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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적폐(積弊)…왜곡된 역사인식과 ‘호작질’들(7-4) >

柏道 2020. 9. 13. 01:37

시간의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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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ystal Ball
2019. 4. 22. 17:43


<< 권력의 적폐(積弊)…왜곡된 역사인식과 ‘호작질’들(7-4) >>



★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적에 대한 순진한 ‘포용(包容)정책’이나 대책 없는 희망적인 사고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배신하는 것이고, 우리의 ‘자유를 탕진’하는 것이다.”



★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배신하는 것, 한민족(韓民族) 공산주의자들은 왜 이미 1897년에 고종에 의해 폐기된 ‘조선(朝鮮)’이라는 용어를 재(再)등장시켰을까? 김일성 일파도 1945년 해방공간에서 북(北) 정권 명칭을 ‘조선(朝鮮)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했다.



★ 한편, 스스로의 잘못이었지만, 1895년 민비 피살,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을 거치며 고종은 조선(朝鮮)의 국운이 다했다고 판단,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었다. 대한국(1897~1910)은 13년간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적 실체였다.



★ 일제와 불법 또는 강제로 맺어야 했던 을사늑약(1905년)과 병탄조약(1910년)에도 당사국은 일본과 한국(韓國)으로 명기되어 있다.



★ 그런데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탄조약 이후 바로 대한국(1897~1910) 역사를 무시 혹은 왜곡하기 위해 1897년에 이미 사라진 ‘조선(朝鮮)’을 다시 끄집어내어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대한국(大韓國) 국호(國號)가 사라진 것이다. 일제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 그러나 한민족은 대한(大韓) 또는 한국(韓國)을 그대로 사용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에서도 ‘조선(朝鮮)독립만세’가 아니라 ‘대한(大韓)독립만세’였다.



★ 그런데 여기서 대표적인 역사적 오류가 등장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위해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에 ‘대한(大韓)’이 아니라 ‘조선(朝鮮)’이 등장한다.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조선(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이 나온다.



★ 최남선과 33인 등은 당연히 “대한(大韓)의 독립국임과 한국인(韓國人)의 자주민”이 나와야 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조선(朝鮮)이라는 역사적 오류가 4번 등장한다.



★ 이런 맥락에서 신채호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안다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김원봉의 부탁에 의해 신채호가 1923년 1월에 작성한 <조선혁명선언>도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는 조선(朝鮮)이라는 용어가 20번 나온다. <대한(大韓)혁명선언>이라고 했으면 한민족(韓民族) 역사가 바뀌었을까?



★ 신채호(1880~1936)의 생애 중 탁월한 업적이었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등에서 ‘조선(朝鮮)’을 ‘대한(大韓)’ 또는 ‘한국(韓國)’으로 썼으면 우리 역사의 얼과 혼이 더 빛나지 않았을까?



★ 제3 인터내셔널 등 국제공산주의 계보를 뻔히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 김일성 등 대한국(大韓國) 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었던 자들은 일제(日帝)가 ‘대한(大韓)’의 역사를 왜곡하고자 사용한 ‘조선(朝鮮)’을 차용하는데 적극 앞장섰다.



★ 절대로 공산주의자 및 김일성 집단 등은 대한국(大韓國)과 이어진 ‘대한독립만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조선공산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공산주의자들이 왜 사라진 ‘조선(朝鮮)’에 집착했는지가 나온다.



★ 지나온 한민족(韓民族)의 한국(韓國), 대한(大韓)의 법통이 아닌 공산주의 맥락의 국가를 생각하면서 오도된 역사적 근원을 선전선동에 이용하고자 일제가 재(再)등장시킨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이다.



★ 힘센 쪽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인정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 세태가 가장 슬프다. 학자, 언론, 주류 카르텔이 이미 틀린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밥그릇을 잡고 옳다고 우기는 역사적 사실, 그 뒤에는 거대한 일제(日帝)의 검은 카르텔이 자리 잡고 있다.



★ 한(韓)민족의 실국시대(失國時代)를 아는 국민은 드물 것이다. ‘길상어(吉祥語)’라는 의미도 잘 모를 것이다. ‘길상(吉祥)’이란 운수가 좋을 것 같은, 경사가 날 조짐, 따라서 길상어(吉祥語)는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의 말’을 일컫는다. 그래서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신앙 대상 및 지형적 특성을 반영한 지명으로 소설이나 영화 제목이 아니다.



★ 진정으로 배달민족과 우리의 역사를 사랑했고 바르게 지키려 했던 인물,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에서 을유광복(乙酉光復,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7일’에 걸친 시간을 노석(老石) 여구연(呂九淵 1865~1938)은 ‘실국시대(失國時代)’라 불렀다.



★ 미국 인명정보기관(ABI),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와 함께 세계 3대 세계인명사전을 만드는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사(社)가 있다. 이는 1899년에 문을 열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세계인명 기관이다.



★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유명한 인명사전 《후즈후인더월드(Who's Who in the World)》를 발간하고 있다. 절제되고 일관된 편집정책 등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아 세계적인 도서관 등에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어 전문 인력정보 제공에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후즈후인더월드》는 정치·경제·사회·종교·과학·예술 등 각 분야에서 매년 세계적 인물 약 5만여 명을 선정, 프로필과 업적을 등재한다.



★ 실국(失國) 시대를 언급한 노석(老石) 여구연(呂九淵 1865~1938)의 손자(孫子) 짐계(斟溪) 여증동(呂增東, 1933~) 경상대학교 명예교수는 두음법칙을 거부한 국문학자다. 일찍이 남의 나라를 침략함에 있어 “말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을 런던에서 배웠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의 간계를 간파한 인물이다.



★ 그래서 침략을 당한 당시 대한(大韓)은 이익을 보는 의미를 가진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고, 피해를 당한 ‘침략사관(侵略史觀)’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짐계(斟溪) 여증동(呂增東, 1933~)은 배달-단군조선의 겨레가 밝은 것을 거룩하게 여기면서 빛을 숭상해, ‘밝은 겨레’가 ‘배달 겨레’로 된 것이라며 ‘배달학(倍達學)’을 고민한 인물이다.



★ 그래서 《후즈후인더월드(Who's Who in the World)》 인명사전은 이런 주체성이 있는 인물을 대한민국 국문학자로는 가장 먼저 유명 인사로 등재했다.



★ 이병도(이완용의 조카뻘, 서울대 교수, 역사학자), 이장무(이완용의 증손자뻘, 이병도의 손자, 서울대총장) 이건무(이완용의 증손자뻘,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의 친동생, 문화재청장)를 보면, ‘역사의 정의’라는 분노와 참담함이 불거질 것이다.



★ 이완용(1858~1926) 증손자뻘인 이병도(1896∼1989)의 손자는 21세기에 서울대총장을 지냈고, 또 다른 손자는 문화재청장을 지냈다.



★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문(獨立門)을 세운 독립협회 초대 회장은 역시나 역적 이완용(1858∼1926)이었다. 독립문(獨立門) 건립비용 대부분을 이완용이 충당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 이완용의 탁월한 비서실장은 이인직(1862~1916)이었고, 그가 왜(倭)를 찬양하는 신소설을 흉내 내 쓴 작품이 《혈의 누》라는 사실을 아는가.



★ 《혈의 누》는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7살 난 여주인공 옥련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닌다는 일제 찬양 내용이다.



★ 이 소설이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할 때가 1906년 7월 22일, 그 4달 전인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국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대한(大韓)의 모든 통치권을 장악했다.



★ <만세보(萬歲報)>를 보자. <만세보>는 1906년(광무 10) 6월 17일에 동학(東學)의 영수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천도교(天道敎)에서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 손병희는 동학의 일파였던 이용구(李容九)가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일제(日帝)를 돕는 반역을 자행하자 그와 손을 끊고 따로 동학의 전통을 계승한 천도교를 창건하는 한편,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다.



★ <만세보>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에 이인직(李人稙)의 진용으로 발족하였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1904~1910)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 이때에도 이완용(1858~1926)은 살아 있었다. 이완용의 매국 행위 과정에서 탁월한 비서실장이었던 이인직(1862~1916)은 당시에 다른 신문들이 8단(八段)을 답습하고 있을 때, 10단 체제를 채택하였다. 한문(漢文)활자에 국문(國文) 토를 달아(후에 중지) 신문체재 면에서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 그러나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지자, 이완용(李完用)의 사주를 받은 이인직이 1907년 6월 30일 <만세보>의 시설 일체를 매수, 《대한신문(大韓新聞)》으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친일(親日)내각의 기관지로 탈바꿈함으로써 창간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 천도교(天道敎)의 손병희(孫秉熙)가 이완용, 이인직 등 친일파들에게 속은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이인직이 “시련에 빠진 여주인공을 일본군이 구출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연재한 의도가 나온 것이다.



★ 쉽게 얘기하면 “일본이여~ 빨리 우리(대한)를 구출해 달라. 일본의 점령은 우리(대한)에게 축복이다.”라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교과서 시험에 잘 나오기 때문에 이인직이 선각자이고, 최초의 신소설(新小說)을 썼다는 사실을 다 알아도, 그가 이완용과 함께 조선을 팔아먹은 주역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 안중근 의사에 의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육군대장이 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은 비서실장인 이인직(1862~1916)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 몰래 보내 한일합병을 교섭하게 했다.



★ 1910년 8월 4일 밤 11시였다. 첫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대한(大韓)을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위해서다. 고마쓰는 24년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 지금으로 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연재물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이인직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 이렇게 운을 뗀 이인직은 은밀하게 이완용이 궁금해 하는 사항을 물었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따른 대가였다.



★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는 솔직했다. 당시 매국노를 조선의 원수(怨讎)라고 했다. “병합 후 조선의 원수(怨讎)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받는다.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는 모두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 재산도 받게 된다.”고 자답했다.



★ 귀가 솔깃해진 이인직은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일본 정부의 대체적인 방침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완용 총리가 걱정하는 정도의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고 본다.”며 고마워했다.



★ 나라를 팔아먹는 대가로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주겠다고 하자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라고 좋아한 것이다.



★ 이인직의 보고를 받은 이완용은 매국(賣國)을 결심하고 데라우치를 만난다. 이완용과 이인직은 작위와 은사금을 대가로 대한(大韓)을 팔아먹은 것이다. 1910년 8월 16일 노론의 영수 이완용은 통감 저택을 방문해 데라우치를 만났다.



★ 사전에 실무협상이 있었기에 나라를 팔아넘기는 거대한 협상은 불과 30분 만에 끝났다. 중요한 사안은 이미 이인직과 고마쓰 사이에 다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 이런 악질 친일파 이인직을 해방 이후 우리 국사와 국어 교과서는 선각자로, <혈의 누>를 ‘자주 독립-신교육 사상’이 담긴 신소설(新小說)의 효시로 가르쳐 왔다.



★ 그런데 이런 파렴치한 교과서 집필을 주도한 인물들은 누구일까? 일제하에서 ‘식민사관’을 계발(啓發)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개발하고, 해방 후 이를 보급한 이병도와 신석호와 같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사학자, 그리고 해방 후 일본 정부의 역사 공작금을 받은 수많은 지식인들 말고 또 누가 있을까?



★ 일제의 논리에 따라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명분아래 1934년 5월 11일에 조직된 역사 연구회가 진단학회(震檀學會)다.



★ 진단학회는 과거 친일역사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일원 중 하나인 이병도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던 대한(大韓)의 역사·언어·문학 등을 한글로 발표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했다.



★ 그러나 이 학파에서는 친일역사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일원 같은 친일적 성향의 역사학자들이 가입해서인지 일본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관이나 민족 역사의 체계, 추구하는 방법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일제 학자들이 세운 체계 위에서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민족(韓民族) 역사에 대한 인식과정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일제의 정치성과 권력에 좌우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