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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제 목 :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제 목 :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柏道 2021. 4. 5. 03:51

제 목 :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최고의 인성교육은 요한복음으로)

靈性 으뜸 요한복음

잃어버린 예수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지음

차례


머리말



서론

1) 예수와 바울로

2) 바울로와 그리스도교

3) 예수와 영성신앙

4) 예수와 영지주의

5) 영성신앙의 보고, 요한복음



1. 요한복음 1장

1) 참삶은 온통이요 참나인 하느님을 찾는 것

2) 하느님은 말씀(성령, 로고스)으로 계신다

3) 말씀(로고스)이 곧 참빛이었다

4) 독생자란 하느님의 외아들이란 뜻이 아니다

5) 세례요한이 예수의 스승인가?

6) 예수는 메시아도 랍비도 아니었다

7) 예수를 좇으려 모여든 아름다운 사람들



2. 요한복음 2장

1) 맹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게 기적인가?

2) 예수가 분연히 성전 확청에 나섰다

3)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짓겠다



3. 요한복음 3장

1)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았다

2) 사람의 아들〔人子〕은 얼나이다



4. 요한복음 4장

1) 사마리아인의 혼혈 차별의식을 허물었다



5. 요한복음 5장

1) 베자타(베데스다) 못에서 38년 기다린 환자

2) 얼나(프뉴마)를 깨달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6. 요한복음 6장

1) 5병 2어로 5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다?

2)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

3) 내 살 먹고 내 피 마셔라

4) 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사온데 어디로 가나?



7. 요한복음 7장

1)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는가?

2) 예수는 핏줄의 오라를 끊은 자유인이다

3) 예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4)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8. 요한복음 8장

1) 너의 죄를 묻던 이들은 다 어디 있는가?

2) 너희는 아래서 왔지만 나는 우에서 왔다

3) 나는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있었다



9. 요한복음 9장

1)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10. 요한복음 10장

1)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2)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11. 요한복음 11장

1) 부활한 생명인 얼나는 죽지 않는다

2)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하였다

3) 이대로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는다



12. 요한복음 12장

1)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 예수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다

3)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

4)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다



13. 요한복음 13장

1) 온 몸은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3)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4.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말라

2) 너희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3)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

5) 그이는 진리의 성령이시다

6)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7) 내가 떠나갔다가 다시 온다



15. 요한복음 15장

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16. 요한복음 16장

1)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거다

2)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3) 나 홀로 걸어가리라



17. 요한복음 17장

1) 영원한 생명은 보내신 이를 아는 것

2)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3)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나 나는 안다



18. 요한복음 18장

1) 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갔다

2)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19. 요한복음 19장

1) 임은 어찌 그렇게도 빨리 돌아갔나?

2) 어쭙잖은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호의



20. 요한복음 20장~21장

1) 예수의 주검이 다시 살아났다니?

2) 도마가 외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서론

길잡이 말

잃어버린 예수

(1) 예수와 바울로

바울로는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일등 공신인가 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세상에 바로 알리는 데 일등 반신(叛臣)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의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을 빌린 바울로의 교의(敎義)이지 예수의 정교(正敎)가 아니라는 데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이것을 바로잡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일부 신학자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바울로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8~10) 이 말로 인하여 2천년동안 그리스도교가 오도되어 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50살에 우울증으로 자살직전에 이르렀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정신적으로 부활을 하였다. 그런 톨스토이가 교의신학을 연구한 결론이 이러하였다. “교의(敎義)가 허위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교의신학에 관한 저서를 읽고나니 단지 불신자가 될 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의 구적(仇敵)이 될 뻔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 교의에 있어서 단순히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 교회가 자기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의 의식적인 허위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톨스토이『교의신학 비판』)류영모는 김교신의 말대로 누구보다 성경을 깊게 읽은 사람인데 이러한 말을 하였다. “성경에는 무엇인지 말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도 처음에는 거짓말을 듣고 속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몸을 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류영모『다석강의』)톨스토이와 류영모는 교회를 떠났지만 예수를 유일한 스승으로 받들었다. 톨스토이와 류영모는 기독교가 잃어버린 예수를 찾는데 앞장선 참된 크리스천들이라 하겠다.

오늘에 크리스천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바울로의 주장을 좇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고린도전서1:2)것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이들에게는 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루를 믿어도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알아보자는 생각이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최면에서 깨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함께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종교적인 정조(情調)에 젖어드는 것과 신앙적인 자각(自覺)에 이르는 것은 다르다. 예수가 가르쳐준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아야 한다.

자칭 사도 바울로는 누구인가? 바울로는 소아시아 동쪽에 자리한 항구도시 타르수스(다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나 로마시민권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인의 피를 지닌 디아스포라(流民)이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다. 바울로는 예수가 죽임을 당한 뒤에야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시 유명한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웠다(사도행전22:3)바울로는 성격적으로 과격한 근본주의자라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데 주동이 되었다. 바울로가 사도행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도 유대교 바리새인들이 스테바노를 죽이는데서부터인 것이다. 바울로가 주동인 유대교인들의 잔혹한 박해를 피하여 예수를 좇는 이들(유대내 그리스도교인은 나자레언이라 불리었다)이 사마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하였다. 특히 다마스쿠스(다메섹)과 안티오키아(안디옥)로 많이 갔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그들을 체포하고자 다마스쿠스까지 쫓아갔다.

바울로의 인생 대전환은 다마스쿠스 성밖에서 일어났다. 나자레언(크리스천)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까지 온 바울로가 다마스쿠스 성밖에서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력(視力)을 잃은 것이다. 아마 급성결막염에 걸렸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질병이 하느님의 노여움에서 받는 징벌로 알았다(요한9:2)유대교 근본주의자인 바울로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바울로가 이제까지 나자레언들을 박해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실명(失明)을 하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자기편이 아니라 예수편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예수에 대한 적의(敵意)를 버리고 선의(善意)로 바꾼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반동형성(反動形成)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야훼)을 믿는 것은 좋은데 아직 정신이 어려 야훼하느님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린이들이 사랑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유대교인들은 하느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예수는 아버지가 내속에 나는 아버지 속에 있다고 하였다. 물론 바울로는 하느님이 무서운 유치신관에 머물렀다. 예수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성숙된 신관을 가진 것이다. 바울로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하느님의 노여움이었다. 그런데 실명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노여움이 이단인 예수에게 있지 않고 그들을 박해한 바울로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하느님 아들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을까? 사람들을 원죄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바울로의 대속교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는 무력하여져 스스로 그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힘 있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강력한 힘을 지닌 이가 자신을 공포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다. 바울로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매여달리는 심리적 배경을 우리가 능히 헤아려 볼 수 있다. 바울로의 탄식을 들어보면 이 사실이 그대로 헤아려 진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 입니다.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서7:24~25) 최고의 깨달음(구경각)에 이른 이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누구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류영모는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스승으로 받드는 것은 다르다고 하였다.

바울로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이 필요치 아니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힘 있는 존재이면 그만인 것이다. 바울로의 편지 속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다. 바울로 자신의 대속의 도그마에 대한 케리그마 뿐이다. 바울로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온전히 무식하였다. 바울로는 예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일이 없고 예수의 말씀을 읽은 일도 없었다. 그 때는 신약복음서가 쓰여지지도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배우는 길 뿐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자신이 생각해낸 케리그마로 자신만만하여 예수의 제자들에게 나아가 배울 생각이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바울로를 사도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까지 박해하던 바울로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울로의 횡설수설하는 케리그마는 예수로부터 배운 가르침과는 아주 달랐다. 그러니 바울로를 사도(예수의 제자)로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외람되게 바울로는 스스로 사도라고 자칭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로마서.1:1) 이것은 상식을 벗어난 자신이요 용기인 것이다.

바울로는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인 진짜 사도들을 멸시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한 시골출신에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유식한 유대교 랍비(스승)였다. 바울로의 말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년 뒤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동안을 지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1:17~19)

예수의 제자들이 바울로를 좋게 생각하였다면 멀리서 온 바울로를 여러 사도들이 모여와서 반겼을 것이다. 그야말로 공자(孔子)의 말대로 벗이 있어 멀리서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일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로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자레언(유대내 크리스천)들은 바울로를 아주 나쁜 사람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교회와는 어느 면에서 대립관계 속에 있었다. 바울로는 자기 자신의 특별한 가르침을 펼쳤다. 그것은 자신의 복음이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메시아인 예수에 의한 구원 곧 예수의 대속이 기독교의 중심문제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제2의 개조(開祖)로 생각되었다. 남아있는 유대국내 그리스도교도의 자료에는 바울로가 대악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메시아적 그리스도교관은 유대내 그리스도교는 바울로의 개인적인 의지의 산물로 보았다. 유대내 그리스도교도는 10세기경까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아라비아에서 발견된 자료들이 증명하고 있다”(D후릇사르『유대인이 본 그리스도교』



(2)바울로와 그리스도교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신약전서만 보아도 오늘날 전승되어 온 그리스도교의 정체(正體)성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신약전서의 맨 앞에는 마태복음서를 비롯하여 예수의 언행(言行)을 적어놓은 4복음서가 실려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부터는 완전히 바울로 일색인 것이다. 예수의 수제자로 자타가 공인받은 이가 베드로이다. 베드로조차 사도행전 첫머리에 약간 비추어지다가 그 뒤부터는 온전히 바울로의 이야기뿐이다. 이름만 사도행전이지 사실은 사도바울로 행전인 것이다. “바울로는 사도행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태동하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신약전서에서 바울로에게 할당된 분량을 살펴보면 바울로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바울로는 신약전서 본문에서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확실히 바울로는 신약성서의 주목할만한 필자로서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는 신약성경에서 대개 4분의1을 차지한다. 바울로는 예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 월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제롬프리뵈르『예수 후 예수』)

이는 신약성경을 편집할 때 그리스도교의 주도권이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바울로의 제자들 쪽으로 온전히 넘어간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최근의 신약학 동향을 따라 필자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바울로의 그리스도교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대략 그와 동시대에 예수의 육성과 행동을 직접으로 계승한 바로 그 공동체를 가리켜 「예수운동」이라 부른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갈릴레이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존재하였던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원류(源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을 버린 바울로(헬레니즘적 기독교)와는 달리 예수 이후 마르코복음이 출현하기까지 예수의 전승을 간직하여 온 공동체들이다.”(조태연 『예수 운동』)

예수의 가르침을 전승하여 온 예수의 직제자들은 유대교의 사울(바울로)에게 박해를 받고 나중에는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온 바울로(사울)의 도전을 받아 지리멸렬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그 어떤 사람도 없애지 못한다. 예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엄격하게 말하면 바울로의 그리스도교만 남아있지 예수의 그리스도교는 없어진 것이다. 그래 예수의 기독교를 히브리 그리스도교라 하고 바울로의 기독교를 헬라 그리스도교라고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유대내 예수의 기독교를 나자레언 이라 불리었고 유대 밖의 바울로의 기독교도를 크리스천이라 불리어졌다(사도행전 11:26)오늘날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예수쪽 그리스도교인 나자레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편집하였다면 신약전서에 바울의 편지는 한글자도 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도 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다고 할 수 있는 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바울로는 분각령(分覺嶺)정상에까지 올라가서는 얼나쪽이 아닌 몸나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는 것 입니다.”(갈라디아서2:20)라고 하였지만 당당하게 “내 복음에 이른바와 같이”(로마서2:16개역성경)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바울로 자기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1:8~9)이 말은 곧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유대내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을 저주하는 이가 사랑이 제일이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신앙내용이 좀 다르다고 어떻게 저주를 한단 말인가? 바울로는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로에서 유대인들의 협량하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인류역사에 놀라운 공헌을 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협량하여 배타적인 것이 치명적인 결점이다. 그런데 예수만은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다. 개인으로나 인류로나 진리의식(신관)은 자라고 있다.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고 정체되기도 하지만 자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로가 자신이 완전고(完全稿)를 이룬 듯 오만을 부리고 저주까지 하였다는 것은 바울로의 의식수준이 유치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인 것이다. 바울로 자신의 생각도 변해왔는데 결국 바울로는 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저주한 것이 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이다. 내 생각이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 거기에 바울로는 자기의 생각을 예수가 직접 계시하였다는 과신을 부려 잘못을 더하고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준 것입니다”(갈라디아서1:11~12)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말씀이 천양지판으로 다를 수 있는가?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14:10)라고 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하게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바울로는 미혹(迷惑)에 빠져 있는 이다. 혹(惑)자가 맘에 자기 것만 옳다고 울타리를 치고는 창으로 무장하여 지킨다는 회의문자이다. 바울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떻든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로의 가르침은 땅과 하늘만큼 다르다. 바울로의 말(글)에는 유대교 냄새가 물신 풍기지만 예수의 말에서는 유대교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울로는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차라리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전해오는 4복음조차도 바울로를 좇는 사람(주교)들에 의해서 많이 변개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본문이 종종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변개되었다는 것이다. 필사자가 본문을 베끼다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본문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고 싶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즉 필사자가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음으로써 본문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런 일은 필사자가 활동하던 당시 교리적인 논쟁 때문에 종종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변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기독교의 초기 몇 세기 동안 벌어진 교리적인 논쟁을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의 거의 모든 이문(異文)들 직업필사자들이 폭 넓게 활동하기 이전단계인 바로 이 시기 즉 기독교 초기 몇 세기사이에 모두 발생하였다”(바트어만『성경왜곡의 역사』)이 때 예수 쪽의 사본문헌이 바울로 쪽에 의해 많은 개작(改作)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예수가 돌아가신 뒤 얼마동안은 바울로의 대속신앙은 미미하였고 예수의 영성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초대기독교시대에 영지주의(예수의 영성신앙)가 그리스도교(바울대속신앙)를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사상이었음을 알고 있다. 영지주의(그노시스)가 그리스도교(바울대속신앙)밖에 있던 도전적 현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영지주의적(영성신앙)요소들이 맹목적으로 이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본질적 신앙(예수의 영성신앙)을 위해 채용되어 있고 또 거기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목해야한다”.(김용옥『도마복음서 연구』)

예수의 영성신앙이 바울로의 대속신앙에 결정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은 AD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이후이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이후 정통기독교(바울로기독교)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영지주의 전통(예수의 영성신앙)은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초기 영지주의 기독교(예수의 영성신앙)에 대한 마지막 타격은 4세기 후반에 가해졌다. 관용적인 정통기독교인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사나운 박해의 파도가 아빌라의 프리스킬리언을 따르던 추종자들을 삼켜버린 것이다”(스티브 흴러 『이것이 영지주의다』)

예수가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지만 영지주의와 예수의 영성신앙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대속신앙의 바울로조차도 삼층천에 올라갔다왔다(고리도후서12:24)하여 뛰어난 영지주의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3)예수의 영성신앙

바울로는 몸나의 영생을 갈구하는 육체부활신앙이다. 또 예수가 제물이 됨으로 아담의 원죄가 대속되었다는 대속신앙이다. 끝으로 바울로는 교회지상주의자라 하리만큼 교회에 집착하는 교회신앙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성신앙은 제나(자아)로는 죽음으로써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의 영성신앙은 석가의 불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니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범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영성신앙이 쇠락하여지고 바울로의 대속신앙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얼나의 영생을 가르친 프뉴마(πνευμα)의 신앙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몸나의 영생을 주장하는 소마(σωμα)의 신앙이다. 바울로는 얼(靈)을 싫건 얘기하다가는 끝에 가서는 몸이 다시 산다(로마서8:5~11)고 결론을 내린다. 자기 말을 자기가 뒤집어 버린다. 한입으로 두말을 하여 다 거짓이 되었다.

바울로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였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몸이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죽은 이들은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할 것 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습니다.”(고리도전서 15:50~55)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 입니다.”(로마서8:8~11)바울로는 얼(靈)을 얘기하다가는 마지막에 몸나의 구원으로 돌아가 버린다. 몸나의 구원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몸이 다시 산다느니 몸이 변화한다느니 또 불멸의 옷을 입는다느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얼나가 아닌 몸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한마디로 미혹인 것이다. 어떤 이는 바울로의 몸 부활을 영체(靈體)로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영체가 무엇인가? 얼이면 얼이고 몸이면 몸이지 영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개령(個靈)도 없는데 개영체가 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얼생명은 하느님의 얼생명을 여러 사람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생명(성령)뿐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 자신이 얼생명(성령)이듯이 아들에게도 얼생명(성령)을 주었다”(요한5:26)고 하였다. 바울로의 소마(σωμα)는 몸이지 영체라고 하면 속이는 일이다. 예수는 분명히 말하였다. “(어버이의)몸에서 나온 것은 몸이며 (하느님의)얼에서 나온 얼이다”(요한3:6)라고 하였다.

예수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누구든지 위(하느님)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나라를 볼 수없다”(요한3:3) 제나(自我)는 어버이가 낳아준 죽는 몸나이다. 성령이신 하느님(위로)으로부터 얼나를 받아야 영원한 생명으로 솟나(부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부터가 하느님이 주시는 얼(성령)로 났다고 하였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우로부터 났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다.”(요한8:23)고 하였다. 예수의 몸은 어버이에게서 나서 이 세상에 속해서 나서는 죽지만 하느님(우로)으로부터 난 얼나(성령)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얼나는 깨닫는 것이지 몸나처럼 나서 죽는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와 묻고 대답한 3:8절에서 10절까지가 그 얘기다.

예수처럼 어버이가 낳아준 나서 죽는 몸나에서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솟난(부활)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내 말을 듣고(하느님께서)내게 보내신 얼나를 깨달은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은 죽음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요한5:24)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말하기를 “영원히 사는 것은 얼나이니 몸나는 부질없다”(요한6:63)고 말하였다. 바울로처럼 몸이 다시 사느니 몸이 변화를 입느니 그런 말이 아니다.

류영모는 예수와 일치되는 말을 하였다. “이 땅에서 몸 쓰고 영생하고 신선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멸망시키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 이것을 구하다니 인간이란 짐승이 어찌된 지 모르겠다. 이 몸은 가짜 생명의 탈을 쓴 것이다. 이 몸을 버리고 아버지께로 가는 게 영생이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몸으로는 죽는다는 뜻이다. 예수는 내 맘속에 온 얼나가 영원한 생명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맘속의 얼나에 좇아야 한다. 그 얼나가 예수의 참 생명이요 나의 참 생명이다. 몸으로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수 없다”(류영모『다석어록』)

둘째로 예수는 원죄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죄가 있다면 유전인자(DNA)로 유전되는 짐승의 본능인 탐. 진. 치(貪瞋痴) 수욕(獸慾)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얼나로 솟날 때 다스려지는 것이지(요한17:2) 제물을 바쳐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로의 대속이론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입에 올린 적도 없다.

셋째. 예수는 바울로처럼 교회를 세운 적이 없다. 자기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많은 교회를 세웠다. 장로니 집사를 둔 것도 바울로다. 바울로는 입만 열었다면 교회다. 고린도서에만 교회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온다. 바울로야말로 교회지상주의자라 하겠다. 이 땅에 교회가 필요하지만 섬김과 사랑의 교회라야지 누름과 미움의 교회는 백해무익할 뿐이다.



(4)예수와 영지주의

크리스천들은 영지주의(그노시스)라면 무조건 이단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있다. 영지주의에도 잘못된 생각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에도 옳은 생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는 분명히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영성신앙을 가진 이다. 예수는 영지주의자는 아니지만 영성신앙을 가졌다. 영성신앙은 인류의 성인들 가운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공통된 신앙이다. 영성은 하느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영통한 이는 영성을 가지게 되고 그 영성으로 짐승의 본능(獸性)을 극복하여 성자가 된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이 임하여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고 노자와 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지주의와 동양의 몇몇 위대한 종교 사이에 유사(類似)성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인정되어 왔다. 그노시스(gnosis)라는 단어는 지식(Knowledge) 특히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즈나나(jnana)와 같은 뜻을 지닌다. 영지주의와 힌두교를 하나로 묶게 하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사람의 영성에 깃들어있는 신성(神聖)한 존재에 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지닌 아트만(Atman)은 우주의 브라만(Braman)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는데 이는 우주적 신성이 모든 인간 속에 축소된 형태로 현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지(靈知)주의에서 프뉴마(얼나)는 하느님의 영성의 화염(flame)에서 방출된 불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는 프뉴마(얼나)를 깨닫게 됨으로써 그 얼나가 나온 영적인 근원(하느님)의 존재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스티븐 흴러『이것이 영지주의다』) 물론 예수가 말한 영원한 생명인 얼나(πνευμα)는 석가붓다가 말한 다르마(Dharma) 그리고 노자(老子)의 도(道 tao)와 이명동본(異名同本)이다. 이것을 아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프라즈나(prajna 반야)라고 하는데 바로 그노시스(靈에대한 지혜)인 것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영원한 생명인 영성의 나 프뉴마(얼나)를 깨닫는 최고의 깨달음(무상정등정각,구경각)을 이룬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영지주의 교단인 만다교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속한 만다교는 인도의 힌두교(또는 불교)도 들이 와선 전한 인도 종교일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영지주의가 영성신앙이면서 다신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물로 세례를 주는 종교의식을 행한다는 것이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힌두교의 종교의식이지 유대교에는 없었다. 또 만다교가 교조(敎祖)가 없다는 것이다.

불트만과 스티븐 흴러가 이러한 증언을 해주고 있어 더욱 확신을 준다. “후기에 나타난 영지주의인 만디아파의 문헌에는 세례자 요한도 그 범위에 그의 역사적인 자리를 가진다. 세례종파들에게 소급되는 한 전통의 단편들이 많이 보존되고 있다. 괄목할만한 것은 만디아파가 자신들을「나자레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실로 예수도 초대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여러 번 그렇게 불리어진다. 이 호칭은 예수의 갈리레아 고향마을의 이름인 나자렛에 소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승(경전)은 예수가 본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회상(기록)을 간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종파(宗派)에 속해 있었으며 예수의 종파는 세례자 요한의 종파와 한 종파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불트만『예수전』)

“만다교의 역사는 초기 신약성서 시대의 성지(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비밀을 가르치고 전한 세례자 요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만다교의 전통에서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만다교의 경전이나 전통이 요한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만다교에는 역사적 창시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최초의 경전언어로 만다어인 아람어의 형식을 따랐다. 아람어의 만다(manda)는 그리스어로 그노시스 로 번역되며 따라서 만다교인이란 문자적으로 영지주의자를 뜻한다. 사실 만다교인은 「숨겨진 지혜의 수호자 또는 소유자」를 뜻하는 나자레언(Nazarean)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일찍이 십자군 전쟁이래 역사의 다양한 지점에서 만다교인과 마주친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을 성 요한의 그리스도인 혹은 요한을 따르는 그리스도 교인이라 불렀다”(스티븐 흴러『이것이 영지주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 할 수 없으나 예수를 영지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지주의 자체가 통일적인 신앙사상을 이룬 것이 아니다. 또 예수는 스스로 얼나의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영지주의 신앙을 추종하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예수는 브라만교의 영향아래 있으면서 독자적인 깨달음을 이룬 석가붓다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붓다를 브라만이라고 할 수 없듯이 예수를 영지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석가붓다가 브라만교의 영향을 안받았다고 할 수 없듯이 예수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지주의인 만다교도 다양함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영지주의적 성격이 뚜렷한 세 가지 종교를 알고 있다. 그 종교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달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될 수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교적이다. 신기하게도 비기독교적 영지주의 종교인 만다교는 성서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단절된 적이 없이 살아남아 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영지주의적 신앙을 지녔으면서 셈족에 뿌리를 둔 작고 조용한 집단이 거의 2천년동안 오늘날의 이라크에 위치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오늘날까지도 살고 있다”(스티븐 흴러『이것이 영지주의다』)

영지주의 만다교 보다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영성신앙을 좇는 이들은 바울로를 추종하는 교회에 의해서 철저하게 짓밟히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지(靈知)라는 낱말조차 입에 올리기를 삼갔다. 자신의 저서에 영지주의에 호감을 드러낸 이는 러시아의 신비사상가 베르자에프가 있다. “예수는 세계종교의 절정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자체는 이 절정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아직 미완성이다. 역사에 나타난 그리스도교는 예수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이취의 신비사상을 언제나 몹시 사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 사상을 정신사상(精神史上)가장 큰 현상의 하나라고 보는 사람이다. 도이취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중에서 나는 야곱뵈메를 가장 사랑하였다. 그노시스(영지)의 신비설이라든가 예언자적 유형의 그것은 교회의 공적인 인가를 얻은 전통적인 것이라고 인정된 신비설보다도 언제나 한층 더 가깝게 생각되었다”(베르자에프『거대한 그물』)

베르자에프가 가장 존경하였다는 독일의 영성신앙인 야콥뵈메(1575~1624)는 도이취의 괴글리천지방의 구두수선공이었다. 이 지방의 루터교 성직자들로부터 무자비한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풍부한 영감을 지닌 이 시골학자는 여러 권의 신비주의 저서를 썼다. 그 책들은 유럽 전역에서 비교적 진실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읽혔다고 한다.



(5)영성신앙의 보고 요한복음

현재 세계적으로 바울로 신학의 정통성으로 가장 보수적인 이 나라에서도 예수의 영성신앙에 시선을 두고 있는 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극적인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케리그마적 복음만이 기독교신앙의 전부라고 믿는다. 일찍이 바울로는 케리그마적 복음을 전하면서 이와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였다(갈라디아서1:6~10)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가 그동안 바울로의 케리그마적 복음만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신학적 편견에 해당한다.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그리스도교의 기원 곧 예수신앙의 탐구를 통하여 현실화 될 수 있다.물론 예수신앙의 탐구와 그리스도교 기원의 규명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는 큰 충격과 당혹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예수신앙은 현대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교신앙의 전부로 치부해오던 그 케리그마적 복음과는 전혀 다른 복음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의 신앙이 바울로의 복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신앙의 탐구는 그만 두어야 할 것인가? 신약의 복음서들이 가장 귀한 자료를 사용한 바로 그 예수의 전승들과 그 배후의 예수 신앙들을 그리스도교인들이 정죄할 수 있을까?그리스도교의 기원은 그리스도인 예수자신에게 있는가? 혹은 예수를 자기의 독특한 신학적 성찰로써 해석하고 헬레니즘 세계에 토착화 시킨 신학자 바울로에게 있는가? 보다 더 예수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은 어느 길에 있는가?”(조태연『예수운동』)

바울로의 대속신앙이 아닌 예수의 영성신앙을 복원하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크리스천(나자레안)들의 사명이요 의무일 것이다. 예수의 영성신앙을 그대로 다 복원하지는 못하여도 그 핵심만은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 핵심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요한복음에 있음을 확언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사상적 패턴에 있어서도 도마복음서와 비슷하여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요한복음이 왜 영지주의란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요소를 그렇게 많이 포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요한복음들이 한때 교회로부터 이단적인 문서로 간주되기도 했었으나 교회편집자가 부족한 내용들 예를 들어보면 종말론과 성례전등을 복음서에 더 첨가한 후에야 정통교회안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것으로 주장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복음이 처음에는 영지주의자들에의해 유통되고 이용되다가 제 2세기 말경에 이르러서야 교회가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적 이단을 공격하는데 도움이 되는 문서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김용옥『도마복음서 연구』)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문서로 이단시 하다가 반대로 영지주의 문서를 공격하는 문서로 바뀐 것은 요한복음에 실려 있는 예수의 영성신앙이 영지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으면서도 영지주의와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수의 영성신앙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예수의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얻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를 발렌티누스파로 불리는 영지주의 그룹이 전용하였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4세기 말에야 비로소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네 권의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과 요한일서나 베드로전서 같은 다른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하였다.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마태오복음서만 사용했다.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룹에서는 마르코복음서만 받아 들였다. 마르치온과 그의 추종자들은 루가복음서만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태와는 다른 것이었다. 바렌티누스파로 불리는 영지주의 그룹은 요한복음서만 받아들였다”(바트어만『성경왜곡의 역사』)

그러니 예수의 제자들 또는 바울로에 의한 여러 공동체(또는 교회)들의 필요에 의해서 복음서가 쓰여지고 그 복음서를 만든 공동체에서 그 복음서만 읽은 것이다. 오늘날의 신약전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4세기 말에 와서야 갖추어진 것이다. 4복음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쓰여져 예수의 직제자들이 안 썼다는 것이 확실해 진 것이다. 예수의 제자의 제자 곧 손자뻘이 되는 또 그 아래의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거의 모든 복음서가 유대나라 밖에 사는 디아스포라(流民)의 손에서 이루어 졌음이 분명하다. 디아스포라가 아니면 외국어인 그리스어에 능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에는 이름을 숨긴 애제자가 등장한다. 실제 인물이라면 자랑스럽게 실명을 밝힐 터인데 굳이 이름을 숨긴 것은 가공의 애제자를 내세워서라도 요한복음과 예수와는 지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어 요한복음서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애제자는 단순히 예수사건을 후세에 전했을 뿐 아니라 자기교회의 실정에 걸맞게 예수사건의 의미를 밝히려고 애쓴 까닭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애제자는 요한 계 신학파의 창시자 또는 좌상이 되었다. 애제자의 예수전승과 그 해석을 물려받아서 한 추종자가 요한복음서 초판(1~20장)을 썼고 또 다른 추종자가 21장을 덧붙여 요한복음서 재판을 펴냈다. 이들 두 집필자들은 복음서를 펴내면서 마치 예수 애제자가 요한복음서 초판과 재판을 펴 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애제자는 예수사건을 전해준 전승자였다. 요한복음서 집필자는 아니었다. 요한복음서 초판과 재판을 펴낸 필자들도 집필당시 크게 존경받던 자기네 스승인 애제자를 필자로 내세웠다고 생각된다.

집필 장소로는 에페소를 꼽겠다. 그럼 언제쯤 썼을까? 요한복음서는 주님의 제자였던 애제자가 고령으로 사망한 뒤에 씌어졌다. 오늘날 신약학계에서는 요한복음서 집필연대를 AD100~110경으로 잡는다.“(정양모『요한복음 이야기』)

1. 요한복음 1장







1) 참삶은 온통이요 참나인 하느님을 찾는 것



예수는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알았고 사랑하기에 가장 으뜸가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데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보다 1,800년 전이나 되는 아브라함 때부터 유일신 야훼 하느님을 믿어온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유일신의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 14:8~10)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계시다(존재)는 데 대해서 한 말은 이것이 모두이다. 필립보가 이 말을 듣고서 그 하느님을 만나 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가붓다는 예수와는 달랐다. 하느님(니르바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거듭 되풀이 말을 하였다. 석가붓다의 연기론은 이 세상의 상대적 존재는 나고 죽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개체(낱동)들의 나고 죽는 너머에 나지 않고 죽지 않는 니르바나님(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니르바나님(하느님)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실상론이다. 석가의 설법한 팔만대장경의 핵심은 결국 연기론과 실상론인 것이다.

예수는 말씀으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은 존재를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에 대한 효도적인 신앙도 본받아야지만 석가의 사변적인 인식도 필요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 두 가지를 아울러 우리들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다.

콜럼버스(1451~1506)는 1492년 오랜 항해 끝에 아메리카 신대륙에 다다랐다. 그러나 콜럼버스 자신은 자신이 닿은 곳이 신대륙인 줄은 전혀 몰랐다. 콜럼버스 자신이 가고자 하였던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알았다. 사실은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은 지금의 멕시코만 카리브 해에 흩어져 있는 서인도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닻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은 인도에 갔다 온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곳의 섬 이름이 서인도제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콜럼버스의 착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콜럼버스만 착각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모태 속에서 양수의 바다를 열 달 동안 헤엄친 끝에 겨우 이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땅(세상)에 온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멀쩡한 착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류영모는 우리의 착각을 일깨워 주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절대)는 빔(허공)이다. 물질세계를 색계(色界)라 하는데 가장자리 없는 무변단일(單一)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검지같이 섞여 있다. 이 사람은 가장자리 없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 데 하느님의 마음이 있다면 하느님의 마음을 허공으로 느낀다. 빈탕한데의 허공은 석가와 장자(莊子)가 처음으로 분명하게 얘기하였다. 그런데 근기(根器)가 낮은 사람들이 빈탕한데(허공)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이단시(異端視)하여 배척하였다. 쓸데 있는 것만 찾는 사람들에게는 허공은 쓸데없다고 하겠지만 허공을 모르면 모두가 거짓이다. 빈탕한데 허공이 쓸데 있고 없고는 하느님 나라에까지 가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무한한 허공 속에 먼지 한 알에 지나지 않고 영원한 시간 속에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 나라는 존재의 실상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내가 전체요 참나인 하느님이 자꾸만 그립다는 것이다.



“낱동(개체)인 나는 전체인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은 완전이신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전체)을 완전(참나)을 알고 싶어 한다. 그 온통과 완전이 참나인 하느님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 삶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는 궁신(窮神)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알려는 것이 궁신이다. 하느님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바로 하느님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할 망정 이 다음에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궁극에는 나가 하느님이 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 간다는 말이다. 정신이란 곧 궁신하겠다는 것이다. 거짓나인 제나〔自我〕로 죽고 참나인 얼나로 솟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몸을 지닌 제나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하느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으므로 생멸(生滅)의 제나를 초극(超克)할 수 있다.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는 제나의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얼(성령)이 없는 곳 없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구의 지각 속에 용암(lava)이 있다는 것은 화산이 폭발함으로 알게 되듯이 내 맘이 빌 때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 솟아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 충만한 얼(성령)로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나밖에는 만족할 만 것이라고는 상대세계에서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 팔 겨를이 없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이 상대세계에는 맘 붙일 데가 없다는 것은 참 좋은 말이다.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에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이 말 한 마디만 잘 알면 해탈할 수 있고 구원받을 지경에 갈 수 있다.”(류영모, 『다석어록』)



예수의 마음에, 류영모의 마음에, 내 마음에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 샘솟아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로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맘속에 있다”(루가 17:20~21)고 한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이 내 맘 속에서 샘솟아 나오기 때문인 것이다.

신비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한 가지 종교적 체험을 겪었다. 나는 깊은 곳에 침잠하고 거기서 세계의 신비, 실존하는 것의 모든 것의 신비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세계의 현존성에 대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밑바닥 속으로 한층 심오한 비밀, 신비로운 의미를 내표하는데 틀림없으리라는 사실을 더욱 통절하게 몸에 배도록 느낀다. 이 최대의 신비는 하느님이다. 인류는 하느님이라는 말 이상으로 숭고한 말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부인은 다만 겉부분의 겉모양에서 가능한 것으로 깊은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영원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적 유형의 인간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아 영원(하느님)이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같은 얘기를 나는 일생동안 자신에게 말하여 왔다. 사람은 영원성 밖에 다른 것은 사랑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 이외의 다른 사랑으로써 영원성(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영원성(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베르자예프, 『거대한 그물』) 죽고 싶도록 아플 때, 죽고 싶도록 슬플 때, 죽고 싶도록 분할 때 하느님을 우러르자.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느라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유성(流星)



별들이 깜빡이는 밤하늘에

문득 나타나 쏜살같이 흐르는 별

온몸을 남김없이 불태워서

황금빛으로 한 일(一)자 그어 뵈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똥겨주고는 곧이 사라져 버린다

인생은 무상하나 뜻깊은 유성(流星)



별들이 속삭이는 밤하늘에

깜작 나타나 쏜살같이 떨어지는 별

온 몸을 남김없이 불태워서

황금빛으로 빗금( / ) 획 그어 뵈

살짝이 이 세상은 아니라 집착 말라고

똥겨주고는 금방 사라져버린다.

인생은 무상하나 뜻있는 비성(飛星)



별들이 이글거리는 밤하늘에

불쑥 나타나 쏜살같이 내닫는 별

온 몸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황금빛으로 감탄(!)부호 그어 뵈

분명히 존재는 감격스러운 것이라고

똑똑히 똥겨주고는 바삐 사라진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나 뜻지닌 운성(隕星)



(2007. 2. 21. 박영호)



2) 하느님은 말씀(성령)으로 계신다



“요한복음 1장 1~18절을 우리는 흔히 요한복음의 ‘서문’이라고 부른다. 이 단락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었다(1~3절).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더군다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세상과 교통하는 방식이며 하느님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요한복음서 서문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보도된다(14절).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람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였다(17절).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 말씀의 성육신(成肉身)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스스로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버트어만, 『성경 왜곡의 역사』)



우리에게 예수의 공생애 동안의 언행(言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의 본면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예수의 언행과는 관계없이 복음서 저자의 신관,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도관을 펼치고 있다. 거기에 요한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일체 쓰이지 않는 로고스(λόϒος, logos, 말씀)라는 낱말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요한복음서 본문을 쓴 저자라면 로고스라는 낱말 대신에 성령(πνευμα, 얼)을 썼을 것이라 믿어진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의 1절에서 18절까지를 버트어만의 주장처럼 요한복음의 ‘서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 밖으로 나가서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라고 하는데 그 디아스포라 가운데 필론이라는 이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로 이름이 나있다. 필론처럼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크리스천이 서문을 써서 요한복음 머리에 서문으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어 요한복음을 돋보이게 한 점도 있지만 오도한 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그리스도의 출발을 하느님의 말씀에 둔 것은 동정녀 탄생설보다는 차원이 높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독생자의 성육신의 설명이 불충분하여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공동번역)



사람은 시간 공간에 갇혀 있어 언제나 시간의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맨 처음(태초)이라 맨 마지막(종말)을 말하지만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셔 맨 처음이 맨 마지막 넘어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한 현재로 계신다. 하느님에게 태초라는 말을 붙이면 하느님께서도 시작과 종말이 있는 상대적 존재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서문 저자도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라는 말을 넣은 것 같다.

‘말씀이 계셨다’는 것에서 ‘말씀’은 ‘얼(성령)’로 바꾸어야 한다. 성령이 사람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일치(一致)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말씀으로만 나타내면 사랑이 빠지게 된다. 그러면 사랑이 징발되고 이치만 따지는 종교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과 사랑을 포괄하는 성령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에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새번역에는 곧 하느님이시니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알쏭달쏭한 말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란 낱말을 써서 이렇게 된 것이다. 성령으로 바꾸면 이런 어색한 문장이 안 된다. 하느님은 성령으로 계시니 성령이 하느님이시다라고 했어야 논리가 서게 된다.

프로스(προς, with)를 ‘으로’라고 옮겨야지 ‘함께’라고 옮기면 안 된다. 함께는 따로 따로 둘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인 것이다. 하느님 따로 있고 성령(말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얼(성령)로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성령이 둘이 아니다. 하느님이 유비쿼터스(ubiquitous)로 아니 계시는 곳이 없게 두루 계시는 것은 얼(성령)과 빔(허공)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절에 “그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다. 하느님은 성령으로 계시는 것이지 성령(말씀)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다.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빅뱅(Big Bang)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말하면 물질세계가 벌어지기 전에는 빔(허공)이요 얼(성령)이신 하느님만 계셨다. 빔(허공)안에 물질세계가 벌어졌다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빔이요 얼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얼(성령)의 일부가 절대성을 버리고 개체의 물질이 된 것이다.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변태한 것이다. 변태는 오래 못가기 때문에 다시 얼(성령)과 빔(허공)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을 유(有)에 붙잡힌 사람들은 멸망(사망)하는 것으로 끔찍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은 귀일(歸一)의 본화(本化)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세계가 하느님의 영역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무변허공의 하느님의 품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의 개체 기준으로 생각하니 개체들이 생기는 것이 좋고 개체들이 없어지는 것을 흉(凶)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얼과 빔으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 거룩한 것이다. 얼과 빔의 거룩을 잃어버리고 상대화하여 물질의 낱동(개체)이 되는 것은 변질이요 타락인 것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몸(물질)에 갇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낱동(개체)으로 나온 것은 참 못난 것이다. 물질에 갇혀 있는 것은 못난 것이다. 이 몸의 틀을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못난 것이다. 내 말의 마지막에는 빔(허공)과 얼(성령)을 말하는 것이다. 빔(성령)과 얼(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 어머니가 낳아준 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없이 계시는 얼나가 참나다.”(류영모, 『다석어록』)



그런데 이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몸뚱이 개체 생명을 낳아 놓고는 축하를 하고 개체생명이 죽어지면 애통해마지 않는다. 사실은 그 반대라야 한다. 우리는 본모습인 빔과 얼의 없이 계시는 데로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바로 살 줄 알고 말씀을 아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고 산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이렇게 사는 것을 부지지생(不知之生)이라고 한다. 살려 준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고 죽이겠다고 해서 흔들릴 것도 없다. 나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흔 살에 가깝다. 일흔이라는 말뜻은 인생을 잊는(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내게는 이 세상에서 좀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다.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더 살고 싶다고 소리소리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하고 말을 알려고 하고 말이 심판을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나로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낱동(개체)의 소멸은 온통(전체)으로 돌아감이다. 장자(莊子)는 이를 복통위일(復通爲一)이라고 하였다 복통위일처럼 영광스럽고 기쁜 일은 없다. 죽는 일이 무섭고 슬프다고 하는 류영모는 그 따위 육체중심의 생각은 내버리라고 하였다.



“해안선을 떠난다는 육리(陸離)라는 말은 영광이 찬란하다는 말이다. 인생의 종말은 찬란한 육리가 되어야 한다. 난삽한 인생의 마지막이 육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나에서 열나로 솟나야 한다.”(류영모, 『다석강의』)



이 글을 쓰는 이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이 글을 읽는 분의 가슴에도 기쁨이 넘치기를 바란다. 죽음을 극복하였는데 어찌 기쁘지 않는가. 하느님(얼나)의 자리에 서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3)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10)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말로 나타내기가 어렵고 글로 쓰기가 어려운 사람의 오관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형이상의 실체인 얼과 빔의 하느님 얘기를 하자니 비유를 들었다가 말을 뒤집었다가 하다가 보면 논리의 비약과 논리의 모순이 있어 언뜻 보기에 횡설수설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일장에 서문이 바로 그러한 문장이다. 논술시험에 이런 작문이 나왔다면 합격점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어리둥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 성경을 읽어도 보고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아도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다.

얼과 빔의 온통이신 하느님은 빛이시다. 저 하늘의 햇빛이 아니라 마음 밝게 하는 지혜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다. 그 빛의 절대성을 버린 얼이 상대성의 몬(물질)의 세계를 이루었다. 상대세계는 생멸(生滅)하는 낱동(개체)들이 모인 물질세계이다. 우리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바로 그러한 세계이다. 이 상대세계가 온통인 얼과 빔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었기 때문에 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이다. 그래서 상대세계에서 하느님을 찾아서는 하느님의 흔적만 보이지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몸의 제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제나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이들에게 얼이시고 빔이신 하느님의 얼생명이 죽음에 이른 제나의 의식(意識, 생각)을 점령해 왔다. 이것을 예수와 석가는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나는 부활이라 자각(自覺)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의 의식화(意識化)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맘은 내 맘인데 임자노릇 하는 이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인 것이다. 예수는 의식화된 얼나를 하느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의식화되지 아니한 선험적인 얼나는 그대로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 아들의 의식을 가지게 되니 자연 하느님은 하느님 아버지인 것이다. 이 관계를 예수는 절묘하게 나타내었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 14:10)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 빛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얼은 무변허공에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얼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람이 된 것도 분명히 가려야 한다. 만물이 모두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말씀 곧 성령이 절대성을 버리고 생멸의 상대적인 개체가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몸뿐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물체가 똑같이 그렇게 이루어진 낱동(개체)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고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새번역). 이른바 성육신(成肉身)은 예수만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요 번역이다. 말씀이 곧 성령이 예수의 맘속에 들어와 예수 맘을 점령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나가 있으되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에 온전히 점령된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니고데모에게 우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학설 가운데 하느님이 땅에 와서 예수가 되었다는 소리는 크게 잘못된 풀이다. 무변허공이시고 무소부재한 얼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한 개체인 예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온통이 개체인 낱동이 될 수 없다. 온통(전체)이 낱동이 되어 버리면 다른 수많은 낱동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전체인 하느님의 얼이 개체인 예수의 맘에 온 것이다. 그 얼(성령)은 우주 안팎에 충만한 데 예수 맘속에 다 들어가 버릴 수 없다. 예수의 마음에 온 것은 하느님의 얼의 한 긋이다. 하느님이 수천만 킬로와트(kw)의 발전소라면 예수의 맘속에 온 얼나는 100와트(w)의 전구와 같다. 그것이 이어져 예수의 가슴에 말씀의 빛이 밝아진 것이다.

말씀이 빛이라는 말은 곧 얼(성령)이신 하느님이 빛이란 말이다. 이 빛은 햇빛 달빛의 빛이 아니라 말씀의 빛이요 지혜의 빛인 것이다. 장자(莊子)가 보광(葆光)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적광(寂光)이라고 한다. 에크하르트, 조지 폭스도 맘속의 빛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느님의 빛 한 오리 곧 연 한 긋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다. 사람을 하느님이라고 하지 말자.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빛 한 오리를 가진다.”(M. K. 간디, 『날마다의 명상』)



예수가 나는 빛이라고 한 나는 하느님이 주신 얼나를 말한다. 얼나로 솟난 이는 어둠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는 빛으로만 비유한 것이 아니라 물로도 비유하였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요한 4:14). 소로우(H. D. Thoreau, 1817~1862)도 하느님 나라를 물에 비유하였다.



“지식욕은 가끔 사그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우주의 정신과 교류하고 하느님 나라의 신선한 물의 향기에 취하고 싶은 욕망, 대기를 뚫고 일어서서 높다란 미지의 세계까지 머리를 치켜들고 싶은 그런 욕망만은 사시사철 늘 그칠 날이 없다.”(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빛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톨스토이와 류영모는 각각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빛이 있다. 이 빛은 하느님의 얼(성령)이다. 이 빛에만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만 행복을 찾아야 한다.”(톨스토이, 『신앙론』)



“영원한 생명(하느님의 얼나)을 빛이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나타낼 수 없으니까, 설명이 안 되니까 좀 그럴듯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빛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알자는 것은 참빛의 근원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은 빛나 밝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비의 체험을 빛의 체험으로 말하기도 한다.



“나는 여름날 시골서의 어느 순간을 생생하게 회상할 수가 있다. 이미 저녁시간이었다. 무거운 상념에 시달리며 침울한 기분에서 나는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둘레는 더욱 어두워져갔다. 그러자 갑자기 내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타올랐다. 내가 이 순간을 나는 명백한 전향이라고 이름 붙일 생각은 없다.”(베르자예프, 『거대한 그물』)



“1821년 6월 에든버러에서 리스로 가는 도중에서 일이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덜된 인생아 네 앞에 놓여진 최악의 경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 지옥, 악마 무엇이든 올 테면 오너라. 부딪쳐 보자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돌연 내 마음에 한 줄기의 불꽃이 힘 있게 흘러갔다. 그 순간에 나는 영원히 공포를 잊어버리고 나는 알 수 없는 힘으로 한없이 강해졌다. 나는 거의 신에 가까운 얼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나의 비통한 기분은 일소되었다.”(카라일, 『회상록』)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아주 적다. 그 다른 것은 여느 사람은 버렸는데 참사람은 간직한다(人之所以異禽獸者幾希 庶民去之君子存之)”(『맹자』, 이루다 편). 여기에서 여느 사람들은 버리고 참사람(君子)만 지니고 있는 새나 짐승과 다른 점이 바로 빛으로 나타낸 얼나인 것이다. 석가의 다르마(Dharma, 法) 노자(老子)의 도(道) 공자의 덕(德) 예수의 얼(프뉴마) 이 이름만 다르지 다 하나인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하느님이 낳아주신다고 할 때는 천생(天生)이 되고 스스로 깨닫는다고 할 때는 자각(自覺)이라 한다. 천생과 자각이 둘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 쪽에서 보느냐 ‘나’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저렇게도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이 상대세계를 열어 아들을 낳으니 그것이 로고스(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지 않으면 확실히 아버지인 참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야 아들이 확실히 아버지를 인식합니다. 그와 같이 확실히 아버지를 인식하고 인정하여야 할 아들 로고스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뚜렷하게 합니다. 이것을 고쳐 말하면 우리가 상대 세계에 있느니만큼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니까 절대자를 모시고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류영모, 『다석강의』)



“땅의 아버지는 나를 껍데기만 내놓고 내가 나를 낳아갑니다. 내가 나를 낳습니다. 아들 된 내가 하느님 아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누가 발견합니까? 나없으면 하느님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바의 아들일 거고 속알 실은 수레임직이 우리입니다. 류영모가 온 것이 아닙니다. 남아 나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옛적부터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옳게 사는데 성과 이름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 사람의 긋(얼나)을 알아주면 더없는 유쾌함을 느낍니다.”(류영모, 『다석강의』)



영지신앙이 몸이 살아 있을 때 얼의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고 하듯이 장자(莊子)는 몸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도통위일(道通爲一)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하느님나라에는 몸이 죽은 다음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 있을 때 이미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내게 보내신 이(얼나)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의 생명(제나)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



베르자예프는 이중(二重)의 탄생을 말하였다.



“이중의 탄생이라는 비의(秘義)는 사람에게서의 하느님의 탄생과 하느님에게서의 사람의 탄생이다. 하느님은 사람 안에 있는 신성(神性, 얼나)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하느님 속에 있는 신성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의 창조적인 응답을 필요로 한다.”(베르자예프, 『거대한 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