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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학[7] 발언의 과학 - 디크리(선언)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대사학

대사학[7] 발언의 과학 - 디크리(선언)

柏道 2019. 2. 6. 22:14


기원문, 로자리, 디크리

대사학[7] 발언의 과학 - 디크리(선언)

 

​​​​

발언의 과학 - 디크리

수행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

기도와 명상, 그리고 주문이나 디크리를 바치는 것처럼 소리로 하는 수행입니다. ​

기도는 사랑을, 명상은 지혜를, 디크리는 힘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세 가지의 균형은 대사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

그 효능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디크리의 과학 즉 '발언의 과학'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오해되고 있기도 하고 일부러 억제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발언의 과학'은

고대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의 사제들이 빛의 힘을 불러일으킬 때 쓰던 기술로

대사들은 이 테크닉들을 다시 복원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이는 이 시대의 제자들이 몰라서는 안될 중요한 테크닉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수련이나 기수련은 크게 볼 때 명상수련에 들어갑니다.

'발언의 과학(the science of the spoken Word)'은

​만트라, 챈트(chant), 기도문, 기원문(invocation), 확언(affirmation), 찬가, 빛의 명령 등을

바침에 있어

​'목 챠크라'와 함께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언 긍정문으로 예를 들자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같은 것이지요.

즉 존재의 진리를 긍정하여 그것이 현현하게 하는 것 빛의 명령은 피아트(fiat)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빛이 있어라' 또는 '잠잠해져라'하는 등등의 명령문이지요. ​

'잠잠해져라' 는 영어로 'Peace be still'인데 예수께서 바람을 잠재울 때 쓰던 명령이지요. ​

이는 감정을 잠재울 때 사용되는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신의 진화하는 의식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그리스도적 존재의 잠재력을 열 수 있게 해주는 자기-지식에 이르는 열쇠를 주려는 것은

신의 최고의 바람입니다.

 

자기 통달의 에너지와 지성, 동기를 발출케 할 그 열쇠는 응답을 촉구하는 부름(call)입니다.

부름은 응답을 재촉한다. call compels answer.

 

부름은 말 그대로 신을 불러서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

'아버지께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겠느냐?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당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

우리는 우리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신으로부터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은 우리를 위해 일할 만반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디크리는 그 신과 신의 일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

그러나 실제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 자신입니다.

좌우지간 신은 우리가 달라고 하면 안 주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

단, 그것이 신의 뜻과 일치하는 것일 때입니다.

‘발언’은 영어로는 'spoken Word'입니다. ​

여기서 Word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

그것은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것으로 요한은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그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가 곧 하느님이라.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그로 인하여 지어지지 않은 이가 없더라."

이 말씀은 우주의 창조력입니다.

발언의 과학은 바로 그 말씀의 힘을 발출시키는 테크닉입니다. ​

그 말씀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그리스도 자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성난 파도와 바람을 잠재웠습니다. ​

그것은 그가 말씀(그리스도)과 하나가 되었고 그의 명령은 곧 신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 앞에 모든 만물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그리스도는 예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 안에 있습니다. ​

그러면서도 언제나 하나입니다. ​

그래서 '독생자'라고 하는 겁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예수께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

아니 그 이상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그가 할 것이며, 그 이상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갈 것이기 때문이다." ​

 

나를 믿는다 함은 예수와 하나가 되었고, 모든 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

그것은 그 그리스도가 자신의 참자아이며 자신의 실체임을 받아들이며,

그가 바로 나의 구원자이며 세계의 구원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니까 너희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얘기는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나 디크리를 하늘에서 더 증폭시켜 준다는 얘깁니다. ​

이런 일은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대사들도 그렇게 하고

여러분이 승천한 다음에도 또 그렇게 할겁니다. ​

그래서 승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구 전체의 빛이 증가하여 점점 좋은 곳이 된다 이겁니다.

'발언의 과학'은 그 말씀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

그 말씀이 이 세계에서 일하기 위해서 육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

즉 이 세계에서 일할 초점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

여러분이 바로 그 초점입니다. ​

여러분이 신의 뜻에 따를 때 여러분은 말씀의 도구가 됩니다.

디크리에 관한 세인트 저메인 대사의 가르침 --------

 

사람은 디크리의 올바른 사용법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사람이 말한 일체의 사소한 말에 대해서도 심판의 날 그에 따른 응보가 주어지리라. ​

너희는 너희 말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겠고, 너희 말로 인해 저주를 받으리라."

디크리는 부주의한 말이 아니다. ​

그것은 세심한 말이다. ​

그리고 우리가 권하는 패턴은 사람을 위해 지고의 선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것이다.

(실상 사람의 모든 말은 디크리이고 만트라(주문)입니다. ​

우리의 말을 통해서 신의 에너지는 항상 작용합니다. ​

 

'나는 바보다'라고 말한다면 '내 안에 계신 신은 바보다'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그리고 신의 에너지는 당신을 바보로 만드는 데 쓰일 겁니다. ​

 

'나는 빛이요, 진리다'라고 한다면 '내 안에 계신 신은 빛이요 진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신은 당신 안에 빛과 진리로 현현될 것입니다.

'너는 왜 그리도 모자라냐'고 상대방을 힐난하면

내 안에 있는 신의 에너지가 상대방을 멍청하게 만드는데 쓰입니다. ​

그렇게 나간 신의 에너지는 상대방의 성장을 방해하는 족쇄로 현현됩니다. ​

그래서 비난을 오랫동안 받게 되면 대개의 사람은 성장을 멈추고 풀이 죽게 됩니다. ​

그리하여 그는 이미 자신에게 있는 능력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말은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사용한 대가는 반드시 자신이 거두게 됩니다.

"내가 어리석었어" 라고 말할 때, 그게 자기 반성에 그치면 되겠지만

그게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시인이라면 정말로 멍청해 질 겁니다.

그게 맨날 되풀이되면 정말로 멍청이가 됩니다.

그게 왜곡된 신의 힘 즉 마야의 힘입니다​. ​

물론 본질은 어리석지 않겠지만요.

쓸데없는 말이 부정적인 카르마를 만들기 때문에 수행자는 침묵을 금처럼 여겨야 하는 겁니다. ​

필요한 말만 하고 그 외는 '예'나 '아니요' 만으로 대답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하고 현재의 자기 모습을 완전하다고 보는 것하고는 다른 얘깁니다. ​

'너희는 신이다'라고 했을 때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고)을 그 자체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네피림적인 생각입니다. ​

​교만과 탐욕의 덩어리인 자신의 모습을 신으로 보고 자신의 매사를 합당하다고 본다면

그 악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런 존재들이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서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다주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겸손과 '자기 존재의 긍정' 사이의 균형 속에서 자리잡아야 합니다. ​

겸손은 자신의 현재 모습 이 결코 신이 아니라 거짓된 것이기에

드러나지 않은 신성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

'자기 존재의 긍정'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신성이

자기의 본질이자 자기 존재의 법칙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

그러한 긍정은 되풀이 될수록 존재의 참빛이 점차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흔히 만트라 또는 디크리라고 하는 것은

신성 에너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발산할 수 있도록

그 의미와 단어를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리고 주문이나 디크리를 할 때 평소보다 좀 더 집중해서 말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말보다 효과가 강한 것입니다.

세인트 저메인의 말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디크리는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크리는 신께 보내는 편지로 여겨져야 한다.

 

(1)

디크리의 인사말은 기원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의 개별화된 신적 현존체와

영적 하이어라키를 구성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말(디크리의 서두)은 경건히 바쳐졌을 때,

하느님과 승천한 이들의 응답을 재촉하는 부름이 된다.

(즉 아엠 프레즌스와 여러 대사들, 천사들의 이름을 서두 부분에 넣습니다.)

소방수가 그대의 도움요청을 거절할 수 없듯이

우리도 이러한 소환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인사말의 목적은

그대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합심하여 사랑스럽게 소리내는

신께 보내는 편지의 몸체부에 대한 응답 안으로

승천대사들의 에너지를 즉각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즉 자기의 기도에 대사나 천사들을 끼여들게 하는 겁니다.)

(2)

편지의 몸체부는 자신이나 남을 위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특질들,

보통의 기도에서도 포함될 수 있는 기원들을 명시한 글귀로 구성된다.

그대의 외면적 의식과 하부의식 그리고 초의식 또는 상부 자아를 통해서

발언의 힘을 발출하게되면,

그대가 불러일으킨 승천 대사의 지고한 의식도 그대가 간구한 것의 발현에 관여하게 된다는 점을

확신해도 좋다.

(즉 대사나 천사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게끔 일한다는 것입니다. ​

이런 존재들은 우리가 신의 뜻에 합당하게 요구하는 기도나 간구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저질적이라면 어두운 것들이 일할 위험이 있지요).

(3)

이제 디크리를 종결함에 이르러,

하느님의 가슴 안에서 편지를 봉인하는 받아들임(the acceptance)은

영의 권역으로 위임하는 마음으로 바친다.

​​

그러면 그곳으로부터 연금술(alchemy : all-chemistry of God 하느님의 일체적 화학)과

침전의 틀림없는 법칙을 따라 발현이 물질적 형태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온다.

 

(종결부분에서는 자기가 바라는 바가 꼭 발현하고 확대되길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수학에서 제곱의 힘을 이해하는 자는

집단으로 신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킴에 동참할 때

단순히 일 더하기 일 베이스로 참여자의 수만큼 그 위력이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디크리를 하는 사람 수와 디크리의 횟수로 제곱하여

발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힘의 발산을 증대시켜 주는 '제곱의 옛 계약' 속으로

동참자들이 진입해 들어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두워진 세상으로 보내는 빛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의식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생명안으로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디크리를 충심으로 권하고 있지만,

그룹 디크리는 소원하는 선에 대한 강력한 심상화가 동반되었을 시에는

개인적인 디크리보다 세계적 규모에서 더욱 효과적이며,

참여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신속한 응답을 초래하게 된다.

( 심상화는 시각화, 영상화 즉 visualization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럿이 모여서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디크리를 하면 전쟁이나 재난도 막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성 주위를 돌면서 소리를 지르니까 성이 무너져 버렸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그 예지요.)

명심할 것은 누적된 필멸적 악취로 에워싸인 오늘날의 형태의 세계 속으로 선(Good: God 신)을 불러일으킬 때면

언제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높은 데서부터 발출되어 오는 선(빛)은 (그 빛의 높은 진동수 때문에)

지구의 대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정적 바이브레이션에 의해(이들 바이브레이션의 낮은 진동수때문에)

거의 항상 자동적으로 반발된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디크리를 함에 앞서 자기 주변에 보호의 역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대사들이 주는 디크리 중에는 개인적, 세계적 악에 도전하는 디크리가 있는데

이런 것은 충분한 준비없이 하다가는 오히려 반작용에 말려들어가 버리기 쉽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버리기도 하고 갑자기 분노가 일어나거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도

반작용의 하나지요. 반작용은 대부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빛에 비례해서 나타납니다. )

디크리에 있어서 박자 또한 중요하다.

올바른 박자(리듬)는 디크리를 통해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의 특질들을

혹성전체로 끌어 당겨올 영적인 바이브레이션의 가장 침투적인 투사를 만들어 낸다.

혹성체 위로 물결치는 원들을 형성하는 이들 파장의 모멘텀은

헌신자가 같은 노력을 쏟기 위해 모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빛의 심화를 창출해낸다.

"너희는 일을 명하라. (Thou shalt decree a thing.)

그러면 그 일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Job 22:28 )

Thou shalt also decreea thing,

and it shall be established unto thee:

and the light shall shine upon thy ways.

이 말은 디크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힌 고대의 격언이다. ​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고 했던

그 태초에 하느님이 사용한 그것을 작용케 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디크리를 지배하는 법칙과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모임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디크리하는 것을 접하는 사람은

어떤 부정적 세력이나 엔터티(entity)들의 영향 아래 놓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들 세력은 자연스레 다이나믹 디크리의 사용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디크리를 하는 장소에 처음 들어가거나 디크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처음 듣게 되면 거기서 발출되는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 사람의 내면에 숨어있던 엔터티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분노나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들 의식 속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온갖 종류의 엔터티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수행을 방해하고 빛의 흐름을 왜곡하는 요인들입니다.

이는 빛의 정화작용을 통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제대로 하면 그런 엔터티들이 발동을 못합니다.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로써 신성의 빛과 에너지로 변환(transmutation)시켜 버려야지요.

엔터티는 인간하부의 감정덩어리 같은게 응집되어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엔터티 중에는 알콜의 엔터티, 마리화나의 엔터티, 자살의 엔터티 같은게 있는데

술자리라면 알콜의 엔터티같은 게 형성되는 장소고 또한 이런 엔터티들이 술을 더 부추기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술을 먹고 그로 인해 발산되는 에너지가 그 엔터티들의 생명원이니까요​​.)

디크리의 올바른 사용은 연습을 요한다. ​

처음부터 우주의 완전함이 자신의 생명에 쌓인 일체의 쓰레기를 쓸어가 버릴 거라고

기대해선 안된다.

 

올바른 디크리는 기술이다.​

좀 더 숙달됨에 따라 디크리의 속도를 높여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즉 바치는 비율을 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속도를 높여감에 따라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자신의 전자적 패턴의 진동율을 고양시키는 이러한 가속은

그 사람의 세계 속에 있는 부정적 생각과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뭐든지 잘하려면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 그 모멘텀을 길러야 합니다. ​

그래서 수행은 마치 피아노같은 악기를 연습하는 것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

악기 연주자는 한두 대목을 연습하고 또 하고 또 합니다. ​

어떤 수행도 마찬가지지요. ​

힘 안들이고도 쉽게 효과를 가져오는 방법을 믿지 마십시오.

생명의 에너지들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신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그리스도적 주체 또는 상부 자아의 특권입니다. ​

인간적 자아는 불완전하고 미완인지라 창조적 명령을 발할 수 있는 권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디크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안에 계신 전능한 하느님의 현존이신 '아이앰'과 나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이름 안에서"

​'In the name of Mighty Victorious Presence God I Am in me, and My Holy Christ self'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자신의 현재의 한계와 능력을 인식하는 제자는

일체의 육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성령의 힘으로 자신의 의식을 새롭게 할 신의 전능함을

시인합니다. ​

성령은 제자의 심장 안에 세줄기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거룩한 불로 발현되어 있습니다.

디크리 또는 신적인 명령과 디크리하는 자, 그리고 디크리에 대한 응답 모두는

신으로 신의 삼위일체적 발현인 것입니다. ​

디크리하는 자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 이 디크리를 바치는 것이다. ​

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에너지이다. ​

그리고 내 안에서 발현하고 있는 '발언의 힘'에 의해 법칙을 실현하고 있는 이도

바로 하느님이다" 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하급 자아)은 신의 가슴으로부터 나와 발현된 완전함으로 응집되는 빛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는 빛의 원천도 아니고, 창조의 주재자도 아니며,

빛으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할 고유의 힘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신의 빛, 신의 말씀, 신의 디크리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가

창조주의 완전한 일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희생물로 순결에 헌정합니다.

그처럼 누가 '행위자(doer)'인지를 명심하고

제자는 아버지/어머니 하느님(아앰 프레즌스)과 성자(자신의 그리스도 자아로 현현된 만유의 그리스도)와

성령(형태와 의식에 신의 에센스인 생명을 부여하는 거룩한 불의 에너지들)의 이름으로

디크리를 바치는 거룩한 의식을 집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문이다(I AM the Door)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라고 했을 때 'door'는 'doer'입니다. ​

그리고 '나는'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하느님)'입니다. ​

즉 바로 진정한 행위자는 하느님이라는 거지요. ​

그래서 예수께선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지요.​

'부처가 부처를 깨닫는다'는 말하고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이런 인식이 참다운 수행의 요체입니다.)

디크리하는 장소는 잘 정돈되고, 깨끗하며, 환기도 잘되고, 조명도 적당한게 좋습니다.

먼지가 많거나 어수선한 곳, 탁한 공기, 어두운 불빛은 디크리의 효과를 떨어트립니다.

이런 것들은 빛의 흐름을 방해하고 천사들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이들 천사들은 신의 거룩한 에너지를 증폭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천사들입니다.

수행할 때 천사 또는 신장 또는 데바라고도 하는 존재들이 옆에서 수행을 돕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주변을 정돈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민감한 존재라 약간의 부조화스런 진동도 꺼려합니다.

불가에서 오채를 먹지말라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오채의 냄새나 진동이 이런 존재들을 못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음식들은 수행자의 몸속에 들어가 수행자의 부조화스런 의식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존재들은 수행자를 외부의 나쁜 진동에서 보호하는 일도 하지만

신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수행자의 기도를 전달하는 사자 역할도 합니다.

야곱이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꾼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일은 안 보이는 세계에서 늘상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

[출처] 대사학[7] 발언의 과학 - 디크리(선언) (불멸의 황금 피라밋) |작성자 일무인

** 이 글을 쓰신 분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광우라는 분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53 문:

​당신이 전번과 이번에 말하고 있는 소재들은 의식(儀式 ritual)의 요소처럼 들리는데,

발언의 과학을 사용함에 있어서 儀式의 요소에 대해 말해 주지 안겠는가?

답:

​儀式(ritual)이란 말은 내게 재미있는 의미를 전해 준다.

나는 그 단어를 분해해서 "right-you-all 그대의 모든 것을 바르게 하라."로 생각한다.

儀式은 과학자의 실험실에서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건반에서건,

인간이 에너지를 극대로 사용키 위해 에너지를 명령하는 방법이다.

"Right-you-all "이 뜻하는 바는 "에너지를 바르게 함"이다.

 

우리 모두는 신의 에너지를 '잘못 특질화'(misqualify) 해왔다

어제 우리는 화를 내었다.

그저께 우리는 질투했다.

그 전날 우리는 불안에 빠졌거나 괴로워했거나 큰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 것 또한 신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생명의 목적은 모든 에너지를 완전의 법칙과 사랑의 법칙으로 특질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아주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작품이고

예수가 그리스도로 알았고, 고타마가 붓다로 알았던 그 의식의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儀式 속에서 에너지를 사용함은 일상적인 활동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신은 내게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주었다

. 나는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하겠다.

 

지난날 신께서 내게 에너지를 주었으나 나는 썩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나에게 성령과 거룩한 불의 선물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용서의 법칙, 변환의 법칙을 불러 일으켜야겠다.

나는 신에게 부탁해서

그의 거룩한 불이 어제의 에너지.증오의 에너지를 통하여 지나가

그것들이 사랑으로 바뀌게 하리라."

그 변화는 '물이 포도주'로,

인간적 불완전의 물이 신의 신성한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이다.

그래서

"가슴과 머리 그리고 손의 디크리"에서

엘모리아는 용서의 디크리를 주었던 것이다

이 용서는 우리를

내면의 자아, 그리스도와 동조상태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가 바로 우리의 존재 안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가진 이이다.

예수는 그 그리스도의 인격화(personification)였다.

그래서 그는 병을 치료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 말 안에서

그는 원자와 분자들의 정렬상태를 야기시켰고

그리하여 치유(wholeness 온전함, 전체됨)가 일어나게 했던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지금 외치고 있다.

"너의 죄는 사해졌노라."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다음 디크리를 바친다.

 

 

<< 용서의 디크리 >>

I AM forgiveness acting here,

Casting out all doubt and fear,

Setting men forever free

With wings of cosmic victory.

I AM calling in full power

For forgiveness every hour;

To all life in every place

I flood forth forgiving grace. (세번)

나는 이 자리에 활동하는 용서이다,

일체의 의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우주적 승리의 날개로

사람을 영원히 자유케 하는

나는 온 힘을 다해 부릅니다.

쉬지 않고 용서를...

모든 곳에서 모든 생명에게

나는 용서의 은총이 넘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용서할 때 생명은 우리를 용서한다

.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듯

,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소서."

그러므로 용서를 위한 이 디크리는

우리기 모든 이에게 용서를 보낼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불의나 부당하게 당했던 모든 곳에서

용서의 바이올릿 불꽃이

우리 가슴으로부터 나와

이 발언의 디크리 안에서 나와

우리가 혹시라도

잘못 이해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는 것을 영상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커다란 평화와 사랑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문제들의 부조화가 용해됨을 느낀다.

우리가 용서를 보낼 때

생명은 용서를 우리에게 다시 보내준다.

성경은 말한다.

"물에 그대의 빵을 던져라.

그러면 여러 날 지나 그것이 네게 돌아오리라."

우리의 빵은 우리의 에너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식의 물 위에 던진다.

그것은 순수한 신의 에너지이므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 안에 작용하고 있는 원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 인과의 법칙이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우리가 선한 진동으로

에너지를 심을 때 선한 진동으로 에너지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승의 나선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 나선 운동의 정점은 영혼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과 매일 매일 재결합하게 될 영혼의 해방이다

.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매일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한다. 나는 매일 올라간다.

죽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림이다.

올라감은 새사람을 입음이다.

.발언의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올라간다.

 

 

 

이것이 명령하는 신이다,

사람은 신의 이름 안에서 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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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문: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은 신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다는 얘깁니까?

답:

​사람은 신의 이름 안에서 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을 때,

"땅을 다스리라."고 말했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신은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응답은 땅의 에너지들이

조화 안에 거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이제 에너지에 대한 명령은

비행기와 배를 만들고,

기술을 진보시키고,

원자를 분열시키고,

정원을 가꾸는데 이용되고 있다.

우리가 전체적인 복지나 공공의 안녕, 인류의 축복을 위한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땅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명령하는 신이다.

이 말은 우리가 신을 에너지로

생각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생명의 모든 것은 신이다.

그것은 범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어디에나 퍼져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51 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대신 그 근원으로 직접 가고 있는 셈인가요?

답: 우리는 근원으로 간다.

우리는 성취하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리 정하고 에너지를 부른다.

그리고

신이 이미 디자인해 놓았고

우리가 자유의지로써

긍정 또는 비준한 패턴

또는 매트릭스 안에서 그것을 봉인한다.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 중에서 :

지상에서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할 때마다, 기록의 천사가 전자적 몸의 크기를 늘려 준다.

실제로 선한 행위는 당신이 가동시킨 불씨이다.

그것은 세상으로 그 바이브레이션을 증폭하며, 물결쳐 나가

당신이 베푼 은혜의 수혜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축복하고 같은 류의 것을 더욱 더 낳아가는 불씨이다.

(여기서 전자적 몸은 코잘체를 얘기합니다.)

덕행의 빛은 해당되는 코잘체의 고리로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자아에 의해 증폭되어져 다시 또 다시 되돌아와 당신의 신적 잠재력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더욱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빛이 필요로 할 때면,

당신이 예비로 저장해둔 '천국의 보고'인 코잘체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아앰 프레젠스'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에너지는 코잘체를 타고 내려와 심장 챠크라에 도착하여 다른 챠크라로 퍼져 나갑니다.

이렇게 내려온 에너지는 우리 맘대로 변형해서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래 신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변형하는 걸 '특질화 (qualify)'한다고 말합니다.

'특질화'는 똑같은 진흙으로 동물도 만들고 사람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에너지를 가지고 누구는 사람을 살리고 누구는 사람을 죽입니다.

그게 특질화 (qualification)입니다.

사람에겐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에 어떤 특질을 부여할 것인가는 제맘대로입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온 중생을 구제하건 온 중생을 타락시키건 맘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겁니다.

이렇게 특질화된 에너지 중에 조화스럽고 선한 것은 상승하여 코잘체에 쌓입니다.

이렇게 쌓인 덕은 그 사람이 절대로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훔쳐갈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생에서 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꺼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조화스럽게 특질화된 에너지는 상승할 수 없습니다.

이는 밑에 쌓입니다.

이렇게 오용한 에너지가 쌓여 있는 곳을 '일렉트로닉 벨트'라고 부르는데

이는 배꼽부터 밑으로 소용돌이 형태로 되어 있는 역장(force field)입니다.

인간의 무의식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괴물들이 다 들어있는데

그게 바로 다 일렉트로닉 벨트라는 곳이 들어있는 것들입니다.

여기 쌓인 에너지들을 본래의 순수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변환(transmutation)이라 하는데

변환작용을 하는 에너지가 바로 '바이올릿 불꽃'입니다.

(바이올릿 불꽃을 통해 그 저질화된 에너지가 변환되면 상승해서 코잘체로 올라가지요)

이 코잘체는 승천한 이후에도 계속 자라납니다.

승천한 이후에도 대사는 계속 진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사들 중에는 지구의 일에만 관여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온 우주를 그 의식으로 덮고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우주적 존재(Cosmic Being)'이라고 부릅니다.

불경에도 보면 어마어마한 부처님들이 등장하는데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이 그런 경우지요.

이는 절대로 과장이 아니고 우리들의 미래 모습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는 똑같지만 또한 각각 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62

​문: 대개 사람들이 빠져있는 나쁜 습관이나 부정적인 성향을 고치는데

발언의 과학이 이용될 수 있습니까?

 

답: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다.

 

미륵불(Coming Buddha)로 알려진 로드 마이트레야(Lord Maitreya)는

"디크리를 통한 두려움의 극복"이란 글에서 그 문제에 관해 답변한 바 있다.

 

"내가 하길 바라는 좋은 일을 나는 하지 않고,

내가 하지 말길 바라는 악한 일을 나는 한다."는 바울의 말은

그러한 하부 의식적 동기와 모멘텀의 딜레마를 표현하고 있다고 마이트레야는 말했다.

마이트레야는 질문한다:

우리자신과 세상 안에서 나타나고 있음이

발견된 악한 의도와 악한 행위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발언의 과학을 통한 에너지의 절제된 사용에 관한 수련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문제에 대답한다.

마이트레야는

습관의 모멘텀을 그 중심의 주위로 감겨진 전자기 코일에 비교한다.

그 코일이 중심 둘레로 감겨진 횟수는

습관과 그 모멘텀의 힘을 결정한다.

그 모멘텀의 파괴는

발언의 과학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습관에 빠진 횟수는

그 습관의 힘을 결정한다.

우리가 디크리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습관의 힘을 깨트리게 된다.

그 코일을 하나 하나 푸는 대신 바로 그 코일의 전체 역장을 깨트리며

습관은 발언의 과학을 통한 신의 힘에 의해 깨지는 것

마이트레야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