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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 - 엘리자베스 C. 프로펫 본문

천지인 공부/카발라

카발라 - 엘리자베스 C. 프로펫

柏道 2018. 9. 13. 11:20


카발라 - 엘리자베스 C. 프로펫                                  


                                                                 

오컬트하면 서양의 신비학을 얘기하는데 ‘서양의 신비학‘이라 하면 카발라를 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카발라는 흔히 유대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신비주의는 신과의 직접적 만남과 합일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런 집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는 십자가의 성요한, 아빌라의 테레사, 엑크하르트같은 이들이 기독교 신비주의를 대표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수피즘이라고 하는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죠. 그리고 유대교에는 카발라라고 하는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유대교는 랍비적인 유대교라고 합니다. 랍비는 유대교의 율법선생을 말합니다.


여러 종교가 외견상으로는 서로 다른 듯하고, 그 때문에 숱한 갈등이 있어왔지만, 모든 종교에서 신비주의 부분만큼은 서로 일치합니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한 뿌리에서 나왔고, 추구하는 것도 같은 곳임이 분명해집니다. 왜냐면 신비주의야말로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본질적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소수였고, 세속적인 종교 세력으로부터 번번히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함부로 공개하지 않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하거나, 암호화해서 아무나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알고 있는 것(깨달은 것) 중에는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었겠죠.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의 비밀스런 전통이 더 강화되었을 겁니다.

예외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득세한 경우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티벳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티벳마저도 중국 인민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가장 철저히 파괴하려드는 것은 바로 티벳의 문화입니다. 티벳의 문화야말로 신비주의적 토대 위에 세워진 문화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티벳 침공과 그 이후의 파괴 행위는 단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빛과 어둠의 전쟁인 아마겟돈의 연속이란 시각에서 볼 때, 티벳의 파괴는 그 동안 다른 종교에서도 진행되어온 신비주의적 가르침과 전통에 대한 파괴, 억압, 말살 행위의 일환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 안에 거하는 신성을 부정하고, 사람들이 그 신성을 깨닫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정치적, 경제적 권좌를 차지하고 앉아서 사람들이 신비적 가르침과 접하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대신에 엉뚱한 길로 가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합일은 모든 신의 아들딸들의 권리이고,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적 가르침 속에서 그에 이르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라고 하는 유대 신비주의를 얘기하기에 앞서 유대 신비주의의 뿌리를 약간 짚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신비적 추구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알려진 유대 신비주의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메르카바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에스겔 예언자가 목격한 신의 메르카바(보좌-수레)의 환상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수백년 동안 신비가들은 에스겔서 1장에 기록된 체험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에스겔서 1장의 기록을 보면;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구름 안에서 에스겔은 신의 수레를 봅니다. 그것은 황옥 같은 돌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퀴를 가진 불같이 빛나는 물체였습니다. 각각의 바퀴 옆에는 네 마리 짐승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하늘의 형상이 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1장 26-28절은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어느날 에스겔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놀라웁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 신은 그에게 일곱 계의 천국과 그분 자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은 그에게 직접 말을 하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호교류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상에 살던 한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에스겔의 이러한 신비체험은 많은 신비가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를 메르카바 신비주의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신의 보좌-수레는 고대에 출현한 유에프오나 우주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에리안들은 그 우주선을 타고 온 자들이 바로 인류를 창조한 우주인이라 하고 그들 우주인을 엘로힘이라고 부릅니다. 무지한 고대인은 그들을 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유물론에 찌든 머리에서 나온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어디서 날아온 우주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내면에 거하는 신성의 모습입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의 흔적은 기원전 3세기부터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인 에녹서입니다. 그 책은 에녹이 천국으로 올라가 여행하며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영광스런 분을 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합니다. 기독교에도 그 영향이 보이는데, 바울이 낙원에 붙들려가서 발설할 수 없다는 기록이나, 계시록에 묘사된 보좌에 앉은 이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들 신비가들은 상부 세계를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일곱 층의 천국과 그곳의 궁전을 가득 채운 천사들, 그리고 수레의 앞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불의 강, 그 강을 건너는 다리 등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목적은 보좌에 앉은 이를 뵙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비가는 그런 체험을 여행처럼 그렸고, 어떤 이는 "가슴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의 여행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내밀한 곳으로의 여행이야말로 내면에 거하는 신을 발견하는 모든 신비가들의 공통적인 보배입니다. 물론 이 메르카바 신비주의도 유대교내의 반신비주의 흐름에 훼방을 받습니다. 에스겔서는 일반에게 읽히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카발라라고 알려진 신비주의 운동은 1200년대에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출현했습니다. 14세기까지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내면의 지혜', 자 신들을 '이해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4세 기에 와서야 카발라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됩니다. 카발라의 문자적 의미는 '전통'입니다. 이는 "받음" 또는 "전달된 가르침"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은 유대 신비가들이 자신들의 교리는 수천년 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으로 전해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카발라가 시작되었는가는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합니다. 유대 신비가들은 그 기원이 아담에게까지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율법의 비밀교의적인 부분이 바로 카발라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그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카발라가 12-13세기경에 유대철학의 합리주의(이성주의)에 반발하여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학자는 카발라가 그리스-로마 시대 초기 생겨나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중세에 와서야 유대교 문헌으로 표면에 떠오른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카발라는 유대 신비주의 사상과 다른 계통의 신비주의 위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런 전통과는 전혀 색다른 요소들도 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토라를 비밀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토라의 단어들을 통해서 신은 그 자신과 우주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앎으로써 오는 커다란 빛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신성은 토라 안에서 숨겨진 형태로 계시된다. 성서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의 진정한 본성과 이 세계의 창조에 이른 신성의 비밀한 과정에 관한 힌트들이 흩어져있다. 현교적이고 대중적 의미에서 계시는 주로 신성의 의지,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람이 따라야할 계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계시는 신성의 진리에 관한 것이고, 우주의 내밀한 작용에 관한 비밀의 네트웍인 것이다."

정통 랍비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성경에 제시된 계명들을 완수할 수 있는 지에 집중하고 신의 본성과 신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탐색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반면 카발리스트들은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신비주의를 통해 바로 그 신비들을 추구하였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 세계에 살아있는 영혼의 목표는 그 영혼이 천국의 높은 곳에서 누리던 최고의 지각을 깨닫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신비주의 과학의 지식은 영혼이 신에게 붙도록 인도하는 다리였습니다.


카발리스트 중에 가장 탁월한 두 명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모세 데 레옹' 입니다. 그는 스페인의 레옹에 살았는데 바로 조하르를 쓴 사람입니다. 조하르는 광약서(The Book of Splendor)라고도 하는데 카발라적인 사상을 묘사한 최초의 책입니다. 조하르는 이렇게 평을 받았습니다. "조하르는 그 전부터 있어온 모든 카발라 사상의 위대한 요약집으로 저자 자신의 시적 상상력에 의해 재작업되고 통합된 작품이다. 앞선 세대에서 희미한 암시나 애매한 표현 속에 담겨있던 개념들은 고대 지혜의 일부로서 완전히 만개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조하르는 2세기의 신비가인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의 것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철저한 조사결과 13세기에 모세 데 레옹에 의해 쓰여진 것임이 판명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조하르가 모세 데 레옹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더 상위의 , 더 오래된 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소스는 바로 시메온 벤 요하이일 것이라고 봅니다. 즉 그의 영이 모세 데 레옹에게 조하르를 불러줬거나 아니면 모세 자신이 시메온 벤 요하이의 환생일 수도 있을 겁니다. 조하르의 어떤 부분은 자동필사에 의해 쓰여진 게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조하르는 1500부터 1800년의 300년간 성경이나 탈무드와 같은 권위를 지닌 정경으로 취급되어 왔었습니다.

또 다른 카발라의 대가는 이삭 루리아입니다. 그는 1534년 예루살렘에 태어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엘리야 예언자가 루리아의 아버지에게 나타나 카발라의 가르침을 드러낼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루리아가 여덟 살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소년은 어머니와 더불어 카이로로 이사갑니다. 그는 금새 탈무드의 천재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는 8년간의 조하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는 조하르의 신비에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나일 강가의 조그만 오두막에서 홀로 거하며 고행의 생활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일주일에 오일씩 명상하고 조하르를 공부합니다. 공부와 기도와 금식으로 2년이 흘렀을 때 엘리야가 나타나 그에게 비전을 전수해주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그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라고 지시했고, 그는 1570년에 팔레스타인의 사페드에 옵니다. 당시 사페드는 아주 번성하던 영적 공동체였습니다. 그야말로 유대인의 샹그릴라였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금새 그가 선생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가르쳤으나 2년도 못되어 죽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지은 저서는 별로 없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가 가르친 가르침을 수천 페이지나 기록했습니다.

루리아는 여러 가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 말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어떤 특정한 영적 자질, 특히 기쁨(joy)을 함양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한 분노의 죄를 피하도록 학생들에게 충고했습니다. 다른 죄들은 영혼의 "손발들"을 다치게 하지만 분노의 죄를 영혼 전체를 다치게 한다고 루리아는 말했습니다. 루리아는 말하길 분노는 지극히 높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서 떠나게 만들고, 성내는 사람은 "낯선 신“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분노의 결과는 그 누구에게 있어도 정말로 심각합니다. 억제되지 않은 분노를 발산하는 자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자기 영혼의 일부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분노가 솟아나 자신의 존재를 점령해 버리지 못하도록 매일 매일 내면으로부터 감시할 때 당신은 신성한 사랑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서 자신의 카르마나 심리적 문제들과의 만남을 헤쳐나갈 수 있을 때 당신은 최종적 만남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비가들이 추구하는 한 가지 만남, 즉 당신의 참자아와의 만남입니다.

카발라의 중심 테마는 신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신이 열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현현했다고 합니다. 그 열 가지 모습을 세피롯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열 가지로 나타나기 이전은 그야말로 무입니다. 하지만 그 무(nothing)는 단순한 없음이 아닙니다. 오늘은 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드립니다.


"무로부터 열 세피롯이 나왔다. 아홉도 아니고 열 하나도 아니고 열이다. 지혜로써 이해하고 이해로써 지혜로워져라. 그것을 시험해보고 그것을 탐색해보라" - 세페 옛치라 -

태초에 무(nothing)가 있었다. "신성한 무(Divine Nothing)"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숨겨진 초월적인 신이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세기의 하느님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창조 이전의 신을 나타내는 말로 카발리스트들이 쓰는 말은 "아인소프(Ein Sof)"입니다. 아인소프는 "끝이 없는" 또는 "무한자"라는 의미입니다. 아인소프는 최초 원인입니다. 그것은 궁극의 실상이며 - 현현되지 않은 것이고, 가늠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창조는 무형의 아인소프의 숨겨진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일련의 현현(emanation 발산)으로 전개되었다.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단 하나의 빛이 있었으며, 그 점이 빛을 내고 "거룩한 씨앗" 을 심은 자이니, 그로 인해 빛의 폭발(빅뱅)로 묘사되는 우주의 잉태가 일어났다.

조하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아인소프)의 의지가 나오기 시작함에 따라 그는 최상의 순수한 빛에 표시들을 새겨넣었다. 가장 은밀한 곳 안에서, 수수께끼의 아인소프, 무형 속의 안개로부터 어둠의 불꽃이 솟아 나와 주위로 고리를 형성하였으니, 그것은 흰빛도 아니고, 검은빛도 아니고, 붉은빛도 아니고, 녹색빛도 아니며, 그 어떠한 색도 아니었다.

재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그것은 빛을 발하는 색을 내었다. 그 불꽃 속 깊은 곳으로부터 샘이 흘러나왔으며 그로부터 아인소프의 신비스런 봉인 속에 숨겨진 색들이 아래로 그려졌다.

그것은 뚫어 헤치고 나갔으나 아직 그것을 둘러싼 에테르를 헤치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헤쳐나가는 힘에 의해 단일의 숨겨진 숭고한 점이 빛을 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점 너머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태초"라고 부르나니 - 그것이 일체의 최초 발설이다.

"태초"는 스스로를 펼쳐서 그 자신을 위한, 자신의 영광과 찬미를 위한 궁전을 마련하였다. 거기에 그것은 세계의 유익을 위한 자손을 낳을 목적으로 '거룩한 씨앗"을 심었다.

씨앗이 들어가자마자 궁전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빛으로부터 다른 빛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불꽃들이 대문들을 통해서 나아가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었다.

16세기의 카발리스트 랍비 이삭 루리아는 다른 창조설을 제시합니다. 다른 카발리스트들이 창조가 확대작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반면 루리아는 수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을 루리아는 '침첨(tzimtzum)'이라고 부릅니다. 루리아에 의하면 무한자인 아인소프는 자신의 중심점으로 스스로를 수축한 다음, 진공을 창조해내기 위해 점 둘레의 원쪽으로 물러납니다. 아인소프가 수축한 이유는 유한 세계의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서 무한자는 자신의 유한한 창조가 자신과는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진공의 가장 자리로부터 아인소프는 일체의 창조를 착수할 빛줄기를 내보내었다. 아인소프의 빛은 열 가지 신성한 발산(emanation)으로 현현되었다. 발산된 각각의 것은 특별한 그릇에 보존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그릇 중에 일부는 그 빛을 지탱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깨어져 버렸다. 그 결과 신성한 빛의 분광들과 그릇의 파편들이 흩어져 물질세계를 낳게 되었다.


과학자나 유대 신비가들의 우주론처럼 힌두교의 창조설도 "무"로부터 시작됩니다. 리그베다의 창조의 노래를 보면,

 

존재하지 않음도 없었고,

존재함도 없었으며,

공기의 영역도 없었고

그 너머의 창공도 없었다.


그 때는 죽음도 없었고

불멸함도 없었으며

밤과 낮을 가르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숨도 없어

스스로의 본성으로 숨쉬는

그 하나가 있었나니

그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암흑이 거기 있었다.

처음에 암흑 속에 숨겨진

그 일체는 무차별적인 혼돈이었다.


그때 존재하던 모든 것은

공허하고 형체가 없었나니,

따스함의 큰 힘에 의해

그 단일함이 탄생했도다.


그리고 태초의 욕구가 일어났으니

그것은 영의 원초적 씨앗이고 맹아였다.

가슴의 생각으로 구하는 성자는

비존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구약 성서 창세기의 시작부분도 한 번 봅시다. 조하르는 그 구절들이 아인소프로부터의 발산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그 때 땅은 형체가 없었고 공허하였다.

그리고 어둠이 깊은 것의 표면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표면 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 빛이 있어라."하니 빛이

있었다. 하느님이 빛을 보매 그것이 좋았더라.

하느님은 어둠으로부터 빛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하느님은 빛을 낮이라 불렀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이 오매 첫 날이었다.

 

어둠으로부터 빛을 가름은 루리아의 수축 개념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최초에는 어둠, 무(nothing)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빛이 생겨났고, 그것이 창조의 과정을 착수했습니다. 아인소프로 얘기되는 신의 개념은 유대사상에 있어서 카발라에 이르러 표면적으로 등장한 개념입니다. "아인소프는 토라, 예언자들, 경전들 또는 랍비의 말속에 암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봉사의 대가들인 카발리스트들은 그에 대한 작은 힌트를 받았다." 카발리스트들은 스스로를 봉사의 대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자신의 기도나 덕행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 회복에 중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마음은 무한자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아인소프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일체 원인의 원인이고, 모든 뿌리의 뿌리이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될 수 없고,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쓰더라도 생각은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에 있는 정의할 수도 없고 한정할 수도 없는 신의 개념은 도교의 '도'나 힌두교의 절대자 브라흐만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아인소프와 마찬가지로 '도'는 뭐라 정의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영원하며, 이름이 없습니다. “무명은 천지의 근본이다. 도의 성품을 말하자면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다. 도는 크지만 이름이 없다.”

케냐 우피니샤드는 절대자 브라흐만에 대해 이르길, " 마음이나 눈이나 귀나 말로 그에 관해 어떤 것도 얘기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눈도 귀도 마음도 그에게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만이 그 모든 기관을 통해 행위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그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

기독교 신비가는 "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일체의 지고한 원인은 지성에 의해 지각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는 말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고. 정의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아인소프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카발리스트들은 그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원초의 의지" 또는 모든 "의지의 의지"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순수한 생각" 또는 "끝이 없고 한정없는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아인소프가 미현현되고, 묘사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형태로 신을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아인소프가 그 자신을 세피롯(단수형은 세피라)이라 하는 열 가지 신의 면모로서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설명할 길 없는 아인소프는 세계 창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 자신의 수준 또는 단계들을 먼저 창조해야 했다. 여기서 세피롯이 나온다.“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빅뱅으로부터 방사된 구(공)들입니다. 그것들은 신적, 인간적 작용 반작용의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아인소프로부터 아래로 뻗어 나오는 형태로 그 패턴을 도형화했는데 그것을 '생명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의 형태로 세피롯을 묘사했는데, 그것을 아담 카드몬이라고 부릅니다.


1. 세피롯: 신성한 현현

 

신은 왜 세피롯을 창조했는가? 이사야 티쉬비는 말하길 카발리스트들은 "그 자신 존재의 깊은 곳에 고하는 숨겨진 신 아인소프는 그 자신을 드러내고, 그의 숨겨진 권능을 풀어놓고자 한다. 그의 의지는 그의 빛에서 나온 빛줄기의 발산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한다. 그 빛줄기들은 잠복상태를 깨트리고 나와 신성한 현현의 세계인 세피롯의 순서대로 배열된다" 세피롯(sephiroth, sefirot)이란 말은 히브리어 '사피르(sappir :사피이어 또는 '번쩍이는 빛'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일부 카발리스트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피롯이 우리들에 신을 조명해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른 카발리스트들은 세피롯이 '말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사퍼(saper)'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왜냐면 세피롯은 우리들에게 신에 관해 얘기해 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랍비 아리예 카프란은 세피롯의 출처인 사퍼(saper)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를 기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선포하다 또는 설명하다. 둘째로 기록하다 또는 명하다. 새로 그리다 또는 세다. 카프란은 설명하길, 세피롯의 첫 번째 기능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에 대해 명상하고 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신은 세피롯을 통해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섭리를 표현하고 명령을 내리고 사건들을 기록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피롯은 신의 책이다. 마지막으로 세피롯은 신의 영광을 그려 그것을 숫자의 유한한 영역으로 가져온다. 신은 무한하고 잠재적으로 기초적 개념의 무한한 숫자를 다 포괄하지만 세피롯은 그것들을 열로 제한한다.

세피롯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세퍼 옛치라(Sefer Yetzirah : "형성의 서" 또는 "창조의 서")라는 책에서인데, 이 책은 우주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히브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수의 카발리스트들은 그 책을 자기들 공부의 기초석으로 여기며, 그 책 없이는 카발라의 신비들이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설에 의하면 제사장 멜키지덱이 세퍼 옛치라에 기록된 가르침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했고, 아브라함은 그 가르침을 기록했거나 아니면 입으로 아들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의로움의 왕이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인 멜키지덱은 사람과 우주 그리고 신에 관한 비밀스런 가르침의 지식으로 아브라함을 입문시켰다(비전을 주었다). ... 멜키지덱은 영원토록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천상적인 사람과 지상적인 사람 간의 그 만남으로부터 후대에 카발라라고 알려진 영적인 계통이 나오게 되었다.

세페 옛치라에 나오는 세피롯의 묘사를 보자면, 십은 형언할 수 없는 세피롯의 숫자다. . 세피롯의 시작은 끝남이 없고 가이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 각자는 광대한 거리이다. . 유일하신 주 하느님, 신실하신 왕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자리에서 이 모두를 세세토록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의 용모는 번개 속에서 번쩍이는 것처럼 빛나는 불꽃이며, 볼 수도 없고, 한도 없다...그들의 끝은 그들의 시작과 같다. 그것들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숯의 표면으로부터 위로 솟아오는 빛나는 불꽃과 같다.


세퍼 옛치라는 세피롯을 '신성의 발산(divine emanation)'이라고 했고, 조하르는 그것을 신의 속성 또는 신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대리자로 묘사했습니다. 각각의 세피라는 신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다른 방법들입니다. 18세기의 카발리스트 랍비 모세 루자토는 세피롯을 아인소프의 빛의 강도를 낮추어 주는 '변압기'로 묘사했습니다. 즉 세피롯은 아래 단계의 창조 세계가 신의 거대한 빛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존속할 수 있도록 빛을 낮추어 전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세피롯은 그를 통해 변화와 변형이 일어나는 수단이다. 세피롯은 유한한 우주를 무한한 신과 이어주는 다리이다.” 라고 퐁세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세피롯과 아인소프와 관계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일부는 세피롯은 아인소프가 일을 하기 위해 만든 수단 또는 도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에센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피롯과 아인소프는 동일한 것이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견들에 대해 코르도베로는 세피롯이 신의 에센스이자 동시에 도구라고 가르칩니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신, 아인소프)은 그들(세피롯)이고, 그들이 그것이다. 불타는 숯의 불꽃처럼 그것은 나눌 수 없다." 아인소프와 세피롯의 관계에 대해 조하르는 "그것은 사방으로 빛을 비치는 등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 그 빛들을 살펴보면 오직 등 자체만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루자토는 아인소프와 세피롯에 대해 말하길, "모든 세피롯은 무한자 그 자신의 빛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과 세피롯간에는 그분이 원인이고 그것들이 결과라는 것만 빼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분께서 그들을 옷입히다'는 표현은 그분이 세피롯들을 채널로 유지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해 세피롯에 영원히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그분은 셋이고 세분은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카발리스트들은 '그분은 열이고 열은 하나이다'라고 한다고 13세기의 카발리스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는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나의 아인소프는 열 개의 세피롯이 되었을까? 루자토에 의하면 아인소프는 세피롯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무한성을 제한했다고 합니다. 즉 아인소프는 그의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빛을 감추며 동시에 그 빛을 뻗쳐 내보내서 세피롯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조하르가 묘사한 발산 과정을 보자면, 먼저 아인소프의 신비로부터 어둠의 불꽃이 나옵니다. 어둡다고 한 것은 감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꽃으로부터 "공기" 또는 "에테르적인 오라"라고 번역되는 것(케테르)에 둘러싸인 샘이 분출됩니다. 그 샘은 그것을 둘러싼 오라(케테르)를 헤치고 나가는 힘에 의해 단일의 숨겨진 점이 빛나게 되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이 두 번째 세피롯인 호크마입니다. 케테르가 호크마를 발산한 다음, 호크마는 그 근원인 케테르에 붙어 케테르에 의해 비춰지길 갈망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 분할은 "호크마의 본질적 존재가 손상되어 발산 과정이 교란되지 않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호크마는 케테르보다 낮은 진동입니다. 그래서 호크마는 베일을 뚫고서 케테르로 다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크마의 욕구가 너무 커서 그 커튼을 통해 빛줄기가 끌려와 호크마로 하여금 빛의 빛으로 빛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호크마는 자신을 뻗쳐서 궁전을 만드는데 그것이 세 번째 세피라인 비나입니다. 그리고 호크마의 빛 혹은 씨앗이 비나의 궁전 혹은 자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 하여 '빛의 폭발(빅뱅)'로 묘사되는 우주적 잉태가 뒤따르게 됩니다. 조하르는 비나를 "솟구쳐 흘러나가는 강"으로 묘사합니다. 나머지 일곱 세피롯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처럼 비나 속의 존재로 나타내 진다. 발산의 과정이 계속되면서 그들은 탄생의 신비를 통해 일곱 자녀로 발산된다." 이리하여 열 개의 세피롯이 나오는데 이들이 생명 나무를 구성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케테르(Keter : 왕관)

호크마(Hokhmah : 지혜)

비나(Binah : 이해)

헤세드(Hesed : 사랑/자비)

게부라(Gevurah : 정의/심판)

티페렛(Tiferet : 아름다움/연민)

네차(Netzah ; 승리)

호드(Hod : 광휘/장엄)

예소드(Yesod : 기반)

말쿠스(Malkut : 왕국)

 

"그대가 얘기하는 이 나무는 무엇인가? 복되신 거룩한 분의 일체 권능이 마치 나무처럼 층층이 배열되어 있도다. 그리고 물을 주면 나무가 열매를 내듯이. 그곳은 복되신 거룩한 분의 물로 채워질 때 신성의 권능을 발한다. 복되신 거룩한 분의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이다. 그것은 의로운 영혼들이다." - 바히르-


생명 나무에서 세피롯은 세 개의 원주 또는 기둥으로 집합을 이룹니다. 나무의 오른쪽 기둥은 호크마, 헤세드, 네차로 이루어집니다. 이 기둥 속의 세피롯은 남성적 양성적 극성을 가집니다. 왼쪽 기둥은 비나, 게부라, 호드로 이루어집니다. 이 기둥의 세피롯은 여성적, 음성적 극성을 가집니다. 중앙의 기둥은 꼭대기에 케테르, 중앙에 티페렛, 그 밑에 예소드, 그리고 맨 밑에는 말쿠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기둥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쪽 기둥을 '자비(Mercy)의 기둥'이라고 하고, 왼쪽의 기둥을 '심판(Judgement)의 기둥 또는 엄격함(Severity)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이 두 기둥은 우주의 상극적인 힘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기둥은 확대되는 힘을 가지고 있고, 왼쪽 기둥은 제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은 연민(Compassion)의 특성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되는데, 바로 중앙의 기둥이 그런 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의 기둥을 연민의 기둥 또는 평형의 기둥이라고 부릅니다. 연민으로써 자비와 심판의 양극단의 균형을 이루고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세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확대와 제한의 상극적이고도 보완적인 힘들은 평형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발산자로부터 나온 빛 중에 자비와 심판, 그리고 연민을 담지 않고 있는 빛은 없다. 이들 빛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서 나오는 법이 없다. 대신 세 기둥으로부터 이미 서로 엉킨 채로 나온다. 세계의 다스림을 감독하는 것은 심판, 자비, 연민의 원리의 이러한 융합인 것이다." 모세 루자토는 말했습니다.

영어로 Mercy와 Compassion은 대개 둘 다 자비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둘을 구분하기 위해 Compassion을 연민으로 번역합니다만 올바른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Mercy는 어머니가 자녀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과 같은 특질입니다. Compassion은 선생이 제자에게 주는 사랑과 같은 특질입니다. 그건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대사들 중에 관세음보살은 Mercy의 대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나 로드 마이트레야는 Compassion의 대사입니다. 관음이 신성한 어머니의 화신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나 로드 마이트레야는 그리스도의 화신입니다. 신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카발라의 가르침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조건적인 사랑이 다 있고 그것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무리 악을 행해도 용납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행한 자는 그 악업에 의해 스스로 속박당하게 됩니다. 이런 속박하는 힘이 바로 심판의 기둥이 구현하고 있는 힘입니다.

 

1) 첫 번째 트라이아드 - 케테르, 호크마, 비나


케테르(Keter: 왕관, 무)

생명 나무상의 세피롯을 구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들을 세 개의 삼개조(triad)로 나누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삼각형은 케테르, 호크마, 비나로 이루어지며, 지성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처음의 삼개조는 "세계 이전의 사고 작용의 역동적 기능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원형적 모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사고 작용을 나타낸다."라고 찰스 퐁세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신에게도 사고 작용이 있으며, 그는 바로 지금 그대를 통해 사고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던 이 마음을 품어라(그 마음이 그대 안에 있게 하라.)" 달리 말하면, 케테르, 호크마, 비나인 그 마음이 그대를 통해 생각하시고, 그대 안에서 그분의 생각의 대상을 깨닫는 신의 마음이 되게 하라.

케테르(왕관)는 생명 나무의 최상위의 세피롯입니다. 케테르와 아인소프는 영원히 공존하며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아인소프처럼 케테르는 "무(Nothing)"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의지(Will)"로 인식됩니다. 조하르에서는 케테르안에 있는 "무한한 의지"의 발현을 "거룩하신 옛 분(the Holy Ancient one)"이라고 부릅니다. 케테르는 아인소프와 가깝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고도 합니다. 조하르는 케테르를 "알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으며, 위 세계의 가장 난해한 머리"라고 했습니다.

케테르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있고, 모든 것의 총합이며, 아무런 특수성(개체성)도 갖고 있지 않은 보편성이다. -조하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왜냐하면 세피롯의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구조가 케테르 안에 잇다. 이 세피라 안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왼쪽도 없고, 오른 쪽도 없다. 그것은 "무관계의 단일체(Indifferent Unity)"라고 불린다. - 13세기의 찬가 -

 

무관계의 단일체는 불교의 "미분화된 여여함 (Undifferentiated Suchness)" 같은 겁니다. 불교에서 여여 라는 용어는 설명할 길 없는 실상을 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 실상이 절대자이며 - 궁극자이고, 걸림이 없는 것이고(unconditioned), 일체 만물의 참된 본성입니다.

 

호크마(Hokhmah : 지혜)

호크마는 두 번째 세피롯입니다. 호크마는 생명나무의 오른쪽 기둥인 자비의 기둥에서 가장 상단에 있는 세피라입니다. 호크마는 창조의 최초점 또는 원점입니다. 그것은 아인소프와 케테르의 의지 작용을 통해 발현된 것입니다. 호크마가 두 번째 세피라임에도 불구하고 카발리스트들은 호크마를 "태초,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케테르는 영원하고 시작이 없지만 호크마는 케테르의 밖으로 나타난 신성의 첫 빛줄기이기 때문이다." 조하르는 호크마는 "신성한 생각"이며 케테르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 안에서 그것은 생각이고, 그것은 내적인 것이고, 비밀하며 알 수 없다."

호크마는 창조의 청사진과 원형들을 담고 있습니다. 조하르를 인용해보면,

"비밀 중의 비밀한 이(아인소프 혹은 케테르)가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을 때, 그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하나의 점(호크마)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생각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디자인했다. 그는 거기서 모든 도안을 했다.“ 장차 존재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나온 무한하게 작은 한 점안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호크마는 빅뱅이라는 빛의 대폭발직전의 한점입니다. 호크마는 남성적 생식 활동의 원형이라서 종종 압바(Abb a), 즉 아버지로 불립니다. 따라서 호크마(지혜)는 일체 창조의 아버지입니다. 제벤 시몬 할레비라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호크마는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내적 지성"으로 작용한다. 호크마는 번득이는 천재성, 영감 또는 계시로 체험된다. 이 곳으로부터 가장 심오한 사상과 고찰이 나온다. 독창성은 그 표시이다."

 

비나(Binah 이해)

비나는 첫 삼개조의 세 번째입니다. 비나는 생명 나무의 왼쪽 기둥인 심판 또는 엄격함의 기둥의 최상단에 있는 세피라입니다. 이 세피라는 호크마의 팽창하는 본성을 견제합니다. 비나는 이해, 지성, 통찰력, 또는 분별력으로 번역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호크마가 남성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비나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입니다. 호크마가 압바,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처럼 비나는 임마(Imma), 어머니라고 불립니다. 그녀는 신성한 어머니 또는 최상의 어머니입니다. 호크마와 비나는 오리지널 양부모입니다. 그들 둘이서 나머지 일곱 세피롯을 창조했고, 그 다음으로 생명이 있고 없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했습니다. 비나는 일체의 피조물이 나온 큰 어머니의 자궁이면서 또한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이 되돌아갈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합니다.

케테르, 호크마, 그리고 비나의 첫 삼개조는 사람의 몸의 머리에 해당하고 또한 히브리 문자 쉰(shin)에 해당합니다. 그 문자는 왕관처럼 생겼습니다. 영어의 E자를 왼쪽으로 90도 기울여 놓은 것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쉰이란 문자는 불의 요소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퍼 옛치라는 천국이 불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케테르 호크마, 비나의 첫 삼개조는 두 번째 삼개조를 낳습니다.

 

2) 두 번째 트라이아드 - 헤세드, 게부라, 티페렛


두 번째 삼개조는 헤세드, 게부라, 티페렛으로 이루어지면서, 신의 윤리적 완전함과 도덕적 힘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삼개조가 지성의 영역을 나타낸다면, 두 번째 삼개조는 영혼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헤세드(Hesed : 사랑)와 게부라(Gevurah: 권능)

헤세드는 네 번째 세피라로, 헤세드라는 히브리어는 사랑, 자비, 은총, 자애로움을 의미합니다. 헤세드는 생명 나무의 오른쪽 기둥인 자비의 기둥의 가운데 위치합니다. 이 세피라는 때로 헤세드 대신 게둘라(Gedullah 위대함)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 세피라는 게부라(Gevurah)인데, 의미는 "권능", 힘, 엄격함입니다. 종종 딘(Din)이라고도 불리는데 의미는 심판 또는 정의입니다. 게부라는 생명 나무의 왼쪽 기둥인 심판의 기둥의 가운데 위치합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감정의 수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상호 보완적인 짝으로 작용합니다. 그들은 각각 사랑/자비의 극단과 정의/심판의 극단을 나타냅니다. 이 짝에서 카발라의 우주의 견제와 균형 체계를 볼 수 있습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신적인 인격의 두 측면으로 제한없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엄격한 침판, 은총과 제한이다. 심판이 사랑에 의해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딘은 호되게 채찍질하여 생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헤세드는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무제한하게 발산하고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부라는 반대로 헤세드의 확대를 저지하여 신의 선하심을 제한합니다. 카발라의 견제와 균형 체계를 퐁세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신의 힘(Power)인 게부라는 정의와 통제의 세피라이며 벌을 내릴 수 있다. 그 특성은 여성이며, 자비의 풍요함을 제한한다. 마찬가지로 힘(Power)의 가혹함은 자비에 의해 완화된다. 그렇게 둘은 조화 상태로 존재한다. 게부라는 신의지의 축소의 전형이다. 자비는 생명을 주는 힘이고, 그 작용에 있어서 늘 생산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그 자체를 표현하도록 방치하는 건 지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게부라(심판, 권력, 정의)가 창조되어야할 것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의 자애로움과 창조성이 없다면 엄격한 심판관의 역할을 하는 정의는 대상을 비존재의 상태로까지 축소시킬 것이다.( 심판은 자비를 완화시키고, 자비는 심판을 완화시킨다)

네 번째 세피라(헤세드)의 위험성은 과도하게 확장하려는 경향에 있다. 다섯 번째 세피라(게부라)는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그 위험성이 있다. 둘은 함께 중간점을 만들어 낸다. 이들 두 힘의 혼인으로부터 아름다움(티페렛)이 탄생된다. 그것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일과 비견될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 너무 엄하면 아이들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정서적으로 심하면 신체적으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엄한 부모는 아이를 왜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사랑을 주기만 해도 아이를 버리게 됩니다.

여섯 번째 세피라는 티페렛으로 "아름다움" 또는 "장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피라의 위치는 중심의 기둥인 연민(Compassion)의 기둥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생명 나무의 중앙이 됩니다. 중간의 기둥의 이름이 연민의 기둥인 것은 바로 이 티페렛의 다른 이름인 라하밈 (Rahamim 연민이란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티페렛은 자비와 심판의 양극단을 조화 속으로 가져가는 중재자입니다. 이 세피라는 온전함(wholeness)과 균형을 나타냅니다. 티페렛은 "생명 나무의 균형점이고 완벽한 대칭적 중심이다. 신성의 나무에 있어서 티페렛은 모든 심장의 심장이고, 인간의 심령에 있어서 티페렛은 그 개인의 핵심인 자아이다."라고 할레비는 말합니다. 카발라에서 티페렛은 "천국" "태양" "왕"이라고 불리며, "복되신 거룩한 분(the Blessed Holy one)"이라고도 불립니다. 티페렛은 호크마와 비나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조하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되신 거룩한 분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그는 세계의 이 끝에서 다른 끝까지 빛난다. 그는 크고도 억센 나무로, 그 머리는 천국에 이르고, 그 뿌리는 거룩한 땅에 묻혀 있다. 그 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뇨?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이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이, "나의 첫 아들, 이스라엘" 모든 믿음의 열쇠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매달려 나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헤아릴 수 없는 왕관으로 그를 축복했다. 그에게 심판과 연민의 왕관이 주어졌으니. 심판을 받을 자에게는 심판을, 자비를 받을 자에게는 자비를 주도다. 위와 아래의 모든 축복이 이 아들의 것이로다. “

이 아들은 지상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신성한 원형인 티페렛을 말합니다. 조하르는 이 티페렛과 하나가 된 사람들을 얘기하는데, 모세에 대해 말하길, "복되신 거룩한 분(티페렛)은 그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다. 쉐키나(말쿠스의 다른 이름)가 그와 함께 항상 있었다." 이 말은 "모세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티페렛까지 올라갔고" 따라서 "모세와 쉐키나(티페렛의 신성한 배필)는 실질적으로 혼인으로 결합된 상태였다"고 해석된다고 합니다.

조하르는 야곱에 대해서도 말하길, "야곱은 구원되어 완전해져서 완전한 구로 높여져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높은 단계와 전적인 완전함을 성취했다! 그는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라(출애굽기 26:28)"고 기록된 바의 중간 기둥이 되었다. '중간 띠'는 '오른 쪽과 왼쪽의 균형을 맞추고, 상부와 하부 세피롯을 결합시키는 티페렛이다. 야곱은 이제 중심을 잡고, 온전해져서 ‘티페렛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아름다움) 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티페렛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조하르는 예수를 거명하지는 않지만 유대인은 예수가 필요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그것은 조하르가 유대인은 모두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발라는 예수의 역할과 "하느님의 아들" 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요한이 "세상에 나온 모든 이를 비춘 참된 빛"이라고 썼을 때 그는 티페렛 즉 아들을 묘사했던 것인데, 그 아들 이 예수 안에서 육신으로 살아있다고 요한은 믿었습니다. 그 빛, 아들, 티페렛은 또한 말씀, 보편적 그리스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보편적 자아는 우리들 각자의 상부자아로 개별화되어 있습니다. 그 상부 자아는 우리의 내면적 그리스도 또는 내면의 메시아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더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아들, 티페렛, 보편적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간적 틀 안에 육신으로 거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열 세피롯의 열 가지 권능을 마스터했을 때 우리들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여러 환생과 비전을 거치면 육신인 상태로 티페렛의 상태를 성취했습니다. 또한 나머지 아홉 세피롯의 원리들을 다 구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 하느님의 충만함이 육신으로 거한다"고 썼습니다. 티페렛과 나머지 아홉 세피롯을 완전히 내적으로 마스터한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또한 메시아라고 불립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 Mashiah에서 나온 건데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의 그리스어 Christos에서 나온 말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열 세피롯의 열 가지 빛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 "을 말합니다. 그때 그는 바로 '생명 나무" 자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티페렛의 화신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티페렛의 화신이 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의 목표입니다. 그들이 그런 말로 표현을 하건 안 하건 관계없이. 왜냐면 모든 신비가들은 상부 자아와의 직접적인 체험과 합일을 추구하니까요. 예수를 비롯 여러 하느님의 아들들은 세피롯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고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아직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된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의 노래처럼 우리는 아인소프의 시냇물로 양육되는 생명 나무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생명 나무에 나타난 열 개의 덕을 소화하고 티페렛과 합쳐질 때 우리는 생명 나무의 열 개의 과일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나무의 잎은 마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은 다 번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심장의 심장인 티페렛, 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에서 예수는 생명 나무와 모든 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씨앗을 비유합니다. "하늘 나라는 사람이 땅에 심은 무화과나무의 씨와 같으니, 그 것은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자라면 어떠한 초목보다도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가 와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 여기서 가지에 깃드는 새는 티페렛의 가슴으로 날아올라 하느님의 아들들 사이에 피난처를 구하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많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피시안 시대의 원형적인 그리스도, 아바타르이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 안에서 예수는 지난 2000여년간 세상의 죄, 부정적 카르마를 져왔습니다. 즉 그는 우리의 비행의 완전한 결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카르마를 갚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죄의 짐을 대신 짐으로써 예수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스스로의 짐을 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 덕분에 우리의 빚은 2000여년간 연장되어 왔지만, 지금은 만기가 도래했습니다. 오늘날 피시안 시대에서 아쿠아리안 시대로 넘어가면서 예수는 하나씩 하나씩 우리 자신의 짐을 져야할 책임을 각자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짐을 져야 합니다."

루리아의 카발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메시아는 우리의 모든 행동의 결과로부터 우리와 세상을 구해주는 구세주의 역할을 맡고 있지 않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개인과 세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고 이해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보속의 책임이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기도가 그 과정을 앞당기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거숌 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는 모든 만물의 유배 상태로부터의 메시아적인 보속에 대한 상징이자 보증이 된다. 보속( Redemption : 되찾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속의 특수한 기능이 위임된 인물로서 메시아의 역할이 아니라 그대의 행위이며 나의 행위이다. 더이상 보속은 역사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재앙으로 간주되지 않고, 우리들 모두가 참여하는 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여겨진다. 루리아에 있어서 메시아의 도래는 우리 자신이 작성한 문서 위에 더해지는 서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피시언 시대를 위한 티페렛의 대표자로서 예수는 살아있는 모범이고 그리스도성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자입니다. 그는 상부자아 그리고 티페렛과 어떻게 합일을 이루어내는지를 입증해 보이기 온 것이고, 우리도 그를 따라할 수 있게 하고자 온 것입니다. 카발라를 가지고 예수의 가르침을 조명해보면 그동안 기독교나 유대인들에 의해 그릇 해석되어온 성서 구절들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 여기서 나는 예수의 인간적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적인 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보편적 그리스도, 티페렛,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여기서 보편적 그리스도는 단 하나가 아닌 다수의 하느님 아들들 안에 인격화(personify)되어 있으며, 그가 바로 우리 영혼이 신과의 합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우리를 비전의 길로 데려가는 이 입니다.

또 다른 말을 보자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예수와 다른 모든 하느님의 아들들 안에 화현된 보편적 그리스도가 바로 포도나무이자, 생명 나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유지되듯이 우리는 생명 나무를 이루는 세피롯에 의존합니다.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보편적 그리스도인 티페렛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제자는 세피롯의 풍성한 열매를 낼 것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영적 삶을 누리겠지만, 티페렛과 다른 세피롯을 떠나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달리 해석하면, 하느님의 아들(티페렛)의 연민으로 자비(헤세드)와 심판(게부라)의 특질들을 조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티페렛을 통해서 오는 온전함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의 중도가 바로 티페렛의 길입니다. 팔정도가 바로 티페렛의 길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아무도 이를 수 없다'는 말이나 '하느님의 독생자'에 대한 개념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나머지 인간은 예수와는 전적으로 다른 일개 피조물로 봅니다. 카발라나 힌두교,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본다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금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전부 죄인이라는 신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 중에 하나인 '섹스투스의 선고"라는 곳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하느님의 선한 작품이다. 하느님에게 합당한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야고보의 비밀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노니, 나의 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너희 자신이 충만해졌을 때만 들어갈 것이다. 나보다 더 훌륭해져라. 너희 자신이 성령의 아들 이 되라!" 또다른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보의 복음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나오길, "그대가 영을 보았으며, 영이 될 것이고, 그대가 그리스도를 보았으면, 그리스도가 될 것이며, 그대가 성부를 보았으면, 그대는 성부가 될 것이다."

도마 복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마셨기 때문에, 너는 내가 나누어 준 비등하는 샘에 취하게 되었다. 내 입으로부터 나온 것을 마신 자는 누구나 나처럼 될 것이다.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비등하는 샘은 아인소프와 보편적 그리스도, 티페렛의 샘입니다. 카발라에서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티페렛은 상위 세피롯을 통해서 내려오는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합당한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시고 소화하는 자는 "나, 티페렛과 같이 될 것이며, 티페렛의 화신이 내가 그대가 될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세계 종교의 신비주의들은 유일한 근원의 새암으로부터 마시는 자는 그 근원 자체가 되리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성자 사나트 쿠마라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절대자 브라흐만은 모든 피조물 안에 깨어있다. 그를 아는 자는 일체의 피조물의 가슴 속에 거하는 만유의 아버지를 안다.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과 똑같다."

중국의 주희는 말하길, "도의 실상을 알려면, 자신의 본성 안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그 안에 의의 원리가 있으니, 그것을 도라고 부른다."

사이초는 말하길, "오 부처님, 제가 당신께 절할 때, 또 다른 부처가 부처께 절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내게 알게 하신 이는 바로 당신, 부처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3) 세 번째 트라이아드 : 네차, 호드, 예소드


세 번째 삼개조는 네차(Netzah), 호드(Hod), 예소드(Yesod)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삼개조가 지성의 영역을 나타내고, 두 번째 삼개조가 영혼의 영역을 나타내듯이, 세 번째 삼개조는 자연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네차, 호드, 예소드는 세계에 대한 지배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네차는 일곱 번째 세피라이며, 생명 나무의 오른쪽 기둥 인 자비의 기둥의 맨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네차는 승리라는 의미이며, 때로는 "인내"를 뜻하기도 합니다. 호드는 여덟 번째 세피라로 생명나무의 왼쪽 기둥인 심판의 기둥의 맨 아래에 위치합니다. 호드는 "광휘" 또는 "장엄"이란 뜻입니다.

네차는 헤세드(사랑/자비)의 발현이고, 호드는 게부라(심판/정의)의 발현입니다. 이 둘은 신이 세계를 다스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예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Halevi는 네차와 호드가 행위의 작동적, 도구적 수준을 나타낸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말하길 인간의 몸에서 네차는 자동 체계를 비롯한 불수의적인 작용을 지배하고 호드는 수의 작용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아홉번째 세피라인 예소드는 "기초(Foundation)"이라는 의미로 중간의 기둥인 연민의 기둥에 속하며, 티페렛과 말쿠스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위치합니다. 어떤 카발리스트는 그것을 예소드 올람(Yesod Olam), "세계의 기초"라고 부릅니다. Matt는 "예소드는 우주의 생식적인 생명력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자디크(Zad diq 의로우신 이)라고도 불린다. '의로운 자는 세상의 기초이다'는 잠언의 말은 그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예소드는 우주의 기둥이다. 그 위의 세피롯의 빛과 힘은 그를 통해서 마지막 세피라인 말쿠스에게도 전달된다."

 

4) 말쿠스/쉐키나 - 신의 여성적 측면

열 번째 세피라는 말쿠스(Malkhut)입니다. 말쿠스는 왕국(Kingdom)이란 의미입니다. 말쿠스는 물질 우주를 나타내며, 영적 힘과 물리적 힘들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학자 숄렘은 말쿠스와 관련된 왕국(kingdom)이란 단어가 "세계 속에서의 신의 다스림(God's dominion) 혹은 힘(power)" 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사람과 관련해서 말쿠스는 육체에 해당됩니다. 생명 나무 상에서 말쿠스는 연민의 기둥의 기저부이고 생명나무 전체의 기저부에 위치합니다. 말쿠스는 쉐키나(Shekhinah 신성의 현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신의 모성적인 측면입니다. 이는 신성의 에너지를 우리의 세계로 내려보냅니다. 그 에너지가 우리를 유지시켜주고 양육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말쿠스는 세피롯의 사다리를 통해 아인소프에게로 올라가는 상승길의 관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나무 안에 있는 신의 힘에 접근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은 말쿠스에서의 현현을 통해 자신의 완성된 개별화(individuation)에 도달한다. 거기서 신은 '나(I)'라고 불린다. 이러한 개념은 발현의 과정을 통해서 '무(아인소프/케테르)가 '나(인격성:personhood )'로 변모했다'는 말로 요약된다."

무(無)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인(ayin)'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히브리 문자를 다시 배열하면 '나'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니(ani)'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아인(무)이 세피롯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펼쳐져서 결국 말쿠스의 아니, 즉 신성한 에고, 나(I)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말쿠스는 두 세계의 연결부입니다. 상부 세계에서 볼 때 말쿠스는 생명 나무의 가장 아래에 있는 세피라입니다. 우리의 세계인 하부 세계에서 볼 때 그녀는 가장 높은 지점입니다. 따라서 말쿠스는 세피롯의 신성한 힘들이 이 세계 속으로 흘러드는 통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우리들이 신에게 이르기 위해 거치는 문의 역할도 합니다. 그녀는 또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신의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말쿠스는 흔히 쉐키나(Shekhinah : Divine Presence 신성의 현존하심)로 불립니다. 전통적 유대 사상에서 쉐키나는 이 세계 안에 계신 신의 현존이고 그 활동입니다. 카발라는 여기에 중요하고도 새로운 차원을 더합니다. 즉 쉐키나는 신의 여성적 측면이 됩니다. 학자 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의 여성적인 요소의 발견이야말로 카발리스트들이 취한 가장 중요한 진전 중에 하나이다. 엄격한 랍비적, 비-카발리스트적인 유대인들로부터 자주 극단적인 우려를 사 온 창조의 신적인 안내자로서 쉐키나의 여성적 원리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개념은 유대 민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것은 유대 사상 안에 여전히 잠재해있는 원초적인 종교적 충동 중에 하나를 카발리스트들이 벗겨내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부 세계의 가장 높은 점이자 시작점으로써 쉐키나는 세계의 어머니이자 그 지배자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특히 이스라엘의 자비로운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우리 세계를 낳고 유지시켜 줍니다. 그녀는 상과 벌을 내립니다. "창조는 쉐키나의 작품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피조물을 돌보신다."

비나와 말쿠스 둘다 신성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만, 비나는 "상부의 어머니" 또는 "상부의 쉐키나"이고 말쿠스는 "하부의 어머니" 또는 "하부의 쉐키나"입니다. 카발라에서 쉐키나는 영혼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신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신비적 몸을 말합니다. 말쿠스/쉐키나는 호크마와 비나의 딸입니다. 또한 말쿠스/쉐키나는 티페렛/ 왕의 신부이자 배필입니다.

호크마와 비나의 남성적 여성적 세피롯이 짝을 이루듯이 티페렛과 쉐키나는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두 짝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호크마와 비나는 중단됨이 없는 결합 상태에 있는 반면 티페렛과 쉐키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쉐키나로 하여금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유배를 떠나게 했습니다.

전통적 유대 사상도 유배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만, 신의 여성적 측면으로서 쉐키나에 대한 카발라의 해석은 그 유대 개념에 독특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탈무드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유배된 곳이면 어디든지 쉐키나가 따라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학자 숄렘은 이를 가리켜 말하길 " 탈무드에서 그것은 신의 현존하심이 유배된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리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만, 카발라에서는 신 자신의 일부분이 신으로부터 유배된 것을 의미한다"

조하르는 그것을 다음 같은 말로 그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들에게 화가 난 왕과도 같다. 왕은 벌로 아들에게 그에게서 떠나 머나먼 땅으로 가라고 명했다. 왕비가 이를 듣고서 말하길, "나의 아들이 머나먼 땅으로 가버리고, 왕은 그를 궁궐에서 추방했으나 나는 그를 버리지 않으리라. 우리 둘 다 왕궁으로 되돌아오거나 아니면 둘이 함께 다른 곳에서 살리라."'

신은 추방된 백성들에게 그가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보증으로 쉐키나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의 연인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하르는 쉐키나에 대한 신의 헌신을 "가죽일을 하는 사람들의 거리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남자"에 비유합니다. 그녀가 거기에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연인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향을 파는 사람들의 거리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향기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된 것입니다.

카발라는 티페렛과 쉐키나의 결합 상태의 교란을 우주적 대재앙으로 묘사합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별은 신성한 힘들이 이 세계로 흘러드는 것을 멈추게 했기 때문입니다. 말쿠스는 아인소프로부터 흘러오는 신성한 힘이 이 세계로 전달되는 마지막 세피라인데, 추방된 이후로 "창조 세계로 전달해야할 상부의 힘들과의 항상적인 결합 상태로부터"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조하르는 이러한 우주적 불균형의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쉐키나가 유배지로 갈 때, 모두다 울며 비탄과 애도의 노래를 지었다. 그녀가 그 전 상태와 다른 변화를 겪은 것처럼 그녀의 남편(티페렛)도 그랬다. 그의 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성전은 파괴되었고, 천국들은 본래의 빛으로 빛나지 않았다. 문제의 비밀은 축복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그곳에만 거한다는 것이다."

신의 여성적 측면의 유배와 더불어 천국의 수문들은 글자 그대로 닫혀버렸습니다. 세피롯으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만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13세기의 카발리스트인 랍비 기카틸라는 티페렛과 말쿠스의 이별로 인해 야기된 재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창조의 시작 초기에 쉐키나의 에센스가 하부 세계에 있었다. 그녀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은 결합되어 있었고, 서로를 완전케하며, 서로를 채우고 있었다. 수로와 샘들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흐름을 이루며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 그분에게 복이 있으라, 께서는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것을 채우셨다. 그런데 아담이 와서 죄를 지었다. 선들은 훼손되었고, 수로들은 부서졌고, 연못들은 물이 끊어졌다. 쉐키나는 물러갔고, 결합은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면 누가 무엇이 티페렛과 쉐키나를 재결합시켜 이 세계로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이 다시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카발리스트들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답은 바로 우리들 각자입니다. 쉐키나와 티페렛의 영구적인 결합은 이 세계의 선과 죄의 균형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조하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에서 의로운 자들이 늘어날 때 대지(쉐키나)는 결실을 내고 모든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늘어난다면, 기록된 바와 같이, "물이 바다에서 사라질 것이다." 쉐키나는 위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모으고, 모은 모든 것을 가두어두고서 이슬처럼 몇 방울만을 흘려 보낸다. 왜냐하면 아래의 믿음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그녀 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발견한다면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방면으로 빛을 쏟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한정없이 그녀에게 선물들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한하고 그녀를 제한하여 그녀를 막혀있게 하는 것은 아래 세계에 있는 자들이다."

쉐키나와 티페렛의 분리를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남자와 여자의 성스런 혼인이라고 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인간적 혼인이 쉐키나와 티페렛의 신적인 혼인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혼인한 신비가들은 자신들의 성적 결합이 티페렛과 쉐키나의 신성한 결합을 기념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조하르는 " 모세의 부모의 욕망이 쉐키나를 결합시키는데 모아졌다."고 합니다. 모세 콜도베로에 의하자면 그 말은 "그들의 욕망은 쉐키나를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티페렛에 집중했고, 그의 아내는 말쿠스(쉐키나)에 집중했다. 그의 결합은 쉐키나와 합쳐지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는 거기에 대응해서 쉐키나가 되는 것에 집중하면서 그녀의 남편인 티페렛과 결합한 것이다."

"따라서 카발라는 독신주의를 거부하고 혼인을 육체의 유혹에 대한 양보로 보기보다 가장 거룩한 신비로 본다. 모든 참된 혼인은 신과 쉐키나간의 결합의 상징적 실현이다."라고 숄렘은 말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개별적으로 말쿠스/쉐키나와 특별한 관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울 때 쉐키나는 우리와 함께 머물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의로운 신비가는 "쉐키나의 수족과 같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죄인은 자신의 몸을 훼손시켜 "배필(쉐키나)이 거할 곳이 없게 한다"고 합니다

조하르는 모세와 쉐키나를 파트너로 묘사했습니다. 쉐키나는 그를 떠난 적이 없었고, 그녀는 그와 항상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이의 전형입니다. 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쉐키나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까? 탈무드는 이 질문을 웅변적으로 제기한다. "인간이 쉐키나 뒤로 걸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쉐키나와 합쳐지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신을 모방해야 한다. 카발라는 그보다 더 대담하다. 조셉 기카틸라의 말에 의하자면 "랍비가 말한대로 인간이 쉐키나와 합쳐지는게 가능할까? 그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말쿠스/쉐키나와의 결합( cleaving to Malkhut/Shekhinah) 은 세피롯의 힘에 접근하는 열쇠입니다. 조하르는 쉐키나야말로 티페렛과 모든 세피롯에 이르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생명 나무[티페렛]에 이르는 길은 누구뇨? 그것은 위대한 배우자이다. 그녀는 저 위대하고도 강력한 나무에 이르는 길이다. 이 문(말쿠스)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제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높고도 은밀하고도 숨기워진 거룩한 왕 (호크마)이 있어 스스로를 위해 여러 문을(세피롯)을 만들었으니, 그 문들의 맨 끝에 특별한 문을 만들어 놓은 것과도 같다. 그는 말하길,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자 원하는 누구에게나 이 문 이 내게로 인도하는 첫 문이 될 것이다. 하나를 취하는 자는 누구나 다른 것들도 취하리니, 그것은 모두가 하나라. 왜냐하면 그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티쉬비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쿠스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이미 최고의 호크마에 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세피롯의 체계는 통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쿠스의 문을 열 것인가? 카발라에 의하자면 그 문을 여는 열쇠는 기도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뒤에 가서 좀 더 얘기하기로 하고 신의 여성적 측면인 신성한 어머니와 우리와의 관계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첫 번째 선생입니다. 영원한 자궁이신 그녀는 당신이 빛의 옷을 입고 대중앙 태양으로부터 나온 이래로 당신을 낳아왔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하부 세계로 내려갈 필요가 있게 되자 그녀는 당신의 여행을 위해 다른 체(體)들을 지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첫 숨을 쉬었을 때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눈이었고, 당신의 존재에 넘쳐난 것은 그녀의 빛나는 사랑의 미소였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새 몸으로 들어갈 때 첫 번째로 환영의 말을 한 "태초의" 말씀입니다.

어머니이신 신은 당신의 형체를 지었고, 이 세계를 운항해갈 도구들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봉인해두었습니다. 그것은 가슴의 빛으로 일광욕을 하기 전까지 잠복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생명의 샘입니다. 물질 우주상에서 신성한 어머니의 속하지 않은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녀는 문명을 유지하고 거기에 부속된 생의 세세한 모든 것을 유지시킵니다. 그녀는 과학에도, 기술에도, 정치에도, 경제에도, 건강, 교육, 예술에도 환경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녀는 불이고 바람이고, 물이고 흙입니다. 그녀는 자연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성한 어머니가 우리에게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전례 없이 높은 비율로 낙태를 하고,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시달리며, 우리의 아이들은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리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와 가정에서도 폭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정부와 경제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뼈대가 없는 지라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들을 기도와 봉사를 통해 신성한 어머니에게 붙음으로써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신성한 어머니를 인격화(personify)해 온 이들에게 강력한 헌신의 관계를 세움으로써 우리의 기도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의 어미니이신 성모 마리아, 힌두교의 여신인 파르바티, 락슈미,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 그리고 리지웨의 성녀 데레사같은 이들이 그런 위대한 빛들입니다.

신성한 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많은 화신들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함은 생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여성적 원리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여성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섬세한 쪽입니다. 그것은 내면의 아이(inner child)이며 영혼입니다. 신성한 어머니에 붙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 우리의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비나와 말쿠스, 여성 그리고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계신 여인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머니의 아들, 신성한 남아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의 그리스도적인 에센스는 나와 그녀의 자녀들의 가슴 속에서 결실 을 맺어가고 있는데. 그녀의 자손, 신성한 남아의 빛을 지니고 있으나 박해를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신성한 어머니의 자녀와 그녀의 모든 창조 세계를 양육하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심령안에 남아있는 미해결된 갈등들은 신성한 어머니와의 불화로 귀결됩니다. 그런 갈등들을 푸는 것은 신성한 어머니와 화해하는 길입니다.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관계는 이 생에서 지상적인 어머니에 대한 관계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 때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신성한 어머니와 친해지고 그녀의 평화가 당신 자체 속의 다툼을 잠재우게 하십시오. 우주적 자궁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지키고 있는 생명 나무를 통한 재탄생을 알도록 하십시오.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고, 그녀와 함께 당신의 심령을 치유하고, 봉사와 선행을 지구를 치유함에 따라 점차로 신성한 어머니는 말쿠스/쉐키나의 문을 당신에게 열어줄 것입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게 자비와 정의와 연민을 펴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가슴을 열 때 그녀의 가슴에 이르는 문을 열어줍니다. 일단 말쿠스에 이르는 문이 당신에게 열리고 나면 당신은 비전을 하나 하나 통과하면서 다른 세피롯들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말쿠스/쉐키나의 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파멸로 이르는 문고 넓고도 커 많은 이들이 그리로 가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도 작아 그걸 찾는 자가 적다."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신성한 어머니는 당신이 말쿠스/쉐키나의 문을 지나 그녀의 발에 입맞출 수 있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생명의 사다리의 첫 다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십시오. 예소드의 다음 같은 부름을 듣게 될 때까지, " 좀더 높이 올라오라. 너는 말쿠스/쉐키나에서 몇 가지 작은 일에 충실했도다. 예소드의 문으로 들어가라. 나는 네가 많은 것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

 

5. 기타

 

준(準) 세피라(The Quasi Sefirah), 다아트(Da'at)

생명 나무 상에는 비밀스런 특성을 지닌 세피라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을 다아트( Da'at) 라고 하며, 그 의미는 "지식"입니다. 다아트는 생명나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합니다. 그것은 케테르 (왕관)와 티페렛(아름다움/연민) 사이에 위치하고 호크마(지혜)와 비나(이해) 아래에 위치합니다. 숄렘은 다아트가 호크마와 비나의 조화의 일종으로 그 둘 사이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다아트를 비(非)-세피라 또는 준(準)-세피라로 봅니다. 그것은 별개의 세피라가 아니라 "케테르의 외적인 측면"입니다. 할레비는 다아트를 신적인 영감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다아트는 그 어느 곳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으로부터 직접 오는 지식이다. 그것은 지혜(호크마)의 드러남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목격될 뿐만 아니라 알려진다. 그것은 이해(비나) 또는 깊은 숙고로부터 나오는 것과도 다르다. 최고 세피라의 아이인 다아트는 관측일 뿐만 아니라 되어짐(becoming)이다."

일부 전통에서는 다아트를 기적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봅니다. 이삭 루리아의 제자들 중에 일부는 다아트라고 불리는 비밀스런 특성을 가진 빛을 불러내려 공중으로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뇌전( Lighting Flash)

케테르로부터 말쿠스로 세피롯이 현현하는 모습을 그린 도표 중에 '뇌전( Lightning Flash)'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세페 옛치라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양은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으며, 볼 수도 없고, 그 끝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세피롯이 빛을 발한다는 의미거나 세피롯은 섬광같은 순간동안만 볼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또 다른 카발리스트들은 '뇌전( Lightning Flash)'이 세피롯의 현현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신성의 힘들이 생명 나무를 통해서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것을 묘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 나무의 패턴은 '발현하는 모든 것의 모델이다. 생명 나무 안에 펼쳐진 관계들은 존재 전체의 근저에 있다. 따라서 세피롯의 성질들은 어떤 분야의 지식에서도 볼 수 있다. 생명 나무의 세피롯들은 신성의 전류가 흐르는 회로의 기능 체계라고 볼 수 있다."고 할레비는 말합니다. 신성의 섬광은 확대하는 성질의 자비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부터 수축적인 심판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 다시 조화시키는 성질의 연민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 계속해서 지나갑니다. 섬광은 케테르에서 시작하여 호크마와 비나로 해서 다아트로 흘러갑니다. 다음으로 그것은 확장적인 세피라인 헤세드로, 그 반대적인 게부라로, 다시 티페렛의 균형으로 갑니다. 여기서 다시 네차, 호드, 예소드 그리고 말쿠스에 이릅니다.

'뇌전( Lightning Flash)'이 세피롯을 지나갈 때 일어나는 창조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할레비는 책을 쓰는 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케테르(왕관)는 창조적 원리라고 합니다. 아이디어는 호크마(지혜)속에 품고 있지만 아직 형태가 없습니다. 비나(이해)안에서 아이디어는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저자는 예를 들어 어떤 주제에 집중된 책을 쓰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 아이디어는 몇 년 동안이고 심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아트(지식)를 통해 집중됩니다. 헤세드(자비/사랑)에 이르면 작가의 내부에서 형성되어 오던 창조적 아이디어들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게부라(정의/심판)를 통해서 책에 어떤 것을 포함시킬 지 판단하고 잽니다. 그리하여 헤세드의 모든 아이디어들을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개념으로 만듭니다. 책이 형태를 갖게 됨에 따라 그 뚜렷한 본질 또는 특질인 티페렛(아름다움/연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네차(승리)는 책이 전체적으로 쓰여지는 지점입니다. 호드(광휘/장엄)를 통해 신체의 생명력은 펜이 종이 위로 움직이게 합니다. 예소드(기반)는 집필을 체계화하고 그 사람의 필체로 다듬습니다. 말쿠스(왕국)는 책의 물질적 발현입니다. 이상의 예는 인간적 생명 나무 안에 그려져 있는 '뇌전( Lightning Flash)' 대략적인 윤곽입니다. 우주의 모든 창조의 과정은 동일한 패턴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할레비는 얘기합니다.

 

내면 세계와 세피라

"그는 오른 손을 뻗어 위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왼손을 뻗어 이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이 세계를 위의 세계와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위에 존재하는 무엇이나 아래에 상응하는 짝을 갖게 되었다.“ -조하르-

 

세피롯은 모든 창조의 '신성한 모델'이며, 우리 자신은 그 열 개의 세피롯을 담고 있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합니다. 사람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것은 "위에 있는 형태를 따라" 창조되었다. 신은 상부 세계의 패턴에 따라 하부 세계를 지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단일한 개체 안에서 전체적인 하나를 형성한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세피롯은 여러 가지 다른 수준에서 당신과 개별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세피롯은 당신의 내적, 영적 존재의 운형이면서 동시에 육체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케테르(왕관)는 우리의 신적인 에센스입니다. 또한 자유의지를 나타내며, 신적인 현존이자 제 일 원인으로서 신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나타냅니다. 호크마(지혜)는 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미분화된 사고입니다. 호크마는 오른쪽 뇌와 상호 관련되어 있고, 독창성이나 영감, 계시 등으로 발현됩니다. 비나(이해)는 왼쪽 뇌, 추론하고 식별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호크마와 비나의 내적인 사고 작용으로부터 한 단계 내려온 다아트(지식)는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또한 영적인 지식이며, 신의 전지함(Omniscience)과 만유적인 의식입니다.

헤세드(사랑/자비)는 사랑, 관용, 자비,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내줌으로 나타납니다. 헤세드는 "언제나 신을 열망하는 우리의 빛나는 본성"이라고 합니다. 게부라(정의/심판)는 규율, 분별과 참된 판단입니다. 아리에 카플란에 의하면, 게부라는 자아를 극복하는 능력이나 힘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완고하며, 무관심하고 고립적이고 완전히 자기 충족적으로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티페렛(아름다움/연민)은 우리의 가슴 또는 핵심이며, 우리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외적 아름다움과 조화, 균형, 평정으로 발현됩니다. 카프란은 "티페렛은 균형잡힌 내줌이며, 조화로운 관계를 창조해내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네차(승리)는 우리의 본능적이고도 불수의적인 작용들을 지배하며, 우리의 건강을 유지시켜 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성취도나 영적 힘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균형을 잃었을 때 네차는 지배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호드(광휘/장엄)는 반대로 수의 작용에 해당됩니다. 호드는 우리의 배우고 소통하고 제어하는 부분입니다. 균형을 잃었을 때 호드는 수동성이나 굴종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소드(기반)는 영적 탄생, 육체적 출산과 에고의 기반입니다. 예소드는 육체적 정신적 쾌락의 자리입니다. 예소드의 특성을 마스터함으로써 의인은 영의 세계들을 파고들어가 신과의 합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카프란은 말합니다. 말쿠스/쉐키나(왕국/ 신성의 현존)는 우리의 육체와 수용성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세피라로서 말쿠스는 상부 세피롯의 현현을 받아들입니다. 말쿠스는 영적인 힘과 물리적인 힘들이 만나는 점입니다.

 

아담 카드몬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은 모든 사람은 '신적인 원형'으로 '원초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세피롯이 처음에 아인소프로부터 현현되었을 때 아담 카드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카발리스트도 있습니다. 아담 카드몬은 신성 그 자체의 숨겨진 형상이라고 합니다. 아담 카드몬은 양성(兩性)으로, 그 안에 남성적 여성적 힘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담 카드몬을 그릴 때 등이 보이도록 그리는데, 이는 출애굽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신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자 신은 다음같이 말하며 자신의 등만 모세에게 드러냅니다. "너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를 보고서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등을 볼 것이나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케테르, 호크마, 비나는 아담 카드몬의 머리입니다. 준 세피라인 다아트는 아담 카드몬의 얼굴과 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 번째 세피라인 헤세드는 오른팔이고 게부라는 왼팔입니다. 티페렛은 아담 카드몬의 몸통이고 네차는 오른쪽 다리, 호드는 왼쪽 다리입니다. 예소드는 남자의 성기에 해당됩니다. 말쿠스는 아담 카드몬의 발이나 입으로 그려지며, 때로는 아담 카드몬의 그림 상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삭 루리아는 아인소프가 빛줄기 또는 선을 뿜어내어 그것이 일련의 동심원의 구( 그 구가 세피롯임 )를 형성했을 때 아담 카드몬의 몸이 창조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리아의 가장 가까운 제자인 랍비 하임 비탈은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인소프와 가장 가까운 첫 번째 구를 원초적 인간의 케테르라고 불린다. 그 다음 직선은 잠깐 계속되다가 물러나 다른 구 안에 또 다른 구를 형성하였다. 이 구를 원초적 인간의 호크마라고 부른다.

이 과정은 모든 세피롯이 전개될 때까지 반복되었고, 이 모든 구를 함께 결합시키고 있는 것은 미세하고 가느다란 선으로, 그 선은 아인소프로부터 뻗어 나와 마지막 세피라에 도달할 때까지 각각의 구를 다른 구와 연결시키며 관통해 내려온다. 다음으로 선이 위로부터 아래로, 가장 상단의 구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부터 가장 하단의 구의 가장 낮은 지점까지 직선으로 뻗어 나온다. 그것은 서 있는 사람의 형상 속에 신비적으로 배열된 열 개의 세피롯으로 구성된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아담 카드몬 그 자체는 아니고 그의 인류학적 대응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그의 몸은 영적이고 에테르적이었으나 신적인 상태로부터 추락한 이후에는 물질적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카드몬은 완전한 상태 이하로 추락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아담 카드몬은 태초에 신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을 때의 그 형상이며, 그의 몸은 신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몸의 청사진입니다. 우리는 그 청사진으로부터 멀어져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말과 행위로 우리의 몸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본래의 모체는 상부 자아 안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형상(Image)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다니엘 매트의 말에 의하자면, "창세기에 사람은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나온다. 세피롯은 그 형상의 신성한 원형이다. 원초의 아담으로서 세피롯은 인간의 신비적 전형이자 우리의 원형적 본성이다. 인간은 그런 본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자신을 정화하면 그는 세피롯과 다시 연결되어 세피롯의 그릇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모세가 성취한 바이다."

 

3. 카발라와 대사학

 

1) '아앰 프레젠스(I AM Presence)'

카발리스트들처럼 승천 대사들도 우리의 신성한 본성 및 신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도표를 가르칩니다. '신성 자아의 도표(The Chart of Your Divine Self)'라고 하는 것이 그것인데, 승천대사들은 그것을 생명 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도표의 상단에 있는 인물이 '아앰 프레젠스'인데 이는 '아버지 -어머니 하느님(Father-Mother God)'에 해당됩니다. '아앰 프레젠스'는 우리들 각자를 위해 개별화되신 하느님의 현존체입니다. 그것은 인격화된 '아앰 댓 아앰(I AM THAT I AM)'입니다. '아앰 댓 아앰'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신의 이름인데, 카발라에서는 케테르와 연관된 신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케테르는 당신의 '아앰 프레젠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성한 무", 형언할 수 없는 "일체 원인의 원인"인 아인소프는 어디에 있을까요? '신성 자아의 도표' 상에서 아인소프는 '아앰 프레젠스'의 태양 뒤에 숨겨진 '큰 태양'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케테르/ '아앰 댓 아앰'과 하나가 되어 순수한 영의 우주로 되돌아갔을 때만 형언할 수도 없고 가히 알 수도 없는 - 지고의 근원인 아인소프로 불려 들어갈 것입니다. 케테르/'아앰 댓 아앰'의 빛은 변모시키는 빛입니다. 신에 모세에 게 "나의 얼굴을 보고서 살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신을 보고도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을 겪고도 살아난다면 그는 발현된 신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아앰 댓 아앰'/케테르의 빛의 변형시키는 힘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신의 현존을 마주 대하고 설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세피롯과 다시 이어짐에 의해, 나날이 신과 함께 걷고, 신과 함께 얘기함으로써 우리는 그런 준비를 갖추어 가게 됩니다.

케테르의 빛을 받기에 앞서 우리는 아홉 세피롯의 에센스들을 소화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승천대사의 지도 아래에 그러한 일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쿠스/쉐키나로부터 케테르에 이르기 세피롯의 열 단계를 통해 우리에게 비전을 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세피롯의 빛을 소화해내게 되는데는 여러 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비전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혹을 견뎌내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주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케테르)을 받을 것이니라."

 

2) 당신의 고유한 주체

신의 현존체가 우리들 각자를 위해 개별화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 한 영혼으로 하여금 다른 영혼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일까? 신성 자아의 도표 상에서 '아앰 프레젠스'를 둘러싸고 있는 빛의 구들이 각자의 고유성을 결정하는 부분입니다. 이 구들을 합쳐서 코잘체라고 부르는데, 이 코잘체는 영의 상위 단계에 존재합니다. 코잘체를 이루는 각각의 구는 당신의 고유한 주체에 관해 참되고 영구적인 모든 것이 담겨있는 저장고입니다. 거기에는 당신이 수많은 환생 동안에 걸쳐 신의 영광과 인류의 축복을 위해 행한 일체 덕행의 기록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런 선한 행위들이 바로 '하늘에 숨겨진 보물들'입니다. 사랑과 조화, 그리고 창조적 노력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게 되면, 그 에너지들은 생명에 대한 봉사도에 따라 몇 갑절로 증가되어서 코잘체의 일곱 구 중에 하나로 상승하게 됩니다.

코잘체의 각 구는 다른 색을 띠고 있는데 각각은 일곱 광선 하나 하나에 해당됩니다. 각 광선은 신의식의 서로 다른 특성들과 연관된 특정한 색, 특질, 진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 광선 말고도 다섯의 '비밀 광선'이 있는데 이들은 코잘체의 중심 구 안에 숨겨 져 있습니다. 코잘체의 중심구로부터 가장 바깥구로의 전개는 세피롯이 아담 카드몬을 형성하기 위해 아인소프로부터 현현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세피롯들을 이어주고 아담 카드몬을 몸을 통해 지나가는 선 혹은 빛줄기는 '신성 자아의 그림'에서 세 인물을 이어주고 있는 백색 빛의 기둥("크리스탈 코드")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세피롯의 특성을 포용할 때 당신은 자신의 세계와 천국 세계와의 우주적 연결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각 세피롯의 특질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선하게 사용한 에너지가 코잘체로 상승함에 따라 해당되는 구의 힘과 주권을 나날이 증가 시켜가게 됩니다. 동시에 신성의 특성들을 모방함은 그에 해당되는 진동수의 신의 빛이 세피롯의 회로를 따라 천국 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내려오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케테르(왕관)는 코잘체의 중심에 있는 백색 구에 해당됩니다. 백색 구는 신성한 순결함, 규율과 환희의 구입니다. 순수한 마음과 때묻지 않은 동기로 오직 신을 영광케 하리라는 욕구로 행동할 때 당신은 백색 구의 힘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며, 케테르의 빛이 이 세계로 흘러들도록 촉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크마(지혜)와 비나(이해)는 신성 지혜, 이해와 깨달음의 노란 구에 해당됩니다. 누군가에게 영적인 이해와 각성을 가져다줄 때마다 당신은 코잘체의 노란 구의 힘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 세계로의 신의 지혜와 이해(호크마와 비나의 빛)의 유입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패턴은 다음의 구와 특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세드(사랑/자비)와 게부라(정의/심판)는 신성한 사랑, 자비, 친절, 박애의 분홍빛 구에 해당됩니다.

티페렛(아름다움/연민)은 신성의 자비, 정의, 자유와 변환의 구인 바이올릿 구에 해당됩니다. 네차(승리)와 호드(광휘/장엄)는 신성의 봉사, 사역, 평화와 형제애의 자주-황금빛 구에 해당됩니다. 예소드(기반)는 신성의 진리, 과학, 치유와 풍요, 비전(vision)과 음악의 녹색 구에 해당됩니다. 말쿠스(왕국)는 신성의 믿음, 의지, 힘, 완전성, 보호와 심판의 파란 구에 해당됩니다. 준 세피라인 다아트(지식)는 중심 구 안의 다섯 비밀 광선의 구에 해당됩니다.

서로 똑같은 코잘체는 없습니다. 왜냐면 각각의 구에는 그 영혼의 고유한 영적 성취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수많은 생애에 걸쳐 헤세드의 사랑의 특질을 완성해 왔음으로 사랑을 표현하는데 커다란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코잘체의 분홍빛 구는 그런 특질을 발달시켜오지 않은 다른 사람의 분홍빛 구보다 클 것입니다. 호크마와 비나의 특질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혜의 선생으로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그의 코잘체의 노란 구는 큰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코잘체와 우리의 일상적인 영적 구도의 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첫째 선행을 함으로써 코잘체의 구를 늘려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신성의 빛이 이 세계로 내려오게 됩니다. 조하르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밑으로부터의 임펄스(impulse)는 위로부터의 임펄스를 불러낸다."

게다가 전생에서 고된 노력을 통해 발달시킨 특성들은( 이는 코잘체의 크기 안에 반영되어 있음) 다음 생에 갖고 태어날 재능이나 능력들을 결정합니다. 이러한 재능들은 코잘체 안에 봉인되어 있다가 상부 자아(신성 자아의 그림에서 중간 인물)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코잘체의 구의 전개 양상은 신께서 우리가 지상에서의 과제를 완성하는 필요한 것을 제공할 때, 우리 영혼의 주체가 전개되는 양상과 같습니다. (백색 구로 나타난) 태초에 우리들 각자는 단일한 백색 화란(불꽃의 알)으로부터 우리의 쌍둥이 불꽃과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쌍둥이 불꽃은 고유한 청사진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다른 반쪽입니다. 쌍둥이 불꽃은 둘이 함께 '신성한 전체 (Divine Whole)'의 남성적/여성적 극성을 구현합니다.

다음에 우리는 신의 마음(노란 구)과 신의 사랑(분홍 구)을 입습니다. 그 다음 신은 창조할 자유와 능력이 포함된 자유의지(바이올릿 구)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자유의지가 갖추어진 우리는 다른 이에게 봉사하기 위해 우리의 재능을 쓸 수 있습니다. (자주-황금빛 구) 다음 단계는 우리의 육체적 형체의 기초, 아담 카드몬의 청사진을 세우는 것입니다.( 녹색 구) 마지막으로 신은 우리가 물질적 차원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진화해 가는데 필요한 특질들과 힘과 의지, 믿음을 줍니다.

메르카바 신비가들이 다시 보고자 염원했던 에스겔의 환상을 보자면, 그가 본 것은 코잘체의 구에 둘러싸인 에스겔 자신의 '아앰 프레젠스'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불같아 보이는 것"에 둘러싸인 사람의 모양과 "사면으로 광채를" 내는 무지개를 닮은 불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그의 환상을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코잘체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신에게 가까워져 열 개의 세피롯에 다시 연결됨에 따라 우리는 그 영광을 더해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영혼이 신과의 합일을 완전히 성취했을 때 우리는 코잘체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일없이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Holy Christ Self)'

신성 자아의 그림에서 중간의 인물은 아버지-어머니 하느님의 아들(Son)을 나타냅니다. 이 아들은 보편적 그리스도(Universal Christ)로 티페렛과 일치합니다. 아들도 하나밖에 없고 티페렛도 하나밖에 없지만 신은 모든 자녀들에게 그 본래 아들을 그대로 똑같이 복사해 주었습니다. 승천 대사들은 그 "똑같이 닮은 것"을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Holy Christ Self)" 또는 "상부 자아 Higher Self"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는 아버지-어머니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영혼을 변호해주는 이입니다. 그는 내면의 선생이고, 수호자이며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는 또한 당신의 가슴과 영혼 깊은 곳에서 말하는 양심의 소리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를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은 '우리 의로움의 주님‘입니다. (the Lord Our Righteousness') 예레미야는 '우리 의로움의 주'께서 지상에 왕으로 다스리시며 심판과 정의 그리고 의로움을 행사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처럼 예레미야 예언자는 '우리 의로움의 주'를 중재자(Mediator)로 예언했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는 당신과 '아앰 댓 아앰'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활동합니다. 그는 당신 안에서 선과 악의 길을 나누고 오류로부터 바른 길을 당신에게 가르칩니다. 죄/카르마가 우리에게 내려오기 전에 우리 영혼은 보편적 그리스도/티페렛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담 카드몬의 본래적인 에테르적 패턴으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의 계속된 환생을 거치면서 우리는 그림의 밑에 인물의 수준으로 내려왔고, 우리에게 본래 있던 깨달음의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는 우리를 위해 아담 카드몬의 청사진을 유지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카발리스트들의 말대로 우리가 다시 발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결합함으로써 완전의 원형적 패턴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주의의 길을 걷는 모든 영혼들의 목적지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결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의식이 영성화(spirotualization)의 여러 단계와 양상들을 지나면서 당신의 영혼이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완전한 패턴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영혼이 그녀의 신랑과의 합일을 이루는 "연금술적 혼인"입니다.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영적 교사들과 랍비들을 모방하고, 세피롯의 각 특질들을 발전시켜감에 따라 당신은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의 점점 더 큰 융합상태를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결합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카르마를 갚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생과 전생에 저지른 잘못으로 빚을 진 이들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카르마를 갚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성령의 바이올릿 불꽃을 일으키는 시인(affirmation)들을 포함한 진심에서 우러난 기도와 신, 가족,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의한 것입니다.

 

4) 심장 속의 신성 불꽃

신성 자아의 그림을 보면 백색의 빛줄기가 아앰 프레젠스로부터 내려와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를 지나, 아래의 인물에게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크리스탈 코드(crystal cord)"라고 하는데, 이는 생명의 탯줄로 이것을 타고 신의 빛과 생명, 의식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옵니다. 이를 '생명류(lifestream 생명의 냇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명류는 당신에게 생각하고, 느끼고, 추론하고, 생을 체험하고, 일하고, 놀고, 영 안에서 성장하고 튼튼해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당신이 되기로 선택한 존재로 되고자 자유를 행사했을 때, 당신은 자신의 생명류에 자신의 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느낌, 말과 행동, 욕구로 수정같이 맑은 시냇물을 물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시냇물을 순수한 색깔(이는 당신이 매일 매일 발달시키고 있는 신으로부터 온 재능과 덕을 나타냅니다)로 색칠하기도 하고, 좋지 않은 의식 상태의 악하고 흐린 변질 상태로 시냇물을 흐려놓기도 합니다.

크리스탈 코드의 에너지는 심장의 밀실 안에 숨겨진 신성 불꽃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 불꽃은 "세 줄기 불꽃(threefold flame)" 또는 "신성의 스파크(divine spark)"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신의 가슴으로부터 나온 거룩한 불의 스파크입니다. 그것은 일체 생명의 궁극적 근원인 아인소프와 당신 영혼간의 접촉지점입니다.

세 줄기 불꽃과 심장의 밀실에 관해 논하면서 승천대사 세인트 저메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심장은 참으로 하느님의 가장 선택된 선물 중에 하나이다. 그 안에 우리가 "우주적 간격“ (cosmic interval)이라 부르는 빛과 보호의 역장(力場 forcefield)으로 에워싸인 중앙의 방이 있다. 그 방은 물질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서,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노라. 그것은 3차원과 4차원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차원들을 동시에 점하고 있다. 이 중심의 방은 심장 속의 제단이라 불리는 바, 육체적 심장의 박동을 유지하고, 생명의 목적과 우주적 통합성을 주고자 너희의 신적 현존하심으로부터 내려오는 강력한 실버코드의 연결점이니라”

 

세 줄기 불꽃은 신의 세 가지 주된 특성을 구현하고 있고, 삼위일체와 대응하는 세 개의 "깃"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쪽의 파란 깃은 신의 능력(Power)을 구현하고 있고, 성부에 해당됩니다. 중앙의 노란 깃은 신의 지혜를 구현하고, 성자에 해당됩니다. 오른 쪽의 분홍 깃은 신의 사랑을 구현하고, 성령에 해당됩니다. 세 줄기 불꽃에 닻을 내리고 있는 신성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에 접근함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5) 당신의 영혼과 네 가지 하부체

신성 자아의 그림에서 아래 인물은 당신의 영혼을 나타냅니다. 영혼은 에텔체, 멘탈체, 욕망체 또는 감정체, 육체의 네 가지 상이한 몸으로 싸여있습니다. 이 몸들은 당신의 영혼이 지구를 여행하는데 사용할 탈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아앰 프레젠스, 코잘체,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세 가지 "상부체"와 대비해서 "하부체"라고 부릅니다.) 그림 상에서 아래의 인물은 삼위일체의 성령에 해당되는데 그것은 당신의 영혼과 네 가지 하부체는 성령의 사원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체라고 불리는 에텔체는 당신의 주체의 청사진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당신이 창조된 이래로 당신 영혼에게 일어난 모든 일과 당신이 내보낸 모든 임펄스의 기억이 담겨있습니다. 멘탈체는 인지적 기능의 그릇입니다. 순화되었을 때 멘탈체는 신의 마음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체는 고상한 욕구와 저급한 욕구들이 거하는 곳이며, 감정들을 기록합니다. 육체는 당신의 영혼이 물리적 우주에서 진보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신성 자아의 그림에 아래 인물이 바이올릿 불꽃 속에 서 있습니다. 바이올릿 불꽃은 당신의 영혼이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는데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성령의 영적인 불입니다. 바이올릿 불꽃에는 부정적 상념이나 느낌, 부정적 카르마를 소멸시킬 수 있는 정화력이 있습니다. 바이올릿 불꽃을 불러일으키면 그 불꽃은 당신의 마음과 심장, 무의식, 하부의식으로 침투하여 과거의 "죄( 또는 열 세피롯의 빛의 오용)"를 변환시켜 모든 것을 조화와 균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바이올릿 불꽃을 사용하여 에텔체, 멘탈체, 감정체와 육체의 불완전한 것들을 변환시킬 때 당신은 아담 카드몬의 청사진이 그들 몸 안에서 발현될 수 있는 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다보면 당신은 지구상의 어둠을 상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양의 빛이 당신의 몸 안에 닻을 내리도록 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6) 세피롯과 챠크라

세피롯은 신성 자아의 그림의 윗부분에 있는 코잘체의 구와 일치하기도 하면서 아래 인물의 챠크라와 일치합니다. 챠크라는 아앰 프레젠스와 세피롯을 통해 아인소프로부터 흘러오는 에너지를 받아 네 가지 하부체로 나누어줍니다. 각각의 챠크라는 몸의 각기 다른 부분으로 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며, 각각의 챠크라는 내분비선 중에 하나를 통해서 그 에너지의 흐름을 외면화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챠크라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명상을 강화하기 위해 신체의 에너지 센터들에 대해 명상을 했습니다. 일곱의 주된 챠크라들이 척추를 따라 척추의 베이스로부터 정수리까지 위치해 있습니다. 세피롯이 우리가 신의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그 에너지를 낮추어주는 변압기 역할을 하듯이 챠크라도 네 가지 하부체의 필요에 따라 신의 에너지를 조절해주는 내적 변압기 역할을 합니다.

챠크라는 바퀴 또는 원반이란 의미입니다. 챠크라를 통해서 더 많은 에너지가 흐를수록 챠크라는 더 빨리 회전합니다. 각각의 챠크라는 고유한 기능과 진동수를 갖고 있고, 각기 다른 수준의 의식을 대표합니다. 그들 챠크라의 상이성은 각 챠크라의 꽃잎 수로 표시됩니다. 꽃잎 수가 많을수록 진동수가 높습니다. 케테르(왕관)는 크라운 챠크라(사하스하라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크라운 챠크라는 972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고, 머리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의 노란 광선은 왕관 챠크라에 집중됩니다. 호크마(지혜)와 비나(이해)는 이마 한가운데 위치한 96개의 꽃잎을 가진 제 삼의 눈 챠크라(아즈나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진리, 과학, 치유, 풍요, 비젼과 음악의 녹색 광선이 이 챠크라에 집중됩니다.

헤세드(자비와 사랑) 그리고 게부라(정의/심판)는 16개의 꽃잎을 가진 목챠크라(비슈다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여기에는 신의 의지, 믿음, 힘, 보호, 완전함과 심판의 파란 광선이 집중됩니다. 티페렛(아름다움/연민)은 12개의 꽃잎을 가진 심장 챠크라(아나하타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여기에는 신성한 사랑의 장미빛 광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네차(승리)와 호드(광휘/장엄)는 배꼽 위치에 있는 태양신경총 챠크라(마니퓨라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사역과 봉사의 심홍/금빛 광선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소드(기반)는 배꼽과 척추 베이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영혼 챠크라(스바드히스타나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여기에는 변환의 바이올릿 불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말쿠스는 네 개의 꽃잎을 가진 척추-베이스 챠크라(물라드하라 챠크라)에 해당됩니다. 이 챠크라에 집중되어 있는 백색 광선은 거룩한 불이자 승천의 불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혼이 카르마를 갚고 자신의 신성 계획을 완수하고,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결합했을 때 그 영혼은 예수와 다른 승천 대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승천의 의식 안에서 신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준-세피라인 다아트는 여덟 개의 꽃잎을 가진 심장의 밀실에 해당됩니다. 그곳은 당신이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소통을 하는 곳이고, 세 줄기 불꽃의 불을 일으키는 곳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다아트의 빛을 불러일으켜서 자아에 관한 지식, 당신의 내면의 아이, 즉 당신의 영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코잘체의 각 구에 이익이 되는 좋은 일을 할 때 당신은 챠크라의 빛을 자동적으로 강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코잘체의 백색 구로 돌아가는 좋은 일을 하면 척추-베이스 챠크라의 빛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이기심, 증오심, 비난, 분노 또는 그 밖에 세피롯의 기운을 변질시킨 것으로 챠크라의 에너지를 오용하면 당신의 챠크라는 막혀 버릴 것입니다. 이는 네 가지 하부체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아인소프의 에너지의 흐름을 막아서 당신의 멘탈체, 감정체, 그리고 육체 안에 무기력함이나 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챠크라나 세피롯의 에너지를 명상할 때는 그것들을 활기차고도 역동적인 것으로 명상하도록 하십시오. 신의 에너지는 세피롯의 망을 통해서 고동치고 있듯이 당신의 몸과 챠크라의 망을 통해 항상 고동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티쉬비는 세피롯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세피롯은 신성의 특성들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는 사다리 상의 고정되고 단단한 계단과 같지 않다. 그것들은 상승하고 하강하는, 그리고 신성의 구역 안에서 스스로를 확대하는 역동적인 힘들이다.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상호간에 얽히고, 연결되고, 결합된 지속적인 운동이다. 하부의 세피롯은 근원으로 되돌아가 근원과 결합하려는 열망으로 인해 스스로를 상승시키고, 상부의 세피롯은 하부의 세피롯을 유지시키고 하부의 세계들에게 신성한 영향력을 전달하고자 아래로 움직인다.“

전체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세피롯의 활동에 점점 더 많이 동조할수록 생명 나무의 더 많은 부분이 신과 함께 가는 우리 걸음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구도자가 법들의 상호작용 - 흐름, 순환, 상호교환, 그리고 수준들을 파악함에 따라 생명나무는 점점 더 외적인 추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가 된다. 그것이 구도자의 존재의 일부가 되기 시작할 때 그는 카발라에 대해 뭔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할레비는 말합니다.

세계 종교의 모든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카발리스트들은 높은 세계의 신성한 패턴은 그들 자신의 몸과 영혼 그리고 주변 세계 안에 반영되어 있다는 원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신비가는 "높은 곳에서처럼 낮은 곳에서도"라는 고대 헤르메스의 격언의 진리대로 살고 숨쉽니다.


3. 영혼(soul)의 신비

 

시간의 시작부터 영겁을 지나도록 나는 그분의 숨겨진 보배 중에 하나였다. 무(無)로부터 그분이 나를 불러내었지만 시간의 끝에 이르면 나는 다시 왕께 불려가리라. - Nahmenides

 

우리는 세피롯을 본따서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적 형태와 영혼에 대해 더욱 알수록 우리는 세피롯의 신성한 세계에 관해 알게 된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믿고 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영혼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를 본떠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영혼의 탁월함과 본성을 알 때 그의 생각과 이해는 거기서 왕의 일들에 관한 비밀, 즉 세피롯의 비밀로 확대될 것이다."라고 모세 드 레옹은 썼습니다.

 

1) 영혼이란 무엇인가?

카발리스트들에 의하면 영혼은 세피롯이 비쳐진 거울, 신성한 에센스의 분광(spark)입니다. 드 레옹은 쓰길 "몸은 창조주의 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형상과 그 대응물은 무엇인가? 의심 할 바 없이 그것은 영혼이다. 영혼은 하느님 자신의 본질적 존재이다." 조하르는 우리의 몸이란 우리 영혼이 입는 옷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창조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당신은 나를 가죽과 살로 입히셨나이다.'(욥기 10:11) 그렇다면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가죽과 살 그리고 뼈와 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틀린 것이다. 왜냐면 사람의 진정한 부분은 그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옷은 사람의 것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떠날 때면 그는 입고 있던 옷들을 벗는다."

 

2) 영혼의 세 부분

조하르는 영혼에게는 네페쉬(nefesh), 루아(ruah), 그리고 네쉐마(neshemah)의 세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각각의 부분은 각기 다른 세피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네페쉬는 몸에 생명을 주고 유지시키는 부분입니다. 그 원천은 말쿠스입니다. 조하르는 네페쉬가 육신으로 하여금 계명을 따르도록 자극한다고 말합니다. 영혼의 두 번째 부분인 루아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 실존 상태를 초월케 하는 지성과 이성의 자리인 영(spirit)입니다. 루아는 티페렛으로부터 유래합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분간하는 윤리적 힘"이리고 숄렘은 말합니다.

영혼의 세 번째 부분인 네쉐마는 영적인 영혼, 거룩한 영혼 또는 신성의 스파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비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비나의 스파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드니 스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쉐마는 글자 그대로 "숨쉼(breathing)'이다. 그것은 "더 높은 영성의 호흡이며, 사람을 천상 세계와 이어주는 다리이다." 그것은 신성한 지성인 비나의 현현이며 사람을 신과 결합시킨다. 그것은 신성의 개별화된 표현이다. 조하르의 말처럼, 그것은 본질상 "천상의 영혼이며, 모든 영혼의 영혼이고, 지극한 밝음 속에 가리워져 있어서 불가해하고 불가지하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감으로써 신의 현존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세 등급을 깨달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그 등급들이 모든 사람 안에서 자동적으로 활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네페쉬는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부분은 공덕에 의해서만 활성화됩니다. 숄렘은 말하길

루아와 네쉐마는 영적으로 각성되었으며, 지력과 종교적 감성을 키우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 안에서만 발견된다. 루아는 사람이 자신의 순수하게 활력적인 측면(vitalistic side) 이상으로 올라가는데 성공했을 때 불특정한 시간에 깨어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세 부분 중에 가장 높은 것인 네쉐마 혹은 스피리투스(spiritus)이다. 그것이 사람이 토라와 그 계명에 전념할 때 깨어난다. 그것은 더 높은 이해의 힘, 특히 신성과 우주의 비밀들을 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열어준다. 네쉐마를 획득함으로써 카발리스트는 자기 본성 안에 있는 신성한 것을 깨닫는다. 조하르는 우리가 의로움과 순결함을 향해 노력할 때 네페쉬가 우리 안에서 깨어나며, 영혼의 등급들을 관찰함으로써 세피롯에 관해 배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네페쉬와 루아는 상호간에 함께 얽혀있다. 반면에 네쉐마는 사람의 품성 안의 - 발견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이 생의 순결됨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거룩한 네쉐마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그는 정화되고 거룩하게 되어 "성자"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의로움과 생의 순결됨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두 등급, 네페쉬와 루아의 작용만을 받으며, 네쉐마가 결여되게 된다. 더욱이 스스로를 더럽히기 시작하는 자는 더러움 속에 더욱 빠져들게 되어 천상의 도움은 그로부터 물러날 것이다. 그처럼 각자는 그가 선택한 길을 따라 인도된다.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의로운 자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은 전적으로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의 몸도 거룩하고, 그들의 영혼 (네페쉬)도 거룩하고, 그들의 영(루아)도 거룩하며, 그들의 초영혼 (네쉬마)은 거룩함 중에서도 거룩하다. 이들 세 등급은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된다. 사람이 그의 영혼(네페쉬)과 더불어 조화한다면 영(루아)이라 불리는 왕관이 그에게 내려오리니, 그것이 그 사람을 자극하여 거룩한 왕의 법을 더 깊고 묵상하게 할 것이다. 그가 그 영과 조화한다면 초영혼(super-soul : 네쉐마)이라 불리는 존귀하고도 거룩한 왕관이 주어질 것이니, 그것은 만물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등급들을 고찰함으로써 그대는 더 높은 지혜로 이르는 통찰력을 얻게 되리니, 모든 것은 지혜라. 그리하여 그대는 봉인된 물건들을 그런 식으로 지각하게 되리라 (세피롯을 지각하게 되리라).

 

아브라함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영혼에 도달했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조하르는 아브라함 생애의 몇 가지 사건들을 그가 신과의 결합을 추구하면서 직면했던 영혼 시험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그 가르침은 생명 나무를 등정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왜냐면 신과의 결합을 구하는 모든 영혼은 아브라함이 했던 겪었던 것과 똑같은 비전을 거쳐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아브라함]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에 신이 그에게 나타났다. 그는 거기서 네페쉬를 받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신성의) 수준에 맞는 (그에 상승하는 세피라에 맞는) 제단을 세웠다. 그다음 그는 "남방으로 여행하여" 루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네쉐마를 통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 신과 결합되었다. 거기서 그는 네쉐마에 해당되는 가장 심오한 수준을 나타내는 "주께 바치는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시험하여 스스로 점수를 매길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는 이집트로 갔다. [이집트는 마법사들의 나라이며, 악한 세력들과 마법의 영역이며, 세속되므로 물질적 세계를 상징함] 거기서 그는 밝은 에센스들에 의한 유혹에 견디었다. 자신을 시험한 뒤 그는 자신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는 이집트로부터 나와 "올라가" 강인해지고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으며, 믿음의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거기서 아브람은 더 높은 지혜를 알게 되고 신께 붙었으며, 세계의 오른손이 되었다.

 

사후에 영혼의 구성부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네쉐마는 신성의 스파크이므로 죄를 범할 수도 없고 따라서 사후에 벌을 받을 수도 없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네페쉬 그리고 때로는 루아도 사후에 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숄렘에 의하면, 사후에 네페쉬는 육신 위를 맴돌며 무덤에 한동안 남아있고, 루아는 그 공덕에 따라 천상의 낙원으로 올라가며, 네쉐마는 그 본래 고향으로 직접 되돌아갑니다. 이삭 루리아를 비롯한 조하르 이후의 카발리스트들은 네페쉬, 루아, 네쉐마보다 더 상위의 영혼 단계를 추가했는데, 그것은 하이야(hayyah)와 예히다(yehidah)입니다. 영혼의 이들 두 단계는 "직관적 인식의 가장 미묘한 단계를 나타내며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숄렘은 말합니다.

 

3) 영혼과 신성의 분광과의 차이

카발리스트처럼 다른 신비가들도 신의 일부분이 우리들 각자 안에 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느님의 성전이며, 너희 안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는 줄 알지 못하느뇨?" 14세기의 기독교 신비가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영혼 안에는 하느님과 너무도 닮은 것이 있나니, 그것은 그 분과 하나이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들 안에 있는 것이다. 시간이나 죽음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이 영혼 안에 있는바, 그것은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영 안에 영원토록 머물러 있고 신성한 것이라. 여기에 하느님이 그 분의 모든 풍성함과 달콤함 그리고 환희 속에서 그침없이 빛나며 타오르고 계시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성이라 하기도 하고 부처의 싹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느 불교 경전에 이르기를 "불성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모든 중생은 언제나 그 안에 부처의 싹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내재하는 신을 "아트만(Atman)"이라고 부릅니다. 아트만은 사람의 불사불멸한 핵심입니다. 그것은 절대자 브라흐만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탓 트밤 아시(Tat Tvam Asi: 너는 바로 그것이다)'는 '너는 바로 절대자이다. 너는 바로 브라흐만이다. 너는 바로 신이다. 그것이 바로 너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같은 신비가들은 때로 영혼과 신성의 스파크가 동일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만 그 둘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유대 신비가들은 영혼의 부분 중에 네쉐마와 다른 두 부분 즉 네페쉬와 루아를 구별합니다.

신성의 스파크는 순수한 영입니다. 그것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잃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그 잠재력을 읽어버리고 존재를 멈출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은 그런 경우에 처한 영혼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는 지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영혼은 죽으리라." "이긴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겠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Climb the Highest Mountain'에서는 영혼(soul)과 영(Spirit)의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영이며 영혼은 신의 살아있는 포텐셜(potential)이다. 영혼의 자유의지에 대한 요구와 신으로부터의 분리는 그 포텐셜이 육의 낮은 상태로 하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치 속에서 씨뿌린 영혼은 일체 생명의 한 영이신 신의 충만한 상태로 영예로이 높여져야 한다. 영혼은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영은 결코 죽을 수 없다.

타락한 포텐셜로 남아 있는 영혼은 영의 실상에 의해 고취되고, 기도와 탄원으로 정화되어, 그가 내려왔던 영광으로 자리로, 전체자와의 합치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영혼과 영의 재결합이 바로 자아의 미래를 결정하고 자아를 불멸한 진리와 하나되게 만드는 연금술적 혼인이다. 이러한 혼인식이 실현되었을 때 가장 높은 자아가 생명의 주님으로 보좌에 자리 잡고, 사람 안에서 실현된 신의 포텐셜은 '일체의 일체(the All-in-all)'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신의 일부분이 있으며, 우리가 열 개의 세피롯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비할 나위없는 기회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과 세계를 바꿀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의 세계를 바꿀 힘도 있다는 것입니다. 숄렘의 말에 의하자면,

사람은 우주의 구조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대리인이다. 다른 모든 창조된 존재들처럼 그는 열 개 세피롯과 "모든 영적인 것들" 즉 신성의 특성들을 구성하는 초월적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피롯의 힘들이 그 사람 안에 반영되어져 있으면 그는 자신의 생명과 행위를 통해서 그 힘들이 최고의 수준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증폭시키고 그 힘들을 원래의 근원으로 되돌리는 "변형자( transfomer)"인 것이다. 신 플라톤 학파의 공식을 사용하자면 창조의 과정은 일체가 유일자로부터 나옴과 유일자에게도 되돌아감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영적인 힘을 사용해서 신성 세계를 강화 또는 약화, 결합 또는 분열시킬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 점은 뒤에 가서 더 다루게 될 것입니다.

 

4) 천상 학원으로의 영혼 여행

조하르를 비롯한 카발라 서적들은 천상 세계로의 영혼 여행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잠들었을 때 영혼은 "천상의 학원"으로 날아가서 신의 숭고한 신비들에 대해 배운다고 합니다. 하임 비탈(Hayim Vital)은 루리아의 야간 여행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천사의 군단이 그를 반기며 와서는 그를 천상의 학원으로 안전하게 데리고 간다. 이들 천사들은 그에게 어느 학원에 가고 싶냐고 물어본다. 그는 때로는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의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랍비 아키바의 학원에 또는 대 랍비 엘리제르의 학원 또는 다른 선생이나 해석가, 또는 예언자들의 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가고자 하는 어떤 학원이든 천사들은 그리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그 학원에서 배운 것을 현자들에게 드러내곤 했다.

카발라 전문가인 모쉐 아이델(Moshe Idel)은 "루리아의 그러한 인식은 그가 전하여 후일 방대한 루리아 문헌을 낳게 한 엄청난 양의 카발라 자료와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아이델은 또한 어느 카발리스트에 대해 얘기하길, "랍비 셈 토브는 메르카바와 창조의 구조에 관한 비밀들을 지적으로 가늠할 필요성을 언급한다. 그 결과는 미적이고 신적인 환상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마치 책처럼 계시된 내용을 베끼는 것과 같은 문학적 창작의 폭발로 나타났다. 이러한 묘사와 루리아 자신의 창작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이다. 랍비 셈 토브에 의하자면 신비가의 이상은 저급 학원에서 초월적 학원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쉐키나의 광휘로 살아가는 것이다"

 

비탈은 랍비 이삭 알라티프의 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때 나는 한 시간 동안 깊이 혼절했다. 그때 엄청난 수의 노인과 여인들이 내게로 와 살펴보았다. 집은 그 사람들로 완전히 가득했다. 그들 모두가 나를 걱정해주었다. 혼절 상태가 지나서 나는 눈을 뜨고는 말했다 "이제 막 나의 영혼이 영광의 자리로 올라갔었는데, 그들이 나의 영혼을 이 세계로 되돌려보내 그대들에게 설교하고 그대들을 뉘우침의 길과 박애의 일로 인도하도록 했다 ."

유대 신비가들이 기록한 천상의 학원들은 승천 대사들이 "리트릿(retreat 은거지, 사원)" 혹은 "영의 대학"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것들은 에텔계라고 알려진 천상 세계에 위치해 있습니다. 밤에 잠 잘 때 당신의 영혼은 몸을 떠나서 이들 학원으로 가서 천사들이나 지혜의 대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가슴을 영혼의 신호에 맞추면 밤에 에텔계에서 배운 가르침을 기억할 수 있거나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라는 분명한 지침을 가지고 아침에 잠이 깰 수도 있습니다. 전날 밤에 신에게 기도했던 육체적/정신적 짐들이 해결되었음을 느낄 수도 있고 또는 그 짐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를 정확히 안 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잠자리 곁에 필기도구를 두고서 밤에 깨었을 때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받은 가르침이나 계시를 즉각 기록해봅니다. 어떤 꿈은 당신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가 상징적으로 전달한 암호들입니다. 그리스도 자아에게 요청해서 그 꿈들을 해석할 수 있고, 그 가르침들을 일상사에 어떻게 적용할 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자료들을 걸러내서 옳다고 느껴지고 윤리적 기준에 부합되는 것을 실행합니다. 있을 법하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조하르는 수면 도중의 영혼 여행의 위험에 대해 경고합니다. "어떤 밝지만 깨끗하지 못한 에센스들이 영혼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가로막으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랍비 시메온이 그의 아들인 랍비 엘리자르와 랍비 압바, 랍비 유다와 함께 여행을 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 있을 때 랍비 시메온이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토라의 말씀과 그들 인생의 토대에 대한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함을 보고 놀랐다.

그는 계속해서 경전 구절에 대해 얘기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안의 영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이사야 26:9)" 이 구절의 내적인 의미는 이렇다. 사람이 잠자리에 들면 그의 생생한 영(네페쉬)은 그를 떠나 높은 곳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이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는 걸까? 아니다. 모든 자가 왕의 용모를[즉 신성한 세피롯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은 심장의 박동을 담은 그릇의 인상만을 육신에 남긴 채 올라간다.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한 등급에서 다음 등급으로 솟아오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는 중에 밝지만 깨끗하지 않은 에센스와 마주친다. [네페쉬가] 순결하고 낮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면 그 영혼은 [깨끗하지 않은 에센스] 너머로 올라가 높은 계에 이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들 속에 더렵혀지고 그것들과 붙어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한다. 거기서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영혼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때로 그것들은 영혼을 기만하고 거짓된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처럼 영혼은 그 사람이 깰 때까지 밤새도록 돌아다닌다. 그 사람이 깰 때야 영혼은 되돌아온다. 하느님께서 꿈에 그분의 비밀을 드러내시어 죄를 경계하는 의인들은 행복하도다! 자신의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죄인들에게 화가 있을진저!

밤에 몸을 빠져나와 에텔계로 여행할 때 "아스트랄계"로 알려진 곳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육신이 없는 영들의 밝은 에센스는 그들 수준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려 듭니다. 이들 영들은 대사학에서는 "discarnate entities"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discarnate이란 말은 incarnate의 반대로 육신이 없이 아스트랄계에서 거하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그 중 일부는 영혼을 상실한 자들도 있는데, 그런 자들은 우리의 빛을 훔치기 위해 우리를 자신들에게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들에게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육적인 매력을 거부해야 합니다. 조하르의 말에 의하자면 아스트랄계와 "밝지만 깨끗하지 못한 에센스"로부터 가져온 것은 신뢰할 만한 것도 못되고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도 아닙니다. 아스트랄계에 떠도는 육신이 없는 영들과 교신을 하느니 당신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를 통해 신과 직접 소통하도록 하십시오. 성령께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에텔계에 있는 대사들의 영의 대학에 안전하게 도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상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대천사 미카엘에게 육신이 없는 영들의 밝은 에센스의 덫에 걸리지 않게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잠에 들면서 마음을 목표하는 지점에 곧장 고정시킵니다. 마음의 눈을 가고자 하는 곳에 집중시킵니다. 대광명 형제단의 에텔계 리트릿이 있는 지역의 사진이 있다면 잠자리 가까운데 붙여두고서 불을 끄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잠에 들면 좋습니다. 그리고는 빛의 에텔체에 쌓인 당신의 영혼이 대천사 미카엘이 보낸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목표하는 곳으로 가는 모습을 심상화합니다.

조하르는 순결한 영혼들이 어떻게 천상계로 올라가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낮 동안에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은 자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들이 밤에 잠이 들었을 때 그들의 영혼은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에 앞에서 언급한 단계(아스트랄계와 밝으나 깨끗하지 못한 에센스)에 진입하지만, 거기에 달라붙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간다. 그는 더욱 전진하여 [그가 가진 덕에 따라] 그 자신의 길로 올라가게 된다. 그처럼 올라갈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영혼은 마침내 천상 궁전의 문에 이르러서 그의 온 힘을 다해 왕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그 분의 성소로 들어갈 수 있기를 갈망하게 된다. 이는 올라갈 때 그 갈망하는 바가 거룩하신 분을 향한 영혼이며, 다른 밝은 에센스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그가 본래 나온 곳의 거룩한 에센스만을 구하는 영혼이다. 그런고로 기록된 바, 그 분을 구하되 그릇된 힘들을 따라 유혹 당하지 않기 위해 "나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사모하였나이다"라고 했다.

 

5) 쌍둥이 불꽃(twin flames)과 영혼의 짝(soulmates)

카발라가 밝혀낸 영혼의 또 다른 신비는 영혼의 파트너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태초에 당신과 함께 창조된 쌍둥이 짝이 있다고 조하르는 가르칩니다. 당신이 순결과 선한 행위의 삶을 산다면 신은 당신 둘을 합치게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수작품의 결실은 세계의 모든 영혼들은 신비적으로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계로 내려올 때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었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맨 처음 나왔을 때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 나왔다. 뒤이어 이 세계로 내려올 때 그들은 하나는 이쪽으로 다른 하나는 다른쪽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훗날 그들을 합치게 할 것이니, 하느님 말고는 그 누구도 모르고 오직 그분만이 각자에게 맞는 짝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의 일이 올곧고(순결하고) 진리의 길을 걷는 자는 행복하도다. 그의 영혼이 그 본래의 짝을 만나리로다. 그때 그는 진실로 완전해질 것이며, 그의 완전함을 통해서 세계가 축복받을 것이다.

플라톤도 우리들 각자는 신성한 전체(divine whole)의 반쪽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상 우리의 원래 파트너를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향연'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들 안에 심겨진 서로에 대한 소망, 우리의 원래 본성과 재결합하여 둘을 하나로 만들고 사람의 상태를 치유하려는 바램은 오래된 것이다. 납작한 생선처럼 한 쪽만을 가지고 분리된 우리들 각자는 사람의 찢어진 반쪽에 불과해서 그의 다른 반쪽을 항상 찾아다니게 된다. 그 중 한쪽이 그의 다른 쪽, 즉 그 자신의 실질적인 반쪽을 만나게 되면 그 둘은 사랑과 우정, 친숙함의 경이로움 속에 빠져든다. 이들은 그들의 온 생애를 함께 보내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들 각자가 상대방을 향해 갖고 있는 강렬한 갈망은 연인적인 교류의 욕구(성욕을 말하는 것 같음)로 나타나지 않고 두 영혼이 분명히 갈구하고는 있으나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욕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쉬바신의 상은 반쪽은 남자, 반쪽은 여자로 되어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쉬바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연인인 파르바티 사이에 어떠한 이별도 없게 하리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오른 쪽은 쉬바를 나타내고 왼쪽은 파르바티를 나타낸 채 영원히 결합해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신성한 짝 그리고 신과의 영원한 결합이야말로 모든 영혼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갈망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조하르와 마찬가지로 플라톤도 신성한 짝을 찾는 일은 우리가 경건해지고 악을 피할 때만 끝난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하나였고, 우리는 온전(whole)했었다. 온전함에 대한 욕구와 추구를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인류의 악함 때문에 신은 우리를 사방을 흩어놓으셨다. 그런고로 악을 피하고 선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건함을 권하자. 그로 인해 사랑은 우리에게 주인이 되고 일꾼이 된다. 우리가 신[사랑]의 친구가 되고 그와 화평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낼 것이다. 그런 일은 현재 이 세상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사랑이 완벽하게 성취되고 원래의 본성으로 되돌아간 각 사람이 그의 본래 참 사랑을 얻는다면 우리 종족은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이신 신께서는] 우리가 경건하다면 우리를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주고 우리를 치유해주고, 우리는 행복하고 복되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

당신과 당신의 반쪽을 얘기할 때 승천 대사들은 'twin flames(쌍둥이 불꽃)'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신은 단일한 '백색 불의 몸(white fire body)'으로부터 쌍둥이 불꽃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그는 난체(avoid 卵 )를 두 개의 구(求)로 분리해서 하나는 남성적 극성(masculine polarity) 다른 쪽은 여성적 극성(feminine polarity)을 갖게 하였습니다. 영혼의 진화를 위해서 각각의 반쪽은 그 자신의 코잘체, 아앰 프레젠스,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 그리고 영혼을 갖게 되었습니다. 쌍둥이 불꽃은 그들이 동일한 영적 기원과 고유한 주체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쌍둥이 불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상호 간에 그리고 신과 조화로운 상태로 있었다면 우리는 쌍둥이 불꽃과의 우주적인 사랑의 아름다운 관계를 계속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빛을 그릇되게 사용하여 완전한 상태로부터 추락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카르마 (negative karma)를 짓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 오라 속에서 고밀도한 에너지 코일(coil)과 층들이 되어 그로 인해 쌍둥이 불꽃과 분리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점점 더 멀어져 급기야는 서로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께서 당신과 당신의 쌍둥이 불꽃을 합칠 수 있기 위해선 먼저 완수해야할 타인에 대한 카르마적 의무가 있습니다. 일체 생명에 대한 봉사 행위를 통해 카르마를 빨리 갚을수록 당신과 당신의 쌍둥이 불꽃은 더욱 빨리 해방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자신이 어떤 환경이나 인간관계 또는 혼인관계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신성 계획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서로에 주어야 하거나 혹은 서로에게 받아야할 아주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카르마적인 의무를 완수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기도를 통한 길인데 특히 바이올릿 불꽃을 불러일으키고 신과 가족,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할 때 효과적이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플라톤과 조하르가 우리의 나머지 반쪽과 합쳐지기 위해서 경건해지고 올곧게 되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쌍둥이 불꽃과 결합하는데 필요한 첫걸음은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 그리고 아앰 프레젠스와의 합일 - 유대 신비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과의 결합을 구해야 하는 겁니다. 당신의 쌍둥이 불꽃을 당신에게로 당겨오는 것 혹은 당신 둘을 해방시켜 그 목표에 더욱 가까이 데려가는 것은 당신이 세피롯의 사다리를 오르면서 모은 신의 빛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사랑이 쌍둥이 불꽃간의 사랑은 아닙니다. "영혼의 짝(soul mate)"이라 불리는 동질적인 영혼간의 사랑도 있습니다. 쌍둥이 불꽃이 동일한 영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영혼의 짝은 인생의 사명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점을 공유합니다. 그들은 여행의 파트너 혹은 동업자라는 의미에서 짝입니다. 당신 영혼의 환생의 기록에는 여러 번 그러한 친분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쌍둥이 불꽃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쌍둥이 불꽃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연인입니다.

지상에서 쌍둥이 불꽃은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영 안에서 그들은 항상 하나입니다. 카르마로 인해 당분간 떨어져 있다해도 영적인 수준에서 그들은 여전히 함께 일하고 있으며, 그들은 사랑의 결합된 모멘텀을 증폭시켜 일체 생명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유대 종교 운동인 하시디즘의 창시자인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는 쌍둥이 불꽃 관계의 아름다움과 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인간으로부터 천국에 직접 도달하는 한 빛이 일어난다. 그리고 합쳐지기로 운명된 두 영혼이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빛의 흐름은 함께 흐르게되고 보다 더 밝은 하나의 빛이 그들의 결합된 존재로부터 발산 되게 된다."

 

6) 데베쿠트(Devekut): 신과의 신비적 결합

카발리스트들은 영혼은 신적인 곳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고 믿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런 복귀를 데베쿠트 즉 신에게로 신비적인 결합을 통해서 추구합니다. 데베쿠트(Devekut)는 유대 신비가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숄렘은 데베쿠트는 "신에게로의 계속적인 집착 혹은 고착"이며 "영속적으로 신과 함께하는 존재 상태,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의 긴밀한 합일과 조화"라고 말합니다.

아코의 이삭(Isaac of Acco)에 의하면 데베쿠트에는 몇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평온의 단계(equanimity : 칭찬이나 비난에 무관심해짐), 집중 혹은 고독의 단계(신과 홀로 머뭄), 성령의 단계(깨달음과 각성), 그리고 예언의 단계가 그것입니다.

13세기의 신비적 철학자 랍비 나흐마니데스(Nahmanides)는 데베쿠트의 의미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언제나 신과 그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며, 돌아다니거나 누웠거나 일어나거나 간에 그를 생각하길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사람들과 얘기할 때 입과 혀로 대화하더라도 그대의 중심(heart)은 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한 자의 영혼은 생애 중에라도 영원한 생명의 사슬에 묶일 수 있다. 왜냐면 그들 스스로가 쉐키나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나흐마니데스는 이런 식으로 창조주에게 붙어버리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말합니다. 12세기의 유대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된 자는 변모되어져서 정상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을 지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는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지식으로 만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도달한 수준은 단지 지성만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한, " [하느님의 영이 그대 위로 내려오리니,] 그대는 그들과 함께 예언할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 변모되리라"(사무엘 상 10:6)고 한 말의 의미이다.

모제스 루자토(Moses Luzzatto)는 성령을 인간적 이성이나 지성보다 높은 깨달음(enlightenment)의 한 형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부여된 깨달음(bestowed enlightenment)"라 불렀습니다. "부여된 각성은 신께서 다양한 방편을 통해서 주신 영향으로 구성된다."고 루자토는 말합니다. "그런 영향이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면, 어떤 지식(information)이 그의 지성 안에 고정된다. 그는 그 지식을 어떤 의심이나 오류없이 명확히 인식하며, 그의 원인과 결과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구도에 있어서의 그것의 위치까지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아코의 이삭처럼 루자토는 깨달음보다 높은 데베쿠트의 형태인 "참된 예언의 단계"를 다음같이 묘사했습니다.

이는 개인이 스스로를 글자 그대로 신에게 묶이게 하여 그 귀속 상태를 실제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 오는 영감이다. 그때 그는 자신이 묶여있는 곳이 신임을 분명하게 안다. 이것은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은 완전한 명료함과 자각에 의해 느껴진다. 그 사람은 육체적 감각으로서 물질적 대상을 관찰하는 것처럼 그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때 진정한 예언의 주요한 개념은 살아있는 인간이 신과의 그러한 귀속과 결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지극히 높은 완전함의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종종 어떤 지식과 깨달음이 동반된다. 예언을 통해 그는 신의 숨겨진 신비들 속에 있는 많은 숭고한 진리들에 관한 지식을 획득한다. 이러한 것들은 부여된 깨달음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처럼 아주 분명하게 인식된다. 하지만 예언은 루아 하코데쉬[Ruah HaKodesh 성령]보다 더 커다란 강도와 더불어 오는 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은 성령을 받을 기회가 카발리스트들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길, "나는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케 하거니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자유인이건 노예건 그 누구라도 그의 행위들이 훌륭하다면, 루아 하코데쉬가 그에게 내려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리예 카플란(Aryeh Kaplan)은 요엘서의 약속을 신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성령을 받게 하시리라는 증거로 지적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나의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다."(요엘 2:28,29)

영혼과 신과의 합일을 묘사하기 위해 아코의 이삭은 대양속의 물방울 은유를 사용하여 이처럼 말합니다: "영혼은 신성한 지성에 붙어버리고 그것은 영혼에게 붙어버릴 것이니. 영혼과 지성은 단일의 실체(entity)가 되리라. 단지의 물을 흐르는 샘 속에 쏟아부은 것처럼, 모두가 하나가 된다. 이것이 '불을 삼키우는 불'이란 말의 비밀한 의미이다. "이 영혼은 아인소프와 결합하여 전체적이고도(total) 보편적으로(universal) 될 것이다. 궁전에 갇혀있는 동안 그 안에서의 체험으로 인해 영혼은 개별적이었으나 그의 진정한 근원의 본성 때문에 보편적으로 될 것이다."

하시디즘의 선생인 체르노빌의 랍비 메나헴 나훔은 영혼과 근원과의 결합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분과 전체인 아인소프의 결합에 의해 그는 신성한 통일성(divine unity)에 붙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뿌리에 붙은 가지처럼 아인소프의 거룩함의 빛이 그 안에 빛나게 된다."

7) 영혼의 사후 여행

조하르에 의하면 영혼의 사후 여행은 그가 지상에서 추구했던 데베쿠트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영혼은 거룩한 세력 혹은 부정한 세력에 붙음으로써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는 셈입니다.

그 욕망이 거룩하신 분에 대한 끊임없는 데베쿠트인 의로운 자는 복되도다. 그들은 그분에 계속 붙어있으리니, 그분 또한 그들에게 붙어 그들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 욕망과 데베쿠트로 인해 그분과 멀어진 악한 자는 슬프도다. 그들 자신을 그 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다른 쪽[악마적인 힘의 영역]"으로 붙게 될 것이다. 세상을 떠날 때 의로운 자의 영혼은 상승하리니 그들을 위해 거룩하신 분께서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생활을 반영하는 새로운 형체를 준비해주시리니 그것을 그들이 입게 될 것이다. 영혼이 세상을 떠난 뒤 가게되는 길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이 세상에서 취했던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분을 향하고 그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하다면 그를 떠나는 영혼은 이 세상에서 그 영혼에게 매일 주어진 추진력에 의해 높은 세계로 끌려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조하르에 실린 랍비 압바의 이야기는 이 주제를 좀 더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동방의 아이들"의 자손들이 사는 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들이 "옛 지혜"를 그에게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서 중에 하나를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안에 기록되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세운 목표에 따라 높은 곳으로부터 어떤 영을 자신에게 끌어오게 된다고 했다. 그가 거룩하고도 고상한 대상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대상을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의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욕망이 다른 쪽에 붙어있고, 그것을 자신의 전적인 의도로 만들었다면, 그는 위로부터 다른 영향력을 자신에게 끌어오게 된다.

그들은 계속 말하길, 모든 것은 그 사람이 습관들인 말과 행동, 의도의 종류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습관적으로 붙을 쪽을 높은 곳으로부터 이곳 아래로 끌어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나는 같은 책에서 별들에 대한 경배에 딸린 의례와 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경배자에게 끌어오기 위해 그것들에게 생각을 어떻게 집중할지에 관해 필요한 공식과 지침들을 발견했다. 같은 원리가 높은 곳의 거룩한 영과 결합하기 원하는 자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높은 곳으로부터 그 영을 자신에게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은 그의 행위, 그의 말, 그의 열의와 헌신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욱 말하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한 방향을 따라가면,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동일한 방향으로 더욱 더 인도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집착한 그대로 다른 세계에서도 집착하게 된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면 거룩한 것에게로, 불경한 것이면 불경한 것에게로 붙을 것이다라고 했다. 거룩함에 매달린다면 높은 곳에서도 그 쪽으로 끌리게 될 것이고, 천사들과 거룩하신 분 앞에서 섬기는 일꾼이 될 것이며, 저들 거룩한 존재들 속에 서게 되리라. 마찬가지로 깨끗지 못한 것에 매달린다면 그쪽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니, 불결한 무리의 일원이 될 것이요, 그들에게 속하게 되리라. 이들은 "인류의 해충" 이라고 불린다.

승천대사들도 카발리스트들처럼 영혼의 목표는 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영혼이 세상을 떠났으나 최종적인 재결합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면 다음의 환생에 앞서 중간적인 계(plane)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신에게 바쳐진 생을 살았던 진보된 영혼들은 천사들에게 인도되어 천상세계의 도장(retreat)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적인 진보를 이루며 다음 생의 도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생과 생 사이에 그런 학교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영혼은 조하르에서 깨끗지 못한 쪽이라고 묘사된 아스트랄계에 붙어버립니다. 아스트랄계에서 그들은 (조하르에서 "인류의 해충"이라고 불린) 영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이들 영들의 에너지는 인류의 가장 저급한 공통 분모상에서 진동합니다.

조하르의 공식은 간단합니다. 지상에 있을 때 물질적인 물건, 권력, 지위, 야심, 저급한 욕망과 같은 지상적인 것에 집착했으면, 죽어서 그 영혼은 빛의 영역으로 자유로이 올라갈 수 없게 됩니다. 세피롯을 명상하고, 승천 대사들과 친교를 나누고, 천사들을 사귀는 등 천상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습관을 들였다면 그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빛으로 끌려가게 되어 조하르의 말처럼 거룩한 존재들 속에 있게 됩니다.

 

8) 영혼의 최종적 상승

신과의 신비적 결합은 기도와 경배, 명상 그리고 선한 일로써 매일 매일 자기자신을 신에게 붙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카발리스트들은 영혼이 그 근원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는 최종적 결합에 대해 얘기합니다. 조하르에서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힌 자로 묘사됩니다. 영혼은 단 하나의 그리움을 가진 유배자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그가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에 대해 스펜서는 쓰길,

세피롯의 현현으로서 영혼은 '신성한 이데아 속에 숨겨진 채로' 천상 세계들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그는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기로 - 신과 재결합하기로 맹세했다. 지상의 생활 동안 그는 의로운 행위들로부터 빛의 의복을 짠다. 그것은 사후에 "광채의 영역"에서 입을 것이다. 자신의 성장을 마쳤을 때 영혼은 마지막 축복 속에서 그 근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신과 재결합한다. 이 결합은 사랑의 어휘로 묘사된다. 영혼은 "사랑의 궁전"에서 "여왕인 쉐키나" 혹은 "천상의 왕이신 거룩하신 분"과 합쳐진다. 그러나 영혼이 "더 높은 세계"로 데려가지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거룩하신 분을 향했고 그 분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했을 때" 뿐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지상에 다시 환생하거나, "게헨나의 불 속에서" 정화되거나 심지어는 파괴되기도 한다. 환생은 후대의 카발리스트들에 의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조하르에서는 명백히 예외적인 운명이다.

카발라가 발전해감에 따라 환생은 단순한 형벌로 여겨지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전생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도록 영혼에게 주어지는 기회로 여겨지게 됩니다. 영혼은 완전해져서 신과 재결합하게 되기 전까지 여러 생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성령의 시험들을 계속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끝나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영혼은 신과의 그 어떠한 일체성도 유지하질 못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승천 대사들은 영혼이 생명에 대한 봉사로 여러 생애를 보낸 뒤 신에게로 승천하여 '아앰 프레젠스'와 재결합하였을 때 영구적인 존재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와 같이 지상의 교실을 졸업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1) 영혼이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에 붙어야 하고, (2) 적어도 51퍼센트의 카르마를 갚아야 하고 (3) 자신의 신성 계획에 따른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승천에 의한 '아앰 프레젠스'와의 재결합은 살아있는 모든 영혼의 생의 최종적 목표입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신명기 32:39)' 카발리스트들은 이 두 개의 성구가 영혼과 신과의 궁극적 합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어느 유대 신비가는 이에 대해 말하길, '이 구절의 비밀은 힘의 결합 - 즉 예언의 원이라 불리는 초월적 신성의 힘과 인간적 힘의 결합이다. '나 곧 내가 그'는 신성과 인간의 합일을 상징한다'

스페인의 카발리스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의 한 제자는 흥미로운 이미지로써 영혼의 승천과 합일을 얘기했습니다. 그에 의하자면 히브리 문자 요드(yod)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는 일체로부터 힘을 받은 이 세계 속의 요드(yod)이다. 그리고 그는 세피롯 속의 요드(yod)와 마찬가지로 일체를 구성한다. 이 요드와 저 요드간에 영성의 측면에서 볼 때의 아주 미묘한 차이말고는 식별될 수 있는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을 알라. 이것이 '그분에게 붙어라(cleave unto Him 신명기 13:4)'라는 말의 비밀이다. 그것은 완전한 원을 이루기 위해 요드가 요드에게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문자 요드는 태극의 반쪽을 머리가 위로가게 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태극은 마치 두 개의 요드를 서로 거꾸로 향하게 한 채 합쳐 놓은 모양과 같습니다. )

원은 인간과 신의 합일을 상징합니다. 이델(Idel)은 설명하길, "두 요드 각각은 원의 반쪽으로 정의된다. 그 원은 아래의 사람이 (보좌에 앉아 있고 '우리 의로움의 주'라 부리는) 위의 사람으로 승천하여 들어감으로써 완성된다. 사람은 더 큰 단위인 원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승천에 의해 그는 그 원을 다시 이룰 수 있다.

“요드가 요드에게 결합하는 것"은 아래의 당신 안에 계신 신이 위의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신 안에 있는 신의 힘에 이름으로써 자신의 저급 자아를 상부 자아 속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의로움의 주이신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와 하나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아앰 프레젠스와 하나가 됩니다. 승천 대사들이 준 신성 자아의 그림을 볼 때 그 전체 그림을 싸고 있는 타원을 그리고 다시 그 타원 안에 8자를 그려봅니다. 이때 아앰 프레젠스는 8자의 윗부분이고 영혼은 아래 부분에 해당됩니다. 그 8자의 연 결점에 하느님의 아들, 우리 의로움의 주이신 티페렛이 있습니다. 티페렛을 통해서 당신의 영혼(아래의 요드)은 아앰 프레젠스(위의 요드)에게로 끌려가 더 이상 둘이 아닌 하나로 됩니다.


출처: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