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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적 시각을 벗어나 보면 세상은 노동하는 인간이 이끈다[글로벌인문학] 4 : 노동의 인문학, 일자리를 달라! 본문
계층적 시각을 벗어나 보면 세상은 노동하는 인간이 이끈다
[글로벌인문학] 4 : 노동의 인문학, 일자리를 달라!
2020-11-09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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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었다.”
어느 기업에 취직한 젊은 노동자의 말이다.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무서운 절규다. 2020년 7월 통계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15~29세)은 10.2%로 통계 집계 이후 가장 높았다. 잠재적 구직자까지 포함한 체감실업률을 그보다 높아 26.8%로 2015년 통계 작성 이래 최악이었다.
이런 사회현상이 이른바 ‘니트족’의 증가로 표출되고 있다고 한다. ‘니트(NEET)’는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약어로서 ‘니트족’은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직업 훈련을 받지도 구직 활동을 하지도 않는 무리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2020년 6월 고용 통계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20대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 줄어든 62.2%를 기록했다. 특히, 주요 구직 계층인 20대 후반의 경제활동참가율은 74.1%로 전년 대비 3.3% 감소했다. 구직활동 자체를 하지 않는 청년들이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일을 하는 청년 중에서도 제대로 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다. 2018년 12월 10일,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25살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사망했다. 그의 노동환경은 열악했고 안전수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처럼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여러 차례 뉴스로 전해졌지만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고 그 속도도 더디다.
노동의 권리, 일할 권리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요즈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놀고 즐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할 권리, 일할 권리를 외치고 있다. 어느 의류업체에서는 한때 아래와 같은 표어를 내걸고 대학생 일 할 권리 캠페인을 벌였다.
“당신은 일 할 권리가 있는 대한민국의 20대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이 이렇게 권리로까지 주장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노동’이라는 유럽어의 어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 의미가 ‘일하다’는 뜻 외에 ‘고통, 노력, 산고’ 등의 뜻도 갖고 있다. 노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포노스(ponos)’는 ‘고난의 신’을 의미하며, 아리스토텔레스도 도구로서의 노예가 행하는 ‘노고’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생존의 유지라는 필요의 결과로서 노동은 필연성에 사로잡힌 행위이며, 인간이 본래 이루어야 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정신활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여성의 출산의 고통과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평생 피할 수 없는 남성의 노고의 근원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노동은 인간이 죄에 빠진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다.
이렇게 노동이 노고와 고통이기 때문에 현대의 노동법에서는 그러한 고통의 대가, 보상 또는 보충으로 임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제 이론적으로도 노동은 인간에게 피해야 할 부담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관을 뒤엎으며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이다. 노동할 권리를 주장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모두 마르크스의 후예인 셈이다. 그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 노동의 인문학 >을 살펴보자.
▲ 카를 마르크스
‘이성적 인간’, 특권층을 위한 인간 정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된 주제이며 끊임없이 인간의 관심을 휘어잡고 있는 핵심물음이다. 전통적인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해 전형적인 대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인간에 대한 정의이다.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이라는 빼어난 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곧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해주고 있는 ‘이성적임’이라는 특징인 셈이다. 이 이성을 무엇으로 보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인간의 정의가 조금씩 그 형태를 달리하긴 하지만, 그 근본에서 인간에 대한 그림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인간의 그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마르크스의 인간관이며 자연관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차원으로 보면서, 인간존재의 고유한 면을 ‘정신’, ‘사유’에서 본 것에 대해 강력한 반기를 든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색다른 주장은 단순히 다양한 이론 중의 한 이론이라는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더욱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왜 인간을 ‘정신적인 존재’로 보았는가? 객관적인 학문적 탐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히 그 사회 지배계층의 시각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 어찌하겠는가? 고대의 노예제도 사회에서 생활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육체적인 노동은 노예들이 도맡아 했고, 소위 ‘자유인’은 정치적, 학문적, 종교적인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살았던 계급사회가 그들에게 주었던 계급적 특권이었다.
이러한 특권적 시각에서 그들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본 것이 아닌가. 결국,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이 모르는 중에 그들의 계급사회의 관점을 대변하면서 그 시각을 객관화시켜 마치 그것이 진리인 양 주장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식의 진리주장을 하고 있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회적인 제 관계의 반영 아니겠는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계급, 경제적 토대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론이 실천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재력이, 계급이, 사회적 제 관계가, 실천이 이론을 각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세상은 소위 ‘자유인’이라는 소수의 지배계층과 그들의 녹을 받으며 생활해나가고 있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지배계층의 삶의 논리를 대변해서 마치 정신이, 이론이, 관념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처럼 호도하여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견고히 하는데 급급했던 것이 아닌가.
자연을 개조하고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의 인간
▲ Pavel Filonov < Udarnitzi (Record Breaking Workers) at the Factory Krasnaya Zaria >
이러한 특권계층의 시각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의 세상을 볼 때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동하는 인간이 없다면 인간은 굶어죽고 말리라. 인간이 지배계층의 여유 있는 생활방식을 전형적인 인간의 삶의 양태로 보며 고상한 척 ‘이성적인 동물’이라 정의하면서도 그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동물적인 노동의 족쇄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결국 자신들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세상을 바꾸려면 그것은 분명 이론을 갖고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으며, 실천의 차원, 즉 물질적 토대 차원에서의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투쟁이라면, 노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다. 지금까지는 강제라고 느껴졌던 노동이, 새로운 인간에게는 자연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증가해가는 지배력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노동이 인간 공동체의 바탕이 되며 동시에 이 공동체가 인간을 그의 근원인 자연에다 얽매이게 하고, 거꾸로 자연을 인간에게 얽매어 준다. 목표는 자연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서로간의 투쟁의 역사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기회를 갖는(무정부적인 평균화가 아님), 그리고 생산품을 정의롭게 나눠주는(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계급없는 사회”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원래의 건전한 자기의 본질을 건전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으로 되돌아간다. 자연 및 사회를 함께 갖추고 있는 완전한 본질 속에는, “완성된 자연주의”와 동시에 “완성된 휴머니즘”이 있게 된다. 즉 실존과 본질, 자유와 필연성, 개인과 사회, 자연과 인간 등이 궁극적인 화해를 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에 대한 학문이 나아갈 길이 암시된 셈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인간에 대한 학문을 ‘영혼론’ 내지는 ‘심리학’이라 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인간을 사실 그대로의 구체적인 인간으로 보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성과 개별성을 제거해 버리고 추상적 보편적인 본질을 영혼 내지는 이성에서 찾으려 했다. 구체적인 인간의 심리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과 연관 지어 고찰하려면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심리학’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심리가 전개되고 있는 욕구의 현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욕구의 현장이 곧 노동의 현장이며 생산의 현장이며 산업의 현장이다. 그래서 “산업(=생산력)”이야말로 “감각적으로 눈앞에 놓여 있는 인간심리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력의 형태인 ‘산업’을 단순히 인간의 외적 물질적 토대를 확장시켜준 유용한 장비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근본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실천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온 인간 본질이 전개되어온 역사의 표현이다. 따라서 산업을 인간의 본질적인 활력이 외적으로 구현되어 나타난 형태로 보고, 자연적인 현실 역시 이러한 인간의 실천적인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가는 인간개입의 역사로 보는 것이 올바른 자연관이며 역사관이다.
마르크스가 본 대로 노동을 통한 자연에 대한 지배는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오히려 노동하는 인간에 의한 ‘지구의 종말’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발전은 일자리를 줄이며 ‘노동의 종말’을 예비하고 있다. 그것이 한편에서 청년실업이라는 결과로 표출되고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제 욕구가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노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욕망하는 인간 앞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 욕구에 휘둘리고 돈에 놀아나는 한 노동하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노동의 인문학. 일자리를 달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 『경향잡지』 2014년 4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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