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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생각없는 생각(김흥호)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생각없는 생각(김흥호)

柏道 2019. 3. 1. 23:28


생각없는 생각(김흥호)

 

당포

 

생각없는 생각

 

 

저자 : 김흥호 목사

 

 

김흥호 다석 유영모 선생의 제자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과 춘원 이광수 선생으로부터 다석 선생을 소개받고 다석선생께서 세상을 뜨기까지 30년 이상 다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에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1944년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을 지냈다. 1965년 미국 버틀러 대학원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연경반 강의를 시작하였다. 1986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1998년까지 전임교수로 재직하였다. 1971년부터 12년간 144호를 목표로 개인 월간지 [사색]을 발간하기도 하였다.김흥호 선생은 하루에 한끼만 먹는 일일일생의 도를 45년째 실천해오면서 바로 다석 선생의 가르침을 그대로 생활하고 있다. 이화여대, 연세대, 감리교신학대에서 동서양 철학과 종교철학을 강의하다가 84년 이화여대를 정년 퇴임하였으며 지금도 어김없이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에 이화여대 중강당에서 동양 고전과 성경을 강독한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 계속되어온 이 주일학교는 서양의 이성과 계시 동양의 명상과 도가가 함께하고 예수, 석가, 공자, 노자가 서로 대화하는 장이다. 예수, 공자를 넘나드는 철인, 무교회주의자, 양복입은 도인으로 불리는 김흥호 선생의 종교, 과학, 철학, 예술 전반에 걸친 독자적인 해석은 지식의 경계를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근본을 물어 지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길을 밝혀준다.

 

1942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입학. 1947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정인보 선생이 설립한 국학대학에 철학교수로 채용. 1955년 이완신 목사 소개로 김옥길 선생을 만나 이화여대 신설 사회사업과의 철학 강사가 되었으며, 연세대에서 5년 간 동양 철학 강사를 지냈다. 1963년 미국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신학대학에 교환교수로 초빙되었다. 1965년 전(全) 미국 감리교단의 비솝(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 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했다. 버틀러 대학원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및 단과대 교목으로 취임,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연경반(硏經班) 강의를 시작했다. 1999년 감리교신학대학,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이화여대 대학교회 연경반, 성천아카데미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터파크 제공]

 

 

머리말

 

 

맑은 호수에 흰 구름이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이 한없이 깨끗해지면 형이상의 세계를 볼 수가 있다. 이런 관조 없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관조는 언제나 글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환상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자기의 작품을 통해서 보는 세계다. 자기만의 창작을 통해서 작품 배후에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자기의 얼굴이 비치듯이 사람은 자기의 작품을 통해서 작품 배후에 나타나는 자기 정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작품을 통해서 자기의 본체를 볼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창작은 거울이요 거울 가운데서 순수한 거울이 경전이다. 경은 경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거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호수가 잔잔하매 흰 구름이 더욱 드러나듯이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할 때 자기의 얼굴은 더욱 뚜렷해진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하는 길은 생각하는 길밖에 없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자각할 때 놀라게 되고 우주의 원리를 탐구할 때 기뻐하며 세계의 근거를 체득하였을 때 한없는 보람을 느낀다. 사람은 이러한 탐구를 통해서 계속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다. 마치 산에 올라가는 사람처럼 산이 높아질 때 짐은 가벼워지고 공기는 맑아진다. 그리하여 드디어 산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마음은 놓이고 기쁨은 넘친다. 이때에 발 밑에는 힘이 생기고 온 세계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산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실존이요 산꼭대기에서 보이는 세계가 실상이다. 사람은 생각이 끝났을 때 가장 깨끗해지며 입장을 얻었을 때 제일 거룩해진다. 일체의 바람과 욕망이 사라지고 달은 밝고 물가는 시원하다. 달은 중천에 떠오르고 찬 기운은 물결을 스치는데 이러한 깨끗한 맛을 몇 사람이나 알랴. 사람은 생각만 하면 누구나 이런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은 학문과 지식을 얻은 뒤에 스승과 진리를 찾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갔는데 학교에서 배운 이상과 세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이 충돌하여 갈등과 모순을 견딜 수 없어 인생의 암초에 좌절했을 때 인생은 구원을 부르짖고 구조선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석가가 29세에 길을 떠나고 예수가 30세에 광야로 가는 것은 다 스승을 찾고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가 되기 위하여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인생의 고행은 시작되고 인간은 자기를 맑게 하는 생각의 산을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산꼭대기에 올라간 때가 실존이요, 실존에 비친 세계가 실상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사색" (1970. 11~1982. 10)의 권두언과 수상들이다. "사색"의 권두언을 읽은 사람이 이 글은 한국사람 마음에 비친 실존의 모습이라고 말해주었다. 즉 종교적 실존과 한국적 실상이란 말이다. 종교적 실존은 내 얼굴이요, 한국적 실상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은 내 글이요, 내 글에 비친 얼굴이 종교적 실존이다. 이것이 내재 속에 초재요 월도천심처요, 내 마음에 비친 내 얼굴이다. 내 마음이란 모든 사람의 마음이요, 내 얼굴이란 모든 사람의 얼굴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 글을 통하여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맑은 호수에 비친 흰구름은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수많은 얼굴들이 이 호수의 흰구름이 되어 영원히 흘러가고 있다.

 

 

 

존재의 소리

 

 

종교적 실존

 

 

인간은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의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욕구도 모두 문화의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문화의 전통 없이 존재하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행위도 학습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은 관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며, 관념 속에서 산다는 말은 말 속에서 산다는 말이다. 사람은 배운 말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전달한다. 말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말은 우리가 배울 때에 벌써 실재와 독립된 것이다. 말은, 실재를 대표하면서 그와는 독립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는 돈과 마찬가지이다. 말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우리들의 지식의 근거가 된다.

 

 

말과 비슷한 것이 도구이다. 도구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자연을 소재로 하여 하나의 독립된 형상이 되어 인간의 목적에 부응하여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도구는 기능을 가진 관념 존재이다. 문화의 세계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기능으로 처리되어 어떤 목적에 쓰여지는 도구로서 관념 존재가 되기도 한다.

 

 

 

도구와 비슷한 것이 생활 양식이다. 인간관계는 하나의 역사적으로 성립된 생활 양식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 양식에 의거하여 인간은 살고 인간은 죽는다. 이 양식은 인간의 생활을 어느 정도 대표하면서 인간의 생활과 독립하여 실재하는 하나의 제도가 되어 인간을 규제하게 된다. 인간은 말에 지배되고 도구에 지배되고 제도에 지배되는 가엾은 존재이다. 관념과 도구와 제도는 인간의 산물인 동시에 독립된 실재가 되어 결국 인간을 규제하는 관념적 실재다. 인간에게 말이 필요하고, 도구가 필요하고, 제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말로 사상을 대표하고, 도구로 사물을 처리하고, 제도로 인간 관계를 관리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문화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사람이 말에 붙잡히고, 도구에 집착하고, 제도에 얽매이면 생각과 행동과 발전은 없어지고 만다. 마치 어항의 물이 썩듯이 말이 고착되고 도구가 낡고 제도가 노쇠해지면 어항의 고기가 죽듯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발전은 죽게 마련이다. 호수에는 언제나 샘물이 솟아올라야 한다. 물은 다시 맑아지고, 말은 다시 힘을 얻고, 도구는 다시 새로워지고, 제도는 다시 고쳐져야 한다.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젊음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은 사유적, 행위적, 창조적 존재이다. 실존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실존이 없이는 문화는 썩게 마련이다. 실존이 없으면 인간은 낡은 관념에 갇히게 되고, 인간의 문화는 병들게 마련이다.

 

 

관념은 본질적으로 현재적 존재이다. 과거와 장래의 내용도 관념이 되면 현재가 되고 만다. 더욱이 무나 비존재일지라도 그것이 관념이 되면 유가 된다. 관념의 세계는 일체가 유요, 현재이다. 문화의 터에서 관념은 실재이다. '신의 관념은 실재의 관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증명도 있고, '신은 궁극 원인으로서 실재한다'고 하는 우주론적 증명도 있고, '신은 궁극의 의미와 목적으로서 존재한다'는 목적론적 증명도 있다. 모두 관념은 실재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신은 존재한다고 증명된다. 그러나 관념이 실재라는 것은 문화의 세계에서만 설득력을 가지는 것으로, 실존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야말로 관념의 원천이다. 관념이라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터가 실재이기 때문이다.

 

 

관념만의 세계는 뿌리 없는 나무나 마찬가지다. 조만간 말라버릴 운명에 놓여 있다. 관념적 실재로서의 신은 잘못된 사유의 산물에 불과하다. 관념의 세계에서도 지식도, 계획도, 행위도 모두 이미 있는 관념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관념을 형성해간다. 지식도 기성 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경험을 거쳐 다시 지식으로 가는, 즉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 가는 과정을 밟으며, 의지도 일정한 계획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 가고 있다. 그런고로 문화적 자아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생각되는 것, 즉 관념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적 자아는 관념에서 관념으로 가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인생은 꿈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인생은 관념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인생은 일체를 관념화한다. 인간은 쾌감이나 불쾌감이라는 감정도 관념화한다. 감정이란 체험으로서는 순간적이요 계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쾌나 불쾌가 관념화될 때는 그것이 지식이 되고 기억이 되어, 쾌는 계속 추구하게 되고 인간은 관념적인 삶을 살게 되기 마련이다.

 

 

인간의 관념화가 자기에게 적용되면, 자기도 하나의 관념이 되어 주어진 관념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하고 사유하고 행위하고 생활하게 된다. 이리하여 자아는 관념의 타율 밑에 노예가 된다. 일정한 세계관, 인생관 밑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이러한 자기 이해에 의해 인생은 시작된다. 일단 자기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일정한 관념이 성립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생에서는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은 모두 수단이 되고 만다. 관념적 자아의 설정은 행복의 추구로 이어지고, 타인은 수단이 되어 경쟁은 노골화되고 사회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생을 도덕으로 해결하려 들면 관념화된 도덕의 노예가 되고, 종교로 해결하려 들면 관념화된 종교가 다시 인간의 목을 조른다. 여기에 인간은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을 부르짖게 된다.

 

 

실존이란 관념으로부터 해탈한 존재이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관념에 빠져 관념 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관념을 깨치고 실재에 부딪힌 사람을 실존이라고 한다. 보통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진리란 별것이 아니다. 관념 가운데 제일 마지막까지 붙어 다니는 관념을 결국 진리라고 믿기 쉽다. 사람은 결국 진리라는 관념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실재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요사이는 이 관념을 꿰뚫고 실재에 부딪히는 것을 직관이란 말로 쓰는 것 같다. 직관, 혹은 순수 직관이라고 한다.

 

 

옛날 동양 사람이 '도통'이라고 한 말과 비슷하다. 도에 통한다는 말도 망상을 벗고 실재에 부딪히는 것이다.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밥으로 산다. 돈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밥이라는 실재에 부딪히면 실존이 된다. 그러나 관념에 사로잡힌 문화인에게는 밥은 안보이고 돈만 보인다. 돈이 안 보이고 밥만 보이게 되기 위해서 사람은 결국 진리를 깨닫는 하나의 사건을 가져야 한다. 계시를 받았다고 하건, 성신을 받았다고 하건, 순수 직관을 얻었다고 하건, 무엇으로 표현되든 간에 인간은 한번 거듭나는 데가 있어야 한다. 천지 개벽하는 사건을 통해서만 인간은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순수 직관만이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을 가져온다. 관념이 붕괴될 때 직관된 세계는 무한히 충만된 실재의 세계이다. 순수 직관이 성립될 때 관념적 자아, 문화적 자아는 해소되고, 쾌의 지식과 경쟁의 의식과 생의 목표는 물러간다. 순수 직관으로 말의 세계는 무너지고 참의 세계가 전개된다. 관념적 자아가 무너지고 실재적 자아로 바뀔 때, 허무는 변해서 충만이 되고 나는 남과 비로소 연관이 된다. 나의 생각과 행위는 관념적 자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현실과 요청에서 출발된다. 이것을 인간은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순수 직관의 결과이다. 사랑의 근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순수 직관이야말로 믿음이다. 믿음과 사랑에는 집착이 없다. 집착은 자기 중심의 관념적 생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 직관은 관념을 초월한다.

 

 

 

실존이 초월자를 말하게 되면 그것은 종교적 실존이다. 그는 초월자를 말하고 초월자에 감사한다. 초월자야말로 자기 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실재이기 때문에 신앙은 사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부터 시작된다. 직관의 세계는 관념이 아니요, 기억될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종교적 실존은 가르쳐서 되는 것도 아니다. 가르쳐서 된다면 그것은 관념적 생이지 순수직관이 아니다. 순수 직관은 누구의 도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실존은 꽃이 피듯이 저절로 된다. 이것은 모든 관념적 자아가 무너지는 하나의 위대한 사건이다. 마치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소돔과 고모라가 없어지듯이 관념적 자아가 없어지고 만다. 생의 욕구도 행복의 추구도 남과의 투쟁도 다 없어진다. 다만 존재의 빛이 비치는 대로 삶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 길에 충만이 있다. 생각이 넘치고 말이 넘치고 글이 넘치고 기운이 넘친다. 넘치는 힘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면 원수로 보였던 모든 중생이 원수가 아니라 내 이웃이다.

 

 

종교적 실존의 표현은 그야말로 계시오 상징이다. 그 속에는 아무런 관념적 내용이 없다. 종교적 실존의 자기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새가 노래를 부르고 사슴이 뛴다고 해서, 거기에 어떤 지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약동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의 매듭을 여주는 것뿐이다. 석가가 출가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생명의 매듭을 보여준 것뿐이다. 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했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계시된 것뿐이다. 종교적 실존의 표현은 시요 상징이지 어떤 의미가 아니다. 종교적 실존의 세계는 관념이 아니다. 실재다. 그곳에는 힘이 있고 빛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의 세계가 관념으로 해석될 때 상징이 변하여 의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종교적 상징이 절대화하여 교의가 되며, 종교적 입장이 없어지고 문화적 입장만이 유일한 입장이 되어 문화적 관념성이 의미 내용으로 굳어지고 만다. 인간이 이미 순수 직관을 잃어버리고 근원적 사유와 행위가 말살될 때, 상징은 이미 상징이 되지 못하고 다만 전달된 종교적 관념만이 절대화가 된다. 그때는 무서운 독단과 어리석은 우상 숭배만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리가 절대화되어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의 새로운 죄악이 되풀이되고, 교단 안의 모순과 갈등은 종교 없는 세계보다도 더 더럽게 된다. 종교는 종교적 실존을 회복해야만 종교가 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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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읽은 책 중에서 단연 최고의 책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김흥호 목사님을 알게 되고 또한 동료로 부터 "생각없는 생각"을 빌려서 읽고 난 이후 늘 가까이 두고 싶은 도서였지만, 동료와 작별한 이후로 책을 돌려준 관계로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김흥호 선생님의 책을 파일로 구하게 되어 블로그에 올렸지만 아직도 책이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에 파일을 지우게 되었으며 도서도 구입했다. 또한 "생각없는 생각" 은 얼마나 훌륭한 글이라는 것을 방문하시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리고자 "존재의 소리" 라는 부분을 조금 가져왔다. 김흥호 목사님 같은 분께서 저작권를 문제삼지 않으실 분이기 때문에...

 

 

전규식(gsjeo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