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인 공부/단군과 한민족
삼한 관경본기 (三韓觀境本紀)
柏道
2019. 8. 6. 14:34
삼한 관경본기 (三韓觀境本紀)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의 땅에 우뚝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 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桓雄天王)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雲師)는 백검((伯劍;백사람을 거느리는 지휘자의 상징)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天帝)가 산에 임하실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君)이 천제(天帝)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天王)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노(長老)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공장,축산,농사,측후,예절,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熊氏;雄과 같은 뜻)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이라고 있었는 데 안부련(安夫連; 8세 환웅) 말기의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환웅 아들 신농(神農;염제 신농씨를 뜻한다.중국 삼황 가운대 두번째 황제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한국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씨의 후예이다, 농사와 의약의 원조라고 불리운다.)은 수 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중국 호북성 수현의 북쪽에 있다.)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別孤;지파)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공손헌원(公孫軒轅, 후에 황제가 되어 황제 헌원(皇帝軒轅)이라 부른다. 중국 "사기"에 중국 삼황오제가 이름과 나라만 다를뿐 모두 같은 성씨라 하였다, 여기서 신농의 별고라 하였으니, 신농과 황제가 동이족임을 뜻한다.)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13세 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받아서 왕검(王儉)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대,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 한 세 가(馬韓世家) (상) 마한(馬汗, 馬韓은 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동쪽 지역을 다스린 비왕(裨王)의 명칭으로 말(馬) 임금이라는 뜻이다. 말(馬)을 넣은 칭호는 고구려(高究黎) 때도 사용되었는데, 사서에는 마려(馬黎), 마리(摩離), 마여(麻餘) 등으로 적혀 있다. 위 마(摩. 麻)는 마(馬)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여(餘. 余)는 무리라는 뜻인 여(黎.與)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며, 이(離)는 여(黎. 與) 대신에 사용된 글자이다. 고기에는 마한(馬韓)이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B.C. 194년 이후에 한반도에 세워진 마한(馬韓)이라는 나라 또는 마한의 통치자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B.C. 194년 이후 한반도에 세워진 마한(馬韓)이라는 나라를 살펴본다. 첫째,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지금의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韓) 무리들을 공파(攻破)한 후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둘째,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마한을 세운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들이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서 홍성(洪城) 금마(金馬)에 수도를 두고 나라 이름을 계속 마한이라 불렀다. 이 마한(馬韓)은 A.D. 9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셋째,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멸망하였을 때 금강(錦江) 이남 지방의 소국(小國)들이 뭉쳐 마한연맹(馬韓聯盟)을 만든 후 익산(益山) 금마(金馬)에 수도를 두고 나라이름을 계속 마한이라 불렀다. 이 마한은 A.D. 205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한반도에서 마한(馬韓)이라 불린 지역은 B.C. 194년 이전에는 한반도 전지역이었고, 홍성 금마 마한 때는 한수(漢水) 이남 지역이었으며, 익산 금마 마한(馬韓) 때는 금강(錦江) 이남 지역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연맹(馬韓聯盟)이나 마한왕(馬韓王)이 모두 마한(馬韓)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전후 문맥을 보고 마한(馬韓)이 마한연맹(馬韓聯盟)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마한왕(馬韓王)을 가리키는지 판단해야 한다. (해설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곰무리와 범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苗桓)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積)을 하나로 하고 ,음(陰)은 십거(十鋸)를 세우고 양(陽)은 무궤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 봉황(성스런 왕이 출현할때 나타난다는 성스런 새로서,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을 뜻한다.옛부터 동양의 상징적 동물 가운데 봉황은 동방족인 동이족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용은 서반족 즉 중국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중국 또한 왕들중에 봉황으로 상징되는 왕들은 동이족이라한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중국의 왕들중 거의가 용을 상징하는데 삼황오제는 봉황을 상징한다는 점이다.)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칠회는 오행<金,木,水,火,土>에 음양<月,日>을 보태 오늘날의 일주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힐),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여기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환역(桓易)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천부(天符)의 유의(遺意)였다,(신지는 고대의 문자를 주관 하는 벼슬이름, 혁덕은 그관리의 이름)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三神)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그 글에 가로대 일신은 충에 내리고(一神降衷) 성은 광명으로 통하니(性通光明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弘益人間)고 했다. 이때 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의 웅상(雄常;옛글에 의하면 지나족은 암컷을 뜻하고 동이족은 수컷을 뜻한다한다. 그래서 중국은 고대에 자신들의 왕을 동이족으로 하였다한다. 하지만 중국이 이를 수치스러워하여 이것의 해석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일고 있다고 한다.)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 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bc 2707- )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징벌코자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이다. 싸움이 있기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2종당(宗黨)의 대인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대 ,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熊氏君)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서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대답해 가로대 도의 대원(大原)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요.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일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기틀(機)이 있으니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볼 수가 있고, 땅에는 모양이 있으니 내 몸이 모양에서 볼 수가 있으며 , 사물에는 주관함이 있으니 내 기의 주관함에서 알 수가 있음이라. 이에 하나를 잡아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으면 하나도 돌아감인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붓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人三)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 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하니 임금께서는 옳을시고 그 말씀이여! 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이라 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治亂)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은 글을 올려 가로대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聖主)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강화군 길성면에 있는 고성)을 혈구(穴口;지금의 강화도)에 쌓고 제천의 단(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을 마리산(摩璃山)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가 즉위하였다. 이 때가 단군부루 12년 임자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의 책력( 단군세기에 의하면 임자12년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를 새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경신년에 도전(稻田)을 일구고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가륵 제 3년 불여래가 죽고 아들 두라문이 즉위했다. 을사년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건으로 서 중일을 잃으면 물체는 곧 뒤죽박죽이 되나니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뭇중생의 마음은 오직 어두울 뿐이다.전인은 통찰하여 골고루 한 가운데에 서서 잃는 일 없게 할 지며, 그런 후에라야 마침내 하나도 평정되나니라. 유중유일의 도(惟中惟一之道 ;중심이 잡힌 한결같은 도)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성스럽고, 임금된 자로서는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충성스러워야 하며, 부부된 자로서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할지며, 형제된 자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지며, 노소는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지며, 친구된자는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할 지니라. 식신,공검,수학,연업,계지,발능,홍익에 서로 힘쓰며 성기,자유,개물, 평등하면 천하는 절로 맡겨도 된다.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여 나라 법을 지키고 각자가 맡은 바 직책에 힘써서 부지런히 산업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는 몸을 던져 옳음을 따르며 힘껏 앞으로 나아간다면 만세의 무강한 나라를 이룸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짐이 그대들 국인과 더불어 절절하게 행하여 바꾸는 일 없을 것이라. 성현 모두의 지극한 뜻이나니 다 받들어 공경할 것인저라 하였다. 두라문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위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의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정정 30인 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 청천강이 아닌 중국의 난하로 비정)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閱兵)하도록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를 하사하여 가관(加冠)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의 동생인 두라시의 증손 막연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區)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一乘)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제의 임인년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가 바햐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로 전(佺)을 삼아 경당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나라의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의 을묘년에 사리가 죽으니 동생 아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의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의 무신년에 갈지의 아들 을아가 즉위하였다. 기유년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의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독로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흘제의 경오년에 아들 아루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bc 1285 년) 마한세가(馬韓世家) (하) 단군 색불루(索弗婁;: 22세 단군)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과馬韓) 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전제(前帝; 21세 단군 소태)는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임금이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과 개천령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죽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마한19대)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의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바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읍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 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부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대로 하였다 ,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아실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 가 즉위했다. 기묘년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아들 서여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에 아들 아화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의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사우가 즉위했다. 무자년에 주나라왕 의구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 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에 아들 궁흘(弓忽;마한27세)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에 협야후(陜野侯;배반명)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왜(倭): 고대에 남해안,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토착민을 말한다. 특정 나라 이름이 아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 지역에 거주한 토착민, 만주나 한반도에서 이주한 무리들이 왜(倭) 지역의 토착민을 정복하고 세운 소국(小國), 왜(倭) 지역에 있던 소국(小國)의 주민들을 군사로 사용한 마한연맹(馬韓聯盟)이나 구태백제(九台百濟)가 모두 왜(倭)로 적혀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倭)를 전부 토착민으로 보지 말고 왜(倭)가 어느 경우를 가리키는지 전후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된다 구주왜(九州倭) : B.C. 194년경에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한 진,변한계 무리들 중 일부는 다시 구주(九州)로 이주하여 수십 개의 소국(小國)을 세웠는데, 사학자들은 고대에 구주에 거주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구주왜(九州倭)라 불렀다. 이 구주왜는 A.D. 97~103년경에 가야계(加耶系)인 일향국(日向國)이 중심이 되어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라는 소국연맹(小國聯盟)을 만들어 일본열도를 지배하였다. 이 야마대연맹은 A.D. 205~208년경부터 A.D. 238년까지 구태백제(九台百濟)에 복속하였다. 그 뒤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방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후부터 대화왜(大和倭)에게 일본열도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다가 A.D. 400~479년까지 광개토왕이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任那聯政)에 복속하였다. 그 뒤 A.D. 488년에 대화(大和) 지방에 인현조(仁賢朝)가 세워진 후부터 다시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다가 A.D. 522년부터 698년까지 일시 대화왜(大和倭)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그 우두머리의 칭호를 다시 천황(天皇)이라 칭하였으나, 7세기 말경부터 다시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였다(해설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궁흘이 죽으니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의 계유년에 아들 다도 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에 아들 사라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에 상장 구물(上將 丘勿 ; 44세 단군)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32대)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典那;: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孟男;35대 마지막 마한))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莫朝鮮=마한 후기명)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高列加;47세 마지막 단군)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왕(秦王) 정(政; 진시황(秦始皇)을 말한다)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番韓世家)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를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인 우(虞)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虞; 舜)를 낭야성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구려분정(九黎分政) :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중국의 회대(淮岱) 지방에 둔 분조(分朝)이다. 배달국(倍達國) 때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동부와 북부 지방을 점령한 후 회대(淮岱) 사이에 웅거(雄據)하였다. 그 뒤 왕검(王儉)이 배달국 지역에 왕검조선을 세운 후 지역을 3분하여 만주중앙은 진한(辰汗)이, 연해주, 한반도, 대마도, 구주 등 동쪽은 마한(馬汗)이, 중국북부지방과 만주남부지방 등 남쪽은 번한(番汗)이 각각 다스리고, 중국동부에 있는 회대 지방에는 분조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 분조를 구려분정(九黎分政)이라 불렀다. 구려분정의 치소는 산동성 제성현 동남쪽에 있는 "낭야성(琅耶城)"이었다. (해설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蚩頭男 :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에 열두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2대)가 즉위하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 순임금 때 제후들을 통솔하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垈)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鋸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황거종(皇鋸宗)의 보물 3가지를 말한다)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虞司空)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구려(九黎): 구려(九黎), 구주(九州), 구지(九地), 8대주(八大州) 등은 온 세상 또는 아주 넓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온 세상을 9방으로 보고 하늘나라를 구천(九天)이라 부르고 지상세계를 구지(九地)라 불렀는데, 구려(九黎)는 자신들의 조상(祖上)이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왔다고 믿은 무리(黎)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즉 구려(九黎)는 고대에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등지에 살면서 해와 달을 천제(天帝 : 하늘나라 임금)로 숭배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뒤에 구려(九黎) 앞에 "高"자를 붙여 나라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삼국유사 마한(馬韓) 편에는 구려(九黎)가 구이(九夷)로 적혀 있고,환단고기에는 구려(九黎)가 부여(夫餘) 또는 구환(九桓)으로 적혀 있다. 구려(九黎)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고대에 구려 무리들이 사용한 용어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천해의 동쪽에 살던 무리들 중 일부는 갑자년(B.C. 3897)에 환인의 아들 환웅과 같이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로 남하하여 배달국을 세웠고, 무진년(B.C. 2333)에 왕검(王儉)이 구려(九黎) 무리들을 통합하여 배달국 지역에 조선(朝鮮 : 왕검조선)을 세웠다. 구려(九黎)의 역사는 7명의 환인(桓因)이 다스린 환국(桓國), 18명의 환웅(桓雄)이 다스린 배달국(倍達國), 47명의 단제(檀帝)가 다스린 왕검조선(王儉朝鮮) 순서로 이어졌다. (해설: 고기론 본 한국고대사)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에 아들 물길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이 죽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5세 단군 구을)께서 순시하사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예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의 기축년에 아들 오라가 즉위했다. 갑신년에 하나라 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의 병인년에 동생 거세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산신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이 즉위했다. 경인년, 명을 받아 삼신의 당 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 아들 백전이 즉위했고, 박전이 죽은 뒤 을미년에 중제 중전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에 아들 소전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 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둑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素胎l: 21세 단군) 5년 우사(雨師)의 소정(小丁;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番韓世家) (하) 단군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왕 무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徐于餘;30대 번한)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툐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이 즉위하였다. 북박(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이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監星)을 두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동생 등나가 즉위했다. 이극희(李克會)가 말씀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에 아들 해수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細言)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31세 단군 등올)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淮軍)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춘년에 아들 나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에 아들 차음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불리가 즉위했고, 그도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여을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가 즉위했다.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마건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에 천한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진년에 아들 노물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道乙;60대 번한))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 公子)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 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겼다.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에 아들 사양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서울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 인을 데리고 와 싸음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BC323년 일명 기자조선의 시작으로 수유족이다.)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에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 172)에 아들 기비(箕丕 ;73대)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 194)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한기7004-BC194년 번조선(=번한)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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