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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 꿈이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휴심정] 구자만의 종교회통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 꿈이다

柏道 2025. 6. 27. 16:32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 꿈이다

  • 수정 2025-05-16 10:42
  • 등록 2025-05-16 10:38
 
픽사베이
 
 

예수는 말씀하셨다.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만약 그대들이 나의 제자들이 되고, 나의 말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돌들도 그대들을 섬길 것이다. 그대들을 위해 준비된 낙원에는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것들은 여름이나 겨울에 변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잎사귀들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도마복음 19)

자기의 본성(참나)을 깨닫고 ‘하나가 된 자’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기 전의 존재(본래면목)로서 행복하다(도덕경 16장). 그는 무시무종으로서 돌들에게도 섬김을 받을 만큼 위대하며, 모든 것이 그를 섬기게 된다. 존재의 바탕인 낙원에 있는 다섯 나무(생명나무), 즉, 시공간을 초월한 영의 진정한 ‘나’(참나)를 아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영생의 자리를 자각한 자이다. 그는 ‘삶과 죽음이 하나’인 영원한 생명(실상)의 환희를 누리며, 무익한 육체(허상)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영생해탈).

예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참나)가 있다’(요한복음 8:58)고, 부처는 ‘내(참나)가 성불한 것은 백천 만억 아승기겁(무한의 시간) 전부터의 일이다’(법화경)라고, 노자는 ‘도가 나(참나)를 비롯한 만물을 낳았다’(도덕경 42장)고 하였다. 예수는 그리스도 의식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고, 석가도 부처 의식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으며, 노자도 도 의식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참나)도 시공간, 즉, 탄생과 죽음을 초월한 온전한 진리 의식이다(마태복음 5:48).

 
 
 

육신의 죽음과 질병이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망각의 무지로 인해서 생겨난 인식의 전도몽상이며 공이다(제법공·諸法空). 당나라 때의 영가 현각선사는 ‘깨달아 알고 보니 한 물건도 없구나’라고 텅 빈 공(空)을 노래하였다. 공의 실상인 진리(참나)를 자각하고 대상과 주체가 하나 되어 생사를 초월하는 자는 죽음이란 본래 없음을 알게 된다(물아일체). 그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자각하여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의 본성은 죄와 질병이 없는 완전한 신성(참나)이므로 예수는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한복음 5:8)고 하여 ‘잘못된 생각의 파동’(죄)을 제거하여 분별심에 의한 병을 치유하셨다. 내면의 본성(참나)은 항상 죽지 않고 머물러 있는 실상이다(영생상주·永生常住). 불경에서는 불성(참나)을 중요시하여 ‘스스로에게 어떤 것이 부모가 낳기 전의 본래 모습(참나)인가?’라고 물어보아야 한다고 한다. 예수는 생사, 주객을 분별하여 보는 어두운 마음(무명)의 죄을 회개할 때 천국의 광명(참나)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셨고(마가복음 1:15), 부처의 가르침도 어두운 마음(무명)을 밝은 마음(참나)으로 바꾸는 것이다.

 
 
 
 
픽사베이
 
 

실재하는 것은 생명나무(참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제법공·諸法空). 회개는 ‘없는 것’(허상)을 본다고 하는 죄를 깨닫는 것이다(요한복음 9:41). 구원은 충만한 천국(실상)을 바로 보며(요한복음 3:3), 분별 망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는 신성(참나) 깨달음이다. 보이는 현실에서의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는 꿈이다. 꿈인 이원적인 세계가 홀연히 사라질 때 보이지 않는 신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천국이 드러난다(고린도후서 4:18). 불경에서도 ‘중생이 집착과 분별하는 꿈의 세계를 버리고 실상을 바로 보기만 하면 부처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좋아함과 싫어함, 이익과 손해 등을 분별하는 개별적인 ‘나’(ego)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버리고,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보편적인 ‘나’(그리스도)로 거듭났다(갈라디아서 2:20). 그는 모양이 있는 허상의 ‘나’(ego)를 모양이 없는 영원한 실상의 ‘나’(참나)로 착각한 무지(죄)를 회개하였다. 회개의 결과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붙잡혀 감옥에 가두어져도 옥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기게 되었다(사도행전 16:26).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요가난다는 ‘인류는 물질이 에너지의 농축이라고 하는 진리의 도움으로 정신세계의 각성과 확장을 도모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물질은 다만 에너지의 파동이며(양자물리학),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생명(순수 에너지)뿐이다.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자는 시간과 죽음이라는 것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육체가 곧 ‘나’(거짓 나)라고 하는 에고를 버리고,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영의 진정한 ‘나’(참나)의 생명을 살린 자이다(생사해탈·生死解脫). 내면의 생명(참나)은 헛되고 헛된 육체의 거짓 나(ego)가 죽을 때에도 죽음을 맛보지 않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무릇 살아서 생명(참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한복음 11:26)고 하셨다. 시공간을 초월한 생명(참나)을 깨닫는 자는 육체의 죽음이 실재하지 않는 꿈이며 환영이고(금강경), 생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고 하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면에 있는 생사불이의 보편적 그리스도(참나)를 깨닫고(갈라디아서 2:20),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부활(해탈)로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다.

 

 

구자만(개신교 장로·신학박사·신흥지앤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