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2021.03.02(화) 오늘의 감사 (저녁夕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 본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저녁夕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④] 유영모 - 치열한 수행과 독창적 사유를 통해 발견한 '체험적 진리'의 신앙
기자명 안규식 승인 2020.10.21 18:24
비제도권에서 신학·인문학을 바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자 하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을 주제로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합니다. 이 시대 주목할 만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를 소개하는 에라스무스 연구원들의 글을 격주 간격으로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다석 유영모柳永模(1890~1981)가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주목받게 된 때는 2008년 8월이다. 당시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 근현대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함석헌과 함께 그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가 세계 철학자들에게 소개되었다. 무려 10명이 넘는 학자가 다석의 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무엇보다 다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1)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그리스도인, 신학생, 그리고 목회자에게 다석은 종교다원주의자2) 내지 기이한 수행적 삶을 산 도인 정도로 주로 알려져 있을 뿐 그리스도교 사상가로는 공정하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유교, 불교, 도가 사상, 대종교 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석의 사유와 표현으로 다석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필자는 다석의 광범위한 종교적 사유와 표현이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붙은 각주라 보고 있다.
사실 다석이 20년간 직접 기록한 일기인 <다석 일지>, 그가 YMCA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기록한 강의록인 <다석 강의>, 그리고 금욕적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에서 강의했던 기록인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의 자료를 읽어 보면 그렇다. 다석은 동양 종교 사상에 뿌리를 둔 우리말과 사유로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에 대해, 수행에 대해서 독창성 있게 사유하고 글을 쓰고 가르친 그리스도교 사상가다. 따라서 필자는 짧은 지면을 빌어 다석 유영모의 생애3)를 통해 그리스도교 사상가로서 그의 삶과 신앙, 사유와 영향력을 거칠게 그려 보고자 한다.
1970년대의 다석 유영모.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1970년대의 다석 유영모.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모세와 예수, 공자와 맹자의 사람
다석은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체구가 왜소했던 아버지 유명근을 닮아 다석 역시 몸이 작고 허약했다. 그 시대가 그랬듯, 많은 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는데, 다석의 형제들도 그랬다. 다석의 형제는 10명 정도 있었는데 2명만 남고 다 죽었으며, 다석 역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다석은 평생 몸과 죽음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았다.
특히 그의 글에서는 육체적 금욕에 대한 주장과 죽음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표현이 대다수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흔히 다석을 몸을 부정하는 동양적 영지주의자로 평가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다석에게 몸은 신앙적 수행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다석이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4)의 동양적 수행을 이야기할 때, 그 출발점은 바로 몸이다. "이 몸은 내 정신을 담는 그릇"5)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석은 평생 죽음을 앞두고 심지어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고 또 연습하며 살았다. 죽음은 그의 중요한 신학적 화두였다. 다석은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6)
다석은 15살 이전까지 그 당시 전통 사회 지식인들처럼 한학을 배웠다. 다석은 5살 때 이미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그리고 다석이 15살 정도 되었을 때, <맹자>에 깊이 심취했는데 그만큼 다석이 동양 경전에서 받은 영향이 깊고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맹자>는 다석이 가장 먼저 읽은 종교 경전이다. 이렇게 다석에게 자연스레 배인 동양 종교의 사유 체계는 다석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그의 삶과 사유를 풀어내는 중요한 틀이 된다. 훗날 다석은 그의 <다석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7)
그러다 1905년 다석의 일생에 중요한 계기가 생기는데,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울 때, 다석은 YMCA 초대 총무인 김정식 선생의 권유로 연동교회와 YMCA에 다니게 된다. 당시 다석에게 인격적 멘토라 부를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명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이고 다른 한 명이 삼성 김정식이다. 바로 김정식을 통해서 유영모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운다. 다석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일요일 오전에는 연동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승동교회에서 연합 예배를 보았어요. 그리고 밤에는 새문안교회에서 밤 예배를 보았어요."8)
하지만 다석이 교회와 YMCA에서 배운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아니었다. 다석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함께 서구에서 유입된 근현대의 새로운 지식과 시대정신을 함께 배웠다. 그리고 20세 때부터 오산학교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불경이나 <도덕경> 같은 여러 동양 경전은 물론 서양 고전과 서양 철학, 그리고 과학을 포함한 신학문을 섭렵한다. 그렇게 다석 안에서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을 바탕으로 동양 경전과 서양의 새로운 사상이 융합되어 무르익어 갔다. 훗날 현구동서現舊東西, 즉 "서양 문명과 문화의 골수를 동쪽의 문명과 문화"9)에 집어넣어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모두 한 정신으로 녹여 내는 다석 사상의 맹아가 싹튼다.
1910년 7월, 오산학교 1회 졸업 사진. 둘째 줄 왼쪽 두 번째가 유영모.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1910년 7월, 오산학교 1회 졸업 사진. 둘째 줄 왼쪽 두 번째가 유영모.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그리스도교의 울타리 넘어
오늘의 생명을 사유하다
정통 신앙의 울타리 안에 있던 다석은 23살 때 그 울타리를 넘어 서서히 정통 신앙에서 비정통 신앙으로 전향한다. 당연히 출석하고 있던 연동교회도, 가르치고 있던 오산학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다석이 비정통 신앙으로 전향한 이유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모교회인 연동교회의 내분과 분열, 톨스토이로부터 받은 영향, 그리고 다석이 21살이 되던 해 일어난 2살 터울 아우 유영묵의 죽음 등을 들 수 있다.10)
하지만 결정적 동기는 바로 톨스토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어떤 영향이 다석에게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을 버리게 했을까. 다석이 버린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무엇이었을까? 톨스토이는 교회의 교리와 예수의 가르침을 분리한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예수가 가르친 사랑과 겸손, 자기희생과 용서지 삼위일체나 동정녀 탄생과 같은 교리는 아니었다. 톨스토이에게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로 표현되는 교리는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이는 다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11)
단, 다석에게는 남들 따라 입으로 외는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얼 생명'이다. 따라서 다석이 보기에 교리는 타율적 신앙의 방편일 뿐 "맘속의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맘속이 깨끗하고 거룩하게 됨"12)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석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이 되는 얼 생명뿐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다석의 신앙적 전향은, 외적인 측면의 정통에서 비정통으로의 변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내적인 측면의 타율적 신앙에서 자각적自覺的 신앙으로의 변화로 이해해야 더 적절하다고 본다. 다석이 추구한 스스로(그리고 스스로를) 깨닫는 자각적 신앙과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단독자의 삶에서 '나'가 가진 중요성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석의 '나'란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얼나'를 말한다. 다석은 인간을 식욕과 성욕과 같은 육체적 욕망의 몸 생명이자 거짓 자아인 '제나'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참자아인 '얼나'로 구분한다. 그는 몸의 수행을 통해 제나를 죽여 얼나를 만나고 깨달아, 이 얼나야말로 참'나'임을 깨닫는 것이 영생이자 구원이라 말한다.
"하느님 앞에 서는데 누가 서야 합니까? 내가 서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만은 대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대하는 것은 다 내가 하는 거예요. 나! 내가 얼나를 믿음(깨달음)으로 얼나로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들어갑니다."13)
이처럼 비정통 자각 신앙으로 돌아선 다석은, 비슷한 시기에 아우 유영묵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오랜 시간 <화엄경>과 <노자> 같은 동양 종교의 경전을 연구하면서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들어간다. 이 시간들은 다석이 그리스도교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시기일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성찰 그리고 이러한 성찰을 통해 깨달은 '오늘 여기'에서의 생명에 대한 동양철학적 이해를 깊게 한 시기이기도 했다.
실제로 다석은 1918년부터 1월 13일부터 자신이 살아온 날수를 셈하기 시작하고 '오늘 살이'에 들어간다. 동시에 다석은 오랜 시간 YMCA 연경반에서 성경과 동양 경전을 연구하면서 가르쳤다. 그렇게 다석은 50살이 되는 해까지 교리적인 타율적 정통 신앙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그렇지만 자각적이면서 수행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핵심으로 삼아 유교·불교·도교의 지평을 융합하고 확장해 오늘 여기의 삶에 대한 보편적 생명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YMCA가 주최한 유영모의 회갑 기념 강연회. 앞줄 가운데 유영모가 있고,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함석헌이다.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YMCA가 주최한 유영모의 회갑 기념 강연회. 앞줄 가운데 유영모가 있고,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함석헌이다.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이 시기에 다석에게 중요했던 것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생명과 그 생명을 추구하는 '오늘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본성인 씨앗을 키워서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즉 생명의 완성이다.14) 다석에게 예수는 바로 이 생명 완성을 위해 온 스승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오시기 전에 人間 欲望은 그리스도엿습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가 본 그리스도는, 生命 願誠으로 보인 것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도라가신 뒤에, 信者들은 다시 各自 欲望의 主로 다시 오시기를 바란다 ᄒᆞ니 生命 願誠은 發心도 못 하는 것 같다."15)
"예수가 오시기 전에는 예수만 오면 다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예수는 왔다. 와서 보여 주신 것은 생명의 완성이다. 예수는 갔다. 갔으면 예수가 보여 주신 대로 각자 생명의 완성을 하면 된다. 사람들은 생명의 완성은 할 생각을 안 하고, 또 예수가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니 생명 완성은 시작도 못 하고 있다."16)
영원한 저녁을 그리워한 사람
다석은 얼 생명이 없는 타율적 교리를 버렸을 뿐이지 예수를 따르는 신앙을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41년 이후 다석의 사유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성이 강해지기도 한다. 다석은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 왔던 동양철학과 서구 사상에 대한 자신의 연구와 통찰은 물론, 자신의 삶으로 치열하게 추구했던 수행적 삶에 한계를 느꼈고, 이를 극복할 영적이고 정신적인 체험을 담아낼 사상과 철학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다석은 1941년 그가 52살이 되던 해에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시작하고, 다음 날 아내와 일체 성적인 관계를 끊는 해혼解婚을 선언한다. 그리고 잣나무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자는 고행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 4일,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가 깊은 영적 체험과 함께 깨달음을 경험한다.
다석 유영모와 그의 부인 김효정.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다석 유영모와 그의 부인 김효정.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다석은 <성서조선>에 투고한 글에서 그때의 체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죽을 것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어 끊어질 것이요. 뒤에 죽을 몸을 거두어서 앞의 얼삶에 양식으로 이바지함으로써 생명을 여는 몸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령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십니다."17) 다석의 표현에도 그렇듯이 다석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강조가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회심 체험처럼 다석에게도 그런 변화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와 함께 다석은 1943년 2월 5일 북악산에서 하늘과 땅과 자신이 하나로 뚫리는 천지인天地人 체험을 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다석 유영모는 자신의 아호를 '다석재多夕齋'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다석의 체험으로 찾아온 변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다석'이란 호는 많은 저녁을 가리킨다. 지금껏 다석이 빛으로, 또 낯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을 철저히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 다석은 무한한 우주에 비해 자기 자신은 무無에 지나지 않음을, 자신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그런 어둠과 밤의 차원을 처절히 깨달은 것이다. 또 지금껏 '오늘 살이'에 힘써왔던 자기 자신의 모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이 아무것도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다석의 사유에서 이런 변화는, 다석이 경험한 앞서 이야기 한 영적 체험에 근거한다. 이 체험으로 다석은 빛보다 큰 어둠, 아침보다 먼저 있었던 저녁을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 이젠 경험으로 깨닫는다.18)
다석에게 빛은 물질세계와 이성을, 어둠은 정신세계와 신비를 의미했다. 따라서 빛이 꺼지면 '어둠'과 '빔'과 '없음'이 찾아온다. 그 빔과 어둠 속에서 절대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에게 하나님은 '없이-계신 이'였다. 이후로, 다석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바로 '영원한 저녁' 되신 하나님을 더욱 그리워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저녁의 어둠 속에서 티끌 같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자신을 깨닫고, 우주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부정하여 하나님과 소통하고 일치하는 삶을 평생 추구했다.
이러한 삶을 다석은 '가온 찍기'(ᄀᆞᆫ)19)라 불렀다. 다석은 그렇게 많은 저녁을 그리워하며, 무한한 우주와 영원한 시간 속에 자신을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사유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였다.
1950년 유영모와 함석헌(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오른쪽 두 번째가 제자 김흥호다.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1950년 유영모와 함석헌(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오른쪽 두 번째가 제자 김흥호다. 사진 출처 다석사상연구회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천지인의 신앙적 체험 이후 점점 다석의 사유에서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특징은 약화하고 동서양 종교 합일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변화가 생긴다. 1943년 북악산의 천지인 체험 이후 다석의 글에서 그리스도교 중심적 신앙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다석 후기 사상의 특징으로, 아마도 다석이 천지인 합일 체험 이후에 한글의 천지인 철학과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연구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서구 근대 철학뿐 아니라 한글의 천지인 사상, 동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사유를 더욱 심화 발전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본질적으로 성경과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충실했으나, 그리스도교의 우위는 사라지고 동양과 서양의 종합을 추구한다. 이러한 사유를 다석은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는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이유로 다석은 동서고금을 회통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는 사상가로 평가된다.20)
평생 죽음을 생각하며 참생명을 살아 내려 했던 다석은 1981년 2월 3일 평생 그토록 바라던 '영원한 저녁'으로 들어간다. 썩어 없어질 육신에 아무 미련이 없었던 그는 화장을 원했지만, 유족들은 그의 시신을 그의 아내 김효정의 묘에 합장했다. 다석이 그토록 원했던 영원한 저녁에 들어가기 전 가족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했던 말은 바로 '아바디'였다. "'아'는 감탄사,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이며, '디'는 디딘다는 실천의 삶을 의미하는 것"21)이었다. 다석의 마지막 말은 평생 그가 걸었던 길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준다. 저녁의 어둠과 빔空 속에서 나타나는 없이-계신 '아바디'를 그리워하며 쫓았던 다석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둠을 통해 '빛'을 보았던 삶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다석 유영모가 저녁의 그리스도교 사상가인 것은 그가 진리에 방해가 되는 빛을 꺼서 '어둠'에 이르는 치열한 신앙 수행과, 자기 안으로 뚫고 또 뚫어 더 이상 남김이 없는 '빔'에 이르는 체험적 사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 체험적 사유를 통해 어떤 외부적 권위와 틀로도 담아낼 수 없는, 심지어 '그리스도교'라는 그 틀조차도 담아낼 수 없는 그 무한한 하나님을 '체험적 진리'로 신앙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런 경험적이고 주체적인 진리가 아닌, 어떤 종교적 제도나 신학에 기대는 신앙이 보여 주는 한계가 극명해진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석을 요청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규식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부목사로 일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다석 유영모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주
1) 다석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받아들여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인식론적 확실성에 이르고자 한 데카르트의 생각과는 달리 다석의 생각은 삶과 신앙의 존재론적 원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이자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창조적 지성인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본성이라 보았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파주: 한울아카데미, 2013), 50-54.
2) 김흡영은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로 규정하는 경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종교라 믿었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선교지에서 다른 종교를 발견하고 이들의 사상을 담아내려 찾아냈던 "인식론적인 대안적 개념"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서구적 유형론을 다석에게 적용하는 것은 다석 사상을 서양의 맥락에서 평가하는 "맥락 착오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김흡영, 『가온 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 신학 서설』 (서울: 동연, 2016), 52-53.
3)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관련한 구체적 내용은 다석의 제자 박영호의 『다석 전기 – 류영모와 그의 시대』 (서울: 교양인, 2012)를, 다석 사상의 시기적 구분과 변화에 대해서는 박재순의 『다석 유영모』 (서울: 홍성사, 2017), 55-101.을 주로 참고했다.
4) 유영모,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다석 일지 - 다석 유영모 일지 - 제4권』 (서울: 홍익재, 1990), 409-410. 다석의 수행론으로 몸성히는 탐욕(식욕)을 버림을, 맘놓이는 치정(색욕)을 끊음을, 뜻태우는 몸성히와 맘놓이를 통해 주어지는 지혜의 광명을 의미한다.
5)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서울: 두레, 2002), 304.
6) 앞의 책, 180.
7) 박영호, 『다석 전기 – 류영모와 그의 시대』 (서울: 교양인, 2012), 61.
8) 앞의 책, 80.
9) 다석 류영모 강의, 다석학회 엮음, 『다석 강의』 (서울: 교양인, 2017), 318.
10) 앞의 책, 141-143.
11) 앞의 책, 138.
12) 류영모 강의, 박영호 풀이, 『다석 마지막 강의』 (서울: 교양인, 2011), 381.
13) 앞의 책, 126.
14) 박재순, 『다석 유영모』 (서울: 홍성사, 2017), 56-61.
15) 유영모, 『다석 일지 – 다석 유영모 일지 – 제1권』 (서울: 홍익재, 1990), 25. 1955년 6월 3일 일기.
16) 김흥호, 『다석 일지 공부 1』 (서울: 솔출판사, 2001), 61. 다석의 제자 김흥호가 『다석 일지』를 묵상하면서 원문과 함께 자신의 해설을 기록한 책이 『다석 일지 공부』이다.
17) 박영호, 『다석 전기』, 313. 1942년 2월 『성서조선』 157호에 유영모가 투고한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을 인용.
18) 박재순, 『다석 유영모』, 61-64.
19) 가온 찍기(ᄀᆞᆫ)란 하늘을 상징하는 'ㄱ'과 땅을 상징하는 'ㄴ' 사이에 인간을 상징하는 '·' 태극점으로 천지인天地人이 합일하는 '나'의 자리라는 의미를 형상화한 다석의 표현으로 "유영모의 핵심적인 관계론적 실존 사상"으로 "우주 속에서 내 자리를 찾아서, 나의 궁극적 주체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김흡영, 『가온 찍기』, 35.
20) 박재순, 『다석 유영모』, 76-101.
21) 김흥호, '유영모,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김홍호 · 이정배 외, 『다석 유영모의 동양 사상과 신학』 (서울: 솔출판사,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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