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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번뇌에 빠진 육적인 자는 빈곤함에 이른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휴심정] 구자만의 종교회통

번뇌에 빠진 육적인 자는 빈곤함에 이른다

柏道 2023. 9. 23. 16:00

번뇌에 빠진 육적인 자는 빈곤함에 이른다

  • 수정 2021-12-17 21:19
  • 등록 2021-12-17 21:19
사진 픽사베이
 

예수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구하라’는 세속적인 것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기 있는 진리(true Self)를 찾으라는 것이며, 이 때 ‘예수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이 하늘(실상)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현상)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하여야 하며, 이 때 대상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린다. 엑카르트는 “무엇보다 아무것도 너 자신을 위해 요구하지 말며, 신으로 하여금 너를 다루고, 그의 뜻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도는 존재계와 하나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진리로 거듭나게 되었을 때 이미 필요한 일체의 것들이 갖추어진 신성(One)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One)의 진리에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이원성(ego)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모든 것이 공(空·無)의 진리 안에서 조화롭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신과 하나(One)가 된 영적인 수준에서는 더 이상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드릴까요’가 되며,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즉 이 세계는 마음(ego)이 만든 환영(maya)이 아니라 하나(One)의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가 된다.

 
 

용수는 하나의 진리인 공관(空觀)을 설명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 뒤에 도달하는 ‘팔불중도(八佛中道)의 진리’는 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남(生)도 없고 멸(滅)함도 없으며, 항상(恒常)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동일(同一)되어 있음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며, 옴(來)도 아니요 또한 가는 것(去)도 아니다’(不生不滅, 不常不㫁, 不一不異, 不來不出). 즉 공간개념· 시간개념· 수량개념· 운동개념이 없다는 중도실상이다. 이러한 하나의 진리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조물주와 피조물 등의 이원적 분별을 초월하며(物我兩忘), 말의 종교를 넘어선 말 저편 세계인 공의 자리이다(我空法空). 이와 같이 현대물리학도 관찰하는 장치와 관찰되는 대상 즉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육조단경에서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고 하였다. 즉 깨치지 못한 중생의 견해로 보면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菩提)가 다른 것이지만,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하나(One)이므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도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라는 진리(One)는 일본의 선사(禪師) 하꾸인(白隱)이 물과 얼음의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무리 단단한 얼음도 녹게 되면 물이 되는 것처럼 일시적인 중생도 ‘본래의 자기’(佛性)를 깨닫는다면 영원한 부처(神)가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선(禪, 無心)은 천지우주 만유가 바로 부처(神)이며, 내가 법신(神性)이 되는 참된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으로 현실의 본모습(One)을 바로 보게 한다. 생멸이 없는 본성(神性)을 깨치는 선(禪)은 부정신학,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영성수행과 통하며, 절대자인 神(부처)은 감각과 사유에 의한 인식을 초월함으로 영적세계의 신비적 체험에 의해서만 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1-8).

예수는 죄(罪性)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으로, 중풍병자를 神(빛)의 자녀로 선언하여 ‘죄와 병’(어둠)을 사라지게 하였고, 우리도 거짓된 죄의식(ego)에서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의 진리에서 보면 이 세상은 텅 비고 밝아 항상 비추고 있어, 생명의 에너지를 일깨우는 깨달음으로 이원성의 집착이 소멸되면 어둠의 죄는 없어진다. 따라서 죄(하마르티아)는 실상(천국)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보는 분별심(無知)이며(요 9:41), 이러한 이원성(ego)이 소멸될 때 내면의 현상인 속박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운 삶을 누린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진리의 깨달음으로 하나(One)가 되는 기쁨이 넘치면 거짓된 마음인 에고(ego)에 의한 죄와 병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이 바로 ‘나’(ego)라고 하는 번뇌(분별심)의 어둠(無明)이 사라지면, 내장되어 있던 ‘무한한 생명력’(神性)에 의해 중풍병자는 치유되는 작용이 일어난다. 예수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믿음은 지금 여기에 神(One)이 현존하는 것 즉 무한한 능력의 신성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信心不二).

 

예수는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only one eye)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two eyes)들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만일 손이나 발이 범죄 하도록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교훈이라 한다. 이러한 윤리 도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ego)이며, 절대적인 진리(One)가 아니다. 그러므로 ‘두 눈’인 선악, 주객의 이원성(ego)을 제거하고, 천지우주에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유인 영원한 신성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성에 대하여 플라톤(Plato)은 영원한 하나(One)의 진리인 이데아(idea)로, 그리스의 파르메니테스(Parmenides)는 일자(一者)로 설명한다. 이들의 철학 핵심은 ‘모든 것이 하나(One)’라는 깨달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 서양의 종교 선각자들은 ‘모든 존재의 하나 됨’(One)과 사랑을 깨달았다. 특히 신학자인 틸리히는 ‘하나님은 존재자체 또는 존재의 힘(energy)이며, 예수가 그리스도(One)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온 우주에 조화로운 실상이며, 하나(One)의 진리인 신성이 충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허상인 꿈과 같은 고통과 불행(ego)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롬 8:28).

 

모든 존재가 오직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 그리고 하나의 도리(One)라는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적 진리관은 여러 종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는 불교, ‘오로지 한결같이 하여 중용(中庸)의 道를 지킨다’(精一執中)는 유교, 도교는 ‘하나를 얻을 것 같으면 만사는 끝난다’(得一而萬事畢)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진리를 바로 알아 버리면 모든 것이 화로에 한 줌 눈이 녹듯이 다 풀린다(紅爐一點雪).

사진 픽사베이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마 21:42, 막 12:10, 눅 20:17, 눅 20:17, 도마복음 66)고 말씀하셨다.

예수 자신의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자(莊子)의 바가지 비유와 같다. 장자(莊子)의 바가지 비유 즉 큼과 작음의 바가지 비유는 다음과 같다. 혜자라는 사람이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우리 왕이 큰 박 씨를 주기에 심었더니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답니다. 얼마나 큰지 쌀 열 가마는 들어갈 정도로 컸어요. 문제는 이걸 잘라서 도저히 물바가지로 쓸 수가 없었다는...들기도 어려워서 물을 담아 옮길 수가 없고 작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보니..물바가지로는 쓸 수가 없더군요. 아깝지만 결국 다 부숴서 버리고 말았지요.”

장자(莊子)는 그렇게 큰 박 이라면 배를 만들어 강에 띄울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커서 물바가지로 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 귀한 것을 버리고 말았군. 꽉 막힌 사람 같으니라고 답하였다. 이러한 하나의 진리에 대한 비유는 비록 버린 돌(예수, One)일지라도 선과 악 등의 분별심(내면의 뱀, 창3:1)을 초월한 진리(One)의 관점에서는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神性, One)가 내면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포도원의 농부 비유, 마 21:33), ‘자각한 자’(One)는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서, 초연한 태도로 온갖 재난과 병고(病苦)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았던 종과 같이 이원성의 에고인 간택심을 철저히 제거하면, 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하나(One)의 영적 에너지인 본래의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克己復禮, 논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본성적(One)인 ‘감사와 기쁨의 삶’은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니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에 된다. 따라서 그대 영혼의 어둔 밤(ego)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대의 존재(true Self)를 자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고 말씀하신 것은 전 우주는 남도 없고 나도 없는 ‘하나(One)의 생명체’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순수한 마음’(true Self)이 우주에 편만해 있음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나(ego)라는 조그만 껍질이 깨지고, 무아(無我)가 될 때, 막힘없이 흐르는 물이 되며, 또한 우리들의 생활이 ‘하나님의 뜻’(One)의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은 저절로 무한 공급을 누리게 한다(마 6:33). 이러한 ‘하나님의 뜻’의 작용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수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말씀하셨다.

‘진리(One)로 즐거워하는 자’(영적인 자)는 더욱 자유와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번뇌에 빠진 육적인 자’(ego)는 빈곤함에 이르게 된다는 마음의 법칙을 설명한 것이다.

 

글 구자만/개신교 장로& 신학박사 &신흥지앤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