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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羅州林氏(나주임씨) 본문

배움과 깨달음/숨터일지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羅州林氏(나주임씨)

柏道 2022. 5. 27. 03:54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羅州林氏(나주임씨)

본관지 회진 ‘부조묘’ 가문의 명예 역사 간직
淸高謹拙(청고근졸)의 종훈 바탕

청백리 배출 많은 명문


*청고근졸(淸高謹拙) : '심지는 청백하고 고상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고 겸손하게 하라'는 나주임씨 종훈(宗訓)

임씨 성(姓)의 유래는 BC10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은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 주왕(紂王)의 폭정을 만류하자,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아홉 개가 있겠다”면서 주왕이 비간을 죽였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의 둘째 아들이기도 하다. 비간이 죽은 뒤 정부인 진씨는 임신 중에 장림산으로 피신하여 아들 천(泉)을 낳았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건국하자 무왕이 비간공의 아들 천을 찾아 임씨 성과 견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임씨가 발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주임씨의 역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임비(林庇)로부터 시작한다. 고려 충렬왕 7년에 왕을 따라 원(元)나라까지 시종(侍從)한 공으로 보좌공신(輔佐功臣) 2등이 되어 철권(鐵券)을 하사 받은 인물이다.

훗날 대장군이 되고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에 이어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주 임씨는 임 비를 시조라 하지 않고 원조(遠祖)로 모시고 있다. 임 비 이전 상계의 세대가 너무 멀고 문적을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통상적인 족보 예규에는 비조 또는 시조라는 표현보다 원조(遠祖)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다.


나주가 관향이 된 것은 원조 임 비의 9세손 임 탁(林 卓)이 해남감무(海南監務)를 지낸 인연 때문이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회진(會津)으로 낙향, 세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회진임씨라 해왔는데, 조선 후기 대학자인 악정공 임상정이 1800년에 족보 경신보를 출간하면서 회진현이 나주(羅州)에 속해 있으므로 관명을 나주로 고쳐야 한다고 하여 나주임씨가 됐다.


나주임씨 세거지 회진은 마한, 백제 시절의 유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옛 고장이다. 신라 경덕왕 때 회진현의 이름을 얻었으며 조선조에 나주로 합쳐져서 회진이라는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나주임씨는 원조 휘 비의 9세손인 감무공 휘 탁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던 해에 회진에 터를 잡은 이래 자손이 번성하여 전국으로 퍼졌다. 특히 15세에 이르러 귀래정공 휘 붕이 태어나 문호를 크게 일으켜서 명문거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청고근졸(淸高謹拙: 심지는 청백하고 고상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고 겸손하게 하라)의 세전 종훈(宗訓)을 바탕삼아 높은 벼슬과 학덕 높은 선조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대대로 청백리가 많았고 역신과 탐관오리가 없는 전통을 이어오는 것을 나주임씨 가문의 긍지로 삼고 있다.


나주임씨의 파명록에 따르면 원래 장수공파, 정자공파, 절도공파, 첨지공파, 도정공파, 진사공파, 생원공파, 동지공파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후에 가의공파, 금수공파 등 10개 파로 나뉘고 있다.


한편 본향인 회진(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나주임씨 대종가가 이어지고 있다. 종손(임정렬)이 본관지에 아직 거주하고 있어 전통과 가문의 긍지를 드높이고 있다.


본관지 회진에 있는 나주임씨 부조묘는 특히 유서 깊은 가문의 명예로운 역사를 오늘날까지 증거하고 있다. 부조묘는 조선 세조 8년(1462년)에 태어나 참판을 지낸 임 평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평생 제사를 모신다는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임 평의 아들 귀래정공 임 붕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어 병조참판으로 추증을 받음으로써 불천위가 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조 임 비로부터 8세 임 선까지의 묘롱(墓壟)이 실전되어 다른 곳의 세거지는 알지 못한다. 나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세거지를 넓혀나가기 시작한 것은 원조로부터 16세, 20세 후손부터였다. 충남 금산과 예산, 전북 부안, 전남의 광주 해남 무안 강진 완도 등으로 세거지를 넓혀 현재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성씨 본관이 됐으며 총 인구수가 30만여 명이 넘는다.


귀래정공의 영모정(지방문화재 제112호, 나주임씨의 상징).


감무공 휘 탁의 묘소(전남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


대종가 부조묘 사당 전경(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창계서원(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나주시 회진리와 월송리·곡성 등 집성촌 이뤄

주요 세거지와 변천


원조 임 비로부터 8세 임 선 까지의 묘롱(墓壟)이 실전(失傳)되어 그 세거지를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는 전국에 분포하는 지파 종회의 묘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종가(宗家)는 관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한 곳에 24대에 걸쳐 살고 있다.


16세 임 익의 자손들 중 일부 임 개의 후손들이 나주에서 금산·예산과 전북 부안, 전남 광주·무안·해남·강진·완도 등지로 세거지를 이동했다.


임 개의 동생 임 경의 후계는 19세 임정필 이래로 전남 진도에, 20세 임 빈이래로 경기도 김포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임 황의 자손들은 21세 임방이 나주에서 경기도 양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충남 서천·부여, 황해도 해주 등지에 산거하였다고 믿어진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에 걸쳐 나주임씨의 묘롱이 있다.


임 척의 자손들은 충남 논산의 은진을 비롯하여 전남 광산의 삼도, 경기도 연천 등지에 살았고, 임 각의 자손들은 전북 고창, 경남 울주, 충남 서천의 마서 등지에 나누어 자리 잡았다.


그밖에 장수공파는 전남 화순·함평, 전북 남원·정읍·임실·순창, 경남 의령·김해·밀양 등지에 세거의 터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공파는 17세 임 서의 자손들이 20세 임세온 이래로 전남 무안에, 21세 임상익 이래로 포천의 영평, 평택의 진위,양주 등 경기 지역에, 23세 임우철 이래로 충남 공주에 산거했고, 일부는 18세 임 담 이래로 전북 진안의 용담과 충남 논산, 경남 통영 등지에 살았다.


임 협의 자손들은 21세 임 장 이래로 무안에, 임 토 이래로 전남 여수에, 19세 임중유 이래로 전북 진안에 옮겨가 각기 정착하였고, 해남과 충남 서천에도 일부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18~20세의 대에 걸치는 동안 통영·산청·해남·순천 등지에서 터를 잡은 후손이 있다.
나주임씨는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본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와 동강면 월송리에 각각 200여호가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다.





임 붕의 아들 임 백, 거북선 설계해 큰 功

나주임씨 역사인물

나주임씨의 원조는 고려시대에 대장군을 지낸 임 비(林 庇). 나주 임씨의 인물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에 활약한 15세손 임 붕(林鵬) 대부터다. 임 붕의 아들 정자공 임 백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설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임 붕의 손자 감사공 임 서(林壻)는 조선조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로 이괄의 난을 평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역시 손자인 백호공 임 제는 병마절도사 진(晉)의 아들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 겸 지제교를 지냈고 특히 절의가 있는 시로 많은 이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그 후대에는 이런 선대의 후광과 나주 임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각 파별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공을 세운 충신, 지사, 현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개황을 살펴본다.


금부판서 임 담(임 서의 아들)이 순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서얼의 등용을 주장했던 임한호(임 담의 현손이며 동래부사 상원의 아들), 공조판서 임시철(임 담의 5세손), 이조참판을 지낸 임경진을 비롯해 예조판서 임영수, 공조판서를 지낸 임한수(이상 임 연의 8세손) 등이 있다.



또 부제학을 지낸 임 협의 현손 임 영, 임긍수(임진 절도사의 10세손), 임최수(임 담의 9세손) 등이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특히 임득명은 시·서·화에서 뛰어나 3절로 불리기도 했다. 또 습정공 임 환은 임진·정유 양란에 공을 세워 소의장군 칭호로 이등록권을 받고 증좌승지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창계공 임 영(임 협의 현손)이 두드러진다. 조선 현종12년(1607)에 정시을과에 급제하여 호당 대사헌 부제학에 이르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고 특히 성리학에 밝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편 대석학으로 나주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 수산사에 제향되었다.



그밖에도 옥산서원, 백호공 기념비, 숭남사, 화산서원, 정려 등 많은 나주임씨 인물들을 기리는 사우, 사원이 있다.

고려시대 인물


시조 임 비, 임영발, 임량간, 임 박, 임영문, 임돈세, 임 수, 임 선, 임 탁, 임 봉, 임시소, 임유소, 임추소 등.


조선시대


임 준, 임 평, 임대동, 임종인, 임 붕, 임 익, 임 복, 임 진, 임 몽, 임희무, 임 홍, 임 제, 임 순, 임 환, 임 서, 임 연, 임충서, 임 담, 임 타, 임 한, 임 게, 임 숙, 임제민, 등.


벌열(閥閱)

상신(相臣):임한호, 문형(文衡):임 서, 임상덕, 임한호, 임 붕, 임 영, 호당(湖堂):임 영, 임상덕, 청백리(淸白吏):임 훈, 임 원, 임 진, 임 서, 임 영, 임상덕, 임한호, 문집(文集):임상덕(동사회강27권, 노촌집), 임 영(창계집27권), 임 제(임백호집, 화사, 수성지, 원생목유록, 남명소승), 임 연(한호집), 임한호(정강공유고), 임 담(청구유고), 임 서(석촌유고), 임 환(습정공유고), 임 파(몽촌공유고), 임 위(동리공유고), 임창택(송악집), 임상원(삼일유고), 임상정(자오록, 사통).



임채정 국회의장 등 정치, 교육, 언론계 등 다수

나주임씨 현대인물

현대에 두드러지게 활약을 한 인물로는 남북교류에 획기적인 물고를 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필두로 임인택 전 건교부장관, 임채정 국회의장, 명창 임방울, 영화감독 임권택 등이 있다.



기업가로는 임인규 중앙화수회장을 비롯하여 임건우 보해양조 회장, 솔로몬 임 석 회장, 동성산업 임동준 회장, 씨엔그룹 임병석 회장 등이 있으며 정계, 교육계, 언론계, 군 등에 고루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화수회를 창립한 임병직과 초기 대종회 활동을 활발히 한 임혁규 등이 있다.


정계:임동원(전 통일부 장관) 임인택(전 건교부장관), 임채정(현 국회의장)


국회의원:임갑수, 임종기, 임인채, 임덕규, 임재정, 임채홍, 임인규, 임무웅


장군:임부택, 임재문, 임인조, 임창규, 임광택, 임종천, 임운택, 임병국, 임치규 임종린, 임경섭, 임상섭


기타:임춘성(도지사), 임종협(전북도의회의장)


(정·관·재·교육·언·예 등 다양한 분야에 인물이 있으나 생략함)


회관건립·유적보감 발간 위해 온 힘


■인터뷰 - 나주임씨 임인규 중앙화수회 회장


든든한 후원자들 종인의 자랑 자부심
자발적 참여 친목 다지며 즐겁게 살자

임인규(69 사진) 나주임씨 중앙화수회 회장은 생가 쪽으로 보면 금부도사를 역임한 세공의 아들 상덕과 호당 벼슬을 지낸 상극(상덕의 셋째 아우)의 후손이고, 양가로는 악정공(상정, 강화유수)의 직계손이다.



임 회장은 1968년에 동화출판사를 창업하여 한국사상전집 등 수백종의 문학전집과 단행본을 출간한 명실상부한 출판업계의 선두주자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장과 제13대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 정책조사 보좌관을 역임했다.



올해로 나주임씨 중앙화수회장을 6년째 역임하고 있고, 귀래정공 유허비와 나주임씨의 상징인 영모정 정화사업에도 토지 등을 기증했으며, 백호공 400주기 행사 기금 전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호공기념관 건립시 동분서주하면서 재원을 마련했던 일은 두고두고 나주임문 모두의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산업포장, 국민훈장모란장, 황조근정훈장, 서울시문화상 등 많은 훈·포장을 수상했다. 원효로 입구 동화출판사 사옥 회장실에서 만나본 임인규 회장은 정정하고 유머감각이 있었다.

나주임씨 중앙화수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 임균택 상임고문에 의하면 임인규 회장이 중앙화수회 사무실 운영기금을 많이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나주임문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임 회장이 있어 관계자들이 든든한 마음으로 대종회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주임씨 대종회와 화수회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 임고문이 하도 꼬셔서….”
임균택 상임고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배석한 종회원들의 폭소가 터졌다. 그렇다고 해도 문중 일을 위해 매번 거금을 선뜻 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실천에 옮기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겸손한 가운데에도 임 회장의 애족심이 엿보인다.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가 보자.

△나주임씨 대종중과 중앙화수회의 창립 배경과 역할은 무엇인가

대종중은 선조를 존숭하고 분묘와 유적, 그리고 종중 재산을 관리하고 족의를 돈독히 하여 정진함을 위함이고, 대종손은 상징적 존재로 모든 회의에 참석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대종중 산하기구로 중앙화수회를 두고 그 산하에 각 지역 조직을 두어 친목조직으로 자율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중앙화수회는 임병직 대사가 40여 년 전 창립하였고, 종원 관리와 유적의 개보수비 등 재원을 마련하며 전체 종중 일을 주관, 추진하고 있다.


현재 대종손은 정렬(35세)이고 2005년 아들이 태어나서 32세 손을 이어오면서 24대째 한 집에서 한번도 양자를 들인 적 없이 현손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음이 나주임문의 자랑거리다.

△특히 자랑스런 선조는


고려조 임 탁을 비롯하여 귀래정공(붕)할아버지의 아들 네 분인 익(장수공), 복(정자공), 진(절도공), 몽(첨지공)과 손자 서(壻)와 제(悌)의 대에서부터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호당 벼슬을 지낸 두 분 학자 창계공과 노천공을 들 수 있고, 노산 이은상씨가 “조선조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 극찬한 ‘백호공’을 들 수 있다. 백호공은 절도공 진의 아들이다. 유호공, 상주공(몽촌), 동리공 3부자의 문집이 현재 준비 중에 있다.



6·25전란 시 땅에 묻어두어 화를 피한 인조반정 원정공신 몽촌공의 열두 가지 항목의 상소문 필사본을 현재 보관 중인데, 그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문적인지 임금께서 국책에 활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60년 동안 진행된 족보(경신보)를 출간하면서 관향을 회진에서 나주로 정리한 대학자 악정공(강화유수, 임상정)은 나의 직계 할아버지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나주 임문의 숙원사업이라면


현재 ‘회관건립’과 ‘유적보감’ 발간을 준비 중에 있다. 회관건립에 소요되는 예산은 회장인 나를 비롯하여, 보해양조 임건우 회장, 솔로몬 임석 회장, 동성산업 임동준 회장, 씨앤그룹 임병석 회장 등이 각각 1억원씩 출연하여 마련할 계획이다.



출연하시는 이분들은 지금까지 모든 유적의 유지, 관리비 등에 재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어서 무엇보다 든든한 후원자로 전체 종인들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다. 유적보감은 현재 70% 정도 진행되고 있다. 이를 완성, 판매하여 화수회 운영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종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더 많은 종원들이 참여하여 혈족 간에 더욱 돈독한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자면 운영하는 입장에서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할 것이다.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주어서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도록 했으면 한다. 종인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참여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1980년대 말 영국의 한 유명 매체에 나온 얘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21세기에는 동양 사회가 세계를 주도한다, 특히 한국의 가족제도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풍습은 굉장한 경쟁력이 된다’라고 했다.



이처럼 조상에 제사 지내는 법도는 피를 나눈 가족의 확인과 또 모임의 자리이고, 결속의 자리이다. 나주임문의 화수회에 참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후손들이 만나서 자랑스런 조상을 추모하고 기리고, 서로의 족의를 쌓다보면 그것이 곧 넓은 의미로는 국가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셈이 될 것이다.

회장단. 좌로부터 임종국 사무총장, 임균택 상임고문, 임인규 회장, 임광순 상임부회장.


지난 달 나주임씨 중앙화수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 날 임종국 사무총장은 경과보고에서, 현재 나주시 주관으로 백호공원 조성을 추진 중에 있고, 공원 안에 ‘백호마을’과 ‘백호공문학관’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나주임씨 화수회가 타 문중에서 볼 수 없는 젊은 회원들의 참여율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청장년회’가 활성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배석한 임종국 사무총장이 귀띔했다.

최종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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