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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의 불사름과 나눔 속의 살림[글로벌생명학] 12 : “다 살라서 다 살려라!” 본문
이태석 신부의 불사름과 나눔 속의 살림
[글로벌생명학] 12 : “다 살라서 다 살려라!”
2020-10-12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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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은 서로 자신만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과연 국민을 위한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政治)’의 우리말은 ‘다스림’이다. 다스림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생(生)을 다 살라 그들 고유의 특색으로 다시 새롭게 살려내도록 돕는 일이다. ‘다 살라서 다 살려냄’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다스림’이다.
우리말 ‘생명’에 담긴 깊은 의미는 한마디로 ‘살아서 살라서 살려라!’이다.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은 이상 어떻게든지 살아남아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불태워서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살리도록 노력하라는 하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다. 비록 정치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을 사르며 다스림을 실천한 이가 있으니 바로 이태석 신부(1962∼2010)다.
통곡의 땅에서 만난 예수님
1999년 신학생이던 이태석은 여름방학을 맞아 내전의 땅 수단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1983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수단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희생된 사람만 200만 명이 넘어선 상황이었다. 전쟁 지역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 그가 방문한 남부 수단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참혹한 지옥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전쟁 중이던 그곳은 지옥이 따로 없는 열악한 환경 그 자체였다. 이태석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뼈만 앙상히 남아 있는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과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아낙네들,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며칠을 충격 속에 멍하니 지내다 정신을 차린 이태석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운다.
그런데 외양으로 볼 때 그들의 삶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고 가장 버림받은 것이 분명한데 역설적이게도 이태석은 그 안에서 상처받은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느낀다. 특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삶을 살던 한센인들이 감사할 줄 알고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마주한 예수님은 그에게 슬픔의 늪에서 피어난 한 송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포근함으로 다가오셨다. 이태석은 예수님의 부족한 손과 발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며 살겠다는 강한 소명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품을 받은 후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고 결심한다.
이태석은 남부 수단의 주민들이 우리에게 오신 작은 예수님일 수도 있고, 마지막 심판 때 우리를 주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파견된 천사일 수도 있으며,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줄 천국 문의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수단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떤 기적들을 일으키셨을까? 어떻게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셨을까?” 그러나 곧 이것이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한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으셨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이곳에 함께 계시며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함께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 처절한 가난이 있는 곳, 세상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외받는 이곳,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생활성서, 2011, 17.)
그런데 교회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그분이 누우실 구유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이태석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일생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는다.
총 대신 악기를 들자!
이태석 신부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건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도 상처받고 부서져 있음을 보고 무언가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음악을 통해 아이들 마음에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처음엔 피리와 기타 그리고 오르간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도 마련하여 35명의 브라스 밴드부를 결성한다. 이 밴드부는 남부 수단의 유일한 악단으로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지역의 ‘문화적 현상’이 된다. 이태석 신부는 진흙에서 진주를 찾은 마음으로 초롱초롱한 아이들 눈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먼저 이곳에 오셔서 이곳 아이들에게 작은 씨앗들을 미리 뿌려 놓으셨군요. 당신이 뿌린 작은 씨앗들이 싹을 잘 틔울 수 있게 물과 거름을 잘 챙겨 주겠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가진 것 없는 단순한 그들의 삶 속에 신기하게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중한 무엇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삶의 맛’, 즉 ‘행복’이었다. 그는 가진 것은 적지만 그것을 서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 자그마한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무엇보다도 산상 설교에 나오는 텅 빈 ‘가난한 마음’이 이들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무소유와 가난한 마음 덕에 이들이 우리보다 행복을 더 쉽게 누리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삶에 첨가된 많은 양념과 조미료에서 나오는 거짓 ‘맛’이지 실제 삶 자체에서 나오는 맛, 즉 ‘행복의 맛’은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이태석 신부는 그곳이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경제적으로도 버림받은 곳이라고 말한다. 물론 주된 원인은 도로 사정이 나쁜 것과 기후나 토질이 나빠 농작물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진짜 주원인은 표면적인 문제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는 것만이 사람들의 목표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정당화되어 버린 무관심’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끔찍한 사태나 인권 탄압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자국의 이권이 없는 곳엔 등을 돌리고 마는 국제 사회의 무관심, ‘나 하나 또는 내 가족 하나도 돌보기 빠듯한데.’ 하는 개인적 무관심이 이들을 버림받은 채 내버려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선의의 경쟁을 하나의 덕으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관심’은 하나의 덕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무관심’은 엄연한 죄악”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예수님의 강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사랑의 교리이다.
이태석 신부는 헐벗고 굶주리며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돌보며 치료하는 것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할 일도 없고 학교도 없어서 하루 종일 나무 밑에 앉아 그냥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에게는 전혀 꿈이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의 모습은 무서움마저 들게 했다. 이태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구원의 빛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문한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그런 학교를 말이다.
모든 아름[영혼]들의 아름다움을 살리자!
이태석 신부의 고민은 지구촌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 문화다양성을 믿음 안에서 실현해나가는 방법이었다. 종교평화 없이는 세계평화가 불가능한 종교다원주의 시대 그리스도교의 복음화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이용해야 할 매개체는 과연 무엇일지 자문한다. 그것은 성경일 수도 있고 교리일 수도 있고 대중매체일 수도 있으며 성사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매개체, 복음화 속도에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하는 핵심 매개체는 바로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으면 그 인간 전체를 사로잡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교리서나 성경에 있는 내용을 주입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려 움직이게 하고 감동하게만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발 빠른 복음화가 또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태석 신부는 내 영혼에서 배어나오는 은은한 삶의 향기가 옆의 사람을 감동시키며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향기가 어떤 향기일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 영혼의 향기가 배어나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후각만 자극하는 향기가 아닌 사람들의 존재에 그리고 그들 삶의 원소적 배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자석 같은 향기가 풍겨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태석 신부의 영혼의 향기가 어디에서보다 한결 짙게 풍겨난 곳은 ‘쵸나’라는 나환자 마을에서였다. 발가락이 떨어져나가 뭉뚝해진 맨발로 힘겹게 걸어 다니는 나환자들을 보고 이태석 신부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나 고민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신발을 만들어주기로 마음먹는다. 나환자들의 발을 일일이 하나씩 재고 그려 본을 떠서 그들을 위한 맞춤신발을 제작했다. 그 신발을 신은 나환자들의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각각의 아름들의 아름-다움을 담은 예술품이 아니겠는가!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섬기며 나누는 사람들은 진정 이 시대의 모든 아픈 사람들을 끌어안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세상 속의 교회인 하느님의 나라일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이러한 포근하고 인간다운 정이 넘치는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 영원한 고향은 형제자매들의 사랑이 있고 하느님의 얼과 사랑이 넘치는 곳, 바로 ‘하늘나라’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천국을 그리워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일 것이고, 그때가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우주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거대한 자기장 아래서 가난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 서로 조화롭게 꿈틀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영혼을 통한 감동의 물결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더욱 빨리 이 땅에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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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다 살라서 다 살려라!” 이태석 신부의 불사름과 나눔 속의 살림>,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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