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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 본문

배움과 깨달음/역사와 철학

조로아스터

柏道 2022. 12. 13. 17:12

인물세계사

조로아스터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 Zoroaster음성듣기 ]

출생 - 사망
B.C. 630(?) ~ B.C. 553(?)
“기원전의 처음 천 년 전에 지상에 존재하였던 실존인물로서의 조로아스터의 삶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빈약한 자료로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완전한 인간을 대표하는 자로서의 상징의 수준에서 보자면, 그는 그의 행동의 연대기가 아니라 신화 속에서 아주 분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나 그리스도의 삶과 마찬가지이다. 즉 진리의 계시나 상징으로서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그 진리대로 살았고, 그 진리를 가르쳤으며, 그 진리의 영광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조지프 캠벨

조로아스터의 생애

조로아스터와 그의 종교 사상에 관해 언급한 종교학 문헌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료의 부족과 해석의 어려움을 맨 처음부터 시인한다. 일단 조로아스터의 생애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조로아스터교의 오랜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후대에 변조된 부분이 많다 보니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고 여겨진다. [아베스타]라고 불리는 경전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최소한 1천 년 이상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AD 3~4세기경 사산 왕조 페르시아 때에 와서야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현존하는 [아베스타]도 전체의 4분의 1가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 해석이 어렵다고 평가된다. [아베스타]는 신들에게 바치는 찬송가인 ‘야스나’와 ‘야슈트’, 기원과 제의에 관한 내용인 ‘비스페라트’, 악마와 정화에 관한 내용인 ‘비데브다트’(또는 ‘벤디다드’), 그리고 ‘코르다흐 아베스타(소[] 아베스타)’ 등으로 이루어진다. ‘야스나’에는 [아베스타]의 다른 부분에 사용된 언어보다 더 오래 된 언어로 기록된 ‘가타’라는 찬송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를 조로아스터가 직접 지은 찬송가로 간주한다.

조로아스터교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그 이전 시대의 페르시아 종교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는 다신교인 고대 인도의 종교와 상당 부분 유사점이 있었다. 가령 페르시아에서는 ‘데바’(daeva)라는 여러 종류의 신들을 숭배했는데, 이는 힌두교의 신들인 ‘데바’(deva)와 유사한 존재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페르시아의 ‘인타르/인다라’(Intar/Indara)와 ‘미트라’(Mithra), 그리고 힌두교의 ‘인드라’(Indra)와 ‘미트라’(Mitra)처럼 명칭과 속성이 상당히 유사한 신들도 있었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에서도 불을 피우고, 동물을 제물로 삼고, 환각제를 이용하는 등의 종교 제의가 있었다. 그런데 가타를 보면 유목을 비난하고 농업을 예찬하며, 나아가 동물을 제물로 삼는 행위에 대한 반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특징이 고대 페르시아인의 생활방식이 유목에서 농업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토착민과 이주민, 또는 토착 종교와 전래 종교 간에 벌어진 갈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페르시아 종교의 개혁을 주도한 사상가라고 해석한다.

조로아스터의 생애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자료들은 분량도 많지 않고, 표현조차 암시적이라, 조로아스터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미르체아 엘리아데) 앞에서 설명한 찬송가 ‘가타’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다. 가령 어떤 연구자는 가타에 ‘가난’에 관한 언급이 등장함을 근거로 조로아스터가 가난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여타의 고대사 관련 추측들이 그러하듯 자료의 빈곤만 더욱 부각시킬 뿐이다.

‘조로아스터’(Zoroaster)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식 표기이며, [아베스타]에 나와 있는 그의 이름을 현대식으로 표기하자면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된다.(다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조로아스터’로 명칭을 통일했다). 정확한 출생 및 사망 시기는 알 수 없고, 대략적인 생존 시기에 관해서도 BC 18세기에서 BC 6세기까지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린다. 그중에서도 BC 6세기가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이 시기에 들어서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언급이 기록에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영웅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갖가지 장치를 동원해서 조로아스터의 생애를 묘사하기도 했다. 즉 그는 출생 당시와 유년기부터 여러 가지 징조와 이적을 보였고, 20세 때에 양친과 아내의 곁을 떠나 수도자가 되었고, 30세 때에 계시를 얻었다. 이후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여 각지의 왕과 귀족과 평민을 감화시켰고, 77세 때에 전쟁의 와중에 불의 제단 앞에서 적군에게 피살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 가운데 어떤 것도 역사적 존재인 조로아스터의 이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로아스터의 사상

조로아스터 이전에도 고대 페르시아에는 다양한 종교적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조로아스터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관습을 보다 체계적인 형태로 재편한 인물로 봐야 한다. 그는 ‘아후라 마즈다’라는 최고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지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이며, 정의의 수호자이다. “현명한 주님”이라는 뜻의 이 말에서는 특히 ‘마즈다’(현명함)라는 단어가 강조되었고, 훗날 조로아스터교는 ‘마즈다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속성을 통해 이 세계를 주관한다. ‘보후 마나흐’(선한 생각), ‘아샤 바히슈타’(정의와 진리), ‘크샤트라’(다스림), ‘스펜타 아르마이티’(헌신과 경건), ‘하우르바타트’(전일성), ‘아메레타트’(불멸성), ‘스펜타 마이뉴’(창조적인 에너지). 그런가 하면 이런 선한 존재들에 대비되는 악한 존재들도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선한 영 ‘스펜타 마이뉴’와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악한 영 ‘앙그라 마이뉴’다. 후대에 가서는 ‘앙그라 마이뉴’를 ‘아후라 마즈다’의 대적자로 바라보는 이원론적인 해석도 나왔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조로아스터. 수염을 기르고 손에는 별이 가득한 천구를 손에 들고 있는인물이다. <출처: wikipedia>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즉 후대의 마니교나 영지주의처럼 세계를 선과 악, 또는 물질과 정신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스펜타 마이뉴와 앙그라 마이뉴도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결국 세상만사가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의 의지에 따른다고 조로아스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원론이며,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일신 사상을 지녔다고 파악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악한 정신이 나올 수 있었을까? 조로아스터는 이를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간주한다. 즉 인간에게는 선과 악 모두를 실천할 자유의지가 있으며, 다만 궁극적인 승리는 항상 선 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조로아스터는 자연과 인간의 세계 모두에 선과 악, 또는 진리와 거짓 같은 상반되는 가치가 엄연히 존재함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악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선을 추구하는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셈이다.

조로아스터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라고, 거짓된 종교를 버리고 진실한 종교를 택하라고, 데바를 숭배하는 과거의 신앙을 버리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새로운 신앙을 택하라고 설파했다. 심지어 악한 자들을 향한 성전()까지도 주장했고, 아후라 마즈다가 모든 악을 제압하는 날이 오면 선악의 심판과 사자의 부활과 지옥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직선적 역사관은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및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이란(페르시아) 종교가 서양 종교 사상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순환적인 시간관념을 대신하는 직선적인 시간관념 (...) 다양한 이원론적 체계, (...) 구세주 신화, ‘낙관적’ 종말론의 구상,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사상과 우주적 구제에 대한 선언,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의 (...) 몇몇 그노시스 신화 역시 이란 종교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신플라톤학파와 파라셀수스, 존 디 등에 의해 더욱 세련된 체계를 갖추게 된 마구스 신화 역시 이란에서 기원한 것이다.”

조로아스터의 영향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교리와 개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BC 6세기경에 처음 나타났다. 다리우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기록에서도 아후라 마즈다가 언급된 바 있다.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무너지고, 이후 파르티아 제국의 시대가 이어지는 동안 페르시아 지역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이름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AD 3세기 초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시작되면서부터 조로아스터교는 국교로 지정되며 부흥하게 되었다. 그 경전인 [아베스타]가 편찬되어 보급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다리우스 1세의 치적을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은 조로아스터교의 지고신 아후라 마즈다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는 고대의 기록 가운데 하나다. 위쪽 가운데에 있는 파라바하르(새의 날개 위에 사람이 앉은 모습)를 일각에서는 아후라 마즈다의 현현으로 해석하며, 이는 지금까지도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유명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출처 : wikipedia>

이때의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이미 조로아스터의 애초 가르침과는 상당 부분 달라진 내용이 눈에 뜨인다. 가령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는 ‘오르마즈드’(Ohrmazd, 또는 ‘호르무즈’)라는 유일신이 되었으며,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는 ‘아리만’(Ahriman)이라는 이름의 대적자, 즉 악마가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로아스터가 한때 배격해 마지않았던 고대의 여러 신들이 조로아스터교에 스며들었고, 그 결과로 태양신 미트라에 대한 신앙이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조로아스터도 종교 개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자, 심지어 신으로까지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교의 대두와 아랍 제국의 확장으로 사산 왕조가 무너지자 조로아스터교도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슬람교에서는 한때 유대교와 기독교를 향해 관용을 베푼 것처럼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후 100년 사이에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도 중 상당수가 고향을 떠났고, 오늘날은 인도와 이란의 일부 지역에만 소수가 남아있다. 특히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뜻)는 18-19세기부터 상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현재는 인도 경제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했지만, 그 숫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의 초판본 표지.오늘날 조로아스터에 대한 일반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저서다. <출처 : wikipedia>

유럽에서 조로아스터는 오랫동안 신비주의자이며 마법사로만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A.-H. 앙크틸 뒤페롱은 1750년대 중반에 인도에 머물면서 파르시 성직자들에게서 페르시아어를 배웠고, 1771년에 [젠드 아베스타]([아베스타]를 중세 페르시아어로 옮긴 해설서)를 프랑스어로 번역, 간행했다. 이로써 조로아스터의 진면목이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되었지만, 그로부터 20년 뒤인 1791년에 나온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 피리]에서도 ‘자라스트로’(조로아스터)는 여전히 마법사로 등장한다.

오늘날 조로아스터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아마도 프리드리히 니체일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는 조로아스터가 30세 때에 출가하여 10년간 수행한 끝에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역사적 인물 조로아스터나 그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며, 다만 니체가 고대의 현자 조로아스터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고 보아야 맞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라는 교향시를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서곡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삽입되어 널리 알려졌다.

조로아스터교는 AD 6세기경에 중국에도 전해져서 ‘현교’()라고 일컬어졌으며, 그 사원은 ‘파사사’()라고 일컬어졌다.(‘파사’는 ‘페르시아’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보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뜻의 ‘배화교()’라는 명칭이 더욱 친숙한데, 여기에는 약간 오해의 여지가 없지 않다.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을 중요한 신앙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 자체를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배화교’라는 명칭은 엄밀하게 말해서 올바른 명칭까지는 아니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 J. B. 노스, <세계종교사>, 1986; 조지프 캠벨, <신의 가면 3: 서양 신화>, 1999; 나종근, <조로아스터>, 2000; 미르체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 1>, 2005.

[네이버 지식백과] 조로아스터 [Zoroaster] -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인물세계사, 박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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