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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깨달음/역사와 철학

[스크랩] 역사의 연구 -아놀드 토인비

柏道 2011. 1. 30. 20:50

역사의 연구 [歷史-硏究, Study of History]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이다.." -아놀드.E.토인비




 요약

영국 역사가 A.J.토인비의 주저(主著).  
구분  역사
저자  A.J.토인비

전 12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현대사와 서유럽 문명의 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집필의 커다란 동기가 되었다. 그는 세계 역사상 26개의 문명권이 각각 성장 ·발전 ·쇠망의 공통된 경로를 거쳤다고 보고, 마지막으로 서유럽문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종교에 의한 통일만이 서유럽을 구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10권이 본문이고, 제11권은 역사지도이다. 이 책은 학계를 비롯하여 각계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비판도 나왔다. 그래서 그 비판을 반성하면서 반론을 편 것이 제12권 ‘재고찰’이다.


토인비 [Toynbee, Arnold Joseph, 1889.4.14~1975.10.22]  

영국의 역사가, 문명평론가.  
국적  영국
활동분야  역사연구
출생지  영국 런던
주요저서  《역사의 연구》(1934∼1954, 1959, 1961)

런던 출생. 경제학자 A.토인비의 조카. 옥스퍼드대학에서 고전고대사를 전공하고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연구부장, 런던대학 국제사 연구교수, 외무성 조사부장을 역임하고 런던대학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56년 CH(名譽勳位保持者)의 서열에 올랐다.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거시적 입장에서 집필한 필생의 역작 《역사의 연구》(12권, 1934∼1954, 1959, 1961)에서 많은 문화유형을 고구(考究)하여 세계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독자적인 문명사관(文明史觀)을 제시하였다.

그리스 이후 쇠퇴하였던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시대성(同時代性)을 발견하고 역사의 기초를 ‘문명’에 두었다. 문명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포착하고, 그 생멸(生滅)이 역사이며, 그 생멸에 일정한 규칙성, 즉 발생·성장·해체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26개의 문명권을 병행적·동시대적으로 나열하고, 이들 모두가 규칙적인 주기(週期)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한편, 문명의 추진력을 고차문명(高次文明)의 저차문명(低次文明)에 대한 ‘도전’과 ‘대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보았다. 이 밖에 ‘내적 ·외적 프롤레타리아트’, ‘세계교회’ 등 특수한 용어에 의한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데, 19세기 이후의 전통사학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역사학의 길을 개척한 점에서 크게 주목되었다. 그 밖의 저서로 《Nationality and War》(1915) 《Greek Historical Thought》(1924) 《A Survey of International Affairs》(1924∼1938) 《Civilization on Trial》(1948) 등이 있다.


      

                                          「역사의연구」저자 아놀드

무엇이 문명을 탄생케 하며 무엇이 이를 멸망케 하는가.
아놀드 조제프 토인비는 이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구도로 설명하고 있다. 토인비는 사막에서 꽃 핀 이집트 문명을 이 이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빙하지대가 축소함에 따라 아프라시아(북아프리카와 남아시아)지역은 건조화가 진행됐다. 그때까지 수렵생활을 하던 주민들에게 열려진 길은 3개였다. 익숙해진 기후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거나, 그 지역에 남아 수렵생활을 하며 근근히 살아남거나 역시 그 지역에 남기는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유목과 농경을 새로 개척해 나가느냐 였다』

『거주지도 생활양식도 바꾸지 않았던 무리는 건조화라는 도전에 응하지 않았던 셈으로 전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양식을 바꾸어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변신한 무리는 아프라시아 스텝의 유목민이 되었다.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한 무리들은 새로운 환경의 도전을 받아 이에 굴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또다른 응전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건조화라는 도전에 대해 거주지와 생활양식을 모두 변경하며 응전한 집단이 있었다. 이 보기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돼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의 몇개 미개사회에서 이집트문명과 수메르문명을 창조한 역동적인 행위였다』

토인비는 이러한 이론으로 이집트문명 뿐만 아니라 마야문명·미노스문명·중국문명 등의 발생과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그 후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비판도 받았지만 인종설이나 환경설에서 벗어나 역사를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역사학 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인종설·환경설 극복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멀지않은 킹즈 스퀘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채텀하우스는 검붉은 벽돌로 산뜻하게 치장돼 있다. 1736년 지어진 이 건물이 토인비가 1925년부터 1955년까지 30년간 역사학과 국제문제를 연구한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다. 푸른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지만 깨끗하게 단장된 로비가 나온다. 안내인은 친절했지만 연구소로 들어가려면 허가를 얻어야 한다며 막무가내다.

1시간여를 기다려 젊은 연구원 매튜 티클(32)의 안내를 받아 토인비 윙의 2층 토인비 룸을 볼 수 있었다. 아놀드 토인비가 30년간 근무했던 곳이다. 정면 벽난로 위에 걸린 토인비의 대형 초상화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연구실 한 구석에 자리잡은 안락의자를 가리키며 티클은 「토인비의 의자」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이 방에서 이제 토인비의 체취를 맡을 수는 없다. 2년 전부터 이 방을 쓰고 있는 티클은 지금 세계의 에너지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지금 국제문제연구소는 이론 보다는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티클은 말한다.

토인비의 대표작 「역사의 연구」는 이 곳에서 지내던 시기에 주로 씌어졌다. 전 12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연구」는 1934년 1·2·3권이 나왔으며 4·5·6권은 5년 후인 1939년에, 7·8·9·10권은 다시 그로부터 15년 후인 1954년에 출판됐다. 지도와 지명사전인 11권과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담은 12권 「재고」는 그가 국제문제연구소를 떠난 후인 1961년에 출판돼 「역사의 연구」는 구상에서부터 40년이 걸린 셈이다.

역사를 『신의 창조가 진전되는 모습』이라고 본 토인비는 『위대한 역사가의 생애를 조사해 보면 대개의 경우 무엇인가 어떤 중대한 강한 충격을 주는 공적 사건에 조우해 그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역사적 탐구를 해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역사가가 된 이유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친 역사의 소용돌이, 즉 「역사가의 기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릴 수 있었던 점과 「아직 희석되지 않은 진짜 모습의 근대 초기 르네상스 이래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 났다」는 점을 들고 있다.

토인비는 1889년 4월14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전형적인 지식계급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름이 같아 흔히 혼동되는 산업혁명의 연구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아저씨였다. 토인비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어린 토인비에게 그리스·로마의 역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토인비가 13세 되던 해에 윈체스터의 기숙학교에 넣었다. 어린 토인비는 이 학교에서 6년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시를 지을 정도로 철저한 고전어 교육을 받았다. 『이 강력한 고전교육으로 나는 모국어인 영어 보다는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영어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라면 나의 감정은 출구가 없는 침묵 속에 갇혀버릴 것』이라고 그는 후에 술회하고 있다.

○그리스여행때 구상

1907년 토인비는 옥스퍼드의 밸리올대에 진학, 고대사를 전공했다.
1911년 밸리올대를 졸업한 후 이 대학의 고대 그리스·로마사 특별연구원으로 남게 된 토인비는 그리스와 로마 여행을 떠났다. 1년간에 걸친 이 여행은 그에게 있어 『나의 생애에서 가장 커다란 지적 즐거움의 하나는 그리스·로마 세계 속에서 오랫동안 간접적으로 친숙해졌고 더구나 역사적인 연상이 풍부한 토지를 처음으로 직접 눈으로 보고 그 것을 확인했을 때의 흥분이다』고 술회한 대로 흥분과 감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으로 그는 발칸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악화를 보고 서서히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14년 1차대전의 발발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케 했다.

『첫번째 그리스 교육(1907∼1911년)은 나를 과거로 끌고 갔고 두번째 교육(그리스 여행)은 현재로 데려왔으며 세번째 교육(1960년 이후)은 미래로 이끌었다』고 한 말처럼 그리스 여행과 1차대전으로 현대사에 눈을 뜬 토인비는 1915년 학교를 떠나 외무성의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터키관계의 일에 종사했으며 1차대전이 끝난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영국대표단의 중동지역 전문위원으로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후 1924년까지 그는 런던대학의 킹스컬리지에서 비잔틴 및 현대 그리스를 강의했다. 1921년에는 맨체스터가디언지의 특파원 명목으로 그리스를 다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역사의 연구」를 구상한 것은 이 때로 알려져 있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불가리아의 자연경관을 보다 문득 하나의 착상을 얻게 된 그는 노트를 꺼내 6가지의 주제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 구상이 무르익기까지는 다시 6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외무부서도 근무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연구부장에 취임한 토인비는 2차대전 기간중 잠시 외무부에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1955년까지 30년간 이 곳에서 일했다. 「역사의 연구」는 이 시절의 산물이다.

1955년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은퇴한 후에도 이 책의 저술에 매달려 1961년 12권을 발간함으로써 대단원의 끝을 맺었다. 그 후 역사가, 국제문제 전문가, 사상가로서 활동하던 그는 1975년 10월22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토인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관심은 현대 서구문명의 앞날이었다.

그는 이를 헬레니즘 문명과의 비교를 통해 이를 분석해 보려 했다.
『헬레니즘 문명의 역사와 서구문명의 역사를 비교하는 필자의 방법이 옳다면 서구사회는 그런 운명에 빠질리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문명의 대부분이 이미 사멸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나는 모든 문명 앞에 죽음의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찌기 번영했던 많은 문명이 통과해 자취를 감춘 이 죽음의 문은 무엇인가.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문명의 쇠퇴와 해체의 연구를 하고 또 나아가 보충적으로 문명의 발생과 성장의 연구를 했다』 토인비의 역사철학은 단순한 역사학을 넘어 현대문명에 대한 경고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런던=이동주특파원>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단일 문명론의 오류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21개 문명을 체계적으로 비교?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21개의 문명과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문명, 즉 서구 문명이 있을 따름이라는 반론이 있다.

이와 같은 단일 문명에 대한 견해는 근대 서구 역사가들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갖게 된 그릇된 생각이다. 서구 문명은 근대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경제적 조직망을 전 세계에 쳐 놓음으로써 경제적 통일을 이루었고, 뒤이어 서구 정부는 군사력에 의한 정복으로 동시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단일한 정치체제로 묶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세계 통일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단일체 문명의 증거로 인정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경제적?정치적 세계 지도는 서구화하고 말았지만, 문화적 세계지도는 서구 사회가 세계를 경제적?정치적으로 정복해 나가기 이전의 상태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의 측면에서 식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서구 4개 문명의 윤곽은 계속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그릇된 사고는 다른 문명에 속하는 주민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데서 잘 드러난다. 우리 서구인들이 '원주민'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은연중에 그들에게서 문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인들은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 나라에 득실거리는 야생의 짐승, 또는 그 지방의 식물군 및 동물군처럼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들을 멸종시킬 수도 있는 일이요, 그들을 길들여 종을 개량하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서구인들은 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가지 그릇된 생각

'단일체 역사'의 가정은, 문명의 물줄기는 오직 서구 문명의 흐름밖에 없으며, 그 밖의 문명들은 이 본류에 이르는 지류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막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인식은 다음의 세 가지 근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는 '자아중심적' 미망(�O)이고, 다음은 '변하지 않는 동양의 침체'라는 미망이며, 또 하나는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으로 파악되는 '진보'의 미망이다.

자아 중심적 미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빠져들기 쉬운 잘못이다. 그리고 알아 두어야 할 일은 오로지 서구인만이 이 잘못에 빠져든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대인은 그들이 선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의 선민이라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서구인이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대상을 그들은 '이방인'이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인은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변하지 않는 동양의 침체'라는 미망은 너무나도 명백한 환각이며 진지한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 원인 규명은 별 흥미를 끌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이 설에 따르면, 동양은 한때 문물에서 서구 사회를 앞질렀으나 이제는 매우 뒤지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서구는 계속 움직이고 있는 데 반해서 동양은 계속 침체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일반 서구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동양의 고대사라고는 오직 구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아라비아 사막의 트란스요르단 지역의 생활이 성경 창세기에 묘사된 족장의 시대의 생활 모습과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의 서구 여행자가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린 감정으로 관찰하게 된다면, 그것이 동양의 변하지 않는 침체의 특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행자가 마주친 것은 변하지 않는 동양 사회가 아니라, 변하지 않고 있는 아라비아 초원의 자연이었을 뿐이다. 아라비아 초원의 자연 환경은 그 곳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주인이어서, 이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능력은 매우 좁은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다. 이 지역의 사막과 초원은 어느 시대든지, 대담하게도 그 곳에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가혹하고도 변화가 없는 생활 양식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증거를 변하지 않는 동양 사회의 논거로 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서구에도 그들의 선조들이 아브라함 시대에 삶을 영위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생활을 오늘에도 하고 있는, 알프스 산맥 계곡의 오지( ��들이 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변하지 않는 동양의 논거를 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알프스의 오지에서 변하지 않는 서구의 논거를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직선으로 진행한다고 파악되는 '진보'에 대한 미망은 인간 사고의 극단적인 단순화를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시대 구분'을 할 때 서구의 역사가들은, 연통 청소부가 사용하는 여러 개의 마디가 연결된 브러시와도 같이,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단일 계열 속에 시대를 배열한다.

서구 역사가들이 물려받은 브러시 자루에는 본래 두 개의 마디만이 있었다. 즉, 역사를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 나누거나, 등과 등을 맞대는 식의 기원전과 기원 후로 계산하는 이분법과도 같이, 고대와 근대로 나누는 두 개의 마디뿐이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서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른바 중세라고 하는 제3의 마디를 두 개의 마디 사이에 추가함으로써 브러시 자루를 연장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및 '근대' 서구의 역사를 인류 역사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역주의에서 나온 편견에 불과하며 당치도 않은 견해이다. 21개 사회 중의 하나에서 다른 하나의 사회로 넘어가는 역사적 이행을 마치 전체 인류사의 전환점이나 되는 듯이 취급하는 것은 서구인들이 자아중심의 환각에 빠져든 결과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지리학자가 지중해 연안과 유럽 지리에 대한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는 책에다 '세계지리'라는 제목을 붙여서 책을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문명전파설의 오류

한편, 지금까지 거론한 통속적이고 전통적인 미망과 또 다른 매우 이색적인 '단일체 역사' 개념이 있다. G. 엘리어트 스미드가 지은 '고대 이집트인과 문명의 기원'과, W.H. 페리가 지은 '태양의 아들 : 초기 문명사의 연구'에서 시작된 문명전파설이 그것이다.이 학자들은 이색적인 의미에서 '단일체 문명'이라는 설을 믿고 있는데, 그들은 이집트 사회가 외부의 어떠한 다른 사회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창건되어 온 유일한 문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문명의 출현은, 미국에서 일어난 문명까지도 포함하여, 모두 이집트 사회로부터 연유하며, 미국 문명은 하와이 이스터섬을 경유하여 미대륙에 도착했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은 재봉틀, 담배, 소총으로 구축되는 것도 아니고, 알파벳이나 숫자로 구축되는 것도 아니다. 교역을 통해서 세계 도처에다 서구의 기술이라는 새로운 문명 요소를 수출하기란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서구의 한 시인이나 성자가 자기 마음에서 불붙고 있는 영혼의 불길이라는 또 하나의 문명 요소를 비서구인의 마음에 불붙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때에 따라서, 문명 간의 영향 관계를 전파 현상에 돌릴지라도, 인간 역사 속에서 독창적 창조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독창적 창조력의 불꽃이나 핵심은 어느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불꽃을 튀기며 개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현대 인류학자인 머피도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고 있다.

"인간의 사상이나 실천의 유사성은, 어느 곳에서나 인간 두뇌의 구조는 유사하며, 그 결과 인간 심리 성질이 유사하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알려져 있는 인간의 모든 역사 단계에서 인간의 생리 기관이 그 구조에 있어서나 신경 계통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과 같이, 인간의 심성도 어떤 보편적 특성과 능력과 행동 방식을 지니고 있다. ……. 두뇌 활동의 유사성은 19세기에 다윈과 러셀 월레스의 지성에서도 보게 되는 일인데, 이 유사성은 같은 자료에 입각하여 연구함으로써 동시대에 같은 진화 이론에 도달케 했던 것이다.



토인비 「역사의 연구」

모든 민족이나 문화단위들은 현재의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과거사를 해석하고 미래사도 파악한다. 그런만큼 과거 - 현재 -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관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상황에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그 역사관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관이 언제나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역사관을 반성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지적 노력이다. 청소년 시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역사관을 확정하는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1차대전 이후 서구를 휩쓴 종말론적, 비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당시 오스발트 슈팽글러가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를 통해 대전을 통해 나타난 현대문명의 병리적 징후들을 비관적으로 그려내면서 문명이 유기체로서 탄생 - 생장 - 사망의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는 점을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한 바 있다.

반면 「역사의 연구」는 이같은 숙명론으로부터 벗어나 창조적 소수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전개한다. 이같은 낙관적 역사관을 피력하기 위해 「역사의 연구」는 역사를 민족이나 국가 중심으로 파악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체, 즉 문명을 역사의 단위로 설정한다. 또 문명이란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적 결정체로 본 점은 문명을 단순한 유기체로 이해한 슈팽글러와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연구」는 인종이나 환경 등 결정론적 요인도 도전을 제기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인정한다. 이같은 도전으로부터 문명의 성장을 가져오는 창조적 소수, 타성에 젖은 한 사회집단 속에서 이 소수가 창조적 의지를 갖고 반응하게 됨으로써 문명이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의 성장․소멸과정을 보면 성장기에는 사회의 다수가 창조적 소수를 기꺼이 모방해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도전에 성공한 소수가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제도를 우상화함으로써 창조성과 지도력을 잃게 되면서 문명의 쇠퇴에 들어서게 된다. 창조적 소수가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소수와 다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자기 결정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고전에서는 매우 많은 역사철학적 주제들이 쟁점화될 수 있다.




1. 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 1892 - 1982)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항상 다시 쓰여진다는 점을 밝히면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histoyt is a coutinuous process of inter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반추하여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 대문에 과거와 현재 및 미래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연속적인 과정중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다.


2. 역사의 연구 토인비

토인비는 많은 문화 유형을 연구하여 세계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독자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하였다. 그리스 이후 쇠퇴하였던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역사의 기초를 '문명'에 두었다. 문명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포착하여, 그 생멸이 하나의 역사이며, 그 생멸은 일정한 규칙성, 즉 발생·성장·해체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출처 : 내 영혼이 은총입어
글쓴이 : 대언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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