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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없이 계신 하나님"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없이 계신 하나님"

柏道 2025. 1. 7. 03:42

"없이 계신 하나님"

​저기 저 너머에 계신 하나님과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
하나님의 현존과 부재는 함께 간다.

하나님은 저기에도 계시고 여기에도 계시다.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아니 계신 곳이 없기에 아무데도 안 계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 단어를 빌어쓰면 Nowhere는 Now here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이미지대로 만들어진 신이다. 

참된 하나님은 우리 인식 너머에 계신다.

계신다는 인식 너머에 계시기 때문에 안 계신다.
안 계신다는 인식 너머에 하나님은 계신다.

유영모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은 없이 계신 이다.

현존 속에 부재가 있고
부재 속에 현존이 있다.

불교에 공즉색이요 색즉공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역설이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을 함축해서 나타내는 말로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틀이다.

우리가 믿는 성경 또한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서로 모순 되는 것 같으나 공존하는 진리가 역설이다.
이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믿음이다.

역설 중에 역설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 인간의 인식론 안에는 상호 내재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고
서로 서로에게 내재해 계시면서 서로에게 독립되어 계신 타자이시다. 

그 둘 사이에 상호 존중과 상호 경청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서로를 들으면서 서로가 사귐 속에서 즉 성령의 교통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신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현상과 본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숨어 있고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보이는 현상의 원인이 있다.

나의 마음은 이것을 말하나
나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온전한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한다.
말로 표현된 것이 진리의 모든 면이 아니다.
말로써 표현 될 수 없는 깊고도 높은 차원이 있다.
그러므로 말은 진리를 가리키는 작은 손가락일 뿐이다. 

직관적 인식을 통해 나는 이것을 말할 뿐이다.

논리적 인식도 인식이거니와
그런 인식을 초월한 인식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 것 같다.
현상에 대한 인식론은 모든 현상의 원인과 배후가 되시면서 

모든 현상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때 그 지평이 넓어진다.

헨리 나웬의 묵상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그 너머”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 그 너머에, 우리의 느낌과 생각 너머에, 

우리의 기대와 욕망 너머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건과 경험 너머에 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핵심에 닿게 되는데,
왜냐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부재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실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現存)은 절대로 그분의 부재(不在)와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부재 역시 그분의 현존(現存)과 절대로 갈라지지 않는다.

그분의 현존은 인간적 차원에서 함께 있음에 대한 체험과 너무나 다르고
그것을 넘어서기 때문에 쉽사리 부재로 인식된다.

다른 한편, 그분의 부재는 너무나 자주 깊이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현존으로 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