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얼나 (靈. 道. 法.) 본문
얼나 (靈. 道. 法.)
●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성령 정신)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道)라 해도 좋고 법(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하느님)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1956)
● 이 사람은 10년 전에 이러한 말을 한 일이 있다.
자고서 남은 것이 깸이다. (睡餘覺).
깬다는 것은 잠을 푹 잔 뒤에 깨는 것이다.
우리가 8시간 동안 잘 잔 뒤에 깨면 머리가 산뜻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참나인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몇 년이나 잠을 자고 있는데 잠자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잠자는 줄도 모르고 있다. 한잠 푹 잤으면 깨야 한다.
게으른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얼나인 하느님이 참나임을 아는 것이 깨는 순간이다. (1956)
●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 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 것 아니다.
몸에 옷을 여러 겹 덧 입는데 몸뚱이가 옷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속옷· 겉옷 아무리 겹겹이 입었더라도
벗어 버릴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옷은 마침내 벗어 버릴 것이라 결국 사람의 임자는 얼(靈)이다.
사람의 생명에서 불멸하는 것은 얼나뿐이다.
입은 옷이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해도 낡으면 벗어 던지게 된다.
그것이 비록 살(肉)옷이요 몸(身)옷이라도 늙으면 마침내 벗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얼나뿐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이시다. (1956)
●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自我)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 나로 죽을때 얼나가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얼 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1956)
● 대낮에 영원(하느님)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우리가 참되게 사는 것은 영원(하느님)과 통신할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낮 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한다.
얼의 숨길은 밤에 잘 뚫린다. 잠 잘 때처럼 얼의 숨길이 잘 뚫릴 때 가 없다.
낮에는 전혀 듣지 못하는 얼의 숨길을 밤에는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 뛰는 것도 모자라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不夜城)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점점 더 정신적으로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하느님)과 얼의 숨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을 몰락시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대낮보다 더 밝게 하는 빛은 얼의 빛이다.
저 천체(天體)의 빛은 참빛이 아니다.
우리가 우주의 영원한 소식을 받아들이고 얼의 숨길로 들어가는 것이 우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세상 밝은 날에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줄 만 알고 있다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얼소식을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사는 몸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영원한 얼나라 그곳으로 가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난다.
대낮처럼 밝은 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 게 된다.
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영원(하느님)과의 생활 곧 얼의 숨길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에는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영원이요, 무한이요, 절대요, 영혼이다.
천문학자에게는 낮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 우주의 신비를 캐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저 태양을 가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저 별들의 눈빛이 영원(하느님)과의 속삭임을 더 많이 듣고 알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하느님)과 늘 같이 하고 싶은데 낮이 있으므로 낮에는 하느님과의 통신이 끊어지게 된다. (1956)
● 학문의 시작은 자각(自覺)부터다. 자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에 불과하다. 우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을 들고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씀이다. 경(鏡)이 경(經)이다. 이 거울 속에 참나(얼나)가 있다. 말씀이 바로 참나(얼나)이다. 가온찍기(「.」)이다.
말씀을 풀어보는 동안에 붙잡히는 것이 진리인 이치요 참나인 정신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온찍기밖에 없다. 점을 찍는 것은 생각 속에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참나(얼나)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나처럼 값비싼 것이 없는데 이를 무시하고 덧없이 살고 있다 . (1956)
● 참나는 없이 있는 하나의 긋(점)이요 찰나다.
'나'라 하는 순간 이미 나는 아니다. 참나는 없이 있는 나다.
그런 나만이 참나라고 할 수 있다. 빛보다 빠른 나만이 참나다.
날마다 새롭고 새로운 나만이 참나다.
참나는 말씀의 나요 성령의 나다. (1956)
● 사람은 몸나로만 살다가 참나로 바뀐다.
감정의 맘나로 살다가 참을 생각하는 정신으로 바뀐다.
참을 생각하는 정신에서 제나(自我)가 없는 얼나가 된다.
이것이 사람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이다.
봄이 여름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고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
하늘 땅 펼친 자리에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자연이요 인생이다.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대법칙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 하나의 현실이 된 것이 나다.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아 나의 할 일을 하는 것이 나다. (1956)
● 은하 우주도 수레처럼 움직여 돈다.
상대세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정(靜)이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수레의 축(軸)일 것이다.
그러나 축이 참으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축이란 한 긋(點)이다.
움직이는 상대 세계에서는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는
무주(無注)이다. 이 상대세계에 축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나(靈我)이다.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생명이라 얼나는 없는 곳이 없는
절대(絶對)이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올 곳이 없다.
따라서 머무를 곳도 없다. (無去無來亦無住)(195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개역성경)
하느님이 주신 얼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참나(얼나)와 길, 참나와 진리, 참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참나(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老子)요, 참나(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요,
참나(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 (1956)
● 우리가 사는 것을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 산다고 말하면 잘못하는 말이 된다.
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궁신지화(窮神知化)에 이르러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나(얼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에 이른다. (1956)
● 나의 속나(얼나)는 참(하느님)의 끄트머리다.
사람들이 나(얼나)가 무엇의 끝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처음(머리)이 되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처음(머리)은 하느님뿐이다. 나는 하느님의 제일 끄트머리의 한 긋(점)이다.
우리가 참을 찾는 것도 하느님의 끄트 머리인
이 긋(얼나)을 찾자는 것이다. 참이란 이 긋이요, 이 긋이 참이다.
이 긋은 속나요 참나요 얼나이다. 이 긋(얼나, 절대)에서 처음도
찾고 마침도 찾아야 한다.
영원한 하늘과 무한한 땅과 신비한 생명이 하나가 된 것이
이 긋(얼나)이다. 이 긋은 우주에 켜진 하나의 불꽃이다. (1956)
● 자꾸 바뀌(變易)고 자꾸 사귀(交易)고 그 가운데 바뀌지 않는 불역(不易)을 가져야 한다.
바뀌는 것은 상대세계요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세계다.바뀌는 것은 겉나(몸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얼나)이다. 절대세계는 상대세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바뀌는 겉나(몸)에서 바뀌지 않는 속나(얼나)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무상한 세상을 여상하게 살 수 있는 평상항(平常恒)이다.
참사람(眞人)은 제 속에 긋(點, 얼나)을 가지고 있다.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하느님)과 이어진 긋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을 지니고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속알을 가지고 얼나를 가지고 있다. (1956)
● 비행기가 활주로를 굴러가다가 날아 오르듯이 사람은 생각으로 추리(推理)하다가 초월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하느님 나라· 의 나라)로 직입(直入)하여 직관(直觀)하게 된다.
그런데 초월해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 속으로 자기의 뿌리 밑둥을 제가 파고 들어간다.
아버지가 따로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소자(小子)되는 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사람이 상대세계에 빠져 버리면 앎(知)이 굳어져 버리고 만다. 절대세계를 놓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완고하고 교만해져 자기를 제일로 알게 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진다. (1956)
● 불교에서는 평생 몇 가지 일을 해보겠다고 하여 해를 등지고 제 그림자를 딛고 가는 일을 한다.
앞에 있는 그림자를 어떻게든지 밟아 볼까 하는 그따위 생각을 한다. 약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제 그림자를 제가 밟겠다는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것이 괜찮을 때가 있다. 몇 십 년 이렇게 의심 한 끝에 가서는 무슨 생각을 얻는 것이 있다. 상식이 풍부하여 약은 사람은 이러한 의심을 안 낸다. 소위 불교의 참선 공념(空念)이 다 그따위 일이다.
어리석은 일에 자꾸 의심을 낸다.
참으로 의심을 하고 알려면 어리석은 편이 낫다.
상식이 있어 약으면 제 그림자를 밟겠다고 하겠는가?
알아야 진리다. 알아본다는 것이 진리이다.
하느님을 알려는 나가 진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나가 하느님을 찾아 알려고 하는 것이다. (1956)
● 몸살림은 겨우겨우 살면 되지 더 바라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몸 성하기를 바란다.
몸이 성하면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다.
다음으로 바랄 것이 있다면 마음 놓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진리의 나(얼나)를 담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 놓이면 더 바라지 않는다.
하나 더 붙인다면 바탈을 이루는 것이다.
맘속 깊이 들어가면 하느님을 닮은 영성(靈性)의 얼나가 있다.
이 얼나를 온전히 들어내는 것을 도교에서는 성성 (成性)이라 하고 유교에서는 양성 (養性)이라 한다.
몸 성히(健康) 맘 놓이(放心) 바탈 이뤄(成性)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줄곧 우(하느님)로 오르고자 한다.
어떠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유교·불교 어느 것을 믿거나 그것은 각자의 할 탓이다.
신앙과 정신은 자유이기에 나로서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종교를 믿거나 몸은 성해야 하고 맘은 놓여야 하고 바탈을 이뤄야 한다. (1956)
● 얼을 드러내는 골짜기가 얼굴이다.
누구나 얼굴을 쳐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마 얼굴만이 영원 생명인 얼이 드러날 것이라는 상징인지 모르겠다.
얼굴만은 누구나 번듯하게 드러내 놓고 보이려 함은 그것이 몸보다 훨씬 중요한 마음이 드러나서 그런가 보다.
몸은 옷이요 얼이 임자다.
몸 위에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 밑에 몸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얼이 임자요 몸은 딸림이다. (1956)
● 사람은 이름을 자기로 아는 사람도 있다.
명예에 취하여 체면을 지키다가 거짓말을 하고 속 빈 겨껍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위하여 붙여 놓은 것이며 내 이름 류영모
(柳永模)도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여준 죄수 번호와 같은 것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이란 수치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름 없는 얼나가 나의 본바탕이다.
나란 영원한 생명(큰얼 하느님)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참나(얼나)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긋(얼나)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리인 얼나(靈我)에 무슨 이름이 붙을 리가 없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름 석 자를 외우느라고 애쓰지만
영원한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는 살아서 죄수의 번호인 이름에 잡혀서 사는 사람도
가엾지만 죽어서까지 이 번호(이름)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돌에 새겨두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명함을 돌장으로 바꾸어 두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서 부서진다.
영원한 것은 참나인 얼나뿐이다.
얼나는 영원자(하느님)의 아들이다. 내 속에 그 얼나가 와 있다.
얼나가 드러나는 것이 덕성(德性)이요 신성(神性)의 인격이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얼나)이다. (1956)
● 영원한 생명(얼나)은 고정할 수가 없다. 고정하면 죽는다.
발전해 가는 것에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은 고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나(얼나)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뀐다. 큰얼(大靈)이신 하느님은 본래 이름
이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하느님이 아니요 우상이 되어버린다.
참나(얼나)도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벌써 참나(얼나)는 아니요 허수아비가 된다.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허수아비를 좋아하는 도깨비장난이다.
서로 이름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면극을 벌리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1956)
● 제나(自我)의 마음은 제나가 내서는(부려서는) 안 되고 얼나(靈我)가 다스려서 내어야(부려야) 한다.
몸의 욕망에 끌려서 마음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의 탐욕이다.
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무슨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즘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을 즘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
희로애락(喜努哀樂)에 허우적이는 제나(自我)를 초극(超克)해야 한다.
무위(無位), 무주(無住)의 얼나만이 제나의 희로애락을
조화시킬 수 있다. 그것이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중화(中和)의 길이다.
얼나가 제나를 절제(節制)하여 다스리는 중화(中和)의 길이 바르게 사는 길이다. (1956)
● 10년을 하루같이 지내는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친형제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녀가 사랑하게 되어 부부가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같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라지만 실제로 얼마만큼
하나같이 된 것인지 멀정한 거짓말이다. 그런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참으로 하나가 되는데는 생명 밑(근원)인 얼(성령)이
터지는 생명문제가 여기에 들어간다. 참으로 두 사람이 하나같이 되려면 두 사람 모두가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는 너와 나라는 나눔이 없다.
얼나는 너와 나가 없는 공통의 한 생명인 것이다.
얼나로 하나가 되면 부르고 대답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이견(異見)이 나올 리가 없다.(1956)
● 참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얼로 교통이 되어서 아는 것이다.
하느님과 얼(성령)로 통하는 점이 있어야 올바르게 발달이 된다. 꼭 무슨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꾸 하느님과 통해야 일이 된다.
성경에도 자연에는 성령이 충만하다고 이른 것이 있다.
동양에서 기상천외(奇想天外)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께 일러주는 것을 아는 것이 발전하는 것이다. (1956)
● 묵은 맥 덩어리에 핀 곰팡이 한 알갱이 같은 나라는 존재인데
내 속에 으뜸인 하나(절대)에서 나온 이상한 것, 바른 것, 근본(根本)인 것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느님 씨(얼나)다.
이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 삶의 지상 목표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 하느님의 씨(얼나)를 싹틔운 사람이라고는 몇 안 된다. 얼나의 씨를 싹틔운 사람을 이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 몇 천 년의 역사가 흘렀어도 얼나의 씨가 싹튼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이것이 아직 그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멸망할 제나(自我)만을 바라보는 이러한 세상에 싹튼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람들의 얼씨가 싹트고 안 트고는 별 문제로 하고 이 사람도
싹이 텃는지 안 텃는지 모르겠다. 싹이 트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정신적인 살림이 구차하나 이렇게 사는 것을 나는 자랑하고 싶다.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다. 옆에 사람들은 알 수 없겠지만 하느님의 씨가 마음속에서 싹이 트는 척만 해도 기쁘기 그지없는데 얼싹이 터서 자라난 사람은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얼싹이 튼 사람으로 온 세상이 가득 찬다면 이 세상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1956)
● 이 땅 위에서 하는 사업이나, 나라나, 세계나 제 맘대로 다 할 수 없다. 다 외물(外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물에 끌려다닐 것 없고 외물에 종노릇 할 것 없다. '이따위 몸을 자른다고 겁낼 것
없다. 하느님이 주신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 이쯤 가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외물이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57)
● 의식(意識)의 세계보다 무의식의 세계가 더 센 나이다.
무의식에서 초의식(超意識)이 되면 그때는 참나(얼나)가 된다.
예수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 3:5-개역성경)고 한 것은 제나(自我)를 초월한 진리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의식의 참나, 곧 솟난 얼나가 영원한 생명이다. (1957)
●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보니 진리를 따르는 이는 없고 다 가짜
문명이라는 빛에 홀려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이에 참으로 진실한
한 점(얼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제사 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은혜로 모두가 마음속의 진리의 한 점(얼나)을 깨치고 나오기를 빌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 언제나 하느님께 나 자신을 불사른다. (1957)
● 사람의 몸은 30대까지 자라고는 늙기 시작하지만 사람의 맘은 80대 까지 자라기 때문에 반드시 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구한 사상을 갖기 위해서는 관념보다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정의와 진리를 이룩 하겠다는 영생의 참나를 깨닫겠다는
강한 신념이 우리의 생활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불신념(不信念)의 시대인 것 같다. (1957)
●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세상 사람은 삶의 법칙을 식·색(食色)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재물(財物)에 대한 애착과 남녀에 대한 애착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못된 것인 줄도 모른 채로
살고 있다. 삶을 바로 잡자면 밥도 처자도 잊어야 한다.
식 색으로 사는 것은 전란이요 음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자는 것이다.
못된 세상을 바로 살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외적인 제도를 고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내적으로 얼나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6:63 공동번역)고 예수가 말했다. 사람은 식· 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본 생명인 얼나는 한없이 풍성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다.
성령 운동이 말씀이다. 얼나가 영원한 생명임을 알면 당장 시원해진다. (1957)
● 이런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리가 없다.
그것은 난 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 몸 사람으로 사는
이는 하느님 말씀을 모른다. 식 색(食色)의 제나(自我)가 임자가 되면 하느님의 말씀은 모른다. 얼나로 진리 정신이 풍부해지면
식· 색은 자연히 끊게 된다. 진리 정신을 일으키는 얼나가 참나다. 정신으로 판단해야 올바른 판단이다.
사람의 제나(自我)는 멸망하지만 얼나는 영생한다.
얼나의 영생은 몸나의 생사(生死)와는 관계가 없다.
정신이 깨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살아야 한다. (1957)
● 영원한 생명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버리는 것뿐이다.
몸생명을 얻기 위하여 얼생명을 버리는 것이 생식(生殖)이고
얼생명을 얻기 위하여 몸생명을 버리는 것이 천명(天命)이다.
내 몸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바른 신앙에 들어가는 것이다. 식욕과 정욕을 미워하여 모든 탐욕을 버리는 것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1957)
● 누에는 애벌레, 고치, 나비로 탈바꿈의 변형을 한다.
죽음을 고치로 보면 이제 나비가 되어 날기 위해서 고치가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나비가 되기 위한 준비다.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얼의 자유를 위해 몸은 죽어야 한다. 몸의 죽음이 없으면 얼의 자유도 없다. 거짓나인 몸이 부정될 때 참나인 얼나를 깨닫는다. (1957)
● 우리는 세상을 목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 세상 여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지나가는 길이다. 목적은 하늘나라이고 이 세상은 수단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하늘나라를 바라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목적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나 자신을 드려다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몸이 수단이고 나의 얼이 목적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몸이 거름이 될 때 얼이 살아난다.
얼이 사는 것이 참 사는 것이다. 얼이 깰 때 한없이 기쁘다.
몸이 얼의 거름이라는 것은 금식해보면 안다.
금식하면 얼이 깬다. 얼이 깨면 기쁘고 행복하다.
그것을 보아서도 정신(얼)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얼(정신)은 보이지 않지만 금식해보면 확 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다. 그것이 히브리 11장 1절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1957)
[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 :1~3)
● 손에 창을 들고 있는 회의문자가 아(我)자이다.
아(我)는 반드시 적수(敵手)가 있는 앞에서 쓴다.
적국(敵國)이 없으면 아방(我邦)이라 하지 않고 오방(吾邦)이라 한다. 적수가 없을 때는 아(我)아닌 오(吾)를 쓴다.
아(我)는 탐· 진· 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말한다.
신앙이란 거짓나인 제나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我)가 없는 무아(無我)가 되어야 한다.
무아(無我)가 되면 배타적인 것이 없어진다.
수성(獸性)이 없어지는 것이 무아(無我)이다.
그래서 석가· 노자 예수가 끔찍이도 제나는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공자(孔子)까지도 제나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없어질 때 참나가 드러난다.
참나인 얼나가 독립· 자유 평등의 나이다. (1957)
● 예수가 이르기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요한 6:53~54-개역성경)고 했지만 얼나(정신)가 나무라면 몸나는 그 거름이라는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몸은 아무리 튼튼해도 죽을 때는 죽는 것이지 죽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몸은 전셋집이나 같다. 빌려 쓰다가 마침내
버려 두고 가는 것이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면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이 몸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
는 것뿐이다. 몸이 강하든 약하든 마침내 이 몸은 내놓아야 한다. 물론 살아 있는 동안 깨끗하고 튼튼하게 간수해야 한다.
이 몸이 병 없이 잘 지내는 것이 사람이 바라는 이 세상에서의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는 그것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병 없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이 바라는 이상이지만 하느님의 이상(理想)은 아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따로 있다. 사람의 몸은 자연이지만 자연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계획이 또 따른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그것은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도 신인(神人)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얼나(靈我)가 되는 것이다. (1957)
● 나를 보아야 한다. 나는 몸나와 맘나와 얼나로 되어 있다.
몸나와 맘나를 제나(自我)라 하는데 이는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죽을 생명이다. 그러나 얼나는 제나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아들로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나의 참나(얼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예수· 석가가 오신 것이다. 예수 · 석가를 믿는 것은 얼나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고자 예수·석가를 믿는 것이다.
나의 얼나는 하느님의 씨요 니르바나님의 씨다. (1957)
● 이 몸은 참나가 아니다. 이 몸은 참나를 실은 수레라고나 할까? 참나인 얼나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얼나도 보이지 않지만 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계신다.
얼나는 보이지 않지만 얼나는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얼나는 예수의 얼나나, 나의 얼나나 한 가지로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다.
눈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것을 보므로 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얼나는 얼을 볼 수 없지만 참된 생각이 솟아나오니까 얼나가 있는 줄 안다. 참인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얼나가 있다는 증거이다. 얼나가 없다는 말은 자기 무시요 자기 모독이다.
얼나가 있으면 하느님도 계시는 것이다. (1957)
●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한 12:46-개역성경) 빛은 얼이다.
얼나의 자각 그것이 나는 빛"이라는 말이다. 얼나가 있다는 것은
얼나를 깨었다는 것이다. 깨었다는 것은 생각이다.
밝은 것이 빛이 되듯이 깬 것이 빛이다.
그 사람이 얼나를 깨었는지 안 깨었는지는 그 사람의 말로 심판한다. 하느님도 예수도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하는 말
이 심판한다. 예수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느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 7:16~17)고 했다. 예수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뜻(명령)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이었다. (1957)
●여(予)자는 서로 줄 것을 줄 수 있는 나인데
넉넉하다는 뜻이 있다. 이 여(予)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뜻을
주고받고 할 수 있는 나(予)이다.
공자(孔子)는 하느님이 내게 속알(德)을 내려주심을 받았다고
할 때 여(予)자를 썼다. 이 여(予)자는 얼굴 둘을 가리고 있는 꼴을 그린 상형의 글자이다.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주고 난 뒤에 줄 것이 없으면 거꾸러진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까지 살 제나(自我)의 끝이 환(幻)이 된다.
환멸한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삼독(三毒)의 제나(自我)로 죽고
얼나를 밝히고 얼나에 복종하는 제나(自我)를 나는 참나를 이루었다고 하고 참나를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이때 제나(自我)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있어도 없는 것이
다. (1957)
● 부모나 스승 밑에서 사는 우리라면 대낮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낮에 길에서 젊은이가 담배를 피워 물고 다닌다.
이전에는 담배를 피워도 대낮에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니지 않았다. 웃사람에게 보일까봐 숨어서 피웠다.
지금은 어른도 아랑곳없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참으로 대낮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정말 이상(理想)의 대낮이란 해와 달이 없이도 밝은 세상을
대낮이라고 한다. 이 대낮이라는 말은 무엇을 예언하는 것 같다.
이 다음 우리는 참으로 해와 달이 없이 얼나의 밝은 대낮을 볼 것 같다. (1957)
● 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뜻에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그대로는 안 된다.
벗어버릴 것이 여간 많지 않다. 벗어 버려야 할 것 다 버리고 가야 한다. 마음은 반드시 멸거(滅去)해야 한다. 그런 뒤에 얼나에 나아가는 즉진(卽眞)을 해야 한다. 참나인 얼나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말을 해도 그것이 참인 얼나에 이른 것이 아니면 아무 짝에도 못쓴다. (1957)
● 우리 몸뚱이는 요망한 것이라 스스로가 체신을 갖추어야 참나인 얼나에 이른다. 몸나를 체신(體身)하여 희생함으로 몸나의 어둠이 가시고 얼나의 아침이 온다. 이것이 궁극의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우주 안팎의 전체인 하나의 절대자(絶對者)가 하느님이다.
얼로 충만한 허공인 이 우주가 그대로 하느님이시다.
내 맘속에 온 얼나는 절대 허공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 절대의 아들이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눈이 멀어서 애착함이 가시어지는가가 문제이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절대)인 허공이 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 올 것이다. (1957)
● '꽃은 피처럼 붉다 하여 꽃은 핀다'고 한다.
꽃은 자연의 피요 사람의 피는 자연의 꽃이다.
꽃이 피요 피가 꽃이다. 이 꽃다운 피, 피다운 꽃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의로운 피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꽃다운 의로운 꽃피(花血)다. 한마디로 의인(義人)이 홀린 피다.
아무리 흉악한 세상이라도 의인이 흘린 꽃피로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 세상을 의롭게 하는 것은 의인의 피뿐이다. 의로운 피를 홀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인격으로 성숙한 증거이다. 성숙이란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 아들이란 몸나의 죽음을 넘어선 얼나(靈我)다.
진리(얼나)를 깨닫는 것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진리 (얼나)와 성숙(成熟)은 같은 말이다.
죽음과 깨달음은 같은 말이다. 제나(自我)의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미성년이다. 몸나의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미성년은 삼독(三毒)의 수성(獸性)에 이끌려 사는 때를 말한다. (1957)
● 몸은 죽지만 얼은 죽지 않는다. 얼나는 진리의 정신을 낳는 영원한 생명이다. 정신이 육체를 이겨야 성숙한 정신이 된다.
죽음이란 육체의 멸망이요 정신의 승리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 16:33-개역성경)고 말했다. 자기의 몸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얼이다.
자기 육체의 죽음을 보며 미소지을 수 있는 정신이 성숙한 정신이다. 성숙한 정신이 꽃핀 정신이요 진리를 깨달은 정신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버릴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요한 10:18)고 할 수 있을 때 이때 나는 온전한 정신이다.
온전한 정신을 낳는 얼나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목숨을 아는사람은 얼목숨이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믿는다.
얼목숨을 모르는 사람은 해(害)를 보면 반드시 피하고 이(利)를
보면 반드시 따라간다 (知命者 知有命而信之 不知命則 見害必避 見利必趨-程子)(1957)
●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을 흔히 쓰는데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려면 마음의 정신이 우로 끌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로 끌린다는 것은 몸을 초월하고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더욱이란 우로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욱은 우로 올라간다는 것을 강조해서 'ㄱ' 을 붙였다. 그래서 더욱은 더 우로이다.
삶은 더욱더욱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문에 나라는 얼의 나라, 얼의 나이다.
얼(성령)에는 나라와 나가 다르지 않다. 얼이란 하느님의 생명소라 유일절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얼나라를 찾아 가질 것이지 땅 위에서 이루는 나라는 좇아갈 필요가 없다. 세상의 나라를 좇아간 것이 오늘날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본 생명의 자리인 얼나라를 세워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서지 않는다. 자기의 참나인 얼나를 찾은 다음에야 그 얼나에서 떠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영원을 붙잡은 것이 되고 소위 구원을 얻은 것이 된다. (1957)
● 몸이 죽어야 얼이 산다. 몸나는 노병사(老病死)이지 진선미
(眞善美)가 아니다. 얼나가 진·선·미이다. 몸은 죽어 썩지만 얼은 살아 빛난다. 그러므로 몸으로는 죽어야 한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개역성경) 하고 죽는 거다. 그것이 아버지 의 뜻이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러 온 것이다. 몸나는 죽으러 온 줄 알아야 한다. 안 죽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얼이시다. 하느님의 얼이 내 맘에서 말씀으로 샘 솟았다. 얼나가 제나의 뜻없이 하느님의 뜻으로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제나의 뜻 없이(無意) 볼 때 진리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 성의(誠意)다. 얼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진성(盡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나의 뜻이 없어지고(無意) 반드시가 없어진(無必) 세계다. 진리와 나가 하나가 되는(無我)세계다. 하느님의 뜻인 진리가 참나(얼나)가 되는 세계다. 이것을 존심 양성(存心養性)이라 한다. 공자(孔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밥 먹는 것보다 강하다.
(君子憂道 不憂貧-논어 위령공편)고 했다. (1957)
● 마음은 놓고 몸은 곧게 가져야 한다. 마음은 영원한 그늘 속에 쉬게하고 몸은 끈이(斷食)와 그늠(禁慾) 위에 높이 올라 세우자. 이것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이다. 마음은 놓고 몸은 꼿꼿이 세우는 이것이 참선이다. 내 마음은 고운 재(灰)와 같이 가라앉히고 내 몸은 막대처럼 꼿꼿이 세워야 한다. 몸은 살(肉)로 된 껍질이기에
내버려두면 물러지고 썩어지고 주저않는다. 그러므로 몸은 막대기처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무슨 막대기인가?정신이라는 막대기다. 정신이 강해야 몸은 일어선다. 몸이 일어셨다는 것은 정신이 강하다는 것이다. 독립은 정신에서 나온다. 정신이 약하면 몸이 쓰러지게 된다.
사람들은 저 잘난 맛에 산다.
이것이 교만인데 교만이 깨져야 한다.
교만의 바람이 빠지고 겸손해져야 한다.
교만의 풍선이 터져 망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실상(實相)에 깨어나야 한다. 내가 못난 줄을 알고
뉘우쳐야 제나의 무상(無常)이 깨지고 얼나의 실상(實相)이 된
다. 마음은 없어져야 마음이다. 내가 없는 것이 마음이다.
무념(無念) 무상(無想)하게 되어야 거울 같은 마음이 된다.
거울 같은 마음이 되면 영원한 생명인 얼나가 드러난다. (1957)
● 이 똥오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더러운 땅 예토(穢土)를 님어서야 깨끗한 나라 정토(淨土)에 이른다. 정토가 하늘나라요 니르바나 나라 이다. 하늘나라에는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覺) 것이다.
깨달으면 '있다시 온이' 여래(如來)가 된다. 여래란 있어서 있는(있게 해서 있는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얼나)가 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얼나(靈我)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얼의 나라(얼나)에는 늙음도, 앓음도, 죽음도, 괴롬도 없다.
영원한 생명(얼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몸나가 없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앞에는 얼나가 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제계(彼岸)다. '제계 가온(歸一)' 이것이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이루어야 할 참이다. 제계 가온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요 얼나를 깨달음이다. 하늘나라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각(自覺)과 천국(天國)이 둘이 아니다. 얼나와 하느님은 하나이다.
사람은 식색(食色)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넘어서야 한다. 식색의 제나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아직 얼나가 다스리는 의식인 정신(情神)이 없다. 정신은 얼나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릴 때 정신이 나타난다. 땅에 하늘나라가 임한 것이다.
정신의 세계만 자성존지(自性尊持)하는 나라이다. (1957)
● 제나(自我)가 죽어야 참나인 얼나로 살 수 있다.
제나가 온전히 없어져야 참나인 얼나가 드러난다. 참나(얼나)가
우주의 임자요 제나(自我)의 임자(主님)이다. 제나(自我)의 임자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려 수성에서 해탈한 자유인(自由人)이란 뜻이다. 이러한 자유인이라야 남을 나로 생각해줄 수 있다.
제나(自我)가 죽어 내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은 제나(自我)의 수성 (獸性)을 죽여 부귀 (富貴)를 초월했다는 말이다.
참나(眞我)와 하느님이 하나다. 참나가 얼나이다.
참나(얼나)로는 나의 생명과 하느님의 생명이 하나다.
참나(얼나)와 하느님은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이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선미 (眞善美)의 영원한 생명이다. (1957)
● 부(富)와 귀(貴)는 힘과 빛 때문에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얼나에서 나오는 얼의 힘인 정신이 있고 얼의 빛인 거룩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얼나가 힘있고 빛나야 참사람이다. 정신의 힘이 없고 거룩의 빛이 흐려진 뒤에 부귀를 가지고 대신하려면 그것이
인류 멸망의 징조이다. (1957)
● 도(道)는 세상을 초월한 진리를 말한다.
도(道)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이 언제나 임자를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질 때 이루어진다.
참으로 진리를 찾으려면 목숨을 내걸고 실천해 보아야 한다.
도(道)는 참나인 얼나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다. (1957)
● 산은 오를수록 험하다. 학문도 종교도 올라갈수록 어렵다.
그 까닭은 체험하고 실천하는 행(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라갈수록 기쁨이 넘친다. 이것이 바라는 것의 실상(實相)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 기쁨이 넘치듯 하느님 나라에는 기쁨이 넘친다. (1957)
●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에 목숨을 걸고 올라가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에 나타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하느님이 계시는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이다.
사람이 부귀(富貴)를 탐하는 것도 사람의 본성이 잘못 나타난 것이다. 부귀는 산이 아니라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형이상의 산인 저 높은 하느님에게 올라야 한다.
높은 산에는 부귀를 가지고는 못 오른다. 몸나를 넘어 죄짐을 벗고
정신을 낳는 얼나가 되어야 오를 수 있다. 이것이 형이상학이다.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명(天命)이다. 하느님께로 오르는 것이 믿음이다. (1957)
● 빛깔(色)을 잘 가리는 이는 빛깔에 달라붙지(執着) 않고 소리(聲) 냄새(香), 맛(味)을 잘 가리는 이는 소리· 냄새· 맛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득의작(得意作) 속에 머무르거나 만족하지 않으며 시인은 자성품(自成品) 속에 해골을 눕힐 수는 없다.
종교가가 자설법떤(自說法) 속에 열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 시집, 업적, 경전, 실가(室家), 의사당, 절, 교회, 사회 등은
색계(色界)의 그림자 모음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찾아가는
생각의 귀착점은 참나인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이신 참나를 만나기까지 우리의 삶에 만족이란 없다.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이어 나가는 것뿐이다.
지나간 일은 벌써 허물이요, 껍질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세상(상대세계)에 집착하여 달라붙으면 이 세상의 삶은 죽은 것이나 같다.
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1957)
● 이제 여기의 이 나라는 존재는 거짓나이지 참나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라는 것도 거짓이라 하잘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껏 찾아야 할 것은 오직 참인 하느님이시다.
참은 일생뿐 아니라 대를 이어가며 찾아야 한다.
인류가 그칠 때까지 찾아야 한다. 온 인류가 다 힘을 쏟아서 마침내 알아내야 할 것은 참 하나이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참은 절대자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나서는데서 가까워 진다. 참(진리)은 하느님의 얼이요 뜻이다. 참은 곧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참은 아주 가까운 데 있으니 내 속에 있다.
참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참은 제나(自我)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참나인 하느님을 찾을 때만 존속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1957)
● 내가 얼숨을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숨쉬어 진리인 나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리는 권능(authority)을 가져 수성을 이김으로 새사람이 되게 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을 마음의 생각으로 숨쉬어 얼나로 솟나야
한다. (1957)
● 공자(孔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天生德於予-논어
술이편) 덕(德)을 나는 '속알'이라고 한다.
속알(德)이란 의식화(意識化)된 얼나이다.
이 속알은 제나(自我)에서 지혜, 정신, 인격으로 나타난다.
속알이 충만한 사람은 무엇을 생각 없이 가까이 하든가 멀리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친절히 하는 것도 잘못이고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친압(親押)이나 모멸(侮蔑)은 속알이 모자라는
데서 일어난다.
친압처럼 간사한 것은 없고 모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람은 인격이 중심이 되어야지 재간이나 외모가 중심이 되면
친압과 모멸을 막을 길 없다. 자라는 사람은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른다. 모두 예수나 석가처럼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성인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업신여긴단 말인가? 생각하면 성인(聖人)을 존경하는 것은 쉽다. 그렇다고 소인들을 업신여기면 말을 안듣고 일을 안 해 준다. (1957)
● 사람들은 거의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쓰고 참으로 쓸데있는
일에는 거의 정신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도 재력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무엇이 쓸데있는 일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생각의 손으로 속알(德)을 잡는
진리파지(眞理把持)에 마음을 써야 한다. 물건도 이상한 물건이라고 중하게 여기게 되면 필요한 물건을 무시하게 된다.
이쁘다, 귀엽다 하는 것을 귀히 여기면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게 된다. (1957)
● 성령의 열매 (얼나)란 사람다운 인격을 세우는(character building)것이다. 인격을 세우는 덕목(德目)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인의예지는 사람의 본성인 얼나가 제나(自我)를 다스려 구현된 결과이다. (1957)
● 욕심이란 끝이 없다. 그것은 밑 빠진 항아리와 같아 물을 아무리 부어도 소용이 없다. 욕심을 좇아 사는 것은 손실이요 죽음이다.
욕망을 가지면 해(害)롭고 욕망을 버리면 의(義)롭다.
참으로 욕심이 없으면 생사(生死)도 넘어설 수가 있다.
살았다고 좋아하지도 않고 죽는대도 싫어하지 않는다.
생사를 초월하면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 이른다. 얼나는 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영원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얼나)이야말로 보석 가운데 보석으로 소중한 것이다.
이것만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
●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야 한다. 뼈와 골과 피로 이뤄진 머리를
머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심장과 이어진 머리는 잘라 버려야 한다. 이것이 주역(周易)에서 머리가 없으면 좋다(無首卽吉)는 것이다. 머리에는 피가 한 방울도 없이 해 오직 정(精)과 신(神)만 통하여 금강석처럼 빛나는 머리를 가져야 한다. 이럴 때의 머리를 말씀이라고 한다. 피 없는 머리는 차디차서 말씀뿐이다. 말씀만으로 살아야 한다. 생각하려고 할 것 없다.
다만 말씀을 머리 위로 빛나게 해야 한다. (1957)
● 향락을 위주로 하는 이세상은 멸망을 스스로 부르는 것이다.
이 멸망할 세상은 집어치우고 하느님이 계시는 위로 솟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얼나를 받들어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다. 그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의 생명으로 통일 된 나라이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인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변함이 없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1957)
● 나란 하느님과 얼로 뚫리는 영통(靈通)· 내통(內通)한 엉큼한
(Mahatma)사람이 돼야 한다. 하느님하고는 줄곧 얼이 뚫려야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엉큼하게 된다. (1957)
●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이 보낸 얼나가 참나(無我)이다. 어버이가 낳은 제나(自我)는 죽으면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참나인 얼나는
하느님 나라를 세운다. 그래서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했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로
우주 안팎으로 충만한 호연지기 (浩然之氣)의 나이다.
그러므로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1957)
● 내가 쓴 이 글은 내가 혼자 가만히 앉아서 마음속 깊이 외우는 것인데 한 바퀴 외우고 나면 내 속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둥글어지고 더 깨어나는 것 같아서 나는 이것을 '정신적인
하이킹'이라고 한다. 오르고 오르고 높이높이 올라 하느님의 품속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얼님(성령)을 받아 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내 목숨을 키워 올려 마침내는 마음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 이 노래의 내용이다. 이 노래를 깊이 명상하면 우선
내 몸의 혈액순환이 잘되고 내 마음의 이치가 잘 돌고 내 정신의
얼님(성령)이 돌아서 내 생명 전체가 풍성해진다. (1957)
[주]류영모가 지은 기도의 말씀
높고 높은 산보다 높고, 산과 들보다 높고, 삼만 오천육백만 리 해
보다도 높고, 백억천조 해(별)들이 돌고 도는 우리 하늘 보다 높고
하늘을 휩싼 빈탕보다 높고, 허공을 새겨낸 마음보다 높고, 마음이
난 바탈보다 높은 자리에 아버지 하나신 아들, 참 거룩하신 얼이,
끝없이 밑없이 그득 차이시고, 고루 잠기시며, 두루 옮기사, 얼얼
이 절절이 사무쳐, 움직이시는 얼김 맞아, 마음 오래 열려, 예어
오른 김 큰 김 굴려 코 뚫리니, 안으로 그득 산 깊이, 사백조 살알
을 꾀 뚫고, 모여나린 배심, 잘몬의 바탕 힘, 바다 보다 깊이, 땅
아래로 깊이, 은하계 아래로 깊이, 한 알을 꿰어 뚫다. 이긴 김 깊
이, 콧김 뱃심으로 잇대는 동안, 얕은 낮에 불똥이 뛰고, 좁은 속
에, 마음 종 울리다 마니, 싶으지 않는가. 고프지 않은가, 울고프지
않은가, 우는 이는 좋음이 있나니, 저희가 마음 삭음을 받을 것임
이라, 우리 마음에, 한 목숨은 목숨키기, 깊이 느껴 높이 살음, 잘
몬의 피어올리는 피도 이 때문, 한 알알의 부서져 내리는 빛도 이
때문, 우리 안에 밝은 속알이 밝아 굴러 커지는 대로, 우리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타고 난 마음 그대로, 왼통
울려 속알 굴려 깨쳐 솟아 오르리로다.
-류영모 지음
●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얼목숨을 키우고 얼생명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게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그것이 얼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이 우주의 기운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옴도 다 우리의 얼목숨을 키우기 위해서 있다. 우주와 세계와 인생이 모두 얼목숨 키우기 위해 있다. (1957)
● 나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을 얼이라고 하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을 덜이라고 생각한다. '얼떨결'이란 말이 있지만 얼은
영(靈)이고 덜은 마(魔)라고 생각한다. 믿는 사람들은 영(靈)이라고 하면 성령을 생각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이라고 하면 영특한 것을 생각한다. 보통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일수록 영한 사람을 찾게 된다. 그래서 귀신 집인 무당을 찾는 사람도 많다. 대학 나온 똑똑한 사람도 이런데 흥미를 가지는 이가 많다. 이것은 덜된 사람으로서 이는 얼에 통한 사람이 아니라 덜에 씌운 사람이다.
우리의 얼생명을 키울 생각으로 신통(神通)을 찾으면 그것은
진리를 찾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을
위해서 얼을 찾으면 그것은 마귀에 떨어지고 만다. 신통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이 깨끗하면 성령이 되고
마음이 더러우면 악마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오순절을 성령의 강림으로 보지만 성부(聖父)와 성자(聖子) 사이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 이어져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를 예수는 하느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성령을 받아서 살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우로 올라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사람은 가끔 정의(正義)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때가 있다. 성경 사사기에는 힘을 잃었던 삼손이 마지막에 성령이 임하여
다리곤의 신전을 쓰러뜨리는 큰 일을 했다.
성령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우주 어디서나 일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정직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없다면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은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마가 3:28~29)라고 했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마음을 닫고서 하느님의 의(義)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령이 권능을 나타낼 수 있도록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마태오 6:33)고 했다.
하느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 얼나를 나무를 가꾸듯이 아기를 기르듯이 키워 나가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입고 성령(얼나)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요한3 :5) (1957)
● 나는 삼각산 골짝 골짜기에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고'라
써 붙여 놓고 산기도를 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성령이 될 이치가 없다. 벌써 욕심으로 성령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얼이 내리면 덜(魔)이 될 수밖에 없다. (1957)
● 부흥회를 해서 병을 고치고 돈이 쏟아지는 것이 성령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를 깨달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아들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령이다. 요새 교회가 성령을 팔아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서 성령의 권능(엑수시아)이라 하는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예수가 말한 성령의 권능(에스쿠시아)이란 사람이 지닌 수성(獸性)을 다스리는 권능을 말한 것이다. 이적 기사를 일으키겠다는 권능 생각은 아주 없어져야 한다. 요새 어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병을 고친다고 야단들이고 여인들이 그 뒤를 따라 다닌다는데 그것은 모두 마귀(제나)의 짓이다. (1957)
●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신 얼로 우리는 위로 오르고 올라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짐승들은 아직도 기어 다니는데 사람은 하늘을 이고 바로 서서
다니는 것만 해도 신통한 것 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결단이 나더라도 하느님이 주신 얼 하나만은 결단이 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얼 하나 가지고 사는 것이다.
우리의 진리정신이 얼나에서 나온다.
이 얼나가 바로 영원한 생명인 참나다.
사람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은 얼나이다.
얼나는 몸나가지닌 육욕(肉欲)의 덜(魔)을 눌러 다스리는 힘이다. 덜(魔)은 제나(自我)의 마귀(수성)로서 우리가 얼나의 뜻을 좇으려는 것을 막는다. 나는 얼결(靈濤) 덜결(魔濤)이라고 한다.
우리는 얼나를 받들고 가야 한다. 얼나가 참나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독(三毒)을 씻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얼님을 이어야 한다. 우리가 얼님을 일 때 하느님 아버지처럼
온전해질 수가 있다. 몸의 욕망인 덜결에 휩쓸리면 요사스런 것이 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다. (1957)
● 인생 문제는 정신적으로 자라서 성숙해질 때 풀린다.
성숙이란 익었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이겨 다른 나가 되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다.
나가 아닌 나가 곧 얼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제나(自我)가 부정 (否定)되고 초아(超我)가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나(自我)에서 얼나로 솟난다는 말이다.
부분인 제나로 죽고 전체인 얼나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이 영생하는 것이다. (1957)
● 개인으로 보면 호흡을 반복하고 민족으로 보면 생사를 반복한다. 코로 숨쉬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몸이 사는 길이요 개인의 생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 민족이 사는 길이다.
나뭇잎은 돋아났다 지지만 나무는 그대로 살고 있다.
여기에서 생사(生死)로 변하는 것 너머에 또 변하지 않는 전체를 본다. 사람도 몸과 맘의 제나(自我)로는 변하는데 얼나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나면 몸 · 맘의 제나는 살아도 죽어도 행복하다.
생명의 비결은 변하지 않는 한결(常)을 알아 그 가운데 드는 것이다. 이를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나로는 하느님과 내가 한 생명이다. (1957)
●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無常)한 몸생명이 비상(非常)한 얼생명이 된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쉬면서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은 늘 제나(自我)를 죽임으로써 얼나가 사는 것이다. 사람은 내 속에 오신 하느님이신 얼나를 위하여 열심이 일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자기 사명(使命)으로 알고 이를 이루기에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내 맘속에 얼나가
하느님과 하나되게 중심을 잡고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언제나 옛 것을 넘어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옛 껍질을 벗고 새로운 삶을 사는 창조적인 짧을 위하여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높게 살아가야 한다. (1957)
● 제나(自我)란 참나인 얼나가 신을 신발이다.
발에 맞도록 아름답게 지어서 흙 떼고 먼지 털고 약칠하고
솔질하여 빛나게 닦아 힘있게 바로 살고 조심조심 길 찾아
마음놓고 걷다가 갈 길 다 간 뒤에는 아낌없이 주리라.
남(어버이) 지은 신이니 뜻 있게 신다가 갈 길 다 간 뒤에는
아낌없이 주리라. 이 제나(自我)란 참나(얼나)가 신을 신발이다.
이 신발은 일생 동안 신는다. 신이 낡아진다는 것은 참나를 찾았다(眞我發見, Self realization)는 뜻이다.
참나를 찾았으면 거짓나인 제나(自我)는 아무 때나 죽어도 좋다. 얼나로는 하느님 아들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 아들인 얼나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니 멸망할 제나는 언제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야말로 헌 신발처럼 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다. (1957)
● 우리나라에 푸닥거리를 일본에서는 미소기(미소기, 목욕재계)라고 해서 집을 가셔내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것은 계속 물로 씻어내야 한다. 오늘 물로 씻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은 흙이지만 자꾸 씻으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문제는 성령인데 성령은 공자(孔子)가 말한 명덕(明德)이다. 명덕은 밝혀야 한다. 거울 같은 명덕은 자꾸 씻어 닦아야 한다. 내 몸은 흙 덩어리인 줄 알고 명덕을 밝히면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게 된다. 또 예수는 바람을 갖다가 영원한 생명의 운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다. (1957)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했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 이다. "(요한 17:26-개역성경) 내가 아버지 존재를 저희에게 알게 했고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에서 이때의 나는 영원한 생명인 나, 영원한 진리인 나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다.
사랑과 진리인 얼나를 저희(제자) 안에 있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저희 안에'라는 것은 알기 쉽게 얘기한 것이고, 진리인 얼나에는
안과 밖이 원래 없다. 그러므로 안에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오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 아들이 가는 것도 아니다. 성령이 가득 찬 전체가 하나인데 안과 밖이 있는 것도 오고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상대(相對)에 사니까
관념이 상대적이라 그렇게 말해야 알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석가붓다에겐 본래 붓다(얼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석가도 얼나를 깨닫기 전에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범인(凡人)이었다. 그렇다고 붓다(얼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얼나)는 없는 곳이 없다.
유일무이(唯-無二)의 절대존재(하느님)를 상대세계에서 깨달으면 그이(석가붓다)와 비슷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1957)
● 얼(나)밖에 정신이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는 상대세계에서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 팔 겨를이 없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이 상대세계에는 맘 붙일 데가 없다는 참 좋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靈我)
에 맘을 내라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 말 한 마디만 잘 알면 해탈할 수 있고 구원받을 지경에 갈 수
있다. (1957)
● 사람에게 영(靈)이 내렀다던가 영감(靈感)을 얻었다는 것은
얼(靈)로 생각하면 좋겠다. 얼떨떨하다는 말이 있으나 얼이 떨어져서 갈피를 못 잡는다는 말이다. 신령(神靈)하다는 말은 신통하다는 말이다. 신(神)이 통해서 당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해내면
그것 참 이상하고 신통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과 얼로 뚫렸으므로 영통(靈通)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통하고 영통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거죽으로만 보면 우리 사람은 저 자연의 나무나 바위만도 못하다. 흙으로 지어져 흙덩이 같은 이 몸에 신통· 영통하는 얼나의 정신작용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 일컬을 수 있다. (1957)
●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 오순절(五旬節) 다락방에서 성령이 나타나심을 알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성령이 임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그러한 잠깐 사이가 아니다. 영원한 자리에서 보면 창조된 천지만물 어느것에나 통히 성령이
깃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들이다.
얼나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떠날 수 있겠는가? 성령이 없으면 나는 이렇게 서서 말할 수 없다. 성령(얼나)이 말씀을 그만두라면 성령이 떠나간다. 우리는 우로 올라가는 생각만으로 인생을 산다면 참으로 성령이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지경에 갈 수가 있다. 성령은 꼭 기독교 신도에게만 임하는 편벽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주 삼라만상에 두루 계시는지라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는 언제든지 그 모습을 달리해서 나타난다.
성령은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숨쉼과 같다. 성령이 우리 맘속에 계시는 얼나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의 얼나가 참나이다.
얼나는 하느님과 하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성령이 임해 권능을 얻으면 독을 마시어도 몸에 해롭지 않고 사람들에게 손을 대면 앓던 병이 낫는다고 한다. 임한 성령의 권능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르코복음 마지막 장(16장) 9절부터 20절까지는 2세기 초 아리스티온이라는 이가 덧붙인 것으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마르코복음 끝에 적었으니 더 중요한 것같이 생각하여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것을 바라서 그 짓을 하려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있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목적이 있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옳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얼(靈)이 통하여 하느님 아들의 권리를 얻는 것이다.
그러면 간단히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할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얼로 통해서 영원한 생명(얼나)에 이르는 것이
입명(立命)이다. 이래서 예수와 같이 영원한 진리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증거한다.
루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회개에 잘 나타나 있다.
탕자 얘기는 불경 법화경에도 나온다. 비유된 아버지는 온전한
하느님 아버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탕자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돌아 다니며 고생을 한다. 그러다가 거지 노릇까지 하다가도 회개를 하면 아버지는 넉넉하신 분이라 곧 자기의 아들로 회복시켜 준다. 이보다 더한 우리의 권리가 없다.
하루 아침에 참나(얼나)를 깨닫고 나서면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인 성령(얼나)을 받는다. 그러면 이 영원한 생명(얼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1957)
● 석가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다르마(Dharma, 法我)라고
했다. 다르마(法)는 참(진리)이란 뜻이다. 금강경에는 참(法)에도 마음이 살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구도(求道)란 참을 찾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인데 참에도 마음을
살리지 (生心)말라니 괴상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참나(法我)를 찾으려고 해서는 참나를
찾지 못한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죽으면 참나는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自我)이 죽어야 한다. 생심(生心)하면 미혹하고
사심(死心)에 본성인 참나(法我, 불성)가 나타난다. (1957)
● 우리들이 불안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 본 바탈인 본성(本性)이다.
우리가 잊었던 본성(얼나)을 회복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영원한 자리(얼나)를 일생을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일 것이다.
얼마 동안만 얼의 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쳐서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얼의 나라의 영원한 부흥이요
얼나를 회복하자는 부흥이다. (1957)
● 얼나는 큰나(大我)이다.
우리 말로는 '한아' '한나'라면 큰나(大我)를 뜻한다.
이 큰나는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다.
큰나(大我)에는 제나(自我)란 없다.
제나(自我)란 나의 성질인데 나의 성미가 다르다고 해서 나를 매기게 된다. 그 성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맛에 들러붙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떡을 좋아하느니, 술을 좋아하느니, 짜게 먹느니,
싱겁게 먹느니 이것을 가지고 개성(個性)이라고 해서 한이
있겠는가?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그런 것이 참나가 아니다.
큰나(大我)에는 그런 제나(自我)가 없어 무아(無我)다.
공자(孔子)도 내 뜻을 꼭 이루어야 하겠다는 의필고(意必固)의
제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 의견, 내 기필(期必), 내 고집의 제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한 나, 곧 하느님의 얼이 주관하는 나가 큰나(大我)요, 얼나(靈我)요, 참나(眞我)다. (1957)
● 사람이 몸으로는 다른 짐승들과 같은데 그래도 귀한 것이 있으니 하느님의 얼(씨)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음이다.
하느님의 얼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사람은 하느님의 얼이 대통령이 되고 제나(自我)의 맘이 수상
(총리)이 된 내각이 조각될 때 사람에게 인격(人格)이 나타난다
인격이란 인물(人物)의 가격이란 뜻으로 사람의 가치이다.
사람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을 이루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선 나가 가장 존귀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1957)
● 연애하는 사람들이 그대의 눈동자가 그립다느니 그대의 콧등이 그립다느니 하지만 눈이란 들창이요, 콧구멍은 굴뚝이요,
입은 아궁이요, 귀는 대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집에 가서 속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굴쪽 언저리나 대문 밖에서 맴돌다가 왔다면 그것이 무슨 연애인가?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주인(얼나)과 만나야지
굴뚝이 오뚝하다느니 창문이 반짝반짝한다느니 해보았자 모두
얼굴 위에서 헤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감정으로 깊이 사귄다고 야단이지만 사실 자기의 속마음은 다른데 가 있다. 그리고서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면 무엇하나? 속마음은 딴 데 있고 껍데기끼리 비비는데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개인들이 다 그렇고 온 인류가 그렇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우리 마음속 깊은 데 하느님 아버지의 얼이 와 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용납이 되어야 하는데 그 속에 용납이 안 되면
부득이 껍데기만 비빌 수밖에 길이 없다. 껍데기 가죽이나 비비니 점점 곁가죽이 두꺼워져서 철면피(鐵面皮)가 된다.
수박 껍질에 붙어 다니는 파리와 같이
새빨간 수박 속은 보지도 못하고 수박 껍데기에만 헛도니
이런 인생이야말로 허망한 인생이다. (1957)
● 가족끼리도 체면치레, 동지끼리도 체면치레, 먹는 데도
입는 데도 일체가 체면이다. 이 제나(自我)의 체면을 한 번 시원하게 벗어버리고서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기 전엔 참 인생은 없다.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場名)이니 성공출세(成功出世)니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품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 사는 것이다. (1957)
● 몸은 만나지만 마음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고독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도 깊이 생각하고 학생도 깊이 생각해서 서로 아무 말도 없지만 서로 마음속에 깊이 통한 곳에서 얼(靈)이라는 한 점 나 곧 얼나에서 만난다.
이 가온찍기(「.」)의 한 점만이 참된 점이다. (1957)
● 물질계에서 생명계가 나오고 생명계에서 정신계가 나오고
정신계에서 얼(靈)의 세계가 나온다. 이 얼의 나라는 절대(絶對)라 어떻게 할 수 없다. 성인이나 붓다의 본체도 얼나의 천명(天命)을 좇아 살았다.
성인, 붓다. 그리스도는 진리·천명 성령이라 이름하는 얼나의 뜻에
따라 산 이들이다. (1957)
● 사람이 자칫하면 거짓나인 몸나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몸의 감각인 살맛(肉味)에 빠지면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몸나가 거짓나인 줄 알고 올라서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령의 나라, 말씀의 나라를 찾을 수 있다.
거짓나인 제나(自我)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참나인 얼나를 깨달음으로 하느님 아들(얼나)의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1957)
● 남은 많은데 나는 하나뿐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나가거라 해서 나온 것이다. 내가 오늘 나와서 나 혼자만이 여기서 참나인 하나(一, 하느님)만을 온전히 깨닫겠다고 열심히 생각하면 내가 공연히 와서 가는 것이 아니고 내 맘 밖에 여러분이 계시어서 내가 나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수의 남은 나에 대해서는 나라는 것을 확실히 증거해 주고 있다. 곧 아무도 없는데 돌연히 나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증거해 주는 남이 있기에 나온 맛도 있다.
여러분은 나오기 이전에 태초부터 하느님과 같이 있다가 나가거라 해서 비로소 이제 여기 나온 것이다. 여기에 나라는 것은 영원한 님(하느님)과 관계가 있다.
제나(自我) 뒤에 얼나(靈我)가 이어져 있다.
제나를 넘어서 얼나에 오를 수 있다. (1957)
●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얼나)을
주어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영생하게 했다.
우리가 순간 순간 토막의 부분으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얼나로 영생하자는 것이다. (1957)
● 이 땅에서 몸을 지닌 채로 영생하고 신선(神仙)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불교, 도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를 멸망시키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 이것을 구하고 있으니 사람이란 짐승이
어찌 된 건지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意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뜻알(意識: 제 맘에 대한 생각). 몸알(身識: 제 몸에 대한 생각), 두레알(공동체 의식), 나라알(한국인이라는 의식), 누리알(지구인이라는 생각). 빔알(虛空意識' 우주적 존재라는 의식) 참알(진리 의식, 하느님 아들이라는 의식) 이런 것들이 있는데 이게 다 따로 개별적인가? 모두 하나인가? 다른 것은 개체(個體)가 다르고
개성(個性)이 다르지만 진리의식(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제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하느님)로부터 왔다는 것이 예수 석가의 생각이다. 사람은 진리의식(얼나)을 받아서 여느사람(凡人)에서 전체의식을 지닌 얼나의 그리스도나 붓다(Buddha)가 된다.
예수(靈·法)는 개인의 나지만 공통의 얼나를 깨달아서만
예수· 석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구경(究竟)은 얼나를 참나로 알아서만 다 이루게 된다. (1960)
● 외아들(독생자)을 주셨다(요한 1 :14)는 것은 하느님의 씨 (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 몸은 짐승이라 짐승과 다름없이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얼(씨)을 주신 게 다른 짐승과 다르다.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얼(불성)이 있으니 이를 깨달으면 좋지 않겠는가? 붓다가 되는 데는 다르마(Dharma, 法)가 참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고기 덩어리(몸나)는 온통 죄악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외아들(얼나)을
내쫒고 이 죄악된 몸뚱이가 차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얼나를 참나로 깨닫지 못하면 멸망해 버린다.
이 몸나는 죽어버리고 마는데 내 속에 죽지 않는 외아들(얼나)이
있어 영생한다.
삼독(三毒)의 제나(自我)는 죽지만 믿음의 얼나가 산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제나와는 상관없다. 우(하느님)에서 오는
믿음의 얼나가 영생하는 것이지 이 몸나는 죽는다. 얼나의 신앙이 뭔지 모르지만 이 영원히 얼나가 산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우(하느님)에서 오는 성령(얼나)이 내게 믿음을 일으키는 것 같다. (1960)
●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1~32)
위란 얼의 나라를 말한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는 말씀이다.
예수는 보고 들은 것을 묵시록에서처럼 말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왔다면 '내가 하늘에서 살 때에'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 성령에서 나왔으니 그리로 들어가는 게 나의 신앙이다. (1960)
● 나는 생각한다. 나를 위해 생각한다. 생각의 중심이 나다.
나는 있다. 나는 참이다. 이 나는 예(땅)에 있는 나가 아니라
계(하늘나라)에 있는 나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다.
그래서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 18:36-개역성경)라고 말했다.
성경 불경을 읽다가 모르더라도 그대로 자꾸 읽어 나가야 한다. 성경이고 불경이고 자기의 정도대로 알아 가는 것이다.
성령(얼나)을 받아 돈오(鑛悟)를 하면 한꺼번에 다 될 줄 알아도 그렇지 않다. 석가도 단번에 모든 것을 다 알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돈오(碩悟) 뒤에도 점수(漸修)를 해야 한다.
돈오도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니다. 줄곧 깨달아야 한다.
인생의 길이란 꽉 막힌 것 같다가도 확 트이는 수가 있고
탁 트였다 싶다가도 또 꼭 막히고 그런 것이다.
삶이란 그저 깨자는 것이다. 깨달아서는 뭘 하나 일어서야 한다.
영원한 생명(얼나)으로 서는 것이다. (1960)
● 누구나 하던 일은쉽게 된다. 그러나 처음으로 하려면 힘이 든다. 아침에도 자꾸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고 싶어진다.
일어나려면 결심을 해야 한다. 이 몸은 물질이니까 물질의 타성이 있어서 그렇다. 우리의 얼나가 이 더러운 몸을 뒤집어쓰고 있어
그런 혐의를 받는다. (1960)
● 사람은 사는 동안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있다.
신선(神仙)이 되어 영생불사(永生不死)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산 채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고 있다. 제나(自我)로 오래 살 욕심 때문에 이런 것을
믿는다. 예수가 말한 영원한 생명의 정의(定義)는 이렇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얼나)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영생한다는 것은 피 살 뼈로 이뤄진 몸이 아니고 말씀(얼나)이
사는 것이다. "나는(하느님의)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요한 12:50) 기독교만 말씀(얼나)이 아니다.
불교도 말씀(얼나)이다. 불교에서는 설법(說法)이라고 하는데
법(法,Dharma)이란 진리 (참)란 말이다. (1960)
●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없어져야 할 것이니까 없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회개로 시작되는 것이다. 회개란쉽게 말하면 몸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몸은 죽더라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걸 아는게 회개다. 거짓나인 몸을 참나(眞我)로 착각하는 것이
멸망이다. 이 몸은 가짜 생명의 탈을 쓴 것이다. 이 몸나를 버리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게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몸나로는 죽고 얼나로 솟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세상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몸은 멸망할 물질이지만 사는 동안은 건강해야 한다.
이 몸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만나 받들면 꽤 부지해 간다.
어쨋든 우(하느님)에서 쓰신다면 나처럼 이렇게 오래 간다.
이게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분간을 못한다.
어디까지가 우(하느님)에서 하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내가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비늘방울 같은 이 몸이지만 잘 다루면 70~80년가는데 70~80년 간다 해도 형편없는 것이다. (1960)
● 우리는 나에 대해서는 의심을 안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이 괴로울 때면 나를 의심하게 된다. 나까지 의심을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렇게 아프고 괴롭고 한 이 나라는 게 뭣인가라며 나를 의심하여 부정(否定)하게 된다. 나를 없애 버리고 싶어 자살도 한다.
괴롭다면서도 재미를 보려는 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석가가 출가하여 6년 동안 고행을 한 것은 나를 의심해서인 것이다. 석가는 나를 의심하다가 이 제나(自我)가 참나(眞我)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원절대한 참나(眞我)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점밖에 안 된다. 원대(遠大)하기가 영원절대한 참나(하느님)가 될 때까지 자라야 한다.
우리는 본래부터 여기 있던 게 아니고 어디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이 속에 있다. 고독하고 비천한 이곳으로 떨어져 낮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타락된 느낌이 있으니까 본래의 자리로 오르려고 한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거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彼岸)를 '계'라고 한다. '계'에서 떨어졌으니 '계'로 올라가자는 게 하느님 사상의 핵심이다. 떨어졌다는 것은 한 점이 된 것이다. 떨어진 나는 한 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계(절대)는 원대(遠大)한 태공(太空)으로 생각된다.
이 세상(상대계)에 떨어진 것은 다 태공(太空)의 찌꺼기다.
안락의자에 올라앉았으니 높은 데로 올라간 것 같으나 모두가 떨어진 찌꺼기다. (1960)
● 예수는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그가 알고자 하는
그 표적 (이적)에 대해서는 말 않고 얼나로 거듭나라고 말했다.
거듭난다로 옮겨진 날말 아노센은 우로부터(from above)라는 뜻이다. 거듭나다는 우(하느님)로부터 오는 얼로 거듭나라는 뜻이다. 어머니에게서 난 것은 어머니의 하문(下門)으로 났으므로 밑에서 난 것이다. 밑에서 난 것은 몸나이고 우로부터 나는 것은 얼나이다. 영원절대한 하느님은 얼이라 얼이 아니면 하느님과 관계할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성령(얼)을 바람에 비겼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 하는 일은 알 수
있듯이 얼나로 남도 알 수 없으나 그 하는 일로 짐작할 수 있다.
얼나로 거듭난 사람의 언행에는 삼독(三毒)을 볼 수 없다. (1960)
● 하느님께서 보낸 얼(성령)로 거듭나야 사람 노릇을 바로 한다. 얼나로 깨어나지 못하면 짐승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人子)이라고 한 것은 짐승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란 뜻일 것이다. 결코 예수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다. 맹자(孟子)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고 말했다. 짐승 같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인자(人子)는 얼나라 이 땅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다.
이 몸은 얼의 씨가 커 갈 보금자리이다. 얼나를 이 보금자리에서
키워 위로 솟나야 한다(1960)
● 예수만 들려야 할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얼로 솟나 들려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높이 들어 독사에 물린 이들이
쳐다보고 낫듯이 얼나인 인자(人子)도 들려야 한다.
물질의 제나에서 정신의 얼나로 솟난다는 뜻이다. 짐승으로 태어난 몸나가 얼나로 솟나 얼나라로 들리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인 것이다. 짐승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나게 해주었으니 이게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몇 십 년 동안 짐승살이 하는 것으로 그치라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정죄(定罪)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 심판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우(하느님)로부터 난 얼생명을 믿어야 한다. 몸나가 죽는다고 멸망이 아니다.
멸망할 것은 멸망하고 우(하느님)로부터 난 얼생명은 영원하다.
내 맘 속에 온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를 믿지 않으면 이미 멸망한 것이다. 죽을 몸나를 참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얼나로 거듭날 생각을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안하니 이미 죽은 거다. 몸나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거다. 몸나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가 만나 혼인하는 것은 얼나로
오르자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일이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한 멸망이요 정죄다.
비관· 낙관, 적극· 소극이 우리가 느끼는 감각으로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상대세계를 뚫고 지나가 밑에 밑의 절대에 이르면 생사유무(生死有無)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절대 앞에는 상대가 없어지고 절대 하나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뿐인 하나, 절대 하나(一)가 영원무한 한 생명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우리의 참나이다. 제나(自我)는 거짓나요 참나가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참나인 얼나를 깨닫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삶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삶의 실현은 소유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있는
얼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1960)
● 나라하면 마음이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말씀이 나온다.
이 생각 이 말씀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얼의 하느님이 계셔 내 마음에 거룩한 생각을 일으키고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그래 이 거룩한 생각 진리의 말씀을 하느님의
씨(얼), 니르바니님의 씨(法)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석가를 비롯하여 모두가 다 똑같다.
이것으로 가면 나도 하느님에게로 간다.
이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1960)
● 얼은 하느님의 생명이라 곧 하느님이시다. 얼이 우리의 임자인 참나다. 그러므로 얼님을 자꾸 다져 졸라 붙잡아야 한다.
제 얼만 빠지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얼나를 붙잡아야 한다. 얼나를 붙잡으려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어디까지 가든 얼나를 붙잡자는 게 우리의 일이다. 하느님의 뜻(얼)이라거나,
자연님의 뜻(얼)이라거나, 니르바나님의 뜻(얼)이라거나 이 뜻(얼) 하나를 잡아가야 한다. 이 얼뜻을 잡아가지는 데는 제나(自我)의 욕심을 비운 공심(空心)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 뜻을 붙잡는 양심(良心)이 되어야 한다. (1960)
● 짐승을 기를 때는 우리가 쓸 만큼 사랑하며 길러야지 그 이상
사랑하여 기를 필요가 없듯이 얼나를 위해 몸뚱이를 길러야지
이 몸뚱이를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뚱이는 짐승이고 몸삶은 짐승살이다.
하느님 아들인 얼(靈)이 어째서 이런 짐승 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온 하느님의 얼을 기르기 위한 한도 안에서
몸을 건강하게 해야지 몸을 삶의 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몸이란 짐승은 적당히 쓰기 위해서 적당이 길러야지 그리하여 잡을 때 아낌없이 잡아야 한다. 항상 몸나는 얼나를 위한 것 임을 그리고 얼나는 우(하느님)에서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오관(五官)사지(四肢)의 몸나밖에 모른다.
그리하여 몸이 미끈하게 잘 생긴 이를 부러워한다.
우리가 육근(六根)에 붙잡히면 이 짐승(몸)에 잡아먹혀 버린다.
이 짐승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좇아야 한다. (1960)
[주] 육근(六根) 눈. 귀 코. 입, 몸. 뜻. 불교용어
● 얼나라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모든 게 얼나가 원점이 되어서 나온다. 얼나를 생각하면 묵은 것도 새 것도 없다.
얼나가 중심(中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 노자(老子)의 수중(守中), 유교의 중용(中庸)은 일체(一切)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얼나는 예사롭게 저거니 하고 갈게 아니다. 이 얼나가 대실존(大實存)일 것이다. 이 얼나는 진실이니 할 정도가 아니다.
이 사람 생각은 늘 얼나를 떠나지 않고 얼나에서 모든 게 나온다. 이것을 모르면 내 말은 못 알아듣는다. (1960)
● 우리의 정신이 물질에 휘감겨서는 못쓴다. 언제든지 정신이
물질을 부려 써야 한다. 육근(六根)을지닌 몸은 부림치(심부름꾼)이지 참나가 아니다. 몸나에 붙잡히면 안 된다. 하느님 아들(얼나)이 종인 몸나의 심부름을 해서는 안 된다. 아들(얼나)이 종(몸나)에게 끌려다녀서는 안된다. 이게 뒤집히면 존심양성(存心養性)이
아닌 실성(失性)이요 진리 파지(眞理把持)가 아닌 실진(失眞)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얼나)을 떠난 멸망일 뿐이다.
몸이 잘 빠지고 이목구비가 잘 생겼다고 거기에 끌려다녀서는 멸망이요 죄악이다. 사람이란 몸나의 짐승 노릇을 그만 두고 몸나가
아닌 참나(얼나)에게로 가자는 거다. 참나인 얼나가 제대로 하자는 거다. (1960)
● 적어도 높이 생각하는 이는 높고 멀고 큰 님 (하느님)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머리보다 더 높고 멀고 큰 님을 생각해야 한다.
몸나에서 얼나로 솟아나가야만 참 삶을 살수 있다는 뜻이 우리
마음에 줄곧 있다.
이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다. 간다고 해야 알아듣기가 쉽다.
제가(참나가) 예서(여기서) 제계(저기로)로 가고 있다. (1960)
● 나는 우(하느님)에서 은혜가 쏟아지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이렇게 하는 이상의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 이 정도라도 할 수 있는 게 우에서 오는 게(얼)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걸 생각하면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 세상에 머리 둘 곳 없이 산 예수인데 우로부터 얼을 받고서 이 세상에 필요한 건 다 있다고 말했다. (1960)
● 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나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짐승과 다름없이 어버이로부터 태어나서 짐승들처럼 직접 간접으로 다른 생물들을 잡아먹으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우(하느님)로부터 얼나를 받고서 짐승이기를 거부하며 맘 속에 수욕(獸慾)의 무명(無明)을 몰아내어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하느님 아들인 얼나는 우로 솟나 하느님께 돌아가 하느님과 하나되려는게 참 삶의 길이다. (1960)
● 그 마음속을 드려다 보지 못하고 어떻게 님으로 안단 말인가? 혼인을 하여도 상대를 모른다. 그러니 이혼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참으로 남의 마음속을 안다면 그 얼나를 알 것이고 그 얼나의 성질이 멸망할 것인지 영생할 것인지도 알 것이다. 우리의 얼나는 우(하느님)로만 통하지 옆으로(사람과는)는 통하지 못한다. (1960)
● 이 몸나는 가짜 생명이라 우리는 참나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일이 얼생명인 참나를 찾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참나(얼나)가 들어간다.
예수가 이르기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 :5)고 했다.
가짜 생명인 몸나는 죽어야 한다.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짜 생명인 몸둥이를 연명시키는데 만 궁리하고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1960)
●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몸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생명에 들어가면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목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구저찌구 하는 그런 제나
(自我)는 멸망의 생명이라 쓸데없다. 석가의 참나(法我), 예수의 얼나(靈我)는 같은 하느님 아들인 영원한 생명이다. (1960)
● 우리는 이 껍질(몸)을 쓰기 전 또 벗어버린 뒤에 어찌될 줄은
모른다. 이것을 알면 나도 거만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인 얼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얼나)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얼나)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1960)
● 으뜸은 저기 맨 꼭대기 같지만 사실은 내 마음속의 얼나이다.
무한 우주인 원(圓)의 중심은 내 속(얼나)에 있다. (1960)
● 영원한 생명을 믿음에 몸은 상관없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름이 소용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좀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 개인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는 개인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이 소용없다. (1960)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박영호 엮음 두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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