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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인간이 되었나 본문
신은 왜 인간이 되었나?
필자: 임명묵
[인간화된 신]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 [젤롯]으로 명망을 얻은 레자 아슬란의 신작이다.
책을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인지종교학의 틀로 재구성해낸 수피즘’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종교의 인지적 기원이 어떻게 인간의 사회조직방식과 맞물려 발전해나가는지를 서술한다. 하지만 결국 방점이 ‘이슬람 수피즘’에 찍혀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얘기하기보다는 저자의 개인적 영적 탐구를 따라가는 것에 가깝다. 이 과정이 굉장히 치밀하고 또 계단 올라가듯 이루어져서 여러모로 감탄하며 읽었다. 내용 자체에 동의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스토리텔링의 정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피즘’이란?
수피즘(Sufism) 혹은 수피파. 이슬람의 신비주의적 분파. 수피즘은 다른 이슬람교와는 다르게 전통적인 교리 학습이나 율법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신과 합일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수피'(Sufi)는 아랍어의 양모를 뜻하는 어근 ‘수프'(suf)에서 파생한 말이다. 수피즘 초기 수도승들은 금욕과 청빈을 상징하는 하얀 양모로 짠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수피라 불렸다. 8세기 무렵 출현해서 12~13세기 이후 많은 교단이 조직되었다.
수피는 숨을 깊이 또 리듬에 맞춰 쉬는 동안 정신력을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빙글빙글 돌며 춤 추는 과정을 '세마' 의식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피들은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고 한다. (내용 출처: 위키백과, 사진 출처: Mevlana Konya, CC BY SA 3.0)
수피는 숨을 깊이 또 리듬에 맞춰 쉬는 동안 정신력을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빙글빙글 돌며 춤 추는 과정을 ‘세마’ 의식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피들은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고 한다. (내용 출처: 위키백과, 사진 출처: Mevlana Konya, CC BY SA 3.0)
수피즘은 이슬람의 전통적인 율법은 존중하되, 일체의 형식을 배격했다. 신도의 내면적 각성과 코란의 신비주의적 해석을 강조하며, 금욕과 청빈 그리고 명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성보다 체험이 중요하다 여긴다. 수피즘은 신과의 합일을 위해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한다. 수피들은 예수를 특히 존중했는데, 수피즘은 예수를 사랑의 복음을 설교한 이상적인 수피로 보았다. (출처: 위키백과, ‘수피파’에서 발췌, 편집자)
1부
1장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2장 야수의 제왕
3장 나무에 새겨진 얼굴
여기는 선사시대 혹은 수렵채집사회에서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추적하는 부분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은 어림잡아 수십만년 전부터 확인되며 보편적이다.
당시 종교는 자연계의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은 애니미즘이(Animism; 정령신앙, 물활론; 모든 사물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었다.
많은 경우 신은 자연현상의 반영에 불과했으며, 인격화되지 않았고 도덕판단을 내리지도 않았다.
원시종교의 인지적 근원은 마음이론과 패턴파악 능력을 통해 인간 아닌 것에도 지향성(의도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 두뇌 기능이다.
2부
4장 창이 쟁기로
5장 고결한 사람
6장 최고신
여기는 원시종교가 어떻게 차츰 ‘인간화’화는 과정을 다룬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거대 구조물 ‘괴베클리 테페’(터키어: Göbekli Tepe; 터키 동남아나톨리아 지역의 산맥 능선 꼭대기에 있는 유적지)에서부터 인격화된 신이 관찰된다. 비인간에 인간성을 투영하여 사고하던 것이 종교의 근원이라면, 비인간을 인간으로 바꿔치기해서 숭배하는 것으로 믿음을 바꾸는 것도 아주 쉬울 것이다. 이것이 농업과 결합하자, 인간 문명은 본격적으로 자연과 분리되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흔적 중 가장 오래된 유적지. 기원전 1만년~8천년기 사이의 두 개 시대의 유적이 혼재돼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뜻. (출처: Teomancimit, CC BY SA 3.0)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흔적 중 가장 오래된 유적지. 기원전 1만년~8천년기 사이의 두 개 시대의 유적이 혼재돼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뜻. (출처: Teomancimit, CC BY SA 3.0)
도시국가, 문명이 탄생하면서 자연력과 동물숭배에 인격이 더해지는 과정은 가속화했다. 문자의 탄생, 문화 축적의 가속화 등은 정교한 신화를 낳았다. 신들은 이제 ‘초인적 능력을 가진 인간들’, 즉 고결한 사람들로 발전했다. 이들은 울고 웃었으며 가족을 이루고 때로 싸우다 죽기까지 했다.
한편 인간들은 자신들의 정치질서를 신의 세계에 그대로 복사하여 권력 정당화의 근원으로 삼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고신이 등장했다. 원래 수메르 도시국가는 각자의 신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도시국가들을 통할하는 제국이 등장하고, 정치권력자는 한 신이 다른 신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렇게 주신, 최고신이 탄생했다. 최고신은 다른 신의 역할을 흡수하며 점점 모순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유일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두 번 있었다. 1) 이집트의 아케나텐과 2)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였다. 이들은 인격과는 무관한 절대적 질서를 신격화했다. 하지만 기존의 인지적으로 편리한 종교와 정면 충돌하는 반직관적인 신은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었다.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최고신에게서 선도 나오고 악도 나온다? 차라리 선신과 악신이 싸운다는 얘기가 나은 것이었다. 실제 조로아스터교는 정확히 이 방향으로 발전했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초기 범신론이 이신론이 되며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되게 된 것이다.
3부
7장 신은 하나
8장 신은 셋
9장 신은 전부
일신론 혁신은 세번째 시도, 즉 유대인들이 유일신 야훼를 만들어내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유대인들의 신은 원래 “엘” 혹은 “엘로힘”이었는데, 모세가 아라비아 북부에서 통용되던 신인 “야훼”를 도입하면서 두 신격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엘-야훼는 다른 신들을 배격하는 유일신보다는 기존의 최고신, 주신에 더 가까운 개념이었다.
하지만 바빌론 유수가 벌어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유대 왕국이 멸망함에 따라 본디 야훼라는 신은 없어져야만 했었다.
바빌론의 유수를 묘사한 제임스 티소의 '포로들의 대이동'(1896-1902 작)
바빌론 유수를 묘사한 제임스 티소의 ‘포로들의 대이동'(1896-1902년 작)
자신들의 신이 없어지게 생긴 유대인은 사상 초유의 인지부조화 과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정당화 논법이 탄생했다:
‘사실 바빌론인들의 신 같은 것은 없고 오로지 야훼만 있다. 우리의 멸망도 알고보면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 위한 야훼의 뜻이 담겨있다.’
기존 아톤 숭배나 차라투스트라의 초기 조로아스터교가 인격화에 실패하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반면, 유대교는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화된 유일신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내어 상황을 돌파했다.
유대교의 주장은 이후 예수를 거쳐 기독교로 뻗어나갔다. 기독교 사상에는 헬레니즘의 로고스 개념이 잔뜩 들어갔는데, 이는 우주적 질서가 곧 신이자 예수라는 관념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것이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관념과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신이면서 신의 아들이다?
창조했으면서 창조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헬레니즘 사상에 익숙한 식자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고자 엄청나게 논쟁했다. 영지주의(고대 혼합주의 종교 운동의 하나)는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이신론을 만들었고 큰 반향을 얻었다. 구약의 신은 유대인들의 불완전한 신이고, 신약의 예수야말로 불완전한 신을 대체할 참된 신이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측에서는 단성론, 예수가 로고스를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 또한 광범위한 지지세를 얻었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논리가 개입했다. 로마의 주교들은 예수가 명백히 신성을 갖고 있기를 원했다. 당시 기독교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신은 마땅히 하나여야 한다고 명령했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요구사항들을 통합하기 위해 정교한 교리체계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삼위일체였다. 삼위일체를 통해 신은 인간화 수준을 넘어서 정말 인간 그 자체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산타 마리아 노벨라)
르네상스 시대 화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산타 마리아 노벨라)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수백년 동안 근동은 삼위일체를 믿는 로마와 이신론을 믿는 페르시아로 나뉘어 싸웠다. 하지만 남쪽에서 새로운 종교가 등장했는데, 진정한 일신론을 내세운 이슬람이었다. 무함마드는 알라를 야훼와 등치시키고 예수의 역할을 재정의한 형태의 ‘수정판본’을 아랍인에게 제시했다. 이슬람교는 이후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근동 세계를 완전히 제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슬람이 세를 불리고 나자 곧바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인 ‘신의 일체성’(타우히드, 아랍어: توحيد)을 어떻게 코란에 나타난 알라의 인격적 모습과 조화시킬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창조주의 속성은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창조주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인가 등 기독교 교리 논쟁에서 익숙한 말장난들이 이슬람에도 등장했다. 논쟁은 이슬람의 두 막강한 근거가 서로 모순되기에 해소될 수 없었다.
코란이 거짓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타우히드가 거짓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 간극은 수피즘이 발전하면서 해소된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사실 코란에서 알라가 인격체로 묘사되는 것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코란은 드러난 ‘현의’가 아니라 숨겨진 ‘비의’가 더 중요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의의 본질은 결국 절대적 존재로서 신이 인격체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 우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범신론으로 귀결된다.
알라가 하나다? 이 말은 우주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 즉 단일하다. 따라서 모든 것에는 신성이 깃들어있다. 수피즘 수행자들이 하나같이 황홀경에 빠진 뒤 “나는 신이다!”와 같은 말을 외치는 이유는 그들이 그 비의에 진정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인지적 부산물이던 종교는 기나긴 인격화를 거쳐 마침내 진정으로 탈인격화되었다.
‘신’이라는 관념을 조정하는 인지과정
자자 여기까지 읽었으면 대부분은 ‘이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혹은 ‘뻔한 소리를 무슨 대단히 새로운 것인양 하고 난리야’)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종교학에 관심이 없다면 몇몇 인지과학, 역사에 관한 얘기 빼고 전부 개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리거나 그 반대로 종교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뻔한 소리로 들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이슬람에 관심이 있다면 레자 아슬란의 이와 같은 서술이 아주 교묘하게 논리적 스텝을 밟아가며 전개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인지기능에서 출발한 종교가 문명 발전과 상호작용해가며 어떻게 신이라는 관념을 조정해가는지 밝히는 것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패턴 인식과 마음이론 → 애니미즘 → 조상신 → 다신교 신화 → 최고신 → 유일신 → 인간-신(예수)
당대의 경제양식, 사회조직양식, 정치권력의 요구사항 등이 맞물려서 만들어내는 게 신에 대한 관념이었고, 이 과정에서 거대해지는 정치권력의 요구사항과 인격화하는 신을 향한 인간의 본능은 계속 충돌했다. 신으로 추상화된 황제의 권력은 어딜가나 자신의 권력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했고, 모든 곳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민중이 믿는대로 그 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신은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 같은 대중의 인지적 본능과 모순을 극복할 방안이 없었기에 차라투스트라와 아케나텐이 실패했다. 하지만 유대교와 예수, 끝내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 정부가 맞물려 이 긴장을 해소한 최종판본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기독교였다.
십자가 크리스천 기독교 교회
배제된 인도와 중국 종교
저자는 그 대신 진정한 신의 모습은 비인격적 신이어야 마땅하며, 그것을 가장 잘 포착한 종교는 이슬람 수피즘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전형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나는 그의 전작 [젤롯의 예수]도 선지자 무함마드라는 렌즈를 거쳐 본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기독교는 신을 인간 편의대로 짜맞추려고 한 결과 만들어진 불완전한 결과물이다.
물론 문명 간 대화에 앞장서는 레자 아슬란이 이런 직설적 표현을 쓰진 않겠지만, 적어도 레자 아슬란의 논리를 따라가면 기독교는 불완전하다. ‘보완’이 필요했다. 그 결과물이 이슬람이고, 이슬람도 신을 인격화하려는 본능과 맞서 오랜 세월 방황한 결과 찾아낸 것이 수피즘이라는 얘기다.
내가 이런 전개가 교묘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저자가 이 너무나 매끄럽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종교 전통을 배제했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범신론이 베단타 힌두교, 불교의 연기와 공, 도교의 도, 서양 철학의 스피노자 등으로 변주되며 여기서 무엇을 선택하건 그것은 독자의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관용이라는 장막에 불공정한 서술을 숨기는 트릭이 아닐까 싶다.
불교 부처
첫째, 종교가 인간 보편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저자는 근동(유럽과 가까운 서아시아 지역) 종교의 발전 궤적을 넘어 적어도 다양한 고등 종교의 발전을 포괄적으로 담았어야 한다. 즉 인도 종교, 중국 종교가 그것이다.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도 신은 줄곧 인격화되곤 했다.
하지만 인격화된 신(인지적 본능)과 우주적 질서(정치적 요구)의 긴장은 이 지역에서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고, 히브리즘 유일신교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훨씬 제한적이었다. 예컨대 불교의 다르마, 힌두교의 브라만(Brahman), 유교의 이(理), 도교의 도(道)는 각각의 질서를 형성했고 각각의 ‘인격화된 신’을 거느렸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사상의 혁신은 각 지역의 시공간적 맥락과 맞물려 비교적으로 고찰되기에 충분한 주제다.
둘째, 이 같은 내러티브를 취할 경우 범신론은 근동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보다 범신론은 기원전 1800년 경 중앙아시아로 남하한 인도-아리아인 집단을 기원으로 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먼저 이란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초기적 범신론을 시도했었다. 한편 인도에서도 불교, 베단타 힌두교로 대표되는 범신론이 사실상 주류였다.
특히 불교는 시기적으로 앞선 조로아스터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석가모니’라는 이름에서부터 붓다가 멀게는 이란계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사카무니의 ‘사카’는 이란계 유목민인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다). 아마 페르시아인들이 근동 지역 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친척 관계인 인도 아대륙 세계와도 깊은 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범신론은 조로아스터가 발전시켜 이후 인도 아대륙에서 대거 수용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나 싶다. 언어적으로 친척관계고 수많은 신화-상징체계를 공유하고 있던 두 민족집단에게서 아이디어 전파 장벽은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 수호천사 '프라바시'(faravahar)를 묘사한 것으로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상징으로도 많이 등장한다.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 수호천사 ‘프라바시'(faravahar)를 묘사한 것으로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상징으로도 많이 등장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저자가 진정한 신의 모습이라 생각하는 범신론의 등장을 설득력 있게 쓰고자 했다면 반드시 인도-페르시아의 영향력을 비중있게 다루었어야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은 이슬람 정복 이후 페르시아에도 깊게 남아 이 지역에서 수피즘과 시아파가 융성하게 되는 발판이 되었었다. 한편 불교를 비롯한 인도계 사상은 처음에는 헬레니즘 교역로를, 이후에는 실크로드를 타고 유라시아 각지로 전파되었으며, 이는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큰 사상혁신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인도계 범신론은 이후 동아시아로도 흘러들어가서 도가의 현학이나 유가의 성리학을 만들어내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근동’에만 치우친 아쉬움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배경과 영성 탐구의 길을 따라가는 책의 구성상 인도와 중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책만 보면 근동 종교의 내적 발전이 수피즘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을 하기 딱 좋다. 하지만 이미 기원전 1500년경 유라시아의 네트워크는 느슨하게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예수가 태어나는 서기 0년경에 이르러서는 로마 세계와 중국 세계가 최초의 접촉을 시도하던 차였다. 무엇보다 인도 세계는 문명의 여명기인 기원전 2천 수백년 경에도 이미 근동 문명과 상호 연결된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는 곧 모두이고 모두는 곧 하나”라는 범신론을 설파하고자 하는 책이, 거미줄처럼 얽힌 문명의 상호연결을 배제하고 오로지 근동(서아시아)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근동(서아시아). 진한 초록색은 현대 고고학과 역사학에서의 근동이고, 연두색은 넓은 의미에서의 근동이다. (위키미디어 공유)
근동(서아시아). 진한 초록색은 현대 고고학과 역사학에서의 근동이고, 연두색은 넓은 의미에서의 근동이다. (위키미디어 공유)
종교학자인 저자가 이런 맥락을 몰랐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레자 아슬란은 이런 이야기를 몰라서 안 썼다기보다는 알면서도 안 쓴 것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잘랄룻딘 루미로 끝나는 이 내러티브의 간결성을 위해서는 중간 가지를 분명 쳐야만 했을 것이다.
또 일종의 ‘학술교양서’ 시장에서 그의 책이 ‘학술’보다는 ‘교양’에 치중하고 있는 편이기에, 서구 독자들이 익숙하지 않을 베단타니 우파니샤드니 장자와 호접지몽 얘기는 책의 대중성을 상당히 약화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부족한 점에 대해 대부분 양해한다. 그렇지만 세계 각지의 종교를 이해하고 특히 이란계 사상에 대한 이해가 탁월할 그의 ‘풀파워’로 써낸 책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범신론에 관하여
끝으로 범신론. 사실 나도 현대 사회에서 굳이 종교가 남는다면 일종의 범신론적인 세계관이 핵심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바가 있다. 내가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인격신을 받아들이기에 인류의 과학은 너무나 발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종교가 제공해주던 의미마저 죽였다.
다시는 그와 같은 강렬한 신심을 회복할 순 없겠지만, 너와 나, 우리 모두, 생물과 자연이 모두 하나의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이제 역으로 인지적으로 받아들이기 더 좋다(사이비 뉴에이지 ‘삘’이 차오르긴 하는데 어쨌든 생태학과 신경과학의 기본적 가르침은 ‘상호의존성’이다).
영화 아바타(2009, 제임스 카메론) 중에서
영화 아바타(2009, 제임스 카메론) 중에서
다만, 나는 그 연결망 혹은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적 전일성을 ‘신’이라는 개념으로 부르는 게 굉장히 꺼려지는데, 부분적으로 서구의 유일신 관념이 겹쳐지면서 본래 뜻이 탁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이슬람 전통에 뿌리박은 레자 아슬란은 그렇게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어보인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디가 니까야(혹은 장부; 長部) 중에서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약 50년 동안의 기간↩
다르마: dharma,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와 여러 교법, 법칙, 도리의 의미로 쓰임.↩
디가 니까야 또는 장부는 팔리 경장 5부 중 첫 번째 경전 묶음으로 길이가 긴 경을 모은 것이다. 모두 34개 경이며, 3품으로 나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디가 니까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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