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가야는 일본의 기원,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다 본문
?가야는 일본의 기원,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다
일본은 고조선 시대부터 꾸준히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들이 세운 나라이다. 한국상고사의 축소판이며 또 하나의 한국이라고 할수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편에 따르면 가륵단군 8년 병오년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륵 임금이 지백특(支伯特)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10년 무신(BC 2173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餘守己)에게 명을 내려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했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陜野奴)가 해상으로 도망하여
일본의 三島(3도)를 점령하고 천왕이라고 참칭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가야와 백제의 분국 이었다. 일본 건국은 고령가야계의 이즈모국(出雲國)개척과 김해금관가야의 큐슈개척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백제가 현 천황가의 원류이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일본 고대사의 시작은 오늘날 오사카 부근의 '나라'에서 시작한 야마도(大和)정권인데 그전에 이미 가야인은 우수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각기 이즈모와 큐슈로 진출하여 오늘날 천황가의 원류가 되었다. 일본서기는 사실상 초기 야마도 정권이라고 할수 있는 이즈모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큐슈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쓰다가 보니 600년이라는 가공의 역사를 덧붙이게 된 것이다.
큐슈는 가야의 분국 이었다.
가야 김수로왕 10왕자중 7왕자가 사라진 승운이거乘雲離去 전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봉황리에 소재한 칠불사 七佛寺 전설은 7왕자가 큐슈로 도항했음을 뒷받침하는 전설 이다..
천손 니니기노미꼬도(천황가의 황조)가 3종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히우가日向의 나라 <다카지호노미네>의 구지후루에 강림했다는 개국설화는 수로왕의 구지봉 강림설화와 동일한 형태의 개국신화 이다
.
가야인의 정착지 오스미大隅는 "큰 곰"大熊을 의미한다.
구마모토熊本는 곰 신앙 본고장 이다. 곰을 일본어로 "구마" 라고 한다. 곰(熊=구마).카미(神).김(金=기무)은 같은 말로서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은 김무천황金武天皇으로 김 수로왕 왕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김운회 저 대쥬신을 찾아서>
당시 왜倭는 백제와는 부모국이나 형제국과 다름없는 1국2체제 이었다. 백제의 패망을 바라보는 왜인들의 심정은 일본최초의 공식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백제멸망(663년)에 대한 보복과 원한의 심정은 일본서기를 통하여 대대로 전승되었고 이것이 곧 일본의 역사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 일본 군국주의의 흐름을 주도하고 정한론을 부르짖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나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같은 인물들이 가야의 옛 땅인 큐수의 사쓰마와 현해탄 바로 건너 조슈 지방출신들 이었음은 한일간의 복잡한 애증의 역사를 보게해 준다. 이들은 옛 가야나 백제의 후손들이 아니었을까 ?
잘못된 역사로 인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역사는 부정과 말살의 대상일 뿐 이었다. 신공왕후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날조된 역사는 그와같은 삐뚤어진 역사정신의 표출이었다.
풍신수길이 일어킨 임진왜란은 그같은 망상과 희망을 실천에 옮긴 첫번째 시도 이었다. 두번째의 기회는 명치유신으로 국력을 키운 뒤에 치밀하게 진행한 <조선반도>의 강탈과 식민지배 이었다.
백제패망후 1300년만에 그들의 역사정신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일본은 1910 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하자마자 그해 11월 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12월까지 1년2개월동안을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저적을 압수 수거해서 불살라 버리거나 비밀리에 보관해 왔다.
일본왕궁 서능부와 정창원에는 현재도 분류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우리니라 고대 역사책이 20여만권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 당시 사서로 근무한 한국인 박창화 증언과 현지방문 기사>
이런식으로 원본자료를 말살하고나서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고 조선을 영구히 일본화하기 위해서 조선어 말살은 물론 창씨개명, 역사조작에 이르기까지 전력을 기울렸던 것이다.
역사강역은 대륙과 만주지역을 제외하고 압록강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하고 역사시대인 고조선을 신화시대로 조작하여 한국사를 식민정권인 위만조선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였다.
단기4349년의 우리역사를 2,000년 정도로 단축하여 일본 천황가의 역사시대라고 하는 2,600년보다 더 짧게 맞추어 놓았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모르고 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시작하는 역사를 배우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조작의 결과인 것 이다.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위만조선 부터 역사시대로 조작하여 한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외세의 지배를 받는 타율적인 역사로 부터 출발하였고 따라서 자치능력이 없기때문에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역사논리를 개발했다.
이러한 작업에 가장 앞선 인물로서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교수를 따라와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이마니시류)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 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 연구(朝鮮古史硏究) 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삼국유사」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國」자를「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今西龍의 이 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삼국유사」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는 석유환국 <昔有桓國>이라는 기사를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는 석유환인 <昔有桓因>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立國)이전에 환국桓國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깎아 버렸다. 환인과 환웅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원문은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으로 되어있다.「삼국유사」에서 단군(檀君)도 '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간조선 1986년>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치밀한 조작끝에 사대주의, 민족분열, 식민근성, 의타적인 민족성을 부각하는 역사로 둔갑시켜서 조선의 식민역사관을 완성하게 된다. 1922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사 편찬사업에 착수한다. 단군을 신화로 날조하고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과 평양위치를 한반도 내로 조작한 역사책인 조선사는 목록과 색인 각 한권, 본문 35권으로 총 37권으로 구성되어 16년간의 작업끝에 1938년에 완간하게 된다.
광복이 된지 70년이지난 지금까지 일제가 만든 조선사 37권을 능가하는 한국사를 정부주도로 만들지 못하고 왜곡된 한국사를 방기한 위정자들과 역사학계는 민족적인 책임을 면치 못할 것 이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 탁>
일본은 고조선 시대부터 꾸준히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들이 세운 나라이다. 한국상고사의 축소판이며 또 하나의 한국이라고 할수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편에 따르면 가륵단군 8년 병오년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륵 임금이 지백특(支伯特)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10년 무신(BC 2173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餘守己)에게 명을 내려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했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陜野奴)가 해상으로 도망하여
일본의 三島(3도)를 점령하고 천왕이라고 참칭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가야와 백제의 분국 이었다. 일본 건국은 고령가야계의 이즈모국(出雲國)개척과 김해금관가야의 큐슈개척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백제가 현 천황가의 원류이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일본 고대사의 시작은 오늘날 오사카 부근의 '나라'에서 시작한 야마도(大和)정권인데 그전에 이미 가야인은 우수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각기 이즈모와 큐슈로 진출하여 오늘날 천황가의 원류가 되었다. 일본서기는 사실상 초기 야마도 정권이라고 할수 있는 이즈모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큐슈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쓰다가 보니 600년이라는 가공의 역사를 덧붙이게 된 것이다.
큐슈는 가야의 분국 이었다.
가야 김수로왕 10왕자중 7왕자가 사라진 승운이거乘雲離去 전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봉황리에 소재한 칠불사 七佛寺 전설은 7왕자가 큐슈로 도항했음을 뒷받침하는 전설 이다..
천손 니니기노미꼬도(천황가의 황조)가 3종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히우가日向의 나라 <다카지호노미네>의 구지후루에 강림했다는 개국설화는 수로왕의 구지봉 강림설화와 동일한 형태의 개국신화 이다
.
가야인의 정착지 오스미大隅는 "큰 곰"大熊을 의미한다.
구마모토熊本는 곰 신앙 본고장 이다. 곰을 일본어로 "구마" 라고 한다. 곰(熊=구마).카미(神).김(金=기무)은 같은 말로서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은 김무천황金武天皇으로 김 수로왕 왕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김운회 저 대쥬신을 찾아서>
당시 왜倭는 백제와는 부모국이나 형제국과 다름없는 1국2체제 이었다. 백제의 패망을 바라보는 왜인들의 심정은 일본최초의 공식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백제멸망(663년)에 대한 보복과 원한의 심정은 일본서기를 통하여 대대로 전승되었고 이것이 곧 일본의 역사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 일본 군국주의의 흐름을 주도하고 정한론을 부르짖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나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같은 인물들이 가야의 옛 땅인 큐수의 사쓰마와 현해탄 바로 건너 조슈 지방출신들 이었음은 한일간의 복잡한 애증의 역사를 보게해 준다. 이들은 옛 가야나 백제의 후손들이 아니었을까 ?
잘못된 역사로 인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역사는 부정과 말살의 대상일 뿐 이었다. 신공왕후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날조된 역사는 그와같은 삐뚤어진 역사정신의 표출이었다.
풍신수길이 일어킨 임진왜란은 그같은 망상과 희망을 실천에 옮긴 첫번째 시도 이었다. 두번째의 기회는 명치유신으로 국력을 키운 뒤에 치밀하게 진행한 <조선반도>의 강탈과 식민지배 이었다.
백제패망후 1300년만에 그들의 역사정신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일본은 1910 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하자마자 그해 11월 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12월까지 1년2개월동안을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저적을 압수 수거해서 불살라 버리거나 비밀리에 보관해 왔다.
일본왕궁 서능부와 정창원에는 현재도 분류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우리니라 고대 역사책이 20여만권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 당시 사서로 근무한 한국인 박창화 증언과 현지방문 기사>
이런식으로 원본자료를 말살하고나서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고 조선을 영구히 일본화하기 위해서 조선어 말살은 물론 창씨개명, 역사조작에 이르기까지 전력을 기울렸던 것이다.
역사강역은 대륙과 만주지역을 제외하고 압록강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하고 역사시대인 고조선을 신화시대로 조작하여 한국사를 식민정권인 위만조선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였다.
단기4349년의 우리역사를 2,000년 정도로 단축하여 일본 천황가의 역사시대라고 하는 2,600년보다 더 짧게 맞추어 놓았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모르고 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시작하는 역사를 배우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조작의 결과인 것 이다.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위만조선 부터 역사시대로 조작하여 한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외세의 지배를 받는 타율적인 역사로 부터 출발하였고 따라서 자치능력이 없기때문에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역사논리를 개발했다.
이러한 작업에 가장 앞선 인물로서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교수를 따라와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이마니시류)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 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 연구(朝鮮古史硏究) 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삼국유사」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國」자를「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今西龍의 이 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삼국유사」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는 석유환국 <昔有桓國>이라는 기사를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는 석유환인 <昔有桓因>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立國)이전에 환국桓國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깎아 버렸다. 환인과 환웅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원문은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으로 되어있다.「삼국유사」에서 단군(檀君)도 '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간조선 1986년>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치밀한 조작끝에 사대주의, 민족분열, 식민근성, 의타적인 민족성을 부각하는 역사로 둔갑시켜서 조선의 식민역사관을 완성하게 된다. 1922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사 편찬사업에 착수한다. 단군을 신화로 날조하고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과 평양위치를 한반도 내로 조작한 역사책인 조선사는 목록과 색인 각 한권, 본문 35권으로 총 37권으로 구성되어 16년간의 작업끝에 1938년에 완간하게 된다.
광복이 된지 70년이지난 지금까지 일제가 만든 조선사 37권을 능가하는 한국사를 정부주도로 만들지 못하고 왜곡된 한국사를 방기한 위정자들과 역사학계는 민족적인 책임을 면치 못할 것 이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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