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스크랩]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의미와 해석 본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의미와 해석
I. 서론
약속의 땅인 가나안과 관련된 여러 가지 표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 표현은 성서 전체에서 20회 정도 사용이 되었는데, 모세 오경에서 15회,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 5회 사용되었다.1)
"젖"과 "꿀"을 근동지방의 신화와 연결시켜 신의 특별 선물(special gifts of god)이나 신의 기호 식품들
(favorite diet of gods)로 해석하려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주석가들은 그동안 일관되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이라는 표현은 땅의 비옥함을 함축적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가나안 땅을 다소 과장시켜 생산성이 넘치는 땅으로 나타난
독특한 표현이라고 해석하였다. 특별히 사막의 유목민들이나 애굽에 종살이하였던 히브리 민족에게는 그러한 표현이
먹을 음식이 풍부한 땅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2) 그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 것은 성경 자체가 젖과 꿀,
혹은 그러한 것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성경에서 젖과 꿀은 대표적인 고단백질 음식으로 여겼다.
그래서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광야에서 숨어 지내던 다윗과 그의 신하들에게 제공된 중요한 음식물 중에는 젖과 꿀로
만든 것이 포함되었다(삼하 17:28). 그것들은 또한 고대사회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교역 물품들이었으며(겔 27:17)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봉헌되는 물건이기도 하였다(대하 31:5). 창세기에서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들들에게 야곱이 함께 보내는 선물에 포함된 물품이기도 하였다(창 43:11).
"무엇이 꿀보다 달겠느냐?"라는 성경의 수사적 질문(삿 14:18)에서 볼 수 있듯이, 특히 꿀은 단 것을 대표하는
식물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달콤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비교적 표현에 꿀을 사용하였다.
잠언에서 꿀은 즐거움과 건강함을 주는 선한 말에 비유되고 있다(잠 16:24).
그런가 하면, 꿀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시 19:11; 119:103), 지혜(잠 24:13; 16:24) 혹은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
(아 4:11; 5:1) 등과 같이 다양한 즐거움과 유익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분명히 젖과 꿀은 고대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는 값진 물건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주셨던 만나는 그 맛이 꿀 섞은 과자 맛 같다고 하였다(출 16:31). 그런가 하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죄인들에게는 젖과 꿀이 정녕 허락될 수 없는 양식이기도 하였다(욥 20:17).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해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실제 지리적 상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따라서 그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극히 힘들다는 점에서 이 표현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일 년 중 거의 절반 이상이 계속되는 고온 건조한 기후의 자연환경과 개발의 조건마저 그 가능성이 희박한
땅이 이스라엘이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주변지역은 사막 내지는 준 사막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무대로 삼았었던 산간지방은 석회질 바위로 뒤덮여 있는 척박한 지역이고 보면 과연 성서에서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표현만큼 기름진 땅이었으나 험난한 역사를 겪으면서 본래의 아름다움은 파괴가 되고
지금과 같이 황폐한 현실이 된 것일까? 아니면 성서의 표현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이상적인 땅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이러한 해석상의 난제는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주제이었다. 이런 해석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결책으로서, 학자들 중에는 이 표현이 실제적인 땅의
비옥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도 했고, 혹은 유목민족들이 신화에서 연유된 축복과 이상의 땅을
소망하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관한 대표적 표현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느
한 측면으로 치우쳐 이해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실제 현실과 더불어 이스라엘민족의 다양한 역사 경험과 신앙 속에서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주제라고 여겨진다.
본 논고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의미와 해석을 다음의 세 가지 입장, 즉
(1)고대 근동아시아의 지리적 차원,
(2) 가나안 땅의 생활 경제적 차원, 그리고
(3)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분석하여 그 해석적 시도를 하려고 한다.
그러한 해석적 시도에 앞서서 가나안 땅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먼저 살펴봄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관한
보다 더 큰 신학적 문맥(context)을 찾아보려고 한다.
II. 성서에 나타난 땅 개념의 신학적 의미
A. 땅과 관련된 용어들
구약에서 땅을 지칭하는 용어로서는 `아다마'와 `에레츠'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라는 뜻의 `아돔'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붉은 색을 띈 비옥한 땅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 주변의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한데,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러한
토양을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땅'이라고 부른다. `아다마'로서의 땅은 경작이 가능한 땅, 소유지로서의 객관적
가치가 있는 땅, 인간의 거주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2)
그러므로 `아다마'의 반대적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불가능한 사막이나 광야 등이다.
땅에 대한 또 다른 용어는 `에레츠'이다.
이 용어는 비옥한 땅인 `아다마'와는 달리 땅의 외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의 개념이다.
즉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 된다.
이런 우주의 구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에레츠' 땅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에레츠'의 땅은 정치적 개념을
내포한 땅으로서 인간의 역사와 신앙, 그리고 사회조직 등으로 의미화 내지는 역사화 되어 있는 땅을 의미한다.2)
그런 면에서 성서신학의 주제가 되는 땅 개념은 `아다마'이기보다는 보다 더 포괄적 개념인 `에레츠'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땅을 `에레츠'와 `아다마'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하게 땅을 공간(space)과 장소(place)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공간이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없는 완전 자유의 상태로서의 땅이며, 그렇기 때문에 책임성 자체도 없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었고, 그 사건이 기억되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거쳐서 연속성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땅이다.2) 따라서 공간(space)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회피이지만, 장소(place)의 추구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추구하였던 땅은 비옥성과 더불어 풍요를 보장하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었으며, 역사의 부름을 외면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강조된
`장소'로서의 땅이었다.
B. 에덴으로부터의 추방과 가나안으로의 부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에덴동산은 단순한 땅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의미의 땅이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설(창2:8)하신 땅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벽한 조화를 누릴 수 있는 땅이었다.2) 그러한 조화로운 삶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네 방향으로 흐르는
풍부한 물 근원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 2장 8절-27절 사이에 묘사되어 있는 내용에 의하면, 에덴은 물이 풍부한
땅이었다. 에덴의 중앙 부분에서 발원하는 수원은 동산 전체를 적실 뿐 만 아니라 네 방향으로 흘러 네 강의 근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풍부한 수원과 흘러 내려가는 강의 이미지는 단순한 물이기보다는 영적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 것으로서, 에덴 안에서 누리는 완벽한 조화와 풍요로운 삶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었고 동시에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은 곧 에덴의
풍요로운 근원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원천적 삶의 시작은 창조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땅인 에덴으로의 도입이었다고 한다면, 인간의 실패는 그러한 본질적 삶의 땅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인류를 사방으로 흩으신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새로운 구속역사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역사는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새로운 땅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창12:2-7).
여기에서의 새로운 땅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살게 될 땅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는 신학적 차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이 인류 구속사를 향한 부름 곧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여 추방당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부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
전체를 향한 부름의 초청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이면서 동시에 인간 전체에게 회복 될 에덴동산의 원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
C. 땅의 신학적 의미
성서에 나타난 땅 개념에 관한 신학적 연구는 최근까지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한 주제이었다.
그러나 땅(land)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 쓰인 빈도수를 본다면 그것은 놀랄 만큼 자주 사용이 되었다.
땅을 구원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한 마르텐스(Elmer A. Martens)
교수는 `땅'이란 단어가 구약에서 만도 2,504번이나 나오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서 네 번째로 많이
나오는 단어이며, 통계적인 수치만으로는 계약사상 보다도 더 중심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2)
성서에 나타난 땅의 의미를 연구하는 분야로서는 여러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땅의 외형적 형태를 다루는 지형지리, 국경문제 혹은 지파별 땅 분배 등을 다루는 정치지리, 혹은 땅의 비옥함, 경제성,
종교-문화의 관련성 등을 주제로 삼는 분야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땅을 단순한 인간 삶의 공간만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나님과 땅과 이스라엘 백성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신학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땅의 신학적 이해를 위하여 성서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땅이 하나님에게 속하였다'는 사상이다.
그러한 성서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창조신앙이 그러한 하나님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화답하는 아브라함의 고백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자"라고
표현되었다(창 14:19). 이스라엘의 선택과 언약의 상대자임을 강조하는 출애굽기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출 19:5). 여기에서의 `세계'는 히브리어 `에레츠'를 번역한 것으로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땅을 의미한다.2)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의 실제적 주인이심을 보다 명백히 밝힌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는 이유 때문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못한다는 희년 규정과 관련하여 나오고 있다.
성경에서 땅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소유권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근거를 제시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땅의 실제적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살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라는 주장 다음에 제시된 이스라엘은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 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로 받았을 뿐이지 땅의 실제적 주인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오히려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는 신분으로서 그 땅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 (‘게르’와 ‘토샤브’)라는
신분은 완전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장기 체류자를 의미하는데, 그런 신분으로서는 합법적으로 토지와 같은 재산권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비록 가나안 땅을 소유하여 살고 있지만 그것은 정식 주민으로서의 재산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땅을 소유할 능력이나 권리조차도 없었다. 다만 궁극적인 소유주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분배받아 관리할 뿐이다. 그 땅은 이스라엘의 기업이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에게 영영히 주어진 것이다.
땅이 하나님의 축복된 선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1)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은 선조들에게 약속된 것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법전이나 종교의식을 통하여 인정되고 있다; (3)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유지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특별한 삶의 형태가 요구된다.2) 히브리어에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없다.
단지 `말하다'라는 동사를 문맥에 따라 `약속하다'라고 번역할 뿐이다.
그러나 땅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특별히 `맹세하다'(샤바아)라는 동사가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부름은 땅에 관한 약속(창 12:7; 13:14-16; 15:18-21; 17:8)으로 시작되었다.
그러한 약속은 그의 자손들에게 계속적으로 확인되었으며(창 26:3-4, 24; 28:13; 35:9-12)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에게도
확인되고 있다(출 6:8).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들은 약속이기보다는 맹세이었다. 그래서 데이비스(W. D. Davies)같은
학자는 `맹세의 땅'이라는 표현이 `약속의 땅'이라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2)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약속과 성취의
역사적 실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실제적으로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은 지파 간에
분배된 토지가 양도 불가능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자기 친족이 아닌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땅을 판 경우가 없다는 사실과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토지 매매에 관한 문서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침묵에 의한 논증이다.2) 역사적인 증거로서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들 수 있다(왕상 21장).
나봇이 왕명을 거역하여 결국 목숨을 잃게 되면서 까지도 자신의 땅을 아합 왕에게 내어놓지 않은 것은 재산의 양도
불가능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예이다.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7) 라는 율법 조항
역시 토지의 부동성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토지의 양도의 불가능성은 이스라엘이 땅을 상실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적용되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하여 땅을 상실하였지만,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땅이 양도될 수 없다는 근거에 의하여 포로귀환의 소망을 선포하였다(렘 12:14-16; 16:14-15; 겔 36:8-1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땅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땅 소유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특별한 삶이 요구되었다. 그러한 요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있었다. 신명기에 제시된 규례들은
그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사항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신 12:1) 땅은 약속의 선물일 뿐만이 아니라 책임을 요구하는
땅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요구를 성실히 실행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거주를 계속적으로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땅으로 인한 풍요와 번성을 더불어 누릴 수가 있었다(신 8:1).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땅에서의 저주와
축출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무서운 경고가 주어졌다. 토지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행위들이 땅을 더럽힌다는 것이다(레 19:29; 민 35:29-34; 신 21:23).
이것은 여호와 자신이 더럽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불가능함으로 오히려 땅이 더럽혀진다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땅은 여호와를 대신하는 유형적 상징이 되고 있다.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는 결과적으로
그 땅이 이스라엘을 토해낸다(레 18:25, 28; 20:22)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땅이 이스라엘을 토해내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에서의 땅 개념은 단순한 외형적인 지리 형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경험과 신앙고백을 통해서 오히려
이해될 수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행위 자체(deliverance)와
축복(blessing)으로 양분시키고, 이 축복의 내용 속에서 땅의 약속과 성취를 본 베스터만의 논리는 의미 있는 것이라
하겠다.2) 축복 자체가 구원행위에서 시작된 하나님 활동의 결과이자 지속적 연장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땅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라는 신학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 적합한 삶을 유지하도록 성서는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III.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해석적 입장
위에서 살펴본 가나안 땅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기초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해석적 입장을 다음 세 가지
관점-고대 근동의 지리적 측면, 가나안 땅의 생활 경제적 측면,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A. 고대 근동의 지리적 입장에서 본 해석
고대 근동지방이란 보다 큰 영역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비옥한 반달형"이라 지칭되는 지역 안에 속하고 있다.2)
근동의 `비옥한 반달형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대 근동지방이 과연 어떠한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고대 근동지방은 오늘날의 세 대륙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를 각각 포함하고 있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지역의 한계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에게해에서 아프카니스탄의
힌두쿠쉬 산지까지의 약 3200km에 달하는 지역이 동서간의 한계이고, 흑해와 카스피 바다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산지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서단에 이르는 지역이 남북 간의 한계이다.
근동지방의 지리적 특징은 이 지역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세 가지의 장애 요인들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장애요소들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나 교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 고대 근동사회의 역사 및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 가지 장애 요인들 중에 첫 번째 요소는 북부지역에 위치한 산지들이다.2)
이러한 산지들은 북쪽으로부터의 외적의 침입과 겨울철 동안 북쪽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두 번 째 장애 요인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사막들이다.2) 이들 사막은 건조한 사막 기후의 영향은 근동지방의
대부분 농경지를 잠식하여 경제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지만, 긍정적으로는 북쪽의 산지처럼 외적
침입을 막아주는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 장애 요소는 근동지방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바다들이다.2)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지리적 요소들은 육상 교통에 크게 방해가 되는 요인들로서, 근동지방이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원할 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근동지방의 지리적 요인들은 자연스럽게 페르샤 만에서 시작하여 지중해의 동부해안을 따라 가늘고
길게 뻗어있는 비옥한 지역 곧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비옥한 초승생달 지역은 사면이 자연적인
방벽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고대 문명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문명의 요람지였다.
고대 역사와 문명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성서의 이해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특히 이곳은 창세기의 족장 역사를 비롯한 성서의 원역사(Proto-History)의 배경이 되고 있으며, 당시의 문화
내지 역사 이해는 성서연구에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옥한 반달형 지역은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동부 지역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지방이라고 하는데, 페르시아 만에서 시작하여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을 중심한 지역을 가리킨다. 서부 지역은 지중해의 해안지역으로서 `레반트'(Levant)지방이라 부른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지역이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서쪽 지역인 레반트에 속하고 있으며, 비옥한 반달형 지역의
중심부가 아닌 서남단의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인 브엘세바는 비옥한 반달형
지역의 최남단으로서, 이 지역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사람의 거주가 불가능해지는 사막지역이 되고 있다.
성서에서 브엘세바를 이스라엘의 남방 한계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나, 브엘세바 이남 지역에서 정착된 생활
근거지가 언급되고 있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약속의 땅 이스라엘은 분명 비옥한 반달형 지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위치적으로 이스라엘은 비옥한 반달형 지역의 중심부가 아닌 외곽지역이었다. 여기에서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평가하는 시각을 볼 수가 있다. 비옥한 지역의 중심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환경은
부정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인간 거주가 가능한 문명 지역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표현한 것은 현실을 무시한 과장이거나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소망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단지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막에 거주하는 자들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입장에서 카수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표현을 사막의 유목민들이 그리는 이상적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2) 그런 점에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고 부른 것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현실적 상황에 입각한 객관적 판단에 의한 표현임을 확증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을 사막에서 지냈다는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여 볼 때, 그들에게 보인 가나안은
실로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하고 아름다운 땅임이 분명하였다.
가나안 땅에 대한 이해의 혼동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판단의 기준, 비교의 기준을 잘못 잡은 데에 있다.
가나안의 참모습과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이 생활하였던 사막으로 들어가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초막절 풍습 중 초막 짓기는 사막에서 가나안을
보아야 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 의하면 초막절 동안 초막을 짓고 그곳에 나가 생활하는
것(레 23:43)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하였던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상징적 행동인 것이다.
노트는 이러한 풍습의 의미를 "historical reason"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는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여호와를 기억나게
할 뿐 아니라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2)
B. 가나안 땅의 생활 경제적 입장에서 본 해석
두 번째 관점의 해석은 가나안 땅에 대한 표현인 "젖"과 "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가나안의 생활
경제적 측면과 직결시켜 보려는 입장이다. 젖과 꿀은 가나안 땅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의 대표적 요소로서,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활동이 무엇인가를 규정지어 주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이 두 가지 생산품은 가나안 경제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목축문화와 농경문화를 대변하는 요소이다.
"젖"이란, 성서에서 직접적인 증거들을 얻을 수 있듯이, 목축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목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경제적 수단이었다.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한 욥,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성서적 인물들은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이스라엘 땅 자체가 사막에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목축은 이스라엘
여건에 적합한 경제수단이 되었다. 목축경제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동물이었던 양들은 이스라엘 제사제도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었던 제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젖이 흐른다'는 표현 속의 `젖'은 목축의 주종을 이루는 양젖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목축에서 양을 키우는 일차적인 목적은 양을 잡아 고기를 얻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젖을 생산하여
그 젖으로 다른 유제품을 만드는데 있었다. 성경에서 여러 종류의 유제품들이 거명되는 것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양들은 일 년에 평균 30-150 리터의 젖을 생산하며, 젖이 집중적으로 짜게 되는 시기는 2-3월 경에
시작하여 3-4개월 간 계속된다.
이스라엘의 꿀은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벌들에 의하여 채집되는 꿀인 `드바쉬'이다.
구약에서 언급되는 꿀은 대부분이 야생 꿀이다(신 32:13; 삿 14:8; 삼상 14:25-29, 43). 시편 기자는 반석에서 나오는
자연의 꿀로 만족할 것을 노래하기도 하였다(시 81:16). 그러나 이러한 `드바쉬'로서의 꿀 이외에도 과일나무의 열매에서
얻어지는 즙으로서의 꿀이 있다.2)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과일 즙 형태의 꿀을 `아시스'라고 부르는데, 주로 포도, 무화과,
종려나무의 열매 등에서 얻어진다.3)
이스라엘은 과일나무가 잘 자라는 토양이며, 자연적인 입지조건도 과일나무 재배에 적합하다.
산과 산 사이에 비가 올 때마다 씻겨 내려가 쌓이는 충적토는 밭농사에도 좋은 토양이 되지만, 경사진 산간 지역에서는
과일나무를 심어 기르기에 적합한 조건이 되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표현에 등장하는 `꿀'을 벌에게서
얻어지는 꿀인 `드바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가나안의 경제적 입장을 고려할 때에는 그것은 오히려 과일나무에서
얻어지는 즙으로서의 꿀인 `아시스'로 보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하다 하겠다. 같은 입장에서 카수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젖을 생산하는 가축들을 위한 초지와 과실을 생산하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땅이라고 해석하였다.4)
모세에 의하여 파송된 열 두 정탐꾼들이 그 땅의 비옥함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세 종류의 과일-포도, 무화과, 석류-을
가져왔을 때에도, 그 과일들은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있는 증거임을 밝히고 있다(민 13:27).
가나안 땅을 표현하는 "젖과 꿀"은 가나안 땅의 생활 경제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땅에 적합한 목축과
과일생산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땅의 비옥함을 과장적으로
나타낸 것이기보다는 그 땅에 허락되어 있는 생산의 가능성들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해 볼 때, 그것들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가능성, 곧 각양의 은사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게 될 때 신앙의 활력을 얻듯이, 가나안의 가능성들인 젖과 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될 때 가나안에게 주어진 축복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C.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고백적 입장에서 본 해석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지시하셨고, 또한 그 땅을 그와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이삭, 야곱을 통하여 거듭 확인된 내용들로서 모세를 통하여 시작된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로 부각이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속에 깊이 축적된 거룩한 약속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보증된 영원한 유산이다.
성서에서 이 땅은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여지나 조건들이 허락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제시된
땅이다. 다시 말하여,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창조주로 믿고 있는 하나님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약속되어진
하나님의 땅이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 속에서 이 가나안 땅은 이미 비교의 대상을 허용치 않는 절대의 땅, 지고의 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가나안 땅을 설명하면서 그 땅의 외형적 가치를 과장시켜 평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외관적인 조건으로는 다른 지역에 뒤지고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그런 외형적 조건이나 여건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열조에게 맹세하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설명하고 있는
신명기 11장은 가나안을 애굽과 비교하여 그 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신 11:10-12).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 얻게 될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음이 전제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애굽은 나일강의 풍부한 수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을 흡수하는 척박한 땅임이 명시되어 있다. 비록 자연 환경의 측면에서는 풍부한 급수원을
가지고 있는 애굽이 하늘의 비만을 의존하고 있는 가나안 땅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애굽은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여 사는 인간 중심의 지역인 반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신명기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집중되어 있는 땅이며,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이다.5)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져 각자의 거주 지역을 선택하는 내용을 보여주는 창세기 13장은 가나안 땅의 평가 기준이
외형적 조건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본 요단 들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었다(창 13:10). 반면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호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간지역의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겼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선택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두고 있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4). 이 두 본문에서는`눈을 들어 본다'라는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롯의 경우는 자신의 판단 기준에
의한 것이었고, 아브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롯이 선택한 요단 들은 외형적으로 물이 넉넉하여 살기 좋은 환경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의
지역임을 성경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창 13:13). 그에 비하여, 아브람이 차지한 지역은 비록 생활에 불편한 산간지역
이었지만 자손 번성의 축복과 더불어 그 땅이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확인되는 땅이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을 세계의 중심지로 보면서 이스라엘 땅을 땅의 일반적 용어인 히브리어
"에레츠"에 정관사를 붙여 "하아레츠", 곧 절대적 땅(the Land)이라고 이해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느 다른 나라나 땅과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표현인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점에서 외형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상대적 땅이 아님을 강력히 표현한 것이다.
앞부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히브리어 "에레츠"는 `아다마'와 달리 토양의 비옥성과 관계없이 의미상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땅에 대한 표현이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땅이 곧 "에레츠"이다. 이와 같은 절대적 의미의 땅 개념은 성서시대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유랑민족으로 흩어져 살았던 과거 이 천년 동안에도 그 명맥을 꾸준히 유지하여 왔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일어난 시온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당시,
이스라엘의 대부분 땅들은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늪지대로 바뀌어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이러한 불모지의 땅에 뛰어들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개척하였다.
그러한 개척적인 용기는 이스라엘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거룩한 땅임을 받아들이는 신앙적
차원을 떠나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비록 외적으로는 황폐한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신앙적 확신을 갖고
피와 땀과 눈물을 뿌렸을 때, 땅 밑에 감추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모습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을 가리켜 사막에 꽃을 피운 기적의 나라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여 그것은 숨겨져 있었던 가나안의
의미를 민족적 신앙과 땅에 대한 확신으로 도전하여 본래의 것을 되찾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첼을 비롯한 초기의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의 본토를 아르헨티나나 우간다로 정하려 했던 시도는 땅에
대한 성서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했던 것임이 사실이며, 그러한 제안과 시도를 거절하고 팔레스타인 본토를 고수하였던
유대인들의 정서는 수천 년을 내려왔던 민족적 신앙 전승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IV. 결론
이스라엘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되거나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시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성서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땅의 신학'의 신학을
기초로 놓고 볼 때, 이스라엘은 결코 자신의 땅에 대하여 과장되거나 현실을 무시한 이상향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관점을 달리하는 세 가지 입장에서 본 해석은 구약 성서신학을 비롯하여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의미 있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약속된 땅으로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소유로 현실화된
거룩한 땅이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에서 축복의 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축복성은 땅의 풍요로움이라는 외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신 11:12)이기 때문에 축복된 땅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쉼이 있는 곳(신 12:9-10)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땅을 소유하여 자신들이 즐기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생활양식을 요구받는 땅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땅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자신의 신앙과 삶을 고백하는 수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2.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현대 비평적 입장에서는 구약성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의 현실이나 실제 역사 경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에 그 기원이 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 역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유목민들의 상징적 언어와 신화적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나안에 대한 그러한 표현은 신앙 고백적 요소를 강조한
내용이긴 하여도 고대 근동지방의 지리적 여건이나 가나안의 생활 경제적 상황에 근거를 둔 객관적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허구 속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신앙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곧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만나주셨던 구원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이다.
3. 오늘을 살고 있는 기독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해석이 갖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가나안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과 성취의 복지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그 땅은 같은 질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삶은 곧 축복으로 주어진 가나안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살펴 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해석적 입장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들 삶의 신앙적 원리를 조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가나안 땅의 의미에 관한 세 가지 방향의 해석이 보여주듯이, 가나안의 축복됨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신앙적 수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고백 위에 사막이라는 출발점에 서서 자신의 삶을 조명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젖과 꿀이라는 은사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오늘의 삶 속에서 주어진 가나안 뿐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영원한
가나안의 축복을 소망 중에 바라는 것도 중요한 자세일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 - Vitis 원문보기▶ 글쓴이 : John
'성경과 영성신앙 > 복음과 구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병의 치유에 대한 성경구절 24개 (0) | 2018.02.09 |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0) | 2013.02.18 |
[스크랩] 말라기서 연구 이종철목사 ( 이요한목사 ) (0) | 2011.12.14 |
[스크랩] 기독교에 대한 자료 5362개 총망라1 (0) | 2011.12.14 |
[스크랩] 인기있는 성구구절 모음 (0) | 201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