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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神誥」로 본 元曉說話 연구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三一神誥」로 본 元曉說話 연구

柏道 2020. 8. 25. 10:43

三一神誥; 대종교에서, 단군한울한얼한울집누리ㆍ참이치의 다섯 가지삼천단부에게 가르친 말씀. 신지(誌)가 고문(文)과 수긍(受兢)이 번역한 은문(文)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고구려 번역하고 발해 해석하여 놓은 한문(文)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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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神誥」로 본 元曉說話 硏究1)

 

 

설 중 환2)

 

 

1. 머리말

2. 「三一神誥」의 理解

3. 元曉說話의 構造와 ‘한’思想的 意味

(1). 一神降衷: 胎夢

(2). 性通光明: 무덤에서의 깨우침

(3). 破戒의 意味

(4). 在世理化: 儒佛의 韓國化와 著述活動

(5). 弘益人間: 自由 · 平等의 始端

4. 맺는 말

 

1. 머리말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현실적으로 발딛고 있는 땅과 사람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하늘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상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첫째 부류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도 여기에 속하는 凡人들이 아닌가 한다.

둘째 부류는 땅에서 태어났으나, 땅에 살면서 열심히 修道精進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이상으로 여기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기실 하늘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일단 성공한 賢人들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땅에서 태어나 노력 끝에 하늘로 올라갔지만, 거기 하늘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다시 땅으로 내려와 인간 세상을 敎化하고 나서 다시 하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은 물론 이상적 하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정말 드문 존재들이다. 釋迦나 孔子, 예수나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聖人들이다.

필자는 일찍부터 이런 성인들이 우리 나라에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찾아보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에도 많은 성인들이 있었지만, 본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元曉大師(617-686)야 말로 바로 가장 한국적인 성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일단 ‘한국적 성인’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리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된다. 한국적 성인은 물론 보편적 의미에서의 성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는 과정과 성인으로서의 역할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본다. 이 점이 바로 다른 나라의 성인들과 다른 한국적 성인의 특수성이 될 것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원효대사는 불교를 한국화한 걸출한 사상가이다. 따라서 그가 한국화한 불교와 그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는 거꾸로 한국사상의 원형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원효대사의 학문적인 완성이 신라 국내에서만 이루어졌다는 데에 한 특징이 있음을 감안하면, 그의 삶과 사상에는 자연 가장 한국적인 특성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런 한국사상의 원형을 우리의 고유 경전인 「三一神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삼일신고」는 「天符經」, 「366事」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경전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경전들 속에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 녹여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본고의 논의는 이런 원효대사의 한국적인 삶을 우리의 고유 經典인 「삼일신고」와 대비해서 설명하는 것이 주가 될 것이다. 특히 본고에서는 원효의 일생을 「三一神誥」의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의 과정에 대입하여 해석함으로써, 원효대사야말로 한국의 가장 전형적인 성인상임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오늘날까지 민간에서는 원효대사를 한국인의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숭앙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가 한국의 고유 경전인 「삼일신고」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을까? 특히 그가 해골물을 마시고 도를 깨쳤다는 설화는 話頭처럼 전해 오고, 요석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는 여러 예술 형태로 윤색되어 그의 대중적 인기를 드높여 왔다. 이를 원효대사 자신의 민중불교 취향이라고 하기3)보다는, 거꾸로 민중들의 전형적인 영웅상이 원효대사였기에 그가 민중들의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더욱이 一然이 「삼국유사」에서 다른 고승들보다는 원효대사에 관한 설화를 특히 많이 실은 것은 일연의 ‘한’사상적 취향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원효대사의 생애와 사상을 밝히려는 전문연구 논문은 무려 300여편에 달하여, 그 연구사적인 정리만 해도 번거로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한 연구는 빈약하며, 특히 그에 대한 「삼일신고」의 ‘한’사상적 연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80년대를 들어와서 우리 것을 찾자는 바람은 조금 부는 듯하나, 그 우리 것도 따지고 보면 유학이요 불교, 아니면 도교의 선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한국학연구의 새로운 방향모색’4)이란 서평에서 한국학이 ‘한’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후 ‘한’사상과 「주역」을 가지고 몇 편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본 논문 역시 원효대사가 왜 가장 위대한 한국의 사상가인가를 ‘한’사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20세기 말인 현대를 살면서 필자는 우리 것만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 선생은 당시 세계의 모든 정신이었던 유불선이 우리 의 현묘지도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유불선은 물론 오늘날의 서양 기독교사상까지도 우리 사상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우리 사상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호환성이 풍부한 사상이란 말이 된다. 앞으로의 세계화시대에는 호환성이 풍부한 사상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한’사상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이를 우리 것으로 확인해 두는 작업이 시급한 것이다.

원효대사에 대한 설화적 자료는 이미 조동일이 잘 정리해 두고 있다.5) 그러나 여기서는 「삼국유사」설화를 주 text로 삼고, 나머지 설화들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어느 해 여름 서점에 들렀다가 김상현교수가 쓴 「역사로 읽는 원효」6)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평소 원효대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보니, 여기에는 필자가 요구하는 자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사실적으로 잘 정리된 것을 보고는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러나 설화와 역사는 다르다. 歷史는 ‘있는 것, 즉 事實의 記錄’이라면, 說話는 ‘있어야 할 것, 곧 眞實의 記錄’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원효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1차적으로 김교수의 책을 전적으로 참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화적 해석은 필자의 몫이라고 본다.

 

2. 「三一神誥」의 理解

「삼일신고」는 「천부경」과 「366事(參佺戒經)」와 더불어 우리 나라의 고유한 사상을 내포한 우리 민족의 3대 경전이다. 혹자는 이 같은 경전들을 후대에 조작된 僞書라거나, 아니면 현대사회에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이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논문 역시 더 이상 거들떠볼 가치가 없다. 그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다만 이 고유 경전들을 위서라거나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이 책들이 만일 거짓으로 조작된 것이라면, 이들 책 전체에 흐르는 그 일관성 있는 사상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이다. 필자는 다년간 이들 책을 보면서 서로가 긴밀하게 하나의 원리 하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에 거듭 감탄할 뿐이다.

둘째, 이 책들이 단군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것이 언제 기록되었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만 사실과 진실을 기록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고,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상고시대의 역사서도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도 예수가 승천한 뒤에 제자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공자의 「논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거들떠 볼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만 그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겸손하게 이들 경전을 조용히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필자는 이들 경전을 지금 시대에 다시 되살려 무슨 종교운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가들의 몫이다. 필자는 다만 이들 경전을 통해서 우리 고전문학의 총론과 각론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찾으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본고에서 다루는 원효대사의 破戒를 불교적으로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지만, 「삼일신고」로는 훌륭히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는 일일이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삼일신고」의 내용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고 있는 말은, ‘執一含三, 會三歸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풀이하면 ‘하나 속에 셋이 있고, 셋이 모이면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하나’는 곧 一神降衷이며, ‘셋’은 곧 性通光明‧在世理化‧弘益人間이다. 따라서 일신강충을 이루게 되면 성통광명‧재세이화‧홍익인간을 할 수 있게 되고, 거꾸로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하면 다시 본래 바탕인 일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곧 하나에서 셋으로, 셋에서 하나로 돌고 도는 循環의 眞理를 이 책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數로 표시하면, 三이 一이 되고, 一이 三이 되는 원리로서, 「삼일신고」의 ‘三一’의 의미이다. 이 말은 三인 인간이 一인 신의 영역에 들어감을 뜻한다. 그리고 ‘神誥’의 의미는 신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서 합하여 ‘삼일신고’인 것이다.7)

여기서 중요한 것은 三이 一이 되고, 一이 三이 되는 과정의 이해이다. 「삼일신고」에서 일이 삼이 되는 과정은 性通이라 하고, 삼이 일이 되는 과정은 功完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천부경」과 연관해서 말하자면, 성통의 과정은 ‘一始無始一’에서 ‘一終無終一’까지의 과정이며, 공완의 과정은 거꾸로 ‘一終無終一’에서 ‘一始無始一’까지의 과정이다. 이것은 현묘지도 전체를 통한 순환 개념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이 부분이야말로 현묘지도의 문을 여는 열쇠라 할 것이다. 그러면 성통과 공완을 좀더 살펴보고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성통은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내부의 하나님이 내려와 계시니 一神降衷이요, 자신의 중앙의 眞性이 곧 하나님이니 진성을 통하면 하나님의 광명에 접근할 수 있어 성통광명이다. 따라서 性通은 원래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의 참됨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참됨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는 것이니 자기완성이다. 따라서 성통은 一神인 眞性과 통했다는 말로, 쉽게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神임을 아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성통광명을 이룬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완성으로서, 스스로에게서 일신을 찾는 과정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大覺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聖靈을 받았다라 하고, 유학에서는 克己復禮라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 과정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으나, 「삼일신고」는 이를 하나의 과정으로만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삼일신고」 제3장 天宮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천궁에 이르는 길에 오로지 성통을 하고 공완을 한 자라야 천궁에서 영원한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8) 여기서 성통은 공완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통을 한 뒤, 공완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하를 위해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완은 곧 재세이화·홍익인간으로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자기 완성을 이룩한 사람이 자신이 되찾은 하나님의 참됨을 가지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천궁에서 많은 신령님과 철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생활을 땅 위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지혜와 힘을 기울이는 것이니, 이는 자신이 되찾은 하나님의 참됨을 세상에 실현하는 것으로서 곧 자기실현이다. 그러므로 공완은 인간을 최대 최상의 경지인 하나님의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며,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唯一無二한 길이다.9)

따라서 「삼일신고」의 본문에 단 두 자로 씌어 있는 功完의 뜻이야말로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의 정신이며, 지상에 天國을 건설하려는 이상이며,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佛國土와 大同世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기도 하다.

인간이 공완은 알지 못하고 성통만을 알 때,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성통의 과정에만 몰입하게 되면 천하를 위해 몸바쳐야 하는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극단적 개인주의를 유발시킨다. 山 속에서 평생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그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통이란 공완에 뜻을 두고 있지 않은 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인간 세상의 혼돈 속에서 고통 받고 미망에서 헤매이는 많은 사람들을 재세이화‧홍익인간으로 구제하겠다는 절절한 마음 없이 성통을 이루겠다는 것은 오만방자한 욕심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욕심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10)

이제까지의 설명에서, 우리는 「삼일신고」의 핵심이 일신강충·성통광명·재세이화·홍익인간임을 알 수 있다. 성통은 자기 완성으로서 스스로에게서 일신을 찾는 과정이며, 공완은 천하를 위해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하는 과정이다. 이 둘은 서로 맞물려서 영원한 순환을 계속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원효대사의 일생을 이 「삼일신고」의 성통공완의 정신에 입각해서 풀이하고자 한다. 그가 「삼일신고」의 정신에 가장 철저한 위인이었음을 증명한다면, 자연 원효대사는 가장 한국적인 성인임도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여기서 특히 부기하고자 하는 것은, 「삼일신고」의 성통과 공완을 「한단고기」의 ‘천지인경’에 입각하여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으로 체계화한 것은 전적으로 최동환님의 탁월한 업적이다. 여기서는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임을 밝혀둔다.

 

3. 元曉說話의 構造와 ‘한’思想的 意味

여기서는 먼저 원효대사의 일생이 한국인의 고유경전인 「삼일신고」의 원리, 즉 성통과 공완의 과정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一神降衷: 胎夢

一神인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땅과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인간에 나뉘어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나뉨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존재하시며, 인간의 性에서 하나님의 나뉨을 찾을 수 있으니 곧 性의 중앙에 존재하는 眞性이다. 진성은 인간의 腦에 존재하며, 진성은 곧 하나님의 나뉨이며, 하나님의 子이니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진성이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인간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중앙에 내려와 계신다는 의미로 일신강충이라 한다.11) 그러므로 일신강충이란 한얼님인 一神이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신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먼저 원효설화에는 이런 일신강충의 모티브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민간에 전해지고 있던 원효의 탄생설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一然禪師가 그 당시 고향에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원효대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효대사의 집이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원효대사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 그 골짜기(즉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해산을 하였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하여 그 남편의 옷을 나무에다 걸어 두고 거기서 지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원효대사의 小名은 誓幢, 第名은 新幢이었다. 당초 그 어머니는 流星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원효를 잉태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에는 오색 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원효대사의 탄생은 진평왕 즉위 39년, 즉 수나라 양제 13년(617)이었다.12)

 

이 원효대사의 탄생설화에서 우리는 일신강충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원효대사의 어머니가 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胎夢을 꾸었다는 사실이다.

태몽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 특히 위대한 인물일수록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기도 하다. 고소설(新話)의 주인공들도 대개는 특이한 태몽들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태몽이 왜 하필 ‘유성’ 즉 별이었나 하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본다. 이 별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원효대사의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준다.

별의 상징적 의미는 신의 존재, 至高한 존재, 영원한 것, 죽지 않는 자, 최고의 위업, 신의 사자인 천사, 어둠 속에 빛나는 희망, 밤의 눈을 가리킨다. 기독교에서의 별은 신의 인도와 호의, 예수의 강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별은 태양이나 달과 마찬가지로 인정된다.13)

결국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별은 一神인 하늘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별이 내려왔다는 태몽은 바로 원효가 탄생할 때 이미 그에게 일신이 강충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 요소로, 본 설화에서는 그가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조동일은 「삼국유사」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설화였는데 그 의미가 망각되었다고 보았다.14) 그러나 우리는 이 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이의 본래의미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즉 나무(tree)는 世界像인 동시에 宇宙軸이며, 하늘과 땅과 물, 이 3가지 세계를 연결해서 그 사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며, 또한 태양의 힘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한가운데의 나무’이다. 뿌리는 땅 속 깊은 곳인 세계의 중심에서 뻗으며 지하수와 접촉하는 나무는 시간의 세계로 자라는 나무이며, 나이테는 나무의 수령을 알려주며, 가지는 하늘과 영원에까지 닿으며, 또한 顯顯世界의 존재 단계를 상징한다. 특히 밤나무처럼 생명의 식량인 열매가 달리는 나무-- 포도, 오디, 복숭아, 대추, 야자, 아몬드 등--는 모두 聖樹이다.15)

이렇게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상징적 존재임을 생각할 때, 원효대사가 나무, 그것도 열매가 달리는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원효에게 일신강충했다는 사실을 아주 적절하게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설화에 나타나는 별과 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원효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一神이 降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삼일신고」의 첫 단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다음 단계인 性通光明할 수 있는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性通光明: 무덤에서의 깨우침

성통광명은 일신강충한 인간이 스스로 광명한 일신을 찾아가서 그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며, 이것은 곧 자기완성의 길이기도 하다. 즉 眞性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땅과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일신이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심이니, 인간은 스스로의 중심에서 우주의 절대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性通이란 性의 중심인 眞性에 도달하는 것이며 光明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광명에 도달하는 것이 곧 성통광명이며, 이것이 곧 道通이다.16) 「삼일신고」에서는 ‘스스로의 본 바탕에서 씨앗을 구하라. 너의 뇌에 내려와 계시느니라’라고 한다.17)

우리는 여기서 원효대사가 어떻게 성통광명을 이루는지를 「삼국유사」의 설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원효대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이름을 「初開寺」라 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그 밤나무의 곁에도 절을 지어 「娑羅寺」라고 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聰慧가 비범하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배워갔다. 그가 수도를 위해 사방으로 雲遊한 행적의 시말과 불교의 弘通에 남긴 업적은 당 僧傳과 그의 行狀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일일이 다 적지 않는다.18)

 

본 설화에는 그가 성통광명하게 되는 修道過程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략하게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민간에서는 그의 득도과정보다는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성통의 과정을 더 중요시했고 더 재미있어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보듯, 「삼국유사」에는 다만 원효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사방으로 운유하며 도를 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宿世에 善根을 심어 한 모퉁이를 들 적에 반드시 세 모퉁이와 연관하여 관찰할 수 있는 上士요 高士의 자질을 타고난 이였다.19) 하지만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의 전기 기록에는 그의 소년기로부터 청년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그의 생애 초반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을 출가 동기와 그 시기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宋高僧傳」에는 丱髽之年에 불법에 입문했다고 했다. 志學之年인 15세가 되면, 상투를 하고 관을 쓰게 되는데 이 때가 관좌지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원효는 그의 나이 15세에 출가한 셈이 된다.20)

그러나 불지촌에서 성장한 15세의 소년 서당이 무슨 생각과 계기로 출가를 결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분명한 기록은 없다. 출가 이전에 화랑으로 상정되어 전쟁에 출전했던 그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한적 존재의 극한을 경험함으로써 죽음 저편의 무한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원효가 진골의 신분이라야 가능했던 화랑이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사회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원효의 출가동기를 헤아리는 데 근거 있는 접근 방식으로 여겨진다. 원효가 아직 불지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진평왕 말기인 7세기 초반, 그 무렵의 신라 사회는 전쟁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사량부의 청년 嘉實의 경우처럼 군역의 의무기간이 지나도 청년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고생하기 일쑤였다. 장군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김유신장군 같은 이는 자기 집 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처자도 보지 못한 채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했을 정도이다. 진평왕 49년(627) 7월, 서쪽 변경에 살던 남녀 300여명이 沙乙이 거느린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이며, 그 이듬해 봄에는 신라 전국을 휩쓸던 지독한 기근으로 자녀를 노비로 파는 참담한 현실을 원효인들 어찌 듣고 보지 못하였겠는가. 이런 와중에서 사려 깊은 소년 서당의 머리 속에 맴도는 것은 사람들은 왜 다투며, 세상은 왜 평화롭지 못한가 하는 의문이었을 것이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구도의 험한 여정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21)

출가한 원효는 「태어나자 총명하고 뛰어나 배움에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는 「삼국유사」의 표현으로 보아, 젊은 날에는 한 스승에게서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의 高僧이나 大德을 찾아 배움을 청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실제로 그가 朗智, 普德, 惠空 등으로부터 사사받았던 예가 있다. 가슴 가득 구도심이 넘쳐 나고, 「求法譬喩論」과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던 그가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22) 따라서 그는 구름처럼 떠돌면서 성통광명의 길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성통광명의 길은 道人이 되는 길로, 멀고도 험한 길이다. 이에 원효는 당시의 다른 승려들처럼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고 하였다.

그때 원효에게는 참으로 좋은 道伴이 있었으니, 바로 義湘이었다. 의상은 원효에 비해 8년이나 후배였지만, 이들의 우정에 나이가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의 벗이고, 진리의 벗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출가 수행자라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출신도 성격도 수행방법도 전공분야도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친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는 원효와 의상, 이 두 스님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그만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다. 의상은 625년(진평왕 47)에 귀족의 신분으로 출생했고, 19세 청년 시절인 선덕여왕 12년(643)에 경주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원효와 의상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인연으로 만나서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두 스님이 함께 당나라로 가고자 했던 때가 650년(진덕여왕 4)이었던 점에 유의할 뿐이다.23)

이들의 제1차 入唐求法에 대한 기록은 다만, 無極이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끝에 인용한 浮石本碑의 다음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의상은 영위 원년 庚戌(650)에 원효와 함께 서녘으로 가려 하였으나,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 되돌아왔다.24)

 

이들의 1차 시도가 좌절된 원인은 위의 기록처럼 정확하지 않다. 위의 기록처럼, 부석본비에서는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움이 있어 되돌아왔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요동 변방에서 수비군에게 첩자로 몰려 수십일 간 갇혀 있다가 풀려나 돌아왔다’25)고 했다. 여하튼 이들의 1차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때 원효는 34세, 의상은 26세 되던 때였다.

이후 원효가 역시 도반 의상과 함께 두 번째로 당나라 유학 길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문무왕 원년(661)이었다. 1차 시도 이후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남양만이 멀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 원효의 인생행로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다 준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悟道했다는 사건이다.

延壽(904-975)의 宗鏡錄에는 원효의 悟道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적 동국의 원효법사와 의상법사 두 분이 함께 스승을 찾아 당나라로 왔다가, 밤이 되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서 잤다. 원효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다. 마침 왼편에 물이 물이 많았는데, 맛이 심히 좋았다. 다음날 보니 그것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그때 마음이 불편하여 토할 것 같았는데, 활연히 크게 깨닫고는 말했다. ‘내 듣건데, 부처님께서는 三界가 唯心이요 萬法이 唯識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좋고 싫은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실로 사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 마침내 고국으로 되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26)

 

위에서 보듯,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단순히 샘물로 알고 맛있게 마셨던 일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이 한 마음 안에 있는 것이지 마음 밖의 사물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즉 원효가 마셨던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나 변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원효 자신의 마음이었고, 인식이었던 것이다. 원효가 부딪쳤던 대상, 혹은 경계는 밤에도 아침에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 그 대상은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간밤에는 편안하기만 했던 고분이 다음날 밤에는 귀신의 소굴로 변했고, 시원하기만 하던 그 물맛이 아침에는 도리어 역겨웠던 것이다. 이에 원효는 一切唯心照의 도리를 깨달았고, 오랜 세월 풀리지 않던 의심이 환하게 밝아졌던 것이다. 오도의 순간이고 성도의 순간이었다. 이처럼 원효는 해골이 나딩구는 옛 무덤 속에서 오랜 꿈을 깨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크나큰 깨달음은 공을 쌓은 뒤에야 얻는 것이니, 흐름을 따르는 긴 꿈을 단번에 깰 수는 없는 것’27)이라고 한 원효 자신의 말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원효 같은 천재도 不惑의 나이를 더 지나고서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확신을 얻었고, 인생에 새로이 눈을 뜨고, 마음의 창문을 열 수 있었다.28)

원효대사가 무덤 속에서 깨달은 것은 ‘一心’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는 다른 법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일심이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眞性이다. 즉 그는 일심을 통해서 진성을 보고, 이로 인하여 성통광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朗然大悟 覺了自心’.29)이라고 한 바 있다. 신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유학까지도 한 순간에 포기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眞性을 통해 하나님의 광명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性通이라 한다. 곧 성통광명이란 인간의 본모습인 진성으로 돌아가 광명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모습이란 곧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씨앗을 평등하게 심어 두셨으니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이 인간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30)

인간의 근원으로 되돌아간 수행자, 고향으로 돌아간 나그네, 어둡고 긴 밤의 꿈에서 깨어난 새벽의 그 신선함을 진정으로 맛 본 장부, 그가 곧 원효대사다. 그가 스스로 새벽이라는 뜻의 원효를 호로 쓰고자 했던 그 생각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토굴과 고분이 둘이 아니듯이, 主와 客, 自와 他, 眞과 俗, 穢土와 淨國, 생사와 열반 등이 대립과 갈등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無分別智의 깨끗한 본심으로 돌아갔기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견고한 담장과 가시들이 무너져 내릴 때, 그는 小我의 낡은 옷을 벗고 영원과 끝없는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大我의 경지, 无碍 解脫의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31)

그러므로 원효대사는 성통광명한 이후에 스스로의 호를 无碍라 했다. 이는 「화엄경」 명난품 중의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에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무애라는 단어는 「366事(參佺戒經)」에도 나오는데,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있음에 저절로 퍼지고 저절로 합쳐 머므름도 없고 엉킴도 없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 자기 몸을 처신하는 것과 같습니다.’32)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서 보면 无碍란 원효대사와 같이 성통광명한 哲人이 거하는 곳이란 말이니, 원효대사의 무애행은 「참전계경」의 내용과 일치하니 재미있는 사실이다. 무애란 걸림이 없다는 말로, 원융무애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다시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진성과 일체가 되어 융합하므로 방해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일에서 집착을 제거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또한 성통을 무교적으로 해석하면, 죽음과 再生의 이니시에이션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밤에 무덤에서 해골의 물을 마셨다는 것은 죽음의 체험이요, 다음날 햇빛 아래 도를 깨닫고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재생의 체혐이었다.33)

이는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성통광명의 경지를 말한다. 즉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는 경험을 통해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이제 원효대사는 道의 과정을 마쳐 성통광명을 했으니, 그는 완전한 ‘哲人’이 되었다. 철인은 하나님의 궁전인 天宮에 도달한 자이니, 하나님의 빛을 입어 밝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道通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철인은 하나님에게서 입은 밝은 빛으로 혼돈에 가득 찬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功을 완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功完이다. 그러므로 철인은 공을 완수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을 하늘의 천궁과 같이 만들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내러오는 것이다. 이것이 곧 德을 베푸는 것이니, 덕은 곧 재세이화‧ 홍익인간으로 이루어 진다.34)

 

(3). 破戒의 意味

道를 깨치고, 철인이 된 원효대사가 공주를 만나서 還俗을 했다. 이는 원효대사에게 있어 하나의 큰 사건이고 중대한 전환점이다. 속인에게도 결혼이란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출가 수행자의 사랑과 환속은 보통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는 범속한 사람에게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사건처럼 보이지만, 원효설화의 가장 깊은 속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환속을 하지 않았다면 원효대사는 원효대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효설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바로 이 파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일신고」에 의하면, 일신강충하고 성통광명한 사람은 다시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하고서야 일신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성인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일신강충한 태몽을 가지고 태어난 원효대사가 무덤 물을 마신 사건으로 성통광명을 하고, 그는 천궁인 하늘에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의 덕을 베풀기 위해서 태풍이 몰아치는 속세로 내려왔다. 본 설화에서는 이 속세로 내려오는 과정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삼일신고」적인 사고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한국적 성인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간에서도 원효대사 이야기 중에서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를 가장 흥미있어 하는지 모른다. 이 점이 바로 한국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른 나라의 설화에는 하늘에 올라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중국문헌에는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데,35) 이는 중국인들이 ‘재세이화’나 ‘홍익인간’과 같은 ‘한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설사 이를 알았더라도 이 이야기를 자기들의 사상적 원형에 맞게 윤색했을 것이다. 이는 오히려 중국과 다른 한국적 특성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공주를 처음으로 기록에 올린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원효의 아들이라 하고, 원효가 승려생활을 그만두고 스스로 小性居士라고 일컬었다고만 하였다. 사실만 간략하게 적었으며, 설총의 어머니인 공주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이규보는 원효와 소성거사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 시를 지었다. 공주에 대한 본격적인 기술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보인다.36)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처음으로 이를 본격적으로 기술한 것은,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사상을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민중들 역시 한사상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무리라, 자연 이 부분을 가장 재미있어 하고, 중요시했던 것이라고 본다. 조동일은 요석공주의 이야기는 ‘鄕傳’에서 가장 중요시할 만한 전승이라 하면서도, 이를 보편주의의 높은 이치가 무시되는 변화가 일어났다고37)고 했는데, 이는 한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온 지적으로,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부분을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聖師는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 하늘 바칠 기둥 다듬고자 하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大賢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당시에 요석궁에는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 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대사를 찾고 있을 때, 원효대사가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일부러 물 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그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38)

 

위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는 우선 원효대사의 대단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내 하늘을 받칠 기둥 다듬고자 하는데’라는 구절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성통광명한 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에서는 원효라는 큰 기둥을 알아 줄 사람은 당시 왕이었던 무열왕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원효대사의 이런 파계 행위는 어디까지나 ‘한’사상적인 차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이를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시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하나는 불교의 계율을 중시하는 입장에서의 심한 비판이고, 한편으로는 원효대사의 인간적인 한계까지도 무애행이라는 한마디 말로 승화시켜 버리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삼일신고」의 성통공완을 이해하지 않고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한 가지 우리가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은 뒷사람들은 원효대사의 환속을 失戒나 破戒로 평가해 오지만, 원효대사 자신은 그러한 행위를 과연 파계로 인식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일정한 계율의 틀 속에 갇혀 버리는 경우야말로 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그의 확신이나, 「보살계본지범요기」등에 나타나는 계율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확신에 찬 그의 이해 등을 염두에 둘 때, 원효 스스로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파계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가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자랑스럽거나 신성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더욱 아니다. 그는 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뒤에 스스로 승복을 벗고 거사의 형색을 하고는, 스스로 小性居士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그런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불교를 완전히 버리거나 떠났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敎化했고, 더 열심히 정진했으며, 더욱 자유롭게 불도를 추구했기 때문이다.39)

그러면 우리는 그의 이런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요석궁에서 아리따운 공주를 품에 안고 아름다운 봄꿈을 꾸었던 원효, 그의 결혼은 우발적인 파계도 실수도 아니었고, 무애도인의 도력을 자랑삼아 시험한 것도 아니었다. 세속을 떠나 불문으로 갔던 그가 다시 세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을 뿐이다.40) 김상현교수의 이러한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세상이란 괴로운 바다이다. 특히 오랜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7세기 중반경의 한반도는 보다 거친 바다이었음에 틀림없다. ‘노약자나 과부들이 군량미를 운반하고, 어린아이들이 어른 대신 농사를 지으며, 누에 치는 아낙네는 뽕 딸 시기를 잃고, 농부는 밭갈 때를 잃었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고, 더구나 질병이 휩쓸고 가는가 하면, 전사의 백골이 들판에 나딩굴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7세기 중반 신라 사회의 한 단면이다.41) 원효대사는 이런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세상 속으로, 生老病死가 전개되는 세속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이는 그가 일찍이 벗어나고자 했던 곳이지만, 그는 이제 철인이 되어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하늘에 올라간 자는 하늘에 있지 말고, 다시 추수할 곡식이 많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도를 닦아 스스로의 만족만 구한다면 이는 소승에 불과할 것이다. 慈藏과 憬興은 당대를 주름잡던 고승들이었지만, 이들은 세상의 낮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다. 이들의 교만했던 태도를 비판하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42)

세속에 안주하는 병을 고치기 위해 出世法이 있다. 그러나 세상을 벗어난 출가 수행의 길에만 머물러도 안되니 이를 고치는 약이 出出世法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야만 하듯이, 세상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다시 세상이라는 굴로 돌아와야 한다. 원효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았고 강한 몸짓으로 왔다. 40대 초반의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먹물옷을 벗어 버렸다. 두꺼운 껍질을 깨고 디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소성거사라 자칭했다. 기고만장하던 자신의 높은 콧대를 스스로 꺾고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했던 것이다.43)

석가도 왕좌를 떨치고 내려왔으며, 예수도 하느님의 오른쪽 보좌에서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원효대사도 철인이 된 다음에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로 나타났다. 이것이 성통광명한 사람의 도리라고 「삼일신고」는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는 차별 없는 평등의 체험에서 벗어나 다시 차별 있는 현실세계로 뛰어들어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이 공안을 통해 스스로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깨달음의 경지44)이기도 하다. 바로 事事無碍의 경지이다. 밝은 사람 철인은 인간 세상이 眞과 妄으로 뒤섞여 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하나님이 계신 천궁처럼 참됨만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통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참됨만을 향하던 眞의 길과는 정반대인 妄의 길로 돌아와 땅에서 헤매고 있는 모든 인간들을 구제한다.45)

결국 파계를 하고 승복을 벗어던진 것은 그가 땅으로 내려오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가 승복을 걸친 것은 승복을 입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小性居士라 부르며,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의 사업을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철인의 길이기도 하다. 그의 학문과 대중교화는 이런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4). 在世理化: 儒佛의 韓國化와 著述活動

여기서는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재세이화란 대자연의 불규칙한 호흡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나아가 대자연의 불규칙한 호흡을 활용하여 하나님이 땅 위에 쌓아 두신 많은 것을 거두어 들여 물자를 부족함 없이 하는 것으로써, 산업을 일으키며 경제를 부흥하는 것들을 말한다. 哲人은 이로써 불규칙한 대자연의 변화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며 윤택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한다.46) 따라서 재세이화란 결국 氣를 理로 다스리는 작업으로, 혼돈의 인간세계를 질서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필자는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적인 행위는 한국의 양대사상이었던 유학과 불교,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원효대사는 스스로 佛敎를 韓國化하여 제세이화, 즉 세상을 이치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저술과 연구를 통하여 불교의 이치를 낱낱이 밝혔다.

설화에서는 이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찌기 분황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華嚴經疏를 저술했는데 제40권 廻向品에 이르러 끝맺고는 절필하였다. 또 언젠가는 公事로 인해서 몸을 百松으로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位階의 初地라고 일렀다. 원효대사는 또한 해룡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고 「金剛三昧經疏」를 저술하였다. 그 저술을 할 때 筆硯을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角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각승이란 또한 本覺과 始覺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大安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 받은 것이다.47)

 

원효대사의 학문 활동은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32세 되던 648년에 번역된 「유가론」이 그의 저술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대부분 저술은 30대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초기 저술로 생각되는 「대승기신론별기」에도 649년에 번역된 「십대승론」이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이 책은 33세 이후의 어느 때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해도경종요」는 47세 이후의 저술이고, 「판비량론」은 59세 때의 저작이다. 그리고 「화엄종요」와 「금강삼매경론」은 60대 만년에 씌어진 것 같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친 끝없는 노력에 대해 의천은 ‘경전마다 주석이 있고, 통하지 않는 논이 없다’고 평했다.48)

원효대사는 지금도 읽히고 있는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하여, 101종 206권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저술을 하였다.49) 원효의 저술에 관하여는 70여부 90여권으로부터 100여부 240여권에 이르기까지 그 설이 다양하나, 적어도 80여종 이상의 저술을 했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다. 사실 한국불교사상 원효대사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찾기 어렵다. 신라의 義寂이 25부, 憬興이 40여부, 太賢이 50여부, 百本疏主로 불리는 窺基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십문화쟁론」은 번역되어 인도에까지 유포된 책이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은 신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찬양 받았던 저서이다.50)

그러나 원효의 이런 교학은 공허한 이론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을 실천으로 이끌려는 구원론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이론이었다.51) 이런 점들은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쓰게 된 의도가 ‘천박한 짓은 버리고, 깊고 원대한 일을 완전하게 하며, 또한 사이비 행동일랑 버리고 진실한 것만을 따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다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에 있다’고 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원효의 학문적 관심은 자신의 문제, 그것도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학문적인 노력은 곧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등불이 두루 전해져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기를 염원했던 것이다.52) 그러므로 그의 학문에는 현실적 인생체험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현학적이거나 훈고적이지는 않는 것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연구는 오직 재세이화를 위한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원효대사는 그의 아들 설총을 통하여 儒學을 韓國化하였다.

세속으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먼저 그가 노래에서 약속한 대로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었다. 즉 요석공주로 통해 설총을 낳았던 것이다. 설총은 신라 十賢의 한 사람으로, 신라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유학을 한국화한 큰 학자이다.

이 부분을 설화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주는 과연 아이를 배더니 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經書와 歷史書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十賢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六經文學을 訓解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經學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53)

 

윗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 나라의 유학은 설총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즉 그는 중국과 주변국들의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두루 통달하여 六經文學을 우리말로 訓解한 최초의 학자로, 일연의 시대까지 이를 전수하여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설총이야말로 유학을 최초로 한국화시킨 학자라 하여 무방할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조까지, 우리의 전 역사를 통하여 크게 보면 불교가 정신적인 측면의 한 기둥이었다면, 유학은 정치사회적인 제도상의 한 기둥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원효대사가 설총을 두고 ‘내 하늘 바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는 깊은 의미가 와닿을 것이다. 이는 바로 유학을 통한 재세이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한국화한 불교가 아니라, 또다른 사상인 유학을 한국화함으로써 재세이화의 다른 한 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안목이 범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살펴본 대로, 그는 스스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한국화하고, 나아가 아들 설총을 통하여서는 유학을 한국화하였다. 고래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사상이 유학과 불교를 두 축으로 하여 내려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사업이 얼마나 크고도 넓은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제 끝으로, 그의 홍익인간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5). 弘益人間: 自由와 平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능력이 각각 다르므로 그 지혜와 능력을 하나로 모아 협력할 때, 하나님의 참됨을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각종 폐단을 자제하고 厚한 인심으로 위를 덮고 아래에 보태며 和白으로 힘을 모아 참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국통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곧 홍익인간이다.54)

홍익인간, 즉 모든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자면, 우선 모든 사람들의 힘을 모아 큰 힘을 만들어야 한다. 흔히 말하듯이, 파이가 커야 돌아갈 몫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할 때 비로소 자발적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다. 이 자유와 평등을 서구사회에서는 오랜 동안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오인하여 서로 반목과 질시로 현대사를 냉전의 역사를 이끌어 왔지만, 사실 이들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표리관계로 동일한 몸체이다. 왜냐하면 이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면, 자유로움 없이 평등할 수 없고, 평등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원효대사의 홍익인간사업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원효대사는 먼저 인간 개개인이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다.

원효대사가 몸담고 살았던 신라 사회는 身分制社會였다. 곧 엄격한 骨品制度에 의해 개인의 사회생활 전반이 제약받던 시대였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타고난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온갖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 제약은 정치적인 출세는 말할 것도 없고,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색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해당되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러한 골품제하에서도 인간의 평등을 가르쳤다는 데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55)

불교의 교리에는 원래 인간평등의 이념이 두루 깔려 있으며, 불교 교단 역시 평등의 원칙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불교 생성 당시 인도 역시 철저한 카스트제도 아래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인간의 평등을 밝힌 붓다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신라사회에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이의 평등이념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불교의 평등사상에 대한 많은 관심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如來藏, 혹은 佛性에 관한 관심이 그의 「기신론소」, 「열반종요」, 「법화종요」 등의 저술에 나타나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56) ‘여래법신과 여래불성은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소유한 것으로써 능히 일체를 운전하여 함께 本源으로 돌아간다’57)는 말에서처럼, 일체중생이 여래불성을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생각을 몸소 보여 주었다.

원효대사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버린 듯이 행동하였다. 그는 당시 6頭品 출신으로, 무열왕의 사위였다. 그리고 김유신의 군사 자문에 응할 정도로 지배층과는 깊은 관련이 있었지만, 그는 천촌만락을 다니며 하층민들과 더불어 한 덩어리가 되어 딩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대사의 무애행은 스스로 신분제약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대중교화의 한 방편이라 하겠다.

원효대사의 이러한 모습은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어, 그 괴이한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에서 「일체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고 한 말을 따서 无碍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돌아다니고, 늘 그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 부르면서 교화하고 음영하면서 다녔다.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데는 원효의 교화가 컸다.58)

 

윗 글에서 보듯 원효대사는 천촌만락을 돌면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그가 마치 당시의 광대처럼 하고 다니면서 때로는 호로병을 희롱하면서 노래하고 춤춘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한 방편임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일상적인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임은 물론, 더불어 잠자는 영혼들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원효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법화경」의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에’라는 구절을, 「법화경종요」에 인용한 바 있다. 골품제 사회에서 이 같은 발언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날개 작은 새는 산 기슭에 의지하여 형을 기르고, 작은 고기는 여울물에 엎드려 본성을 편안히 한다’59)라고도 했다. 이처럼 그는 소승적인 범부의 삶 또한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원효대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홍익인간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한 성원이 될 수 있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해와 달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도 어둠을 물리칠 줄 모르는 범부들’.60)을 흔들어 깨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보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효대사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 이는 그가 모든 인간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때, 홍익인간 세계의 기틀이 이룩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원효대사는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지만, 대중의 교화를 위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많은 말이 필요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둔하거나 재간이 적은 사람은 글이 많고 뜻이 광범하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들로 하여금 하나의 게송을 외워 항상 생각하게 한다면 마침내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알 수 있다’61)고 했다. 원효의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대중교화에 전문적인 술어나 어려운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염불, 偈頌, 노래, 혹은 춤 등을 즐겨 사용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원효대사의 교화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원효대사의 모습을 이론적인 저술의 한계를 깨닫고 하층민중과의 직접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민중과 일체가 되는 길을 찾아나선 증거라고 하는 것은62), 원효대사의 언행을 너무 표피적으로 관찰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홍익인간을 하고자 하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이해한다면, 이런 그의 행동은 저술의 한계를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두루 이익을 끼치기 위한 그의 적극적인 실천행임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서, 이들의 힘을 하나로 뭉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바로 대동사회요, 홍익사회인 것이다.

둘째, 원효대사는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배고픈 사람들에 실제적인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자 하였다.

일연이 전하는 다음 설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옛부터 전하기를, (사라사의)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개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다.63)

 

위의 사라밤은 원효대사가 태어났던 사라수에서 열리는 밤이다. 이 밤은 대단히 커서 밤 한 개가 바루에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하는데, 고려 후기까지 사라밤이라 했다 한다. 이 사라밤이 실제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한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이 같은 설화의 형성과 유포에는 어떤 의도적 상징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어쩌면 배고픈 대중에게 풍성한 물질적 은혜를 베풀어 財施를 하듯, 밝은 지혜의 빛을 비춰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던 원효대사의 일생을 더욱 위대한 것으로 윤색하기 위해서 생겨난 설화일 수도 있다.64)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예수의 五餠二魚와 같은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원효대사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풍요롭게 먹이는 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런 설화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원효대사는 醫術을 알고, 이를 통해 병든 자들을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자 하였다.

아마도 원효대사는 당시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지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상처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는 錚觀法법으로 사랑에 상처받은 嚴莊의 마음을 치료하고, 또 「금강삼매경」의 강설로 왕비의 모진 병을 치료했다는 설화는 이런 사실을 직접 확인해 준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이런 종교적인 방법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의학을 이해하고 의술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의학적인 용어를 그의 저서명에 붙인 예가 있는데, 곧 「華嚴關脈義」가 그 경우이다. 관맥이란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손목의 掌面撓骨動脈 위에 대어 뛰는 맥박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의 저술 속에 병이나 의료와 관련된 전문적인 용어를 적절히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의학에 대한 어느 정도 구체적인 지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고 하겠다.65)

따라서 원효대사는 불교 교학뿐만아니라 현실적인 의술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또한 대중의 교화에도 많이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물론 대중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모으던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그의 자비행임은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다. 예수도 전도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또 그들을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사실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유와 평등을 손수 가르치면서 행하면서 홍익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홍익사회를 이룬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누구나 부처임을 알게 하여, 누구나 자유와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움으로서, 홍익사회의 초석을 놓았던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점은 그가 스스로를 원효라 한 데서 잘 드러난다고 본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元曉 역시 方言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시골 말로 불렀으니, 곧 <이른 아침>이란 뜻이다’66)라고 했다. 원효라는 한자어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원효의 의미는 한자어나 신라 방언에서나 다 같이 ‘새벽’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원효나 시단은 하루 중의 가장 이른 새벽의 의미로 이해된다. 이처럼 새벽의 뜻인 원효로 자기의 호를 삼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필자는 아마도 그가 스스로 홍익인간의 세상을 처음으로 여는 사람임을 알고 이를 자처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는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하여 홍익인간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수순방편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원효대사의 교화에는 일정한 틀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교화했다는 것이고, 갖가지 방편을 동원했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또 흥미를 유발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일, 이것은 隨順方便이기도 하다. 원효대사는 수순방편을 해석하여, ‘먼저 갖가지 재물을 보시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로 하여금 설하는 것을 듣도록 하고 그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게 하는 것’67)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원효대사의 교화방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그는 교리를 설하기 전에 먼저 이익을 베풀어 대중이 기꺼이 따르게 하였다. 병아리도 모이를 주어야 따르는 것처럼 대중도 우선 자기에게 실질적 이익이 되어야 따르는 것이다. 원효대사는 대중들에게 재물과 의술로 실질적 이익을 준 것은 이런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원효대사는 무엇보다 모든 인간 개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에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과 더불어 너도 나와 같은 평등한 존재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편으로 정신적·물질적 보시는 물론 의술까지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모두 홍익인간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초석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원효대사는 「삼일신고」의 말씀대로 성통과 공완을 다 이루었다.

 

4.맺는 말

원효대사는 이미 당시에 국제적인 불교학자로서 널리 알려졌고, 아울러 중국과 일본에까지 사상적인 영향을 끼친 고승이다. 즉 그는 한국이 낳은 聖人인 것이다.

원효대사는 불교를 한국화한 걸출한 사상가이다. 특히 원효대사의 학문적인 완성이 신라 국내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삶과 사상에는 자연 가장 한국적인 특성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런 그의 특성은 바로 ‘한국적 성인상’의 원형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한국적 성인은 물론 보편적 성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성인이 되는 과정과 역할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고 본다.

필자는 이런 한국사상의 원형은 우리의 고유 경전인 「三一神誥」에 담겨 있다고 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원효의 삶을 「三一神誥」에 대입하여 해석함으로써, 원효대사야말로 한국의 가장 전형적인 성인상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삼일신고」의 내용은 ‘執一含三, 會三歸一’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 속에 셋이 있고, 셋이 모이면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하나’는 곧 一神降衷이며, ‘셋’은 곧 性通光明‧在世理化‧弘益人間이다. 따라서 일신강충하게 되면 성통광명‧재세이화‧홍익인간을 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數로 표시하면, 三이 一이 되고, 一이 三이 되는 순환의 원리로서, 「삼일신고」의 ‘三一’의 의미이다.

필자가 검토해 본 결과, 원효대사의 일생은 이런 「삼일신고」의 원리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신강충한 인물이었다.

「삼국유사」의 설화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밤나무 아래에서 낳았다. 별은 하늘을, 또 나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상징적 의미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원효대사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一神이 降衷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삼일신고」의 첫 단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그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사건으로, 성통광명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젊은 날의 원효는 구름처럼 떠돌면서 朗智, 普德, 惠空 등 여러 방면의 고승들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해, 원효는 도반 의상과 함께 다른 승려들처럼 당나라 유학 길에 올랐다가 해골물을 마시는 뜻밖의 사건으로 悟道를 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한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알았으니, 곧 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는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성통광명의 경지를 말한다. 즉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는 경험을 통해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이제 원효대사는 완전한 ‘哲人’이 되었다.

셋째, 성통광명한 원효대사는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니,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결혼은 우발적인 파계나 실수도 아니었고, 무애도인의 도력을 자랑삼아 시험한 것도 아니었다. 세속을 떠나 불문으로 갔던 그가 다시 세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을 뿐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야만 하듯이, 세상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다시 세상이라는 굴로 돌아와야만 했다. 원효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았고 강한 몸짓으로 왔던 것이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먹물옷을 벗어 버렸다. 거듭 껍질을 깨고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했던 것이다. 석가도 왕좌를 떨치고 내려왔으며, 예수도 하느님의 오른쪽 보좌에서 내려왔다. 이것이 성통광명한 사람의 도리라고 「삼일신고」는 가르치고 있다.

넷째, 그는 유불의 한국화와 저술활동을 통하여, 재세이화를 한다.

먼저 원효대사는 스스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한국화하고, 나아가 아들 설총을 통하여서는 유학을 한국화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사상이 유학과 불교를 두 축으로 하여 내려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사업이 얼마나 크고도 넓은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원효대사는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학문활동을 계속하였다. 원효대사의 저술은 70여부 90여권으로부터 100여부 240여권에 이르기까지 그 설이 다양하나, 적어도 80여종 이상의 저술을 했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리고 원효의 이런 교학은 공허한 이론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을 실천으로 이끌려는 구원론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이론이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현학적이거나 훈고적이지는 않는 것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연구는 오직 재세이화를 위한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서, 홍익인간세계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편으로 재물과 의술을 베풀었다.

원효대사는 홍익인간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먼저 인간 개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다. 원효대사가 몸담고 살았던 신라 사회는 신분제사회였지만, 그는 불교 교리의 인간 평등사상에 대해 많은 관심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체중생이 여래불성을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믿고, 이를 가르쳤으니, 이는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그는 천촌만락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과 못 배운 사람들조차도 모두 부처님을 알고, 나미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 이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뭉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바로 대동사회요, 홍익사회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대중들을 물질적 가난과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는 물론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즉 그는 교리를 설하기 전에 먼저 이익을 베풀어 대중이 기꺼이 따르게 하였으니, 대중들에게 정신적·물질적 보시는 물론 의술까지도 베풀었다. 예수도 전도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며 사람들을 모은 것이나 같은 일로 보인다.

결국 원효대사는 일신강충한 인물로 태어나, 노력 끝에 해골물을 마시는 사건으로 성통광명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으니, 요석공주와의 사랑이 그것이다. 이후 그는 아들 설총과 함께 불교와 유학을 한국화하고 많은 저술활동으로 재세이화사업을 펼쳤다. 끝으로 그는 모든 인간 개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에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과 더불어 너도 나와 같은 평등한 존재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편으로 정신적·물질적 보시는 물론 의술까지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하나 되어 홍익인간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초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홍익인간의 세상을 처음으로 여는 ‘새벽’이란 뜻의 원효라 했는지 모른다.

원효대사는 성통과 공완을 다 이루었으므로, 「삼일신고」의 말씀대로라면, 그가 내려왔던 하늘로 되올라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출처] 三一神誥」로 본 元曉說話 연구.|작성자 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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