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어록-생각하자는 삶 본문
다석어록- 생각(思想)하자는 삶
사람이 참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내게 건네 주는 얼(성령)이 참된 거룩한 생각이다. 하느님
께서 건네 주는 얼이 없으면 참된 생각을 얻을 수 없다. 참된 거룩한
생각은 하느님과의 연락에서 이루어진다. 몸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
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한다. 그러면 거룩한 생각이 하느님이신가? 나
로서는 모른다. (1956)
저 하늘의 무한한 공간 안에 있는 천지(天地)의 자연(自然)은 이 모
두가 다 하느님이 주신 글월이다. 이 글월을 읽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
서 사람들에게 이승의 짐승 버롯(獸性)을 버리게 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느님에게 짐승 노릇(獸
性)을 내버리도록 하여 하느님 생각을 이루도록 해달라는 것이
다. (1956)
사람이 어릴 때는 좋은 일, 나쁜 일을 분간 못 한다. 분별력이 있으
면 어리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릴 때 하는 노릇은 짐승 같다고 한
다. 짐승은 먹는 것과 짝짓는 것밖에 모른다. 그리하여 태어나자마자
먹으려하고 유치원생만 되어도 짝지으려 한다. 사춘기가 되면 식색(食
色)밖에 관심이 없다. 예수와 석가는 짐승인 몸을 가지고도 짐승이기
를 거부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짐승 노릇밖에 못하는 이들이 있
다. 짐승 이하의 짐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짐승은 얼이 없지만 못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도 하느님이 주시는 얼이 끊어지면 짐승
밖에 못 된다. 어른이 되어도 생각도 없고 하느님도 모르면 짐승밖에
더 되겠는가?(1956)
나와 너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다 한 나무에 핀 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긋을 알면 그만이다.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정신,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말씀을 알면 그만이다. 그 말씀 속에서 또
내 얼굴을 보고 내 긋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56)
생각은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적인 불꽃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꽃 피울 때 참으로 불꽃이 되어 살아 나오는 것이 생각이다.
나란 바로 정신이다. 정신이 자라는 것이 생각이다. 정신이 깨어나고
정신이 불붙어야 한다. 정신은 거저 깨어나지 않는다.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정신이 깨난다.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다. 정신
이 통일되어야 생각의 불이 붙는다. 분열된 정신은 연기만 난다. (1956)
얼굴을 보니 그 골(谷)이 한없이 깊다. 얼굴 뒤에 골(腦)이란 골(谷)
은 여간 깊은 골짜기가 아니다. 소뇌(小腦), 대뇌를 넘어서 무한한 신
비가 얼굴 뒤로 이어져 있다. 생각하고 생각해 가면 우주의 별하늘(星
天)이 문제가 아니다. 별하늘 뒤에 천천 만만의 별하늘이 있고 그 뒤에
생각의 얼바다(靈海)가 있다. 그 깊은 그윽한 곳에 얼굴의 임자요 참
나인 얼나(하느님)가 계신다. (1956)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을 일으켜 태우는데 탄산가스가 나올 리
가 없다.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불에는 탄산가스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얼(성령)의 불이 제대로 불타오르지 않으면 탄
산가스 이상으로 악독한 생각이 나을 수가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악마와 같은 독한 생각을 뿜어내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생각이 잘못 들면 못된 생각이 나오는 것은 당연
하다. 얼(성령)의 불이 타고 있는 마음에서는 참된 생각, 좋은 생각만
나오지 생명에 해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의 얼생명을
떠나지 않으면 사람이란 본래 참되게 살도록 되어 있다. 그리하여 마침
내는 하느님 아버지를 뚜렷이 증거할 좋은 생각을 남기도록 밀어 주신
다. 이것이 예수·석가가 보여 준 참 삶의 길이라 생각된다. (1956)
우리는 마음이란 성화로(聖火爐)에 영원한 생명의 불을 태우느냐 못
태우느냐를 늘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생각을 불사르는 것이고 그것으
로 정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말이 터지게 된다. 내가 말을
자꾸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56)
태우는 것을 사린다고 한다. 내 맘속에 생각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
하느님에게 말씀 사뢰는 것이다. 우리를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얼의 불꽃이 있
게 마련이다. 때로는 나도 혼자 기도하듯이 혼자 당신(하느님)하고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1956)
미루어 생각하는 것을 추리(推理)한다고 한다. 추리하는 것은 참으
로 이상하다. 추리하는 가운데 엉뚱한 영감(靈感)을 얻게 된다. 나는
글자를 파자(破字)해서 추리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1956)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ln)"는 데
카르트의 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내게서 생각은 자꾸 살리어 나오는데
나라는 것이 그리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이 살리어 나
오는 것이 문제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그 임시에 가
서 해도 좋다. 모름지기 꼭 할 일은 나라는 생각의 긋(點)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내 생각의 긋을 살리어 나가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1956)
나는 무엇인가? 나를 찾으려면 내 속에 들어와야 한다. 가까운 이
웃, 친구, 친척에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내 맘속에서 생각해 나를
찾을 도리밖에 없다. 나라는 것은 마침내 있다고 하고 싶다. 나는 있다
는 생각이 버릇이 되었는데 확답은 못 한다.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절대의 하느님을 향하여 형이상하(形而上下)로 나아지려고 애쓰는
얼나가 있는 것이다. (1956)
내가 청년회관(YMCA)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다. 하느님의 얼이 이 내 얼을 보고 꼭 하라고 해서 나오게 된 것
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사람은 어떤 목적에 무슨 일을 어찌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슨
학교 공부를 해야 하고 무슨 지위를 바라는 것은 한낮 꿈이 아니겠는
가? 우리는 순간 순간 새로 낳아 가는 얼나가 아닌가. 이러한 말을 해
서 어떨지 모르지만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말을 좀 해도 무관할 것이
다. (1956)
사람의 정신은 사람들이 향불을 피우듯이 생각(思想)을 피워 올리는
것을 먹고산다. 우주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필요가 있어서일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의 사상을 향불 모양으로 위로 피어 올리는 것을 받아먹
고 지내는 하느님이 계시는지 모르겠다. (1957)
우리는 살아가다가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의심이 생겨 밤낮으로
생각해도 밝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아주 답답하고 곤란할 때가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
지 않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나를 훌륭하게 만들까 괴로워한다. 그들
에게 참을 찾으려는 마음이 한결 같으면 언젠가 제 가슴속에 밝은 길
이 열릴 것이다. (1957)
생각은 우리의 바탈(性)이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른다. 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다. 생각이라는 바탈(性)을 태우려
면 마음이 놓여야 하고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한다. 바탈은 생
각이 밑천이 되어 자기의 정신을 불사르는 예술의 세계이다. 몸성해 참
되고 마음 놓여 착하고 바탈을 태워 아름답다.
나무의 불을 사르듯이 자기의 정신이 활활 불타올라야 한다. 바탈을
태우지 못하면 정신을 잃고 실성(失性)한 사람이 된다. 자기의 소질을
살리는 것은 중요하다. 소질 가운데 소질은 생각하는 소질이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러 감성을 살려도 좋고,사물을 직관하여 하느님의 섭
리를 헤아리는 영성 (靈性)을 살려도 좋고, 과학과 기술을 연마하여 오
성(悟性)을 살려도 좋다. 하여튼 바탈을 살려야 한다. 그것이 사는 것
이다. (1957)
하늘인 건(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했다. 원(元)자는 하늘
밑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글자이다. 사람은 만물의 으뜸이
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과 통해서 쉬지 않고 줄곧 원기(元
氣)를 받아 마시어 원기왕성하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형 (亨)자는 우·아래(上下)가 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통하고
만물과 통해서 마침내 형통하게 된다. 형(亨)자는 향(享)자와 같은 자
인데 향(享)은 제향(祭享)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만물을 음
복(飮福)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 형(亨)은 삶을 더
두텁게 하는 형이다. 하늘의 이치에 통하고 만물의 이치에 통할 때 사
람의 삶은 더 풍부하게 된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도 하늘에 드리
는 제사이다. 말씀 사룀은 목숨 사룀보다 더 큰 제사이다. 제사를 지내
는 것보다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없다.
이(利)는 벼 화(希)변에 칼 도(刀)를 그린 것이다. 씨를 뿌리고 거둔
다는 뜻이다. 조 1알이 1천5백 알로 불어난다. 이렇게 이로운 것은 없
다. 주역(周易)에서는 서로서로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해 이(利)자를 쓴
다. 이(利)는 남을 해치는 것의 반대이다.
정(貞)은 솥을 반듯하게 거는 것을 나타낸 글자이다. 정(貞)은 사람
이 곧이 곧장 똑바로 서는 것이다. 곧이(正直한 사람)는 언제나 바로
정직하게 서서 곧이 곧장 나가야 한다. 하늘을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곧이(貞)다. 행(行)자는 왼발 세 걸음, 바른 발 세 걸음을 곧이
곧장 간다는 뜻이다. 걸음 보(步)는 좌지(左止) 우지 (右止)를 합친 글
자이다. 좌로도 그치고 우로도 그쳐 곧이 가게 되는 줄을 알아야 한
다. (1957)
쉬지 않는 것이 불식(不息)이다. 숨을 쉰다는 식(息)이다. 자(自)자
는 사람의 코를 그린 글자이다. 나의 대표가 코이다. 코는 숨쉬는 기관
으로 숨쉬는 생명이 자기이다. 숨은 코로만 쉬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
로 숨을 쉰다. 정신의 숨쉼이 생각이다. 줄곧 숨쉬고 줄곧 생각하여 하
늘에 다달아 내가 나가 되는 것이다. 거짓나(제나)가 참나(얼나)가 되
는 것이다. 멸망의 나에서 영생의 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이 곧장
나아가는 것이다. 코로 숨쉬는 데도 몸을 곧이 곧게 하고 정신이 숨쉬
는 데도 맘이 곧이 곧게 하는 이것이 양기법(養氣法)이다. 몸과 맘을
곧이 곧게 하는 이것이 장생(長生)하는 양생법(養生法), 양심법(養心
法)이다. 몸과 맘을 곧이 곧게 하는 이것이 장생(長生)의 길이요 영생
(永生)의 길이다. 곧이 곧장 정신을 가지고 입다물고 코로 숨을 쉬면
숨이 잘 쉬어져 호흡이 잘 된다. (1957)
인류가 히브리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생각한 얼을 제대로 파악했으면
이 땅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한 참을 찾아서 단단
히 파지(把持)했으면 인류의 꿈이 실현되었을지 모른다. 이런 것들이
부실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이 꼴이 된 것 같다. (1956)
예수교 신앙에는 영생 (永生)하겠다는 입지 (立志)가 들어 있다. 불교
신앙에는 성불(成佛)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신앙이 영원한 생명(얼나)
으로 영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길이 있으면 꽉 붙잡고 끝까지
가봐야 한다. 적어도 영생하겠다고 염원(念願)하는 것만이라도 잊어서
는 안 된다. 이것을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더라도 나는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쉬지 말
고 기도하라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얼나로 솟나 영생하도록 하느님
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얼나를 깨달아 영생의 길을 한 번 붙잡으면 죽
어도 놓지 않겠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또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면 그 길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파지(眞理把持)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아 성불(成佛)하는
이치를 알았으면 그것을 기어이 깨닫고야 말겠다는 염원(念願)이 염불
이다. 염불한다는 것은 블다(Buddha)의 이름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
만일 영원한 생명(얼나)을 깨닫는 이치가 있으면 꼭 붙잡고 그 이치의
자리까지 가는 것이 염불이며 신앙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는
데는 바르게 생각하는 길뿐이다. 석가의 팔정도(八正道)는 곧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몸에 기름이 가득 차고 마음의 심지가 꼿꼿하고 정신의 지혜가 빛나
는 것이다. 이를 비기면 등잔에 기름이 차있고 심지가 바로 서있어 불
빛이 빛나는 것이다. 이것을 석가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라고
한다. (1957)
사람과 사람이 몸으로는 만나나 맘으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고
독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도 깊이 생각하고 학생도 깊이 생각
해서 서로 아무 말도 없지만 서로 마음속 깊이 통한 곳에서 얼(靈)이
란 한 긋의 나 곧 얼나(靈我)에서 만난다. 이 가온찍기(「.」)의 한 긋만
이 진실한 점(點)이다. 이 점(얼)에서 착한(善) 선(線)이 나오고 아름
다운(美) 면(面)이 나오고 거룩한(聖) 체(體)가 생긴다. (1957)
사상(思想)에 굳이 동양·서양의 수식어를 달아 구별할 필요가 없
다. 사상은 다 하나(하느님)를 담아서만이 영원한 사상인 것이다. 사상
이 이루어진 것은 사람들이 하나(하느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정고(未定槁)로 완결된 사상이란 없다. 인류가 남긴 모든 사
상은 영원 절대(하느님)에 이르려는 과정에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고백적인 기록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무슨사상,무슨 신조라하는 것은 다 완결을 보지 못한 것들
이다. 어떤 뜻에서는 어떤 사상이든 모두가 영원한 미정고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이나 사상에 대표라는 것은 없다. 철학이나 사상이란 다만
자기가 사색하고 생활해본 정도를 발표한 소견(所見)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상 어떤 종교를 내세워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면서 완전고(完全槁)처럼 떠들지만 실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사상이나 신조가 완전고라 떠들고 내려온
것이 인류역사다. (1957)
땅(지구) 위에 붙어사는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인충
(人蟲)이 이 우주에 없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지구도 달처럼 아
무런 생물이 없이 빤빤하게 있다고 해서 무슨 서운한 일이 있는가?우
주조차도 마침내 다 타버린다는 주장이 종교나 과학에나 다 있다. 우리
가 옷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린다고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마
찬가지로 지구에서 인류를 다 털어 낸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는가?
벌레 같은 인류이고, 갈대 같은 사람이지만 임자되시는 하느님이 그리
워서 생각하여 사상을 내놓아 여느 짐승과 다르다. 이 사상이 무시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어 문제인 것이다. (1957)
삶(生)도 문제가 아니고 죽음(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
인 생각이다. 주관적인 생각이 문제다. 나의 생각이 하느님이 계시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문제이다. 생각이 우로 올라가면 참이다. 우로부터
오는 말씀이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하느님의 생
명인 성령이 내 마음속에 바람과 같이 불어 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
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 (1957)
세상은 못됐다, 틀렸다고 하고서 우로 올라가면 시원하다. 생각이
우로 오름이 마음이 한없이 넓어진다. 하늘로 머리를 들면 시원하다.
시원하니까 생각이 난다. 그리하여 백두산에서 물이 흐르듯이 마음에
서 생각이 나온다. 객관이 아니라 주관(主觀)뿐이다. 몸은 쓸데없지만
얼은 영생한다. 주관뿐인데 주관은 내 주관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관이
다. 하느님은 만유보다 크시다. 나의 주관까지도 하느님께로부터 나왔
다. (19i7)
좋은 사상은 내 생명을 약동케 한다. 남의 말을 들어도 시원하다. 생
각처럼 귀한 것은 없다 생각해서 밑지는 일은 없다. 생각에서도 하느
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생각은 향기롭다. 바람만 통해도 시원한데 거
룩한 항기가 참어 나오는 바람이 불어온다면 얼마나 시원하겠는가?시
원한 생각, 시원한 말씀이 불어가게 하라.(1957)
이 세상에 신통한 일이란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얼이 통하면 시원
하다. 내가 생각을 했는데 나도 모르는 것을 보면 내 생각도 하느님으
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나오기는 나에게서 나오는데 오기는 하느님으로
부터 온다. 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생명(얼)이다. 내가 낳았
으나 나(自我)를 안 닮았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얼나이다. 달걀도
무정 란(無精卵)은 썩는다.
하느님 아들의 씨(얼)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말씀은 하느님으로부
터 온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아들(씨)을 여래(如來)라고 한다. 얼생명
으로 온 것이다. 여여불생 (如如不生) 내내불멸(來來不滅)이라 얼이 그
대로다. 와도 나지 않고 가도 죽지 않는다. 얼나이기 때문에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1957)
몸은 때(垢)이며 유한(有限)한 시간이다. 얼은 깨끗(淨)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몸은 죽음이란 한 줄(線)을 넘어가야 사상(思想)이다. 쌀
(米)을 먹고 살(肉)이 되듯이 몸은 발전적으로 해소되어 정신이 된다.
몸 부정(否定)이 정신이다. 우리의 몸이 숨을 쉬듯이 이 우주도 숨을
쉰다. 이 우주의 숨쉼이 성령인 말씀이다. 영원한 생명(하느님)의 활동
이 말씀이다. (1957)
물건이 중요하면 우리는 머리에 이고 간다. 참 받들어 가는 것이다.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을 임(님)이라고 한다. 님이라고 할 때는 아주 정
중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다.님
을 생각하는 것을 상사(想思)라 한다. 님을 머리 위에 받들어 이는 데
는 반드시 생각이 있다. 생각이 없으면 님은 없다. 우리는 하느님, 말
씀님, 길님처럼 님을 붙여서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님을 붙여 놓으면
그 깊은 뜻이 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하는 기도는 바
로 최고의 님,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다. 이 사람의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1957)
만물을 이룬 것이 로고스(말씀)라면 이것은 바로 생각을 말하는 것
이다. 로고스가 말씀이라면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이 생
각이라는 것에서 기독교의 얼(靈)이, 유교의 길(道)이, 불교의 참(法)
이 나타난 것이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도 마찬가지다. 유신론(有
神論),유물론(唯物論)도 생각 없이 나올 수 없다. 모두가 생각의 방편
이지 별 것 아니다. (1957)
현재를 깊이 알아야 한다. 생각이 자꾸 나와야 한다. 영원(永遠)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미신적으로 망상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게서 나오
는 생각이 자꾸 흘러나와서 사상(思想)의 바다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생각 때문에 얼의 바다, 얼의 나라를 믿는 것이다. 내 속에서
말이 자꾸 나온다. 그것을 보아서 말씀의 나라가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다. 없(無)에서 와서 없(無)으로 가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허무를 느끼
는데 무(無)가 무(無)는 아닌 것이다. 얼의 나라인 새로운 시대 이
다. (1957)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모든 것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므로 나는 있다"고 했다.모
든 것이 있다 없다,이것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제법 똑똑한 사람이면 한번쯤은 여기에 도달한다. 김성탄(金
聖嘆)이라는 사람은 수호지, 삼국지 등을 이상스럽게 주석을 낸 사람
인데 『서상기』라는 책 서문에 "나는 왔습니다. 나는 마음이 있으니
나를 압니다. 나라는 생각은 이 순간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나가 아닌 동시에 지나
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나만큼은 참으로 있다고 하는 소리
는 내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확실히 있다. 생각이 있는
이 시간에는 내가 말씀드릴 수 있지만 이 다음 시간에는 나라는 존재
가 있어도 생각이 없으면 이런 시간은 다시 없다. 그렇지만 인류라는
것이 끊어지기 전에는 생각은 사람에게서 자꾸 나온다.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다. 생각이라는 존재만큼은 확실한데 어디서 오
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생각이 있기에 말씀을 한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아이가 말하기 전에는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른다. 말을 배워
가지고 그 말을 생각할 줄 안다. 그러니 생각과 말씀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천지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은
일찍 내린 결론이요 대단한 진리라 아니할 수 없다. 말씀으로 모든 것
을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말씀이 곧 존재이다. 말씀이 하느님이시다.말
씀의 근원은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운데(얼)이다. 말씀이
사람의 정신 내용을 살린다. (1957)
나는 무엇인가? (얼)생각이다. 하느님이 무엇인가? (얼)생각이다.
붓다가 무엇인가? (얼)생각이다. 있다는 데는 얼생각이 주인이다. 생각
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아무도 모른다. 생각(정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러나 어디인지 잘 몰라
서 얼생명인 하느님이라고 했다. (1957)
우리는 생각을 하는데 말 기도는 하지 말고 오직 위로 올라가는 생
각을 해야 한다. 눈을 감고 한 10분 동안 위로 올라가는 생각을 하고
다음엔 아래로 들어가는 생각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그 생각의 맛이 어
느 쪽이 좋은지 알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떻게 말로 설명이 안 된다.위
로 오르는 것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위로 올라가게 생겼지 아래도 미끄러지게 생기지 않았다. 사람
이 위로 올라가는 생각을 많이 하면 구원받기 싫다 해도 구원을 받고
야 말 것이다. (1957)
큰 으뜸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다(大元出于天) 원(元)자는 내 근원
을 말한다. 하느님 밑에 사람이 있는 것이 원(元)자이다. 이 글자가 우
리와 하느님을 이어 준다. 큰 으뜸(大元)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얼나
(정신)이다. 영원무한(하느님)과 접속을 할 때가 왔단 말이다. 한 모금
의 물을 마시는데 우리집 우물이나 수도(水道)에서 퍼마셨다 해도 그
물은 우주적으로 대원(大元)에 이어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하듯이 내게
서 나오는 참된 생각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
다. (1957)
이 사람이 말씀드릴 때는 내 속으로 생각이 여물어지기를 바라면서
얘기를 한다. 이 사람도 생각을 하자는 것이고 여러분도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사람이야 살아 있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여러분의 생각이 열리
게 된다면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나서 이 사람은 여태껏 여러분과 같이 말로 하는 기도는 하
지 않으려고 했다. 찬송 또한 불러 본 적이 없다. 다만 생각한 것이 잘
영글어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되어서 절로 나오
는 감동이 찬송이 되고 말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의 생각이 좀
더 여물어져 하느님과 일치되는 생각을 하도록 되어야 찬송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그 밖에는 거짓이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도와 찬송이
인사치레 하는 것같이 하고 있으니 그런 것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무의미한 것이다. (1957)
태양광선을 알아 그 거짓 빛을 좇는 허영에 팔려 있다. 해와 달과
별 저게 있는 것인가?모두가 그림자 같은 것이라 없는 것이다. 참 있
는 것은 오직 하느님을 생각하는 얼나뿐이다. (1957)
점심(點心)이란 무엇인가 하면 속이 궁금할 때 먹거리를 조금 집어
넣는 것을 점심이라 한다. 곧 음식을 조금 먹는 것이 점심이다. 그저
조금 먹는 것은 다 점심이라고 한다. 꼭 낮에 먹어야 점심인 것이 아니
다. 점심하면 즉세(卽世)한다. 점심을 먹었으면 밥값을 내야 한다. 보
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점심만 먹고 점심소견(點心所見)이 없
으면 무전취식(無錢取食)한 것이 된다. 뱃속이 즘 궁금해서 또는 섭섭
해서 집어먹는 것만을 해서는 점심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나와 사물
(事物)과 관계가 있겠금 점심소견이 따라야 한다 소견(所見)을 생각
하고 집어먹으면 물건의 소견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점심소견을 아는 사람은 닭고기를 먹는데도 닭만큼 일찍 일어나고
닭처럼 부지런히 일할 줄 알아야 닭고기 먹은 본의(本意)가 있다. 닭
에 대한 소견을 말하고 잡아먹어야 하는 것이다. 점심소견 하지 않고서
는 정말 고기 맛도 모르는 것이다. 물건마다 보는 것마다 우리의 궁금
증을 덜어 주는 것마다 점심 아닌 것이 없다. 지금 새삼스럽게 따져서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본 뒤부터 그러하다. (1957)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다. 생각
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의 뜻을 좇아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
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생각은 진실한 것이다. 몸
삶이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1957)
순수철학에서는 궁극으로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생각하기 위해서 사는데 '생각은 왜 하는가'라고
하게 되면 우습게 된다. 참으로 보자고 하는 것은 새 것을 보자는 것이
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밝히자고 하는 이 충동이 발명, 발전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자꾸 새로운 것을 밝히자는 뜻으로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 자체가 사는 것이다. (1957)
묵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요 살았다는 것은 새롭다는 뜻이 된다. 산
다는 자체가 새롭게 되는 것이고 새 것을 간직하는 것이다. 세상이 싫
다면 이 몸뚱이가 싫다는 것이지 자연(自然)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죽은 것은 새로운 법이 없다. 묵은 것은 죽은 것이다. 묵은 것을 버리
고 새 것을 자꾸 찾는다. 인생이 그렇고 우주가 그렇다. 다른 것으로는
새 것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사는 것은 새롭다는 것이라고 아마 단
언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자꾸 새로운 생각을 영원히 낳게 한
다. (1957)
우리가 왜 있나? 이것을 알려고 하면 참 어려운 것이다. 내가 있는
까닭을 온전히 알자면 절대계(하느님)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
이다. (1957)
우리의 머리 위에 큰 님(하느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피울 것 없다. 하느님을 뚜렷이 할 것과 하느님 아들로 뚜
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엇인가. 몇 천 몇 만 년이 가도
하느님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떨어
진 천인(天人)이란 말을 익혀 두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
신 거룩한 일이다. '솟아나갈 뚜렷'은 얼나로 거듭난다는 소리와 같다.
이것도 하느님에게 아들로 뚜렷해서만이 나올 수 있는 말이다. (1957)
하늘 땅 사이에 벌려놓은 물건이나 벌어지는 일들도 생각해보면 모
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다. 반가운 일이나 싫은
일이나 다 내게 온 편지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당신 생각을 좀 해보라는 것이다. (1960)
위대한 것을(하느님) 섬기는 데는 많은 재물이 안 든다. 먼 것을 잊
어버리지만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1960)
신앙에 추리(推理)하는 사색(思索)없이는 안 된다 추리하는 동안에
생각이 발전한다. 밀(推)어서 밑(本)을 보는 게 믿(信)음이다. 마침내
밑(本)이 훤하게 터지면 아버지께 다다른다. (1960)
'나'라고 하면 마음이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말씀이 나온다.이
게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크신 하느님이 계시는데 그
게 내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다. 이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아들 될
씨(얼나), 붓다(Buddha)가 될 씨(얼나)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석가
그리고 나나 바보도 다 똑같다. 이 얼나(씨)를 좇으면 하느님 아버지에
게로 간다.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거야말로 만민에게
평등한 진리이다. 얼나를 버리면 못쓴다. 그러면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
이 많다. (1960)
영원히 갈 것은 오직 생각 하나만이다. 영원무한(하느님)을 아는 것
은 생각 때문이다. 생각이 없었다면 말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 없다면
이렇다 저렇다 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물질(몸)말고 오직
생각뿐인 데가 있을 것이라 해서 하느님, 니르바나님이라 한다. 우로
올라가는 게 영원한 생명이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영
원히 가는 것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얼나뿐이다. 참(法)이라, 말씀이라
하는 게 이것이다. (1960)
삶을 잘 태우고 불사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사
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고 데카르트가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나는 살았다는 말과 같다. (1960)
생각의 시작은 긋(점)이다. 그림과 글씨가 생각의 시작이다. ㅅ(시
옷)은 산 생명을 나타낸다. 모든 긋(점)의 긋은 산다는 나다. 원점의
원점은 나다. 모든 게 내게서 나온다. 맨 처음 시작은 나다. '나라'는
게 왜 됐는지 이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온종일 가도 아무런 생각이 안 떠오른다. (1961)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박영호 엮음 두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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