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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가 왜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본문

배움과 깨달음/역사와 철학

[한겨레] 우리가 왜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柏道 2009. 5. 26. 01:29

[한겨레] 우리가 왜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당신께서 그랬듯이…

종일 책조차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대통령을 해본 적도 없고 더구나 검찰에 불려가본 적도 없어 당신께서 당했을 고통과 번뇌와 굴욕감에 대해 충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 이게 뭡니까. 아무리 고쳐 생각해봐도 당신의 선택에 손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아는 바,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곧은 분이셨고 가장 정직한 분이셨으며 가장 가장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당신께서 이러저러한 비리에 연루되어 검찰에 불려나갈 때에도 나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찌 나만 그랬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아직껏 당신의 죽음에 대해, 깊고 고요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이렇게 이퉁을 부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토끼몰이하듯 몰았던 정략적인 전선(戰線)에서조차 애절한 슬픔과 통절한 아픔의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정작 당신을 믿고 사랑했던 저는 깊은 슬픔에 잠기기에 앞서 당신께 자꾸 화가 납니다. ‘이러면 막 가자는 거지요?’ 대통령이 되시고 얼마 안돼 검사들과 대면한 토론에서 무례한 검사들에게 당신이 했던 말입니다. 솔직히, 너무 화가 나서 지금 이 말을 당신 앞에 들이대고싶은 심정입니다.

그렇다고 명예롭게 살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기 바랐던 당신의 사람다운 꿈과 그것이 무너졌을 때 받았던 수모와 고통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닙니다. 부끄러운 고백이거니와, 오래 전 젊을 때 저도 몇 번의 자살미수를 경험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세계로 가는 길을 찾지못해 고통스러웠습니다. 제 자의식으로 본 세계는 ‘광기’에 가득 싸여 있었고, 혼자였던 저는 그것과 맞서 제 자유를 지키는 길이 스스로 선택해 결행함으로 얻어지는 죽음밖에 없다고 감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사람’으로서의 삶이란 것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고, 어둠이 깊을수록 불꽃이 더 뜨겁고 밝다는 인간의 위대한 향일성(向日性)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으며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직껏 그 일을 죄스럽게 여기며 사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소소한 한 개인이 이럴진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아직도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신은 하물며 어떻겠습니까.

물론 압니다. 한 인간으로의 당신에게 이런 말조차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야만성과 미친 욕망에 따른 수많은 가름과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높이 든, 그러나 알고보면 거의 ‘맹목적’인 증오심을 당신 혼자 지고 가달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 잔인해졌을까요. 죽은 고기를 향해 달려들어 뼈만 남기는 하이에나적 문화는 도대체 언제 어디로 와서 우리들 가슴 속을 숙주로 삼았을까요.

‘대통령이 자살하는 이런 나라 정말 싫어!’

간밤의 어느 술집에서 한 젊은이가 내뱉은 말이 아직 귓가를 후벼팝니다. 당신께서 그랬듯이 저 또한 이 말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고 덤벼들어 사실은 종일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의 결단은 완전한 패배, 혹은 완전한 승리를 위한 통절한 반역입니다. 매일매일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고통에 찬 인생의 대장정을 감행하고 있는 ‘우리’와 ‘이웃’들이 당신의 결단을 완전히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또 이해하고나서 그것을 실행하여 완성할 때까지는 더 많은 역사적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살아남은 우리는 우리들의 미친 욕망에 대해 사람다운 고삐를 걸어야 하고, 우리들을 숙주로 삼은 정신병리적인 앙갚음과 증오심의 뿌리를 뽑아내야 하며, 아직도 가난과 편견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살아남아 ‘통일조국’을 만들어야 하는 수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편히 잠들라는 의례적인 애도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하루 빨리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애도의 말을 대신할까 합니다.

박범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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