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I AM THAT I AM
신지학 대의 43- 잃어버린 혼들 2 본문
신지학 대의 43- 잃어버린 혼들 2
인성이 매우 크게 강화되는 경우, 자아는 인성으로부터 거의 단절되게 된다. (즉, 혼의 상실) 이런 경우는 자기의 욕망 속에서만 사는 자들과 자기의 마음 속에서만 사는 자들의 두 부류가 있다. 이 두 유형의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종종 저급계의 질료 속으로 내려온 자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많은 학도들은 이것이 단지 수사(修辭)적인 비유가 아니라 매우 명백하고 실제적인 면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아는 코잘체 안에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를 덧입는다는 것은 사실상 코잘체의 질료 일부분과 하위의 멘탈, 아스트랄 질료와 교착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하강 현상을 자아가 하는 일종의 투자로 볼 수 있다. 모든 투자가 그렇듯 이 경우에도 자아는 자기가 출자한 것보다 더 많이 돌려 받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즉, 자기가 투자한 것을 잃을 가능성, 때로는 어떤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투자한 것 전부를 잃을 가능성-실제로는 완전 파산이 아니라 유효 자본의 상실이지만-이 있는 것이다.
이 비유를 자세히 풀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자아는 코잘체 안에 세 가지 차원(멘탈계의 제1, 제2, 제3 부분계)의 질료를 갖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3 부분계를 넘어선 계(제1, 제2부분계)에서는 아직 활동이 없다. 심지어 제3 부분계에서조차 대개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활동한다. 따라서 코잘 질료 중 가장 저급한 유형(제3 부분계의 질료)의 일부만이 하급 차원으로 내려올 수 있다. 그것도 그 중 작은 단편(斷片)만이 멘탈, 아스트랄 질료와 교착된다.
이렇게 하강된 것에 대한 자아의 통제는 매우 약하고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자아는 아직도 반은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가 성장함에 따라 자아의 아스트랄체, 멘탈체도 발전된다. 이때 아스트랄체, 멘탈체와 교착된 코잘 질료는 그것들을 통해서 전달받은 활기찬 진동으로 각성되게 된다. 즉, 그 매체들과 완전히 교착된 이 단편 중의 단편은 그것들에 생명과 활력과 개체 의식을 주고, 이번에는 차례로 그것들이 교착된 코잘 질료에 강한 반작용을 일으켜 생명에 대한 날카로운 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 예리한 자각은 자아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니, 자아가 하강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자아를 다시 밑으로 화신해 오게 하는 힘이 바로 이 날카로운 의식에 대한 갈망-이것을 트리쉬나라 부른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단편은 여러 경험들을 거쳐왔기 때문에 나머지 자아보다 훨씬 더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 그 결과, 그것은 종종 지나치게 강화되어 자신을 전체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연결을 망각한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자기가 입고 활동해야만 하는 질료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게다가 저급계에 내려오기는 했지만 교착되지는 않은 나머지 부분들-고급 멘탈계에 있는 자아의 큰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의 작용에 저항하기도 한다.
위의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멘탈계의 제3 부분계에 깨어 있는 자아의 부분에 대해 자세히 고찰해 보자. 그것 - 전체 중에서 얼마나 작은 단편에 불과한지 항상 기억하라 - 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 멘탈계의 제3 부분계에 남아 있는 것
㉯ 저급계에 내려오기는 했지만 저급 질료와 교착되지 않은 것
㉰ 저급 질료와 완전히 교착되어 그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을 수용하는 것
이것들은 하강해 온 비율에 따라 배열되었다.
㉮는 진정한 자아의 매우 작은 일부분이며 ㉯는 ㉮의 작은 일부분이고 ㉰는 ㉯의 작은 일부분이다. ㉯는 ㉮와 ㉰ 사이의 연결 고리로서 역할한다. 우리는 ㉮를 몸으로, ㉯를 밖으로 뻗은 팔로, ㉰를 움켜쥐는 손, 즉 질료 속에 담궈지는 손가락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하게 균형 잡힌 구성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여러 가지 영향에 민감하다.
손㉰는, 몸㉮에 의해 언제나 완벽하게 조정된 상태로 팔㉯를 통해 교착된 질료를 움켜쥐고 이끈다. 바람직한 환경이라면 더 많은 힘과 질료가 ㉮로부터 ㉯를 통해 ㉰로 흘러 들어가며, 결과적으로 그 통제는 점점 더 완벽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는 힘에 있어서는 물론 부피도 커져 간다. ㉯를 통한 통신이 막힘 없이 열려 있고 ㉮가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의 힘과 크기가 성장하면 할수록 바람직한 일이다.
㉰의 교착 행위에 의해 그 안의 코잘 질료가 각성되어 날카롭게 활동하게 되고 다양한 진동에 정확히 반응할 수 있게 된다. 만일 그런 교착이 없다면 이런 결과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를 통해 ㉮에 전달되어짐으로써 자아는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과정이 위에서처럼 언제나 활동 계획에 따라 이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의 통제가 미약할 경우 종종 ㉰가 완전히 저급 질료에 묶여 사실상 자신을 그 질료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의 고급한 본성을 망각하고 자신을 전체 자아로 착각하게 된다.
만일 저급 멘탈 질료에 빠졌다면 그는 물질계에서 완전히 물질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어쩌면 매우 지성적인 사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영적인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영적인 것에 대해 완고하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사실적이고 실용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무정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 때문에 그의 삶은 실패하게 되고 결국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한다.
만일 아스트랄 질료에 빠져 있다면 그는 물질계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생각한다. 자신이 강하게 욕구하는 어떤 것을 추구할 때 그는 매우 잔인해진다. 다시 말해 매우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
멘탈 질료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살 듯 위의 사람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만 산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우리의 문헌 속에서 ‘잃어버린 혼들’이라 일컬어져 왔다. 물론 다시 찾을 길 없이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블라바츠키 여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악덕으로 인해 자신의 고급 혼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직 육체 속에 있는 동안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에게는 아직도 본성을 회복하고 물질 성향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 깊은 참회나, 떠나온 자아에게 한번 간절히 호소하거나,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질적인 노력을 한다면 그의 고급 자아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연결의 끈은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크릿 독트린, ⅲ 527)
이런 케이스들은 ㉰가 자기 주장만 내세워 ㉯를 ㉮한테 다시 밀쳐 버린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팔이 가늘어지고 급기야 마비되어 그 힘이 위축된 반면 손은 자기만 내세워 멋대로 경련적인 발작을 하는 것과 같다. 뇌의 통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와 ㉰사이의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손목 절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사는 동안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인성의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의 통신 정도는 남아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블라바츠키 여사에 따르면 그런 경우는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만일 충분히 강하게 노력하여 자아가 ㉰의 부분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면(-이때 ㉯도 대부분 이미 회복된다) 비록 최후의 순간일지라도 새로운 생명이 그 마비된 팔을 통해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삶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심각한 자아의 상실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해서 금방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많은 시간이 소비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부류의 사람이 본성을 회복할 수 있으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들에게는 발전 잠재성이 있기 때문에 우주 법칙상 자아를 상실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을 살펴보면 그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행위들은, 멘탈계 상의 이기적인 상념이든, 아스트랄계 상의 이기적인 감정이든, 언제나 그 계(界)들의 저급 부분계 질료의 진동이다. 반면 모든 선하고 이타적인 상념과 감정들은 고급 부분계 질료의 진동이다. 이 때 정묘한 질료일수록 훨씬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일정한 힘이 선한 상념과 감정에 쓰여질 때가 거친 질료에 쓰여질 때보다 백 배 정도의 효과를 더 낼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보통 사람은 전혀 진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의 생각과 감정 중 90%는 자기 중심적이고 나머지 10%는 영적이고 이타적이라면 그는 이미 이타적인 쪽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 비율에 정확히 상응하는 만큼만 결과가 나온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뒤로 아홉 발자국 물러나게 된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몇 생 지나지 않아 우리가 진화해 온 동물계로 다시 전락할 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선을 향한 10%의 힘은 악을 향한 90%의 힘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에서 생으로 상당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1%의 선만 보여줘도 그 사람은 조금이라도 진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차가 정확히 같아서 진보도 퇴보도 없는 사람은 굉장히 악한 삶을 살아 왔음에 틀림없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심지어 사실상 퇴보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그가 얼마나 극악한 삶을 지속해 왔을까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항상 주위에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많은 것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한 그 자비로운 법칙 덕분에 세계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그런 사람들조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잃는 것은 진화 그 자체가 아니라 진화를 위한 시간과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기회를 잃는다는 것은 곧 그만큼 고통을 더 많이 겪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시 앞서의 투자의 비유를 다시 들어 그들이 과연 무엇을 잃고 무엇에 실패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
자아는 때가 되면 이윤을 위해 저급 질료에 투자한 것, 즉 우리가 ㉰라고 불렀던 주식을 회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가 질과 양 모두에서 높아졌기를 기대한다.
㉰의 질은 전보다 나아져 있다. 왜냐하면 훨씬 더 많이 각성되었고, 더 다양한 진동 영역에 정확히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은 ㉰가 ㉮에게 언젠가 재흡수 될 때 그 ㉮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 안에 그렇게 강한 파동을 일으키는 저장 에너지도 ㉮의 질료 전체에 배분되면 하나의 물결밖에 만들지 못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매체들이 악한 상념과 감정들에 반응하고 그것들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진동들 하에서 흥분하여 교착된 코잘 질료㉰에 혼란을 초래한다 할지라도 그 질료㉰가 ㉮나 ㉯에 그런 진동을 재생시키거나 전달시키기란 전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일정한 음고(音高)에 조율된 바이올린 현이 그 밑의 음조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급 멘탈계의 질료는 그보다 낮은 계(界)의 진동과 공명할 수 없다.
㉰는 질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양에 있어서도 늘어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매체들과 마찬가지로 코잘체도 그 질료를 끊임없이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의 근육과 꼭 마찬가지로 어떤 부분에 특별한 운동을 하면 그 부분은 크기와 힘이 커지게 된다.
모든 지상의 삶은 자아가 필요로 하는 그러한 질과 양의 발전을 위해 주의깊게 만들어진 기회이다. 따라서 그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다음 생에 다시 유사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 지체될 뿐이고 고통이 따를 뿐이다. 아마 그때는 추가로 발생된 나쁜 카르마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지 모른다. 자아가 각 화신에서 기대하는 증가분에 대비(對比)해서, 우리는 이전 단계에서 어쩔 수 없었던 일정한 손실분을 벌충해야만 하는 것이다.
저급 질료와의 교착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 교착은 가능한 매우 밀접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모든 입자들을 회복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나 그것이 아스트랄체와 연결되었다면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아스트랄체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시간이 도래했을 때 아스트랄계에 남겨지는 것은 단순히 분해되고 있는 아스트랄 질료의 껍질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교착된 자아가 남아 있는 그림자인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코잘 질료가 상실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도로 나쁜 삶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 잃어버린 양은 성장에 의해 얻어진 양보다 훨씬 적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거래상의 이익이 있는 것이다. 완전히 자신의 상념과 욕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질과 양, 어느 것도 발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진동들이 코잘체에 저장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그 교착이 매우 강하다면 분리가 일어날 때 분명 상당한 양의 코잘 질료의 손실이 따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팔과 손의 비유로 인해 자칫 ㉯와 ㉰가 영원히 자아의 부속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는 동안 그것들(㉯㉰)은 ㉮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 화신의 최후 순간에 그것들은 ㉮에게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의 결과들이 ㉮ 전체에 배분되게 된다. 따라서 자아가 다시 화신 속에 내려올 때가 되었을 때 옛날의 그 ㉯와 ㉰에게 다시 손을 뻗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그에게 흡수돼 그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양동이에 부어진 한 컵의 물이 양동이 속의 물과 하나가 되어 다시 분리해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이때 컵의 물에 물감이 있다면 그 색깔이 양동이 물 전체에 희미하게 번질 것이다. 여기서 물감은 경험에 의해 계발된 성질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상기한 방식에 대해 자아는 이미 익숙해 있다. 그가 동물의 그룹 소울로부터 개체성을 획득하여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자아가 되기 전부터 말이다. 그 방법은 그룹 소울이 취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룹 소울은 동시에 많은 촉수들을 내려보냄에 비해 자아는 오직 한번에 하나씩만을 발출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윤회할 때마다 새로운 화신 속에 있는 인성은 달라진다. 비록 그 뒤에 있는 자아는 언제나 같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