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석일지』 1956년 4월 13일에 기록된 ‘동명’(東銘), 즉 송나라 성리학자 장횡거(張載)가 쓴 글을 순수 우리말로 풀어 되새긴 내용이다. 다석은 ‘동명’을 ‘동쪽에 삭여두고 본 글’로서 제목을 달았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0월 26일에 실린 것으로 ‘남우슴과 들어오름’이란 두 편으로 된 우리말 시의 내용이다. 다석은 이 시 내용을 한자어 爲, 立, 知, 세 글자를 달리 배열하여 6개의 조합어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다시 본인의 한글 시를 설명했다. 한자어가 우리 글로 풀어지듯 우리 글을 한자어로 다시 표현해 낸 것이다.
여기서 爲, 立, 知는 앞 장에서 논했던 忠, 信, 習의 핵심 내용인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시 제목인 ’남우슴과 들어오름‘은 남(타자)을 깔고 앉아 그 위에 서고자 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위(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을 대비시킨 뜻을 담았다. 6개월이란 시간 차(差)를 두고 쓰인 글을 편집자가 함께 묶은 것은 두 편의 글이 내용상 유사한 탓이겠다.
다석 사상의 핵심 중 하나로 염재신재(念在神在)란 말이 있다.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말이다. 성적 욕망(생각)이 자신과 다른 성(性)을 지닌 존재가 있음을 반증하듯이 형이상학적 욕망 역시 하느님 계시다는 증거라 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에게 있어 생각이란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자신을 ‘생각하러 온 자’로 여겼다. 동명(東銘)을 풀어 낸 ‘동쪽에 삭여두고 본 글’에서 다석은 생각-이를 이곳에서는 ‘꾀’라고도 표현했다-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하 내용을 본 책 『다석 강의』에 따라 쉽게 정리해 볼 것이다.
< 1 >
시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실없는 말도 생각으로 조차 나오고 실없는 짓도 꾀로 맨드는 것입니다’. 무슨 말, 어떤 행동이든지 생각의 산물이란 것이다. 설령 실(實)없는 말일 지라도 생각 없이 나오는 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실없이 했다고 하며 자신을 면피하는 경향이 있다. 본래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다석 강의』 제3강 ⓒ에큐메니안 |
다석은 이런 말을 철저히 부정한다. 어떤 류의 말과 행위이건 자신이 꾀한 것이기에 본인이 책임질 주체라는 것이다. ‘소리로 내고 손발짓을 ᄒᆞ고 제ᄆᆞᆷ이 아니엇다 고는 컴컴ᄒᆞᆫ 수작이오니 남이 절 의심 안케하고 싶은들 됩니까’ 자기 말로 말하고 자기 몸짓으로 행했음에도 그것이 자기 마음 탓이 아니었다는 것은 어둡고 음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석은 이를 컴컴한 수작이라 비난하였다.
이런 핑계는 밝은 대 낯에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자기 말과 행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실없는 일을 벌여 놓고도 자기 탓 말라고 간청하고 자기 참뜻을 알아달라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허믈된 말이 제 ᄆᆞᆷ 아니고 허믈된 짓이 참이 아니라면 소리에 틀렸고 사지가 잘못 든 것을 제 맛당ᄒᆞ다면 스스로 소김이오 남으로 절 좆게 ᄒᆞ려 들면 남을 속임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노릇 제대로 하려면 자기 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란 메시지를 전한다. 정신이 멀쩡하고 사지(四肢)가 온전함에도 본의 아니게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과 행위가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 된다. 다석은 이를 미친 짓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정치가, 경제가 심지어 종교인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다반사가 되었다. 한마디로 전장에서 언급한 忠·信·習이 실종된 결과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 곧이’를 신실하게 밀어 올려 지속적으로 익혀 사는 삶이 사라졌다. 세상에 종교가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이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종교는 모두 값싼 사구려 은총만을 남발한다. 그 때는 본심, 본뜻이 아니었으니 용서해 달라면 용서해 주는 종교, 수백 번 회개해도 다시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사(赦)하는 것이 종교의 본업이 되어 버렸다. 성직자란 존재는 자신의 ’마음 곧이‘를 지속적으로 익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눈을 부릅떠도 보이질 않으니 종교조차 중생을 속이고 있다 할 것이다.
‘혹 ᄆᆞᆷ에서 나온 것을 제 브러 힛다는데로 허믈을 돌릴 수 있다거나 생각에서 틀린 것을 제의 참으로 ᄒᆞᆫ 것이라고 스스로 속일러 들면’. 어떤 경우 사람들은 일부러(제 브러) 말하고 행했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진실로 그리 한 것이 아니라 일부로, 억지로 그리 했다는 것이다. 자기 말과 행위의 화를 면피할 목적에서다.
과연 그렇다고 허물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경우든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결과가 좋을리 없건마는 자신 행위를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는 인간 현실을 다석은 질타했다. 일부러 라는 것은 없다. 그것도 자신의 생각이고 의도(꾀)일 뿐이다. 결국 이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로서 종교인이라면 으당 이런 현실을 괴로워하고 회개해야 옳다.
‘그 네게서 나온 것을 일깰 줄도 모르고 도리혀 네게서 나오지 안는 데다가 허믈을 돌리려 드니 오만을 길우고 그른 것을 드디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번 속이려고 의도적으로 했던 말과 행위들, 그것이 잘못된 것을 깨쳐야 한다. 재미삼아, 실수로 혹은 친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허물과 죄가 아닐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실없는 소리, 열매 없는 행위를 밥 먹듯 해대는 우리네 삶을 정확히 꿰뚫어 본 다석의 꾸지람이다.
이런 실없는 소리들은 결국 오만을 자초하게 된다. 자기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틀린 것을 회개치 않는 것은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겠다는 심보라 할 것이다. 다석은 이것을 가장 무지한일이라 하였다.
‘무엇이 이에서 더 무지ᄒᆞᆫ 일이리까’. 이런 무지를 깨트리는 일이 종교의 으뜸과제란 것이다. 실(열매) 없는 삶을 고치는 일인 까닭이다. 이에 비하면 하느님이 있/없다 논쟁은 사실 백해무익한 토론일 뿐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참 종교를 일컬어 ‘學’(배움)의 종교라 했고 신도들을 학생이라 부르길 좋아했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수행과 배움의 종교라 여긴 것이다.
< 2 >
이런 선상에서 다석은 시조 ‘남우슴과 들어오름’을 풀어냈다.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비웃고 조롱하는 인간의 오만을 적시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인간됨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다시 ‘爲’, ‘立’, ‘知’ 세 한자어로 다시 풀어냈음을 앞서 언급한 것을 기억할 일이다. 시조의 각 연을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다.
‘얼버므리 우슨 말씀 우서가며 말씀썼쌈’, 사람들은 세상이 무의미하게 얼버므려 생긴 것이라 믿으며 상호간에 실없는 소리나 해 대며 말을 우섭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사람 살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서로 속이고 싸우며 오로지 남을 이기고자 한다. 여기서 ‘썼쌈’이란 말을 가지고서 서로 싸우려고 한다는 뜻이겠다. 한마디로 ‘썼’은 한문 ‘以’의 다석 식 풀이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을 이겨내야 할 존재이지 남을 이기려 들면 못쓴다. 시조 제목이 말하듯 남우슴, 곧 남위에 서고자 하는 것은 이 땅을 섬기로 오신 예수의 뜻과도 거리가 멀다. 이 시대에 만연된 무수한 갑질들, 그것을 바로 ‘썼쌈’이 적시한다.
‘님계셔서 이른말슴 말미암아 차츰 첫참’, 하느님이 있어 내가 존재한다. 말씀과 내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뜻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썼쌈 같은 일을 이제 그쳐야 한다. 다석은 ‘말미암아’를 ‘그만 하면 어떻겠는가’로 이해했다. 이제 해오던 관습을 그쳐야 한다는 뜻이겠다. 애시당초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신, 그것이 바로 말씀을 지닌 인간의 실존인 바, 그 길을 찾되,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 첫째로 찾자고 권한다.
‘참차저 올나가만이 이 길이라 ᄒᆞ시다’, 참, 곧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을 우선해야한다. 다른 어떤 일보다 이를 앞세우지 않으면 참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진리의 길, 곧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는 피안에 있지 않다. 말씀을 우습게 만드는 일을 그치고 남을 이기기보다 자신을 이기고자 하는데에 구원이 있고 진리가 있는 법이다. 의(義)의 최후 승리란 말이 이런 뜻이 아닌가 싶다.
‘우슴이키 오름ᄇᆞ린 씨알몰킨 나란나라’, 하지만 일상의 우리는 우습고 실없는 말을 거듭 반복한다. 남을 속이고, 그를 이겨내고자 위로 오르는 일을 다반사로 잊고 산다. 이런 민중(씨알)들이 모인 나라는 불행하다. 적폐로 휩싸였던 이 나라 대한민국이 그러했다. 촛불혁명은 민중들 모두를 하늘로 머리 두게 할 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이긴 죽기실코 진이기긴 살일난 듯’, 다석은 사람의 이마를 님을 마중한다는 뜻으로 풀은 바 있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적 실존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존을 부정하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 것(바탈)을 지녔음에도 그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
반면에 남을 이기고 그 위에 서고자 ‘짓이기는’ 일은 살판난 듯 잘한다. 서툴고 어리석은 일에 목숨을 걸곤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일들을 잘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탐진치, 곧 욕심, 분노, 치정이 우리들 현실을 짓이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코 안믈커진걸 어데언제 뉘봣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살면 자신은 물론 나라 전체가 망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망할지언정 실없는 웃음이나 실컷 웃겠다는, 남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가득하니 걱정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충(忠)을 오독하여 지배이념으로 만들었었다. 사람위에 사람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이른 지금도 그런 폐습이 지배하고 있으니 세상이 망할 수밖에 없다.
우스운 사람들, 남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 경쟁을 미덕으로 아는 현실을 다석은 깊이 우려했다. 그럴수록 다석은 하느님 한 분(하나)만을 강조해야만 헀다. 우스운 세상위에 계시는 분, 그 하느님을 가슴속에 모신 존재(바탈)가 인간인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이제 누구도 우스운 일은 그만해야 옳다. 아직도 우스운 일을 하고 실없는 말을 하고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다석은 ’그치라(말미아마)‘ 명했다. 이를 위해 須三知가 말하듯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이‘ 인 것을 알고 말씀과 제도를 알아야 할 것이다.
< 3 >
끝으로 다석은 ‘그이’, ‘말씀’, ‘제도’를 각기 위(爲), 립(立), 지(知) 세말의 6개 변형을 통해 명쾌하게 재정리했다. 위립지(爲立知), 그이가 되기 위해 서야하고 서려면 알아야 한다. 즉 ‘그이’가 되려면 말씀이 있어야 하고 말씀은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위지립(爲知立), 알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설 수 있다. 즉 제도가 있기에 사람은 누구나 말씀을 갖고 살 수 있다. 입위지(立爲知), 서면 누구든 알게 된다. 즉 말씀을 갖고 살면 제도는 절로 배운다. 입지위(立知爲), 서야만 할 줄 아는 바, 자신을 깨주는 것이 필요하다. 즉 말씀이 있어야 ‘그이’가 되는데 이를 위해 제도가 필요하다.
지위립(知爲立), 해봐야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즉 ‘그이’가 되면 제도가 무엇인지를 절로 알게 된다. 지립위(知立爲), 알기 위해서 행한다. 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그이’가 되어야 한다. 결국 爲, 立, 知, 다시말해 ‘그이’, ‘말씀’ 그리고 ‘제도’, 이 셋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 하나를 각기 다르게 말한 것뿐이다. 이를 갖고서 다석은 실없는 말과 행위가 사라질 것을 소망했다.
한글을 우리민족을 위한 天文, 곧 하늘글자로 여겼던 다석은 이 나라가 결코 우스운 나라, 남을 이기고자 거짓과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