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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서숙(책 소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더듬는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 김인희 저_ 본문
우담서숙(책 소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더듬는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 김인희 저_
柏道 2020. 6. 26. 13:49우담서숙(책 소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더듬는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 김인희 저_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더듬는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 김인희 저_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을 오래 전에 읽었다. 중국에서 머무는 동안에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에 대하여 눈이 떠졌기로 최근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도 가슴이 아릿아릿 아팠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우리는 668년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망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포로로 잡혀간 유민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기록도 거의 없지만, 이를 우리 역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배우고 익혀 교훈 삼으려는 의지도 없고 연구자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구려가 망한 후, 많은 유민들이 중국 내지로 들어와서 ‘한화’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동북공정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무관심과 식민 사학의 영향으로 아직도 우리 고대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그 그늘에서 왜곡되고 있다. 그러나 김인희는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에서 멸망한 나라의 백성인 고구려 유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분명하게 NO! 라고 말한다. 저자 김인희는 학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답사한 소수민족 마을 답사에서 “흰바지야오족”이 입고 있는 쪼우가 고구려인의 옷, “궁고” 임을 확신하며 북방 사람의 옷을 남방 사람들이 입고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역사적인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10년에 걸쳐서 궁고를 추적하는 중에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유민들의 비참하고 곤고한 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0여 년 동안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며 살았던 유민들의 신앙과 관혼상제가 두 강 건너편에 있었던 고구려의 것과 같음을 확인하며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 유민이 모두 중국인이 되었으니 “고구려는 중국사”라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고구려가 멸망당할 당시 고구려는 170개의 성과 69만 7천호를 보유했으며 인구는 대략 350만 ~4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612년 수양제가 113만 3천 8백 명으로 공격할 정도라면 전성기의 고구려 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 적게는 14만 명, 많게는 28만 명의 고구려 유민의 당나라로의 집단 이동은 645년 당 태종의 원정이 끝난 후에 두 번째는 669년, 세 번째는 681년에 실시되었는데 본 책은 669년에 강회 이남으로 집단이주한 유민에 관심하면서 그 이유를 669년 고구려 유민이 집단이주한 지역이 중국의 남부 지역으로 송나라 시기 후난성 일대에 등장하는 먀오족과 관련성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고구려 유민의 이동지역으로 ❰자치통감❱,❰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동국사략❱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곳은 “강회 이남과 산남”이다. 당나라 시대에 강회와 산남은 중국의 중남부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어서 그 곳에서 고구려 유민이 끌려간 곳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렵지만 저자는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을 공한처, 즉 사람이 살지 않아 비어 있는 곳에 안치했다는 말에 힌트를 얻어서 후난성 서부와 후베이성 남부를 고구려 유민들의 정착지로 비정하고 탐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시기인 863년에 편찬된❰만서❱가 ❰광이기❱를 인용한 문장에서 “고려” 라는 말을 후난성에서 발견하여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의 관계를 정리한다.
책은 1,300년의 역사를 거스르며 낯선 중국 남방지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명들과 소수민족들의 이름이 낯설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가 탐정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먀오족의 치마에 그려진 두 개의 강, 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서 온 사람들, 옷 등에 그려진 도성 도안, 먀오족의 자칭 이름인 가뤼(가루오), 체질인류학으로 본 한국인과 먀오족, 쌀, 난생신화. 먀오족의 축제와 조상신, 새날개형 관식의 머리핀, 고구려인의 모자 절풍과 같은 먀오족의 고깔형 모자, 고분에 나오는 주름치마, 신랑의 처가살이 결혼 풍습, 형사취수제, 시신을 집안에 묻는 장례식 등등을 먼저는 주변의 소수민족의 것들, 최후에는 고구려의 것과 비교하면서 먀오족이 치우천황의 후손이 아니라 1,300여 년 전에 조양성과 평양성에서 떠난 고구려의 유민임을 밝힌다.
이 책은 단순히 바지 하나로 시작된 문화 여행이 아니다. 망국 고구려 유민이 먀오족으로 살게 된 처절한 역사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와 힘을 직면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호소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10년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저자에게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난 박수갈채를 보내드리며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후기** 안타까운 심정으로 먀오족이 18세기와 19세기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일으킨 세 번의 전쟁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혼자 가슴에 담고 있기에는 먀오족의 자존심과 저항이 너무 비장하고 너무 의연하여서.
먀오족들은 말한다. “돌은 베개로 삼을 수 없고 한족은 친구로 삼을 수 없다. ”고. 먀오족은 계속적으로 저항을 하였고 패배를 당하여 끊임없이 이동을 하였다. 중국인은 먀오족에 대하여 “먀오족은 30년 만에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60년 만에 큰 전쟁을 일으킨다.” 하며 포악하다고 하였다. 결국 먀오족은 패배하여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들은 “늙은 오리는 집이 없고 먀오족은 살 곳이 없다.” 고 말로 자신들의 떠돌이 인생을 말 한다 . 현재 먀오족은 1,000만 명에 이르는데 중국에 8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미국, 캐나다, 프랑스에 2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옹건기의(1735~1736)는 착취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다 자주권이 침해당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청은 군대를 동원해서 먀오족의 마을 1,000개를 점령하고 방화와 학살을 자행하였다. 청은 점령지에 관청을 세우고 세금과 요역의 의무를 부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인식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라 생각했던 그들에게는 모욕이었다. 1735년에 포리와 홍은은 먀오족을 이끌고 거병하였다. 이로 인하여 13만 명이 기아사를 했으며, 1,224개 마을이 파괴되고, 70~80 퍼센트의 사람이 죽어 마을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타향으로 떠났고, 군인 가족 1만 3천 6백여 명이 노예가 되었다.
건가기의(1795~1797)는 먀오족이 착취와 수탈로부터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한족과 만족이 먀오족 지역에 들어와 토지세, 부역, 고리대, 상업이윤의 방식으로 먀오족을 착취하였다. 불법과 폭력으로 먀오족의 땅을 빼앗은 한족들은 먀오족을 노예로 학대하였다. 오팔월과 석삼보는 “한족을 몰아내고 옛 땅을 되찾자”고자 거병하였다. 먀오족의 병사들은 거병당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땅은 넓고 곡식은 풍부하나 먹을 쌀이 없네. 먀오족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어째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가? 먀오족이 농사를 짓는 땅은 넓고 좋은 땅으로 청 정부 관리들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한 뼘의 땅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으니 먀오족은 마르고 관방은 살이 찐다.
건가기의는 실패했으나 그 여파는 계속되어 청 정부는 7개 성의 십만 대군을 이끌고 백여 번의 전쟁을 통해 12년 만에 진압하였다. 이 전쟁으로 먀오족 마을이 1,000개가 파괴되었고 인구의 60%가 도살당하거나 죽어서 10만으로 줄어들었다.
함동기의(1855~1872)는 청 정부가 세금과 요역을 증액한 것에 반대해 일어난 저항이다. 장수미가 주도하였는데 “군인을 몰아내고 토지를 되찾자”는 구호로 거병하였다. 장수미는 군인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
흰 소의 붉은 피는 가난한 사람들의 붉은 마음. 붉은 술을 마시고 하늘에 맹세한다. 관리들을 몰아내고 평화를 나누자. 행복과 불행을 함께 나누자. 관의 폐해를 제거하고 탐관오리를 소멸하자. 농사를 지어 풍년이 들게 하자. 만약 마음이 정의롭지 못하여 중간에 변절하는 자가 있으면 소를 잡는 칼로 목을 자르고 날카로운 화살로 가슴을 찌르리라.
장수미는 1856년에 관공서를 공격해 “청에 속한 둔전은 누구든 곡식을 심은 사람이 양식을 거두며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고 선포하였다. 1858년 말에는 귀주 동남지역을 점령하여 먀오족의 영토를 다시 확보하고 자주권을 획득하였으나 1872년 5개성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였고 잡혀갔다. 청의 통치자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장수미가 대답하였다. “너희 관가와 지주는 우리를 먹었고 우리의 피를 빨아 먹었고 우리의 골수를 부숴버렸고 조상의 뼈도 편히 쉬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내일이 있겠는가?”
먀오족은 지금도 자신들의 비참한 역사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만들어 후손에게 전승하기를 좋아한다. 고구려 땅을 떠난 이래 고구려 유민은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자주성을 유지하며 1,300년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겪어 왔다. 현대 먀오족 사이에 “ 우리의 이름은 먀오족이다”라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왜 우리의 말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의 옷을 입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먀오족이기 때문이다.
~~생략~~
우리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노예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약한 자를 탄압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다른 사람과 권력을 두고 다투지 않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든 얼마나 멀리 가든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민족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먀오족이란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먀오족-먀오족-먀오족
나라를 잃은 민족의 삶은 참담하다. 역사는 망한 민족에게 한 뼘의 땅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먀오족은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하며 자존과 자유를 지켜냈다.
2019.12.13.금 우담초라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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