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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카발라 - 8장. 불의 신비 I - 불의 힘| 본문
불의 신비 I 불의 힘 오늘 밤 우리는 생명의 가장 위대한 신비, 불의 신비와 마주해 있다. 우리는 불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불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불 없이는 참된 창조도 참된 변형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놀라운 힘들이 불 속에 감추어져 있다. 불에는 녹이고 액화시키고 태우고 변형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 다른 원소들, 흙, 물, 공기 역시 위대한 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으로 물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지진은 땅의 거죽을 붕괴시키고 산맥을 갈라놓고 도시와 마을을 집어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흙은 사물의 기초적인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물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공기에는 흩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러나 사물을 진정으로 변형시키는 힘을 지닌 것은 오직 불 뿐이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재만이, 완전히 변형된 물체만이 남는다.
불은 사원소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변형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요인이다. 불에는 저항할 상대가 없다. 이 때문에 비전 전통에서는 인간이 변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두 종류의 불이 거주한다. 정열의 불(정욕의 불)과 신성한 사랑의 불(희생의 불). 정욕의 불은 태우는 모든 것들에 커다란 고통을 주는 맹렬한 화로이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포기하기보다는 이 불에 의해 불태워짐으로써 고통 받기를 더 좋아한다. 신성한 사랑의 불로 일을 하는 이점을 이해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신성한 사랑의 불은 물질 변형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우선 그 사람 자신을, 나중에는 그의 주변을 변형시킨다.
너무도 굳고 딱딱해져서 오로지 고통만이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불을 통과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고통의 불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공평무사한 사랑의 불로 작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당신을 변형시킬 수 있고 당신을 빛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랑의 불만이 당신을 불태우지 않고 불꽃으로 당신을 감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고통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당신은 여전히 지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신성한 사랑의 불로 일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당신의 고통을 참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방법을 알 것이다. 정욕의 불은 인간을 속박하고 노예화한다. 신성한 사랑의 불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당신은 오늘밤 이 불의 의식에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보려는 자세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전 존재를 가지고 이 의식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라. 당신이 난생 처음으로 불을 보는 듯한 마음으로 불을 보도록 노력하라. 불 속에는 지극히 아름답고 강력한 피조물들이 살고 있다. 불의 정령인 살라만더들 뿐만 아니라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은 많은 인간 존재들이 순화를 계속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불 속에 자신들을 담그고 있다.
저 거대한 힘으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을 보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광경인가! 아마도 물은 지구의 심연 속으로 잠긴 응축된 불일지 모른다. 그리고 불은 높이 치솟아 오르는 타오르는 물이다. 저 불꽃의 무리들을 보라. 마치 남자가 수태를 위해 여자한테 사정해 놓은 수백만의 정충들 같다. 불은 특별한 존재들을 수태시키고 탄생시키기 위해 무수한 불꽃들을 공간 속에 투사한다. 불은 풍성한 과실나무이다. 수많은 씨앗들을 낳고 그 씨앗들은 다시 또 다른 나무들을 낳는다.
당신은 항상 불을 처음 보듯이 봐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생명의 가장 위대한 신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 불타는 가지들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새나 맹수, 사람의 얼굴이나 꽃의 형상을 볼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의 눈에 보이는 저 형상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불은 당신들 각자한테 상이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한테 미래를 예언하고 계시해 주거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당신이 불을 주시할 때 불 속에 거주하는 존재들 역시 당신을 바라본다. 그들은 인간의 관심과 사랑에 지극히 민감하다. 그들은 당신한테 다가와 당신을 인도하고 도와줄 것이다. 당신이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이 당신한테 말하는 것은 당신의 잠재의식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조건이 무르익으면 당신은 갑자기 계명되어 직관적인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 곁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인들이 자연의 비밀을 배우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샘가에 몇 시간동안 머문다. 그들은 거기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듣고 햇살에 반짝이는 차갑고 수정같이 맑은 물을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차츰 차츰 그들은 물의 혼, 샘의 혼과의 교감 상태로 들어간다. 당신은 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 비록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 교감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자연의 생명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묘한 센터들을 열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의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 집중력을 통해 당신의 내적 장치들은 활동할 준비를 하고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자연 서식지에 사는 야생 동물들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그와 같다. 그들은 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린다. 그리고 동물이 접근하면 카메라나 녹음기로 사진을 찍거나 소리를 녹음한다. 인간 안에는 모든 필요한 장치가 이미 마련돼 있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을 무의식적으로 보거나 들을 때조차 우리 안의 장치는 자동적으로 개울의 재잘거림이나 불의 속삭임을 기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 기록들이 의식의 차원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불과 교감하라. 그리고 불이 당신한테 말하는 소리를 듣도록 하라. 그것은 당신 내면에 모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기록과 필름을 통해 당신은 그 영상을 보거나 음악이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배우고 진화하는 방법이다. 어느 날 당신은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가서야 당신의 예를 통해 타인들을 돕거나 설득시킬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갖 수단으로 사람들한테 말해보라. 당신보다 더 말 잘하는 사람도 종종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수단을 부려도 사람들이 쉽사리 당신한테 설득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보다는 당신이 평소 보여 준 태도와 행실, 당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의해 훨씬 더 쉽게 설득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불에 매혹된다. 사람들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면서도 불에 매혹된다. 특히 겨울에 나이든 사람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들은 하루 종일 불가에 나른하게 앉아 불을 보면서 손을 뻗어 쬐곤한다. 그들은 무슨 즐거움을 얻는가? 이 몸짓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본능이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자연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충동질한다고. 그렇다. 그럼 왜일까? 그 이유는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 손가락 끝에 지극히 예민한 민감점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의 두툼한 부분은 사실 한 사람의 민감성을 보여주는 사인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 지점에 많은 수의 고감도 세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에 손을 뻗을 때 손가락 끝의 민감한 센터들이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곳은 열기뿐만 아니라 다른 정묘한 요소들까지 받고 우리의 몸의 다른 부분에 보낸다. 그래서 전체 몸이 따뜻해지고 태양신경총이 그것으로부터 유익한 영향을 받는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히터들은 매우 유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장치들이 방사하는 열에는 살아 있는 불로부터 받는 생생한 열기가 지닌 덕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어릴 때 불가리아에서의 일을 기억한다. 한기가 들어 열이 날라치면 나는 화롯가에 불을 피워놓고 가까이 가서 자리 잡고는 따스한 불의 열기에 대한 커다란 감사와 사랑의 느낌을 지닌 채 잠을 자곤 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치유 되었다. 그때 나는 불의 치유 속성을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치유하는 것은 열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은 다른 치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은 불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반박할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다른 요소들 역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특정한 치유적 속성들을 가진다. 그러나 불은 생명의 기초이다.
음식 없이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는가? 단식 투쟁을 하는 수인들은 때때로 60일 정도를 버틴다. 물을 마시지 않고 사람은 얼마를 버틸 수 있는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다. 사실상 고작 며칠 정도이다. 우리의 몸은 많은 양의 수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허기보다는 갈증 때문에 훨씬 먼저 죽는다. 숨을 쉬지 않으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기껏해야 이삼 분 정도이다. 당신들은 모두 그것을 경험해왔다. 그러므로 당신도 알다시피 고체 성분(흙)은 액체 성분(물)보다 덜 중요하다. 액체 성분은 가스 성분(공기)보다 덜 중요하다. 그렇다면 화성 성분(불)은 어떨까? 인간은 불 없이, 열기 없이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수년정도이다. 나는 추워서 고통받아본 적이 없다.” 아,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열기이다. 심장의 온기. 인간은 심장의 온기를 잃는 순간 죽게 된다. 그러면 자, 열기가 생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어째서 사람들은 부글부글 끓는 분노와 정욕의 분출로 그것을 낭비하고 모독하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노와 정욕의 분출이야말로 자신의 온기, 성스러운 불의 온기 - 창조주가 인간들로 하여금 진정한 생을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내려주신 -의 상실이다.
인간은 몇 단계로 이루어진 우주로켓과 같다. 첫 단계의 연료가 거의 소모 될 때 두 번째 단계가 점화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의 연료가 소모될 때 세 번째 단계가 점화된다. 이런 식이다. 우주 로켓처럼 인간은 연료가 비축된 다단계 저장고이다. 비밀은 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신전에는 베스타 여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성스러운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것은 순전히 상징적인 역할이었다. 물질적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사시대도 아니고,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만일 불이 꺼지면 언제고 다시 살릴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되는 불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불이다. 베스타 여사제들은 신성한 어머니의 가장 순수한 측면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순수는 불과 빛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으려면 신성한 어머니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혼속에서 모든 인간은 반드시 동정녀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 속에 이 불을 끌어당겨와 내면의 남성 원리, 즉 의지, 영을 사용하여 창조 행위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창조는 그 기원을 불 속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준비하는 단순한 일에서부터 우주선을 쏘아올리는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불은 필수적이다.
눈에 보이는 불은 불가시不可視의 불에 대한 물질적인 상징이다. 우리가 불을 킬 때마다 우리는 이점을 생각해야만 하다. 그래서 우리의 혼과 영(천상의 불, 즉 사랑, 지성, 힘) 사이의 연결 관계를 새롭게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단순히 불을 키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불을 키는 유일한 의미는 성스러운 불에 의해, 그리고 그 사랑에 의해 점화되고 밝혀지는 것이다. 오로지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랑을 방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불로 하여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활절 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초를 가지고 자리를 잡으면 사제가 먼저 자신의 초에 불을 붙인다. 그러면 그의 보조자가 사제의 촛불에서 자기 초로 불을 옮겨 붙인다. 그러고 나서 회중會衆의 한 사람이 그 보조자의 촛불에서 자신의 촛불을 붙이고 곁에 사람이 그 사람의 촛불에서 불을 옮겨 붙이는 식으로 해서 차례로 이어간다. 하나씩 차례차례 작은 생명의 불꽃들이 이어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것은 마치 불의 행진과 같다. 교회 전체가 수백 개의 작은 불꽃들로 가득하며 신실한 기도자의 얼굴들을 밝혀준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상의 불꽃으로 자신의 초(지성)와 램프(가슴)에 불을 밝힌 자는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에 옮겨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언젠가 전체 세계가 불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초에 이미 불을 켠 사람들은 그 불꽃을 친척, 친구, 자식들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왜 불을 혼자만 간직하는가? 그것은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는 방식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촛불에 불을 켰다. 그러나 당신 혼자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당신은 타인의 촛불에 불을 밝혀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자신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하나의 촛불은 너무도 작고 연약해서 훅 하고 입김만 불어도 꺼져버린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불꽃을 살찌우고 키운다면 같은 입김이 불을 꺼뜨리기는커녕 불길을 더욱 크게 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그 불을 꺼뜨리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동일한 입김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가? 어째서 약한 불꽃은 꺼져버리고 강한 불길은 더욱 강해지는가? 이것은 정확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불꽃은 영의 상징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영을 키우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자신의 육체에만 너무 관심을 기울인 채 영을 무시한다면 당신의 가슴, 지성, 영의 불꽃은 너무도 약해져서 아주 사소한 곤경에도 꺼져버릴 수 있다. 오늘날 세상에는 영이 죽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을 질질 끌며 살아간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꺼져버린 상태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영을 기도와 명상과 집중을 통해 강건하게 한다. 그것은 너무도 강해져 인생의 폭풍조차 불길을 더욱 거세고 밝게 만들뿐이다.
똑같은 난관과 장애가 나약한 자는 비틀거리게 만들고 영의 아들들은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신은 영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마치 영이 만능이어서 당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항상 다가와서 도와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은 강하지 않다. 영이 강한 것은 오직 자양분이 공급되는 조건일 때 만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불가에 둥그렇게 모여 있다. 이것은 중심점을 지닌 원을 상징한다. 중심점은 불이고 우리는 원주이다. 우리가 불을 응시할 때 우리는 인생의 원주로부터 중심 쪽으로 움직이고자하는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중심에는 신성한 불이 불타고 있다. 그 불은 사랑이고 영이다. 우리가 이런 소망으로 충만할 때 불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취하여 드높인다. 이것이, 불 주위에 모여 불에 대해 명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로운 이유이다.
불은 우리를 묶어준다. 우리의 혼과 상념은 불 속에서 하나 된다. 모든 것은 불을 향해 한 점으로 모아진다. 물론 우리가 이런 행동, 이런 의식儀式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우리가 불꽃을 명상할 때 우리는 불 속에서 하나 될 수 있고 우리의 상념은 우리 사이에 진정한 합일을 창조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 같이 동일한 개념에 대해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다음 모임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 때 당신은 집단적으로 같은 명상 주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모든 진동들이 조화롭게 화합되고 동일한 은혜의 파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상태들이 존재할 때만이 불의 의식은 효과적일 수 있다.
당신이 불을 보는 방법을 알 때 당신은 보다 명징해지고 평화와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명징, 평화, 자유는 중심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말해 온 중심은 정상에 대한 비유이다. 불에서 올라오는 불꽃은 원추 꼴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상의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산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은 아래 계곡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맑게 더 멀리 볼 수 있다. 불은 산 정상을 향하여 치솟기 때문에 주변의 지평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이 비전가의 지성을 보다 광대한 지평으로 열어 놓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루미네이션이라는 것이다. 불, 즉 성령의 불이 없다면, 일루미네이션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심으로부터 얻어야만 할 첫 번째 것은 명징함, 실재에 대한 진정한 영상이다. 또한 중심을 향하는 자의 내적인 운동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조화와 평화는 그 안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는 주변에 비등하는 무질서한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안전을 위해서는 우리는 고지대로 들어가야만 한다. 고지대는 원의 중심이다. 거기서 우리는 불, 영원의 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중심에 도달한 자는 훨씬 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 그는 힘들의 교차점에 서게 되고 지극히 강력해진다.
오늘 나는 불의 상징적 중요성에 대해 당신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이해가 없으면 산만한 마음으로 와서 아무리 불을 응시한다 해도 아무 것도 배우지도 얻지도 못하고 갈 것이다. 오늘 밤 나는 여러분이 합일에 대해 의식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의 합일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불이다. 여기 우리 눈앞에 있는 불.
봉팽, 1961. 8. 28.
[출처] 비전의 카발라 - 8장. 불의 신비 I - 불의 힘|작성자 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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