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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본문

천지인 공부/유란시아서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柏道 2019. 3. 25. 14:03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195:0.1]    오순절 날 베드로 설교의 결과들은, 왕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들에서, 대부분 사도들의 장래의 정책들을 정하고 그리고 계획들을 결정하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실제적 설립자였으며; 바울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였고, 그리스인 신자들이 그것을 로마제국 전역에 퍼뜨렸다.

[195:0.2]    전통에 매이고 사제의 지배를 받는 히브리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예수의 복음이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승에 대한 베드로와 바울의 선포 (후에 그리스도교가 됨)를 거부하였지만, 로마제국의 그 나머지는 확장되는 그리스도교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서방 문명은 지적이었고 전쟁에 지쳐 있었으며 기존의 모든 종교들과 우주 철학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회의적이었다. 서방 세계의 민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수혜자들, 위대한 과거의 존경받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 예술, 문학, 그리고 정치적 진보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들의 유산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성취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을 만족시키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 갈망은 만족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5:0.3]    그러한 인간 사회의 무대 위로 예수의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둘러싸여, 갑자기 밀려왔다. 새로운 삶의 질서가 그렇게 해서 이들 서방 사람들의 간절한 가슴에 제시되었다. 이 상황은 더 오래된 종교적 관습과 세상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새로운 그리스도교식 해석 사이에 즉각적인 갈등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갈등은 새로운 것이나 옛 것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거나 또는 어느 정도의 타협으로 끝나야만 한다. 역사는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는 어느 한 민족이 한 두 세대 동안에 동화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을 포옹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가 사람들의 혼에게 제시하였던 것과 같은,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찍부터 종교의식, 교육, 마술, 의술, 예술, 문학, 법, 정부, 도덕, 성(性)에 관한 규칙, 일부다처제, 그리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노예제도에 대해서까지 분명한 태도를 고집하였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마제국 전체와 모든 동방이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으로서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도덕적 충돌을 신속히 촉진시켰다. 예수가 제시한 그 이상(理想)들은, 그리스 철학에 의해 재해석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회화됨에 따라서, 이제 서방 문명의 윤리 도덕, 종교에 구현된 인간 종족의 전통에 대담하게 도전하였다.

[195:0.4]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는 오직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만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세기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의 최고점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운 질서, 삶의 목적과 실재의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을 향하여 점점 더 돌아서고 있었다.

[195:0.5]    어떻게, 그것의 태생의 땅에서는 거의 실패한, 유대에서 기원한 이 새로운 메시지가 그토록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로마제국의 최상의 마음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철학적인 종교들과 신비종파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기인되었다:

[195:0.6]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그가 정한 걸음을 유지하였다.

[195:0.7]    2. 그리스도교가 속속들이 그리스화 되었다. 그리스 철학의 최고뿐 아니라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까지 포옹하였다.

[195:0.8]    3. 그러나 그 중에서 최고는, 그것은 새롭고도 위대한 이상(理想), 즉 예수의 생명 증여에서의 반향(反響)과 모든 인류에게 주는 그의 구원의 메시지에서의 반영이 포함되었다.

[195:0.9]    4.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기꺼이 타협해서, 그 추종자들의 절반 이상이 안디옥 종파로 전향되도록 하였다.

[195:0.10]    5. 마찬가지로 그 다음과 그리고 그 후대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도 이교도와 더욱 타협하여, 로마 황제 콘스탄틴마저도 그 새로운 종교에 설득되어졌다.

[195:0.11]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도의 의례적인 허식을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에게 바울 그리스도교의 그리스화된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교도들과 영민한 거래를 했다. 그들은 미트라 종파와 맺었던 것보다는 이교도들과 더 나은 거래를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의 타협에서도 그들은 극심한 부도덕은 물론 페르시아 신비 사상의 비난받을 만한 다른 수많은 관습들을 성공적으로 제거시킴으로써 정복자가 되고도 남았다

[195:0.12]    현명하였든 또는 현명치 못했든, 이 초기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상들을 자의적으로 양보하고 그리고 더 많은 예수의 관념들을 구하려는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마라! 이렇게 양보된 주(主)의 이상들은 여전히 그의 복음 속에 잠재되어 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충분한 힘을 세상에서 주장하게 될 것이다.

[195:0.13]    그리스도교의 이 이교화로 인하여, 옛 계층은 의례적인 본성에서의 많은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195:0.14]    1. 인간의 도덕에서 새롭고도 엄청나게 높아진 음률을 부르짖었다

[195:0.15]    2.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확대되고 새로운 개념을 세계에 주었다.

[195:0.16]    3. 불멸의 희망이 인정받는 종교에서의 확신의 한 부분이 되었다.

[195:0.17]    4. 사람의 굶주린 혼에게 나사렛 예수가 주어졌다.

[195:0.18]    예수가 가르치셨던 위대한 진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초기의 타협 속에서 거의 유실되었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이교화된 그리스도교의 종교, 다시 말해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일생과 가르침을 지닌 바울파의 해석 안에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교화 되기 전에 이미, 먼저 속속들이 그리스화된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집트에서 온 그리스인이 니케아에서 용감하게 일어나서, 아주 두려움 없이 그의 증여에 대한 참된 진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이 집회에 도전하였고, 그 회의가 예수의 본성에 대한 개념을 감히 가리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다나시우스였으며, 이 신자의 논리와 웅변술이 아니었으면, 아리우스의 신조가 승리했었을 것이다.

 1. 그리스인들의 영향 

[195:1.1]    그리스도교의 그리스화는 사도 바울이 아덴에 있는 아레오파구스 의회에 출두하여 “미지의 하나님”에 관하여 아덴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의미심장한 그 날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곳,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에서, 이 로마 시민은 그곳에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갈릴리의 유대 땅에서 발생된 새로운 종교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리스 철학에는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서 많은 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인 목적─둘 모두 개별존재의 창발에 두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창발을; 예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창발을. 그리스인들은 정치적인 자유로 인도하는 이성적인 자유주의를 가르쳤으며; 예수는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적 해방주의를 가르치셨다. 이 두 관념들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하나의 새롭고도 강력한 헌장을 수립하였으며;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영적 해방에 대한 전조(前條)가 되었다.

[195:1.2]    그리스도교가 실재하게 되고 투쟁 관계에 있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 두 가지 주요 원인은:

[195:1.3]    1. 그리스인의 마음은 유대인들이라 해도 새롭고 좋은 관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다.

[195:1.4]    2.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기꺼이, 그러나 약삭빠르고 영리하게 타협하는 자들이었다; 신학을 다루는 날카로운 거래자들이었다.

[195:1.5]    바울이 아덴에서 일어나서 “그리스도이자 십자가에 못박힌 이”에 대해 설교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영적으로 굶주려있었다; 그들은 묻고 있었고, 관심을 가졌으며, 실제적으로 영적 진리를 찾고 있었다.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와 싸웠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포옹하였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리스 문화의 일부분인 것으로 수정된, 이 새로운 종교를 로마인들이 나중에 받아들이도록 실제적으로 압력을 가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195:1.6]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숭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신성함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두 민족 모두 진리를 사랑하였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제외한 모든 인간 문제들─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인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논의하였다. 종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그리스인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종교에 헌신하면서, 반면 다른 분야의 생각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매우 진지하게 여겼으며, 너무 진지하게 여겼다. 예수의 메시지의 내용에서 비추어지고 있듯이, 이 두 민족들의 여러 세기동안의 생각이 결합되어진 산물이 이제 인간 사회의 새로운 계층에, 어느 한도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믿음과 관습의 새로운 계층에 추진력이 되었다.

[195:1.7]    그리스 문명의 영향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의 문명을 근동 지역에 퍼뜨렸을 때 이미 서부 지중해 지방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스인들은 작은 도시국가 안에 사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종교와 자신들의 정치로 대단히 잘 행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이 그리스를 대담하게 하나의 제국으로 확대시키면서, 아드리아 해로부터 인더스 강까지 뻗어 나갔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 확대의 과업과 충분하게 동등하였지만, 그리스의 정치 행정이나 종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제국으로 확대된 이후에, 상당히 지엽적인 그들의 하나님들은 다소 괴상하게 보였다. 오래된 유대 종교의 그리스도교화된 해석본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들은 진실로 한분 하나님, 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195:1.8]    이런 상태로 그리스 제국은 지탱될 수 없었다. 그 문화적 지배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서방으로부터 제국의 행정을 위한 로마의 정치적 재능이 확보되고,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제국의 존엄을 갖춘 한분 하나님의 종교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오래 견디어냈다.

[195:1.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는 이미 최고 차원에 이르렀다; 그것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학문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창조적인 재능은 쇠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교 안에 부분적으로 구현되어 있던, 예수의 관념과 이상이 그리스 문화와 학문의 구출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5:1.10]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가지고 동방에 진격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의 그리스도교 해석본으로 서방을 공략하였다. 그리고 그리스 문화가 보급된 서방 전역의 어느 곳이든지, 그곳에는 그리스화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렸다.

[195:1.11]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동방 해석본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좀더 진실이 유지되긴 하였지만, 완고한 아브너의 태도를 계속 따랐다. 결코 그리스화된 해석본처럼 진보하지 못하였으며, 결국에는 이슬람 운동 안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2. 로마의 영향 

[195:2.1]    로마인들은 추첨에 의한 정부 대신에 대의(代議) 정부를 채택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로마가 모든 서방 세계에 생소한 언어들과 민족들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용을 가져왔다는 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곧바로 그리스도교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195:2.2]    로마에서의 그리스도교인 들에 대한 초기 박해의 대부분은 단지 그들이 불운하게 설교에서 사용한 “왕국”이라는 용어에서 기인되었다. 로마인들은 어떤 그리고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경쟁의 냄새가 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개하였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오해로 인하여 기인되었던 이러한 초기의 박해가 끝나게 되자, 종교적 포교활동을 위한 마당이 활짝 열렸다. 로마인은 정치 행정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예술이나 종교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둘 모두에 이상스러울 만큼 관대하였다.

[195:2.3]    동양의 법은 엄격하고 독단적이었고; 그리스의 법은 유동적이고 예술적이었으며; 로마의 법은 위엄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교육은 전대미문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가르쳤다. 초기의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헌신적이고 숭고하게 삶을 바치는 개별존재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상에 대해 성실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이름에 걸 맞는 종교가 없었다. 그들의 그리스인 선생들이 그들에게 바울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195:2.4]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아주 훌륭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한 견줄 데 없는 정직, 헌신 그리고 굳센 자아-통제는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지고 성장하는 데에 이상적인 토양이었다.

[195:2.5]    이들 그리스-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국가에 헌신하였었기 때문에, 제도적인 교회에 영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이 쉬웠다. 로마인들은 교회가 국가에 대한 경쟁자로서 그들이 두려워했을 때에만 교회와 싸웠다. 로마는, 민족의 철학이나 토착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였으며, 그 도덕적인 철학으로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도덕적 문화가 되었지만, 그렇게 도매방식으로 새로운 종교를 포옹한 사람들의 영적 성장 안에서 개별적 체험이 된다는 의미로서는 도저히 로마의 종교가 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사실 정말로, 많은 개별존재들이 모든 이 국가 종교의 표면 밑으로 파고들어왔고, 그들 혼의 영양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화 되고 이교화된 그리스도교의 잠재된 진리들 속에 들어있는 감추어진 의미들의 진정한 가치들을 발견하였다.

[195:2.6]    스토아 철학과 “자연과 양심”에 대한 그들의 억센 호소는, 적어도 지적인 감각에서, 모든 로마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잘 준비를 하였을 뿐이다. 로마인은 본성으로 그리고 훈련으로 법률가였다; 그들은 자연법칙까지도 존경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자연법칙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식별해냈다. 키케로와 버질을 낳을 수 있었던 민족은 바울의 그리스화된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무르익었다.

[195:2.7]    그리하여 로마화된 이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인들 모두에게 그들의 종교를 철학화하고, 그것의 관념들을 합동하고 그것의 이상들을 체계화시키고, 실재하고 있는 생명의 흐름에 종교적 관습들을 적응시키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히브리어 경전이 그리스어로 번역됨으로써,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어로 신약 성경이 기록됨으로써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

[195:2.8]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나 다른 많은 민족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잠정적으로 불멸, 죽음 이후에 어떤 식으로든 생존되는 것을 믿어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교가 그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195:2.9]    그리스의 문화적 그리고 로마의 정치적 승리들의 상속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로 지중해 땅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서방 세계를 하나의 하나님을 위하여 준비시켰다. 유대교가 이 하나님을 제공하였지만, 그러나 유대교는 이들 로마화된 그리스인들에게 종교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필로가 그들의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것을 좀 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하나님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들은 준비된 듯이 그것을 포옹하였다,

 3.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195:3.1]    로마의 정치적인 통치가 강화된 후,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후에, 그리스도교인 들은 자신들이 한분 하나님, 위대한 종교 개념을 가졌지만, 제국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로마인들은 그들에게 위대한 제국은 있지만, 제국 경배와 영적 통합에 합당한 종교적 개념으로써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교인 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였다. 로마는 정치적 통치의 합일을 제공하였고; 그리스는 문화와 학문의 합일을 제공하였으며;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생각과 관습의 합일을 제공하였다.

[195:3.2]    로마는 제국의 보편성으로서 민족주의 전통을 극복하였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다른 종족들과 국가들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5:3.3]    그리스도교는 로마에서 스토아 철학자의 활기찬 가르침들과 신비주의 종파들의 구원의 약속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인기를 끌었다. 자신들의 언어 속에 “비(非)이기심”이라는 단어가 없는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에게, 그리스도교는 상쾌한 위로와 해방하는 힘으로 다가왔다.

[195:3.4]    그리스도교에 가장 위대한 힘을 준 것은 그 신자들이 봉사의 삶을 살아갔던 길과 그리고 더욱이 격렬한 박해의 초기에 신앙을 위하여 그들이 죽으며 갔던 길이었다.

[195:3.5]    그리스도의 어린이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 아이를 원하지 않을 때, 특히 여자 아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널리 퍼진 관습을 곧 종식시켰다.

[195:3.6]    그리스도교 경배의 초기 계획은 대부분이 유대인 회당으로 넘겨졌으며, 미트라신 경배 의식에 의해 수정되었다; 나중에, 많은 이교도의 허식이 더해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근간은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도교화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다.

[195:3.7]    그리스도 이후 2세기는 세계의 전체 역사 중에서 좋은 종교가 서방 세계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1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투쟁과 타협으로 뿌리를 내리고 급속히 퍼져나갈 준비를 스스로 하였었다. 그리스도교는 제국을 받아들였다; 제국은 나중에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의 전파를 위하여 위대한 시기였다. 종교적인 해방이 있었고; 여행이 보편화되었으며 생각은 족쇄가 채워지지 않았다.

[195:3.8]    이미 시작된 도덕적 타락을 막거나 또는 이미 확정되고 확장되고 있는 인종 퇴보를 보상하기에 그리스화된 그리스도교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영적 자극이 로마에 너무 늦게 임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제국화된 로마를 위한 문화적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195:3.9]    아무리 훌륭한 종교라도, 정부의 관련사에서 개별존재의 참여 부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로부터, 과도한 온정주의, 과중한 세금과 극심한 징수 폐해, 금을 고갈시키는 레반트족과의 불균형한 거래, 오락의 광기, 로마인들의 규범화, 여성의 쇠퇴, 노예와 민족의 타락, 육체적인 전염병, 그리고 거의 영적 불모지에 이르도록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 위대한 제국을 구할 수는 없었다.

[195:3.10]    그렇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초기의 학교들은 손상되지 않은 많은 예수의 가르침들을 지켜 나갔다. 판타에누스는 클레멘트를 가르친 후에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로 나다니엘을 따라 갔다. 그리스도교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예수의 이상들 중 일부분이 희생된 반면에, 공평하게 말해서, 2세기말 경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위대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기록되어야 한다. 승리는 완성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195:3.11]    그리고 로마제국이 나중에는 몰락하였지만 그리스도교가 생존을 보장받기에 충분할 만큼, 그 제국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받아들여진 것이 그리스적 그리스도교 대신에 왕국 복음이었다면 로마와 전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를 종종 추측해보곤 한다.

 4. 유럽의 암흑기 

[195:4.1]    사회의 부속물이 되고 정치와 동맹자가 된 교회는 필연적으로 소위 유럽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지적 그리고 영적 쇠퇴를 함께 나눌 처지에 놓여졌다, 이 기간 동안, 종교는 점점 더 수도원과 같이 은둔적이 되고, 금욕적이고 법제화 되었다.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는 동면(冬眠)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두루, 이러한 무기력하고 세속화된 종교에 발맞추어서, 신비주의의 계속적인 흐름, 비실체성이며 철학적으로는 범신주의와 동족인 것과 거의 접하고 있는, 공상적인 영적 체험이 존재하였다.

[195:4.2]    이러한 어둡고 절망적인 세기들 동안, 사실상 종교는 다시 중고품이 되었다. 교회의 뒤덮는 권위와 전통 그리고 지시 앞에서 개별존재는 거의 없어졌다. 신성한 재판정에 계신 하나님들에게, 만일 효과적으로 호소하려면. 하나님들 앞에 사람을 대신하여 탄원할 수 있어야 하는, 그러므로, 특별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라성 같은 “성자” 집단의 창조라는 새로운 영적 위협이 나타났다.

[195:4.3]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암흑기를 막아내기에는 무기력하였지만, 충분히 사회화 되고 이교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오랜 기간의 도덕적 어둠과 영적 침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다 잘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 문명의 긴 밤이 지나는 동안 존속되었으며, 문예부흥이 밝아온 세계에서도 여전히 도덕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암흑기가 지남을 뒤 따라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재건은 특별한 지적, 감정적, 그리고 인간 개인성의 영적 유형에 적합한 여러 분파들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믿음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러한 특별한 그리스도교인 집단들, 다시 말해 종교적 계보들이 이 발표를 작성하고 있는 시간에도 아직 잔존(殘存)하고 있다.

[195:4.4]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종교가 예수에 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환시킨 데서 기원되어지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화, 이교화, 세속화, 제도화, 지적 퇴보, 영적 타락, 도덕적 동면, 위협하는 종말, 나중의 회생, 분열,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상대적(相對的) 부흥을 겪은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족보는 선천적 생명력과, 강한 회복력의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바로 이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람의 문명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지배권을 위한 지난날의 싸움으로 특징 지워지는 그러한 저들 파란만장한 위기보다도 훨씬 더 심상치 않은, 실재를 위한 투쟁과 마주하고 있다.

[195:4.5]    종교는 새로운 시대의 과학적 마음과 물질주의적 성향들의 도전에 지금 직면하고 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거대한 투쟁 속에서, 예수의 종교는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5. 현대의 문제점 

[195:5.1]    20세기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모든 종교들이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사회를 인정시키고 그것의 물질적인 문제들을 쉽게 해결하려는 사람의 모든 노력 속에서 “먼저 하늘의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195:5.2]    진리는 분할되고, 격리되고, 고립되고, 너무 심하게 분석될 때, 혼돈되고 그리고 오도(誤導)되기까지 한다. 살아있는 진리는, 물질적 과학의 사실이나 중재하는 기술의 영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적 실체로서 그리고 한 덩어리 안에서 포옹될 때에만 진리를 찾는 자들을 바르게 가르친다.

[195:5.3]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성하고 영원한 운명의 계시이다. 종교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영적 체험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람의 다른 높은 생각의 형태와 언제까지나 구별되어야만 한다:

[195:5.4]    1. 물질적 실체의 사물들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인 태도.

[195:5.5]    2. 추한 것과 대비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심미적인 깊은 이해.

[195:5.6]    3. 사람의 사회적 책무와 정치적 의무에서의 윤리적 인지(認知).

[195:5.7]    4. 종교적이거나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닌, 인간 도덕성에 대한 사람의 감각.

[195:5.8]    종교는 신앙과 신뢰 그리고 확신을 불러내는 가치들을 우주에서 발견하도록 예정되었다; 종교는 경배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교는 마음에 의하여 발견된 상대적 가치들과는 대조가 되는 이러한 최극의 가치들을 혼을 위하여 발견한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참된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만 소유될 수 있다.

[195:5.9]    영적 실체들에 입각한 도덕이 없이 지속되는 사회체제는 중력 없는 태양계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욱 더 유지될 수 없다.

[195:5.10]    육신으로 사는 한 번의 짧은 일생에서, 호기심을 채우려 하거나 또는 혼 안에서 솟구치는 모든 잠재된 모험을 만족시키려고 시도하지 말라. 인내하라! 저속하고 비열한 모험에 멋대로 돌진하는 탐닉에 유혹되지 마라. 너의 에너지에 마구를 채우고 너의 정열에 굴레를 씌워라; 진보적인 모험과 감동적인 발견의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전개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침착하여라.

[195:5.11]    사람의 기원에 대한 혼란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보는 것을 놓치지 말라. 예수가 어린아이들까지도 사랑하였던 것과, 인간 개인성의 위대한 가치를 언제까지나 분명하게 한 것을 잊지 마라.

[195:5.12]    너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너희가 보는 악의 검은 조각들은 궁극적 선의 하얀 바탕에 대비하여 보인다는 것을 기억해라. 너는 그저 악의 검은 바탕에 대비하여 초라하게 나타나는 선의 흰 조각들만을 보지 마라.

[195:5.13]    널리 알리고 그리고 전파해야할 그렇게 많은 진리가 있는 때, 왜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고 하여 세상에서 악에 그렇게 많이 유의해야만 하는가? 진리의 영적 가치들의 아름다움(美)은 악의 현상보다 더욱 즐겁고 고양하는 것이다.

[195:5.14]    종교에서,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체험의 방법을 옹호하고 따르셨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 진리의 추구, 의무에 충실함, 그리고 신성한 선에 대한 경배를 통하여 이 혼의 통찰력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중에서, 사랑이 진정한 통찰력으로 인도하는 참된 안내자이다.

 6. 물질주의 

[195:6.1]    과학자들은 뜻하지 않게 인류를 물질주의적 공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도덕의 은행에 생각 없는 외상을 달아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인간 체험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위에 매겨져있는 청구들을 대처할 수 있다, 오직 생각 없는 사람들만이 인간 종족의 영적 자산들에 대하여 공황상태가 되어간다. 물질주의적-세속적 공황이 끝나면, 예수의 종교가 파산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늘의 왕국의 영적 은행은 “그의 이름으로” 그것에 구하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과 소망 그리고 도덕적 보증을 지불해줄 것이다.

[195:6.2]    물질주의와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충돌이 있던지 간에, 너희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주(主)의 가르침이 충분히 승리할 것을 안심하고 있어도 된다. 실제로, 참된 종교는 과학과의 어떤 논쟁에도 휘말리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인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는 과학에 대해 간단하게 개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깊은 공감을 가지며. 한편으로는 종교 자체는 과학자와 최극으로 관계하고 있다.

[195:6.3]    지혜에서의 필연적인 해석과 종교적 체험에서의 영적 통찰력이 없는, 단순한 지식 추구는 결국에는 염세주의와 인간 절망으로 인도한다. 작은 지식은 정말로 혼란스럽게 한다.

[195:6.4]    이것을 쓰고 있는 시기에, 물질주의적 시대의 최악은 지나갔다. 보다 증진된 납득의 날이 이미 밝기 시작하였다. 과학적 세계의 더 높은 차원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에서 이제 더 이상 전적으로 물질주의적이 아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이전의 가르침들로 인하여 여전히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사실주의 시대는 이 땅에서의 사람의 일생에서 지나가는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를─그의 신자들의 삶 속에서 전환된 예수의 가르침들을─다치지 않고 남겨 놓았다. 과학이 이룩한 모든 업적은, 일생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유치한 환상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이다.

[195:6.5]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일생에 관하여 볼 때, 과학은 양적 체험이며, 종교는 질적 체험이다. 과학은 현상을 다룬다; 종교는 기원과 가치 그리고 목표를 다룬다. 원인들을 물리적 현상의 설명으로 돌리는 것은 궁극의 것들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리고 끝에 가서는 과학자들을 처음 위대한 원인자─낙원천국의 우주 아버지─에게로 곧바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195:6.6]    기적의 시대로부터 기계의 시대로의 격렬한 이동은 사람에게 전적으로 당황되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기계론의 그릇된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은 바로 그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낸다. 물질주의자 마음의 숙명론적인 기민성은 우주가 제멋대로이고 목적이 없는 에너지 현상이라는 그의 주장들이 그릇되고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증명하고 있다.

[195:6.7]    필경 상당한 교육을 받았을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와, 거리에 흔히 있는 사람의 생각 없는 세속주의는 둘 모두 오로지 사물에만 관심을 둔다; 그들에게는 모든 진정한 가치, 신성한 규약, 그리고 영적 본성에서의 만족이 알맹이를 이루지 못하며, 신앙과 소망 그리고 영원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현대생활에서의 커다란 문제들 중의 하나는 사람이 자신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과 종교적인 헌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5:6.8]    물질주의는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장치로 축소하고, 그리고 그를 낭만도 없고 기계적인 우주의 수학 공식에 무력한 위치를 차지하는 단순한 산술 기호로 이루어 놓는다. 그러나 수학의 이 모든 광대한 우주는 주(主) 수학자가 없이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은 질량의 보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만, 종교는 사람들의 혼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그것은 영적 실체들과 영원한 가치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체험에 관계되는 것이다.

[195:6.9]    오늘날의 물질주의적 사회학자들은 공동체를 조사하고, 곧바로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발견했던 그대로 사람을 내버려둔다. 1,900년 전에, 배움이 없는 갈릴리인은, 사람의 내적 체험에 대한 영적 기여로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있는 예수를 조사하였고, 그러고 나서는 밖으로 나갔고, 그리고 로마제국 전체를 뒤집어버렸었다.

[195:6.10]    그렇지만, 종교적 지도자들은 중세 시대의 나팔소리로 현대인들을 영적 전쟁터로 불러내려고 시도하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최첨단의 표어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정치적 만병통치약이라도 영적 진보를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거짓된 종교들은 실체에서의 회피를 내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는 그의 복음에서 필사 사람을 영적 진보의 영원한 실체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로 선도하였다.

[195:6.11]    마음이 물질로부터 “창발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에 우주가 단지 기능구조이고 마음이 물질과 구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관찰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 다른 두개의 해석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에 대한 개념들은 물리학이나 화학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기계는 진리, 옳은 것에 대한 굶주림, 그리고 선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한다.

[195:6.12]    과학은 물리적일 수 있지만, 진리를 식별하는 과학자의 마음은 동시에 초(超)물질적이다. 물질은 진리를 모른다, 그것은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들로 즐길 수도 없다. 영적 계몽에 기초되고 인간 체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신념들은 물리적 관찰들에 기초한 수학적 추론들과 같이 실제적이며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 근거한다.

[195:6.13]    만약에 사람들이 단지 기계들이라면, 물질적인 우주에 대해 거의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다. 개별존재성은 비(非)실재로 될 것이며, 개인성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195:6.14]    우주들의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낙원천국이 절대적 기능구조라는 사실은, 둘째근원이며 중심의 분별불가적인 의지의 현존 안에서, 결정자들이 조화우주에서의 배타적 법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까지나 확실하게 만든다. 물질주의가 있다, 그러나 배타적이 아니다; 기능구조가 있다, 그러나 분별불가적이 아니다; 결정론이 있다. 그러나 단독적이 아니다.

[195:6.15]    물질의 유한 우주는 마음과 영의 병합된 현존이 없다면, 결국에는 균일해지고 그리고 결정론으로 될 것이다. 조화우주 마음의 영향은 물질세계 속이라 해도 끊임없이 자발성을 주입한다.

[195:6.16]    실재의 어느 영역에서도 자유나 진취성은 영적 영향과 조화우주-마음 통제의 정도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그것은 인간 체험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실제성의 정도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단 하나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너희를 발견하였다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195:6.17]    선(善)과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 속에 자유와 균일성이 둘 모두 실재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발견자는 발견할 자유가 있었다. 발견된 사물은 실제이고 명백히 균일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물로서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7. 물질주의의 취약성 

[195:7.1]    물질적-마음을 가진 사람이 기능구조적인 기계론 우주와 같은 그렇게 취약한 이론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참된 종교에서의 개인적 체험의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빼앗아 가도록 허용하는 것이 얼마니 어리석은 것인가. 사실들은 결코 참된 영적 신앙과 다투지 않는다; 이론들은 그럴 수 있다. 과학은 종교적인 신앙─영적 실체들과 신성한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신을 타파하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195:7.2]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 하는: 일생의 지평을 넓히고 그의 개인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과학은 그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해야 한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계속되는 대립관계를 가질 수 없다. “과학적인 방법”은 단지 물질적인 모험들과 물리적인 성취들을 재는 지적 척도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그리고 전적으로 지적으로 되는 것은, 영적 실체들과 종교적 체험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혀 쓸모가 없다.

[195:7.3]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은 단지 기계라면, 그러한 사람은 그 자신을 그런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적-사람은 그러한 물질적 우주의 실재 사실을 결코 의식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론적 과학의 물질주의적 낙담과 절망이, 바로 자신의 초(超)물질적 통찰력이 물질주의적 우주에 대한 이들 잘못된 판단과 자기-모순의 개념들을 형성한 과학자의 영이-내주된 마음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95:7.4]    영원과 무한의, 진리(眞)의,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에 대한 낙원천국 가치들은 시간과 공간 우주 현상의 사실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가치들을 감지하고 분간하기 위해서는, 영으로-태어난 필사자 안에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195:7.5]    영적 진보의 실체와 가치들은 단순히 물질적 마음에서의 영화롭게 꾸민 백일몽-어떤 "정신적인 구체적인 투사 활동"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 영, 내주하고 있는 조절자의 영적 조짐이다. 그리고 "상대성"을 발견해 내는 어렴풋한 이해와 가벼운 접근으로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에 대한 너희 개념이 혼란을 겪도록 하지 말라. 그리고 자아-표현의 필요성과 관련되는 너희의 그 모든 간절한 탐구가, 너의 참되고 더욱 나은 자아의 현시, 조절자-표현을 제공하려는 데에 실패하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마라

[195:7.6]    만약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었다면, 물질적 사람은 결코 그러한 배타적으로 물질적인 실재에서의 기계론적 성격 개념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 그 자체가 마음의 비물질적 현상이다, 모든 마음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속속들이 물질적으로 제약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비물질적 기원에서 비롯한다.

[195:7.7]    필사 사람의 부분적으로 진화된 두뇌 정신적 기능구조는 일관성과 지혜가 철저하게 자질부여 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자만심은 종종 그의 이성(理性)을 지나치고 그리고 그의 논리를 벗어난다.

[195:7.8]    대부분의 염세적인 물질주의자의 바로 그 염세주의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염세주의자의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하고 있다. 낙관주의와 염세주의는 둘 모두 사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치에 대한 마음 의식 안에서의 개념 반응들이다. 만일 우주가 정말로 물질주의자들이 그것이 그러하다고 간주하는 것이었다면, 그러면 인간 기계로서의 사람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모든 의식적(意識的) 자각이 결여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으로 태어난 마음속에 가치들에 대한 개념의 인식이 없다면, 우주 물질주의의 사실과 우주 운행의 기계론적 현상은 절대로 사람에 의해 감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본성이나 가치를 인식할 수 없다.

[195:7.9]    과학은 오직 물질들과 사실들만을 인지하고 취급하기 때문에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적이 될 수 없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초(超)과학적이다. 사람은 자연의 물질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자연의 물질적 차원들을 초월하는 현상이며, 그 속에서 마음의 통제 속성들과 영의 창조적 본질특성을 나타낸다.

[195:7.10]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지적 그리고 도덕적 자살을 저지르려고 사람의 헛된 노력을 기울이는 그러한 비극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195:7.11]    만일 우주가 오직 물질적이고 그리고 사람이 단지 기계였다면, 과학자들에게 우주의 기계화에 대한 가정을 세우도록 용기를 붓 돋는 과학이 없었을 것이다. 기계들은 측정하거나 구분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과학적 작업은 초(超)기계적 지위의 실존개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195:7.12]    만약에 우주 실체가 단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라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그리고 그러한 평가의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하여 우주 밖에 있어야만 하며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195:7.13]    만약에 사람이 단지 기계이라면, 도대체 어떤 기법으로 이 사람이 그는 단지 기계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또는 안다고 주장하는가? 그 자신의 자아-의식 평가의 체험은 단지 기계의 속성이 결코 아니다. 자아-의식이 있는 공공연한 기계론자가 기계론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대답이다. 만약에 물질주의가 사실이었다면, 자아-의식이 있는 기계론자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그 사람은 도덕적 개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또한 참말이다.

[195:7.14]    물질주의의 바로 그 주장이 그렇게 독단을 주장하도록 추정하는 마음의 초(超)물질적 의식을 암시한다. 기계론은 나빠질 수는 있지만, 결코 진보할 수는 없다. 기계는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포부를 가지거나, 이상화하거나, 진리에 굶주리거나, 또는 올바름에 목마를 수 없다. 그것들은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진보의 목표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려고 분투하는 숭고한 과업을 선택하도록 열정으로 그들의 삶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들은 결코 지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또는 영적이 아니다.

[195:7.15]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영적으로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필사자의 모론시아이며, 물질적인 것, 사람과 영적인 것, 사람사이에 개재(介在)되는 분야이다. 시(詩)는 물질적 실체에서 영적 가치로 달아나려는 노력이다.

[195:7.16]    높은 문명에서는, 예술은 과학을 인간화 시키고, 반면에 그것은 진실한 종교─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통찰─에 의해 영성화된다. 예술은 인간과 실체의 시간-공간적인 평가를 묘사한다. 종교는 조화우주 가치들의 신성한 포옹이다 그리고 영적 상승과 확대로 영원한 진보를 내포한다. 시간의 예술은 영원이 시간의 실체 그림자들로서 반영하는 신성한 원형틀의 영적 표준에 장님이 될 때에만 위험하다, 참된 예술은 일생에서의 물질적 사물의 효력적인 조작이며; 종교는 일생의 물질적인 사실들의 고상한 변환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에 대한 스스로의 영적 평가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195:7.17]    자동장치가 자동화주의 철학을 생각해 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그리고 동료 자동장치들의 개념을 형성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195:7.18]    과학자에게 정당한 인정이 고려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무가치하다. 예술가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예술의 감상은 참된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자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도덕에 대한 어떤 평가도 보람이 없다. 철학자를 무시한다면, 철학의 인식이 덕성을 북돋우지 못한다, 그리고 종교는 종교가가 자신의 체험 속에서 그리고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알려고 노력하는, 바로 종교가의 그 진정한 체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들의 우주는 스스로 이신 이,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끊임없이 관리하는 무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의의(意義)가 없다.

[195:7.19]    기계론자들─인본주의자들─은 물질적 흐름에 따라서 떠내려가는 경향이 있다. 이상주의자들과 영성주의자들은 에너지 흐름줄기들의 명백하게 순수한 물질적 진로를 변경하기 위하여 지능과 활력으로 감히 그들의 노를 사용하려 한다.

[195:7.20]    과학은 마음에서의 수학으로 살아간다; 음악은 감성에서의 박자를 표현한다. 종교는 무한에서의 더 높고 영원한 선율에 대한 측정의 시간-공간 조화 안에 있는 혼의 율동이다. 종교적 체험은 인간의 일생 속에서 진실로 초(超)수학적인 그 무엇이다.

[195:7.21]    언어에서, 알파벳은 물질주의의 기능구조를 대표한다. 반면에 수많은 생각, 커다란 관념, 그리고 고상한 이상의─사랑과 미움에서의, 비겁함과 용기에서의─의미를 표현하는 말들은, 물질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법칙에 의해 정의되고, 개인성의 의지가 주장하는 바에 의해 지시를 받으며, 그리고 선천적인 상황에서의 자질에 따라 제한받는 범위 안에서, 마음의 행위들을 묘사한다.

[195:7.22]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는 그리고 그가 과학이라고 여기게 되는 법칙, 기능구조 그리고 균일성 같은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우주 현상을 관찰하고 그리고 창조의 물질측면의 그 구조적 위상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해 내는 그러한 호기심이 강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적이고, 병합하고 그리고 분간해 내는 그 과학자들과 같다. 또한 우주는 예술가의 예술과는 다르다, 그러나 오히려 영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들의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분투하고, 꿈꾸며, 열망하고, 전진하는 예술가와 같다.

[195:7.23]    과학이 아니고, 과학자가 에너지와 물질의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실체를 감지한다. 예술이 아니고, 예술가가 물질적 실재와 영적 해방 사이에 개재하는 과도기 모론시아 세계의 실재를 실증한다. 종교가 아니고, 종교가가 영원한 진보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영적 실체들과 신성한 가치들의 실재를 증명한다.

 8. 세속적인 전체주의 

[195:8.1]    그러나 물질주의와 기계론이 얼마큼 정복되어진 이후라 할지라도, 20세기 세속주의의 지독한 영향은, 수백만의 영문을 모르는 혼의 영적 체험들을 여전히 망치게 할 것이다.

[195:8.2]    현대 세속주의는 두 가지의 범세계적인 영향에 의해 육성되고 있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소위 과학─무신론적 과학이라고 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편협하고도 하나님이 없다는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전체주의적 중세(中世) 그리스도교 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한 서방 문명의 거의 완벽한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불복으로 발단이 되었다.

[195:8.3]    이 계시의 때에,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생활에서 유행하는 지적 그리고 철학적 풍조는 단연코 세속적─인본주의적이다. 서방의 사고(思考)는 300년 동안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어 왔다. 종교는 점점 더 명목상의 영향, 주로 의식적인 행사가 되었다, 서방 문명에서의 자칭 그리스도교인 들의 대부분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실제로 세속주의자이다.

[195:8.4]    사람을 시들게 하는 전체주의 교회의 지배의 손아귀에서 서방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자유롭게 하는 데는, 커다란 힘, 강력한 영향이 필요하였다. 세속주의는 교회의 통제하는 속박을 깨트렸다, 그리고 이제는 다음 차례로 그것이 현대인들의 가슴과 마음 위에 새롭고도 하나님 없는 유형의 지배력을 확립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압제와 독재적인 정치 형태는 과학적 물질주의와 철학적 세속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교회의 지배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자마자, 그것은 사람을 노예처럼 사슬에 묶어 전체주의 국가에 팔았다. 세속주의는 사람을 단지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노예상태의 압제로 팔기 위하여 교회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있다.

[195:8.5]    물질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한다, 세속주의는 단순히 그를 무시한다; 적어도 그것이 초기의 태도였다. 더욱 최근에는, 세속주의는 그것이 한 때 종교의 전체주의적 속박에 저항하였던 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이, 더욱 투쟁적인 태도를 취하여 왔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라! 인간 사회에서의 하나님이 없는 이 철학은 오직 불안, 증오, 불행, 전쟁, 그리고 범세계적 재난으로 이끌 것이다.

[195:8.6]    세속주의는 인류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잘 주목해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하여 반기를 든 세속자의 은혜로운 수익들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마라. 서방 문명은 세속자의 반기의 결과로, 오늘날 많은 해방과 만족을 누리고 있다. 세속주의의 엄청난 오류는 이것 이었다;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 생활의 거의 전부가 지배되는 것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면서,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후에, 세속주의자들은 하나님 자신에게 대항하는 반기를 들도록, 때로는 잠잠하게 그리고 때로는 공개적으로 조성하며 계속 나아간 것이었다.

[195:8.7]    너희는 미국 산업주의의 놀라운 창조성과 그리고 서방 문명의 전례 없는 물질적 진보를 이룩하게 한 세속주의 반기(叛起)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세속주의의 반기가 너무 멀리 갔고 그리고 하나님과 참된 종교에 대한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계 전쟁과 국제적 불안정의 예기치 못한 결과가 또한 뒤 따라 발생되었다.

[195:8.8]    현대 세속주의 반기에서의 축복, 관용, 사회적 봉사, 민주적 정부, 그리고 시민의 해방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과학을 증진시키고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세속주의자들이 참 종교에 반목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195:8.9]    그러나 세속주의가 생활의 확장에서의 모든 이러한 최근 수익에서의 유일한 본원은 아니다. 20세기의 수익 이면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만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의 인지되지 않은 그리고 인정받지 않은 영적 작용들이 있다.

[195:8.10]    하나님 없이, 종교가 없이, 과학적인 세속주의는 결코 그 기세들을 합동할 수 없고, 그것의 다양하고도 경쟁적인 관심들, 종족들, 그리고 민족주의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세속주의의 인간사회는, 비교할 수 없는 물질주의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분열되고 있다. 이러한 반목에서의 분열을 막는 가장 주된 응집력 있는 기세는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평화의 가장 주된 장애물이다.

[195:8.11]    세속주의의 선천적인 결점은 정치와 힘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무시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서, 사람들의 형제신분을 절대로 이룩할 수 없다.

[195:8.12]    세속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낙관주의는 환상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나 해방도, 재산이나 풍요도 평화로 인도할 수 없다.

[195:8.13]    과학, 교육, 산업, 그리고 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초반 1/3 기간 동안, 유란시아인 들은 그 때 까지 전체 그리스도교 섭리시대 동안에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무시무시한 추수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끔찍한 파괴는 이제부터 다가올 것이다.

 9. 그리스도교의 문제 

[195:9.1]    너희들의 영적 유산, 물질주의적 그리고 세속 시대의 불모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통하여 흘러내리고 있는 진리의 강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 지나간 시대들의 미신 신조들로부터 벗어나려는 너희들의 온갖 값진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가 영원한 진리를 견고히 붙잡고 있음을 확실히 하라. 그러나 인내하라! 현재의 미신 반기가 지나가면, 예수의 복음의 진리들이 새롭고 더 좋은 길을 비추기 위하여 영광스럽게 지속될 것이다.

[195:9.2]    그러나 이교화 되고 사회화된 그리스도교는 손상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들과 새롭게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주(主)의 일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모자란다는 것이 서글프다. 예수의 종교에 대한 새롭고도 보다 충분한 계시가 물질주의적 세속주의의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고 물질주의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타도하도록 운명되어있다. 유란시아는 이제 사회적 재조정, 도덕적 소생(蘇生), 그리고 영적 계몽의 가장 놀랍고 그리고 매혹적인 신(新)시대들 중의 하나의 바로 그 고비에서 지금 떨고 있다.

[195:9.3]    예수의 가르침들은, 비록 크게 변경되기는 하였지만, 그들 탄생시절의 신비 종파들, 암흑기의 무지와 미신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는 20세기의 물질주의, 기계론,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하여 서서히 승리하고 있다. 그리고 큰 시험과 패배의 위협을 받는 그러한 시기는 항상 위대한 계시가 내리는 시기이다.

[195:9.4]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들, 예수와 그의 비할 데 없는 가르침에만 오로지 용감하게 의존하려는 영적 남자와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만약에 그리스도교가 사회적이고 물질적 문제에 계속 바쁘게 일하면서 자신의 영적 임무에 게으름을 끈질기게 지속한다면, 영적 부흥은 오로지 사람의 영적 쇄신에만 헌신할 수 있는 예수의 종교에 대한 이들 새로운 선생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영으로-태어난 이들 혼들은 세상의 사회적,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재조직에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靈感)을 신속하게 공급할 것이다.

[195:9.5]    현대는 사실들과 모순되고, 그리고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의 최고 개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종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왜곡되고 수치스럽게 타협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참되고 근본적인 기초들─예수의 참된 일생과 가르침들─을 다시 발견할 시간의 종이 울리고 있다.

[195:9.6]    원시인은 종교적인 두려움에 미신적 속박의 일생을 살았다. 현대의 문명인들은 강력한 종교적 신념의 지배 아래에 붙잡힌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사색하는 사람은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항상 염려해왔다. 강력하고 감동시키는 종교가 사람을 지배하려고 위협할 때, 그는 변함없이 그것을 합리화, 전통화, 그리고 제도화하려고 시도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에 대한 통제를 얻으려고 바라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 따라서, 계시 종교조차도 사람이-만든 사람이- 지배하는 것으로 된다. 현대의 남녀 지능존재들은 예수의 종교가 자신들에게─그리고 자신들을 가지고─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런 모든 두려움에는 모두 그럴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예수의 종교는, 정말로 그 신자들을 지배하고 변환시키는데,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데에 자신들의 일생을 바치도록 요구하며, 삶의 에너지를 사람의 형제신분의 사심 없는 봉사에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

[195:9.7]    이기적인 남자와 여자들은 필사 사람에게 제공된 가장 위대한 영적 보물에 대하여서도 결코 그러한 값을 치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고 현혹시키는 이기심의 추구에 수반되는 비참한 실망감으로 사람이 충분히 환멸을 느끼게 되고, 뒤이어 형식화된 종교의 불모지를 발견하고 난 후에야, 오직 미몽에서 깨어나기에 충분하게 될 것이고, 그는 왕국 복음, 나사렛 예수의 종교로 전심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195:9.8]    세상은 더욱 더 손을 거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종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교─20세기의 종교 중에서 최고─조차도 단지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이며, 더구나 스쳐간 사람의 손길을 너무도 많이 체험하고 있는 종교다. 사람들은 그들의 인정된 종교 교사들이 전해주는 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실제로 이 세상에 사셨던 원래 그대로의 예수를 볼 수 있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들을, 손을 거치지 않은 원래 그대로를 알게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큰 깨우침을 체험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물을 묘사하는 말이 그것을 직접 보는 것만큼 전율을 줄 수 없으며, 또한 교리 말씀이 하나님의 현존을 아는 체험만큼 사람의 혼에 영감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신앙은, 저 건너 세상들에서의 신성한 가치의 영원한 영적 실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의 혼에 있는 소망의-문을 언제나 활짝 열어 놓을 것이다.

[195:9.9]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탐욕, 전쟁의 광기, 그리고 힘에 대한 강한 욕망의 도전 앞에서 그것의 이상들을 과감히 낮추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사람에게 들어있는 최상의 것을 향하여 동물적 진화의 이 모든 유산들의 단계를 넘어서라고 그리고, 은혜로서,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정상을 달성하라고 외치는, 순결하고 초월적인 영적 호소로서 서 있다.

[195:9.10]    그리스도교는 형식주의, 과대한 조직화, 주지(主知)주의, 그리고 다른 비(非)영적인 경향들에 의해 서서히 죽을 위협을 받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교 교회는, 이어지는 인류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영적 변환의 효력을 발휘하도록 예수가 위임한 것과 같은, 그러한 활기찬 신자들의 형제신분이 아니다.

[195:9.11]    소위 그리스도교라는 공동체는 종교적인 믿음과 관습은 물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운동이 되어 버렸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물줄기는 많은 고대의 이교도의 늪과 야만적인 습지(濕地)의 물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배타적인 근원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갈릴리 고원은 물론, 마찬가지의 많은 낡은 문화적 분수 구멍들이 물을 이 현대의 문화적 물줄기 안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10. 미래 

[195:10.1]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정말로 위대한 봉사를 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예수이다. 세계는 주(主)를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영으로 태어난 필사자들의 체험 안에서, 이 세상에 다시 사는 예수를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익하다; 너희는 너희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현대 문화는 예수의 일생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 영적 세례를 받아야만 되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의 복음의 새로운 납득의 빛이 비쳐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가 그렇게 높이 들어 올려졌을 때, 그가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당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복자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이상의 것, 모든 사람들에 대한 증진된 삶과 영감(靈感)의 흘러넘치는 근원이 되어야한다. 종교는 개인적 체험 안에서 하나님 현존의 실체에 대한 발견으로 인하여 신성하게 되기 전에는 단지 하나의 고양된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195:10.2]    세상에서 예수의 일생의 아름다움과 장엄함, 인간성과 신성, 소박함과 독특성은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을-계시하는 그렇게 마음을 때리고 호소하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시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람 형체로서의 그러한 초월적인 증여로부터 감히 교리를 만들어 내거나 영적 속박의 신학 체제들을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제지되어야만 한다. 예수 안에서 우주는, 사랑의 영이 시간의 물질적인 불리한 조건들을 이겼고 그리고 물리적 기원의 사실을 극복했던 필사 사람을 만들어내었다.

[195:10.3]    항상 마음에 간직하라 -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그들은 우주 최종의 신성한 운명으로 영원한 개인성 체험의 충만하고 최종적인 달성에 다다르는데 서로가 필요하다.

[195:10.4]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가 한 것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살아 계시며 사랑하시는 영이시라는 선언 다음으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선언이었다.

[195:10.5]    주(主)를 향한 승리하는 혼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 그의 형제를 사랑으로 끌어안고 그리고 영적 인도아래 그를 필사 실재의 보다 높고 신성한 목표로 휘몰아치는 그러한 예수 공동체를 예시하는 것은, 사람과 그의 세계를 변환시키는 충동, 의무, 또는 집회에서 터져나오는 경주의 첫번째 걸음과 같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봉사와 해방을-사랑하는 헌신으로 그러한 두번째 걸음이다. 그리스도교는 비록 지금 첫걸음을 기꺼이 나아가고 있지만, 진정으로 두번째 걸음을 내딛는 자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진실로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삶을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삶을 살고 사랑하는 예수의 공언된 추종자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인류가 도덕적 암흑에서 풀이 죽고 비틀거린다.

[195:10.6]    왕국의 예수와 형제신분에서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수단을 이용하여 새롭고도 변환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의 부름은, 육신에서의 예수님 동행자로서 이 땅위에서 거닐었던 날들 이후로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극을 받아본 적이 없으므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전율케 할 것이다.

[195:10.7]    하나님의 실체를 부인하는 사회적 체계나 정치적 제도는 인간 문명의 증진에 어떤 건설적이고 지속적인 방법으로도 기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됨으로써, 그것의 앞으로의 발전에 가장 큰 유일한 장애를 주고 있다; 특별히 이것은 동양에 관한 한 참말이다.

[195:10.8]    교회중심주의는 당장 그리고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신앙, 성장하는 영, 그리고 하늘의 왕국의 영적 연합으로 사람의 형제신분을 이루고 있는 예수의 신앙-동료들이 직접 접하는 체험과, 양립될 수 없다. 과거 업적의 전통들을 지키려는 칭찬할만한 욕망은 종종 낡은 경배 체계의 방어로 이끈다. 고대의 생각 체계들을 육성하고자 하는 선의의 욕망은, 현대인들의 확장하고 전진하는 영적 갈망들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새롭고도 적당한 수단들과 방법들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제지한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위대하게 서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참된 복음─나사렛 예수의 가르침들─의 즉각적인 진보에 장애물들이다.

[195:10.9]    복음의 그리스도에게 기쁨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들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고, 그리고 그가 기초하였던 것에 대해 잘못 가르침을 받아온 교회를 열심히 후원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예수는 소위 그리스도교 교회라는 것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본성과 일치되는 모든 방식으로, 세상에서의 그의 필생의 일에 대한 실재적인 최고의 주창자로서 그것을 육성해 왔다.

[195:10.10]    만약에 그리스도교 교회가 주(主)의 계획을 용감하게 지지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무관심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영적 약속에 참여하기 위하여 몰려들 것이며, 이 커다란 모험과 끝까지 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195:10.11]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반하여 갈라진 집은 설 수 없다”는 자신의 표어들 중의 하나에 구체화되어있는 운명에 직면하고 있다. 비(非)-그리스도교 세계는 파벌화된 그리스도교계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만이 그리스도교의 가능한 통일의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교회─예수와의 형제신분─는 보이는 것이 아니며, 영적이며, 부득이한 획일이 아니라, 합일로 특징지어진다. 획일은 물질주의적 본성을 갖는 물리적 세계의 꼬리표이다. 영적 합일은 살아있는 예수와 신앙 결합의 열매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왕국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그리고 영적 형제신분의 진보를 더 이상 방해하는 것을 거절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신분은 제도화된 사회 조직과는 대조가 되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도록 운명되어 있다. 그것이 그러한 사회 조직들을 잘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대신 들어앉아서는 결코 안 된다.

[195:10.12]    그러나 20세기의 그리스도교조차도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종족들의 하나님을-아는 사람들의 병합된 도덕적 진수(眞髓)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세상의 선(善)을 위한 가장 큰 힘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의 선천적 또는 후천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막강한 도덕적 감정에 반영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다.

[195:10.13]    그러나 교회가 상업과 정치에 가담한 것은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동맹은 주(主)에 대한 파렴치한 배반이다. 그리고 진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발생되는 신앙을 종종 감히 질식시키려고 하였으며, 비정통적인 옷을 입고 우연히 나타났던 진리의 전달자들을 박해하려고 하였던 것을 좀처럼 잊지 않을 것이다.

[195:10.14]    세상에 그러한 형태의 경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영적으로 나태한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이고 신성한 전통의 오래되고 권위적인 종교를 갈망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권위 없이 지내라고 하기에는 인간 진화와 영적 진보가 도무지 충분치 않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의 형제신분은, 만약에 그들이 오직 진실로 영-인도된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되려한다면, 사회적 그리고 기질에서 다양한 등급들의 가족 집단들을 아마도 잘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 형제신분에는, 그 어떤 분파적 경쟁이나 집단적 적의 또는 도덕적 우월성과 영적 무오성(無誤性)에 대한 주장도 설 자리가 없다.

[195:10.15]    그리스도교인 들의 이러한 다양한 집단화(集團化)들은 서방 문명의 다양한 민족들 중에서 신자가 되고자 하는 다양한 다른 유형들을 수용하는 일에 기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스도교계의 분파는, 예수의 복음을 동양 사람들에게 전해주려고 시도할 때 심각한 약점을 제공한다. 이들 종족들은 점점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떨어져서, 많이 다른, 별개의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195:10.16]    유란시아의 가장 큰 희망은, 오늘 날에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추종자들의 수많은 가족을 사랑하는 봉사 안에서 영적으로 결합시키게 될, 새롭고도 확대된 그의 구원의 메시지의 제시와 함께 예수에 대한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 속에 있다.

[195:10.17]    세속적인 교육일지라도, 만약에 일생 설계와 성격 진보에 관여시키는 방법을 젊은이에게 가르치는 일에 좀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면, 이 위대한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일생의 최극 목표, 잘 균형이 잡히고 장엄한 개인성의 계발을 육성시키고 진행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너무 지나친 자아-만족대신에 도덕적 교육단련에 대한 가르침이 대단히 필요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종교는 필사자의 생활을 확대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강화시키는 영적 자극을 제공할 수 있다.

[195:10.18]    그리스도교는 즉흥으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 기어로 운전되어야만 한다. 고속 기어의 영적 행위들은 새로운 계시와 그리고 진정한 예수의 종교를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박힌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저들 가르침들을 시작하여 300년 동안 로마세계를 정복하고 그 후에 로마를 타도한 야만인들에게도 승리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볼 때, 위대한 종교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교가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복─흡수하였고 드높였음─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그리스도교 종교가 신비종파와 이교도의 과도한 투여의 결과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수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스스로 다시 일어났으며 실질적으로 전체 서방 세계를 다시 정복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불멸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들을 간직하고 있다.

[195:10.19]    만약에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가르침들을 더 많이 파악할 수만 있다면, 현대인들이 그의 새롭고도 증가되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그를 돕는 것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195:10.20]    그리스도교는 모든 세계의 마음속에, 사회 체계, 산업 생활. 그리고 서방 문명의 도덕적 표준의 일부로서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에 큰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이상주의가 결여된 과학, 원칙이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는 재물, 억제되지 않는 쾌락, 성격이 결여된 지식, 양심이 결여된 권력, 그리고 도덕성이 결여된 산업을 허용하는 죄로 비틀거리는 사회를 부지불식간에 후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10.21]    현대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자신이 그렇게 씩씩하게 찬양하는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거기에서 나사렛의 예수로부터 필사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살아있는 복음─을 배우면서, 서방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을 후원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