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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40사- 讓劣(양열)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40사- 讓劣(양열)

柏道 2019. 4. 13. 12:46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52  
 
나뭇가지가 여러갈래로 갈라져
많아 보이지만 근원을 더듬어 들어가면
결국 하나의 둥치에서 다 만나게 된다.
나무의 가지분화를 이해하는데는 모든
것을 다 살필 필요가 없다.
한 둥치에서 갈라진 큰 가지 둘만 확인하면
수만가지의 분화를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프랙탈(fractal)'이론이라고 하는데
작은 구조가 끝임없이 되풀이하여 확장함으로
큰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작은 구조를 통하여
전체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가장 간단한 예를 나뭇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나무가 원 줄기에서 둘로 나뉘는
가장 기본적인 분화현상이 계속 반복됨으로
수천, 수만의 가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천, 수만의 가지를 일일이
다 확인할 필요가 없이 Y자로 갈라지는
것만 보면 전체를 다 이해할 수 있다.
참전계경의 구성도 이와 같다.
하나의 진리에서 시작하여 8강령으로
나누고, 각각의 강령은 또다시 여러개의
주제로 구분되며, 그 주제 아래서 또
여러개의 소주제로 구분되는 그런 형식을
취하여 모두 366사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통찰을 해보면
결국 13200자의 366사는 삼일신고의
366자로 요약이 되고, 366사의 
삼일신고는 또 천부경의 81자로 함축이
되고, 나아가 81자는 3과 1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로 귀결이 된다.
그러니까 '무'(알수 없음)에서 시작하여 
'무한'(알수 없음)이 나왔는데 이 '무'를
이해하는 것이 무한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 '무'의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이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궁극의 자리이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자리까지 가야 하는데
사실 우리의 모든 여정은 끝에서부터,
즉 내가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이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第 240事 福 1門 仁 7戶
(복 1문 인 7호) 讓劣(양열) 
 
讓劣者(양열자)는
優讓於劣也(우양어열야)라
求譽陋而反損譽
(구예누이반손예)하며
釣名譁而反傷名
(조명화이반상명)이니
是以哲人有可功
(시이철인유가공)이나
讓於無功(양어무공)하고
有可賞讓於不賞
(유가상양어불상)이니라 
 
양열(讓劣)이란
우수한 사람이 열등한 자에게
양보하는 것이니라
명예를 구하는데 급급하면
오히려 명예를 손상시키며
이름을 날리고자 떠들면
도리어 이름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밝고 지혜로운 이는
공로가 있어도 없는 자에게 양보하고
상 받을 일이 있어도
상이 없는 자에게 양보하느니라 
 
사실 같은 내용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식으로
비슷한 내용을 다양하게 반복하는
것이 깨닫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맥을 잡고 핵심을 짚게되면
이러한 반복적 교훈을 뛰어 넘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길고 지루한
내용을 계속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수준에 이른 자들을 위하여
366자로 된 삼일신고 같은 요약본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꼭 삼일신고가 아니라도 된다.
그리고 또 삼일신고의 맥을 잡게 되면
81자의 천부경이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런 식으로 진리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본 240사의 가르침도 원리를 같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공로와 상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라는 멧시지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풀면 아무리 많은
것을 설명해도 모두 다 틀리게 된다.
마치 수학문제를 푸는데 공식을 잘못
적용하게 되면 그 공식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다 틀리게 되는 것과 같이...
이 말씀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다.
그냥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를 얻기에 급급하게 되면 도리어
수치를 당하게 되고, 이름을 날리려고 애를
쓰게 되면 도리어 이름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도의 경지에서 보면 아주 상식에 속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요,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자들은 끊임없이 명예와
인기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이름을
날려보려고 무던 애를 쓰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런 수고는 아무리 해 봐야
결과는 좋지 않는 것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진리에 입각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에 입각하여 이 교훈을 풀이하면
간단한 이치로 완벽하게 설명이 된다.
우리는 이미 영광으로 보상을 받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더 이상 받을 것도 없고,
얻을 상도 없다. 공연히 그러한 것들을
구할 일도 없고, 준다고 해도 양보하게 된다.
이 말씀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얻었는데
무슨 다른 명예를 갖다 붙이고,
온 우주가 우리를 알고 존귀하게 여기는데
무슨 이름을 날릴 데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있지도 않는 명예를
추구하다가 창피만 더 당하게 되고,
날릴 필요도 없는 이름을 내세우다가
도리어 진리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탄로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교만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도리어 겸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로는 생각도 않고, 상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