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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구인가? (128) >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동학, 천도교

< 우리는 누구인가? (128) >

柏道 2021. 8. 9. 08:37

김시완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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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구인가? (128) >
수운은 우주의 질서를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무작위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확고한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이를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또는 상대성 원리 또는 ‘불완전정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조물자는 다만 ‘기연’에 부쳐 보았을 때 해당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불연의 지기에 이르면 기연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기(至氣)와 천주(天主)의 결합은 결국 ‘불완전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불연기연(不然其然)° : 불연(不然) -> 알 수 없음, 기연(其然) -> 알 수 있음.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신마저 창조성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 없이는 혼돈이 아무런 방향도 가치매김을 할 수 없다.
정체된 질서란 있을 수 없으며 질서는 혼돈으로, 그리고 혼돈은 질서로 되먹힘해 나간다.
이렇게 질서와 무질서는 역동적으로 요동친다.
이를 ‘프랙탈’이라고 한다.
마치 두 거울을 마주 세우고 거울 속을 들여다 보면 반사의 반사를 되먹힘하듯이 자기언급을 반복한다.
이를 ‘맴돌이’라고 했다.
자기언급의 반복에서 새로움의 ‘신기성’이 만들어진다.
창조성(至氣)과 신(天主)는 이와 같이 자기언급적 프랙탈 관계이다.
그래서 신의 측면에서 보면 유신론이 성립되고 지기의 측면에서 보면 범신론이 성립된다.

유신론과 범신론은 프랙탈 현상을 만드는 관계이다.
세계가 승하면 범신론(汎神論) 이 되고, 신이 승하면 유신론이 된다.
이것이 동학의 주된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수운의 주문을 반복해서 암송할 때 궁극적으로 유신론과 범신론의 오류를 모두 동시에 극복하고 범재신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이 끊임없이 세계를 거울삼아 재귀적 맴돌이를 할 때 창조적 진보를 할 수 있다.
반복의 강도가 높을수록 새로움의 창조성이 생긴다.
신(天主)과 창조성(至氣)은 서로 포섭되는 관계에 있으나 종속되지는 않는다.
지기 속에는 순수 영원대상에서 오는 ‘명(命)’과 그 명이 사물에 닿아 스며든 ‘섭(涉)’이 서로 간섭을 한다.
간섭은 부분과 전체가 되먹힘하는 홀론 현상을 만들며, 이 홀론 현상이 다름 아닌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배경이 된다.
이것은 동학사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홀론(holon) : 부분으로서 전체의 구성에 관여하는 동시에 각각이 하나의 전체적ㆍ자율적 통합을 가진 것.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창조란 혼돈의 무정형적(無定型的)인 늪에서 안정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이 혼돈 위에 군림하여 빛으로 혼돈의 흑암을 파괴하고 천지를 창조한다.
창조의 주도적 역할은 오직 신이 할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나 화이트헤드는 높은 질서가 나타나는 데는 낮은 질서가 사전에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동학 #천도교 #불연기연 #창조성 #유신론 #범신론 #혼돈 #

< 우리는 누구인가? (127) > 신이 수운을 만나려고 수만년 동안 애타게 기다린 것은 환웅(桓雄)이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생각하고 기다린 것과 같다. 신은 이 세계를 물리적 감응을 하려고 그렇게 기다렸던 것이다. 신의 이상과 꿈은 영원대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속에 있다. 화이트헤드가 신도 다른 존재들과 같이 사실존재로서 창조성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 이는 수운이 신도 기접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도 존재의 원리와 과정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도 되어가는 님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은 이러한 성육신(成育神)의 과정을 시천(侍天)·양천(養天)·체천(體天)의 과정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 실천방법으로 성(誠)·경(敬)·신(信)을 손꼽고 있다. 성육신이란 신과 인간이 정드는 것이다. 세계와 신은 같은 기에서 온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포함(包含)되어 버린다. 녹문 임성주는 고기가 물속에 있지만 고기 속에도 물이 있다. 이와 같이 신이 인간을 만들었지만 그 인간 속에 신이 들어 있다. 인간은 신에게 불복종할 수 있으며, 다시 신은 자기가 만든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의 손에 사로잡히며, 다시 신이 인간을 이긴다. 이를 신인(神人) 상교상쟁(相交相爭)이라 한다. 동학의 무체법경해의(無體法經解義)에서는 세계사를 신과 인간의 각축장으로 보았다. 신이 승(勝)하면 신이 지배하고, 인간이 승하면 인간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성서>에서 야곱이 신과 압복 강가에서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하듯이 말이다. 기독교의 전통신관 가운데 가장 위협받고 있는 부분은 창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티마우스’에서 Demiurge°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여 무엇을 짓는 행위를 한다. 혼돈이란 상태가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무란 없다. * Demiurge° : 세계를 형성하는 자, 데미우르고스(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 신도 세계와 같은 기(氣)로 받은 재료로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순간은 없다. 있다면 일자와 다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합생(合生, concrescence)으로서 ’한 처음‘이 있을 뿐이다. ‘한 처음’이란 ‘천부경(天符經)’에서 말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의미한다. 신이 세계에 앞서가는 그러한 시간적 시원(始原)이란 결코 없다. 그래서 제일원인도 그리고 효능인도 없다. 기접자는 모두 자기창조를 할 뿐이다. 그런데 무시무종의 ‘한 처음’이 기(氣)에 천주(天主)가 명(命)을 부여함으로써 질서가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천주 역시 지기의 기접자에 불과하다. 수운과 화이트헤드에게는 신도 사물도 기접자이며 사실존재이다. 신은 ‘그 안에 신령이 있어서(內有神靈)’ 있다고 했으며, 화이트헤드는 이를 ‘시원적 본성(primordial Nature)’이라 했다. #동학 #천도교 #환웅 #시천 #양천 #체천 #플라톤 #천부경 #천주 #내유신령

< 우리는 누구인가? (126) > 기(氣)를 접하려고 하는 열망이 주관목적이다. 논학문(論學文)에서 “밖으로 영(靈)과 접(接)하는 기운(氣運)이 있고, 안으로는 강화(降話)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때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內有降話之敎)”이 주관목적이다. 수운에게 지기의 涉(섭)과 命(명)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도 사실존재와 영원대상은 창조성 속에서 두 얼굴과 같이 분리될 수 없다. 율곡 이이의 경우도 기(氣)와 이(理)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대상이 사실존재에서 분리되어 독립(獨立)된 상태로는 잠시도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영원대상이 사실존재에 다 ‘귀속되는(reducible)’ 것도 아니다. 사실존재에 의해 제한은 받으나 제약은 받지 않는다. 제한을 받음으로써 영원대상은 구체적이 된다. 그러나 제약은 받지 않기 때문에 사실존재에 새로움을 영속적으로 더해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eternal)’하다. 포섭(包攝)은 되나 종속(從屬)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를 ‘존재의 원리’ 또는 ‘상대성의 원리’라고 한다. 이렇게 간섭하는 것을 수운은 ‘無事不涉(무사불섭)’이라 했으며, 제약받지 않는 것을 ‘無事不命(무사불명)이라고 했다. 수운은 성리학의 틀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이(理)를 ‘천주(天主)’로, 그리고 ‘지기(至氣)’도 천주의 신령함이 거기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산 정약용이 그의 신을 서학(그리스도교)에서 가져왔고 그것을 고대유학의 전통에 연관시켰기 때문에 폭발적인 힘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수운은 반서학적(反西學的)이고 원시적인 민족의 고유한 무층(巫層)과 선층(仙層) 속에서 사상을 발굴해 냈기 때문에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공자보다 오래된 아니 공자가 파기한 원시 무속적인 것과 풍류도적인 요소들인 선적인 요소들을 모두 발굴해 자기 속에 용해해 버렸던 것이다. 공자도 다시 살려면 수운이 그러했던 것처럼 몸이 춥고 떨리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신들려야 나라가 산다. 그리고 하는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이 다시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더 위력을 갖는 이유는 그가 더 오래된 기적이나 주술 같은 원시적인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서슴없이 기적으로 병도 고치고 자기 자신이 바로 기적이 되었다. 수운의 경우 신(神)도 다른 개물(個物)들과 같이 ‘기접자(氣接者)’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신은 다른 만물과 아무런 차별이 없다. 스피노자는 자연을 그대로 신이라 했다. 수운의 경우 지기는 전체로서의 자연이다. 그러나 기접자에 의해 기는 개별적이 된다. 신(神)도 수운을 만나려고 수만년 동안 애타게 기다렸다 한다. #동학 #천도교 #영 #강화 #야누스 #상대성 #스피노자 #다산 #공자 #유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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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구인가? (123) > 신 없이는 무의미와 무질서로 남겨져 있던 창조성이 신을 통해 의미를 찾고 질서를 회복한다. 그래서 창조성(創造性)과 신(神)은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 그리고 우월하고 월등한 그러한 관계가 아니다. 수운에게는 지기(至氣)와 천주(天主)의 관계가 그러하다. 신(神)이 창조성(創造性)의 피조물(被造物)이라고 해서 결코 신이 창조성에 대하여 열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성도 신 없이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자의 말을 빌리면 “대도(大道 : 창조성 또는 지기)”는 “낳고도 소유하지 않으며(生而不有)”, “공을 이루고도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 도덕경 제2장)”고 했다. 창조성은 노자의 ‘대도’ 같이 ‘하’고도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한다. 그래서 하지 않음이 없기에 아무런 함이 없이 보여서 무력한 것 같다. 수운이 신을 무위이화(無爲而化) 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라고 할 때 이는 이러한 ‘대도(大道)’의 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운은 허령창창(虛靈蒼蒼)의 지기(至氣)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바로 어디에나 스며들지 않는 데가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과 어디에나 명령하지 않는 데가 없다는 ‘무사불명(無事不命)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기능은 서로 상반된 기능이다. 전자는 질서가 ‘부여되는(imposed)’ 기능이고, 후자는 ‘부여하는(imposing)’ 기능이다. 동서양은 그들의 사상사에서 어느 한 쪽을 상실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잃은 역사를 빨리 다시 찾는 길만이 미래를 향도해 나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밖에 어디 다른 대안이 우리 앞에 있는가? 서양에서 상실한 것 그리고 동양에서 상실한 것을 동학은 절묘하게 조화시켜 21자 주문(呪文) 속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허령창창(虛靈蒼蒼)한 지기(至氣)에 천주(天主)가 인격성을 불어넣어 사실세계가 생성된다. 그러나 그 천주(天主)마저 지기(至氣)의 생산물이다. 그래서 창조적 과정은 창조성과 신의 혼합물이다. 수운은 이성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며, 지기(至氣)와 천주(天主)의 통일이 주문(呪文)에 의한 종교적 행위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무질서한 아난케에 질서를 부여하여 제어하는 것을 ‘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바로 ‘영원대상’이라 했고, 성리학은 ‘理’라고 했으며, 수운은 ‘命’이라고 했다. 화이트헤드의 영원대상은 ‘순수 가능태’로서 객관적 불멸의 실질적 가능태와 쌍벽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무엇이 ‘된’다고 할 때 두 가능태가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됨됨’이라고 한다. 영원대상이 사실존재와 만나 구체화하여 어떤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됨됨’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아난케 : 그리스로마신화의 태초의 신들 중 하나이자 필연적 운명의 강제력을 의인화한 여신 #동학 #천도교 #창조성 #지기 #천주 #도덕경 #대도 #주문 #플라톤 #아난케

< 우리는 누구인가? (122) > 창조성은 우리말 ‘하’로 이해하면 쉽다. 공부‘하’다와 같이 구체적인 작용이 있기 전의 작용 그 자체로서의 작용성 ‘하’가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로 ‘연결적(conjunction)’이 되는 ‘한’의 작용으로서 ‘하(doing)’와 같다. ‘다자가 일자가 되며 다자가 다시 일자에 의하여 증가되어 나가는’ 작용 그 자체로서 ‘하’를 통해서만 창조성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창조성은 전후좌우 또는 처음과 끝이 없는 작용을 하는 한편 동시다발적 ‘합생’ 작용도 한다. ‘창조성의 피조물’이 신이라고 할 만큼 창조성은 능동적이다. 한국어에서 ‘하’는 스스로 피동형(被動形)으로도 또는 능동형(能動形)으로도 쓰이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하는님’은 능동자이기도 하고 또한 피동자이기도 하다. 신을 ‘하는님’이라고 할 때 바로 신이 창조성의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성을 제어하는 능동적 동작을 뜻한다. 마치 빛이 자기 매개적이듯이 신은 그러하다. 빛이야말로 ‘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 빛의 질량은 ‘0’으로 제 자신의 속성이란 없다. 그래서 능동적일 수 있다. 창조성이 형이상학적인 궁극(窮極)이긴 하지만 사실존재를 떠나서는 결정적인 성격을 결여하게 된다. 그래서 수운이 ‘지기(至氣)’를 ‘금지(今至)’에 대비시켰던 것이다. 만약 ‘지기’가 ‘금지’되지 않으면 지기는 어떤 것으로도 결정되지 못한 비결정적인 상태로, 그리고 아무런 목적도 없는 단순한 에너지의 상태로 남게 된다. 수운은 존재(存在)자체(自體)를 ‘지기’라 했고 이러한 존재자체인 지기에 접한 자를 ‘기접자(氣接者)’라 한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사실존재’와 같다. 신도 사실존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신도 기접자이며, 이를 수운은 ‘천주’라 한다. 그런데 수운은 궁극적이고 순수한 지기가 사실존재로 기접되기 위해서는 천주가 있어야 하고, 화이트헤드는 ‘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기본 구도상으로 볼 때 성리학이 인격신을 배제시켰으나 신의 위상만은 남겨 놓은 이유를 알게 된다. 즉 ‘무극(無極)’은 ‘지기(至氣)’ 또는 ‘창조성(創造性)’과 일치하고, 태극(太極)은 ‘천주(天主)’ 그리고 ‘God’의 자리와 위상이 같다. 지기(至氣)는 금지(今至)를 떠나서는 안 된다. 지기는 금지에 의하여 구체적이 된다. 지기와 금지는 상호 만들고 만들어지는 순환관계에 있다. 수운의 경우 신(神) 역시 지기(至氣)가 금지에 의하여 기접자가 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사상이 앞으로 궁극적인 ‘인내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금지(今至) 없는 지기(至氣)는 한갓 목적성 없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동학 #천도교 #창조성 #형이상학 #형이하학 #우주 #인격신 #사실존재 #인내천 #성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 (121) > 어떻게 기(氣)가 무사불섭(無事不涉)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그것이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특수한 특징이 없는 존재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눈의 망막이 제 자신의 성격이 없기 때문에 사진의 네거티브와는 달리 어느 장면이든지 촬영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자기 자신의 특수한 성격이 없다고 한 것이다. 수운이 ‘허령창창(虛靈蒼蒼)’이라고 한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수운이 무사불섭이라 한 것은 일관성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기(至氣)는 스스로 존재(存在)하며 스스로 창조(創造)하기도 한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도(道)를 ‘유물혼성 선천지시(有物混成 先天地始(生)-도덕경 제25장)라고 했다. 또 현지우현 위지중묘지문(玄之又玄 謂之衆妙之門-도덕경 제1장)이라고도 했다. 혼돈(混沌)으로 천지(天地)보다 먼저 있고 그러나 동시(同時)에 만물(萬物)이 거기서 나온다는 뜻이다. 순수 자체권은 ‘제 자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 안이 ‘텅 비어(vacuity)’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는 ‘무(無)’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만물이 동시에 거기서 나와야 한다. 그래서 텅 비어 있어야 하면서 동시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허령창창’이라고 했다. ‘허령(虛靈)’은 텅 비어 있음을, 그러나 ‘창창(蒼蒼)’은 초목이 무성해 가득 참을 동시에 역설적으로 나타낸다. 그래서 노자는 ‘유물혼성(有物混成)’이라고 했던 것이다. 유(有)와 무(無)가 섞여 있다는 뜻이다. 도덕경 제1장에서는 ‘이 둘이 같은 데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이다’고 했다. 20세기는 서양사상사에서 ‘신’이나 ‘존재’ 같은 개념이 인플레이션 되어 마치 나무가 제 무게에 못 이겨 가지가 부러지는 과부하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모조리 비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배 안의 짐들을 먼저 버려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Being을 사건(Event, Ereignis)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수운이 ‘기(氣)’에 ‘지(至)’를 더한 이유도 ‘기’가 이미 인플레이션 되었기 때문이다. ‘지기(至氣)’ 다음 주문의 글 ‘금지(今至)’에서 금지는 ‘지금 여기’에 창조성이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것으로 제한되고 한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주문은 만권시서가 무색할 정도로 그 속에 형이상학적인 많은 비밀을 담고 있다. ‘지기’의 ‘至’와 ‘금지’의 ‘至’는 같은 글자이지만, 전자가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이라면 후자는 그 반대인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이다. 전자는 한없이 ‘비결정’인 것으로 추상화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결정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수운은 이와 같이 말의 운을 고려하여 주문을 만든 것이다. #동학 #천도교 #허령창창 #무사불섭 #도덕경 #허령 #창창 #주문 #형이상학 #창조성

< 우리는 누구인가? (120) > 구리선은 전류(電流)를 전달한다. 그러나 구리라는 존재(存在)가 있기 때문에 전류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또한 방해를 한다. 이를 존재의 몫이라고 한다. 허령창창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한 것이다. 도가(도교)나 불가(불교)사상에서 ‘허령창창’을 찾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동양사상 전반에 걸쳐서 존재자체를 ‘무(無)’ 또는 ‘허(虛)’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같은 것이다. 일단 ‘유(有)’라고 하면 영락없이 존재의 몫 또는 값을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와 존재자체의 문제는 또한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신론자들은 존재를 항상 신(神)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의 눈으로 볼 때 불교나 대부분의 동양(東洋) 종교(宗敎)를 ‘무신론(無神論)’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양종교가 존재(存在)를 부인하고 존재자체(存在自體)를 궁극적(窮極的) 실제(實題)로 보기 때문이다. 존재와 존재자체가 때로 충돌한다는 이유도 다름 아닌 이 문제가 유신론과 무신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神) 죽음의 신학자’들이 존재로서의 ‘God’의 죽음을 선언하고, 불교의 ’무(無)‘나 ’도(道)‘ 같은 개념을 찾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자체(存在自體)는 늘 수운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불연기연(不然其然)으로 불확실(不確實)하고 유동적(流動的)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존재자체는 ‘생성(生成 - Becoming)’과 일치한다. 『불연기연(不然其然) ->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의 일부임.』 불교나 동양사상에서는 아예 신(神)과 같은 존재를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존재(存在)는 과부하(過負荷) 현상을 초래하고, 이는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神)이 없다면 전선(電線) 없는 전류(電流)와 같아서 어떻게 작용(作用)하는 힘이 나올 수 있고, 어떻게 방향성을 가질 수 있으며, 다시 신기성(新奇性)을 가능하게 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인 문제 때문에 철학자들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제>와 <종교론>에서 신을 ‘사실존재(事實存在)’라고 했으며, 그런 면에서 신(神) 이외의 것들도 모두 사실존재이다. 여기서 수운은 신(神)이 ‘모든 일에 간섭(干涉)하지 않음이 없다(無事不涉)’는 말로 대답한다. 기(氣)는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다. 만약 기(氣)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특징 만큼은 다른 것에 스며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존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운은 ‘허령(虛靈)’이라고 먼저 말한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道)란 “낳으나 소유(所有)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도(道)는 자기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학 #천도교 #구리 #전류 #존재 #유신론 #무신론 #불연기연 #소유 #과부하

< 우리는 누구인가? (119) > 동양에서는 하·은·주 초기에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인격적(人格的) 신(神) 상제(上帝)를 상실하고, 창조성(創造性)에 해당하는 범천적(汎天的) 또는 범신적(汎神的) 요소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중국과 달리 면면히 하는님 신앙(信仰)이 이어져 왔으며, 조선시대 말부터 실학자(實學者)들의 손에 의하여 인격신(人格神)이 되찾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물론 서교(그리스도교)의 자극이 하나의 촉매역할을 했을 것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다산(정약용)이 서교의 신관을 유교적 시각에서 그대로 수용한 데 대하여 수운은 서교의 신관에 ‘지기(至氣)’가 빠져 있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발견한 뒤 드디어 두 주문(呪文)인 강령주문(降靈呪文)과 본주문(本呪文))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창조성(創造性)인 ‘지기(至氣)’와 신(神)인 ‘천(天)’이 동시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와 수운의 사상은 크게 일치한다. 화이트헤드가 God에 대하여 Creativity를 첨가해 말한 것은 궁극적으로 수운이 지기(至氣)에 천주(天主)를 더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4대 구성요소는 신(神)·창조성(創造性)·사실존재(事實存在)·영원대상(永元大象)이다. 비교종교학자들은 ‘이들 4대 구성요소들을 다 갖춘 사상체계는 아마도 화이트헤드와 수운의 사상이 유일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물론 수운의 주문(呪文) 속에 4대 구성요소들이 다 들어 있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주문이란 특성 때문에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운 다음에 발전된 동학사상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이들 구성요소들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그의 짧은 주문 속에는 많은 철학적 내용들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운의 사상 역시 한국의 사상사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수운 이전의 다산(정약용)과 율곡(이이) 사상 등은 수운을 이해하는 데 그 배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동양종교와 철학의 역사에서 기(氣)를 예배(禮拜)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없고, 더욱이 천(天)을 신비체험(神祕體驗)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없다. 수운은 바로 존재(存在)와 존재자체(存在自體)를 구별하면서도 이 둘을 종교체험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수운은 기(氣에) 지(至)를 첨가하고, 천(天)에 주(主)를 첨가함으로써, 전통 기(氣)나 천(天)의 개념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려 했던 것이다. ‘기(氣)’에 ‘지(至)’를 첨가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더 철저하게 기(氣)를 비인격화(非人格化)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와는 반대로 ‘천(天)’에 ‘주(主)’를 첨가한 것은 천(天)을 더 철저하게 인격화(人格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수운의 주문 속에는 철저한 인격화(人格化)와 비인격화(非人格化)가 동시에 양 방향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이 점에서 수운 사상의 특징이 있고 동시에 독창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氣)에 지(至)가 붙은 의미는 지기(至氣)를 수운이 해석하는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기(氣)’란 ‘허령창창(虛靈蒼蒼)’하다고 했다. 그 속에 아무런 내용물이 없는 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과정신학자 #동학 #천도교 #창조성 #실학자 #정약용 #이율곡 #사실존재 #영원대상 #지기 #천주

< 우리는 누구인가? (117) > 그래서 기(氣)와 같아진 하날님(한울님)은 만물 속에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으며, 무엇이나 명(命)하지 않는 것이 없다. 19세기 말 수운이 짊어지고 있었던 사상적인 짐은 바로 비인격적인 존재자체와 인격적인 존재를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있었다. 융에 따르면, 카오스(chaos)는 여성원리로서 ‘자연(nature)’, ‘생명’ 같은 것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코스모스(cosmos)는 ‘역사’와 ‘인간’으로 상징된다. 수운이 18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서학(천주학)과 서교(천주교)의 소식도 듣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관찰한 결과 바로 유도(儒道)도 불도(佛道)도 그리고 서교(西敎-그리스도교)도 역사와 자연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결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신년(庚申年) 체험 이후 그 경험의 내용을 주문화(呪文化)하여 21자 속에 함축(含蓄)시켜냈던 것이다. 현대과학의 프랙탈(fractal) 이론에 따르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되먹힘하여 ‘캐오스모스(Chaosmos)’ 또는 코캐오스(Cochaos)’를 만든다고 ‘들레쥐’ 같은 학자는 주장한다. 서로 양립(兩立)되는 개념은 서로 되먹힘을 한다. 서교(천주교)는 이러한 신관의 되먹힘 현상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동학(東學) 주문(呪文) 21자는 동학사상의 진수와 같으며, 이 21자 속에 동학사상의 큰 줄거리가 다 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문 속에는 온갖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은 1861년 11월에 관의 눈을 피해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 피신한다. 전라도로 피신 전까지는 ‘지기(至氣)’란 아직 ‘천주(天主)’에 미치지 못한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피신을 계기로 ‘천주’ 보다는 ‘지기’가 더욱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수운은 서학을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서양의 위력 그 자체가 바로 천주를 믿는 데 있다는 사실에 그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서학(그리스도교-서학-천주학)은 천주를 위하는 흔적도 없고, 가르침도 없다고 했다. 수운이 서학의 천주를 비판하는 배경에는 바로 천주가 존재자체인 지기(至氣)를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학을 향해 소총이 아닌 대포를 쏜 것이다. 서학의 신(神)에는 기(氣)로 저절로 화(化)하는 신(神)이 없다는 것이다. 서학의 천주가 하늘 위로 초월(超越)하기는 했으나 땅으로 내려와 사람 몸에 기(氣)로 변해 들어오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포덕문(布德文)’에서는 신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타자적인 것이었지만 ‘논학문(論學文)’에서는 안에서 들려온다. “밖으로는 영(靈)과 접하고, 안으로는 강화(降話)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즉 보신적이다. 포덕문에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떨리지만 논학문에서는 몸만 떨리고 마음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 된다(吾心卽汝心也)”고 했다. 즉 법신적(法身的)이 된다는 것이며, 이런 법신적인 것을 두고 존재자체(存在自體)라 한다. #동학 #천도교 #수운 #카오스 #코스모스 #역사 #인간 #은적암 #포덕문 #논학문

< 우리는 누구인가? (116) > 수운이 말한 기(氣)에 대한 이해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수운의 기(氣) 이해는 득도(得道)의 세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氣) 역시 전분별적(前分別的-아직 분별이 생기지 않은 상태의 混)인 기에 대하여 ‘허령창창(虛靈蒼蒼)’이라고 했다. 분별적(分別的-기가 만물 속에 스며들어 기가 뚜렷한 물체의 형상을 지니게 됨. 구체화 한 상태 涉)인 기(氣)에 대해서는 ‘모든 일에 스며 관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든 일에 명(命)하지 않는 것이 없다(무사불섭 무사불명 無事不涉 無事不命)’고 했다. 초분별적(超分別的)인 기에 대하여는 ‘드러날 듯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듯하면서도 드러난다.(연이여형이난상 여문이난견 시역혼원지일기야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고 했다. 혼(混)은 분별상이 생기지 않은 것이고, 혼(渾)은 분별상이 생긴 다음에 다시 융합(融合)된 초분별의 혼돈(渾沌)이다. 이 세 과정의 기를 요약하면 混(혼) -> 涉(섭) -> 渾(혼)과 같다. 두 가지 ‘혼’은 모두 한자 글자 모양에서 ‘물(氵)의 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서양의 ‘혼돈(Chaos)’은 항상 물로 상징된다. 예를 들면 중용에서는 ‘동(同)’과 ‘화(和)’를 구별하여 ‘화’하나 ‘동’하지 않는다고 하여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다. 여기서 ‘동(同)’은 전분별적 ‘혼동(混同)’을, ‘화(和)’는 초분별적 ‘혼돈(混沌)을 의미한다. ‘화(和)’란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벼를 입으로 먹어 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쌀이 소화되어 몸의 일부분이 됨으로써 몸과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는 상태이다. 수운은 ‘논학문’에서 기(氣)의 세 종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과정의 기 개념으로 볼 때 ‘기(氣)’와 ‘지기(至氣)’의 구별은 분명해진다. ‘혼(混)’이 ‘섭(涉)’과 ‘명(命)’의 과정을 거치면서 ‘혼(渾)’이 된다. 따라서 ‘지기(至氣)=혼원일기(渾元一氣)’의 등식관계가 된다. 기(氣) 개념의 삼단계 발전과정이란 다름 아닌 ‘혼동(混同)’의 기에서 ‘혼돈(混沌)’의 기로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동(同)의 기(氣)에서 화(和)의 기(氣)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학에 이르러 기(氣)는 지기(至氣)가 되며, 만물 속에 제 모습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氣)가 ‘하는님’과 만나 인격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운의 지기(至氣)란 기(氣)가 세 번째 과정, 즉 초분별적 과정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수운도 지기란 ‘지극(至極)함’이라고 했다. 지극함이란 기가 만물 속에 스며들어 기가 나타나 명하지 않는 것이 없는 상태여서 만물과 기 사이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분리될 것 같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관계이다. 그리고 하는님과 기가 하나가 되어 만물 속에 하는님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해월의 새소리 그리고 베짜는 여인이 모두 하날님, 즉 한울님이 된다. “사람과 물(物)이 같이 살아 숨 쉬는 것(人與物之瑞息-인여물지서식)”이며, 모두가 하날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 #천도교 #수운 #득도 #혼돈 #카오스 #지기 #지극 #혼원일기 #하는님

< 우리는 누구인가? (115)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기(氣) 개념은 화담으로부터 녹문과 혜강을 거쳐 점차 연인격적으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화담 서경덕과 녹문 임성주 그리고 혜강 최한기는 모두 수운(水雲)이 나타나기를 준비하는 전령자(傳令者)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는 수운의 기철학(氣哲學)을 본격적으로 말할 차례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경대전(東經大全) 논학문(論學文)에서... 曰洋學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運則一也 道則同也 理則非也(왈양학여사이유리 여주이무실 연이운칙일야 도칙동야 리즉비야) ‘양학(서학/그리스도교)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고 하셨고, 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西人 言無次第 書無皂白而 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如思無呪 道近虛無 學非天主 豈可謂無異者乎(왈오도무위이화의 수기심정기기 솔기성수기교 화출어자연지중야 서인 언무차제 서무조백이 돈무위천주지단 지축자위신지모 신무기화지신 학무천주지교 유형무적 여사무주 도근허무 학비천주 개가위무이자호)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요,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니라.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시며 양학(그리스도교)은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고, 주문(呪文)이 없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의 인격(人格) 신관(神觀)에 ‘기(氣)’가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기(氣)는 신의 비인격적(非人格的) 요소이다. 서구화와 함께 전 세계가 지금 비인격적인 영성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런데 동양의 비인격적인 요소와 서양의 인격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나타난 것이 동학의 21자 주문(呪文)인 것이다. 이 부분을 두고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말했다. “전 세계의 모든 종교는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동학(東學)으로 귀일(歸一 하나로 돌아간다)한다.”고... 수운은 ‘기(氣)’ 대신 ‘지기(至氣)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수운은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지기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왈지자 극언지위지 기자허령창창 무사불섭 무사불명 연이여형이난상 여문이난견 시역혼원지일기야) ‘지(至)’라고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것(終焉-종언)’이라는 뜻이다. ‘기(氣)’라는 것은 허령창창하여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일에 명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이 있는 것 같으나 형용하기 어렵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나 보기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하날님의) 한 기운이다. #동학 #천도교 #화담 #녹문 #혜강 #기철학 #무위이화 #도올 #지기 #혼원

< 우리는 누구인가? (114) > 동북아문화권 일대에서 특이하게 발견된 ‘기(氣)’ 개념은 가장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또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기’는 자연환경과 인간이 평화롭게 조화될 수 있는 지역에서만 발달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동북아 일대의 지역에서만 유행했던 것이다. 도가(道家)에서 말한 기는 유무개념이 관련되면서 실체론적으로 되었으며, 기가 허무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기는 종교적이며, 경(敬-공경)을 통해 상제(上帝)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지기를 성(誠)·경(敬)·신(信)함으로써 천주(天主)인 하날님을 알 수 있다고 한 것과 상통한다. 화담은 깨끗하고 모양도 없는 태허(太虛)를 ‘선천지기(先天之氣)’라고 보았으며, 그 것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초월해 있다. ‘소리도 냄새’도 없으며 경험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화담은 기를 유무로 표현하지 않고 ‘모아지고 흩어지는 것’이라는 동사로서 ‘취산(聚散)’이라고 했던 것이다. 화담의 기는 주자(朱子)의 기(氣)같이 이(理)에 의하여 조종 받는 것이 아니라 기는 그 자체의 능력에 의하여 스스로 조직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기자이(氣自爾)’라고 했다. ‘기(氣) 밖에 이(理)가 없다. 이란 기의 주재(主宰)다. 주재란 밖에서 나와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가 그 까닭의 정당성을 잃지 않는 것을 가리켜 주재한다고 한다. 이는 기보다 앞설 수 없고, 기가 처음이 없으니 이도 처음이 없다. 만일 이가 기보다 앞선다고 하면 기가 처음인 것이다.’ <화담집> 권 2 화담은 선천지기는 스스로 자기원인적(자기언급적)이라고 한다. 화담의 선천지기는 수운의 지기이다. 화담은 “비록 미세한 한 포기의 화초나 한 그루의 나무에도 기가 흩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18세기의 기철학자이셨던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년~1788년) 선생께서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에는 단지 하나의 신이 있을 따름이다. 하늘에 있어서는 그 능히 쉬지 않고 운행하며 만물을 낳는 것이 이것이요. 땅에 있어서는 그 능히 하늘의 베품을 이어 만물을 기르는 것이 이것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그 능히 자신의 몸을 주재하여 다양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조수가 능히 달리고 날아가며 도망하고 치닫는 것, 초목이 능히 피고 지고 꽃 피우고 시드는 것, 기물이 능히 닫히고 열리며 이루어지고 부서지는 것에 이르기까지도 이 신이 하는 것의 골자가 아님이 없다.’ <녹문집> 권 4 녹문선생께서 ‘풀과 나무에 꽃이 피고 지는 이 모든 것을 생의로서 신의 작용이라고 본 것’은 나중에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최시형)선생께서 ‘새 울음소리도 하날(한울)님의 소리’라고 한 말의 예비적 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아무튼 수운 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녹문선생께서는 수운의 기 개념의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선생의 기(氣) 사상도 또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동학 #천도교 #화담 #서경덕 #테허 #선천지기 #취산 #기자이 #임성주 #최한기

< 우리는 누구인가? (113) >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는 인격신에 대한 표현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시경’ ‘대아편(大雅篇)’의 “하늘이 사람을 낳았다”를 비롯하여 신의 인격성은 유대교 경전을 방불하게 할 정도로 ‘상제(上帝)’라는 이름으로 인격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격신도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공자나 노자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질시(疾視)받기 시작한다. 도(道)는 다시 11세기 송명대(宋나라와 明나라)에 들어와 ‘이(理)’와 ‘기(氣)’ 같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송명대에 들어와 기론자(氣論者)들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 하고, 이론자(理論者)들은 이(理)로써 설명하려 한다. 인격신을 배제하고 이런 비인격적인 개념들로 기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무한퇴행(無限退行)의 오류를 만나게 되며, ‘아(A)형의 논리’ 아니면 ‘에(E)형의 논리’에 의하여 결국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동학은 바로 인격 신관의 문제점과 비인격 신관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아(A)형논리 : 부분의 합이 전체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논리이다. * 에(E)형논리 : 전체가 자기 자신을 부분의 한 요소로 포함한다는 논리이다.』 동북아시아의 유가(유교儒敎)와 도가(도교道敎)는 모두 ‘역(易)’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역에서는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낳고, ‘음양’이 ‘사상(四象)’을, 그리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했다. 차축시대(춘추전국시대)의 공자는 역의 태극을 궁극자로 보았고, 노자는 도를 궁극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공자와 노자는 모두 인격신을 배격하고 말았다. 공자 자신이 인격 신관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그 영향은 후대에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비인격적 개념으로 대표적인 것은 ‘천(天)’, ‘도(道)’, ‘기(氣)’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기’는 가장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손꼽힐 수 있다. 노장사상에서 발달되어 신유학에 전달된 기 개념에서 인격신 개념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수운에게 와서 인격과 비인격은 절묘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유일신·인격신에 집착한 나머지 죄의 회개 그리고 인격신에 대한 예배와 찬양을, 그리고 불교는 범신론의 범아일체적인 명상 수련과 깨달음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어디 있냐? 그런 거 안 믿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도 없다. 한 번 뿐인 인생 잘 살다 가면 그만이지 그 딴 거는 왜 믿느냐!”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신이 있다. 없다’는 논쟁을 하기도 하며, 더러는 신이 있다면 증명을 해 보라고 한다, 그런데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는 신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은 대체로 유일신인 인격신이라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고, 전지전능할 뿐만 아니라 선악을 구분 짓고, 상벌을 내리는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동학 #천도교 #차축시대 #시경 #서경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 #범신론 #전지전능 #명상

< 우리는 누구인가? (112) > 한마디로 말해서 도의 인격화는 도의 통속화(通俗化) 또는 타락화(墮落化)라 할 수 있다. 도의 과부하(過負荷)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노자의 자어상위적(自語相違的) 역설은 이러한 통속화를 예고하고 있다. “신장(身長)은 구척이고 황색을 하고 있으며, 새의 부리에 높은 코를 하고 있다. 금과 옥으로 지은 집에 사는데 백색의 은으로 계단을 만든다.”는 노자에 대한 묘사는 통속화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하는 덕(德)에 어긋나는 것이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상(思想)과 거리가 먼 것이다. 동학(東學)은 이러한 도교의 통속화를 극복하고, 기(氣)의 소유권에 묻어 있는 기의 자체권을 회복시켜 ‘지기(至氣)’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인격신을 천주(天主)라고 하여 인격과 비인격의 조화를 잘 이루어 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도가(道家) 사상(思想)은 근본적으로 유가(儒家) 사상(思想)에 대립하여 생긴 것이다. 유가사상은 본질적으로 가정과 국가 그리고 사회를 유지할 윤리(倫理) 도덕적(道德的) 규범(規範)을 세우는데 있다. 이러한 경우 우주의 본질을 ‘유(有)’로 보는 것은 당연하며, 도가사상은 유(有)에 대하여 ‘무(無)’를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도가사상은 ‘무소유(無所有)’ 그리고 ‘무위(無爲)’를 강조한다.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삼교 가운데 동학(東學)은 도가(도교)와 유사점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비인격적인 기(氣)와 인격신(人格神)을 연관시키는 작업에서 도교가 표본(標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운은 “유도(儒道) 불도(佛道)”를 모두 타기(唾棄 - 돌아보지 않고 버림)해도 도가(道家) 또는 도교(道敎)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도교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도교가 제(齊)나라와 연(燕)나라 지역에서 동이족(東夷族)으로부터 파생되어 통속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운선생은 ‘용담유사(龍潭遺詞’ 4절 가운데 즈음에서... “대저생령 많은 사람 사람 없어 이러한가(무릇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사람이 없어 이러한가)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다해 그러한가) 윤회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돌고 도는 새 운수를 내가 어찌 받았으며)”라고 했지만 도가사상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신(神)은 하늘과 땅 사이를 왕복하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며, 자연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자연신(自然神)에서 인격신(人格神)으로 교차된다. 천지왕복, 성전환, 인격과 비인격의 격이 교차하는 것은 신관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를 신관의 맴돌이현상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프랙탈과 양단현상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동학 #천도교 #자어상위 #도덕경 #무소유 #무위 #용담유사 #자연신 #인격신 #프랙탈

< 우리는 누구인가? (111) > 도가(道家) 사상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도덕경(道德經)은 노자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函谷關)에서 윤희의 간청에 따라 3일 동안 머물면서 글을 남겼는데 그 것이 도덕경(5,000자) 이라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다. 도덕경(도와 덕에 관한)의 가르침을 보면 42장에서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라고 했다. 도교(道敎)에서 도(道)는 만물(萬物)의 근원(根源)이자 존재(存在)의 근거(根據)라는 뜻이며, 무(無-비존재)라고 볼 수 있다. 도교에서는 도의 작용을 살피고 맞추어 살면서 덕(德)을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도교에서는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며, 의연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득(得)이라 한다. 또한 함이 없는 무위이화(無爲而化)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며, 은은하여 보통의 함과 다른 함을 말한다. 따라서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득이다. 다듬지 않는 통나무로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과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다. 없애고 또 없애서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장자의 가르침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훈적 가르침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이야기로 되어 읽는 이가 나름대로 필요한 깨우침을 얻도록 되어 있다. 추상화된 존재자체로서의 도(道)는 한 대(韓代)에 이르러 인격신적 형태로 나타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도의 인격화는 노자의 비인격적 도를 강조하는 ‘도덕경(道德經)’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후한대(後漢代/136~220) 도교의 창시자 장릉(장도릉) 또는 장로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노자상이주(老子想爾註)’ 이하 ‘상이주’가 바로 도의 인격화를 시도한 대표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도교는 도를 신격화함으로써 나타난 종교이다. ‘상이주’에 따르면 도는 ‘일자(一者)’가 “하늘과 땅의 밖에 있으며, 동시에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데 사람의 몸 안으로 왕래하여 흩어지면 기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되어 곤륜산을 다스린다.’고 했다. ‘일자’의 취합이 곧 인격신이라는 것이다. ‘노군’이라 불리는 태상노군은 바로 노자 자신이며, 시를 지어 여러 신들에게 해설까지 해주는 존재이고, 맹수가 호위하고 해와 달이 비추는 인물이다. 이렇게 신격화(神格化)한 노자(老子)는 남북조시대(420~589)에 이르러서는 교인들 사이에 공인된 인격신(人格神)이 되어 버린다. 태상노군은 ‘태상도군(太上道君)’ 그리고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으로 바뀐다. 남북조시대에 이어 한 대로 넘어오면서 도(道)의 인격성은 ‘기(氣)’나 ‘무(無)’ 같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변해 간다. 동한 후기에 이르러 ‘노자(老子)’와 ‘도(道)’와 ‘기(氣)’는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다. 그리고 위진 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도교가 등장하여 도의 인격화는 그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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