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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육십넷째 날 : 불교사상을 정리한 석가모니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석가

육십넷째 날 : 불교사상을 정리한 석가모니

柏道 2021. 5. 19. 16:16
육십넷째 날 :
불교사상을 정리한 석가모니,

신:
왔느냐?

나:
네. 왔습니다.

신:
어때?
답답하다던 마음은 좀 가라앉았느냐?

나:
네?
아, 그 얘기요.
어이구 그럼요.
그때 당신에게 답답하다고 한 그 날,
당신에게 말하고 나서 마음 비우니(0)까
금방 괜찮아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요.

신:
오, 그랬구나.
자,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이야기로 문을 열까?

나:
엿장수 맘대로 하세요.
언제나 당신 맘대루잖아유.

신:
그럴까?
.그럼 오늘은 어떻게 시작해야 대화가 매끄러울까?
그래.
그럼 예수에 대해 남은 이야기보다
먼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각 종교와
그 의미를 알아보자.

나:
그게 좋겠네요.
대화가 너무 기독교 쪽으로 치중된다고
불편해하실 분들이 계실 테니
다른 이야기도 좀 섞어서 해요.

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
수학이며,
과학인 正·分·合 원칙에 의해 인류역사가 그렇게 흘렀을 뿐,
너와의 대화가 기독교를 의식해서
그 쪽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나:
글쎄,
저는 이미 알아들었지만,
편차에 따라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신:
그래,
숙성과정이 있기에 그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시간이 걸릴 뿐
반드시 종점으로 온다.

나:
그렇겠지요.
그럼 일단 최선을 다할 뿐,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네요.

신:
그래,
이야기나 시작하자.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세계의 모든 종교사상은
수천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퍼져나간 것으로,
지금의 세계는 ‘과정인 생명력’을 중심으로 개량한 야생목과 같은 다신사상(多神思想=불교와 힌두교)과,
‘목적인 꽃’을 중심으로 개량한 온상목과 같은 유일신(唯一神=기독교와 이슬람교)사상이 있다고 했지?

나:
네, 그러셨어요.

신:
그런데 알고 보면,
지금의 세계는 다신사상의 인구와
유일신사상의 인구가 엇비슷하게 대칭(分=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이것은 두 가지 진리의 비중이 대칭(分)이기에
正·分·合 원칙에 의해 인구 수도 대칭(分)인 것이다.
그 뿐인 줄 아느냐?
유일신 사상도 전체성인 기독교사상과
개체성인 이슬람사상 역시 인구가 엇비슷한 대칭(分)이며,
다신사상도 불교와 힌두교의 인구가 엇비슷하게 대칭(分)이다.

나:
예에.

신:
이 역시 正·分·合 원칙에 의한 것으로서
4가지의 비중이 상대적(分=대칭)이기 때문이다.

나:
와!
뭐 하나 二分法인 正·分·合 원칙을 벗어난 게 없군요?

신:
물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3위 1체 중 하나인 正·分·合 원칙이 아니지.
그럼 우선 너희에게 익숙한 불교사상부터 알아보자.
본래의 불교사상은 깨닳음에 들어
앎의 성장을 이루면 누구나 부처라 했으니,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는 얼마든지 있었고,
석가모니 이후에도 누구나 깨닳으면 부처다.
따라서 누구나 스스로 어떤 진리를 깨닳으려 노력하면
그는 부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지.

나:
아, 그래요?
그렇다면 불교의 부처는 석가모니를 말하는 게 아니고
‘깨닳은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예요?

신:
그렇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니
‘그리스도’는 예수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와 같은 수준이 되면 누구나 그리스도이다.

나:
예? 아닌데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던데요?

신:
물론,
지금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뜻은 그게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의 어원인 ‘메시아’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의 ‘하마시아’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하마시아는 ‘神이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이고,
신이 기름부은 자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히브리어의 하마시아가 그리스에 가서 ‘메시아스’가 되었고,
이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스’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구약성서에 보면,
메시아란 칭호는
사울,
다윗,
기레키아,
페르시아의 시라 등
왕들이나
승려들에게도 주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출현할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란,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민족을 해방시키고
유대왕국을 건설할 사람으로 알았으니,
이 기다림은 예수가 출현한 지 2,000년이 되는 지금도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에겐 ‘시온이즘’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이러한 ‘메시아’의 의미는 예언자나 신에 의해 특별임무를 부여받은 명칭으로도 사용되었고,
기독교에 와서는 예수를 신격화하면서 또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나:
아, 그래요?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기독교에서 변질시켜 사용하고 있군요.

신:
그렇다.
그렇듯 본래의 불교사상도 석가모니만이 부처가 아니고,
누구나 깨닳으면 부처이기에
동양사회에서
무당,
박수,
만신,
태주 등이 부처 그림이나 상(像)을 놓고 있는 것은,
석가모니를 상징한 것이 아니고,
점(占)을 보아주는 죽은 영(靈)의 ‘깨닳음 목적’ 상징이다.

나:
그렇군요.
저도 그런 불상들을 많이 봤지만
모두가 석가모니를 숭배해서 세워놓은 불상인 줄 알았어요.
그러면 각 사찰에 있는 불상들은 뭐예요?

신:
물론 사찰마다 있는 불상은
불상을 안치한 사람 마음이기에,
대개의 사찰들은 스스로의 깨닳음 목적이 아닌
나름대로의 부처나 보살이라고 명칭이 있더구나.
이것은 불교사상이 원래의 ‘깨닳음위주’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기복(祈福)사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나:
그렇군요.
그러니까 결국은 불교사상도 원래의 ‘깨닳음 사상’에서
‘기복사상’으로 취지가 변질되었네요.

신:
뭐 불교만 그러냐?
기독교는 안 그러냐?
기독교사상도 원래는 이해 양보의 사랑 체험인데
기복사상으로 흐르고 있더구나.

나: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변질된대요?

신:
그게 다 너희 인간들의 수준이 낮아서 생긴 폐단이란다.

나:
예?
그게 다 인간들의 낮은 수준 탓이라고요?

신:
그렇다.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기복사상이 떡밥으로 섞여 있지 않으면
수준 낮은 너희들은 깨닳음에 관심이 없고,
그나마 잘 먹고 잘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야 관심을 가지니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결국은 수준 따라 최선으로……,
수준 낮은 너희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에비 있다’가 우물가로 못 가게 하는 게 최선이듯이,
너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봐라,
조금이라도 그런 바램이 없나를.

나:
예?
이야기 듣고 보니 좀 거시기하고 쑥스럽네요.
그건 뭐,
제가 우선이 개체성이어서 우선으로 흐르는 ‘도구’ 본능이라니 어쩔 수 없겠지요.

신:
맞다.
항상 ‘개체성인 도구 1, 2, 3, 4, 5, 6, 7, 8, 9’가 먼저 나타난다고 했지.
그러니
그렇게 먼저 일어나는 당연한 본능 도구에 너희가 자괴감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먼저 나타나는 당연한 도구임을 잊지 말고
이어서 나타나는 ‘목적’ 제로(0)를 찾아 체험해라.
그건 그렇고
이렇듯 불교사상은 개개인 스스로의 깨닳음 위주이기에
특정 신(神)과의 뜻(목적) 합일(合一)이 아니다.
이러한 불교사상이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이전에는 960여개의 종파가 비슷비슷한 주장으로 난맥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에 석가모니가 나타나 깊고 넓게 하나로 정리하여 단일 불교사상이 되었다.

나:
아, 그러니까 불교사상은 석가모니가 느닷없이 나타나 발표한 게 아니고,
이미 960여 개로 발전하던 것을 석가모니가 하나로 정리한 것이군요?

신:
그렇다.
인류역사가 앎의 성장과정이듯이
불교사상도 석가모니가 느닷없이 나타나 발표한 게 아니고,
여기저기서 발전한 사상을
석가모니가 한 단계 상위개념으로 정리한 것이다.

나:
그렇군요. 유일신사상도 중앙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쳐 기독교로 발전했듯이요.

신:
그래.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석가모니가 설파한
아함부 12년,
방등부 8년,
반야부 21년,
법화부 8년=총 49년 내용을 살펴보자.

초등학교 수준인 ‘아함부의 구사학’엔 삼세실유 제법항존(三世實有 諸法恒存)이라 하여
우주의 모든 것은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중학교 수준인 ‘방등부의 성실론과 삼론’에서는
우주는 “모두 빈(空) 것(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초등학교 수준에선
모든 것은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다.”라고 긍정했던 것을
중학교 수준에서는 “사실 모든 것은 없는 빈(空) 것이다.”라며 부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앎을 깨우쳐 주는 二分法으로서,
수준 낮은 초등학생들에게 처음부터 “우주는 빈 것”이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우주는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다.”고 했다가,
앎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正·分·合 원칙인 상대성(分=二分法)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고등학교 수준인 ‘반야부의 유식학’을 보면,
"우주만물이 사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부정도 긍정도 아닌 공(空)과 유(有)가 하나라고 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이 된다.

나:
예?
그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그거예요?

신:
그래.
들어본 적이 있구나.

나:
그럼요.
그건 너무 유명한 말이잖아요.

신:
어디서 들었는데?

나:
아마 영화에서 봤지요?

신:
그렇구나.
그렇게 가끔 여기저기서 얻어 들은 게 이럴 때 큰 도움이 되나 보다.

나:
그러네요.
뭔 말인지 계속 어리둥절하다가
내가 아는 말이 나오니까 알아들을 것 같아요.

신:
그렇구나.
그랬다가 ,

대학수준인 ‘법화경’ 화엄경의 ‘10지론’, ‘기신론’, ‘화엄론’등에 가면,
다시 “우주는 있는 그대로가 법=진리=사실”이라고 했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가 법으로서 변치않고 있다는 것이다(시법주법위 세간상상주 = 是法住法位 世間湘常住).

나:
예?
처음 초등학교 수준에서 “우주의 모든 것은 사실 있는 그대로다.”라고 했다며,
대학수준에 와서
다시 “우주는 있는 그대로가 법이다.”라고 했다면 결국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신:
아니다.
석가모니가 대학수준에 가서 다시 “우주가 곧 진리이다.”라고 한 것은,
초등학교 때의 “우주의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다.”라는 것과 다르니,
1,
초등학교 수준에서 말한 긍정은 부정(分)을 거치지 않은 긍정(正=원인)이며,
2,
대학에 올라와서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라고 하는 긍정은
부정(分)을 거쳐 깨우쳐 성장된 긍정(앎=合=결과)이다.
즉,
초등학교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긍정이며,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이라 한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똑같이 무지(無知)로 태어나
깨닳음의 과정에 차이가 있음을 화엄경에서 밝혔으니,
모든 인간은 성불할 수있는 똑같은 재료(금으로 비유)인데,
다만 닦고(깨달음),
안 닦고(無知)의 차이 뿐이라고 했다.

나:
이 간단한 것을 석가모니는 35세부터 84세까지 49년이나 설명했다는 거예요?

신:
뭐 간단하다고?
이거 알아듣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왜 그 말만 했겠냐?
더 들어봐라.

나:
예, 더 있어요?

신:
그럼,
깨달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4가지가 있다고 했으니,
첫째,
진리를 들을 때 말이나 글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 뜻에 의지하라.
둘째,
기존 사회 상식에 얽매이지 말고 지혜(깨달음=영의 느낌=直觀)에 의지하라.
셋째,
말하는 사람의 인격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말고
그 사람의 말에만 의지하라.
넷째,
불경 중 화엄경 80권인 요의경만이 문제이고 모든 다른 불경은 화엄경의 수준까지 이끌기 위한 것이니,
요의경에 이르면 그때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요의경에만 의지하라.

나:
들어보니 모두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런데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앎을 벗어나 비워진(0) 마음으로 새로운 앎을 받아드리기가 어디 쉬운가요?

신:
맞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0) 듣는다 해도
어느 정도 기초가 있어야 "의미가 이어져" 알아듣는다.

나:
아, 그런거예요?

신:
그럼,
그래서 새 시대의 첨단인 지금 여기저기서 正·分·合 원칙과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와 사람들의 앎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나:
아, 그래요?
그래서 요즈음 저승의 영혼들이 인류에게 뜻을 전하는 영적 서적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또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갖는군요.

신:
그렇다.
그 모두가 때가 되어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나:
그러나 그런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는 것이 혼란으로 이어져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 거 같던데요.

신:
물론,
저승 영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그런 책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앎에 대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게 분위기가 바뀌는 게 중요하다.
기독교의 성령활동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는 게 중요하듯이.

나:
호! 그렇군요.

신:
그렇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우선 마음부터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새로운 진리를 이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보자.
석가모니를 따라 다니던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육체가 쇠약해져야 그에 비례하여 정신력이 강해진다고 생각했으니,
이것은 지금도 그 지역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나:
예?
육체가 쇠약해져야 정신력이 강해진다고요?
제가 알기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신:
물론,
목적 없이 육체가 쇠약해지면 그렇지만,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 육체를 쇠약하게 하는 것은
목적이 정신력이기에 효과가 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엘리야나 모세나 예수나 ‘하느님(神)과 뜻(목적)을 하나(合一)로 하기 위해 정신력을 키우는 40일씩의 단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
아,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육체가 쇠약해지는 게 아니라,
전체성(0) 목적을 위한 육체의 쇠약은 영의 진화에 도움이 된다는 거네요?

신:
그렇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진리를 깨닫기 위해 6년간 악의악식(惡衣惡食)과 단식을 했다.
즉,
개체욕망의 부정을 실천하는 과정이지.

나:
오! 석가모니가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6년간 고행을 했다는 게 그거군요.

신:
그렇다.
그런 고행끝에 드디어 깨닳은 석가모니는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의 생활을 했지.
그러자,
그런 석가모니를 이해 못한 제자 하나가 어느날,
“선생님 깨닳음의 길을가기 위해서는 악의악식을 해야 하는데 어째서 선생님은 호의호식 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내가 호의호식 하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대답했다.

나:
예,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 제자 말이 맞는 거 아니예요?

신:
아니다.
석가모니의 대답은
내가 먹고 입는 것은
욕심이 있어 집착함이 아니고,
누가 갖다 주니 그냥 생겨서 입고
생겨서 먹는 건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냐는 뜻이다.
즉,
석가모니는 호의호식에 미련과 집착이 없다(0=제로)는 것이다.

나:
호!
그런 뜻인가요?

신:
그렇다.
결국 석가모니가 6년 고행으로 깨닳은 것은
나의 모든 것이 외부(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인 내 마음(意識=내면=비움=0)에 있다는 것이었지.

나:
아,
당신 말의 뜻을 알고 나니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신:
뭔데?

나:
거 있잖아요.
원효가 의상과 같이 중국으로 가다가
온종일 걸었더니 피곤해서 그런지
밤중에 자다가 목이 말라 여기저기 더듬다가,
웬 그릇에 물이 가득 담겨 있기에 벌컥벌컥 맛있게 마셨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잖아요.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에 무슨 물을 먹었기에 그렇게 시원했나? 하고 찾아보니,
옆에 빈 해골이 뒹굴고 있더라잖아요.
그걸 보고 원효는 깜짝 놀라 더러운 생각이 들어 구토를 했다지요.

신:
그래서?

나: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까
어제 모르고 먹을 때는 그렇게 시원했던 물이,
해골에 담겼던 물이란 것을 알고는
구토가 생길 정도로 더럽게 느껴진 것에 대해 이유를 생각하다가,
그 원인이 스스로의 마음에 있음을 알고는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있다(一切唯心造)는 것을' 깨닳았다고 하더군요.

신:
그래서?

나:
그래서 중국으로 가려던 원효는
중국에 가서 배우는 게 문제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임을 깨우쳐,
중국에 가는 것을 걷어치우고
조국에서 유명한 승려가 되었고,
의상은 그대로 중국으로 갔다고 하지요.

신:
그래,
네 이야기 잘 들었다.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에 있는 원효와 의상에 대한 행적의 옛 기록에는
원효와 의상이 밤중에 어느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그 굴은 무덤에 파여 있는 굴이었단다.
다시 하루를 더 묵게 되어
그 굴에서 자게 되었는데
무덤속의 굴이라는 것을 알고 난 원효가
밤새 귀신 꿈에 잠을 설쳤고.
그 후 원효가 깨닫기를 "같은 무덤속의 굴인데 모르고 잘 때는 좋았는데
무덤속이란 걸 알고 난 후는 밤새 귀신 꿈에 잠을 설친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 이유가 자기의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一切唯心造)를 깨닳았다고 한다.
어째든 간에 같은 뜻이니
이 문제로 왈가왈부할 건 없고,
그 결과
원효는 중국에 가지 않았지만,
깨닳음의 수준이 대단해
요즈음은 서양에서 원효의 진리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기고 있다.

나:
그렇군요,
그럼 원효의 깨닳음 수준이 높긴 높았나 보지요?

신:
물론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에서도
큰 깨우침을 얻을 정도로 영성이 풍부했으니
그 이후의 깨닳음이야 어땠겠냐?

나:
아 참!
아까 석가모니에게 질문했다는
그 제자는 뭐라고 했대요?

신:
아무 말 없이 그냥 보따리 싸가지고 갔단다.
석가모니의 그 답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지.

나:
그랬군요.

신:
그렇다.
그렇게 깨닳음의 길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쉽지 않은 거다.

나:
글쎄 말이에요.

신:
뭐가 글쎄 말이냐?
너도 그 범주에 들어가니
마음 열기를 게을리 하지 마라.

나:
아이구, 깜짝이야!
제가 잠깐 오만했군요.
그게 바로 저 자신인 것을요.

신:
그래.
오늘도 대화가 길어졌으니
이 정도로 하자.
내일은 불교사상에 대해
깊이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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