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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67절) 자기를 모르면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67절) 자기를 모르면

柏道 2019. 1. 3. 16:28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Lambdin Translation

Davies Translation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67. 자기를 모르면

나를 아는 앎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Jesus said, "If one who knows the all still feels a personal deficiency, he is completely deficient."


Jesus said: one who knows everything else but who does not know himself knows nothing. (NOTE alternatives)


Jesus says:

"Whoever knows all, if he is lacking one thing, he is (already) lacking everything."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공관복음에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16:26, 8:36, 9:25).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2)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 목숨이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앎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를 통해 많이 알려진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앎과 자기 스스로를 아는 앎이 그것이다. 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바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일반적 앎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이나 직관 같은 앎이 있다. 초월적인 혜안慧眼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둘째 종류의 특수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 종류의 일반적인 앎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반적 앎을 기초로 하여 굳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인습적 지식을 알음알이혹은 분별지分別智라고 하여 위험시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도덕경47장에도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심지어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알 수 있는 앎을 추구하라고 하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덜 알게되니 조심하라고 했다. 곧이어 48장에서도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일상적 지식을 쌓느라 부산하게 쏘다닐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깊은 내면적 성찰을 통해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본래의 나를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가 금방 한물간obsolete’‘지식knowledge’, 이른바 ‘obsoledge’가 되어 폐기처분해야 할 것으로 변하는 마당에 그런 것에 연연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앎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앎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잘못 아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앎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앎을 두고 중세 신비주의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도 무지하고 아테네 사람들도 무지하지만 자기와 아테네 사람들과의 차이는,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반해, 자기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무지가 바로 박학한 무지인 셈이다.

[출처] 도마복음 제67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