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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 본문
기자조선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
2018. 8. 24. 12:39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의 건국정신은 무엇인가 ?
이성계의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고 기자조선을 계승한 의미로 조선 이라고 했다 ㅡ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펌>《조선의 사대모화의 뿌리는 몽골군벌인 자신의 실체를 감추려는 이성계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출발했다 》
윤은숙 교수는 “결국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주21] 따라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정한 것이다. 즉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부정적이다. 원나라는 사실상 세계의 지배자였고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종속의 정도는 더 심했으며 조선인들이 명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하여 이데올로기(ideology)로 삼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儀禮)의 근간으로 하여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편찬된, 주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구준(丘濬)의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전 8권 : 1465)을 적극 수용하여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다.[주23]
우리에게는 학문의 스승으로 각인된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은 비생산적인 <주자가례>를 더욱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학집요(聖學輯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저술하여 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주자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하여, 주자학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송대(宋代)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송나라 때 이루어진 <주자가례>가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많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가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중화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더니 급기야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 「척화론(斥和論)」]”라고 하기도 하고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송시열의 말 : <肅宗實錄> 9-2-12).”라고 하는 등 역사적 이성(理性)을 상실해갔다.
즉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당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 고려와 세계의 지배자인 원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몽골 군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이성계의 무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들이 민족의 원류인 북방민들을 지나치게 오랑캐로 천시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 전체를 왜곡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한 원인이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글 전재>
이성계의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고 기자조선을 계승한 의미로 조선 이라고 했다 ㅡ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펌>《조선의 사대모화의 뿌리는 몽골군벌인 자신의 실체를 감추려는 이성계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출발했다 》
윤은숙 교수는 “결국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주21] 따라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정한 것이다. 즉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부정적이다. 원나라는 사실상 세계의 지배자였고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종속의 정도는 더 심했으며 조선인들이 명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하여 이데올로기(ideology)로 삼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儀禮)의 근간으로 하여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편찬된, 주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구준(丘濬)의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전 8권 : 1465)을 적극 수용하여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다.[주23]
우리에게는 학문의 스승으로 각인된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은 비생산적인 <주자가례>를 더욱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학집요(聖學輯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저술하여 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주자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하여, 주자학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송대(宋代)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송나라 때 이루어진 <주자가례>가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많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가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중화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더니 급기야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 「척화론(斥和論)」]”라고 하기도 하고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송시열의 말 : <肅宗實錄> 9-2-12).”라고 하는 등 역사적 이성(理性)을 상실해갔다.
즉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당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 고려와 세계의 지배자인 원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몽골 군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이성계의 무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들이 민족의 원류인 북방민들을 지나치게 오랑캐로 천시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 전체를 왜곡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한 원인이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글 전재>
[출처] 기자조선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작성자 조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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