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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빈기의《金文新攷》란? 본문

배움과 깨달음/역사와 철학

낙빈기의《金文新攷》란?

柏道 2018. 11. 10. 11:23

노아속회참고자료/금문신고(2012.3.30)

 

중국 낙빈기(駱賓基)의

金文新攷

오늘 속회 주제는「순종의 역사」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너진 성전재건의 열의를 다지지만, 주변정세가 여의치 않아 낙담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재건케 한다는 내용이다. 아시아의 평화를 사랑하는 동이족(東夷族)은 주변의 호전적 민족의 침략으로 나라 땅의 태반을 잃고 한반도 남쪽에 겨우 살아남아 있다. 뙤놈들은 ‘동북공정’이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하며 우리 고대사를 지네들 변방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 때, 중국의 낙빈기라는 양심적인 학자가 고대사를 정리하여 낸 책이《금문신고(金文新攷)》라는 책이다. 이 책은 중원을 제패한 동이족의 역사와 중국인이 자기네 글자라 하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는 소위 漢字가 동이족이 만든 글자임을 신체의 핵심부위 한국어로 하나하나 예를 들어 밝히고 있다. 중국에서는 금서(禁書)로 된 이 책을 구한 학자들의 서평을 모아서 이 자료를 만들었다. 긴 글을 줄였고, 이해를 돕기 위해 주를 달았다(오소운).

 

1.  낙빈기의《金文新攷》란?

“금문신고”는 중국인 문자학자인 낙빈기에 의해 씌어져 지난 1988년 중국에서 출간된 책으로 현재 중국의 강단학계가 신화ㆍ전설의 시대라고 단정해 놓은 4,500년 전 ‘삼황오제’ 시대인 주전 2,517년부터 2,298년까지 220년간을 고대 청동기의 금문(金文)을 철저한 “문자인류학적 해석학”을 통해 확실한 역사시대라고 논증해 놓은 방대한 연구논문이다. 이 금문신고란 책은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전적집(典籍集):중국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역사서를 통해 삼황오제 시대가 역사 실제 시대라고 논증한 저술.

 

화폐집(貨幣集):이 시대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는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었음을 논증한 저술.

 

병명집(兵銘集):무기ㆍ농기구ㆍ제기(祭器) 등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를 가려내 실제 그 시대에 사용된 기물을 통해 사회상을 조명한 저술.

 

인물집(人物集):신화나 상서(尙書)등의 간접 자료를 토대로 하지 않고, 직접 청동기에 새겨진 직접자료를 통해 신농(神農)ㆍ황제(黃帝)ㆍ전욱고양(顚頊高陽)ㆍ제곡고신(帝嚳高辛)ㆍ요(堯)임금ㆍ순(舜)임금ㆍ우(禹)임금의 실제 사적을 규명한 저술. 

 

이런 획기적인 인류학적 가치를 지니는 낙빈기의 저술은 중국 당국에 의해 800권의 출간 허락을 받고, 중국인 학자들의 냉담한 반응과 일체의 평가가 함구된 상태에서 판금, 그 중 너 댓 권이 서울의 중국 서점에 들어와 소남자ㆍ김재섭ㆍ청암 김대성 등의 재야학계에서 크게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 재야학계가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낙빈기의 저술을 숨긴 채, 작년 11월 11일 주요 일간지에서는 북경 특파원발로 “하(夏)왕조 개국은 주전 2,070년”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되고 5년간 200여명의 학자를 동원해 지금까지 주전 1,600년에 개국한 은상(殷商)이 중국 건국의 시초라고 단정한 중국의 학계가 “가상의 나라 이름”일 뿐이라고 부정을 해온 하(夏) 나라의 건국을 주전 2,070년 때부터라고 공식 선언을 하면서 그 원천(源泉) 지식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학술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 또 자칫 중국이 낙빈기가 밝힌 자료를 근거로, 주변 국가, 주로 당시 고조선이라 칭해진 우리나라 등에 패권주의적 사관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하는 학자적 양심이 그 근간이었다.  

 

가. 낙빈기가 해명한 실제 역사

낙빈기씨는 “금문신고”에서 이미

① 최초의 군주 신농이 주전 2517년부터 43년간 제위에 있다가

② 주전 2474년 소호김천(少昊金天)씨에게 물려주고, 또 소호김천은 7년간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③ 전욱고양(顚頊高陽)에게 재위를 넘긴다. 전욱고양은 47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④주전 2420년에 사위인 제곡고신(帝嚳高辛)에게 넘기고 55년간 통치하던 고신씨는

⑤자기 아들인 지(摯)에게 주전 2,36 5년에 왕위를 넘긴다.

⑥요임금(요(堯) : 주전 2357-2321)

⑦순임금 (순(舜):주전 2320-2312)

⑧ 임금(우(禹) 주전 2357-2321)

⑨ 그리고 삼황오제 시대 마지막 임금인 백익(伯益)이 통치하던 6년 만에 우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 도륙을 당하고 계가 아버지인 우임금을 시조로 세운 나라가 하(夏)나라이며, 하의 건국은 주전 2297년이라고 이미 못박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계(啓)가 아버지인 우임금을 시조로 세운 나라가 하나라이며, 하의 건국은 주전 2297년이라고 못박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확한 연대를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今文)에서 하나하나 찾아내 중국의 고대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삼황오제시대의 주역들이 바로 동이(東夷)족이라는 점이 특히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점이 아닐 수 없다. (금문의 비밀 258p) 순(舜)임금의 첫 번째 이름 호(護), 이는 한(韓)이란 글자의 시원(始原)이 된다. 그리고 공자를 비롯한 유생(儒生)들에 의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것으로 되어 있는 요순시대는 칼로써 정권을 뺏고 뺏기는 전제군주 정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금문(金文)으로써 밝혀내고 있다. 이 같은 역사 왜곡은 서구인들에게 정확한 동양고대사의 입문서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 주전 145-86?)이 쓴 “사기(史記)”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나. 신화적 종교적 권위에서 벗어나, 인류학적 분석이 가능해지게 된 “고대 아시아사”

낙빈기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오제금문(五帝金文)”은 지금까지 유학(儒學)이라는 종교적 권위 혹은 정형화(定型化)된 신화라는 권위 아래 당연시 여겨온 고대 아시아의 역사 및 사회상에 내재된 패러다임(paradyme, 이론적 틀ㆍ필자 주)을 전혀 다른 인류학적 시각으로 재조명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중요해 진다. 그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 같다.

 

문자(文字)의 시작은 지금 중국 산동성 곡부에서 나라를 열고, 문자를 만든 신농(神農 주전 2517-2475)이라는 이름 글자인【ㆍ】,【○】,【丨】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자가 단순한 상형문자로써부터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制字)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고, 또 이 시대 주역들의 이름과 관직의 명칭, 통치하는 봉읍(封邑)등이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의하는 만치 실제, 그러한 이름과 관직 등이 어떤 사회적 기능과 의미가 있었는지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음미할 수 있는 시각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실은 한자의 품위를 높이는 쾌거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신성(神聖)문자, 또 마야의 문자까지도 단순한 상형이 아니라, 고도로 체계화된 제자원리를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져, 지금까지 유독 한자만이 상형 문자로 낙후된 문자라는 오명을 씻게 한 큰 공로가 있는 것이다.

 

이 시대는 푸나루아(punalua)라는 특이한 모계제(母系制)시대였음이 밝혀졌다. 두 사람의 남편과 두 사람의 부인이 한 가정을 이루는 양급제(兩級制) 시대로 왕위는 사위에게 넘겨주던 때였다. 즉 아들이라고 알려진 자(子)는 “사위”라는 뜻이며,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남(男)으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또,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비견할 수 있는 “탁록대전”의 발단인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전쟁도 기실, 서로 누비혼인을 이루는 당시 중국의 양대 세력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들어난다. 즉 결혼은 양대 세력인 신농과 황제계열이 서로 누비사돈이 되었고, 재위(在位)는 신농계와 황제계가 서로 바통을 주고받던 때였음이 들어난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역사의 시작을 철저하게 이(夷)와 하(夏)로 분리한 시각 자체가 후대 사가들에 의해서 조작임이 들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夷)와 하(夏)의 개념 규정 자체도, 하(夏)가 중국 정통이고, 이(夷)가 주변 세력이라는 동양고대사의 고정관념도 잘못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이른 바 한자의 근원은 신농계의 언어인 “우리의 말(한국어)로써만이 그때의 글자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는 중국고대 언어연구의 방법론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즉 문법은 중국어와 한국어가 다르지만, 그 발음과 개념은 한국어에서 많이 투영되어 있고, 이는 그 시대에 한국인이 오제(五帝) 시대의 중국에 실제 핵심세력으로써 동거했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미 한자가 단순한 상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 원리에 의해서 구성된 문자의 체계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쓰는 조선(朝鮮)이란 용어가 전욱고양(顚頊高陽)이란 임금의 이름에서, 어떤 개념이 투영되었으며 또 한(韓)이란 이름이 바로 순(舜) 임금의 이름, 위(韋)에서 나왔음이 밝혀져,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으로부터, 고대의 조선(朝鮮) 및 한(韓)의 사회상을 음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고조선 및 한(韓)의 문제에서 최대의 인류학적 문제는 오늘날의 국가의 개념을 원시시대로 퇴화시켜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주권ㆍ영역ㆍ국민이 국가의 삼요소인데, 과연 상고시대에도 국가의 영역이 상호 배타적이었는가?

 

중국 안에 조선이 있을 수 없으며, 또 조선 안에 중국이 있을 수 없는가? 하는 국가의 기본개념을 검토하지 않은 채, 영토분쟁을 고대사에 투영해 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과정을 통해, 재음미할 계기가 주어졌던 것이다. 또 신주(神主)라는 글자, 제사의 제(祭)와 사(祀)가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이며, 입만 벙긋하면 들먹이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禮)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축하(祝賀)의 축(祝)이 내포한 의미, 차인(茶人)들이 죽고 못 사는 차(茶)란 글자의 내력 등 수많은 글자의 생성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이 멸시해 부르는 오랑캐 이(夷)자가 한족(漢族)의 시조인 우(禹)임금의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글자가 바로 신농계에서 발음하고 있는 사람 인(人), 임금이라는 임(任)이 변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오제금문은 문자-인류학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에, 인류학이 당연히 여기는 차원 -기존의 인식체계를 윤리적 차원에서 선입관점을 가지고 조사하는 “에틱(etic)적” 차원을 철저하게 배제하게 할 수 있게 한 중요한 학적 콘텐츠(contents)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고대 중국이 이렇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오히려 “한국인이 중국 문자의 개념과 발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이미 퇴행되어 그 원형을 잘 알 수 없는 “솟대”며, 세발달린 “삼족오(三足烏)”, 여자들이 시집갈 때 이마와 뺨에 찍는 “연지 곤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난생(卵生) 설화”의 비밀 등을 저 고대로부터 냉동되어 있는 “오제금문(金文)”으로부터 신선하게 재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오제금문(五帝金文)이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식체계의 대전환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다. 문명의 원형은 미래-기억

오제금문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대사는 하나의 문명의 원형을 품고 있고,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기억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제금문의 의의는 “미래의 기억”에 대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발전법칙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전의 토대는 분명 과거를 성찰하는 시각에서 연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끝>

 

다음 글은 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2. [金文] 이란 무엇인가?

몇 해 전까지 중국 북경에서 살았던 낙빈기(駱賓基, 1917~1994)라는 문자학자이자 소설가가 있었다. 그가 쓴《금문신고(金文新攷)》(산서인민출판사, 1988년 刊)라는 책에서 낙빈기는 5000년 중국의 역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허구로 시작된 역사라며 역사를 바로 세워야 중국이 중국다워진다고 했다.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서체인 금문(金文)은 갑골문보다 폭넓은 지역과 많은 유물로 인해 문자학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서체(書體)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금속에 주조된 특징으로 인해 금석학(金石學)의 시원과 함께 원시 한자 서체의 또 다른 한 축을 나타내게 되고, 고대 주(周)나라의 다양한 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한다. 

 

가. 금문의 정의

 '金(금)'은 고대부터 금속의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글자이기 때문에 금문의 '金'은 중국 고대 청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 틀 [거푸집]에 새겨 넣은 글자들인데, 이로 인해 금문의 다른 명칭으로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악기류의 쇠북[鐘]이나 예기류(禮器類)의 솥[鼎]의 이름에서 유래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 시절의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이전 왕조인 은(殷)나라에서 사용된 금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후대 철기시대인 한(漢)나라 때까지 금문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사용 시기로 인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골문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자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아울러 금문이 새겨진 기물에는 한 글자만 주조된 것부터 몇 백 글자가 주조된 기물까지 발견되었는데, 새겨진 내용으로는 주조된 청동 기물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표시하거나 주조된 연원이나 기물의 주인 등을 표시했고, 또한 전반적인 당시의 상황인 전쟁이나 제례(祭禮), 계약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나 사회ㆍ문화 등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다.

 

 

나. 금문의 특징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의 틀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기에, 주조되어 완성된 기물에 명확하게 글자가 보이기 위해서는 새기는 글자의 크기가 크고 굵어야 했다. 그래서 가늘고 긴 서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갑골문과 비교하면 금문은 넓고 굵은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유로 인해 동일한 글자가 여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체자(異體字)가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갑골문에 비해 금문은 회화적 요소로부터 점차 문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기호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 점차 문자의 틀이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두 개 이상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합체자(合體字)가 많아지고 있다.

 

다. 금문의 가치

무겁고 가공하기 어려운 석기에서 벗어나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청동기의 기물들은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며, 그 기물을 주조할 때 거푸집에 새겨 넣은 금문은 당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임과 동시에 문자학의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서주(西周) 후기부터 자형의 획이 곧은 직선으로 변하면서 가늘어지는 문자로서의 발전 양상을 보이는 것을 통해 한자의 새로운 발전 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낙빈기는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세워진 나라는 신농(神農)이 맨 처음이고 지금 한자의 유래가 되는 글자 또한 신농이 만든 것이라며 조목조목 정확한 논증을 해 놓은 것이다.

염소와 양을 치던 동이족(東夷族) 신농씨는 4,500여년 전 지금의 호북성 수현 역산에서 태어났다. 신농의 아버지는 고시(高矢)씨 방계 후손인 웅족(熊族) 출신인 소전(少典)이었고, 어머니는 치우(蚩尤)씨 집안의 여자 강(姜)씨였으므로 대우혼(對偶婚)적 모권제에 의해 성을 강(姜)씨라 했다. 호북에서 태어난 신농씨는 지금의 섬서성 천주산(天主山) 아래 강수(姜水)에서 살다가 성년이 되자 유웅(有熊)씨 집안의 딸 즉, 황제의 아버지와 자일급(子一級)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임사(妊巳)씨에게 장가들어 서방님(西方任)이 된다. 이리하여 신농이 산동성 곡부로 와 나라를 세운 것이 주전 2,517년인 상원갑자였다.

 

서방님(西方任)은 원래 서쪽지방에서 동쪽 지방으로 장가온 남편을 여성 쪽에서 부르는 장부(丈夫)에 대한 호칭이었다. 낙빈기에 따르면 당시의 동상례(東床禮)는 오늘부터 처갓집의 머슴애가 되어 처갓집을 잇겠다는 의례였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지금 서방님이란 말은 없어졌으나 동상(東床)이란 말은 남아 사위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장가올 때 데리고 온 작은 서방(도련님)은 새서방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고사의 혈통문제를 단순하게 지금의 가부장제적 부권제의 관념으로 바라보아 피아를 가려오곤 했는데, 낙빈기의 논조를 보면 족외우혼적 모권제인 "대우혼(對偶婚)제도"를 뒷받침하는 당시의 "누비혼인" 푸나루아(punalua)라는 특이한 모계제(母系制)시대라는 문화전통 아래, 후일 동방족과 서방족, 동이족과 서이족, 등 피아를 가늠하는 분기가 되었던 신농과 황제가 그 실은 같은 동이족 역사의 바운더리 안에 놓여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신농씨가 양족과 곰족을 대표하는 임금이 된 지 43년 되던 해(주전 2,473)에 무슨 이유에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위 황제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결국 신농은 황제에게 패해 임금 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이에 신농의 어머니계 군주인 치우가 지금의 탁록(涿鹿)에서 황제와 수년간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임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아들인 소호금천(少昊金天, 주전 2474-2468)씨가 제위를 잇는다.

 

낙빈기가 해석하는 혈통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는 신농의 모일급정비(母一級正妃)가 낳은 딸 누조(累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 사위고, 소호금천은 신농의 자일급차비(子一級次妃)가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 사위다. 낙빈기가 바라보는 세계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이므로 외가의 권력이 황제를 좌우한 것으로 본다. 황제가 도망가고 아들 소호가 제위를 잇자 신농계열에서는 소위 "구려(九黎)의 난"이 일어나 7년 만에 소호는 제위를 신농의 손자이자 황제의 외손자인 전욱고양에게 넘긴다.

 

라. 신농씨의 이름은 곤(丨)자

곤(丨=소리음=袞곤룡포 곤, 해석은 셈대나 산가지, 물러설 退,위아래로 통할 곤)은 신농씨를 의미하는 이름 글자다. "곤(丨)"자는 주전 2,517년 신농씨가 곡부태산에 나라를 열었을 당시 유통된 청동화폐인 호미모양의 조패(鉏貝)에 새겨져 있다.

 

허신은 그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아래위로 통한다" 하였고, 위로 그어서 읽을 때는 '가마(가리마) 신(囟, 정수리)'으로 읽는다 했다. 다시 말해 "丨"의 소리음은 본래 "곤"이라기보다는 "신(囟)"이며 신은 정수리로 곧 우두머리로 일본어 가미(神), 우리의 신(神)과 통한다. "丨"을 곤이라 읽는 것에 대해, "丨"의 위쪽을 하늘이라 했을 때 천신이 되고, 밑둥치 쪽을 땅이라 했을 때 곤(坤)은 토지신이 된다. 곤의 소리값이 '꽂는다'의 '꼰'에서 온 것이라면, 양(陽)을 상징하는 양물(陽物)이 꽂혀야 새 생명을 탄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지구의 중심축, 동북 간방향의 끝 쪽, 북극성에서 내리꽂히는 지구의 중력축을 의미하는 글자다.

 

노중평은 물러갈 "퇴(退)"자로 보는 것에 대해, '쉬엄쉬엄 갈 착(辶)' 자와 팔괘의 동북쪽을 뜻하는 '간(艮)'의 합성글자로, '간(艮)'이 팔괘에서 천제를 모시는 원단(圓壇)있는 제(祭)를 지내는 영산(靈山)이라는 뜻에서 '물러갈 퇴'는 동북 간(艮) 방향에 있는 천제단(天祭壇)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라 했다.

 

즉, 금문에서 말하는 열십(十)이라는 글자는 본래부터 창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숫자를 헤아리는 개념의 십이 아니라 "열린다는 열"의 뜻이었다. 그래서 "열리는 열 십"이다. "십"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 우리말의 '씹'은 '씨(種·卵)가 들어가는 입(口)'이라는 뜻으로 씨의 입이 열려 삼라만상이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특히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아버지의 씨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라 자궁이 저절로 열리는 달, 즉 열 달 만에 그 자궁의 문이 열리면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궁은 그래서 열십자의 가운데 자리인 자미원국(紫微垣局)이다. 남자는 얼굴에 7개, 아래에 2개의 구멍인 9규(竅:구멍 규)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는 얼굴에 7개 아래에 3개의 구멍인 10규(竅)를 가지고 있다. 9수는 극대분열의 완성수라면 10은 시공이 합쳐지는 10무극 완전수로 생명이 열리는 창조의 수이다.

 

낙빈기는 "문자는 본래 말이다. 고금문에서는 인(人)자를 두 가지로 읽는다. 문자를 창조한 신농(神農) 양(羊) 족이 말하는 본음은 지금의 임(任·ren)으로 읽고, 변음은 이(夷·yi)라고 읽으며, 하(夏)나라 우임금의 씨성(氏姓)이 되고, 우임금이 임금 자리에 오른 뒤, 인(人)은 또 시(尸)와 통하며 주(主)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낙빈기가 '인(人)'을 옛날 '임(任)'이라고 읽었다는 말은 우리 국어사전의 해석과 같이 자기가 가장 존경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곤(丨)"은 아래위로 통하는 하나의 님, 곧 하나님을 의미했으며, 상통천문, 하달지리한 신농의 신 자였다.

 

마. 자지(自知)와 보지(保地)

이제 다음 서술이 바로 낙빈기가 말하는 좆(祖:남근신앙)과 황실을 잇는 혈통의 중심으로 최고의 존칭으로 칭한 자지(自持), 다음 임금 자리를 이을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의 보지(保地)에 대한 결론 내용이다. 좀 길지만 상고사의 핵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핵심만 간추려 소개한다.

 

"곤(丨)"자에서 자지 또는 좆의 'ㅈ'을 뿌리로 하는 음이 나온다. "丨"자는 바로 자지이며 성인 남자의 좆이다. 조상이라는 조(祖)의 어원도 바로 좆이고 조선이라는 조(朝)의 음운도 첫획 "丨"에서 나온다. "丨"자는 신(申)자에서 신(神)으로 변해간다.

 

"丨"자가 '자지 신'으로 발전하는 것은 다음단계인 '신(申)'에서 확인된다.「설문해자」에서 "신(申)은 신(神)이다…. '확 구(臼)를 좇아서 스스로 가진 것(自持)이다(從臼自持也)"라고 하였으며, 또 "환할 신, 아홉째 지지신"이라고 하였다. 즉, 여성의 음물을 표시하는 '절구 구(臼)'가 남자의 양물을 상징하는 절구공이, 즉, '기둥 주(丨)를 둘러싸면서 "丨"자가 다음 단계인 '신(申)'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확 구(臼)를 따르고 스스로 가진 것'이란 말에서 자지(自持)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여자를 좇아(따라, 從臼) 남자(自持)'라는 뜻으로 신(申)은 여자의 음물을 쫓는 남자의 양물이라는 뜻이다. 결국 '신'에서 나온 자지라는 말은 "丨"의 순수 조선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곧 자지가 곧 신이며 스스로 사람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신농이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신(神), 하나님은 만물을 끄집어낸 이(天神引出萬物者也)이라 하는데, 신농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세상의 새로운 세상을 연(열 십) 신(神)으로 "丨"자는 '열 십' 으로도 읽는다. 조정 또는 나라 '조(朝)' 자는 '사당 묘(廟), 할아버지 조(祖)' 자와 와 음이 같고, 그 뜻 또한 '하나 아비 조, 한 아비 조, 하나님 조(祖)'와 같은데 이는 고조선 문자인 남자의 생식기처럼 생긴 '조(且·남근 모양)' 자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지 조(自持且)'의 조(祖)가 그 소리값이기 때문이다.

 

현재 섬서성 서안 근교에 있는 황제릉 앞 자료관에는 흙으로 구워 만든 남자성기가 진열되어있으며 그 아래 설명문에는 복제품 "도조(陶祖)"라 되어있다. 신농시대의 호미모양의 청동 화폐인 조패는 끈으로 꿸 수 있게 윗부분에 동그라미 모양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동그라미와 연결해서 그 아래로 "丨"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동그라미 구멍이 문자의 시작인 [ · ] 를 도형화 시킨 [○]이다. 불꽃 주ㆍ불씨 주ㆍ불핵 주ㆍ불의 알이라고 읽는 글자다. 우리민족은 태양족이며 문자는 바로 태양에서 시작된다. 염제의 후손들이면 '불의 씨'들이고 '불의 알'들이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부랄·불알'도 사실은 '불의 알, 불의 씨', 즉 '염제 신농의 씨알, 신농의 후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이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가야 등 2,000년 전 시조들이 모두 새알에서 태어난 것도 바로 염제 신농의 ‘씨알’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우리를 동이족이라 하고 동이족 중에서도 새족(鳥族)이라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낙빈기는 주(主·柱)의 'ㅈ'자 발음에서 ‘조선’이나 ‘조상’ 등 '조'라는 음이 나온다고 했다. 하나 "일(一)"이나 날 "일(日)" 또는 달 "월(月)" 등의 글자에서는 '조'라는 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상고사회신론」의<28수론>에서 조수(鳥宿)를 풀이하면서 "조(鳥)는 원래 하(夏)나라족 계통의 족칭 글자였고 본래가 훌륭한 칭호 존귀한 칭호였다. 처음에는 악의가 없었고 남아의 배뇨기관을 조(鳥ㆍ자지)라고 장난기 섞인 부름으로 하였다. 헌원족 계통의 남자는 순임금의 유신(維新) 이전에 또한 모계제 유풍을 따르고 있었으며 신농족에 데릴사위로 가서 여자 쪽과 혼인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고문화가 있는 지역에서 데릴사위 남성은 자연스럽게 족칭을 '조(鳥)'로 하였고 남자아이를 낳으면 '조'는 곧 뇨(尿:배뇨관, 즉 자지)와 연계되었다. 하나라에 이어 등장한 은(殷)과 상(商)나라는 하나라 시조 우(禹)임금을 싫어했으므로 이에 본래부터 존귀한 족칭이었던 조(鳥)를 뇨(尿)로 통용해 이에 따라 음은 '뇨'로 읽혀져 그 소리는 폄하와 배척으로 고정되었다. 중국의 발음은 조(鳥)와 뇨(尿)를 'Niao'로 발음한다. 연대가 오래되자 도리어 그것의 원래의 의미인 임금과 같은 존귀한 족칭의 옛소리(본래의 음은 수리매 응(鷹)이고 변음은 알릴 告의 소리로 읽으며 비둘기 구(鳩)의 소리가 원류가 되었다)의 뜻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동이인(東夷人)들은 자지를 '자지(自持)'로 쓰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풀어 천자나 다음 제위에 오를 왕자의 생식기에 최고의 존칭을 붙여 '자지'라고 했다. 여기에 반대되는 여자의 생식기를 '보지(保持)' 곧 ‘보호하여 지니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 임금 자리를 이를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이다.

 

이룰 성(成)이란 글짜에 우리에게만 있는 솟대와 깃발이 있다. 이는 고대 동북아인에게 “이룬다”는 개념에 솟대와 깃발이 함축되어 있음을 뜻한다. 축(祝)자는 제상(祭床) 앞에서 축을 읽는 제주(祭主)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 문명의 원형은 미래-기억

오제금문(五帝金文)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대사는 하나의 문명의 원형을 품고 있고,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기억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제금문의 의의는 “미래의 기억”에 대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발전법칙이 있는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전의 토대는 분명 과거를 성찰하는 시각에서 연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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