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창세기 연구 55/ 야곱과 이스라엘 본문
창세기 연구 55/ 야곱과 이스라엘
출처 : 푸른 오솔길 블로그
본문 : 창세기 35:9-29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 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 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야곱이 기럇 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더니 기럇 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장사하였더라”
* 연구 방향과 목적
1.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찾음
2. 이름이 바뀌는 과정 가운데 들어있는 깊은 영적인 비밀을 찾아내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함
도입/ 자가진단질문
1.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후에도 계속 “야곱”이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고 “이스라엘”과 겹쳐서 불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 서 론 )
“당신은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하는 물음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려니 구원받은 자의 달라진 신분에 대한 말씀이 걸리고, 의인이라고 하려니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에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의인”이라든지 “불완전한 의인,” “영혼은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아직 육신은 죄 가운데 있는 존재,” “원죄(原罪)는 사함받았으나 자범죄는 여전히 남아있는 자들” 등등 다양한 복합용어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의들은 이론과 실제, 그 어느것도 무시하지 않고자 애를 쓴 흔적들일 수 있습니다. 비실제적인 이론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요, 체험적인 면만을 강조하여 순수한 진리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도 피하고자 한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지성을 납득시키는데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지성이 “한번에 한가지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는 법칙에 있습니다. 그 순간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고, 의인이라고 하면 의인으로 인식하는 것이지 두가지를 동시에 인식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이 결국 삶의 태도와 방향을 결정한다면 결국 우리의 삶의 내용은 순간순간의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의인이다”는 인식이 지속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죄인이다”는 인식이 지속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인식이 쉴새없이 바뀌고 있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혼동은 갈등과 불안을 일으킬 것이고 결국 그것은 병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언가 확고한 기초위에 서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평생 한가지 신분인식만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늘 두가지 신분인식(죄인과 의인)을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틀린 것도, 문제도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이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우리를 호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구잡이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언가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 근거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라야 확신 가운데서 자신의 현재 신분, 상태에 대해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이다”라고 할 때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인식하는지 분명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반대로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할 때에도 그에 대한 분명한 진리의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정신적인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고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하게 됩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야곱”이라는 이름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함께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해 보고 그 속에 담긴 깊은 영적인 진리를 찾아 봅시다.
본문의 내용 이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 그에 대한 호칭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계속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세월이 흘렀습니다. 숙곳을 지나 세겜에서 디나 사건을 겪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벧엘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새롭게 바뀐 이름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35:10)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 이미 야곱 자신도 밧단아람으로 떠날 당시 벧엘에서 받았던 언약을 다시 받습니다. 이후로 야곱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 일과 장남 르우벤이 첩 빌하와 통간하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그 때부터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35:21).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약속 이후에 곧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야곱”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다가(35:14, 20) 갑자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35:21, 22) 또 그런가 하면 다시 야곱이라는 호칭이 나오며(35:23, 27, 29) 계속 보면 이스라엘과 야곱의 호칭이 함께 겹쳐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하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아, 야곱아”하시며 부르시는 곳이 나온다는 점입니다(46:2).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바꾸어 주신 후 다시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왜 또다시 “야곱”이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과연 이 속에 어떤 비밀이 담겨있을까요?
관찰과 분석, 그리고 적용적 해설
본문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떤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상반되는 두가지 이름, 즉 야곱(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과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낸 자)이 사용되는 기준과 관련한 것으로 현재 우리의 두가지 상반되는 신분, 즉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함께 본문을 통해 이 난제를 풀어봅시다.
가. 이름이 바뀐 두 시점: 브니엘(32장)과 벧엘(35장)
① 아브라함의 칭의와 비교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시점에 대해서 연구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기 시작한 때는 창 12장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시기는 한참 후인 15:6에서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풀이하였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12장에서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사실적인 의로움의 단계로 들어갔었지만 15:6에 이르기까지 실제적인 체험으로 그 의로움을 누리지 못한 때였고, 그가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시점인 15: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의로움이 실제적으로 체험되는 의로움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는 사실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평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체험의 기준”에서의 평가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아브라함과 같은 체험이 그의 이름이 바뀌는 것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과 같은 체험은 얍복강 가에서의 씨름이었고, 아브라함이 비로소 칭의를 얻는 것과 같은 체험은 바로 다시 이름과 언약을 받는 벧엘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비록 천사와 씨름 후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여전히 삶의 모습은 “야곱”이었습니다. 전혀 “이스라엘”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세겜사건을 겪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은 후 비로소 진정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건이나 서원의 차원에서 반응하던 이전 벧엘(28장)이나 브니엘 이후(33-34장)에서와는 달리 두 번째 벧엘(35장)에서는 믿음의 차원에서 하나님께 반응하였습니다.
② 브니엘과 벧엘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극적인 체험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사력을 다해 씨름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그 때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의 행적을 보면 여전히 두려움과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름만 바뀌었지 그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세겜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과 시므온과 레위의 세겜 부족 몰살사건을 통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전의 두려움에 다시금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믿음의 체험이 쌓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효력을 나타낸 때는 세겜 사건이후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서 내게 다시 단을 쌓으라”는 말씀을 들은 이후였습니다. 그제사 야곱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방식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순종함으로 놀라운 체험을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③ 벧엘에서의 언약
야곱이 하나님과 쌍방간의 언약이 체결된 곳은 두 번째 벧엘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첫 번 벧엘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지만(28장) 바르게 반응하지 못함으로 쌍방간의 언약이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또 그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을 때에도(31장) 언약을 받은 상황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 마하나임에서의 기도(32:9-12)나 얍복강에서의 씨름(32:27-29)도 일방적인 기도였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끌어낸 것이지 쌍방간의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벧엘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야곱과 쌍방간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언약이 야곱에 이르러 진정한 언약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는 바르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는 묵묵히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였고 그 표시로 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음으로 화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 처음 이스라엘로 불리던 시점 : 자아의 죽음과 영적계보의 시작
①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탄생/ 과거의 단절과 12아들
우리는 라헬의 죽음이 어떤 영적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릅니다.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산고로 인한 죽음이었는지, 아니면 드라빔을 훔친데 대한 저주로 임한 죽음인지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리하게 그녀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녀의 죽음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이 처음으로 “이스라엘”로 불리는 시점이 그녀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이 시점에서 우리는 라헬의 일생을 잠시 회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의 일생에 있어서 라헬은 깊은 사랑이 대상이었던 동시에 심각한 영적인 고통을 가져다 준 존재였습니다. 야곱이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였을 때 그녀를 단지 인간적인 눈으로 선택하였고, 그녀로 인해 가정에 심각한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드라빔을 도적질하는 영적인 범죄에까지 깊이 연루되어 집안에 우환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를 통하여 낳은 자식인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의 깊은 사랑의 대상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그러한 편애로 인해 야곱은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라헬은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깊숙히 뿌리내린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끊기 어려운 인간적인 정(情), 바로 그것이 라헬로 야곱에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로 이 라헬이 야곱의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난산으로 인해 베냐민을 낳고 죽은 것입니다. 라헬의 입장에서는 “슬픔의 아들”이었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완성의 아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야곱의 모든 인간적인 자아가 단절되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장사하기까지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호칭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35:20). 라헬을 장사한 후 야곱은 비로소 이스라엘로 삶을 시작하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야곱에게서 라헬의 죽음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과 같고, 이삭에게 있어서 우물을 메우는 일에 대항하지 않고 참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이요, 성령의 소욕에 순종함으로 자아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승리의 전환점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전기를 통하여 비로소 성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그것을 버리는 고통을 체험해야 만이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이었고, 야곱에게 있어서는 라헬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이러한 자아의 깊은 뿌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으며, 성격적인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해 가시면서 어느 시점에 도달했을 때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아를 죽이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참된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자아를 옹호하고 그것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마치 그것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과 더불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아를 취급합니다. 그리고 너무 안일하게 “나는 웬만큼 자아가 처리 되었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는 그처럼 쉽게 처리되는 것도, 쉽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자아는 “내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내가 뽑아내어야 할 자아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생명과 같이 여겨졌던 율법과 유대교가 자아였습니다. 사울(바울)은 추호도 의심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잡고 죽이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의 자아였고 죽여야 했던 것이었음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카톨릭 신앙과 영세, 성사 등 그들의 영생을 주관한다고 여겼던 것이 자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는 무엇이 자아로 존재하고 있을지 짐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옳다고 여기는 지금 나의 신앙형태, 그것이 바로 뿌리뽑고 죽여야하는 자아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이러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② 이스라엘 호칭의 시작/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라헬의 죽음이 야곱의 생애에서 커다란 전기를 이루었다면, 베냐민의 출생은 또 다른 차원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었습니다. 12지파가 완성되어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드디어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은 거의 동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계보의 시작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 것은 자아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계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가문에 새로운 영적인 계보가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의 자아가 죽을 때 새로운 생명이 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생명의 출생과 더불어 진정한 영적생명을 지닌 참 하나님의 자녀의 계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내어놓지 않으면서 남이 바뀌거나, 외형적인 변화로 신앙의 가문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될 수도 없는 일을 기대합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세월만 허비할 뿐이요 자아를 키워가는 미련한 일이 되어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헛된 시도들이 횡행하는지 모릅니다. “자녀 교육을 위한 세미나” “교회 부흥을 위한 책략” “세계 선교 비젼” “축복 대성회” “성령 대망회” “미스바 구국 대성회”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운동들과 캠페인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핵심인 자아를 죽이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활동들로 인해 더욱 자아만 키워가는 어리석은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곳에서 영적인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며, 참된 영적 계보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자녀가 망하고, 교회가 어지러우며, 나라가 부패해가는지 도무지 생각지도 않고 남들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고만 있으니 이 어찌 슬프고 통탄할 일이 아닌지요.....
다. 바뀐 이름 후 곧바로 발생한 사건 : 극심한 연단
① 장자 르우벤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다
야곱의 이름이 처음으로 이스라엘로 호칭되는 순간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야곱 앞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아들과 아내의 간통사건입니다. 자신의 분신이요, 신앙전통과 기업을 이어받을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아내요, 자신의 형제들을 낳은 서모 빌하와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여받아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이처럼 엄청난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야곱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달랐습니다. 마치 욥이나 다윗 등의 시련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이 완전히 달랐던 것처럼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형통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진정으로 자아가 죽었는지 검증과정이 펼쳐지는데 이 과정은 자아가 죽는 과정보다 더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개인도 그러하면 교회도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 곧바로 다가온 것은 아이성의 실패였습니다. 한 사람 아간의 범죄로 온 민족이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시작된 후 곧바로 터진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었습니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얼음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은 한 순간의 경험이 아닙니다. 반드시 강력한 반작용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 더욱 혹독한 죽음의 과정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흘간 무덤 속에 머무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일정기간 자아의 죽음을 증거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테스트”가 아니라 “연단”입니다. 정말로 자아가 죽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죽은 사실을 드러내어 증거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게 됩니다. 힘겹지만 감당할 만한 연단을 주셔서 확실하게 자아를 통제하는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② 슬픔과 참음으로 반응하다
야곱은 이처럼 끔찍하고 부끄러운 범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이는 반응은 덤덤하였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22절 뒤에 “그가 이를 듣고 심히 슬퍼하였더라”는 첨가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끼워 넣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반응을 정리하면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슬퍼했으며, 또한 침묵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분노라든지, 책벌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장 뒤를 보아도 그러한 갈등이나 문제가 표면화되어 나타났다든지, 아니면 표면하에서 지속적인 갈등의 요소로 작용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야곱이 임종하기 직전 자식들에게 유언을 하면서 비로소 르우벤의 악행을 언급하며 그의 장자권을 박탈합니다. 이 때는 예언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맡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집안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슬퍼했을 뿐이지 그것에 동요되어 이성을 잃거나 복수를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과 같이, 다윗과 같이 자아를 통제하는 능력이 뚜렷하게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야곱,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다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독생자를 대속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경지로 들어갔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메우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마음을 배워 신의 성품에 참여하였습니다. 지금 야곱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기서 배운 것은 “은혜에 대해 배신하는 인간을 용납하시는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배신, 노아의 후손들, 이스라엘 백성들... 끝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야곱은 지금 장자와 첩의 간통사건을 통하여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체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심판하지 않고 참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체험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 못해서 당하는 그런 고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쉽게 자청해서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성숙으로 인도하시고 감당할 수준이 되었을 때 가장 깊고 귀한 영적인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8복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축복이며,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배우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기쁨이 어떠하신지 그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 “천국의 본질”이요, 영생입니다.
진정 지혜롭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바로 이러한 축복을 체험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고통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체험하는 것, 이것을 최상의 축복으로 삼고 그 길을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추구해 나가고 얻기를....
라. 두 이름 “야곱”과 “이스라엘”이 병용됨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과는 달리 야곱의 경우에는 이름이 바뀐 후에도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병용되고 있습니다.
① 규칙이나 기준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처럼 이름을 병용하는데 어떤 규칙도 기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야곱이라고 불렀다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고 하신 하나님 조차도 “야곱”이라고 부르십니다. 또한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전체, 특히 이사야 40-49장을 보면 이렇게 어떤 특별한 기준없이 두 이름이 병용되는 것을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야곱은 부정적인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긍정적인 이름인데 두가지 이름이 다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고 겸용해서 부르기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거리낌 없이 겸용해서 사용하고,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경 저자들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해도 맞고, “성도, 의인”이라고 해도 맞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혼용할 수 있습니다.
②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혼용하는 것은 바른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규정이 나타나있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더욱이 반대로 적용할 때는 심각한 오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름이 바뀌기 전 야곱으로 불리웠을 때는 그야말로 “간사한 자” “속이는 자”가 그에게 합당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바뀐 후에는 야곱이라고 불릴 때 그러한 차원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적인 한계와 연약함을 가진 자”의 의미로 불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후에는 그 이름에 합당한 자가 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낸 자”였고, “구원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 “죄인”이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죄를 짓고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후 우리가 스스로 부르거나 남들이 부르는 “죄인”은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형벌받은 죄인”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 연약함을 가진 존재로 늘 허물과 잘못을 행함으로 항상 그리스도가 필요한 자”의 의미에서 “죄인”이 됩니다. 다른 말로 “늘 그리스도가 필요한 자”의 의미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 하나님의 자녀, 의인”의 이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라는 의미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신분이 결코 변할 수 없는 자”로서의 의미입니다. 나아가 “의로운 삶을 통하여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이루어 갈자”로서의 의미로도 그렇게 불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개념으로 우리를 얼마든지 “죄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의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해도 틀리게 되고, 의인 이라고 해도 틀리게 되며 “죄를 간혹짓는 의인”이니 “영은 구원받았으나 육신은 아직 죄가운데 있는 존재”니 하는 말들도 다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이후로 성경 전반에 걸쳐 나오는 야곱의 이름은 이이상 간사한 자로서의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로서의 야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야곱이라고 부를 때는 항상 연약하여 긍휼을 입을 자로서의 사람과 백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를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27)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 41:14)
결 론 :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본문 연구를 통해서 비상한 영적인 진리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지, 그리고 우리의 신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엄청난 진리의 광맥을 캐어 낸 것입니다. 본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생각하던 피상적인 지식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대로 성공과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 방향을 바르게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 천국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라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긍정적인 일들과 부정적인 일들이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데로 인도하는 스승이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셨는지 맛보게 되어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과 기쁨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이러한 기쁨을 주셨는지 그 기뻐하시는 마음을 함께 나누며 진심으로 감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감사의 조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스승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의 신분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죄인”이라고 했다가 “성도, 의인”이라고 하면서 혼동해왔고, 또 그 의미도 바른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름변화를 연구함으로 우리의 신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른 적용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어 치우치지 않고 확신 위에서 우리의 이름과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지식들을 삶 가운데 적용하여 하나하나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출처 : 푸른 오솔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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