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본문
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188 :0.1]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때로부터 부활까지, 예수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 있었던 하루 반나절 동안은, 미가엘이 이 땅에서 보내신 시간들 중에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을 매장한 과정을 설명할 수 있고 그의 부활과 관계된 사건들을 여기에 기록할 수도 있지만,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아침 3시까지, 약 36시간의 이 신(新)시대 동안 정말로 무엇이 일어났었는지 그 확실한 현상에 대한 자료를 제시할 수 없다. 주(主)의 일생 중에서 이 기간은 그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지기 직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돌아가신 후로 약 한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두 강도를 죽이는 일로 지체되지 않았다면 그의 시신이 보다 빨리 내려졌을 것이다.
[188 :0.2] 유대인 통치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그 성의 남쪽에 있는 게헤나 라는 넓은 구덩이에 던져 넣을 계획이었으며;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주(主)의 시신은 맹수들에게 뜯겼을 것이다.
[188 :0.3] 한편,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자기들이 적절하게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친구들이 그 시체의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로마 당국자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요셉은 많은 돈을 지참하고 빌라도에게 갔으며, 예수의 시신을 사유(私有) 매장지로 옮길 수 있는 허락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그 요청을 들었을 때, 그는 요셉으로 하여금 골고다에 가서 주(主)의 시신을 즉시 그에게 소유하도록 한다는 명령서에 바로 서명을 하였다. 그 동안, 모래 폭풍이 현저히 감소되었고, 강도들의 시체와 함께 예수의 시신을 넓은 공공 매장지 구덩이에 던져 넣기 위하여, 산헤드린에서 보낸 여러 명의 유대인들이 골고다로 출발하였다.
1. 예수의 매장
[188 :1.1] 요셉과 니고데모가 골고다에 도착하였을 때,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있고, 죄수를 매장하는 구덩이로 그의 시신을 옮겨가는 일을 예수의 추종자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산헤드린에서 보낸 사람들이 옆에 서서 감시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발견하였다. 요셉이 주(主)의 시신에 대한 빌라도의 명령서를 백부장에게 제시하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소란을 피우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들이 광란에 가까울 정도로 맹렬하게 그 시신을 가져가려고 하면서 행동에 옮기려고 하자, 백부장은 네 명의 군인에게 옆에 서도록 명령하였으며, 그들은 칼을 빼들고 땅에 눕혀져 있는 주(主)의 몸 좌우에 버티고 섰다. 백부장은 다른 군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화난 유대인들을 뒤로 물리치는 동안, 강도들의 시체를 치우도록 하였다. 질서가 회복된 후에, 백부장은 빌라도가 보낸 명령서를 유대인들에게 읽어주고, 옆으로 가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시신은 당신의 소유이니 소견대로 하시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내가 군인들과 함께 지켜주겠소.”
[188 :1.2]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은 유대인의 무덤에 묻힐 수 없었으며; 그러한 절차를 금지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법을 알고 있었으며, 골고다로 가는 길에서 그들은 요셉이 새로 만든 가족묘에 예수를 묻기로 결정했었으며, 그 묘는 사마리아로 가는 길 건너편, 골고다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단단한 바위를 파내서 만든 것이었다. 이 무덤에는 아무도 묻힌 적이 없었으며, 그들은 주(主)를 그곳에 눕히는 것이 적당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요셉은 예수가 죽음에서 일어나실 것을 정말로 믿었지만, 니고데모는 거의 믿지 않았다. 전에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이 사람들은 그들이 그 공회를 그만두기 전에도 산헤드린 회원 동료들 중에는 오래 전부터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예수에 대한 자기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 비밀리에 지키고 있었다. 이 날 이후로 그들은 온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가장 과감하게 전하는 제자들이 되었다.
[188 :1.3] 4시 30분경에 나사렛 예수의 장례 행렬이 길 건너편에 있는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골고다를 출발하였다. 그 시신은 네 사람이 운반할 수 있도록 세마포로 쌌으며, 갈릴리에서 온 신실한 여인 감시자들이 뒤를 따라갔다. 예수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들은: 요셉, 니고데모, 요한, 그리고 로마 백부장이었다.
[188 :1.4] 그들은 시신을 무덤 안으로 운반하였으며, 사방 10피트 정도 되는 묘실 안에서 급히 장사지낼 준비를 하였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시신을 땅에 묻지 않았으며; 그들은 실제 향유로 방부 처리하였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많은 양의 몰약과 향료를 가져왔으며, 이 액체들을 적신 헝겊으로 시신을 쌌다. 향유로 방부 처리하는 일이 끝나자,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동이고, 몸을 세마포로 감았으며 무덤 안에 있는 선반 위에 경건하게 눕혀 놓았다.
[188 :1.5] 시신을 무덤에 안치시킨 후에, 백부장은 군인들에게 신호를 보내어 무덤 입구에 돌로 된 문을 굴리는 일을 돕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은 강도들의 시체를 게헤나로 옮기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유월절 축제를 지키기 위해 슬퍼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88 :1.6] 이 날은 준비일 이었고 안식일이 곧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의 장사는 매우 급하게 서둘러 치러졌다. 남자들은 서둘러 도시로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아주 캄캄할 때까지도 무덤 곁에 있었다.
[188 :1.7] 이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여인들은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그리고 주(主)가 어디에 안치되는 지를 보기 위하여 아주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숨어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시간에 여인들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들은 예수를 장사지낼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자기들이 요셉의 집에 돌아가서, 안식일을 지내고 향료와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고 죽음의 휴식을 위하여 예수의 시신을 준비하도록 일요일 아침에 정확히 돌아오도록 그들끼리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하면서 금요일 저녁에 무덤에 머물러 있었던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클로파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또 다른 이모 마르다, 그리고 세포리의 레베카였다.
[188 :1.8]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의 요셉을 제외하고는, 셋째 날에 무덤에서 살아나실 것을 정말로 믿거나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2. 무덤을 지킴
[188 :2.1] 세 번째 날에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관심하였더라도, 그의 적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제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그가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188 :2.2] 그 금요일 밤 유월절 만찬이 끝나고 자정 무렵이 되어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가야바의 집에 모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세 번째 날에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주(主)의 단언에 대한 그들의 우려를 의논하였다. 이 회의는 산헤드린 회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예수의 친구들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그의 무덤 앞에 로마 경비병을 세워 달라는 산헤드린의 공식 요청을 가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빌라도에게 가기로 약속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위원회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각하, 나사렛 예수라 하는 그 사기꾼이 아직 살아있을 때에, ‘삼일 후에 내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그 세 번째 날이 지날 때까지 그의 추종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하달해 주실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와서 야밤에 그를 훔쳐간 후에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되는 것을 심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는 오류를 범한다면, 그것은 그를 살려둔 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사태를 일으킬 것입니다.
[188 :2.3] 산헤드린 회원들의 이러한 요청을 들은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열 명의 군인들을 경비원으로 내어주겠다. 너희들이 가서 무덤을 지켜라.” 그들은 성전으로 돌아가서, 안식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경비병을 열 명 더 보강하여, 열 명의 유대인 경비병들과 열 명의 로마 군인들과 함께 요셉의 무덤으로 행진하였으며, 무덤 앞을 지키게 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른 돌을 굴려다가 무덤 앞을 막았고, 그들의 허락 없이는 접근을 못하도록 돌 주위에 빌라도의 이름으로 봉인하였다. 그리고 이 20 명의 남자들은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지켰으며,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3. 안식일을 지키는 동안
[188 :3.1] 안식일 기간 동안 제자들과 사도들은 여전히 숨어 있었으며,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거의 1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로마제국의 각 지방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몰려 왔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이 시작되는 때였으며, 모든 순례자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고향에 전하기 위하여 성(城)에 남아 있으려고 하였다.
[188 :3.2] 토요일 밤늦게, 요한 마가는 열 한 사도들을 비밀리에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오도록 불렀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이틀 전에 자신들의 주(主)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바로 그 동일한 다락방으로 자정이 지나기 직전에 모두 모였다.
[188 :3.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같은 날 토요일 저녁 해가 지기 직전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룻과 유다를 데리고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니고데모의 집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는 자기 연락원들에게 일요일 아침 그곳에 모두 모이도록 이미 지시해 두었었다. 예수의 시신에 약품을 더 바르기 위하여 향료를 준비한 갈릴리의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188 :3.4] 요셉의 새 무덤에서 그가 영면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하루 반나절 동안 나사렛 예수께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다른 필사자들이 처하는 것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여, 내 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생각조절자가 오래 전에 개인성구현되었고 예수의 필사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실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다. 주(主)의 개인성구현된 조절자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물리적 죽음으로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 예수가 잠시 동안 아버지의 손에 의탁한 것은 인간 체험의 기록을 맨션세계로 옮겨지도록 대비하기 위하여 인간 마음을 영화(靈化)시켰던 조절자의 초기 활동에 대한 영 부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체험 속에도 구체들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필사자들의 영 본성, 즉 혼과 비슷한 어떤 영적 실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우리의 견해일 뿐이다─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위탁하였는지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88 :3.5] 주(主)의 육체적인 형체가 일요일 아침 3시경까지 요셉의 무덤 안에서 영면하였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36 시간의 기간 동안 예수의 개인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이 감히 우리들끼리 이것을 설명해 보려고 하였다:
[188 :3.6] 1. 미가엘의 창조주 의식은 육체적 육신화와 연합된 필사자 마음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최대한으로 해방되었음이 틀림없다.
[188 :3.7] 2. 우리가 아는 예수의 전(前) 생각조절자는 이 기간 동안에도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연합된 하늘 무리들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188 :3.8] 3. 육신으로의 그의 일생동안에 이루어졌던, 나사렛 사람으로서의 습득된 영 정체성, 처음에 그의 생각조절자의 직접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결코-중지되지 않은 아버지 뜻에 대한 선택으로 달성된 것처럼, 육체적 필요성과 이상적인 필사자 실재의 영적 요구사항들 사이에서 자기 스스로의 완전한 조절로 이루어졌던 영 정체성은, 낙원천국 아버지의 보호관리에 위탁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영 실체가 부활한 개인성의 일부분으로 돌아왔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돌아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주에는 예수의 혼-정체성이, 외부 공간에 있는 미조직(未組職) 영역들에 아직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과 관련하여 그들의 밝혀지지 않은 운명 속에 있는, 네바돈 최종의 무리단의 지휘를 위하여 나중에 배정되도록 지금 “아버지의 품” 안에서 쉬고 있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있다.
[188 :3.9] 4. 우리는 예수의 인간 혹은 필사자 의식(意識)이 이 36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 예수가 이 기간 동안 우주에 일어난 일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필사자 의식에 그 어떤 시간의 흐름도 없었다; 생명의 부활은 죽음의 잠을 자는 동시에 즉시 뒤따랐다.
[188 :3.10] 이상이 예수가 무덤에 계시는 동안의 지위에 관하여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전부이다. 우리가 암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관련 사실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해석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188 :3.11] 사타니아에 있는 첫 맨션세계 부활실의 거대한 뜰 안에서, “미가엘 기념관”이라고 알려진 장엄한 물질적-모론시아적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은 가브리엘이 인봉해 놓았다. 이 기념관은 미가엘이 이 세상을 떠나신 직후에 만들어졌으며, 그곳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의 필사자 과정을 기념하여.”
[188 :3.12] 그곳에는 이 기간 동안 구원자별의 최고 의회가 가브리엘의 주재 아래 유란시아에서 백여 회에 달하는 집행 회의를 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또한 그곳에는 유버사의 옛적으로 늘 계신 이가 이 기간 동안 네바돈의 우주 상태에 관하여 미가엘과 교통을 나눈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다.
[188 :3.13] 주(主)의 시신이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동안 구원자별에 있는 임마누엘과 미가엘 사이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메시지가 교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88 :3.14]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서 쉬고 있는 동안 예루셈에 있는 행성영주들의 체계 협의회에서 칼리가스티아의 자리에 어떤 개인성이 앉아 있었다는 것을 믿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
[188 :3.15] 에덴시아의 기록들에 의하면,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가 유란시아에 있었으며, 무덤에 있던 이 기간 동안 미가엘로부터 지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88 :3.16] 그리고 분명한 육체적 죽음의 이 시간동안 예수의 개인성의 모든 것이 잠들어 무의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많은 다른 증거들이 있다.
4.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
[188 :4.1] 비록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이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필사 사람의 인종적인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내시고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효력적인 접근을 제공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비록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면서, 죄 많은 사람이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물로 바친 것은 아니었지만; 속죄와 화해에 대한 이 관념들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이 죽음에는 중요한 의의(意義)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거주되고 있는 이웃 행성들에게 유란시아가 “십자가의 세계”라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188 :4.2]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신으로 한껏 필사자 일생을 사시기를 원하였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일생의 한 부분이다. 죽음은 필사자 드라마의 마지막 장(場)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의미를 거짓되게 해석하는 미신적인 실수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희들의 선의의 노력들 속에서, 주(主)의 죽음에 대하여 진정한 중요성과 참된 의의(意義)를 깨닫지 못하는 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188 :4.3] 필사 사람은 최고 사기꾼들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는 변절한 통치자들과 구체들의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로부터 몸값을 지불하고 사람을 구출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필사자 혼을 파멸시킬 만큼 우둔한 불공정성을 마음에 품으신 적이 결코 없으시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하나님께 갚아야 될 빚을 지불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하나의 희생물로서 주(主)가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188 :4.4] 예수가 이 땅에 사셨던 이전에는, 너희들이 아마도 그러한 하나님을 믿었어도 정당화되었을 것이나, 그러나 이제 주(主)가 너희 동료 필사자들 속에서 사시고 죽으신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 모세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를 가르쳤지만 ;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묘사하였다.
[188 :4.5] 동물적 본성─악을 행하려는 경향─은 유전적인 것이겠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의식적인 행동이며, 의지를 가진 창조체 개별존재가 아버지의 뜻과 아들들의 법에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다
[188 :4.6] 예수는 전체 우주를 위하여 사셨고 돌아가셨으며, 오직 이 세상 하나에 있는 인류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사시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영역들의 필사자들은 구원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세상에 증여되심으로써 그 구원의 길이 엄청나게 밝혀진 것이 사실이며; 그의 죽음은 필사자가 육신적인 죽음 이후에 생존한다는 확실성을 언제까지나 똑똑히 밝히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88 :4.7] 예수를 희생자, 대속자, 구세주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적절하지 못하지만, 그를 구원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구원(살아남음)의 길을 언제까지나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는 네바돈 우주들 안에 있는 모든 세계들의 모든 필사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더욱 낫게 그리고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188 :4.8] 너희가 하나님의 관념을, 나사렛 예수가 항상 가르쳤던 유일한 개념인, 진실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일단 파악이 되었다면, 너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원시적 생각을 당장에,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아주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시적 관념은, 하나님이 그릇된 일을 행하는 자기 백성들을 늘 따져보고 탐지하고, 그들이 합당하게 벌 받는 것을 보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의 하나님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 받기를 자원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대리로 죽는 것을 중요한 기쁨으로 여기는, 그러한 화를 내는 주권자, 엄격하고 모든-힘을 지닌 통치자로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신성한 본성 안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못하지 않다.
[188 :4.9] 속죄와 희생을 통하여 구원을 이룬다는 이 모든 개념은 이기주의에 뿌리를 두고 바탕을 두는 것이다. 자기 친구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영적 신자들의 형제신분에 대한 최고의 개념이라고 예수는 가르치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져야만 하는 것이다. 신자의 주요 관심사는 개인적 구원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며, 오히려 예수가 필사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신 것처럼, 자신의 동료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그리하여, 섬기고자하는 사심 없는 욕구이어야만 한다.
[188 :4.10] 또한 참된 신자들은 죄에 대한 앞으로의 형벌을 크게 염려하지도 않는다. 참된 신자는 오직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관심을 쏟을 뿐이다. 현명한 아버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벌을 주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그리고 바로잡아주기 위하여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화가 나서 벌주지 않으며, 응징하기 위하여 혼내지도 않는다.
[188 :4.11] 만약 하나님께서 공의가 최고를 지배하는 우주의 완고하고 율법적인 군주였다 하더라도, 그는 결백한 수난자를 죄 있는 범죄자와 바꾸는 어리석은 계획에 분명히 만족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188 :4.12]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인간 체험의 질을 높이고 구원의 길을 확대한 것과 관련하여, 그의 죽음 그 자체의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가 죽음을 맞으시면서 보여주신 당당한 태도와 비길 데 없는 영이다.
[188 :4.13] 속죄의 배상이라는 이 모든 관념이 구원을 비현실의 수준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한 개념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인간 구원은 실제이다; 그것은 창조체의 신앙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개별적 인간 체험 속에 합병됨으로써 파악될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의 사실과 그것에 상관되는 진실인 사람의 형제신분이다. 아무튼, 너희가 “너희에게 빚진 자를 네가 용서하는 것처럼 너희 빚도 용서받는다”는 것은 진실이다.
5. 십자가의 교훈
[188 :5.1] 참 목자는 자기 양떼 중에서 무가치한 것을 위해서라도 최극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의 십자가가 충만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모든 관계들을 가족의 기반 위에 언제까지나 놓는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사람은 그의 아들이다. 악을 행하는 백성에게 고난을 주고 벌을 가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는 왕의 공의가 아니라─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창조주와 창조체의 우주 관계 속에서 가장 중심적인 진리를 이룬다.
[188 :5.2] 죄인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는 비난이나 용서가 아니라, 영원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구원이라는 것을 그 십자가가 언제까지나 보여준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선하고 정의로운 생존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로 구원자이시다. 예수는 그의 사랑이 인간의 가슴속에서 사랑의 응답이 깨어날 수 있을 만큼 그토록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랑은 정말로 전달되는 속성을 가지며 영원토록 창조성을 갖는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행을 삼켜버릴 만큼 충분히 강하고 신성한 사랑을 예시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공의─단지 기술적인 옳고 그릇됨의 판단-보다 더 높은 본질특성의 올바름을 나타내셨다. 신성한 사랑은 단순히 그릇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흡수하고 실제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사랑으로 하는 용서는 자비로 하는 용서를 아주 초월한다. 자비는 악행의 죄를 한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사랑은 죄와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연약함을 언제까지나 파괴한다. 예수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유란시아에 전하였다. 그는 악에게 대항하지 말고 악을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선을 그를 통하여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예수의 관용은 그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난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은 그릇된 것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들을 올바르게 만든다. 참된 사랑은 미움과 타협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미움을 파괴한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단순한 용서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주(主)의 사랑은 갱생(更生)과 영원한 생존을 내포한다. 만일 너희가 이 영원한 갱생을 의미한다면 구원을 대속(代贖)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188 :5.3] 예수는 사람에 대한 그의 개인적 사랑의 힘에 의해서 죄와 악의 지배를 깨뜨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생명의 길을 선택하도록 해방시키셨다. 예수는 미래에 대한 승리가 자체적으로 약속된 해방을 과거에서부터 표현하였다, 그렇게 하여 용서가 구원을 마련하였다. 신성한 사랑의 아름다움이 일단 인간의 가슴속에 충만하게 받아들여지면, 죄의 매력과 악의 힘을 언제까지나 부수어 버린다.
[188 :5.4] 예수의 고난들이 십자가형 사건만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으로는, 나사렛 예수가 진지하고 격렬한 필사 실재의 십자가 위에서 25년 이상을 보내셨다.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그의 사랑, 그의 자비의 완벽한 계시를 최고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있다.
[188 :5.5] 사람이 거주하는 수백만의 거주하는 세상들에서, 도덕적 투쟁을 포기하고 신앙의 선한 싸움을 단념하도록 유혹 받을 수 있었던 진보하는 수십조에 달하는 창조체들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나서, 사람의 애타적인 봉사에 헌신으로 그의 육신화 생명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고무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188 :5.6]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승리는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 태도의 정신 속에 모두 요약된다. 그가 “아버지여,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들이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을 때, 십자가가 악에 대한 진리의 승리와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영원히 상징하도록 만드셨다. 그러한 사랑의 헌신은 광대한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으며; 제자들은 주(主)로부터 그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봉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그의 복음의 가장 최초의 선생은, 그들이 돌을 던져 그을 죽일 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188 :5.7] 십자가는 그의 동료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 그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려 하였던 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최고에 대하여 최극 탄원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그가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려고 하였던 것보다 더 큰사랑을 가질 수는 없다,─그리고 예수는 그의 적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시려는 그러한 사랑을 가졌다, 이 세상에 아직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도 더 커다란 사랑을 소유하였다.
[188 :5.8] 유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들에서도, 인간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장엄한 광경에 필사자들이 감동하였으며, 한편 그것은 천사들에게 최고의 헌신을 야기 시켰다.
[188 :5.9] 십자가는 그의 동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그의 생명을 헌신하는, 거룩한 봉사의 높은 상징이다. 십자가는 죄 많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죄한 아들의 희생과 그리고 성내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상징이 아니라, 지구와 광대한 우주에 걸쳐, 그것은 악에 대한 그들의 선한 증여와 그리하여 바로 그 사랑의 헌신을 하여 그들을 구원하였다는 상징으로 언제까지나 서있다. 십자가는, 비록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같은 죽음의 경우에도, 최고 형태의 사심 없는 헌신, 전심으로 사명활동하는 봉사에 의로운 일생을 한껏 증여하는 최극 헌신의 상징으로 서있다. 그리고 예수가 증여한 일생의 이 커다란 상징의 바로 그 모습이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 나아가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원하도록 고무시킨다.
[188 :5.10] 사고력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그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명을 바치시는 모습의 예수를 바라볼 때, 그들이 비록 최고로 심각한 일생의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그들은 도저히 다시 불평할 수 없을 것이며, 사소한 고민거리나 그들의 많은 순전히 허구적인 불평거리들의 경우에는 더욱 적을 것이다. 그의 일생은 너무나 영광스러웠고 그의 죽음은 너무나 승리에 찼으므로 우리 모두는 둘 모두를 공유하려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끌려진다. 예수의 소년 시절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엄한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의 전체 증여에는 진실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188 :5.11] 그러므로, 너희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시로서 바라볼 때, 너희가 원시인의 눈이나 그 후의 미개인의 관점으로 보지 않도록 확실히 하여라, 그 둘은 하나님을 엄격한 공의와 엄정한 법 집행의 냉혹한 주권자로 간주한다. 오히려, 예수가 그의 광대한 우주에 있는 필사 종족들에게 증여로 그의 일생의 임무에 쏟으신 그의 사랑과 헌신의 최종적인 표명을 십자가에서 너희가 보도록 확실히 하여라. 필사 구체들에 있는 그의 아들들을 위한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이 전개되는 절정을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보아라. 그리하여, 십자가는 그러한 선물들과 헌신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하는 애정의 헌신과 자발적인 구원의 증여를 표현한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께서 요구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오직 예수가 자진해서 주었으며, 그가 피하기를 거부하였다.
[188 :5.12] 만일 사람이 달리 예수를 깊이 깨달을 수도 없고 그리고 땅에서의 그의 증여의 의미를 납득할 수도 없어도, 적어도 그가 필사자로서 고통을 겪은 그러한 그의 동료관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결코 자신의 현세적 고통의 본성이나 정도를 창조자가 알지 못한다고 걱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88 :5.13]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화해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그의 아들의 끝남이 없는 자비에 대한 사람의 실현을 자극하고 이 우주의 진리들을 전체 우주에 널리 알리기 위하였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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