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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나는 누구인가 ? 본문

배움과 깨달음/숨터일지

나는 누구인가 ?

柏道 2025. 4. 29. 07:56


오늘 살펴볼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아들인 나를 무엇이라고 하더냐?” [마태복음 16:13]
그러자 그들은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러나 그대들은 내가 누구라고 말하느냐?’라고 하시더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당신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나이다’라고 말하더라.”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시몬 바요나, 너는 은총 받았다. 살과 피가 너에게 그것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그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말하니, ‘그대는 베드로이다. 그래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지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14-18]
이 이야기에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disciples)에게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인간이 명상 속에서 자신의 훈련된(disciplined) 마음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우리에게 맞게 고치면,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대답합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고대의 선지자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을 과거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위대한 사람들과 닮았다고 하면 굉장히 우쭐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난 이성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진리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누구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겁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면, 그 대답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일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느끼고 이렇게 살아갈 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살과 피는 이렇게 말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나에게 그것을 나타내주셨다.” 그리고는 이런 자아에 대한 관념을 반석삼아 나의 세상인 나의 교회를 세울 겁니다.
“내가 그(He)임을 그대가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8:24]
의식만이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에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모습은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자신이라고 규정한 한계 속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댈 곳을 찾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르치고 있는 이 진리는 실패에 대해 어떤 변명거리도 주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만이 삶의 모든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부에서 먼저 변화가 찾아와야만 합니다. 바깥세상에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부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 자신만이 이 모든 환경들의 원인이라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때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수가 돌아가서,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더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도 떠날 것인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66-68]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실체이자 유일한 반석인 자신의 의식 안으로 고개를 돌려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면 거부감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자기 자신의 불행에 대해 사회를 비난하고, 저 너머의 것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나라를 탓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날씨 탓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은 바로 자신이고 항상 내부의 상태에 따라 외부의 환경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에게로 가야합니까?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듯 보이지만, 이 말들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면 이 진리의 말씀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만 합니다.
이 법칙을 깊게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오로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행동들은, 단지 나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말해줄 뿐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과 함께 살아나간다면 마침내는 우리가 성경의 위대한 기도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합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들을 끝냈나이다.” [요한복음 17:4]
“그리고 이제, 오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도 전에 그대와 함께 있었던 영광을 가진 그대 자신의 자아와 함께 저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한복음 17:5]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저는 그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저에게 주어진 것들은 제가 지켜서, 어떤 것도 잃지 않았나이다. 오로지 잃은 것이 있다면 멸망의 아들뿐입니다.” [요한복음 17:2]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것도 잃는 것이 없으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잠시 꽃 피웠던 작은 꽃조차 영원히 피어 있습니다. 지금 한계 속에 둘러싸인 여러분의 시선은 그것을 볼 수 없지만, 존재의 더 넓은 차원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그대의 이름 안에서 지켰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멸망의 아들만을 잃었습니다. 멸망의 아들은 ‘잃는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아들은 생각이자 관념입니다. 멸망(Perdido)은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유일하게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잃는다는 믿음뿐입니다. 어떤 것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 천상의 영역으로부터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다 낮은 의식 속으로 내려오면 천상의 영역에 존재했던 것들은 자신의 시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겁니다. “나는 건강을 잃었어. 나는 재산을 잃었어. 나는 지위를 잃었어. 나는 믿음을 잃었어. 나는 많은 것들을 잃었어.” 그러나 한 번 존재했던 것들은 그 존재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내려오면서 위에 존재했던 것들은 자신의 시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렸어. 그것들은 내 세상 안에서 끝나버렸어.” 우리가 다시 할 일은 그것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높은 곳까지 의식을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나타나게 하고 자신의 세상 안에서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의 핵심은 19절에 있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신성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신성함을 얻게 하려 함이다.”
이전에는 노력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먼저 제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타인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안의 세상 속에 존재하는 타인을 바꾸려면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지닌 관념을 먼저 바꿔야만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겁니다. 다른 이들을 볼 때, 자아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관념이 비추는 대로 그들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이 고귀하고 고결하다면, 다른 이들에게서 고귀하지 않은 것들을 볼 순 없었을 겁니다.
다른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싸우지 말고, 단순히 의식 속에서 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자아는 변화될 것이고 자연히 다른 이들도 변화될 겁니다.
“변화시켜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자아밖에 없다.” 자아는 간단히 말해 여러분의 의식이자 인식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그 자아가 사는 세상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유일한 실체로서 시선을 향할 곳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전부이고 모든 것들은 의식’이라는 명제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할 때, 현실의 도피처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하는 것들이 정말 이루어졌다면 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느끼고 마음속에서 그것을 현실처럼 느낀다면, 상상했던 것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형체를 굳혀갈 겁니다.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이미 객관적이고 단단한 실체로 형체를 띄고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이들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신성하게 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을 성스럽게 합니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보입니다.
“그 본연의 속성상 깨끗하지 않은 것들은 없더라. 그러나 깨끗하지 않다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그것들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다.” [로마서 14:14]
본질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자아의 관념에 의해서 깨끗한 것인지, 깨끗하지 않은 것인지가 구별될 뿐입니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 10:30]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지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한다면, 그대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으라. 그대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0:37, 38]
예수는 하느님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신성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달라집니다. 배나무에서 배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 내부의 모습이 비추는 대로 삶의 환경을 만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그대들은 가지들이다.” [요한복음 15:5]
가지가 포도나무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열매를 바꾸고 싶다면 포도나무를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저의 세상 안에서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뿌리내려 있고, 마치 포도나무의 열매가 그 증거를 가져오는 것처럼, 여러분은 저라는 포도나무의 증거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의 의식을 제외하면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리고 여러분 세상에 있는 환경 속에서 변화를 일궈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고요하게 지금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단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통해 여러분은 그 모습이 될 겁니다. 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다(I am the way).”
즉, 나의 IAMness, 나의 의식은 나의 세상을 바꾸는 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관념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훼방 놓는다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그 사람은 단지 우리의 관념 안에 써놓은 그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동적으로 했던 것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맡은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모습을 먼저 그렇게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은 변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여러분의 것 중,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길 원하는 모습으로 여러분이 먼저 변화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절대 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그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8:24]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그 어떤 분도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밤 우리는 자신의 세상으로 뻗어있는 집으로 갑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급니다. 다음날 일어나 일터로 갑니다. 그곳에서 서로를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정신세계, 다른 물질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유일하게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완벽하지 못하면서 세상이 완벽하길 바란다면, 내가 완벽하기 전까지는 세상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실패할 겁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면 세상에서 완벽함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완벽해지는 날이 오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을 아름답게 봅니다.
“순수한 자에게는 모든 것들이 순수하다.” [디도서 1:15]
제가 여기서 똑같은 말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지만, 똑같은 내용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제가 말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듣는 겁니다. 여러분의 선입견들, 미신들, 그리고 자아에 대한 관념들을 통해 걸러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이 메시지는 여러분을 통해 주어지고 여러분에 의해서 채색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다른 모습으로 보기 원한다면, 그래서 여러분의 베데스다 연못이 흔들린다면 제가 변하길 원하는 모습으로 여러분이 먼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변했으면 하는 모습으로 먼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나 먼저 변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기대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식과 저의 의식은 세상의 유일한 반석입니다. 성경에서는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인간 베드로가 아닌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요한이 다시 왔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우쭐거리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가리켜 세례요한이 다시 왔다거나 예레미야 혹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우쭐거리게 만들 겁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의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닫고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누구지?”
태생적인 한계, 환경적인 한계와 나를 단순히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몸으로 규정짓는 잘못된 관념을 거부하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바로 나임을 느껴 이 느낌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아서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중심부를 차지할 때까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유지합니다. 그러면 어떤 의도나 노력 없이도, 이 완벽함은 마음 안에 품어져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열게 하고, 슬픔에 기쁨을 주고,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때, 오로지 그때만이 진정으로 포도나무를 내부 깊숙이 박아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낼 일들입니다. 그(He)는 그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임을 나타냅니다.
우리 의식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뀔 때 겪는, 그런 평범한 잠시간의 의식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상태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져서 마음속에서 그 믿음과 모순되는 것들을 쫓아낼 정도가 되면 존재의 중심에 습관처럼 배인 생각이 우리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즉 깨어난 이성은 사람들에게 끌려온 여인에게서 어떤 불순한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말합니다. “그대에게 죄를 묻는 자들이 없지 않느냐?” [요한복음 8:10]
“그녀가 말하기를, ‘주여, 아무도 저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 역시 너에게 죄를 묻지 않노라.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거라.’” [요한복음 8:11]
아름다운 존재는, 그 앞에 어떤 것을 가져다 놓아도,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봅니다. 예수도 아름다운 것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불결한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가 된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 역시 병들어 굽어진 팔을 곧게 만들고, 인간들의 죽은 희망을 부활시킬 겁니다. 나를 단순하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낼 것입니다. 이것은 확신에 차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인데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차원 세상의 인간인 요한은 4차원 세상의 자아인 예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3차원적인 시야를 잃게 됩니다.
자아의 개념이 확장될 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생각들을 떠나보내면서 어느 정도 고통이 따릅니다. 깊이 박혀 있는 생각들은 습관적으로 받아들인, 한계로 둘러싸인 자궁 속에다가 우리를 붙잡아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믿어왔던 것들을, 이젠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의 의식 바깥에는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시선을 더 이상 자아의 외부로 향하지 않습니다.
의식 이외의 것들에 힘이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유일한 실체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생각을 반석 삼아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짓고, 여러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태어난 신성한 존재란 사실을 확신을 갖고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요람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던 자아에 대한 관념,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자아에 대한 관념, 인간의 힘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품어진 자아에 대한 관념을 감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이삭으로 인간의 힘의 영역을 벗어나 태어났고, 다른 한 명은 이스마엘로 노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하기에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방랑자인 여종 하가와 정을 맺습니다. 하가는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었고, 모든 사람들도 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들이 영국의 왕실에서 태어나든 백악관에서 태어나든 아니면 어떤 굉장한 곳에서 태어나든, 모두들 주어진 환경들에 갇혀서 태어난, 속박 속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처럼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경에서 하가의 아들인, 이스마엘로 상징됐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에 들었다면 축복받은 이삭이 됩니다. 이삭은 인간 능력의 영역을 넘어 태어났고,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둘째 아이는 육체적인 아버지가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태어난 겁니다. 과연 무엇이 두 번째의 태어남입니까? 저는 인간이기에 다시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의 태어남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요한복음 3:3]
어떤 남자도 줄 수 없는 것, 어떤 여인도 줄 수 없는 것, 저는 그것을 고요히 제 것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제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에 차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때야 저는 축복받을 수 있고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받은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제 자신도 할 수 있기 시작할 때, 이스마엘의 속박을 넘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왕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이스마엘은 그의 아버지가 아브라함, 즉 신인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의 부모님 모두가 신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하가는 노예였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자 사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식 안에 갇힌 채 자신을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리는 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를 이삭이라 말하고 신약에서는 예수라 말합니다. 둘 다 인간의 도움 없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거나 확신시켜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항상 간직해야 하고, 여러분이 만약 하느님이 된다면 어떨 것인지 궁금해해야 합니다. 의식이 전부이고 ‘모든 것은 의식’이라는 명제 외에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이상이 마음 안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절대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출간한 ‘더 서치(THE SEARCH)’에 나와 있는 저의 경험을 지금 다시 한 번 말해서, 강조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의식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여러분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시킬 사람은 외부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자아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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