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22사-間倫(간륜)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34
의식이 높아지면 보이는 것이 멀고 길다.
가장 높은 지혜는 근원을 볼 수 있고, 마지막을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가장 높은 곳과 함께 밑도 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높이와 깊이, 넓이, 길이 등을 모두 보게되는 것을 '견성' 혹은 '깨달음'이라 한다.
이러한 앎에 이르게 되면 무지의 비늘이 벗겨져 무지로부터 나온 두려움도 사라지고,
두려움에서 파생한 욕심도 없어지게 된다. 물론 이는 이론적인 설명일 뿐이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깨달았다고 삶이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축복은 중심을 잡고 방향을 알고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의식의 깨달음은 이제 몸의 체험으로 나아가게 하여 하나하나 체득하게 이끈다.
근원과 끝을 본 자는 그 깨달음을 활용하여 두려움과 욕심을 제어하며 살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말이다. 마치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이
출발지과 도착지를 명확하게 알고 가지만 가는 도중 파도와 풍랑 등을 만나면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모든 죄는 사실 '무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무지의 정체를 들여다 보면
'근원과 끝'에 대한 무지다.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근원의 하나님이 아니다. 천국 지옥을 말하지만
그 또한 마지막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이 틀리고, 목표가 잘못된다.
진리가 아니니 확신이 없어지고 쉽게 궤도에서 이탈하고 만다.
요즘 아침마다 천부경을 강의하면서 놀라운 깨우침을 얻고 있다.
이제까지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요, 만물의 근원이라
믿어왔던 것이 근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왜 우리의 삶이 혼란스럽고 불안한지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하나님의 위치를 경전의 지혜를 따라
바로 확인하고 나니 그렇게 든든하고 평안하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있다, 없다'의 구분까지 초월한 자리에 계시니 유신론, 무신론의
논쟁도 의미가 없고, 천국과 지옥의 구분도 맞지 않다.
천부경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이를 깨우쳐 주니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우리 민족과 인류의 의식을 환하게 밝혀줄 생명의 빛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第 222事 禍 5條 陰 5目
(화 5조 음 5목) 間倫(간륜)
間倫者(간륜자)는
離間人倫也(이간인륜야)라
見冬煖而喜者愚
(견동난이희자우)하고
見春寒而畏者亦愚
(견춘한이외자역우)하니
爲己贅慾(위기췌욕)하여
謀絶人倫則(모절인윤즉)
冬長煖乎(동장난호)며
春長寒乎(춘장한호)아
聽間者冬煖也(청간자동난야)요
受間者春寒也(수간자춘한야)라
冬煖更寒春寒更煖
(동난갱한춘한갱난)하면
禍旋至者(화선지자)니
此天理也(차천리야)라
간륜(間倫)이란
인륜을 이간시킴을 말하느니라
겨울에 따뜻함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봄에 추위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 또한 어리석음이라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고자
인륜을 저버리고자 꾀하다니
겨울의 따뜻함이 오래갈 것이며
봄날의 추위가 오래가겠는가?
이간함을 듣는 자는
겨울 한날 따뜻함 같고
이간질 받아들이는 자는
봄날 한날 추위와 같으니
겨울 따뜻한 것이 곧 다시 추워지고
봄날 추운 것이 곧 다시 따뜻해
지는 것처럼
화가 결국 자기에게 되돌아 오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니라
멀리 보지 못하고 눈 앞의 현상, 코 앞의 이익만 보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미혹에 끌려 넘어지는 범죄이다.
멀리 내다볼 줄 알면 이러한 죄를 막을 수 있는데 그 지혜를 얻지 못하니 경계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오늘 참전계경의 가르침 속에 나오는 비유가 참으로 멋지다.
추운 겨울에 잠시 따뜻함을 보고 좋아한다거나 따뜻한 봄에 잠시 추위가 온다고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봄은 잠시 추워도 곧 따뜻함으로 돌아오게 마련이고, 겨울도 마찬가지로 잠시 따뜻해도 곧 겨울추위로 돌아간다. 인간이 잠시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고자 이간질을 하고, 악을 꾀하는 것은
일시 따뜻함을 붙들어 두려는 어리석음이요, 일시 추위를 물리쳐 보려는 미련함이다.
잠시 따뜻하다고 겨울 옷을 내던지거나 잠시 춥다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누가 그러한 자를 지혜롭다고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하늘의 이치를 아는 자는 잠시 일이 잘 풀린다고 방심하지 않고, 잠시 일이 꼬인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이 잘 풀려도 전체흐름을 보고 대비하고, 일이 꼬여도 전체 흐름을 보면서 소망을 품는다.
하늘의 이치에 자신의 삶을 맞추며, 하늘의 뜻을 알고 순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지금 나라가 온통 난리다. 좁은 시야로 보는 자들은 다들 조급하다.
당장 탄핵하여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새세상이 금방 올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답답하고, 버티고 고집을 부리면 어떤 요행수가 생길 것을 바라는 것도 답답하다.
지도자가 바뀐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정권이 바뀌거나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 것 없다.
세상 일은 파도처럼 늘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인간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자신을 향한 하늘의 이치를 적용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흐름에는 큰 우주적 차원의 흐름이 있고 나라차원의 흐름이 있으며, 가족과
개인차원의 흐름이 또 따로 있다.
큰 흐름이 좋아도 작은 흐름이 좋지 않을 수 있고, 큰 흐름이 나빠도 작은
흐름이 좋을 수 있는 것이다.
작은 흐름의 좋고 나쁨에 울고 웃으면 어리석다. 큰 흐름이 결국은 작은 흐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보아야 할 큰 흐름은 단순한 국가적인 흐름이 아니다.
세계적 흐름, 우주적 흐름을 살펴야 한다.
가장 작은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흐름을 타고,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
흐름을 탄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은 생로병사 (生老病死)흐름이 절대적이다.
가장 작은 생각의 흐름에 삶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사람은 늘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게 된다.
기본은 생로병사의 흐름을 보고, 그것이 자녀들로 이어지는 것까지 보는 안목이다.
그것을 위하여 제도와 규범, 정치, 과학, 예술, 문화 등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정도의 안목에서 머물게 되면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거의 대부분이 두려움과 욕심, 불안, 염려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를 주관하는 신과 도의 실체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욕심과 두려움이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경전이 삶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황당한 소리로
들리지만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인생과 우주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진리가 된다.
지금 나라의 문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다.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이게
될 것이고, 분노와 좌절로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만 더하게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답이 아닐 것 같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의 길은
인생과 우주의 근원과 끝을 알려주는 천부경, 삼일신고 같은 경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지금 진행되는 상황을 높은데서 바라보고
근원과 결과까지 보는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222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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