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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의 재발견] (2)나는 상놈이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 (2)나는 상놈이다

柏道 2019. 12. 10. 15:22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 (2)나는 상놈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 2019-11-28 08:28

[아주경제 '정신가치'시리즈-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2)

[다석 유영모(그림과 글씨는 유형재 작품)]
황해도 살던 문화 류씨, 고조부 때 서울로 이사 

류영모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서울시 경찰청이 있는 곳으로 옛 남대문 수각다리(水閣橋) 근처이다. 류영모의 아버지 류명근이 태어난 곳은 자하문 밖 부암동이다. 류영모의 고조부 때에 황해도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왔다. 고조부 이상의 선조들은 문화(文化) 류씨(柳氏)의 본향인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아래에 있는 문화마을(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문화 류씨 시조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류영모는 선조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일기(多夕日誌)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 위로 다섯 번째 갈림에 계시었던 류윤복(柳潤福) 할아버지께서 남의 고을살이(郡守職任)에 따라다녔고, 의령 남(宜寧 南)씨 할머님께서도 나라에서 호적할 때 남의 호적이나 대서(代書)하시게 되셨다고 전할 만큼 집안 살림이 어려우셨던지, 아드님 곧 내 고조(高祖)되시는 류동식(柳東植)·할머니 남양 홍(南陽 洪)씨 내외분께서 시모님 남씨를 모시고 본향인 문화고을(황해도 구월산 밑)을 떠나신 듯합니다. 새 복지(福地)로 한성(漢城) 서북쪽 무계(武溪)와 삼계(三溪)의 협곡으로 잡으셨습니다. 내 5대(五代) 조부모님께서는 그 뒤에 아드님이 잡으신 복지로 오신 듯하므로 5대 조부모님 산소가 서교(西郊)에 계셨고, 6대(六代) 조부모님 류성기(柳成起)씨, 7대(七代) 조부모님 류준만(柳俊萬)씨 함자는 장지(壯紙)에 묵서(墨書)한 고호적(古戶籍)에서 살폈을 뿐입니다. 준만(俊萬 7대), 성기(成起 6대), 윤복(潤福 5대), 동식(東植 고조) 덕신(德信 증조), 무연(務連 조부), 명근(明根 부), 영모(永模)." 종교는 상놈의 종교 되어야 한다   류영모의 고조부인 류동식이 30대에 생계(生計)를 찾아 서울로 옮겨 왔다. 그때가 조선조 영조(英祖·조선 21대왕·재위 1724~1776)말경이 된다. 류동식이 30살쯤이었다면 대개 1770년쯤이다. 정조(正祖) 13년에 한성부(漢城府)의 인구가 18만9000명이었다. 그 인구의 40.6%인 7만6000명이 서울 도성 밖에 살고 있었다. 옛날에도 흉년이 들면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주로 청계천변에 빈민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빈민 구제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류영모의 일가는 청계천 주변을 택하지 않고 산지(山地)를 택하여 자하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성(城) 밖의 인구에 포함된다.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서울의 인구가 10만명 선을 유지하였고, 정조 이후 조선조 말까지는 20만명 수준을 유지하였다. 류영모는 유교(儒敎)사상에서 온 씨족과 가족만을 지상(至上)으로 아는 생각 때문에 조선조가 멸망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선조의 족보타령·양반타령을 아주 싫어했다. "이제 우리는 몇 대조 할아버지 들추는 족보타령은 집어치워야 해요. 내가 위대해야지 조상만 위대하면 무얼 해요. 조상은 위대한데 내가 망국지종(亡國之種)이라면 조상에 대하여 불효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들출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상민(常民)들이 많이 믿어 상놈의 종교라 하였어요. 이는 유교가 양반의 종교인데 대해서 한 말이지요. 참 종교는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해요. 종교가 귀족적이 되면 이미 영원한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1930년대에 학교 학적부(생활기록부)를 쓰는데 양반·상민의 계층을 밝히는 신분란이 있었다. 거기에 쓰기 위해 조사하는 가정환경조사서에도 반상(班常)을 밝히게 되어 있었다. 류영모는 자녀들의 가정환경 조사서에 자신이 직접 평민(平民)이라고 적어 넣었다. 상놈이라 자처한 것이다. 문화 류씨는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高麗)를 세운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다. 조선왕조의 류성룡(柳成龍)이 보여 주듯이 양반에 속한다. 예수·석가도 거지삶 실천했다, 이게 상놈정신   류영모가 옛 수첩에 이렇게 써 놓은 글이 있다.  "이 상(常)놈. 심상(尋常)하게도 무상(無常)한 물신(物神). 이상(異常)하게도 비상(非常)한 정신(精神)." 류영모는 참사람이 되자면 가장 미천한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석가가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산 것은 이 때문이다. 무소유의 삶이란 거지(乞人)의 삶이다. 사회에서 거지 이상의 미천한 사람은 없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농민들이 입는 루바시카를 입고 농사를 한 것도, 마하트마 간디가 하리잔과 같이 웃통을 벗고 맨발로 다닌 것도 가장 미천한 자리에 서고자 함이었다. 예수가 "사실 사람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라고 한 것은 소위 잘났다는 지배층의 귀족을 나무라는 말이다. 양반의 우월의식은 죄악이란 말이다. "상놈의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는 백범(白凡)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의 윗글자를 따서 백범(白凡)이라 한 것이다. 못난 상놈이란 뜻이다. 류영모의 '이 상(常)놈' 정신, 김구의 '나 백범(白凡)'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백범'이 바로, 상놈정신을 별칭에 붙인 것   이 나라에서 가난하고 못난 놈들이 믿던 기독교가 어느 짬에 가멸하고 잘난 귀족들의 종교가 되었다. 가난하고 지위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밀려나 폭력이 지배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고 있다. 폭력을 숭배하는 종교는 마피아 집단보다 더 무섭다. 일본의 옴진리교가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중세 가톨릭은 귀족종교와 폭력종교의 혼합이었다. 종교집단에 정치집단처럼 위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스승과 제자가 있을 뿐이다. 예수는 마지막에는 스승의 자리도 버리고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였다. 재산 없고 지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9:13)고 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루가 17 :10)라고 해야 한다. 잘난 체하는 귀족은 멸망의 넓은 문으로 들어갈 뿐이다. ​다석전기 집필=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편집 및 정리= 이상국 논설실장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 너의 생각이 하느님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 2019-12-03 15:14

[아주경제 '정신가치'빅시리즈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

[시스티나 성당 천장그림인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1475)]


자하문 밖 달동네에 입향(入鄕) 류영모의 고조(高祖) 류동식(柳東植)이 출애굽을 하였지만 그들을 반길 복지(福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도, 가진 재산도 없이 천리 타향에 와서 삶의 터전을 잡는다는 것은 옛날이나 이제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감히 사대문 성안에는 꿈도 못 꾸고 자하문 밖 차일바위 아래 삼계동천(三溪洞天)에 삶의 닻을 내렸다. 동천(洞天)이란 말은 하늘 동네란 뜻이다. 요즘의 부암동은 아주 다르지만
그때는 달동네요 별동네이다. 그곳에서 수대에 이르도록 100여년 동안 살아왔다.류명근은 골바위집에서 13살의 나이에 16살의 신부 김완전(金完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김완전은 수십리 떨어진 박석고개 너머에서 시집을 왔다. 그때는 아직도 인왕산에서 범이 내려와 집에서 기르는 개를 곧잘 물어 갔다. 돼지우리도 굵은 밧줄로 그물을 엮어 덮어씌웠다. 범이 사람과 담배를 마주 피우자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김완전이 시집을 와서 이른 아침에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오는데, 돼지우리에 짐승이 웅크리고 엎드려 있다가 슬쩍 도망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1890년까지 나라에는 호랑이 잡는 방호군(防虎軍)이 있었다.종로에서 구두 재료상 '경성피혁'을 경영했던 아버지  류명근은 어릴 때 서당에 다녔다. 류영모의 선조는 높은 벼슬은 못 하였으나 학문의 열의가 있었다. 류명근은 자녀와 손자들에게 직접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류명근은 일찍부터 가계(家計)를 돕기 위하여 직업전선에 나가 제화(製靴) 재료상을 하였다. 그래서 구두의 모양을 갖추게 하는 구두골을 잘 만들었다. 나무를 깎아서 오리알을 만들었는데 실물과 같았다. 버리기가 아까워 양말에 구멍난 것을 깁는 데 오래도록 활용하였다. 경성피혁(京城皮革)이라는 상호로 지금의 종로구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노백린도 그때 종로에서 피혁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김완전은 왜소한 남편 류명근과 달리 여걸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옛날 여인들이 거의 그러하였던 것처럼 학문은 배우지 못하였다. 남다르게 부지런하고 뛰어난 재능을 지녀 대한제국인 구한국 군인들의 모자 테두리를 누비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좀 뒤에는 방직공장에서 나오는 자투리 실을 사서 고운 색깔로 물을 들여 방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솜씨 있게 만들었다. 그 물건들은 집에서 쓰거나 남에게 선물하였다. 류영모의 외모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닮았다. 류영모는 문과 쪽이나 이과 쪽이나 다 잘하였다. 다만 예능면에서는 음악과 체육을 잘하지 못하였다. 미술에는 취미와 재능이 있었다. 5년 동안이나 교회를 다녔으나 찬송가를 잘 부르지 못했다. 자신이 지은 시에 음률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기를 좋아하였다. "찬송을 나는 할 줄을 몰라. 못 하지만 생각할 때나 일할 때 부르면 참 좋아요"라고 말하였다. 운동경기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구기동 집으로 찾아갔을 때 마라톤 경기를 실황중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별천지의 일이에요"라고 하면서 라디오를 껐다. 실내 요가체조를 날마다 하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였다. 몸이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니 함부로 죽지 말라   류영모는 몸의 건강관리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몸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으면 다치지 말고 가야 해요. 몸이란 자기의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전선(戰線)에 가서 싸우다 죽을 줄도 알아야 하지만 죽지 않을 곳에 가서 죽는 개죽음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의 그릇을 다치면 그 영혼도 온전하지 않아요. 증자(曾子)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하게 받은 몸을 성하게 가지고 가야 해요. 남에게 빌린 그릇을 그 사이 잘 썼으니, 늙어 버렸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아니 꼭 성히 도로 갖다놓는 것이 옳아요. 적극적으로 성해야 합니다." 류영모의 생명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류영모의 생각에 있다. 류영모를 살아서 받들고 죽어서 기리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생각이 참되기 때문이다. 류영모의 생각은 어버이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에게서 받았기에 귀한 것이다.   



몸은 부모에게서 받지만 생각은 하느님에게서 받는다 "생각은 우리의 바탕(本性)입니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릅니다. 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어요. 영원히 갈 것은 생각 하나뿐입니다. 영원을 아는 것도 생각 때문입니다. 몸뚱이의 물질 말고 오직 생각뿐인 데가 있을 것이라 해서 하느님, 부처님 하는 것이에요. 위로 올라가는 게 생명이지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히 가는 것은 생각하는 점, 그것뿐입니다. 진리(法)라, 말씀이라 하는 게 이것입니다. " 부모가 자식의 소유일 수 없듯이 자식도 부모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 땅의 부모는 모두가 양부모(養父母, 원래의 뜻은 생부·생모가 아닌 부모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기른 부모'를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생명의 임자는 하느님이 계실 뿐이다. 하느님이 친부모이다. 그분만이 참아버지이며 참어머니일 수 있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다석어록]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라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하나의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1956)   *얼줄은 성령정신의 탯줄이며 곧 하느님이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 2019-12-04 08:46

 
(4)콜레라로 죽을 뻔한 7세 소년, '죽음'이 삶이었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죽음과 삶(Death and Life)'(1916). 죽음을 두 해 앞둔 화가가 6년에 걸쳐 작업한 이 그림에는 삶과 죽음이 어김없이 순환하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드 박물관 소장]]
 


[다석어록] 사람의 몸뚱이는 벗어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것 아니다. 몸에 옷을 여러 겹 덧입는데 몸뚱이가 옷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옷은 마침내 벗어버릴 것이라 결국 사람의 임자는 얼(靈)이다. 사람의 생명에서 불멸하는 것은 얼나(영성=하느님) 뿐이다. (1956)  
7살 때 그는 다시 한번 태어났다  류영모가 나기 4년 전인 1886년에 나라에는 콜레라가 크게 번졌다. 서울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송장을 나르는 들것이 수구문 밖으로 줄을 잇다시피 하였다. 그 뒤로 해마다 여름이면 콜레라가 돌았다. 콜레라가 얼마나 무서우면 범 같다 하여 호열자(虎列刺)라 이름하였을까.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한방의학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1897년 7살의 류영모도 콜레라에 걸렸다. 쌀뜨물 같은 설사를 계속하여 탈수증으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고쳐줄 수 있는 의사가 없으니 그야말로 천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김완전은 설사 때문에 아이가 죽어 간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설사를 억지로라도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아들의 항문을 막았다. 항문을 막은 지 7~8시간을 지나자 죽어 가던 영모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기적이었다. 항문을 솜으로 틀어막고서 미음을 끓여 떠 먹이니 아이는 다시 살아났다. 죽음에서 건져낸 어머니. 류영모는 그때 다시 한 번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형제 13명 중에서 2명만 살았다   형제 자매가 13명이었다. 그중에서 스무 살을 넘기며 살아남은 것은 두 명뿐이었다. 류영모와 동생 류영철(永哲)인데, 류영모 위로 형이나 누나가 몇인지, 혹은 아래로 동생들이 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랐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인생관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형제의 요절 가운데서도 류영모가 21세 때  잃은 동생 영묵(永黙·당시 19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고 한다.형과 아우들이 죽어가는 걸 보며, 그는 어린 시절 의사가 말한 "이 아이는 서른 살을 넘기기도 어렵겠는데요"라는 말을 거듭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청소년기였다. 왜 이렇게 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겪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국가 쇠망의 시절과 식민지 초기의 처절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수시로 돌았던 콜레라 같은 전염병과 의료체계의 미비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떠밀었음에 틀림없다. 자식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했던 부부는 그러나 비교적 장수했다(부친 류명근은 67세, 모친 김완전은 88세).서른 살도 못 산다는 얘기를 들었던 류영모가 91세까지 살게 된 것은 극기(克己)를 바탕으로 하는 투철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체구가 작고 몸이 약했던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류영모는 자신의 키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몸은 오척(五尺)쯤 돼요. 여러분은 두세 치 더 클 것입니다. 같은 오척 단구(短軀)라도 이를 비관하는 사람이 있고 낙관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키가 작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건 관(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관(觀)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이 다르면 사는 세계가 다릅니다."아이 때문에 앓지도 못하는 어머니처럼   작은 몸과 약한 체질을 타고난 류영모는 20살 전후부터 냉수마찰과 요가체조를 했다. 오래 걷기를 평생 즐겼다. 그는 약국이나 병원에 가는 법이 없었다. 감기조차 앓는 법이 없었다. 그는 죽음을 잊지는 말되 몸은 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몸의 털과 살갗까지도 어버이로부터 받았으니 구태여 함부로 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증자(曾子)의 생각을 그는 평생 실천했다. 그는 몸의 건강이 하느님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한 기초라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건강은 책임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문에 앓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앓을 수 없는 육체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에는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 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칫집에 있다"(전도서 7:2~4)는 말이 있다. 형제의 죽음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성장한 류영모는 23세에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버리고 신앙생활로 일생을 마감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그의 삶은 죽음을 품은 삶이었다. 인생의 공통숙제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들여다보았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벗어버릴 허물이요, 옷이지 별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얼(靈)입니다. 이 몸뚱이는 멸망입니다. 멸망해야 할 것이니까 멸망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란 쉽게 말하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이 죽어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참나로 착각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식물은 환경이 좋으면 꽃이 안 핍니다   식물은 환경과 영양이 좋으면 자신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화훼를 기르거나 농사지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새가 땅 위에서 공격해 오는 짐승이 없으면 날아오르는 비상력을 잃어버린다. 뉴질랜드의 키위, 남극의 펭귄이 그 예다. 사람이 죽음을 잊어버리면 삶의 목적을 잊어버린다. 죽음이 참삶을 살게 하고, 참삶이 죽음을 이기게 한다. 예수와 석가는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한 사람이다.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면 참된 삶을 살 수가 없다. 자기 죽음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라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이란 무섭고도 싫은 것이라 하여 애써 모른 체하고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허둥지둥 발버둥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공자(孔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논어> 이인편)고 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었으니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죽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진짜 삶이다.    

[세검정초등학교 옆에 있는 조지서 터 표석.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곳이다,]

[다석의 외갓집과 홰나무(회화나무)가 있던 조지서 터 부근은 세검정초등학교와 큰길이 생기면서 지형이 바뀌고 나무도 사라졌다. 다석이 삶과 죽음의 시간을 새기며 시를 읊은 그곳은 '정신의 가치'를 상실한 시절을 드러내듯 황량하다. [사진=유대길기자]]
 [다석의 추억, 이곳 - 구기동 회화나무]  "사정(射亭) 앞 홰나무, 네다섯 살 적부터   외가(外家) 갈 적에 활 쏘는 정자 앞을   지나면 저 큰 나무 봬. 우리 다 왔구나. 우리 외갓집에. 그 나무는 그저 날 보네. 여든 바퀴 몇 바퀴."            ('다석일지(多夕日誌)' 중에서) 세검정을 지나서 구기동 입구에 활 쏘는 사정(射亭)이 있으며 그 자리에는 늙은 홰나무(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80세 이후 류영모가 그 나무를 보고 옛날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어머니는 박석고개 너머에서 시집을 왔는데, 나중에 친정이 구기동으로 이사를 간다. 류영모가 구기동에서 살게 된 것도 외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외가 갈 때 보던 회화나무를 보면서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수백년을 사는 회화나무에 비하면, 자신의 나이테 팔십 몇 바퀴는 그리 길지 않지 않은가. 그 회화나무 근처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거기엔 1960년대까지도 장판지를 만드는 제지공장이 있었는데 구기터널이 뚫리면서 아주 달라져 버렸다. 다석전기 집필=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편집 및 정리=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시리즈 편집팀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공부 좀 하셨습니까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 2019-12-09 15:43

회초리와 거짓말 속에서 죽고싶었던 소년의 깨달음

[다석 류영모 선생.]


다섯 살 '천자문'에서 접한 우주  류영모는 어떻게 그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에 이르렀을까. 어린 시절의 교육은 어땠을까. 그가 세상의 정신을 이룬 동서고금의 종교와 신앙을 오직 흉중에서 융합하여 그 정채(精彩)를 빛나는 거미줄처럼 뽑아낸 기적의 영성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 존재 바탕에 기인하는 바가 크겠지만, 학문과 교육을 통해 위대한 각성에 이르는 촉매의 지점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를 살피는 우리는 그와의 접점(接點)을 찾는 노력으로 어쩔 수 없이 ‘첫 공부의 추억과 개안(開眼)의 기억’ 속을 먼저 순례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기억을 끄집어낸다.“다섯 살에 아버지에게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아주 신기해서 이걸 거듭 읽고 외워버렸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이렇게 외우다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황현지천 황홍주우 이렇게 외우기도 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아호재언 자조어위··· 황홍주우 황현지천’으로 줄줄 읊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놀이 같은 것이었죠. 눈을 감으면 글자들이 훤히 보였기에, 암기에 의존해 외우는 게 아니라 천장에 떠오르는 글자들을 보고 읽는 기분이었죠.”류영모가 시작한 공부는 ‘천자문’에 담긴 심오한 뜻을 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네 글자의 연속으로 이어진 250줄의 노래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 노래가 세상의 핵심적인 이치를 담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검고 누렇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이 태초의 원시와 영원의 풍경은 그러나, 그가 세상의 종교와 지식을 통섭(統攝)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심장한 경험의 기반을 이룬다. 이것을 다섯 살이 어찌 처음에 알았겠는가. 교육은 이렇게 한 사람의 내면에 위대한 발견과 성장의 씨를 뿌린다. 회초리가 싫었다   천자문을 가슴속에 별처럼 담은 이 소년은 드디어 유학(遊學)을 시작한다. 홍문서골에 홍살문이 있는 부잣집에 차린 글방이었다. 서당 선생은 충북 괴산사람으로 <통감(通鑑)>을 가르쳤다. 통감은 중국 북송시대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이 책은 BC 403년부터 AD 960년까지 중국의 1362년간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책은 중국의 역사를 통해 정치의 규범을 찾는다는 취지로 널리 읽혔다. 왕조의 흥망 원인을 분석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풀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서당의 교과서로 쓰인 이유는 소년기에 세상의 큰 그림을 접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선생은 한자로 된 교재를 나눠주고 학생들에게 먼저 읽어보게 시켰다. 어려운 한자도 많은 만큼 아이들은 당연히 쩔쩔맬 수밖에 없다. 예습을 해 와야 했다. 소년 류영모는 이미 한자가 익숙했던지라, 이 공부 또한 재미가 있었다. 선생은 엄했지만,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글을 읽고 난 뒤 그 구절을 붓으로 쓰는데, 선생은 손에 먹물이 묻어 있으면 꾸지람을 하고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때렸다. 그런 일이 잦았다. 옛 서당에서 흔했던 풍경이겠으나, 이것을 당하는 소년 류영모는 견디기 어려웠다. 공부는 자발적이고 즐거워야 하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주면서 가르치려 하는가. 매맞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는 서당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서당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류영모는 어린 마음에 회초리를 피할 꾀를 낸다. 거짓말은 참말보다 훨씬 ‘진화된 말’이라는 얘기가 있다. 참말만 하고 살 수도 있지만,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하게 되면 참말보다 더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은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선생과 부모, 양쪽의 회초리를 피하면서 양쪽 모두에게 비난 받지 않는 방법을 류영모는 생각해낸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기도 했다. 서당에 가는 듯이 책을 가지고 집을 나와서는 서당과는 반대편으로 향하였다. 종로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저쪽 멀리엔 동대문이 우뚝하고 거리엔 초가집 가게가 늘어섰다. 가게 뒤쪽엔 기와집들이 촘촘히 박혔다(이 풍경은 류영모가 본 것보다 7, 8년쯤 뒤(1904년) 프랑스인 망도리외가 그린 그림 속에 있는 장면이다). 세상에 속일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길에 류영모가 있었다. 머리채를 늘어뜨린 어린 총각이 ‘통감’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 저어하며 고개를 숙인 채 시장바닥을 걷고 있었다. 동대문 밖엔 밭들이 줄지어 있고, 남대문 앞엔 미나리꽝이 있고, 서대문 밖은 솔밭이던 시절이다. 사대문 성안에도 채소밭이 많았고 밭 둘레에는 앵두와 자두 같은 과일나무가 지천이었다. 인구 17만의 1920년대 서울 풍경이다. 류영모는 서당 공부를 빼먹고서 서당 아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쯤 되어서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영모를 보자 버럭 화를 내며 “이놈, 어디엘 갔다 오느냐”면서 다짜고짜 앞에 세워 종아리를 쳤다. 영모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서당엔 왜 안 가고 돌아다녔느냐”고 족집게처럼 말하지 않는가. 철썩철썩 쏟아지는 매를 맞으면서도 소년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시장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비밀은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풀렸다. 영모가 서당에 오지 않자 서당 선생은 학동들을 시켜 영모를 데려오도록 집으로 보냈다. 영모는 집에 없었고, 부모는 서당에 간다던 영모가 옆길로 샜음을 알아챘다. 시장을 거닐던 영모는 모르고 있었지만 부모는 몹시 화가 나기도 하고 걱정도 되기도 하여 종일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당에서는 서당대로 학생이 잠적한 것에 대해 난리법석이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매를, 그 몇 배로 맞고 난 뒤 류영모는 생각했다. “남을 속이는 일이 이토록 큰일이구나. 그리고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그는 다시는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 세상을 속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을 가슴에 새겼던 계기였다. 류영모는 팔순을 넘긴 어느 날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얼마나 부끄럽고 슬프던지,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정말 죽고 싶었다  70여년을 따라온 그 기억과 ‘죽고 싶었다’는 고백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거짓에 대해 그가 그토록 엄격하고 진실에 대해 그토록 강직했던 마음자리가 거기서부터 생겨났음을 알 수 있지만, 그날의 깊은 트라우마도 느낄 수 있다. 회초리를 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낳은 거짓말과 그것이 다시 회초리를 부른 그 사건 앞에서, 그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일에 좀더 면밀하고 부드러울 필요가 있음을 ‘죽고 싶었다’는 말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최근의 많은 교육들은 자녀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망시키거나 혼란스럽게 한다. 교육이 진실로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자아실현’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시대엔 저 소년의 충동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이 나라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삶의 환경이 아무리 좋아져도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필요충분의 조건을 갖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웅변한다. 자녀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야말로 진짜 교육의 핵심임을 소년 류영모도 그때 어렴풋이 느꼈을까.류영모는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파란만장한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는 인생길에 자살의 유혹을 한 번도 안 느꼈다면 그것은 모자라는 사람이든지 미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50살에 자살의 유혹을 극복하고서 진리의 나를 깨달았지요. 석가나 예수의 구도(求道)를 위한 고행(苦行)은 죽어도 좋다는 결심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산 사람이라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육신의 생명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제나를 넘어서면 죽고 싶은 생각 사라져   하지만 그 고민에서 그친다면, 어떤 빛도 만날 수 없다. 가치가 없는 삶을 피하려다가 가치가 없는 죽음에 이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는 삶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보다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류영모의 말은 이렇다. “제나(自我)를 넘어서게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도,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오로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좇는 것입니다. 살고 싶다는 사람이 미(未·미흡)라면, 죽고 싶다는 사 람은 과(過·과도)입니다. 공자(孔子)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하였지요. 참사람은 살고 싶다, 죽고 싶다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제나로 죽어서 얼나로 살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류영모는 학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배움살이(學生活), 먹음살이(食生活), 흘림살이(色生活)라는 세 가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됩니다. 식색(食色)의 삶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짐승들이 모범적으로 잘 합니다. 짐승들도 식색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학문이란 것은 없지요.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복잡한 학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글로 된 학문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공자(孔子)의 <논어> 첫머리에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논어> 학이편)라는 글귀가 실려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글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글(文)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의 길을 적은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경전만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글이며 경전입니다. 하늘의 말씀은 인간에게 가장 긴요한 진실과 가장 시급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입니다.”요사이 글깨나 쓰는 자들, 한 일이 무엇인가   경전만이 글이라는 류영모의 단언은 머리를 탁 치는 듯하다. 모든 글이 경전만큼의 진실과 경전만큼의 간절함과 경전만큼의 아름다움과 경전만큼의 환함과 경전만큼의 삶과 경전만큼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가. 그것을 되묻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 사회 지도자들은 대단한 학력과 이력을 자랑 삼는다. 그러나 그 학력과 이력이 이룬 그 몸뚱이는 지금 무엇을 '언행(言行)'하고 있는가.  "공부 좀 하셨습니까. 그 공부는 다 어디 가 있는지요?" 그 말을 류영모는 불쑥 이렇게 질문한다. "요사이 글자나 알고 글깨나 읽고 책을 써 낸 자들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다석어록] 내 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다. 위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니,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 이 몸이 죽지 않는다거나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겨질 게 벗겨지고 멸망할 게 멸망해야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난 생명의 씨알로서 위로 나야 그게 사람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편집 및 정리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