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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16절) 이 땅에 분쟁을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16절) 이 땅에 분쟁을

柏道 2019. 1. 2. 23:48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Lambdin Translation

Davies Translation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16. 이 땅에 분쟁을

운명적 단독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


 Jesus said, "Men think, perhaps, that it is peace which I have come to cast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t is dissension which I have come to cast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ree will b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the father against the son, and the son against the father. And they will stand solitary."


16a. Jesus said: People think, perhaps, that I have come to throw peace upon the world. They don't know that I have come to throw disagreement upon the world, and fire, and sword, and struggle.
16b (For) There will be five in one house. Three will oppose two. Two will oppose three. The father will oppose his son and the son oppose his father. And they will stand up and they will be alone (monachos).


Jesus says:

(1)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earth. 
(2) But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dissension upon the earth: fire, sword, war. 
(3) For there will be five in one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4) And they will stand as solitary ones."

 

이를 문자적표피적으로 읽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움을 하고 모든 식구들과 불화하고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데 어찌 하여 여기 도마복음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공관복음서에서도(12:51-53, 10:34-36)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가? 이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고 했다. 평화에도 예수님이 주는 바람직한 평화와 세상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가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평화는 정의가 강같이 흐를 때, 모든 사람들이 서로 오순도순 사랑하고 도와주며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이살아가는 밝고 따뜻한 참된 평화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억눌러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 불의를 보고도 두려움과 근심때문에 눈감거나 동조할 수 밖에 없을 때 있을 수 있는 무겁고 싸늘한 외형적 평화다. 첫째 종류의 평화는 우리가 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지만, 둘째 종류의 평화는 당연히 배격하고 깨뜨려야 한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느 살인마가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와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있다고 하자. 이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서 있는 것이 평화일 수 있겠는가.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가 세상에 만연할 때를 상상해보라. 예수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절대 철권 아래에서 모든 민족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던 죽음의 평화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 이런 식의 평화를 종식시키러 오셨다고 선언한 것이 아닐까.

 

둘째,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상식의 세계에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이 같을 수가 없다. 앞에서 몇 번 지적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성 중 하나가 바로 고정관념이나 일상적 통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관념이나 일차원적 통념이란 우상을 쳐부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저도 그 깨달음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이른바단독자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단독자 됨, 홀로 섬, 고독은 종교사를 통해 볼 때 선각자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셈이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 멍에는 가볍고, 자기를 따르면 쉼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다고 했다(19:41). 노자님도 자신의 말은 이해가기도 실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 드문가.”(도덕경 70)하고 탄식했다. 공자님도 ,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하늘 밖에 없구나.”(논어14:37)하고 한탄했다. 위대한 성인들의 실존적 고독을 말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구절 홀로 서리라.”는 여기 외에 제23, 48, 75절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홀로의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영어의 독신 수도사를 뜻하는 ‘monk'와 수도원을 뜻하는 ‘monasyery'라는 어휘들이 나왔다고 한다. 수도원에서처럼 모여 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단독자일 수밖에 없고, 결국에 가서는 이런 단독자 됨이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의 영적 운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홀로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만 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경4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나온다. 빛이 부드러워져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성인들, 깨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일반 사람들과 섞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빛이 티끌과 하나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임마누엘혹은 육화肉化, incamation'의 논리와 같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도 소년이 홀로 집을 떠나 소를 찾지만, 찾은 다음에는 다시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 그림이 아니던가.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서 자주 말하는절대적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the flight of alone to the Alone'이 이루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평화, 이 평화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시 사람들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리라.

[출처] 도마복음-제16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