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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신들과 도래하는 신 사이의 시대[이기상-신의 숨결]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성스러움 ③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떠나버린 신들과 도래하는 신 사이의 시대[이기상-신의 숨결]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성스러움 ③

柏道 2021. 4. 19. 00:21

떠나버린 신들과 도래하는 신 사이의 시대
[이기상-신의 숨결]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성스러움 ③

2020-05-25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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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성스러움



농부가 그의 일터에서 그렇듯이 시인들은 날씨가 좋은 때에 자연의 가르침 안에 서게 된다. ‘자연’은 횔덜린의 시 <마치 축제일에…> 전체를 꿰뚫고 있다. 이 송가를 해설하는 곳에서 하이데거는 시인은 자연에 대답을 할 때 시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들이 “응답하는 이들”이라고 명명되고 있다.(EH 55) 여기서 시적인 명명은 “부름을 받은 것 자체가 자신의 본질에서부터 시인에게 말해야 할 것으로 독촉하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렇게 독촉을 받고 횔덜린은 자연을 ‘성스러움’이라고 명명한다.”(EH 58)



“이제 날이 밝는다! 나는 고대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성스러움이 나의 말이라는 것이다.“(EH 57)




▲ Max Ernst < Red Forest >


자연은 시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자연은 일깨워주면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드러낸다”(EH 58). 시인이 보았고 말하고 있는 성스러움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다른 것이 아닌 (방금 시인의 봄과 말함 속에서 밝아오는) 깨어남 속에 있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신은 시간들보다 오래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신들 위에 있다.” 자연의 고유한 본질을 성스러움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성스러움에 의해 말건네 받는 사람이다.



“횔덜린은 자연을 성스러움이라 명명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시간들보다 오래이고 신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결코 확고하게 서 있는 어떤 신에게서 빌려온 특징이 아니다. 성스러움은 그것이 신적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것은 그것이 자신의 방식에서 ‘성스럽기’ 때문에 신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횔덜린은 이 싯말에서는 ‘혼돈’도 ‘성스럽다’고 명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자연의 본질이다.”(EH 59)



여기서 우리는 ‘자연’, ‘성스러움’, ‘신들’ 사이의 독특한 연관에 대한 암시를 받고 있다. 첫째,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리는 성스러움을 신들에게 속한 속성으로서 신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서술적 특징으로 알고 있는데, 그 관계는 오히려 거꾸로라는 것이다. 신적인 것이 단적으로 신적인 것이기에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 자신의 나타남의 방식에서 성스럽기 때문에 신적이라는 것이다. 즉 성스러움이 신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의 성스러움이 시간들보다 오래이고 신들 위에 있다는 점이다. 신들 위에 있다는 점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들보다도 오래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을 자가 죽을 자를 만나고 이들이 각기 그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적인 것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이 열린 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현실적인 것 — 이것은 오직 열린 장에 의해 매개된 연관들 안에서만 현실적이기에 — 은 열린 장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그것만이, 즉 매개된 것의 간접성만이 적접적인 것이다. ‘혼돈’(다시 말해 여는 자신을 엶)뿐 아니라 ‘법칙’(다시 말해 매개)도 바로 이러한 포괄하는 열려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성스러움이다. 이 열린 장이, 하이데거에게는 전부터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젊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서 (어떤 것도 그것을 앞서 갈 수 없고 오직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있으며 동시에 언제나 새롭고 시원적으로 남아 있다.



자연이 성스러운 이유의 하나는 열린 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열린 장 안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관계할 뿐 아니라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만나며 신적인 것도 경험한다. 따라서 그것은 신들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모든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매개해주는 열린 장은 낡거나 늙지 않고 언제나 새롭고 젊게 남아 있다. 열린 장의 근원성과 시원성을 보장해주는 성스러움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 손상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그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느 것도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접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스스로의 본질을 드러낼 때



시인이 본질적으로 응답하고 있는 바, 바로 그것은 시원적인 근본낱말에서는 physis이며 이것은 “성스러움”이 다르게 사유된 차원이다.⑴ 하이데거는 “physis”라는 근본낱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피지스는 밖으로-나옴과 솟아-오름, 자신을-열음, 솟아오르면서 동시에 이 밖으로-나옴 속으로 되돌아가고 그래서 그 안에서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 각기 그때마다 현전하는 것에게 현전을 내어주고 있는 그것이다. 피지스를 근본낱말로 사유할 때 그것은 열린 장 안으로 솟아오름, 그 안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어떤 것이 나타나고, 자신의 윤곽 속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보임새’(에이도스, 이데아)에서 자신을 내보이며 그래서 각기 그때마다 이것 또는 저것으로 현전할 수 있는 그러한 밝혀보임의 밝힘을 의미한다. 피지스는 솟아오르면서 자신-안으로-되-돌아감이며 열린 장으로서의 그렇게 현성[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솟아오름 속에 체류하고 있는 그것의 현전을 말한다.”(EH 56)




▲ Rene Magritte < The natural graces >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연’을 그리스적으로 ‘피지스’로 사유하면서 그러한 피지스로서의 자연에서 유의해야 할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들’을, 즉 사계절을 통해 우리가 자연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자연의 다양한 나타남의 방식들을 열거하고 있다. 밖으로-나옴, 솟아오름, 싹틈, 자신을-열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단적인 ‘나타남’에만 눈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자신을 숨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하게 자연 ‘현상들을’ 나타나게끔 하고 그러한 밖으로-나옴 속에서 자신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신을 숨겨버리고 있는 차원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때의 자연은 현전하는 [그 자리에 나타나 있게 되는] 것들에게 그것들의 그 자리에 있음[현전]을 내어주고 자신의 있음[존재]은 빼내어 숨기는 그런 어떤 것이다.



자연에서 우리가 자연의 ‘자신을-열음’만을 본다면 절반의 진리는커녕 가장 중요한 진리의 본질적인 차원에 눈을 감아버리는 셈이다. 우리는 거기서 또한 동시에 자연의 ‘자신을-닫음’, ‘자신을-숨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한다면, 자연의 ‘본질적인 있음’(Wesung, wesen)은 ‘자신을-닫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자연의 ‘본질’(Wesen)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근접할 수 없는 자연의 본질이 우리에게 매개되는 또는 와-닿는(an-wesen)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현전하는 것(das Anwesende)으로 하여금 현전하도록 하고(anwesen-lassen) 자신은 그것의 현전함(das Anwesen)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와-있는 것(an-west)이다.



또 하나 자연이 성스러운 까닭은 “자연이 열린 장을 보장”한다는 점이다. 열린 장은, 그 안에서 인간 현존재가 존재하는 모든 것 — 그것이 사물이든 도구든 사람이든 신이든 — 을 만나며 경험하는 사방팔방으로 막힌 곳 없이 트인 마당이다. 열린 장은 이제 그 안에서 모든 생성·소멸·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전혀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끝없이 열린 장이다. 그래서 그것이 곧 ‘혼돈’(카오스)인 것이다. 존재의 법칙과 질서가 생기기 이전의 온갖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 그 자체, “열려 있음” 그 자체가 ‘혼돈’이다. 그 안에서 모든 존재의 사건, 성스러움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이 열린 장은 끝이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이며 무한히 뻗어가는 푸른 창공으로서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지는 빔과 빔의 무한한 사이[공간(空間)]이며 ‘텅빔’이며 ‘빈탕’이다. 이 텅빔 속에서 우주적 생성사건, 물리화학적 전개사건, 생물학적 진화사건, 인식론적 존재사건 등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열린 장으로서의 자연은 시간보다도 ‘오래’인 것이다. 시간마저도 이 열린 장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여기서의 피지스는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의미한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하는 개개의 것에게 체류의 온전함을 선사한다. 따라서 성스러움이란 온전함(das Heile)과 구원(das Heil)을 보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시원적인 것으로 성스러움은 자체 안에서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며’(unversehrt und ‘heil’) 동시에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것에게 “그것의 체재의 온전함”(das Heil seiner Verweilung)을 선사하는 것이다.(EH 63)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보장함 속에서 그것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어떤 개별자에게도 —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현실적인 것은 그것에 의해 자신의 매개의 연관 속으로 정립된다. 그렇지만 성스러움 자체에 대한 연관은 그러한 매개에서부터는 벗어나 있으며 그렇게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빼내고 있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빼-내면서 경악스러운 것(das Entsetzliche) 자체이다.”(EH 63) 그렇지만 이러한 경악성은 가벼운 둘레에 은닉된 채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매개의 보장 속에서 성스러움에 대한 ‘연관’은 여기서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예감하는 — 자연의 가르침에 의해 배우게 되는 — 앎으로서 (모든 연관성의 유래와 구체적 연관들의 유래에 대한 앎으로서) 주어져 있다. “자연이 깨어날 때 자연은 자신의 본질을 성스러움으로 드러낸다.”(EH 58)



자연이 깨어날 때 자연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성스러움임을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자연의 ‘본질’(Wesen)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본질의 ‘있음’의 방식은 자연사물의 있음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사물의 ‘있음’의 방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연본질의 ‘있음’은 차라리 ‘없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의 없음은 단적인 없음이 아니고 어떠한 방식에서는 ‘있음’임을 고려에 넣어 우리는 그러한 독특한 있음을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하기로 하자. 이러한 <없이-있음>은, 자연의 독특한 존재방식, 즉 ‘자신을-열음’과 동시에 ‘자신을-닫음’을 지칭하기 위해 택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없이-있음’은 앞에서 등장한 ‘결여’나 ‘부재’를 뜻하기 위해 취해진 개념인 <허전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연의 고유한 본질, 즉 이러한 ‘없이-있음’을 예감하여 알아챌 때 시인은 그것이 곧 성스러움임을 깨닫고 그렇게 명명하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성스러움을 예감하며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어느 때인가? 횔덜린이 말하고 있는 ‘운 좋은 날씨’란 어떤 때를 말하는가?





▶ 다음 편에서는 ‘신성과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참조 EH 58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