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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속의 만주]한·중 역사분쟁의 현장을 가다 - 2천년을 지킨 성채…고구려는 살아있다 본문
[韓國史속의 만주]한·중 역사분쟁의 현장을 가다 - 2천년을 지킨 성채…고구려는 살아있다
야발
2천년을 지킨 성채…고구려는 살아있다
입력 : 2004.01.02 15:41
=[韓國史속의 만주]한·중 역사분쟁의 현장을 가다=
지난 12월21일 오후 3시30분,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칼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함성이 들렸다. 혹독한 추위에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산을 타고 올라와 차곡차곡 성을 쌓았던 그분들의 다짐. 우리의 터전, 이 드넓은 벌판을 지키겠노라는 2,000년전의 약속이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五女山城). 중국 랴오닝성 환런(桓仁)시 동북쪽 8.5㎞에 위치한 오녀산성은 천연 요새, 그 자체였다. 아니 신비로움을 간직한 거대한 신전이었다. 해발 804m, 절벽 높이 200m.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는 낙엽활엽수의 숲이 길게 길게 이어졌다. 성곽 남문지가 있는 동남쪽 길을 따라 산행이 시작됐다. 동남쪽에는 수백m에 달하는 성벽의 모습이 올연하다.
성벽을 지나 수직에 가까운 수백개의 계단을 밝으며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정상에 다다랐다. 놀랍게도 산정은 평평한 고원이었다. 남북 1,500m, 동서 300m, 면적 10만여평에 달하는 대평원.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비류수(훈강) 강가의 졸본(환런)에 정착했다가 서쪽 산위에 도읍을 정했다”고 적혀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이 흘승골성에 자리잡았다”고 했다. 졸본의 서쪽 산과 흘승골성은 모두 오녀산성을 말한다.
문헌을 뒷받침하듯, 1980년대 들어 산정에서는 고구려 때의 건물터, 병영터, 창고터, 제단 등이 발굴됐다. 20여곳이나 되는 건물터 중에는 왕궁터가 포함돼 있다. 사시사철 물이 솟구치는 ‘천지’, 성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점장대’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중국은 오녀산성을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존·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 1999년에는 ‘중국 10대 고고학 유적지’로 선정했다. ‘고구려 첫 도성’이라며 관광 홍보에도 열심이다. 지난해 9월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신청,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동행한 현지 가이드는 “하루 관광객이 2,000여명에 달한다”며 “문화유산 신청 이후 관광객이 2배나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국가라는 사실은 애써 감추고 있다. 오녀산성을 소개한 어디 글에서도 ‘한국’과 ‘조선’은 찾아볼 수 없다. 오녀산성 팜플렛은 ‘중국 소수민족 고구려 정권의 첫 도읍지’라며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적고 있다. 남북한 관광객에 대해서도 중국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사진 촬영은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에 편입시키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은 이미 중국의 유적이 되어 있었다.
=1. 고구려 땅에 서서=
지난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역사학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학계는 동북공정을 ‘한·중 역사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정부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경향신문은 ‘역사분쟁의 현장’ 답사를 통해 우리 역사 속의 만주를 본격 조명하려 한다.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 동북 3성 지역인 만주가 한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시리즈 ‘한국사 속의 만주’를 통해 만주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유리왕 21년 어느 봄날, 갑자기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한 관리가 돼지를 뒤쫓자 멀리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비로소 잡았다. 그가 국내 지역을 돌아보니, 땅은 오곡을 짓기에 알맞고 사냥할 짐승과 물고기가 풍부했다. 이에 졸본으로 돌아와 왕에게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크고 전쟁 걱정도 없어지리라고 아뢰었다. 유리왕은 이 관리의 말에 따라 이듬해에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424년 도읍지 集安 ‘유네스코 유산’ 추진-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3년 유리왕은 국내, 즉 지금의 지안(集安)으로 도읍을 옮겼다. 졸본, 즉 환런(桓仁)에 도읍을 세운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지안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두 번째 도읍지로서 초기 고구려를 이끌었다.
2,000년 전 천도(遷都)의 길을 따라 지안 땅을 찾아나섰다. 랴오닝성 환런에서 지린성 지안까지의 거리는 약 150㎞.
그러나 퉁화(通化)를 경유해 가는 길은 200㎞가 훨씬 넘었다. 자동차로 4시간 만에 도착한 천년고도 지안은 올 6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의를 앞두고,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깨끗이 단장된 모습으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호태왕비’ 가장 신경 장군총 말끔히 단장-
지안 시가지 북쪽 4㎞ 지점에 위치한 ‘호태왕비’(광개토왕비)는 중국 당국이 가장 신경을 쓴 유물이다. 높이 6m39㎝로 2,000년 전 고구려의 역사를 생생히 담고 있는 이 비석은 지안의 대표적 문화유산.
지난해 중국은 광개토왕비와 인근 태왕릉 경내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단행했다.
먼저 비석을 유리방책으로 두르고, 비각 주위의 민가를 모두 소개시켰다. 매표소 안내원은 “지난해 4~8월 사이에 40~50가구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말했다.
장군총 경내도 깨끗하게 단장됐다. 인근에 무질서하게 들어선 민가, 공장 등은 더이상 볼 수 없다. 진입로를 포장하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는 등 유적 보호·관리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 장군총에 오르는 철제사다리를 나무사다리로 바꾸고, 그 위치도 뒤쪽으로 옮겨 미관을 고려했다.
-국내성 도성 복원 3만여명 이주계획-
유네스코에 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중국의 노력은 지안 시내에서 더 확연히 느껴진다.
지안시는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국내성 도성 복원을 위해 대대적인 주민 이주작업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서쪽 성벽 부근의 민간 주택, 아파트, 회사 등 300여호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중국은 2020년까지 도성 안에 사는 3만여명을 성곽 밖으로 이주시키고 전체 성곽(1.7㎞)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주 비용만 26억위안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유적보호 노력도 유적 정비·복원사업 못지않다. 광개토왕비에는 지난해 8월부터 4마리의 경비견이 배치돼 24시간 비석을 경호하고 있다. 유적·유물을 둘러친 철제울타리에 설치된 보안경비시설도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이다.
자연 관광객에 대한 감시도 부쩍 강화됐다.
지안 유적지는 관리원의 승인을 받아야 사진촬영이 허용된다. 특히 지안 고분에 대한 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상태다.
지난해 신축한 지안시박물관에서는 관람객의 사진촬영을 감시하는 직원들이 관람시간 내내 따라붙는다. 지난해 6월20일 문을 연 오회분(五●墳·다섯 투구무덤) 고분 전시장은 개장 며칠 만에 다시 폐쇄됐다. 전시장 관계자는 “중국 문물관리국(문화재관리청)에서 실제 고분은 물론 모사본도 공개하지 말라고 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역사 편입 드러난 뒤 한국인 경계대상 1호-
이곳 관광객 가운데 한국인은 경계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다. 한 중국인은 “북한이 중국과 나란히 고구려 유적에 대해 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데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조선족은 “2000년 도굴당한 장천1호 고분벽화가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인에 대한 의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며 “내년 6월23일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의 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양, 창춘 등 중국 동북지역의 대도시에는 ‘21세기에는 동북을 본다’라는 입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만주의 동북 3성지역을 새롭게 주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고, ‘동북공정’으로 동북아 역사를 다시 새로 쓰는 것으로 동북을 새롭게 보려 한다면 오산이다. 영토와 역사는 다르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1021541311&code=210100#csidx83d934c7509be64b44f15a3fab0ee33
야발
2천년을 지킨 성채…고구려는 살아있다
입력 : 2004.01.02 15:41
=[韓國史속의 만주]한·중 역사분쟁의 현장을 가다=
지난 12월21일 오후 3시30분,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칼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함성이 들렸다. 혹독한 추위에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산을 타고 올라와 차곡차곡 성을 쌓았던 그분들의 다짐. 우리의 터전, 이 드넓은 벌판을 지키겠노라는 2,000년전의 약속이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五女山城). 중국 랴오닝성 환런(桓仁)시 동북쪽 8.5㎞에 위치한 오녀산성은 천연 요새, 그 자체였다. 아니 신비로움을 간직한 거대한 신전이었다. 해발 804m, 절벽 높이 200m.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는 낙엽활엽수의 숲이 길게 길게 이어졌다. 성곽 남문지가 있는 동남쪽 길을 따라 산행이 시작됐다. 동남쪽에는 수백m에 달하는 성벽의 모습이 올연하다.
성벽을 지나 수직에 가까운 수백개의 계단을 밝으며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정상에 다다랐다. 놀랍게도 산정은 평평한 고원이었다. 남북 1,500m, 동서 300m, 면적 10만여평에 달하는 대평원.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비류수(훈강) 강가의 졸본(환런)에 정착했다가 서쪽 산위에 도읍을 정했다”고 적혀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이 흘승골성에 자리잡았다”고 했다. 졸본의 서쪽 산과 흘승골성은 모두 오녀산성을 말한다.
문헌을 뒷받침하듯, 1980년대 들어 산정에서는 고구려 때의 건물터, 병영터, 창고터, 제단 등이 발굴됐다. 20여곳이나 되는 건물터 중에는 왕궁터가 포함돼 있다. 사시사철 물이 솟구치는 ‘천지’, 성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점장대’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중국은 오녀산성을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존·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 1999년에는 ‘중국 10대 고고학 유적지’로 선정했다. ‘고구려 첫 도성’이라며 관광 홍보에도 열심이다. 지난해 9월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신청,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동행한 현지 가이드는 “하루 관광객이 2,000여명에 달한다”며 “문화유산 신청 이후 관광객이 2배나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국가라는 사실은 애써 감추고 있다. 오녀산성을 소개한 어디 글에서도 ‘한국’과 ‘조선’은 찾아볼 수 없다. 오녀산성 팜플렛은 ‘중국 소수민족 고구려 정권의 첫 도읍지’라며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적고 있다. 남북한 관광객에 대해서도 중국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사진 촬영은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에 편입시키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은 이미 중국의 유적이 되어 있었다.
=1. 고구려 땅에 서서=
지난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역사학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학계는 동북공정을 ‘한·중 역사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정부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경향신문은 ‘역사분쟁의 현장’ 답사를 통해 우리 역사 속의 만주를 본격 조명하려 한다.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 동북 3성 지역인 만주가 한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시리즈 ‘한국사 속의 만주’를 통해 만주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유리왕 21년 어느 봄날, 갑자기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한 관리가 돼지를 뒤쫓자 멀리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비로소 잡았다. 그가 국내 지역을 돌아보니, 땅은 오곡을 짓기에 알맞고 사냥할 짐승과 물고기가 풍부했다. 이에 졸본으로 돌아와 왕에게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크고 전쟁 걱정도 없어지리라고 아뢰었다. 유리왕은 이 관리의 말에 따라 이듬해에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424년 도읍지 集安 ‘유네스코 유산’ 추진-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3년 유리왕은 국내, 즉 지금의 지안(集安)으로 도읍을 옮겼다. 졸본, 즉 환런(桓仁)에 도읍을 세운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지안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두 번째 도읍지로서 초기 고구려를 이끌었다.
2,000년 전 천도(遷都)의 길을 따라 지안 땅을 찾아나섰다. 랴오닝성 환런에서 지린성 지안까지의 거리는 약 150㎞.
그러나 퉁화(通化)를 경유해 가는 길은 200㎞가 훨씬 넘었다. 자동차로 4시간 만에 도착한 천년고도 지안은 올 6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의를 앞두고,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깨끗이 단장된 모습으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호태왕비’ 가장 신경 장군총 말끔히 단장-
지안 시가지 북쪽 4㎞ 지점에 위치한 ‘호태왕비’(광개토왕비)는 중국 당국이 가장 신경을 쓴 유물이다. 높이 6m39㎝로 2,000년 전 고구려의 역사를 생생히 담고 있는 이 비석은 지안의 대표적 문화유산.
지난해 중국은 광개토왕비와 인근 태왕릉 경내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단행했다.
먼저 비석을 유리방책으로 두르고, 비각 주위의 민가를 모두 소개시켰다. 매표소 안내원은 “지난해 4~8월 사이에 40~50가구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말했다.
장군총 경내도 깨끗하게 단장됐다. 인근에 무질서하게 들어선 민가, 공장 등은 더이상 볼 수 없다. 진입로를 포장하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는 등 유적 보호·관리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 장군총에 오르는 철제사다리를 나무사다리로 바꾸고, 그 위치도 뒤쪽으로 옮겨 미관을 고려했다.
-국내성 도성 복원 3만여명 이주계획-
유네스코에 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중국의 노력은 지안 시내에서 더 확연히 느껴진다.
지안시는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국내성 도성 복원을 위해 대대적인 주민 이주작업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서쪽 성벽 부근의 민간 주택, 아파트, 회사 등 300여호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중국은 2020년까지 도성 안에 사는 3만여명을 성곽 밖으로 이주시키고 전체 성곽(1.7㎞)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주 비용만 26억위안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유적보호 노력도 유적 정비·복원사업 못지않다. 광개토왕비에는 지난해 8월부터 4마리의 경비견이 배치돼 24시간 비석을 경호하고 있다. 유적·유물을 둘러친 철제울타리에 설치된 보안경비시설도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이다.
자연 관광객에 대한 감시도 부쩍 강화됐다.
지안 유적지는 관리원의 승인을 받아야 사진촬영이 허용된다. 특히 지안 고분에 대한 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상태다.
지난해 신축한 지안시박물관에서는 관람객의 사진촬영을 감시하는 직원들이 관람시간 내내 따라붙는다. 지난해 6월20일 문을 연 오회분(五●墳·다섯 투구무덤) 고분 전시장은 개장 며칠 만에 다시 폐쇄됐다. 전시장 관계자는 “중국 문물관리국(문화재관리청)에서 실제 고분은 물론 모사본도 공개하지 말라고 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역사 편입 드러난 뒤 한국인 경계대상 1호-
이곳 관광객 가운데 한국인은 경계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다. 한 중국인은 “북한이 중국과 나란히 고구려 유적에 대해 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데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조선족은 “2000년 도굴당한 장천1호 고분벽화가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인에 대한 의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며 “내년 6월23일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의 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양, 창춘 등 중국 동북지역의 대도시에는 ‘21세기에는 동북을 본다’라는 입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만주의 동북 3성지역을 새롭게 주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고, ‘동북공정’으로 동북아 역사를 다시 새로 쓰는 것으로 동북을 새롭게 보려 한다면 오산이다. 영토와 역사는 다르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1021541311&code=210100#csidx83d934c7509be64b44f15a3fab0ee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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