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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柏道 2021. 3. 3. 04:48

다석 유영모


다석(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작성자관리자작성일2020-04-02 11:36조회823
<한국 문화 신학회 논문>

다석(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유영모, 함석헌, 김흥호의 ‘不二的’ 신학원리에 대한 일 고찰-

이 정배 교수 (감신대)

들어가는 글

한국 문화신학회가 기독교 학계에 독자적인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 된지도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조직신학의 한 주제로 머물던 ‘토착화’를 간(間)문화적 해석학을 토대로 활발히 논의하기 위해 문화신학이란 별도의 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 기독교 학회 30년사를 정리하는 논문에서 1994년 발기 모임으로부터 2000년까지의 문화 신학회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2000년 이후 한국 문화 신학회는 한국에서 태동된 한국적 신학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함석헌, 이용도, 김재준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집중 연구되었고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김흥호, 서남동, 김경재의 토착적 시각이 재조명되었으며 무엇보다 多夕 유영모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단군 신화, 유/불학 그리고 동학을 소재로 한 신학적 작업 역시 꾸준히 지속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多夕에 대한 연구 성과를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화신학회의 가장 큰 연구 성과로 생각한다. 인도의 간디하고도 바꿀 수 없다는 평을 듣는 多夕, 그의 자기 발견적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2000년 대 이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사실 함석헌 연구에 비하면 그의 스승이었던 多夕 사상의 르네상스는 때늦은 감이 많다. 그러나 多夕 사상의 조명을 통해 민중 신학의 선구자로만 알려진 함석헌 연구의 지평이 확대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多夕에 관심하던 문화신학자들이 함석헌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함석헌을 추종하던 신학자들이 多夕을 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하지만 多夕과 함석헌 양자 간의 사상적 연결고리에 대한 추측은 무성했으나 이들의 생각 속에 어떤 공동구조가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더욱이 多夕의 마지막 제자로서 스승의 책을 풀어놓은 김흥호에게 까지 이런 성찰이 행해졌어야 함에도 이들 간의 연속성 및 사상적 구조에 대한 논의가 의외로 부재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연구된 종래의 문화 신학적 전개가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한 사람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머물렀다면 多夕 사상은 학파로 이어져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 계승되었으며 또한 기독교 밖의 종교, 사상계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작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이들 속에 담겨진 기독교 이해의 독특성, 한국 종교 문화 및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등을 연구함 없이 문화신학의 미래를 논하기 어렵다고 확신한다. 최근 활발히 연구, 소개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결과물 역시 多夕 학파의 기독교이해를 돕는 매개물이 될 수 있다. 본고를 통해 필자는 이들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의 독특성과 공동 구조 등을 밝힘으로 한국 문화 신학의 향방을 가늠해 볼 것이다. 따라서 본 글은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화신학을 개괄하는 과거 지향적 성격보다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多夕 학파의 신학적 논리를 파헤침으로 한국 기독교계에 줄 수 있는 문화 신학의 미래지향적 성격에 주목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리와 절차로 본고를 진행시킬 생각이다. 첫 장에서는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김흥호의 사상적 특성 및 그들 간의 관계를 하나의 신학적 원리로 역어낼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 원리에 터하여 多夕 유영모의 예수 이해를 비롯한 기독교의 토착적 이해 방식을 서술하고 셋째 장에서는 스승의 소승적 기독교를 대승적 방식으로 확대시킨 함석헌의 自贖的 기독교의 정체성을 밝힐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서양 신/철학에 익숙한 김흥호의 ‘脫自的 實存’ 개념의 빛에서 多夕의 생각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가를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이들 간의 차이점은 물론 多夕 학파 속에 내재된 공동의 신학원리가 갖는 미래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1.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 불이(不二)적 신학 원리의 발견

먼저 多夕 학파란 말에 생소한 사람이 있을 듯싶어 필자의 생각을 개진한다. 필자는 니시다 기타로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교토학파를 염두에 두고 그와 견줄만한 사상 체계로서 한국의 多夕 학파를 떠올렸다. 주지하듯 이들은 서세동점의 시기 한일 양국에서 시차를 두고 생성된 주체적이며 체계적인 사상운동이었다.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사상과의 대화를 통해 자국의 정신세계를 지평확장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서구에 전하려 했던 교토학파와 달리 多夕 학파의 경우 유불선을 토대로 기독교를 토착화하는 일 그것 자체가 관건이었다. 비록 니시다의 제자들 중에 공(空) 개념의 빛에서 기독교를 재구성하거나 부정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선불교라는 자신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多夕 학파의 사상가들은 동양 종교의 자양분을 섭취하였으되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승화시킨 토착화된 신앙인들이었다. 이점에서 두 학파들 간의 입장 차이는 너무도 분명했다. 동양적 주체성을 함께 강조했으되 그것을 활용한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교토학파의 경우 몇 대에 걸친 사상적 계보가 형성되었으나 한국 상황에서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는 보수화된 한국 주류 교회로부터 외면당했을 뿐 아니라 그들 상호간의 관계성을 찾아 학파로 발전시키려는 사상적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多夕 유영모와 함석헌의 관계가 후일 단절되었고 김흥호의 多夕이해 역시 함석헌을 건너뛴 한계를 노정했기에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多夕 사상의 대중화 작업에 몰두해온 박영호, 多夕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풀어낸 철학자 이기상, 多夕 학회를 만들고 <다석 강의>를 펴낸 정양모 신부 등을 중심으로 학파로서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에 신학자들도 교파에 상관없이 함께 참여하며 명실 공히 多夕 학파의 맥을 잇고자 힘을 보태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多夕 유영모와 함석헌 연구 그리고 多夕의 직계 제자로 알려진 김흥호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시각이 부재하다. 비록 이들 간에 교토학파에서처럼 사상적 대물림이 없기는 했으나 多夕 없이는 함석헌, 김흥호가 존재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함께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서 필자는 부족한대로 이들 세 사상가를 관통해 흐르는 신학적 원리를 발견할 책임을 느낀다. 본 장에서는 세 사상가들의 사상적 배경을 간략히 살피고 기독교 이해에 있어 일관된 원리가 무엇인지를 정리할 것이다.

정통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주일이면 세 번씩이나 예배를 드렸던 多夕 선생(1890-1981)은 몇 가지 이유로 교회로부터 멀어졌다.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동생 영묵의 갑작스런 죽음과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본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 등이 시차를 두고 정통신앙으로부터의 일탈을 부추겼다. 어린 시절 小學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읽고 자랐던 선생의 손에 老莊의 서적과 불교경전이 들려지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선생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 셋을 꼽으라면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를 들 수 있겠다. 간디는 선생 평생의 삶의 원칙이 된 일식(一食)과 종교간 회통(會通)에 대한 감각을 일깨웠으며 톨스토이는 서구 기독교 교리를 비판할 수 있는 비정통주의의 시각을 열어주었고 우찌무라 간조와는 후일 선(線)을 그었으나 무교회주의 영향을 입었다. 이런 이유로 多夕 유영모를 간디주의자나 톨스토이주의자로 환원시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多夕의 비정통적 기독교 이해가 톨스토이나 간디 그리고 교회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우찌무라 간조 영향 때문이란 것이다. 일리(一理)있는 지적이긴 하나 이런 식의 환원은 多夕 사상의 독창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 비정통주의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양적, 한국적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후술하겠으나 그가 정통 기독교의 代贖신앙을 거부한 것은 동양적 정신세계, 수행적 삶의 체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비정통주의를 종교다원주의 틀로 논하는 시각도 있다.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를 상호 회통시켰던 多夕에게서 종교다원주의가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多夕은 예수만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으로 고백하였다. 예수가 걸머진 십자가 道를 주체적(동양적)으로 이해하여 자신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로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실체론적으로 고백되지 않았다. 天命之謂性의 논거 하에 예수의 性이나 인간의 性이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점에서 多夕의 예수는 자신 속의 절대(본성)를 깨닫고 그와 하나 된 삶을 산(십자가) 분으로 인간 모두에게 길을 가다 ‘길’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이런 식의 동양적 예수는 서구적 종교다원주의 틀 자체를 철저하게 해체시킨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처럼 자기 십자가, 곧 自贖의 길을 가라고 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삶과 생각이 다를 수 없다는 동양적 사고의 열매이다. 自贖을 통해 代贖의 진정한 의미를 밝힌 것이 多夕의 동양적(토착적)기독교 이해의 공헌이라 하겠다. 이후 함석헌과 김흥호의 기독교 이해 역시 본질에 있어 불이(不二)적 신학 원리를 철저히 추종하고 있음을 볼 것이다.

함석헌(1901-1989)은 누가 뭐래도 多夕 사상의 위대한 계승자이다. 1921년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한해 전 교사로 부름 받은 多夕과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多夕 역시도 자신이 오산 학교에 온 것은 함석헌이란 학생 하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 시기 함석헌은 성서에 대한 이해와 민족의 문제에 눈뜨게 된다. 함석헌의 사상은 흔히 1961년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1920년대 말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력 하에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참여하던 전기와 多夕 사상을 씨알 종교의 이름으로 대승적(독자적)으로 발전시킨 60년대 초 후기 시대 구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전후기로 대별하기 보다는 1961년 수정 증보판인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나오기 까지 多夕 사상의 단초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평전을 썼던 이치석의 다음 이해가 이것을 보여준다. 초기 多夕이 그랬듯이 함석헌도 代贖신앙의 빛에서 <성서조선>의 시각과 동일한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복음(진리)의 빛에서 일제하 현실로부터 해방을 기대한 것이다. 그럴수록 한국교회의 무저항성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거셌다. 1934년 함석헌은 “성서로 본 조선 역사”라는 글을 <성서조선>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예수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민족의 운명과 동일 시 했다는 점이다.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 예수가 대속신앙의 표상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자 민족의 현실과 같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자주적 인격과 대속 신앙 간의 갈등이 발원되었다. 1939년 이래로 함석헌은 개인적 차원의 代贖신앙을 기저로 하는 <성서조선>과 다소 거리를 두었다. 입장 차를 느꼈기에 폐간 시(時)까지 그 곳에 글을 싣지 않은 것이다. 이는 우찌무라 간조와의 사상적 결별을 뜻한다. 1924년 이래로 그의 代贖신앙의 세계에 젖어있던 함석헌은 1952년 “흰손” 이란 詩와 1953년 “대선언‘을 통해 새로운 신앙관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바라보는 십자가 신앙대신 스스로 걸머지는 십자가, 곧 自贖的 십자가를 말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自贖이란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하나 되는 체험인 바,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리였다. ”대선언“에서는 기독교만을 유일종교로 알았던 이전의 시각을 교정한다. 기독교 역시 상대계에 속한 하나의 종파에 불과했다. 하여 함석헌은 성서대신 인간과 우주를 아우르는 ’뜻‘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성서 종교대신 ’뜻‘의 종교를 말했고 <성서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으로 고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多夕 사상과의 깊은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우선 선생에게 ’뜻‘이란 天命之謂性의 성(性)과 다름 아니다. 우주와 인간의 본질인 ’性‘ 을 역사화시킨 개념이 바로 ’뜻‘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씨알 민중을 ’뜻‘의 담지자로 명명한 것도 같은 맥락 하에 있다. 또한 함석헌 역시 自贖을 통한 代贖의 길, 곧 自他不二의 구원관을 제시했다. 자속을 말했으나 예수의 의미를 무화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초대 교회의 해석과 별개로 본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생각과 같을 뿐이다. 스승 多夕의 생각이 함석헌을 통해 역사 속에서 대승적 기독교의 면모를 띠게 된 것은 주목해야 될 부분이다.

29세 되던 1948년 다석 선생을 만나 6년 수학 후 일생 그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제소리를 내고 있는 김흥호(1919-)는 필자가 가까이에서 모신 어른이다. 그만큼 필자는 선생으로부터 多夕에 대해 들었고 선생 자신을 통해 多夕을 보았다. 아쉬운 것은 김흥호에게서 함석헌의 고뇌와 체취를 느낄 수 없다고 하는 점이다. 비록 나이차를 갖고 多夕 문하에서 동문수학까지 하였으나 상호간의 사상적 교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김흥호의 문제의식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얻고자 함이었다. 바로 이것이 두 제자들 간의 차이였다. 주지하듯 김흥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을 외친 연고로 옥중에 있던 부모를 대신하여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깊이 좌절했다. 일평생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김흥호는 믿음을 얻기까지의 자신 삶의 여정을 다음 3단계로 구분했다. 부흥 목사를 좆아 다니며 감성적 복음이해에 심취했던 수년의 기간,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 총본의 지도 하에 성경 공부를 하던 일본 유학시절, 마지막으로 한국에 돌아와 多夕 유영모를 사사하며 그의 삶을 실천에 옮긴 시기가 그것이다. 부흥목사들을 통해 정(情)을 배웠고 무교회주의자로부터 지(知)를 얻었으며 多夕으로부터 의(意)를 배웠던 바,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내가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믿는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하였다. 불을 끄고 빛이 된 것이요 길을 가다 길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은 불경을 읽고 유교 경전을 읽어도 그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다. 제소리를 얻은 것이다. 김흥호는 이를 脫自的 實存(脫存)이라 하였다. 존재가 시간 속에 현존하는 상태가 바로 脫存 이며 죽음인 바, 예수의 복음을 제소리로 터트린 것이다. 그는 성서를 예수사건으로 읽지 않고 자신의 사건으로 읽어갔다. 제소리는 김흥호에게 성육신이고 지금 여기서 현존하는 구원이었다. 김흥호는 앞 선 두 사상가와 달리 서양교육을 충분히 받은 목사였다. 이화여대 교목으로 일평생 자신의 직업을 삼았기에 그의 언어는 교회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스승 多夕을 종교다원주의로 읽는 독법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오히려 그를 토착화 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김흥호가 <원각경>을 쓴 종밀과 <전습록>의 저자 왕양명을 높게 평가한 것도 이유가 있다. 종밀은 선과 화암 불교를 통섭하여 불교 속에 유교를 수용했고 양명은 불교를 받아들여 오히려 불교이상의 유교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흥호는 개인전도 보다 이웃 종교나 사상을 수용하여 자신을 큰 그릇, 대승적 종교로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선생이 일생을 불교연구에 바친 변선환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김흥호 역시 철저하게 不二적 구원론, 자속적 신앙관을 기저로 삼았다. 하지만 제소리를 내기 위해선 인과성이 지배하는 시간을 당연히 끊어야만 한다(時間際斷).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인바, 선생은 多夕을 좆아 一食을 평생 실천하고 있다. “A=非A”라는 서구적 언어의 한계를 수행을 통해 뛰어 넘었던 것이다. 결국 선생에게 탈자적 실존은 天命之謂性의 서양적 표현이며 씨알의 종교적 차원을 지시한다. 自贖과 代贖은 自他不二의 관계처럼 나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상으로 첫 장에서 필자는 多夕 학파의 사상 형성 과정을 살폈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동양적 신학원리를 원론적 차원에서 서술했다. 이들에게 일관된 不二的 구원론(신앙관)은 적용되는 맥락은 다르지만 한국 기독교 신학계에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주지하듯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영원한 常數로 생각하여 문자화된 고정된 형태로 의미를 전달하려한다. 여기서 대속신앙은 포기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이웃종교들에 대한 이해 역시 자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케리그마 역시 하나의 문화라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多夕 학파는 예수의 의미성은 물론 동양종교들의 중요성을 격하시키지 않는 대안적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서구 종교다원주의 신학과도 변별되는 전혀 새로운 길이다. 이어지는 장에서 不二的 신학원리를 매개로 전개되는 세 사상가들의 기독교 이해를 구체적으로 접해 보도록 하자.

2. ‘없이 계신 하느님’의 不二的 속성과 유영모의 얼 기독론

‘多夕’이란 말 풀이가 늦었다. ‘많은 저녁’이란 것이 호가 지닌 의미이다. 철학자 이기상은 多夕 속에서 서구 형이상학의 종말을 보았다. 그리하여 ‘태양(의식)을 끄라’는 말로 多夕 사상을 상징화시켰다. 이성의 틀 하에서 존재자만을 존재로 규정해온 서구 형이상학과 달리 無, 空 즉 ‘없음’이 존재 사유의 지평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多夕의 기독교 이해는 주저함 없이 동양적 신학으로 언명될 수 있다. 사유의 동양적 지평을 통해 기독교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多夕의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없이 있다’는 말은 서구논리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A=非A 의 모순을 내포한다. 하지만 유교, 불교를 막론하고 동양 논리는 이런 모순 자체를 품어 않았다. ‘太極而無極’, ‘眞空卽妙有’란 말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m)란 신비주의 논리와 상응한다고 할까? 여하튼 ‘없이 계신 하느님’ 은 不二的 신학의 첫 번째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非A 를 가능케 한 동양적(한국적)사유지평을 설명하는 일이다. 동양적 기독교 이해를 위해 多夕이 의존한 사유지평은 다음처럼 약술될 수 있다. 우선 동북아 샤마니즘의 지평에서 생겨난 삼재론이 거론된다. 샤마니즘은 본래 수렵문화에서 발생한 것으로 죽은 짐승의 혼(靈)을 기리는 희생제의를 발달시켰다. 따라서 天地人을 뜻하는 민족 고유의 삼재사상은 靈의 거처인 뵈지 않는 天의 세계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多夕은 天地人을 계, 예, 긋이란 순수 우리말로 풀었다. ‘계’란 없음의 세계 그러나 생명의 근거가 되는 세계를 뜻한다. “예‘란 육체, 땅, 죽음의 세계이다. 계와 연결된 다른 한 끝을 가리킨다. ’긋‘은 하늘이 땅에 부딪쳐 생겨난 존재로 땅(地)에 있는 하늘(天)이라 할 수 있다. 후일 多夕이 한글을 하늘의 계시(天文)로 보고 계소리(天), 가온소리(地) 그리고 제소리(人)를 말한 것도 이런 삼재론에 터한 이해의 산물이다. 불교의 ’眞空妙有‘와 유교의 ’無極而太極‘, ’天命之謂性‘ 역시 동일한 논리로서 ’없이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불교에 있어서 眞空妙有란 견성(見性)의 세계에 해당되는 말이다. 텅 비어 있지만 가득차 있는 진여(眞如) 세계를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이다. 하여 견성은 현상(상대)계를 넘어선 절대의 차원, 곧 空과 無의 실재를 일컫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인간은 탐진치의 욕망을 벗기 어렵다. 眞如인 참 나를 깨닫기 위해 이 땅에서 인간은 수행(고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부터 成佛의 세계, 곧 ’긋‘의 현실태를 얻게 된다. 일체 상대계, 인과의 세계를 초극한 자유의 세계(一體無碍人)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多夕은 見性, 苦行 그리고 成佛을 天地人의 맥락에서 이해했고 ’없이 있는 세계‘가 불교에 있어서도 핵심인 것을 보여주었다. 유교 역시도 이런 차원에서 해석된다. 多夕은 유교가 조상을 숭배하는 有의 차원으로 몰락한 현실을 개탄한다. 유교 역시도 ’없이 있음‘(太極而無極)을 강조하는 계시 종교라는 것이다. 하여 中庸의 첫 내용,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을 들어 ’없이 있는‘ 절대와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한다. 먼저 天命之謂性을 하늘이면서도 인간 속의 참 본성, 곧 바탈로 풀어낸다. 率性之謂道는 종교적 수행으로서 몸성히, 마음놓이, 바탈태우, 곧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평안히 하며 자신속의 천명(本性)을 일깨우라는 명령이다. 절대계에 이르기 위해 타고난 본성을 기르자는 것이다. 修道之謂敎는 바탈, 즉 ’없이 있는‘ 존재와 하나 된 상태로서 부자불이(父子不二)의 현실태를 지칭한다. 여기서 多夕은 유교적 孝를 종교성으로 승화시킨다. 父子有親을 위한 ’孝‘야말로 자신속의 바탈을 키울 수 있는 종교적 태도란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多夕은 불교, 유교를 막론하고 저마다 자기 속의 절대를 깨닫고 자신을 갈고닦아 절대존재와 하나 되는 길을 제시했다고 믿었다. 그가 불교, 유교도 하늘로부터 계시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들 종교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있었기에 多夕은 기독교, 특히 예수를 동양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여기서 ’없이 계신 존재‘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本覺의 상태로서 頓悟(깨침)의 자리이며 기독교적으로는 믿음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현실태(始覺)가 되려면 지난한 漸修의 과정, 곧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 多夕의 기독교가 수행적 종교로 자리매김 되고 代贖에 대해 自贖性을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 하에서이다. 분명한 사실은 수행을 통해 도달된 세계는 그것이 成佛이든 父子有親이든간에 경험적 진리로서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不二的 원리 하에 재구성된 多夕의 기독교, 곧 하느님과 예수, 성령의 이해는 다음처럼 기존 서구 신학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우선 多夕에게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없다는 말은 대상적, 서구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말이다. 동학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不然이다. 주객도식의 구조로서는 神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영원 무한하며 절대의 존재로서 우주 생명이다. 그 없으면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있는 것이다. 多夕은 念在神在란 말로서 하느님 존재를 설명한다. 생각, 곧 인간에게 형이상학적 욕망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을 多夕은 인간 속에서 찾는다. 서구 신학이 말하는 하느님의 절대 타자성 대신에 인간의 속알(얼)로서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없이 계신 이’가 인간의 깊은 바탈(本然之性)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多夕은 종국에 이르러 하느님이 참 나임을 주장한다. 물론 하느님이 참 나(A=非A)가 되기 위해 지난한 수행이 필요하다. 양자 간의 일치는 논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질적인 것은 ‘없이 계신 이’가 내속에 있다는 동양적 에토스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에 대한 이해 역시도 서구신학의 길과 달라진다. 여기서 예수는 白死千難 끝에 하느님 씨알을 깨닫고 얼 나, 곧 하느님이 된 父子不二적 존재로 급진적으로 재구성된다. 반면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신성화된 예수 이미지를 벗겨내듯이 多夕 역시도 역사적 예수 자체를 우리와 같은 인간(몸나)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자신 속의 하느님을 깨치고 십자가를 통해 얼나로 솟구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없이 계신 이와 하나(父子有親)된 존재가 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시간을 끊고 얼(하느님)로 솟구친 존재,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고 多夕이 일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유일한 분이었다. 多夕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 자신 스스로도 믿음에 들어갔음을 고백한 오도송(悟道頌)을 지은 바 있다. 한편 多夕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자, 인간의 바탈(本性)이고 ‘참나’였다. 하여 인간 및 우주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하느님 영은 한 번도 끊어져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道를 통해 그리스도는 전체 생명이 되었고 우리 인간은 그 생명에 잇대어 사는 것이라고도 했다. 요컨대 하느님 영은 전체로서 우주 생명이고 내 속의 속알이며 상대계를 초월한 절대 정신이다. 모든 인간 속에 하느님 영(바탈)이 있으며 그를 토대로 누구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서구 다원주의 신학의 급진적 보편화(내재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없이 계신 하느님’ 속에 함축된 不二的 신학원리는 종래의 代贖사상에 대한 수정을 촉구한다. 代贖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自贖의 빛에서 시도하려는 것이다. 필자가 새롭게 이름붙인 ‘얼 기독론’이 이점을 잘 설명한다. 多夕에 의하면 동양전통에는 본래 대속사상이 없다. 기독교의 대속사상을 유대 민족의 풍습으로 해석된 예수이해의 일면이라고 보았다. 이점에서 多夕은 동양의 수행적 전통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自贖的 방식으로 재해석했고, 그것은 ‘一坐食 一言仁’이란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一座란 무릎 꿇고 앉아 말씀을 골라 묵상하는 일이며 一食은 하루 한 끼 먹는 일로서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一言은 남녀 간의 성적 관계를 끊는 일로서 선생이 부인과 解婚하여 남매처럼 지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一仁은 언제든 걷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간혹 多夕을 몸을 부정한 동양적 영지주의로 오해하는 바, 선생에게 몸은 얼로 나가는 출발점이었다. 얼나로 가는 길이 몸성히, 마음놓이, 바탈태우의 순서인 것을 명심할 일이다. 이렇듯 십자가에 대한 동양적 이해는 모든 인간 속에 참나, 곧 하느님이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속알(얼)을 싹티울 때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란 사람의 속알이 몸에 온전히 체화되는 상태와 다름 아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는 것이 多夕 얼 기독론의 본질이다. “...영원한 한아님의 뜻을 잇는게 우리의 일이다. 그게 독생자다.... 우리는 한아님의 아들을 맡아있다. 이 씨를 꼭 지켜서 키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럼에도 앞서 보았듯 예수는 多夕에게 특별한 존재, 곧 유일한 스승이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예수와 우리 간의 필연적 관계를 설명치 못하는 반면 多夕의 얼 기독론은 예수를 ‘한나신 아들’(獨生子)로 고백한다. 속알(얼), 곧 本覺의 입장에서 예수와 우리는 무차별적으로 동일하지만 始覺의 세계에서 실천적 삶이 동일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多夕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실천력을 보았고 그 길을 통해 힘을 얻었다. 이점에서 多夕에게 예수는 의심 할 나위 없이 구주(救主)였고 따라야 할 스승이었다. 예수가 걸머진 십자가의 道가 없었다면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도 없었을 것이다. 多夕은 예수가 그랬듯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길을 감으로 자신의 속사람을 변화시켜 얼나로 거듭난 존재였다. 그로써 그 역시 우리에게 십자가의 道, ‘一坐食, 一言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은 당연히 代贖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예수의 믿음을 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역시도 본래 예수 자신에게 있어 自贖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 自贖이 우리에게 여전히 自贖의 길을 요구함으로서 오히려 代贖이 되고 있다.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은 언제든 自/他力의 구별없이 不二의 형태로 일어난다. 얼나로 솟구치는 순간 내용적으로도 나의 구원이 우주적 구원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다음 장의 주제인 함석헌의 탈민족, 탈기독교적 역사이해 속에서 우리는 自贖과 代贖의 不二的 차원을 더욱 여실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함석헌의 “뜻”의 존재론과 씨알사상 속의 不二的 구원관

어느 글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함석헌을 늦게 접했다. 함석헌의 씨알개념을 활용한 민중신학이 만개할 때에도 그의 글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토착화 신학을 전개한 감신에서 함석헌을 가르치지 않았고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의외이다. 나이 50이 되어 만난 함석헌에게서 영혼의 울림을 얻는다. 무엇보다 그의 역사관에 대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을 본(觀) 믿음의 산물이다. 일제치하에서 생겨난 저항적 민족주의가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평화주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선생의 역사관은 왜곡된 민족주의를 치유하고 세계주의의 길을 제시한다. 함석헌에게 非我에 대한 我의 저항이 관건이 아니라 성서적 시각에서 고난의 의미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서 대승적으로 승화된 多夕 사상의 흔적을 발견했다. 혹자는 함석헌에 대한 多夕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다. 多夕과 다른 사상적 면모를 들이대며 함석헌 고유의 입장을 강조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함석헌은 多夕의 기독교 이해를 역사화 시킨 존재이다. 양자 간의 차이보다 사상적 연속성이 더욱 두드러져야 마땅하다. 多夕은 민족에게 생각을 주러 온 존재였고 함석헌 역시 생각하되 행동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간디와의 관계에 있어서 多夕이 그의 一食(진리파지)을 배웠다면 함석헌은 비폭력운동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성정의 다름에서 온 것으로 사상적 단절로 이해될 수 없다. 함석헌 자신도 스승의 一食을 따르기 위해 힘쓰지 않았던가? 비폭력 평화운동의 힘이 그로부터 나옴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시대는 행동하는 지성을 요구했고 민족 전체와 상대할 대중적 지도자가 필요했다. 많은 이들이 함석헌을 따르다가 교회에서 파문된 경우도 있었다. 그의 기독교 이해가 기성교회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학자들 중에는 선생의 초기 사상에만 관심하는 경우가 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집필하던 초기 시절, 그의 신학이 신중심적 복음주의, 저항적 민족주의 노선에 있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함석헌을 변호하려는 그 뜻을 모르지 않으나 선생 스스로가 사상의 전회를 선포한 마당에 이전의 함석헌을 변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선생의 관심이 ‘성서’에서 ‘뜻’으로 바뀐 현실에서 양자 간의 연속성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경우도 눈에 띤다. 필자 역시 여기에 일정부분 수긍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多夕 사상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는 함석헌을 다소 과도하나마 多夕학파의 핵심인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본 장을 통해 우리는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 “뜻”의 존재론으로 바뀌고 얼 기독론이 ‘씨알 민중’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필 것이다. 함석헌에 이르러 多夕의 얼 기독론이 한민족 역사 속에 응축된 ‘뜻’으로 이해되고 그로써 민족현실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씨알 종교가 생겨난 것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 속에서 필자는 여전히 多夕에게서 출원된 不二的 신학원리를 예의 주시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함석헌 사상의 백미는 ‘성서’가 ‘뜻’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환은 우찌무라(內村)를 경유하여 多夕을 만나 함석헌 자신의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진 결과이다. 필자는 이런 전환의 특징을 탈(脫)민족, 탈(脫)기독교란 말로 정리해보았다. 여기서 탈(脫)민족은 민족의 고난을 세계사를 정화시키는 구속사적 도구로 이해했음을, 탈(脫)기독교란 소위 정통주의적 대속신앙과 거리를 두었음을 뜻한다. 지난 세월동안 민족이 당한 고난이 외세 탓도, 우리의 못남으로 인함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한 밑거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탈(脫)민족주의 시각 속에서 우리는 이미 自贖과 代贖이 하나로 녹아있음을 본다. 多夕의 不二的 구원관이 역사의 지평에서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조선인의 집단자아를 성서가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와 중첩시켰고 고난에 대한 능동적 자기이해(自贖)를 세계사의 지평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지금껏 이런 섭리사관을 타력적 대속신앙의 토대로만 해석하였다. 이로써 기독교를 비주체적 종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점에서 탈(脫)민족과 탈(脫)기독교는 함석헌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탈(脫)기독교가 되어야 진정으로 민족주의를 脫하여 세계성이 담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민족의 고난 속에 담겨진 이런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관(觀)을 누가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함석헌은 ‘뜻’의 담지자를 ‘씨알’ 민중으로 보았다. 이 역시 多夕의 영향력과 무관치 않다. 씨알이 본래 <大學> 序의 ‘親民’에 대한 多夕의 해석으로부터 비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뜻’이 더 이상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이 ‘성서’로부터 ‘뜻’에로의 사상적 전회가 갖는 더 큰 의미였다. 결국 함석헌 사상은 모든 종교 속에 내재된 ‘뜻’의 존재와 그 ‘뜻’을 실현시키는 주체인 씨알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하 길게 소개된 인용문들 속에서 본 논제는 더욱 분명하게 각인된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 없지만 내게는 이제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가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민족과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 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 “피는 한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고 싶더냐?...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누가 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청장(淸帳)을 내 안다더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생명은 생명에서만, 피는 피에만. 네 피 없는 예수의 피 어디 있느냐? 네 십자가 아닌 예수 십자가 어디 있느냐? 지지 않고 십자가 맛, 네 무엇으로 아느냐? 맛 모르는 십자가 네 어이 믿느냐? 허공에 바라는 십자가의 예수 뜬 예수, 가슴에 등에 안고 진 십자가의 예수 너와 하나로 산 예수...”.

이제 함석헌에게 있어 ‘뜻’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다. 多夕의 ‘없이 있는 분‘ 그가 함석헌에게 있어 ’뜻‘의 존재로서 새로운 표현을 얻었음을 앞서 말했다. 이는 인간의 바탈(本然之性)이신 하느님이 ’무제약적 한 뜻‘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 ’뜻‘은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 기능한다. 진화를 신봉한 선생의 입장에서 ’뜻‘의 존재야 말로 역사의 발전을 믿을 수 있는 근거이자 토대였다. 한 개인에게 부여된 초월성(多夕)이 함석헌에게 역사에 대한 역사 초월적 차원으로 해석된 것이다. 함석헌의 하느님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범주로 인해 된 것은 多夕 학파 기독교이해의 진일보된 모습이다. 물론 이 ’뜻‘은 역사 속에서 아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생명의 창조적 지향성이며 사건화의 시발점이고 시공간 안에서 육화되어져야 할 초월적 가능성일 뿐이다. 이점에서 그의 하느님은 영원한 미완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실 속에서 ’뜻‘의 실현 내지 완성을 논하기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느님과 역사는 언제든 선생에게 동일한 차원에서 언급된다. 변하고 달라지는 진화의 역사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성장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나선 운동처럼 자란다는 믿음, 생명 진보에 대한 확신은 ’없이 계신 이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선생에게 확실한 진리였던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 동양적 사유와의 단절을 말한다. 시간의 불가역성은 오로지 기독교 서구의 산물이란 편벽된 인식 때문이다. 氣의 작용중 하나인 ‘역본설’(Dynamism)이 생명 진화의 과정에서 개방적 발전이란 의미를 담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보았듯이 이 ‘뜻’은 종교 다원적 토대를 갖고 있다. 多夕이 유불선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로 인식하듯이 함석헌 역시 ‘뜻’을 만인의 종교로 이해한 것이다. 만인의 종교로서 ‘뜻’을 상정하고 ‘스스로 함’(自贖)을 통해 ‘뜻’을 이루는 종교야 말로 세계주의와 과학주의에 상응한다고 믿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뜻’의 존재를 한국 민족의 역사 속에서 읽어 갔던 책이다. 한국 민족의 苦難史를 ‘뜻’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특별히 壬辰亂 시기 이순신의 죽음을 自贖的 代贖으로 이해했고 그를 통한 ‘뜻’의 펼쳐짐의 역사를 서술한 대목은 감동적이다. 함석헌은 역사를 일컬어 지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장차 올 것을 믿는 일이라 말했다. “始가 終을 낳는 것이 아니라 終이야 말로 처음부터 있어 始를 결정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역사 속에서 역사를 초월하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필자가 ‘없이 있는 이’에 대한 믿음의 역사화로 함석헌을 풀이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경우 終은 ‘뜻’이고 하느님 자신이며 신적 섭리로서 역사의 긍극적 토대가 된다. 항차 함석헌이 새로운 인간 種과 새 문명의 출현을 기대한 것도 ‘뜻’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뜻’을 이루는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함석헌 사상의 또 다른 주제인 ‘씨알’이 그 대답이다.

‘없이 계신 이’가 ‘뜻’의 존재론으로 전개되었듯이 多夕의 바탈은 함석헌에게 있어 ‘씨알‘ 민중으로 표현되었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초월적 본성이 함석헌에게 ’씨알‘이란 역사적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씨알‘은 계급적 관점에서의 민중과 무차별적으로 동일화 되지 않는다. ’씨알‘ 자체는 ’뜻‘의 담지자이긴 하나 그것을 구체화시킨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多夕 에게 天命之謂性으로서의 바탈과 父子有親이 언제든 孝라는 종교적 실천을 통해 매개되듯이 ’씨알‘ 그자체도 단순한 백성, 계급적 민중은 아니다. 오로지 고난의 능동적 수용을 통해 역사화 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 분노와 미움을 키우고 적대감을 일으키며 자신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존재는 역사 발전의 주체일 수 없고 ’뜻‘과는 무관하다. 함석헌에게 씨알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민중을 일컫는 바, 역사(생명)발전의 動因은 자기포기, 곧 사랑이었다. 자기 포기적 사랑을 통해서 생명이 창조되고 역사발전이 이뤄진다는 믿음이 ’뜻‘의 존재에 상응하는 삶의 양식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個別我를 초극하지 않고서는 성사되기 어렵다. 선생은 나와 남의 대립을 통전시키는 방법으로 ’一卽多, 多卽一‘ 정신세계를 제시한다. 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가 자신임을 알라는 것이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보는 것을 ’뜻‘을 지닌 씨알의 할 일,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본다. 동시에 함석헌은 전체 구원 없는 개인구원의 불가함을 역설한다. 생명의 본성은 전체로서 하나이며 다양한 색조 속에서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개체가 상실되지 않고 저마다 제소리를 내는 전체, 사랑의 깊이를 지닌 전체가 바로 생명의 본질이란 것이다. 따라서 씨알은 자신의 고난이 역사 및 생명 진화의 도구, 自他不二의 ’뜻‘을 이루는 방책임을 자각한다. 하지만 自然이 그렇듯이 ’씨알‘ 역시 억지로 그리하지 않는다. ’스스로 함‘의 정신성을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이 생각하는 백성이 될 것을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 경우 ’스스로 함‘은 두 차원을 지니는 바, 多夕의 ’念在神在‘를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念在神在‘ 가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 존재를 함께 말하듯 함석헌 역시도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의 동시성을 말한 것이다. 전자는 주체적 이성, 盡人事의 태도이고 후자는 영적 작용, 곧 ’뜻‘(天命)과 일치된 생각을 뜻한다. 캥김(대립)중에 이 두 생각은 하나가 되어 ’씨알‘을 하느님과의 共屬된 존재로 만들어 간다. 계시의 수동적 차원과 이를 적극적으로 사고할 능동적 차원이 함께 아우러진 것이다. 이런 신앙적 존재는 인과율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평화(비폭력)와 공생의 삶을 살게 된다. 어느 종교에 몸담고 있든지 역사 속에서 ’씨알‘은 ’뜻‘의 共創者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예수 이해 역시 스승 多夕의 경우처럼 특별났고 기독교에 대한 애정 역시 남달랐다. 불교나 가톨릭보다는 개신교 정신에서 종교의 미래를 생각했다. 이는 선생에게 예수가 ’씨알‘ 중의 ’씨알‘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기존 중보개념의 완전 탈각을 의미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처럼 예수의 중개자 역할을 인정치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은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 아들로 말한 것을 성서 메시지의 핵심으로 보았다. 단지 모든 인간 속에 하느님 될 만한 씨가 있기 때문에 예수 역시도 하느님 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동양적 인간이해의 바탕에서 예수를 보려는 多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잠자고 있는 아들의 씨를 싹티워 우리를 고난의 길로 내몰아 그로써 능동적 구원의 길을 걷도록 한 이가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씨알’ 민중에게 ‘뜻’의 존재를 각성시킨 분으로서 ‘씨알’ 중의 ‘씨알’이란 사실이다. 이로써 ‘씨알’들 모두가 예수로 살아 생명을 키우고 ‘뜻’을 자라게 하는 일을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안에도 예수와 같은 하느님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질 존재는 이제 우리들이 되었다. ‘뜻’의 담지자 예수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인격과 삶에 부닥치는-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되길 바라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自贖이 우리에게 代贖이 된 것처럼 우리의 自贖(십자가) 역시 민족과 세계를 위한 代贖이 될 수 있다. ‘뜻’의 실현에 있어 自贖이 유일한 代贖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를 미정고라 한 多夕처럼 함석헌 역시도 기독교의 궁극성(절대성)을 인정치 않는다. 진화의 시각에서 역사의 완성이란 쉽게 언급될 주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씨알’을 ‘뜻’의 共創者로 부르는 ‘씨알’ 예수의 自贖的 기독교이해는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참 종교의 실상을 알리는데 부족하지 않을 듯싶다. 절대적이지 않다고 해서 참된 종교가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김흥호의 不二적 구원론-탈자(脫自)적 실존과 제소리를 중심으로

多夕 학파의 마지막 주자로서 김흥호는 유일하게 목사이고 대학 교수였다. 동양 고전 모두를 풀이해 낼 만큼 동양을 알았고 서구 신학과 철학에 대해서도 깊은 공부를 하신 분이다. ‘脫自的 實存’ 이란 말이 동서양을 에두르는 선생의 화두가 된 것이 이를 웅변한다. 하지만 목사로서 多夕의 길을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법하다.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는 주류 기독교의 눈에 비정통적으로 폄하되곤 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서는 누구라도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머물며 多夕을 말하며 가르치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당한 어려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多夕 사상을 일생동안 몸으로 살았고 그것을 풀어냈다. 一食이야 말로 多夕에게 배운 진리로서 자신이 담당한 십자가의 道라고 여러 차례 강변한 바 있다. 어느 해 정초, 김흥호는 세배를 받으면서도 틈틈이 자신이 풀어놓은 <多夕日誌> 원고 뭉치를 들추며 교정을 보고 있었다. 80이 넘은 老齡의 몸으로 자신의 스승을 기리며 새해 첫날부터 원고를 읽고 수정하는 모습은 깊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다행히도 필자는 선생과 15년 이상을 옆방을 쓰면서 多夕 사상을 사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선생은 한사람의 청중을 위해 성의껏 강의하던 스승을 기억하며 자신도 필자 한 사람을 놓고 가르침을 베풀었던 것이다. 세인들은 김흥호를 일컬어 스승을 빼 닮은 존재로 여긴다. 그만큼 그는 선생의 말씀을 체화했다. 하지만 多夕 학파를 논함에 있어 필자에게 아쉬움이 있다. 多夕의 제자들로서 함석헌과 김흥호 간의 사상적 교감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김흥호의 기독교이해가 多夕으로부터 함석헌을 통해 전개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접지 못한다. 교토학파와 같은 확고한 학파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하지만 김흥호는 '씨알‘ 사상으로 발전된 함석헌의 탈(脫)기독교적인 입장과 거리를 두면서도 多夕 학파의 기본 입장을 독자적 방식으로 전개시켰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多夕 사상을 실존적으로 매개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토착화의 논지로 접근했던 것이다. 우선 多夕의 바탈이 선생에게는 實存으로 풀어졌고 不二的 구원이 ’제소리‘란 말로 언표 되었다. 脫自的 實存이란 자기가 없는 절대 무(絶對 無)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이는 ’없이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존재가 시간 속에 현존하는 순간이다. 그 상태 하에서 참나(眞我)는 선생에게 있어서도 예수와 다르지 않다. 나와 예수는 對自不二의 관계를 이룬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이 제소리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역시 自贖을 통해 실현되는 代贖의 경지에 대한 언명이다. 한편 김흥호에게 기독교는 실존적으로 絶對의 종교였다. 그가 불교, 유교 경전을 읽는 것도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을 알기 위함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웃종교를 排他하는 기독교는 絶對의 종교가 될 수 없다. 김흥호가 종밀의 佛敎와 양명의 心學을 좋아한 것은 그들 사상이 일체를 포용할만한 큰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생에게도 불교와 유교를 아우르는 동양적 기독교, 일명 토착화가 필요했다. 토착화란 불교, 유교인 보다 그들 종교를 더 잘 이해하는 기독교의 탄생을 일컫는다. 그것은 동양적으로 사유되고 실존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이다. 김흥호는 多夕의 사상이 토착화된 기독교의 진면목을 들어낸다고 보았다. 일평생 그가 多夕에게 매달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필자는 김흥호의 不二的 구원론의 핵심으로 脫自的 實存과 제소리를 들었다. 이는 多夕의 바탈이나 함석헌의 ‘씨알’과 의미론적으로 다르지 않다. 스승의 ‘얼나’를 ‘실존 이라는 서구적 개념을 사용하여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선생께서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를 좋아했으나 실존주의 철학 사조를 수용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해답을 동서양을 아우르는 ’실존‘이란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에게 동서양을 통해 길을 찾은 스승들은 모두 ’실존‘으로 불려진다. ’실존‘에 대한 선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실존이란 관념으로부터 해탈한 존재이다. 관념에 빠져 관념에 맴돌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관념을 깨치고 실재에 부딪친 사람을 일컫는다.” 선생은 이를 순수직관이라고도 불렀다. 순수 직관이 생겨날 때 비로소 ’나‘라는 거짓된 자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자기를 잊은 사람, 달리말해 ’된‘(익은) 사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은 언제든 경험이 먼저 있고서야 자신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은 하느님이 계시기에 가능하다는 念在神在의 의미와 맥락이 같다. ’실존‘은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산물이 아닌 것이다. 태양을 꺼야 더 광대한 우주가 들어나듯 근본자아는 일체의 문화적 자아, 관념적 자아가 사라질 때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이때의 근본자아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를 心으로 보는 데 이것은 천지가 있기 전부터 있었던 실재(心在天地前)이다. 바로 이 실재와 접한 존재가 ’실존‘인 것이다. 김흥호에게 선생은 ’실존‘이었다. 왜냐하면 선생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가 아니라 ’실존‘인 선생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김흥호의 삶은 바로 선생을 좆는 ’실존‘이었다. 가까이는 多夕이 스승이었고 왕양명이 선생이었으며 예수가 자신의 ’실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흥호에게 역사적 예수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가 자신의 ’실존‘이라는 케리그마가 핵심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동양적으로 이해했다. 多夕의 제자답게 자신의 기독교적 실존을 동양적 언어세계, 동양적 수행론의 차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탈(脫)맥락화라 말할 수 있겠다. 의식치 않았으나 선생은 케리그마 역시도 문화적 산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단지 김흥호는 脫自的 實存이란 자신의 입장을 갖고 상대와 회통하는 사고체제를 만들었을 뿐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만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상대의 언어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선생은 종밀의 원각(圓覺), 양명의 ’心卽理‘를 모두 ’실존‘으로 이해하였다. 圓覺이란 본래의 빛이 비치면 일체의 어둠과 더러움이 사라지는 상태이고 ’心卽理‘는 心之本體로서 내가 하늘이라는 자각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은 이들 경전 속에서도 이해 가능한 실재가 되었다. 이들은 관념(언어)이 아니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믿음(실재)의 세계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사고체계에 감금된 자신을 보고 자신 속의 ’참나‘(성령))를 깨닫는 것이 동양정신과 회통하는 그리스도 케리그마인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實存‘으로 감싸진(회통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의미를 각인시킨다. “생사를 초월했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죽은 후에 부활한다는 말도 아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도 죽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다‘ 는 절대적 부활이다. 죽어서 가는 부활은 상대적 부활이고 내가 부활이 될 때 이것이 절대적 부활이다.” 김흥호가 時間際斷을 통해 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實存‘의 時間性을 강조한 것은 이런 절대적 부활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서양은 물론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 그리고 앎과 실천이 不二的 관계로 소통되는 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동서양 종교 모두는 결국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얼, 바탈)가 산다”는 말의 자기 식 이해인 것이다.

김흥호는 절대적 부활, 곧 脫自的 實存의 모습을 ‘제소리’란 말로 설명한다. 이는 多夕으로부터 배운 어휘인바, 기독교 목사로서 선생 자신의 구원관을 일컫는 개념이다. 일체의 인과성을 끊는 時間際斷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자기 말, 곧 ‘제소리’가 되는 구원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四書五經을 자기 마음(心)의 주석으로 본 상산이나 양명처럼 선생 역시도 성서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 말씀이 제소리로 터져 나오지 않는 한 성서 그 자체는 남의 이야기이고 구원과는 무관한 책이며 결국 남의 인생을 사는 헛된 것임을 강변하였다. 양명의 말로 바꾸면 마음속의 良知(心卽理)를 갈고 닦아 心體(실재)에 부닥쳐(致良知) 비로소 지행 합일된 구원을 체험한 것이다. 선생이 주자학의 格物論 대신 양명의 논지를 따라 ‘정심’(正心)을 강조했고 一食, 一座의 수행을 통해 문자에 대해 ‘overstanding' 의 입장을 위한 것도 이런 이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기존의 교리를 해석한 인물이 아니라 듣는 모든 사람이 생소할 만큼 제소리를 낸 존재였다. 인간 속의 하늘인 良知(바탈)를 실현시킨 致良知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라 했고 자신은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그가 일하듯 자신도 일한다고 말 할 수 있었다. 致良知의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흥호에게 이것은 脫自的 實存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의 의미일 뿐 역사의 종국(궁극)이란 차원은 아니다. “ ...안으로 우주를 재편하려는 그의 시작을 그리스도 생애를 통해 우리가 본다... 이 역사가 2000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만 년까지 인류를 새롭게 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을 보고 있다. 이와 같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동시에 중요한 것은 내안에도 어떠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예수는 김흥호에게 心體이고 따라야 할 선생이었으며 ’실존‘ 그 자체였다. 선생은 이런 예수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일차적 과제임을 말한다. 日常의 우리는 이미 ’絶對 無‘가 된 예수(얼은)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속에서 무한을 보는 것, 즉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믿음이 요구된다. 목사로서 예수의 고유한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多夕처럼 선생의 예수 역시 대상적인 代贖의 실체는 아니다. 여기서 믿음은 내안의 양지(하늘)를 깨달아 아는 일이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깨침의 세계, 곧 ’實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自贖과 代贖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예수의 마음이 나의 心體가 되어 예수의 길을 걷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실천적 수행, 곧 자신 속의 良知(바탈)를 실현하는 致良知의 과정이다. 예수 역시도 십자가의 길을 통해 부활을 얻은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김흥호에게 ’一食‘과 ’一座‘ 두 마디로 요약 된다. 이 경우 一食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에 대한 일체의 수행(고행), 자신을 모든 것을 바치는 거룩한 행위이다. 믿음(깨달음)에 근거한 ’實存‘을 향한 노력인 것이다. 김흥호는 多夕 사상이 종종 영지주의로 오도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나치게 ’몸나‘와 ’얼나‘로 인간이해가 대별되는 것을 경계했다. 一座가 건강한 정신을 위한 수행(一座天地通)인 반면 一食은 언제든 밤낮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한 몸(一食晝夜通)을 위한 것이었다. 선생에게는 中道를 벗어난 금욕주의(정신주의)나 물질(향락)주의 모두가 문제였다. 一食과 一座는 건강한 인격인 ’실존‘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거룩한 산제사, 곧 십자가를 지는 일인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선생은 일생 몸 건강은 물론 多夕처럼 하느님이 자신을 믿는 경지를 체득했다. 자신의 바탈과 참으로 하나 된 경험을 한 것이다(A=非A). 최근 선생에게서 필자는 ’인생은 죽음으로부터‘ 란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一道出生死‘ 란 말의 자기 식의 언급이었다.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선생에게는 죽음이자 영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흥호는 사람들이 스스로 ’실존‘임을 깨닫는 진정한 민주사회의 실현을 고대했다. 바쳐진 사람이 되어 스스로 ’나라‘가 되라는 것이다. ‘나’는 ‘나라’가 되라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밥이 되어 먹히는 십자가의 실현이다. 김흥호는 多夕처럼, 함석헌과는 달리 ’선생‘으로서 사람들에게 ’실존‘을 자각시키는 일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았다. 수행적으로 해석된 기독교 이해를 통해 불교, 유교를 통전하는 포괄적인 신앙의 틀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종밀의 불교, 양명의 유교가 그랬듯 한국 전역을 토착화된 기독교인, 곧 ’실존‘의 사람들로 가득 채우고자 하였다. 多夕 보다도 함석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김흥호의 관심사는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에 있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多夕 학파 기독교이해의 문화 신학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상에서 우리는 多夕 학파 기독교 이해를 개략적으로 서술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통기독교의 代贖 사상을 不二的 구원론, 곧 수행론의 틀로 바꿔 이해했다. 물론 세 사상가들 간에는 저마다 차이점이 있다. 多夕이 스승기독론을 전제로 ‘없이 계신 이’(얼, 바탈)와 하나 된 길을 제시했다면 함석헌의 경우 ‘씨알 예수’는 집단적 특성을 담보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인류 전체의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多夕의 스승기독론에 비해 대승적 기독교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에 반해 김흥호는 예수를 ‘실존’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실존은 본질에 있어 선생(스승)의 다른 표현이다. 선생을 좆아 길을 가다 스스로 길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했다. 결국 바탈(얼)이 씨알이 되고 그것이 실존으로 언표 되긴 했으나 多夕 학파의 독특한 구원관을 고지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기독교 이해는 일관된 원리를 따른다. 필자는 그것을 不二的 구원론으로 명명했다. 정통 기독교의 代贖사상에 비해 이것은 수행의 차원을 강력히 주장한다. 믿음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세 사상가들은 인간의 본래성에 대한 깨달음을 믿음이라 하였다. A=非A의 논리(믿음)를 전제로 자신의 본래성(바탈)을 구체화시키는 방법, 믿음에 들어가는 길이 바로 수행이다. 이미 하느님 아들이기에 하느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수행을 자신이 걸머져야 할 십자가로 이해하였다. 물론 수행의 차원 역시 이들 모두에게 동일하지는 않았다. 함석헌이 민족의 고난 속에서 ‘뜻’을 찾는 것을 십자가로 이해했다면 多夕과 김흥호에게 있어 십자가, 곧 수행은 一坐食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누차 강조했듯이 自贖이란 개념이었다. 스스로 함(自贖)을 통해 민족과 개인에게 代贖이 열리고 이런 代贖은 또다시 自贖의 길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多夕 학파가 말하는 不二的 구원론의 핵심인 것이다.

필자는 본 글에서 多夕 학파가 전개한 기독교 이해의 근간만을 다루었다. 不二的 구원 원리를 추적해 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이들 생각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간략하게 제시했으나 이들 세 사상가들의 차이점 역시 충분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추론해낸 不二的 구원원리는 한국 문화 신학, 토착화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맹아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필자가 영향 받은 서구 신학 방법론의 빛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필자가 관심하는 서구 신학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기독교를 역사적 종교로 인정하자는 E. 트뢸치의 종교사학과 기독교 케리그마 역시 문화적 산물임을 주장하는 불트만 좌파의 ‘비케리그마화’ 작업 그리고 최근 신학을 사실적합한 시대적 상상물로 여기는 구성신학 흐름 등이다. 종교사학파의 시각에서 기독교의 교리적 절대성은 반학문적인 것으로 평가되었고 F. 부리의 ‘비케리그마화’ 작업을 통해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이해 역시 밀의 종교가 지배하던 희랍문화에 토착화된 기독교의 자기이해인 것이 밝혀졌고 하버드 대학 신학자 G. 카우프만 이후의 구성신학자들이 신론의 재구성과 함께 ‘비유 기독론’을 언급한 것은 신학의 역사화는 물론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한 유대적 예수 복원 운동 역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신학이 얼마나 달라져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가 정통적 기독교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는 소위 탈(脫) 맥락성에 대한 서구 신학 및 현장 교회의 비판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필자는 탈(脫)맥락성이야 말로 신학의 본질에 부합함을 말하고 싶다. 비록 이들 사상가들이 이웃 종교들을 계시 종교로 인정하고 ‘뜻’의 존재론 속에 이웃 종교를 포함시키며 <원각경>, <전습록>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읽고 있으나 이들에게 예수는 唯一 無二한 스승이었고 ‘뜻’(없이 있는 하느님)을 각인시킨 유일한 존재였으며 脫自的 實存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들은 교회를 위한 기독교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양적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해석함으로 민족과 세계를 위한 기독교 절대성의 의미를 새롭게 전달코자 하였다. 이점에서 필자는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한국 문화신학의 교두보이자 토착화 신학의 핵심적 범례로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한국(동양)기독교인의 자기이해의 시각에서 철저하게 재해석했고 그 와중에서 기독교가 놓친 수행의 차원을 복원시킨 多夕 학파의 토착화 신학은 신 구교를 합친 200년 한국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믿는다. 향후 한국 교회가 이들 기독교 사상가들의 진의를 파악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한국적(동양적)대답을 내놓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 문화 신학의 미래는 '오래된 새길‘의 의미로서 多夕 학파의 기독교 이해에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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