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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란 무엇인가?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동학, 천도교

동학이란 무엇인가?

柏道 2021. 8. 9. 14:28

동학이란 무엇인가?

 

 

동학은 1860 4 5일 최제우崔濟愚(18241864, 호는 水雲)에 의해 창도되었다.

 

그는 경주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지러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그 구제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37세 때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동학을 창도하게 되었다.

 

최제우는 이 종교체험 이후 바로 포교에 들어가지 않고 일년 정도를 더 수련에 정진하면서 종교적 신비체험을 내면화시킨다.

 

본래 최제우의 한글 가사인 ?용담유사?에서는 하느님이으로 되어 있으나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신의 명칭을한울님으로 표기하여, 이후 천도교에서한울님으로 통용되고 있다.

 

최제우는 종교적 체험을 거치면서 하느님이 저 하늘에 지존하신 초월적 인격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내 마음에 모셔져 있다’(侍天主)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하느님 마음이 우리의 본래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바깥에서는 천지의지기至氣로서 끊임없이 만물의 생성에 참여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조화의 자취이며이기二氣(陰陽)의 양능良能으로 얘기되던귀신鬼神이 다름 아닌 바로 하느님’(鬼神者吾也)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는 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였고, 시천주侍天主의 신 이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이 거룩하고 신령한 하느님을 모신 존재로서 평등할 뿐 아니라 존귀한 존재라는 인간이해를 하게 된다.

 

그는 나아가십이제국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龍潭遺詞?, 安心歌)이라 하여, 이전의 요순 시대와 같은 태평성세가 필연적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는 시운관時運觀을 피력하면서 새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민중들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이렇듯 최제우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모신 시천주의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의 하느님 마음을 회복하는수심정기守心正氣와 내 안에 모신 하느님을 정성공경믿음으로 지극하게 받드는성경신誠敬信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제시한 것이주문수련呪文修鍊이었다.

 

한편 최제우는 이러한 자신의 종교체험과 깨달음의 내용을한문한글이라는 두 가지 언어 체계로 표현하였다. 그 중에서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한글 가사체로 이루어진 것이 ?용담유사龍潭遺詞?이다. 최제우의 저서 판본은 인제麟蹄 경진판庚辰版, 목천木川 계미판癸未版, 경주慶州 계미판癸未版무자판戊子版 등이 있었으나 현재 인제 경진판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가장 많이 통용되는 판본은 1883 6월 경주에서 간행된 계미 목각판이다. 그러나 실제 간행한 곳은 경주가 아니라 목천이었으며 공주접이 주도하였다.

 

이후 동학은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18271898, 호는 海月)에게 전수되어 더욱 구체적으로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최시형은 스승의시천주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사람을 하느님같이 섬기라는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내놓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당시 핍박받던 민중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까지도 하느님으로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그는 물건까지도 공경하라는경물敬物사상을 내놓았다.

 

한편 고부군수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갑오년의 동학혁명(1894)은 동학의 평등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 억압받던 농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새로운 세상 건설의 기치를 한껏 드높였다. 그러나 이 불길은 일본의 개입에 의해 진압되고, 결국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동학은 다시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도통을 전수받은 3세 교조 손병희孫秉熙(18611922, 호는 義菴) 1905년 동학이라는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교단의 체계를 정비하였다. 뛰어난 영도력을 발휘한 손병희는 1910년대에 이미 300만 교도를 양성하는 한편, 31운동을 주도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손병희의 사망 이후 천도교는 주로 종교 단체로서의 성격보다는 사회운동의 주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개벽?ㆍ?별건곤?ㆍ?어린이?ㆍ?혜성?ㆍ?신인간? 등의 잡지를 출간함으로써 민중들에게 근대적 의식을 심어 주는 한편어린이여성농민노동자청년운동 등 이른바 신문화운동을 이끌면서 사회적 실천에 힘써 왔다.

 

1) 내 안에 모신 하느님

 

동학은 당시의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최제우의보국안민輔國安民의 열망에서 나온 종교이다. 최제우는 당시 세상이 어지러워진 이유를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各自爲心)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경전을 살펴보니 옛날 사람들은 모두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순종하며(敬天命順天理) 살아왔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만 살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다시 하늘을 공경하고 따르는(敬天順天) 삶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최제우에 있어서은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요 상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천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셔져 있는 도덕적 원리인 동시에 조화의 주체로서의 귀신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지기至氣이자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허령한 마음이다.

 

그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서로 문답이 열리는 체험을 통하여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천주天主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하느님이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내 몸을 통해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기운이며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손병희에 와서인내천人乃天이라는 동학의 가장 핵심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에서의 경천敬天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상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모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 모셔져 있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바로 우리의 근본 마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모든 사람은 그 하느님의 영기를 모신 거룩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렇게 최제우는 천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면서 인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의 계급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최제우는 이런 시천주侍天主의 자각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그의 하느님체험에서 받은 주문과 영부를 통한 수련을 강조하였다. 주문은 강령주문降靈呪文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여덟자와 본주문本呪文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열세자로 전체 스물한자로 되어 있다.

 

수련을 통해 본래의 하느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느님의덕을 밝혀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면 지기至氣와 지극히 화합하여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신비적 종교체험으로 동학을 창도하였지만 결코 하느님의 권능의 힘에 의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 속에 모시고 있는 본래의 마음을 깨달아 그것을 지켜내도록 함으로써 자발적인 도덕 실천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이 그가 새로 제창한수심정기守心正氣이다. 주자학적 윤리 규범들이 형식화되고 명분을 중시하는 비실제적인 경향이 심해져 더 이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지도적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되자, 최제우는 외재적인 천리에 근거한 윤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내면화하여 개인의 자각적 수양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仁義禮智, 先聖之所敎, 修心正氣, 惟我之更定. ; ?東經大全?, 修德文)고 하여 수심정기가 인의예지에 앞선 공부이며 더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인의예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가 실제로 시행되기 위한 더 근본적인 실천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최제우는 외재적인 하느님의 권능을 바라는 타율적인 신앙에서 진일보하여, 본래 나의 마음이 하느님 마음인 것을 깨달음으로써 당시의 멸시받던 백성들도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는데,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였다.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시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사람들은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는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라는 것은 존칭으로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다.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이상은 본주문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 대한 해설)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

 

수심정기네 글자는 천지가 운절되는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하셨으니, 만일 수심정기가 아니면 인의예지의 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 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

 

2) 동학의 개벽 사상

 

최제우의 구도의 동기는 앞에서 밝혔듯이보국안민輔國安民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한 시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이 인류 전체에게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 순환의 이치에 비추어 볼 때 필연적으로 오리라고 하였다. “시운時運이 둘렀던가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창건하니 이도 역시 시운이라.…… 차차차차 증험하니 윤회시운 분명하다”(?龍潭遺詞?, 勸學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龍潭遺詞?, 安心歌)이라 하여 최제우는 그것을 개벽이라고 불렀다.

 

이런 개벽 사상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줌으로써 많이 사람들을 동학에 입도하게 만들었고, 이후 동학혁명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역사적 필연성보다는 주문과 영부를 통한 수련 그리고 성의 실천을 통한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이었다.

 

그는 새 세상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역시 인간이며, 그 변화는 자기 내면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개벽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통한 생활 양식의 전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벽을 물질개벽보다는 정신개벽에 더 초점을 두는 경향은 이후 최시형과 손병희에 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최제우는 이렇게 깨달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항상 사회적 실천과 적극적으로 연결시켰다. 그에게는 항상 초월과 내재가,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이 역동적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극단으로 빠진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인식론이기도 한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 구조와 상통한다. 불연不然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종교적 직관의 세계를 말하고, 기연其然은 현상의 세계를 말한다. 상식과 논리와 추론이 가능한 경험적 현실세계이다.

 

그는 이불연기연장에서 기연만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의존하는 것도 비판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불연의 세계에만 빠지는 데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는다. 그는 불연과 기연을 함께 살펴서 기연의 드러나는 세계에서의 합리성과 불연의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의 직관의 차원을 함께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 운수는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의 큰 운수를 회복한 것이니, 세계만물이 다시 포태의 수를 다시 정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하셨으니, 이는 이것이 바로 개벽의 운이요 개벽의 이치이기 때문이니라. 새 한울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

 

개벽이란 한울이 떨어지고 땅이 꺼져서 혼돈한 한 덩어리로 모였다가 자 두 조각으로 나뉘임을 의미함인가? 아니다.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니, 천지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 지금에 그대들은 가히 하지 못할 일을 생각지 말고 먼저 각자가 본래 있는 정신을 개벽하면, 만사의 개벽은 그 다음 차례의 일이니라.

 

그러나 정신을 개벽코자 하면 먼저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모실 시자로 개벽하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개벽코자 하면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정할 정자로 개벽하고,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개벽코자 하면 아득하고 망녕된 생각을 알 지자로 개벽하고, 아득하고 망녕된 생각을 개벽코자 하면 먼저 육신 관념을 성령으로 개벽하라.

 

이러므로 기필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요, 판단하기 쉬운 것은 기연이라. 먼 데를 캐어 견주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일이요, 조물자에 붙여 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인저.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無窮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어 부야흥야賦也興也 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3) 일상 생활에서의 도

 

이후 동학은 2세 교조 최시형에게 계승되었다.

최시형은 관에 쫓기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고, 멍석을 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면서우리의 일상 생활이 모두 도 아닌 것이 없다”(日用行事莫非道也)고 하였다. 그는 고원하게만 느껴지던 도를 일상 생활을 통하여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그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서도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다”(?海月神師法說?, 夫和婦順), “어린아이도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를 때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다”(?海月神師法說?, 待人接物)라고 하여,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함과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부간의 화순함(夫和婦順)이 도의 으뜸 종지라는 설법을 통하여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 관계가 아닌 서로 화순하기를 힘써야 하는 평등적 상보 관계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삼경三敬 사상을 통해 경천敬天과 경인敬人뿐만 아니라 경물敬物까지도 강조하였다. 특히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등의 법설은 오늘날 환경운동의 헌장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최시형은 제도나 정체政體의 변화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변화와, 그로 인해 새로운 생활 양식을 결단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이런 개개인의 생활 양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결국 전체 문명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향아설위向我設位의 법설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유교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제사는 벽을 향해 제위祭位를 차리는향벽설위向壁設位이지만, 동학에서는 신(조상)이 저 벽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 따라 나를 향해서 상을 차리는 것이다.

 

이런 제사의 변화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는 인류 문명의 주체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도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라는 것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최시형은 구체적인 일상 생활에서의 수도를 가장 중시하였고, 이런 생활의 변화를 통해 생명의 문화, ‘모심살림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사람은 첫째로 한울을 공경해야 하나니, 이것이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처음 밝히신 도법이라. 한울을 공경하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 하면 한울은 진리의 중심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울을 공경함은 결단코 빈 공중을 향하여 상제를 공경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공경함이 곧 한울을 공경하는 도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이 곧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라 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나의 동포라는 전체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과 세상을 위하여 의무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한울을 공경함은 모든 진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움켜잡는 것이니라.…… 셋째는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맑고 밝음이 있으면 그 아는 것이 신과 같으리니, 맑고 밝음이 몸에 있는 근본 마음은 곧 도를 지극히 함에 다하는 것이니라. 일용행사가 도 아님이 없느니라. 한 사람이 착해짐에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온화해짐에 한 집안이 화목해지고, 한 집안이 화목해짐에 한 나라가 화목해지고, 한 나라가 화목해짐에 천하가 같이 화목하리니, 비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임규호가 여쭈었다. “나를 향하여 위를 베푸는 이치는 어떤 연고입니까?” 신사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한울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

 

4) 동학의 사회적 실천 운동

 

이런생활의 성화聖化를 추구한 최시형과는 달리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평등 사상에 입각해서 민중들이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사회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일어난 운동이 전봉준全琫準(18531895)이 이끈 갑오동학혁명이다. 이는 민중들이 부패한 봉건정부와 외세에 맞서 현실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일어난 무장투쟁이었다.

 

동학혁명은, 생활 속에서 도를 실천하고 종교적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최시형의 노선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기에, 1차 봉기에서는 동학 지도층 전체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전주협약 이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의 침략적 야욕이 드러나면서, 2차 봉기에서는 전체 동학도들이 단합하여 반봉건뿐만 아니라 반침략반외세의 기치까지 높이 들었다. 이런 동학혁명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현실의 모순과 불평등을 개혁하자는 자발적인 근대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 교권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보국안민의 새로운 방법으로 민회를 조직하여 개혁운동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단발을 하고 물들인 검은 옷을 입으며 긴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달게 하는 등의 생활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합리적인 생활운동을 통해 고루하고 진부했던 낡은 폐습을 뜯어고치고, 나아가 국정 쇄신, 민폐 제거, 잡세 혁파, 교육과 산업의 진흥 등을 주장하는 일대 민중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1904년의 갑진개화혁신운동이다.

 

나라가 일제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손병희는 모든 교회의 힘을 오직 독립에 결집시켜서, 전국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지방대표 500여명을 우이동 봉황각에 모아 7차에 걸쳐 독립정신고취를 위한 수련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일으킨 범종교적범민족적 운동이 바로 기미년 31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천도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손병희를 비롯한 수많은 간부들이 희생을 당하고, 교회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천도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이런 보국안민의 정신은 천도교 청년들에게 계승되어 민족자주 정신의 고양과 대중계몽을 위해 전개된 출판문화운동어린이운동을 비롯한 이른바신문화운동으로 승화되었다.

 

<동학농민군 무장포고문>

 

사람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는 인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니,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곧으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한 후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에 이를 수 있다.

 

지금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인효자애仁孝慈愛하시고 신명성예神明聖睿하시어, 어질고 정직한 신하가 보좌하면 요순의 풍화風化와 문경文景의 정치를 머지 않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신하들은 보국報國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녹위祿位를 탐하여 총명을 가리우고 아첨할 뿐, 충성으로 간하는 선비를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나쁜 무리라 하여 중앙에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지방에는 백성에게 사납게 하는 관리가 많다.

 

이에 인민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하여 들어가면 생을 즐길 직업이 없고 나가면 몸을 지킬 계책이 없어, 학정이 날로 심하매 원성이 계속하여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천륜과 상하의 분별이 무너져 남음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사유四維(禮義廉恥)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심함이 있는지라. 공경 이하로부터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기 몸만 살찌우게 하고 자기 집만 윤택하게 할 계책을 하여, 사람 뽑는 곳을 재물 생기는 길로 보며 응시하는 장소를 교역하는 시장으로 보아 허다한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자기 주머니를 채워, 나라에 누적된 빚이 있는데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짓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하여, 팔로八路가 어육魚肉이오 만민이 도탄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관리의 탐학이 진실로 이러하니 어찌하여 백성이 곤궁하지 않으리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우면 나라가 쇠잔하나니,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베풀어 오직 홀로 보전할 방법만 도모하고 한갓 녹위祿位를 도적질하니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보잘것없는 백성이나 임금의 토지에서 밥을 먹고 임금의 덕에 옷을 입으면서 앉아서 국가의 위태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팔로八路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億兆가 의논하여 이제 창의倡義의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으로써 사생死生을 같이할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나 절대로 겁내어 망동하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편안하여 한가지로 태평세월이 되기를 빌며 다 같이 임금의 덕화德化를 기뻐하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 호남창의소 전봉준손화중김개남

 

 

 

 

최제우

이름 최제우(崔濟愚)
초명 제선(濟宣)
수운(水雲)
생몰 기간 1824 1218 ~ 1864 415 (14364)
비고 동학교조(敎祖)

 

1. 소개

 

조선의 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 호는 수운(水雲)이며 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2. 생애

 

아명은 복술(福述)이었으며 30대 시절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로 개명하고 13살에 울산 출신의 부인 박씨과 결혼하여 꼬마 신랑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로는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녀었으므로 최제우는 재가녀의 자손이 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문과를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부친인 근암공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 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참고로 근암공은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당대 영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자에게 수학을 받았으나 가세가 기울고 양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결혼을 하며 먹여 살릴 식구가 생긴 수운은 생계 방편이 없는 몰락한 양반의 처지가 된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으므로 무과를 준비한 흔적이 보이나 곧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

 

이때 수운은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대영제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 듣고서 청나라가 대영제국에게 패배 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긴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높으신 분들에게 협의를 해보려 하었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수운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아예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수운은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왔다는 깨달음을 확고히 한다.

 

장삿일을 끝내고 1854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울산에서 지내며 철물점을 하다가 사업을 그르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인 경주시 용담으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 하던 어느 날,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의 말과 병을 고치는 부적 문양을 받는다.

 

동경대전에서 전하는 최제우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不意四月(불의사월)心寒身戰(심산신전)疾不得執症(질부득집중)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유하선어)忽入耳中(홀입이중)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 즉
曰勿懼勿恐(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世人(세인)謂我上帝(위아상제)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生汝世間(생여세간)敎人此法(교인차법)勿疑勿疑(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曰然則(왈연즉)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曰不然(왈불연)吾有靈符(오유영부)其名仙藥(기명선약)其形太極(기형태극)又形弓弓(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受我此符(수아차부)濟人疾病(제인질별)受我呪文(수아주문)敎人爲我則(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汝亦長生(여역장생)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수운은 자신의 이 신내림이 꿈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동학을 창시한다.

 

3. 최후

 

동학의 규모가 커지고 동학의 위협론 등이 폐쇄적인 영남 서원 사이를 오가면서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긴다.

이로 인해 18629경주시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탄원으로 인해 그해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하였다가 1864년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조정에 체포된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귀(鄭雲龜)이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시에 가까워 올수록 주문 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음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고 수운은 체포되어 과천까지 왔다가 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른 조정의 혼란 때문에 다시 대구광역시 경상 감영으로 이감되었다.

그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어서 41세 나이로 순교(殉敎)하였다.

오히려 타 학문에 대한 배척도가 심한 영남 지방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더 안 좋게 작용했을 수 있다. 이후 최시형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었다.

 

그의 사상은 증산계통 종교원불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증산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 최제우다.

 

 

 

 


동학

東學

 

 

1. 개요

 

1860 수운 최제우조선에서 창시한 종교. 현재 천도교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최제우가 <논학문>에서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하여 이름을 동학이라 한다.

 

흔히 동학 하면 바로 천도교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격히 말하면 천도교는 동학의 가장 직계 분파다.

천도교 외에도 시천교(이쪽은 일진회 못지않은 친일 종교), 제우교 등 많지는 않지만 여러 군소 분파가 존재하지만 매우 미미하다..

 

1.1. 창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경주 최씨, 어릴때 이름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었으며 후일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으로 제우(濟愚)라고 개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집안으로 아버지 최옥은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기운데다가 그의 어머니 곡산 한씨와 아버지와의 결혼이 재가었기에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사망한다. 13세 때 울산 출신 박씨와 결혼했으나 17세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결국 처가인 울산으로 옮겨간다.

울산으로 옮겨간 후 1855년 을묘년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와 자신은 금강산에서 왔는데 백일 동안 치성을 드리던 중 이상한 책 한권을 얻게 되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찾아다니던 중이라며 그 책을 최제우에게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을묘천서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으로 최제우는 1859년 다시 구미 용담으로 돌아와 입구에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 써서 붙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에 매진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비서를 기독교성경 혹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나, 주류 학계와 천도교 측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기독교와 동학은 차이가 분명하며, 당시 이미 널리 알려진 기독교계 서적을 굳이 비서로 왜곡할 이유가 없고 최제우는 울산으로 옮겨가기 전 3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갖가지 세상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후 부분은 천도교 문서 참조.

 

당시는 기독교는 물론이고 천주실의가 동아시아 전체에 알려진 상황이었고,(일반인을 위한 한글 번역본과 그 필사본도 있다.*) 청의 <천학초징 / 천학재징>, 일본의 <벽사관견록>, 한국의 <서학변>, <천학문답> 등 천주실의와 기독교를 비판하는 서적까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진 지 오래었다. 즉 천주실의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책이었던 것이다.

남학 계열에서는 그가 수도생활을 할 때, 조선 후기의 도사인 연담 이운규의 제자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최제우, 김일부(김항)남학의 분파인 정역(正易)의 창시자. 유교 중심적이다.

 

김광화(김치인) (남학의 다른 분파인 광화계의 창시자. 불교, 특히 미륵신앙 중심적이다.) 와 동문 출신, 혹은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것이며 시천주 주문 또한 이운규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셋의 연령 차이가 있고, 행적 역시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설은 부정되고 있다. 셋 모두 후천개벽을 자신들의 중심 사상으로 놓았던 점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이라는 동학을 창시하었고,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치고,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학이 서서히 퍼져나가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최제우와 그의 추종자들을 압송하여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시켰다.

 

1.2. 2대 교주 최시형의 교단 정비

최제우의 순교 이후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특히 동경대전 등 경전을 간행하면서 동학의 교단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시형의 시기에 포접제라는 제도도 새롭게 구축되었다. 그래서 동학은 최제우의 순교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교조 신원을 내세우면서 서서히 농촌 사회에도 파고드는 모습들을 보여줬다.

특히 1871년 일어났던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성격이 서서히 사회 개혁적인 모습도 띄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며 추후에 일어나게 되는 동학 농민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필제의 난은 진압 당했으나 동학은 역시 더 세력이 커지면서 1880년대에 이르면 삼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조 신원 운동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1892년 삼례에서 첫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93년에는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를 하였다. 그리고 펼쳐진 보은 집회에서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때부터 동학에서는 북접과 남접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접은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온건파 세력들이 이끌었으며, 남접은 전봉준 등 동학에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급진파 세력들이 이끌었다.

 

1.3. 동학농민운동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인해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동학교인들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외치면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은 성공을 거두며 전주성에 입성,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반일을 기치로 내세운 2차 봉기가 발생했으며, 이때는 그동안 관망 자세로 있었던 북접의 지도자들도 참가하게 된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후 남접의 지도자들은 대거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4. 동학 농민 운동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살아남은 북접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숨어 다니면서 동학을 포교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는 영학당이니 남학당이니 할빈당이니 하는 무장 조직에 많이 투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최시형이 처형당하고, 1901년 살아남은 핵심 지도부가 죄다 관군에 체포당하자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이 도움 하에 국내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여, 손병희는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하여 진보회를 만들게 하었고, 비록 진보회는 여전히 탄압 당했지만,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을 도왔던 점이 인정되어 일진회의 압박을 받고 대한제국 정부는 결국 동학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었으며 진보회는 일진회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을사조약에 대해 찬성했던 점이 계기가 되어서 교주 손병희와 이용구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서 손병희는 190512월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고, 이용구와 일진회를 천도교에서 제명시킨다. 이후 이용구와 일진회는 시천교를 만들게 된다.

 

1.5. 사이비 동학

안중근 의사가 젊은 시절 동학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이 있었는데, 지금 기준에서는 일종의 흑역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안중근 같은 양반 계층에서 보기에 신분 질서를 거스르고 항명하는 행위는 금기시 되었다.

 

즉 안중근 의사처럼 동학을 적대시하는 것은 당시 기득권층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만이 아니라 딱히 군기가 정비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농민 반란의 특성상 관군과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억눌림이 분노로 분출되며 그냥 양반이면 다 습격하고 재물을 뺏거나 양반집 여인을 겁탈하거나 외국인 상인을 공격하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원래 의의와 벗어난 행위지만 아는 양반집들이 약탈되며 나라를 뒤엎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원래 이기면 혁명이 되고 지면 폭동이 된다.

또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동학 지역 지도자로 활동했던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산적패가 동학군 이름을 사칭하고 약탈을 한 일도 많았으며 안중근 의사 집안이 토벌한 동학군은 대부분 이런 사이비 동학군이었다 한다.

다만 안중근의 자서전을 보면 안중근은 동학을 일진회와 동급의 매국 도적 집단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일진회가 동학의 분파로 시작하기도 했고.

 

1.6. 동학의 분파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설립한 이후, 동학 신도가 늘어나고 근대 시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동학도 여러 분파가 생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다들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동학은 창시자 최수운 - 최시형 - 손병희로 이어지는 교주 계승 관계가 확실하여, 천도교 외 교파들은 방계교단으로 분류된다.참조

 

천도교 - 동학의 정통. 해당 문서 참조.

 

수운교 - 승려었던 이상룡이 만든 교단. 창시자를 최제우와 동일인이라 주장하며, 창시자가 승려었던지라 불교 / 민간 신앙적 색채가 강하다.

흑역사로 1938진종 계통의 일본 불교와 함께 흥룡사(興龍寺)를 건립, 일본식 아미타불상을 설치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교주가 죽었으며 해방 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대전 광역시 유성구 자운대 근처에 본부가 있다.

 

상주 동학교당 - 1915년 동학의 남접주었던 김주희가 만든 종교 단체로, 옛 이름은 궁을도.* 인내천 / 시인여천을 주장하는 천도교와는 달리 한울님에 대해 유신론적인 관점을 가져 독립된 신으로서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교리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최제우의 뜻을 직접 이었다는 청림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교조 김주희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문제는 이 청림이라는 사람은 가공의 인물이며 동학가사에 김주희의 창작본을 최제우의 작품과 같이 넣는 등 천도교하고는 차이점이 많다.

참고로 상주 동학교당이 주장하는 청림이란 인물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힌 사람은 다름 아닌 상주 동학교당 창시자 김주희의 아들이다. 2014년도에 들어 교단의 적통을 내세우며 천도교 측과 마찰을 빚고 있다.

 

청림교 - 남정(南正)이라는 인물이 창시한 동학 분파. 은청림(隱靑林)과 현청림(顯靑林)의 두 파가 있다. 1933년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이족 역시 청림 선생이라는 인물이 자신들의 교주에게 도를 전하였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위의 동학 분파 중, 청림 혹은 남접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천도교와 별개로 행동하는 분파들은 하나같이 청림이라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정작 그 청림의 본명에 대해서는 다 말이 다르다.

 

주된 청림의 본명으로만 김시종, 김낙춘, 정시종의 셋이나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최수운이 최해월을 후계자로 정하면서 해월의 직함이 '북접주인'(혹은 북접()도주, 북접법현 등의 표현도 사용. 어느 용어든 북접이란 말이 들어간다.)이 되자, 후에 동학 내 분파 / 급진파들이 스스로 남접이라 이름 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접이란 말은 1879년대에 만들어진 동학 초기 기록부터 나오지만, 남접이란 말은 1894년 이후부터 등장하고, 그마저도 대부분 동학에 적대적이었던 관군이나 토벌군의 문헌 자료에서 주로 등장한다.

 

1.6.1. 흑역사 - 친일 교단들

제우교 -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원인 김유영이 만든 종교. 일본 관동군의 밀정 단체인 만주 보민회 활동을 하다 민간인들의 반발로 소멸하었고, 잔존 세력이 신앙의 대상을 미륵불로 바꾸면서 만든 단체가 대화교.

 

시천교 - 일진회 창시자인 이용구가 창시한 교단.

 

상제교(천진교) - 시천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 시천교의 간부었던 김연국이 만든 교단.

 

 

 

 

 

최시형

 

동학의 역대 교주
초대 최제우 2대 최시형 천도교 발전
이름 최시형(崔時亨)
해월(海月)
생몰 기간 1827~ 1898
비고 동학2대 교주

 

조선의 종교 사상가이자 동학2대 교주.

호는 해월(海月).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최제우와 동향(同鄕) 사람이다.


1827년 경주의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으며 초명은 경상(慶翔)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되어서 한때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을 하다가 1861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할 당시 최시형은 머슴으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다. 최제우가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골랐음을 보여주는 대목. 1864, 1대 교주 최제우가 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그 후임으로 동학 2대 교주가 되어 신도들을 이끌였다.

이후 태백산에 은신하여 포교활동을 하였고 경북 안동, 울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에 은신하였다. 1892년 교조의 신원, 동학 활동의 자유,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며 1893년 서울로 올라와서 동학 대표 40명을 통해 당시 임금 고종 앞에서 통곡하며 청원하여 고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으나 시행되지 않자 충북 보은에서 척왜 운동,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조정에서 충청 관찰사 등을 해임하자 최시형도 동학 교도들을 해산시켰다.

1894전북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엔 반대하였으나 전봉준,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크게 간청하고 그 밑의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하였다.

 

이듬해 전봉준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충남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관군 / 일본 혼성군과 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전북 장수 전투에서도 참패하자 몸을 숨겼다. 1898강원도 원주에 머물던 중 반역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때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한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고부 군수 조병갑이라는 것

[출처] 동학과 최제우|작성자 우리나라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