” 중국 고대의 고전에 등장하는 이상 군주의 모습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철학적인 발언은 대체로 어진 신하가 임금을 타이르거나 가르칠 때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달랐다. 그는 신하들에게 묻고 배우기보다는 주로 신하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17세기 후반, 김유 등 조선의 많은 선비들은 『중용』의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까지도 샅샅이 탐색했다. 그들은 털끝만큼의 의혹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의 학구열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만나기만 하면 심하게 공격하고 배척했다. 그 시대의 풍습이 그러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실학자 이덕무는 주희의 『중용』에 문제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덕무는 『중용』이 본래 실려 있던 『예기』를 주석까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처럼 색다른 방법으로, 이덕무는 주희의 해석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홍대용은 주희의 『중용』에 관한 해설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러는 공연히 복잡하게 내용을 이리저리 갈라놓아서 문제요, 때로는 학자가 나아갈 바를 친절하게 일러주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 가끔 억지스러운 주석이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으며, 몇 군데에서는 쓸데없이 빈말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옛사람의 글에 함부로 손댄 것도 홍대용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18세기의 조선 사회는 이단의 문제에 다시 봉착했다. 가톨릭(서학)의 전래를 계기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의문이 크게 일어났다. 상당수 선비들이 『중용』에서 그에 대한 올바른 답을 구했다.

18세기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형이상학적 경전 해석을 거부했다. 정약용도 이덕무도 홍대용도 모두 그러했다. 그들보다 조금 늦게 태어난 추사 김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 곧 실지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윤휴는 대단한 선각자였다. 1617년생이었던 그는 『중용』을 일상의 품으로 가져온 최초의 조선 선비였다. 그의 학문적 목표는 이기설의 규명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명제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윤휴에게 『중용』은 하늘의 명령을 다루는 신비한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적은 한 권의 실용적인 책이었다.

이익은 훌륭한 역사가였다. 그는 항상 과거의 문헌을 철저히 검토하여 의심을 해결했다. 『중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실증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익은 새로운 답을 발견했다. 그런 연구방법이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웠다.

천주교 문제는 1780년대 말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단에 관한 보수 집권층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천주교 문제는 당파싸움과 겹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정조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정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하기로 결심했다. 강도 높은 과강課講과 과제課製, 즉 경전 강의와 경전에 대한 논술시험을 통해 초계문신들을 성리학의 이념적 전사로 양성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