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심명 요약 본문
신심명 요약
승찬스님은 혜가스님의 법제자로 중국 수나라 양제 대 2년 10월 5일, 서기 606년에 입적하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태어난 시기와 혜가대사와 만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심명」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인데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데 있다는 말인데, 이는 사언(四言) 이구(二句), 73송, 584자(字)로 구성되어 있다.
「신심명」의 대의(大意)
「신심명」에서는 일체 분쟁(分爭)에서 오는 고통(苦痛)은 상대적(相對的)인 개념, 즉 이분법(二分法)적 사유(思惟)와 흑백(黑白) 논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유(思惟)는 중생의 본성(本性)이 아니라고 하여 철저히 그 대립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그 대신 불이(不二)와 중도(中道)사상으로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세워주는 이치를 깨달아 대립(對立)을 화합(和合)으로 바꿈으로서 대립에서 오는 고뇌(苦惱)를 소멸한다. 서로 수용(受用)하고, 포용(包容)함으로서 지도(至道)에 이르러 극락(極樂)을 얻게 하고자 함에 있다.
지도(至道)는 대도(大道), 중도(中道), 지복(至福), 극락(極樂) 등으로도 표현되는데 일체의 대립적인 사유를 지양(止揚)함으로서 중생을 포용(包容)하여 구경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하나가 되어 극락을 즐기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립(對立)적인 마음은 하나의 공(空)에서 나온 것이니 대립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또 이 공은 대도의 체(體)로 모든 중생의 불생불멸하는 본성(本性)으로써 능히 일체 중생을 포용하여 원융무애하게 할 수 있는 지도(至道)이니 이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서 지도(至道)에 이르러 극락을 이루게 하라는 말씀이다.
「신심명」의 개요(槪要)
「신심명」은 게송 1)에서부터 상대(相對)적이고 흑백(黑白)이나 이분법(二分法)적인 사유(思惟)를 부정(否定)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게송 1)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여 택하는 것이 아니면 버리는 이분법(二分法)적인 사유를 싫어하면 지도(至道)는 무난히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게송 2)에서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하여 역시 흑백(黑白) 논리나 이분법적인 사랑 아니면 미움이라는 사유를 막을 수만 있으면 지도는 통연히 명백해진다고 했다.
간택(揀擇)이나 증애(憎愛)의 양변(兩邊) 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것은 버리려는 이분법적인 사유의 예를 들면, ‘기독교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식으로 둘 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보다 양변의 중도(中道)를 택해 양쪽을 서로 살려가는 길이 지도(至道)로 가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불교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상관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에 가고, 악(惡)을 짓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와 같은 예이다. 그리고 양쪽을 서로 살려가려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집착을 여의여야만 가능하고, 집착을 여의려면 탐진치를 여의여야하고, 탐진치를 여의려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야 한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함으로서 게송 11)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이 가능하게 된다. 즉 모든 움직이는 번뇌를 소멸하고 고요한 지(止)에 돌아가게 되고, 지(止)에서 무분별지를 얻어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지동귀지(止動歸止)가 됨으로서 게송 24)의 일심불생(一心不生) 만법무구(萬法無咎), 25)의 무구무법(無咎無法) 불생불심(不生不心)이 가능하게 된다. 즉 일체번뇌를 소멸하고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면 이분법적인 상대적인 사유를 가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만법에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원래 법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사유를 가진 마음을 내니 허물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 흑백(黑白) 논리적인 사유를 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本性)인가 아닌가를 게송 28)에서 밝히고 있다. 욕지양단(欲知兩段) 원시일공(元是一空)에서 양단(兩段)으로 가르는 이분법(二分法)의 근원은 공(空)이라고 하여 이분법적인 사유가 인간의 본성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즉 중생의 본성은 공(空)이라고 했다. 그리고 게송 29)에서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이라하여 이분법(二分法)의 근원이 일공(一空)임을 알게 되면 양변(兩邊)과 가지런히 화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상(萬象)과 가지런히 화합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이분법적인 사유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아님이 인식되었으면, 공연히 대립을 일으키고 투쟁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본래 공(空)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서로 가지런히 품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공(空)의 원리를 게송 31)에서 대도체관(大道體寬) 무이무난(無易無難)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은 곧 대도의 체(體)이고 그 체는 관대(寬大)하여 쉬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은 그 체의 작용의 묘(妙)한 이치를 설한 것이다. 그 작용이 넓다 좁다, 작다 크다, 짧다 길다, 두텁다 얇다, 깊다 얕다, 강하다 약하다고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말로서 그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나, 아무리 어렵고 쉬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 체(體)에 맡겨두면 그가 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게송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이다.
그리고 또 이 체(體)의 성(性)과 용(用)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니 일체중생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즉 나에게 불성(佛性)이 있어 내가 부처가 될 수 있거나 부처라면 ‘나’외 다른 모든 중생도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그들도 부처가 될 수 있거나 부처이니 나와 남의 인격을 이분법적으로 봐 남을 열등하게 보거나 취급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그들도 나와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대하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게송 38)의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과 39)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머리를 굴려서 짐작으로 흑백을 만들어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 게송 44)의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이고, 또 긍정적으로 표현하여, 이치가 이러하니 ‘내’가 일체중생을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외의 이분법적인 사유는 쉬게 하라는 말씀이 게송 55) 계심평등(契心平等) 소작구식(所作俱息)이다.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이「신심명」에서 설하는 내편이 아니면 적(敵)이라는 흑백적인 사유, 공(空)의 원리, 인격 평등의 원리 등의 말씀에 대한 일체 의심이 깨끗이 정화되었을 때 바른 믿음을 세우게 되고, 그 바른 믿음으로서 일체중생과 조화를 곧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게송 56)에서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이라 하였다.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텅 비어 공허(空虛)해지고 이 법계의 진리가 저절로 밝게 비춰질 것이니 아무 것도 애쓸 일이 없게 될 것이라 하여 게송 58)에서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이라 했다.
그리고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것은 생각을 헤아리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곳이고,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으로도 측정(測定)하기 어려운 곳이라 하여 게송 59)에서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가 진여법계(眞如法界)이고, 이 진여법계에는 ‘네’가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바도 없고, ‘내’가 ‘너’를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곳이라 하여 게송 60)에서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라 하였다.
그리고 무타무자(無他無自)의 뜻을 재차 설명하기를 ‘너’와 ‘나’는 현상적으로 봐서 서로 다르고 상대적이고 대립적이지만 중생이라는 인격적인 면에서는 서로 평등하고 같다. 즉 안 먹으면 배고프고, 병들면 아프고, 늙으면 죽는다는 사실도 같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는 변화의 연속이라는 것도 같고, 오온(五蘊)에 연(緣)이 있어 태어나서, 오온의 조화로 살다가, 오온의 연이 다하면 죽는다는 사실도 같으니 ‘너’와 ‘나’는 서로 수용하고 포용(包容)하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도 이와 같으니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게송 62)에서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이라 하여 불이문(不二門)을 열어 흑백 논리와 이분법(二分法)을 대치(代置)할 수 있는 비흑백(非黑白), 비이분법(非二分法) 법문을 했다.
게송 58)에서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것은 게송 59)에서 비사량처(非思量處)이고 식정난측(識情難測)하다고 한 것을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에서 시작해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66)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67)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不見邊表),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69) 약불여차(若不如此) 필불수수(必不須守),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73)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이라 하여 대도(大道)의 비사량(非思量)한 구체적인 이치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상 예를 들은 비사량처(非思量處) 중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에서 유무(有無) 불이(不二)와 중도(中道)로써 지복(至福)인 극락(極樂)왕생의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특히 유(有)에서 무(無)로, 무(無)에서 유(有)를 자재롭게 할 수 있음으로서 영적(靈的), 정신적(精神的), 물질적(物質的) 창조(創造)를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이들로부터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허명자조(虛明自照)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니 참선수행의 목적이 바로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즉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게 하는데 두고, 이 구(句)가 일상생활 전반의 향상을 위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에서 일(一)은 전체를 의미하고 일체(一切)는 그 구성원의 합(合)을 의미하는 것이니, 일(一)이 한 국가의 통치권자라면 일체(一切)는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이다. 일(一)과 일체(一切)는 합이 될 수도 있지만 대립과 투쟁관계도 될 수 있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도로써 즉(卽)을 삼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일(一)과 일체(一切)의 조건은 끝없이 변하는 것이니 중도도 역동적으로 변해가야 한다. 이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통치이념이고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도 역시 훌륭한 지도자와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 신심명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참선수행이 필수가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마지막 게송 73)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이라 하여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경지(境地)의 신비성(神秘性)을 한 마디로 결론 맺고 있다. 이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 세상의 훌륭한 학자들 중에는 불교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학자들의 이런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의 근기만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내면세계 안에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경지(境地)에서 체험할 수 있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의 신비성(神秘性)이 내재해 있기에 ‘하나님’의 창조설을 믿지 않고 인간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믿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이 지구상에 3,000만이 넘는 신도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모두 폭력적이지만 이 지구상의 종교 중에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가 불교인 것은 이「신심명」에서 밝히고 있는 흑백적인 대립(對立)을 부정하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그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信)을 하되 맹신(盲信)에 치우치지 말고, 심(心)을 쓰되 허망한데 치우침이 없도록 하여 믿는 마음과 믿음의 대상을 불이(不二)로서 중도를 삼음으로서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이「신심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여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극락을 즐기게 하라고 하여 게송 72)에서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을 설하여 발심하는 마음과 성불하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 선행조건이면서 근본이 될 수 있는 이치를 설하고, 73)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으로써 허명자조(虛明自照)를 재조명하고 「신심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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