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韓國史속의 만주](4)고구려의 세 수도-졸본·국내성·평양 - 요동·한반도 ‘제국경영의 王都’ 본문

천지인 공부/단군과 한민족

[韓國史속의 만주](4)고구려의 세 수도-졸본·국내성·평양 - 요동·한반도 ‘제국경영의 王都’

柏道 2020. 9. 13. 05:23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 겨레 력사

[韓國史속의 만주](4)고구려의 세 수도-졸본·국내성·평양 - 요동·한반도 ‘제국경영의 王都’

야발


요동·한반도 ‘제국경영의 王都’
입력 : 2004.01.28 18:44



=[韓國史속의 만주](4)고구려의 세 수도-졸본·국내성·평양=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고구려의 건국 시조로 알려진 주몽왕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졸본(卒本)이었다. 그 위치는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의 환런(桓仁) 일대로 추측된다. 졸본에서 만날 수 있는 고구려 도성 유적으로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고, 평지성으로는 하고성자성과 나합성이 있다. 왕궁성으로 추정되는 나합성은 지금 수몰되었지만 고구려 시대의 석축이 뚜렷했다고 한다. 졸본을 흐르는 훈강(渾江)과 국내성 옆을 지나치는 압록강에는 강줄기를 따라 골짜기마다 충적 평야가 펼쳐지고 곳곳에 초기 고구려의 유적인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연맹체를 이루는 나(那)집단의 흔적들이다. 농업생산과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이들 나집단이 자리잡고 있는 초기 고구려의 영역은 지금의 환런과 신빈, 퉁화 그리고 지안 일대에 걸친다.



졸본은 건국의 초석을 놓은 땅인지라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새로 왕이 즉위하면 대개 이곳으로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곤 하였으니, 졸본은 고구려인들에게는 영원한 정신적 고향인 셈이었다.



◇400년 도읍지, 국내성의 영화=고구려가 졸본에서 도읍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다시 압록강변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가 이곳이다.



지안에는 도성 유적으로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1만2천여기의 고분이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400년 도읍지의 자취를 전해준다. 평지성인 국내성은 왕궁과 관청이 있고 귀족들과 일부 평민들이 거주하는 도성이었다. 환도산성은 위급할 때 피난하는 방어성으로,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산성 안에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도성 구조는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과 군사적 방어 기능을 갖는 산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게 특징이다. 이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지안 분지의 동북쪽 끝에는 유명한 장군총과 태왕릉이, 그 반대쪽 서남단에는 천추총과 서대총이 남아 있다. 국내 지역의 양쪽 끝에 거대한 왕릉이 축조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도읍을 호위하는 듯한 인상이다. 국내성 주위의 수많은 고분들은 곧 지배 귀족들이 모두 왕경(王京)에 모여 살고 있었던 결과이다. 고구려는 이곳 국내성에서 국가 발전의 터전을 닦았다. 무엇보다 비약적인 대외 팽창을 이룬다. 먼저 동해안 지역의 동옥저와 동예를 차지하고 멀리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와 그 너머의 숙신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요동 지역과 낙랑군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결국 미천왕 때 낙랑군을 내쫓고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하였다.



이후 고구려의 발길은 북쪽으로 향한다. 고구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지린 일대의 부여를 놓고 전연과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한때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 국내성마저 함락당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였다. 이어 고구려는 서쪽의 랴오둥 지역을 놓고 후연과 힘을 겨루었으며, 마침내 광개토왕대에 랴오둥 일대를 완전히 확보해 가게 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성장할 수 있는 영역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팽창 과정은 고구려사의 독특한 성격을 낳았다. 다수의 이종족 집단과 그들의 영역이 고구려의 세력권 내로 편입되면서 고구려는 다종족국가이며 제국적 지배질서를 갖춘 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유목민족과의 교류 루트를 열면서 중국 일변도의 교류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문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고구려의 대외 팽창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성장하고 있던 다수의 종족과 정치집단들을 정치적·문화적으로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에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한반도와 만주를 구분하는 지리적 인식을 갖고 있지만 이는 후대의 산물이고, 과거 고구려에는 만주와 한반도가 하나로 통일된 자신의 영역이었다.



◇평양으로 옮긴 뜻은=이렇게 고구려는 한창 뻗어나가는 무렵에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왜 그랬을까? 사실 평양으로 천도한 배경이야 얼핏 생각해도 그 타당한 이유 몇가지는 금방 꼽을 수 있다. 평양 일대의 경제적 기반, 역사적 전통, 국제적인 교역망, 교통의 요충지 등 말이다.



그런데 굳이 천도를 하려면 왜 랴오둥 어디쯤으로 기세좋게 옮겨 중원 진출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이다. 만약 고구려가 랴오둥·랴오시나 더 서쪽으로 천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과연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어울려 이른바 ‘삼국’이 되었을까? 쉽게 말하면 삼국시대라는 우리 민족사의 뿌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사실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리라. 그만큼 우리 민족사가 풍성해졌으니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고구려의 발전 방향에 그리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는 전연·후연·북위 등 강력한 국가가 차례로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서쪽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발전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게 되고 이에 따라 남진이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했다. 그러나 4세기까지 고구려가 서진을 고집한 것도 아니었으며, 5세기 들어 남진에만 주력한 것도 아니었다. 한 국가의 영역 팽창 방향은 경제적인 면이 중시되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외교적·전략적 측면에서 수행될 수도 있는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굳이 한 측면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평양 천도 이후에 고구려는 국제정세에 대한 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평양은 한반도와 랴오둥 및 만주 지역을 아울러 경영하는 중심지로 걸맞은 위치였으며, 그 점에서 고구려인의 선택은 탁월하였다. 졸본에서 국내로, 거기서 다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고구려사의 전개는 곧 한반도와 만주가 고구려에 의해 통합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기환/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1281844381&code=21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