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8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8
35.영혼이 병들었을 때 어떻게 그가 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기도한다면......” 여기서 강조하
는 것은 ‘너희’이다,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그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 그대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그 행위는 그대의 호의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에고에서 나온 것인가? 만일 그대가 거리에 혼자 있는데 걸인이 다가온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리 비켜요!”
그대가 걸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대의 에고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걸인 역시 그러한 심리를 알고
있다, 걸인들은 그대 혼자만 길에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결코 그대에게
적선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기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대의 곁을
그저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친구들과 함께 있다면 걸인은 그대를 붙잡을 것이다.
시장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걸인은 그대를 붙잡는다,
걸인들은 만일 그대가 적선을 거부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
할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의 에고를 구하기 위해서 적선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적선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잘 기억하라, 그대가 그런 식으로
걸인에게 적선을 할 때마다, 그 걸인은 자기의 동료 걸인에게 자신이 그대를
얼마나 잘 속였는지, 그대를 어떻게 바보로 만들었는지를 말할 것이다, 그대가 왜 자기에게 돈을 주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웃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동정심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동정심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느끼는 것
이고, 그대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아주 깊게 느끼면 그 불행은 그대의 일부
가 된다, 불행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불행에 대한 책임감 또한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면 어느 정도 그대에게도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는 부분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걸인들을 만들어낸 이 사회의 일원이다, 나는 착취를 만드는 사회, 정부, 그
리고 체제를 돕고 있다, 나는 이러한 구조의 일부이며 이 걸인은 희생자이
다, 그래서 그대는 동정심뿐만 아니라 책임도 느끼는 것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대가 걸인에게 얼마를 베푼다면 걸인
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동정심에서 우
러나왔다면 오히려 그대가 그 걸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알기 때문이다.
사회는 존속하고 있고 걸인들을 만들어낸 이 사회에 그대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사회 구조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없이 부자는 존재할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부자가 그대 자신 또한 부자가 되고 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대는 모든 책임과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그때
적선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만일 그대가 걸인에게 동전 몇 닢을 주고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주어라, 그때 그것은 걸인에
게 주는 것이 아니고,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친구와 나누어 갖는 것
이다, 걸인이 친구가 될 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을 갖는다.
그대는 그 걸인보다 높지 않으며, 그대는 그 걸인에게 무언가 장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대의 에고를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대는 이렇게 느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런 적은 돈을 주는 것으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선사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의 오두막 집에
서 혼자 살고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한 도둑이 그의 오두막 집에
들어왔다, 선사는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선사에게는 도둑이 가져갈 것이
라고는 담요 한 장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때 그는 그것을 몸에 두르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도둑이
들어왔을 때 그 담요를 문 옆에 걸어두고 구석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도둑은 방 안을 둘러 보았으나 어둠 때문에 그 담요를 볼 수가 없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둑은 실망하고 방을 나가고 있었다, 그때 선사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담요를 가져가시오! 대단히 미안하게 됐소, 이 추운
밤에 그렇게 먼 길을 오셨는데 이 집에서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
오.
다음에 올 때는 미리 나에게 말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겠소,
나는 가난하지만 무언가를 마련하겠소,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훔쳐갈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가슴이 아플 거요,
거절하지 말고 부디 그 담요를 가져 가시오!”
도둑은 도대체 이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담요를 들고 달아나버렸다.
그날 밤 선사는 창가에 앉아서 한 편의 시를 썼다, 추운 밤이었다, 보름달
은 하늘에 떠 있었고 그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달이구나! 저 달을 그 도둑에게 주면 좋으련만!”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도둑에 대한 연민으로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 불쌍한 사람은 그렇게도 먼 곳에서 왔는데!”
얼마 후 도둑이 잡혔다, 그는 또다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고 그 담요가
도둑에게서 발견되었다, 그 담요는 매우 유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
이 그 담요가 선사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사는 법정에까지 가야만 했다, 재판관이 말했다, “이 담요가 당신
것이라고 말만 해주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사람이 담요를 당신의 오두막 집에서 훔쳤습니다, 그러니 그렇다고만 말해 주시오, 그것으로 다입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는 절대로 그것을 훔치지 않았소, 그는 도둑이 아니오,
그가 나를 찾아온 적은 있었지만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소, 그것은 나의 선물
이오, 그 담요는 내가 그에게 준 것이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것밖에 줄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마음이 아프오, 그 담요는 너무 오래된 것이라 별 가치
도 없소, 그리고 이 사람은 아주 선한 사람이오, 그는 그 담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었소.”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서 베풀기 때문이다, 그대
는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면 그대는 놓친다, 완전
히 놓치게 된다.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사람들이 너희 앞에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그들 중 병든 자를 낫게 해주어라.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사람들이
무엇을 주든지 그것을 받으라, 무조건 받으라”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승려들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불교는 크게 퍼져 있
다, 전 세계의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자이나교
는 이 인도라는 나라에만 한정되어 있고 신도 숫자도 삼백만 정도에 불과하
다.
마하비라와 붓다는 같은 수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자이나교는
그들의 메시지를 나라 밖으로 전할 수가 없었는가? 그것은 자이나교의 승려들 때문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조건이 있다, 특정한 종류의 음식이, 특정한 절차로, 특정한 자세로 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인도 밖을 나갈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인도에서조차
그들은 자이나교도들이 사는 마을로만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음식을
받아먹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식 조건 때문에 마하비라는 세계에서 무용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세계는 이 위대한 인간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어느 마을이든지 그곳을
지날 때,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사람들이 너희 앞에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어떤 특정한 것만을 먹는다고 조건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
다.
세상에서 그대의 행동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조건을 만든다
면 그대는 하나의 짐을 지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혀 짐이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주어지는 것은 뭐든지 먹을 것이며, 그들이 입을 수 있는 것은 무엇
이든지 입을 것이고, 어떤 기후에서도 살아갈 것이며,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도 어울릴 것이다, 기독교가 마치 불길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조건이 붙지 않는 제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하라고 말한다. “...... 그들 중
병든 자를 낫게 해주어라.” 그는 “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메시지를 믿게 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
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병든 자를 고쳐주어
라! 병든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병든 자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의 영혼이 병들었을 때 어떻게 그가 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병든 자를 고쳐주어라, 그 사람을 전체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단 그 사람이 전체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되면, 그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봉사자, 치유자가 되어라, 단지 사람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심리학적으로 모든 사람은 병들어 있다, 생리학적으로는 병들어 있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은 병들어 있다, 그리고 마음에
는 깊은 치료가 필요하다, 예수는 말한다. “치유자가 되어라, 그리고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 주어라.”
36. 일단 그대의 존재 내부에 뿌리를 내리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
마음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잘 이해하도록 하라, 마음이 분리된 것이
병이고, 분리되지 않은 것이 치유이다, 만일 마음속에 대립되는 것이 많이
있다면 그것은 병이다, 그것은 한 무리의 군중과도 같다, 미친 군중과도 같
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만 마음속에 있다면 마음은 치유된 것이다, 그 하나
를 통해서 결정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 하나가 되지 않으면 병든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대의 마음이 그 하나가 되는 어떤 순간이 있다, 때로 그 순간은 우연히
일어난다, 어느 날 아침, 그대가 일찍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은 신선하고 태양
은 떠오르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대는 하나로 통합이 된다,
그대는 장사하러 나가는 것을 잊는다, 사무실에 출근해야 하는 것을 잊는다.
그대는 그대가 힌두교도인지, 이슬람교도인지, 또는 기독교도인지를 잊는
다, 또한 그대는 그대가 아버지라든가 어머니,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그대는 이 세상 일 모두를 잊어버린다.
떠오르는 태양은 그토록 아름답고 아침은 그렇게도 신선하다, 그대는 그것
속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하나가 된 것이다, 그 한순간, 그대가 하나일 때
마음은 전체가 되며 건강하다, 그대는 어떤 강렬한 환희가 그대의 존재 전체
를 굽이쳐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그대가 의식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마음이 하나일 때는 언제나 높은 질의 것은 스스로 드러나고 낮은 질의
것은 곧바로 가라앉는다, 그것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다, 교장이
학교에 있을 때 선생들은 잘 가르치고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한다, 거기에는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교장이 외출을 하면 선생들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선생들에게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질서는 흐트러진다, 낮은 차원의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생들은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실 것이며 잡담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선생들이 아직 교실에 있는 동안은 학생들은 얌전하다, 그러나 선생
이 교실을 나가기라도 하면 교실은 난장판이 된다, 마치 미친 군중들과도
같다, 그리고 선생이 들어오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변한다, 높은 차원의
힘이 들어옴으로써 혼란은 사라진다.
이 혼란이라는 것은 곧, 높은 상태의 힘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
혼란이 없고 조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높은 차원의 힘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대들의 마음은 혼란 속에 있다, 하나의 높은 지점이, 하나의 높은 상태의
결정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대들은 마치 학교의 아이들과도 같다, 선생이 없
는, 난장판이 된 교실과도 같다, 그대가 하나로 통합될 때마다, 곧바로 보다
높은 차원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치유해 주어라,”‘치유(heal)'라는 단어는 ’전체(whole)'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성한(holy)'이라는 단어 역시 치유나 전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병든 사람을 치유해 주어라, 그러면 그는 전체가 될 것이고 그가 전체적인
인간이 될 때 그는 신성해진다, 이것이 바로 모든 과정이다, 마음이 병든
이유는 그 안에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에 중심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이 중심이 바로 나다”라고 그대는 말할 수 있는가? 매순간 중심은 변한다, 아침에 그대는 화를 낸다, 그리고 그 화가 그대 자신이라고 느낀다, 오후에 그대는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감정이 그대 자신이라고
느낀다, 밤에 그대는 좌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좌절감은 그대 자신이 된다,
과연 그대에게 중심이 있는가? 아니면 그대는 단지 떠도는 군중인가?
지금의 그대 상태로는 그대에게 중심이란 없다, 그리고 중심이 없는 사람
은 병든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이란 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
수는 말했다. “사람들에게 중심을 주어라!” 그렇게 되면 그대에게 어떤 혼란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는 중심이 존재한다.
그대는 하루 스물네 시간 그 중심에 머무르게 된다,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그대의 내면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속하는 실체가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그것을 이런 방법으로 관찰해 보라, 세 개의 층이 존재한다, 한 개의 층은
대상적인 층이다, 주변에 있는 대상적 세계의 층을 말한다, 그대가 가진 감
각들은 그것에 대해서 보고한다, 그대의 눈은 보고, 그대의 귀는 들으며, 그
대의 손은 만진다, 그 대상적 세계가 바로 존재의 첫 번째 층이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이 첫 번째 층 속에 빠져버리게 되면 그대는 가장 표면
의 층에 만족한 채 남아 있게 된다, 두 번째 층은 그대의 내부에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층이다, 생각, 감정, 사랑, 분노, 느낌들...... 이러한 것들이 두
번째 층이다, 첫 번째 층은 공통된 것이다, 만일 내가 손에 돌을 들고 있다면
그대들은 그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공통된 대상들이다.
그러나 두 번째 층에 관한 한, 그대가 나를 본다 해도 그대는 결코 나를 보
지 못한다, 그대는 오직 나의 육체를 볼 뿐이다, 내가 그대를 볼 때 역시 나
는 결코 그대를 보지 못한다, 나는 오직 그대의 육체를 볼 뿐이다, 아무도 그
대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은 그대의 행동을 볼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반
응을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그대의 얼굴에 나타난 분노의 표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대가 육체로 표현하는 사랑의 동작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대의 사랑 그 자체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그대는 사랑의 동작만을 할 뿐 사랑의 감정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여태껏 그대가 해오고 있는 짓이다.
그대의 육체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대
상적 세계는 공통된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과학의 세계이다, 과학은 대
상적 세계만이 오직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우
리는 당신의 생각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오직 당신만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험할 수가 없고 그것을
볼 수도 없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서 보고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는 당신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대의 생각은 물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질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지 공통된 것은 아니다.
외부의 층, 즉 첫 번째 표면의 층은 과학을 낳는다, 생각이나 느낌들을 말
하는 두 번째 층은 철학이나 시를 낳는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물질과
마음이 전부인가? 만일 이것이 전부라면 그대는 결코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중심이 없다, 어
제 그대는 어떤 생각을 했었고, 오늘 그대는 다른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일
그대는 또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강물과 같다, 거기에 중심은
없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그대는 어떤 중심도 발견할 수 없다, 생각은 변하고 느낌들도
변한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언제나 병들어 있고 불안
하다,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층이, 가장 깊은 층이 존재한다, 첫 번째 층은 대상의 세계
이다, 과학의 세계이다, 두 번째 층은 마음의 세계이다, 철학과 시, 느낌과 생
각의 세계이다, 그리고 거기에 세 번째 층인 종교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주시(witness)의 세계이다, 생각을 주시하는 자, 사물을 주시하는 자가 거기에 있다.
그 주시하는 자는 하나이다, 둘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점을 바라보거나
또는 눈을 감고 그 집 안에 있는 그림을 바라보거나 그 보는 사람은 똑같다,
그대가 그대의 분노를 주시하거나 또는 그대의 사랑의 감정을 주시하거나
그 주시하는 자는 똑같다.
그대가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삶이 시와 같거나 또는 악몽과 같거나 거기에
차이는 없다, 바라보는 자는 똑같다, 주시하는 자는 똑같다, 이 주시하는 자가
오직 중심이며, 그리고 이 주시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세계이다.
예수가 “가서 사람들을 치유해 주어라!”라고 말할 때 그는 곧 이렇게 말하
는 것이다. “가서 사람들에게 중심을 갖게 해주어라, 그들을 주시자로 만들
어 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세상에 빠지지도 않고 그들의 생각에 빠지지도 않
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내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대가 일단
그대의 존재 내부에 뿌리를 내리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 본질이 변화한다,
그러면 그대는 기도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잘못된 이유로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될 것이다, 그때 그대의 기도는 걸인처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황제의 기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에고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연민
으로 베풀게 될 것이다, 준다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고 그대에게 큰 기쁨을 주기 때문에 줄 것이다, 그때 그대는 단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식은 먹는 것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단식이 될 것이다.
그 완전히 다른 단식이란 바로 마하비라가 행한 단식이다, 때로 그대는 육
체를 완전히 잊은 나머지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육체로부
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육체가 그대에게 배고픔을 알릴 수조차 없을 것
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단식이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것은 ‘우파바스(upawas)’ 라는 단어인데 이 말 속에는 음식이라든가 또는 음식이 없다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그 말 속에 단식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자기 자신과 아주 가까이에서 산다’라는 뜻이며
‘자기 자신과 아주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대가 그대의 중심 깊은 곳에 있을 때, 마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 그대는 배고픔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고 단식이 저절로 일어 난다, 단식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 중심 속에 여러 날 동안 머무를 수가 있다, 라마크리슈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육칠 일 동안 황홀경 속에서 마치 죽은 사
람처럼 움직이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서 있었다면 선 채로 며칠을 보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그를 강제로 눕혀야 했고 강제로 물이나 우유를 먹여주어야만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단식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육체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
나 그대는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대가 이것을 할 수 있겠는가? 모
든 행위는 육체를 통해야만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육체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단식은 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단식은 비육체적인 것을 못하기 때
문이다, 이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하비라, 예수,
그리고 모하메드에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에게도 역시 일어날 수
있다.
37.핵심은 그대에게 들어온 것을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너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매우 의미가 깊다, 만일 음식이 청결하지 않더라도, 수드라 같은
천민 계급이 그것을 만졌다 해도, 또는 생리 중인 여자가 그 음식 옆을 지나
가다가 음식에 그 여자의 그림자가 닿았다 해도, 그런 것에는 결코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의 속에 무엇을 취하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밖으로 무엇을 내어놓는 가이다, 그것은 그대의 질을 보여준다, 그대가 취한 것을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진흙은 변형되어 한 송이 연꽃으로 된다,
연꽃은 절대로 “나는 이 더러운 진흙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한 송이 연꽃이라면 어떤 것도 더럽지가 않다, 만일 그대가 연꽃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진흙 속에 머무를 수가 있고 그리고 그대는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연꽃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그대가 황금 속에서 산다고 해도.
그대에게 나오는 것은 오직 진흙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그대가 그대의 존재 안에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 들어가더라도 변화시키고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대 존재의 질을 취한 다음 밖으로 나오게 된다.
붓다의 생애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독이 든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
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사고였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붓다를 자신의 집
에 초대하려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새벽 네 시에 붓다가 잠자고 있는 나무 근처에 와서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붓다를 초대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붓다는 눈을 떴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부디 저의 초대를 받아주십시오, 저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그리
고 몇 해를 준비해 왔습니다,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많이 차려드릴 수는 없
지만 당신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 저의 오랜 바람이었습
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대의 초대를 받아들이겠다.”
바로 그때 그 도시의 왕이 마차를 타고 대신들과 수행원을 거느린 채 나
타났다, 왕은 붓다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와주십시
오.”
붓다가 말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대의 왕궁에는 나의 제자들이
갈 것이다, 나는 이미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 남자가 첫 번째로 나를 초대했
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가 첫 번째로 나를 초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가야만 할 것이다.”
왕은 그 남자의 초대는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붓다를 설득하려고 했다, “도
대체 이 사람이 당신에게 무엇을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아이들
은 굶주리고 있고 그에게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나를 초대했고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붓다는 그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갔다.
그 남자가 준비한 것은 무엇인가? 비하르 지방이나 인도의 다른 가난한 지방
에서는 우기 동안에 먹을 것들을 모은다, 땅 위로 돋아나는 식물은 무엇이든지 채집해서 모아두는 것이다.
꽃의 일종인, 쿠카르무타라고 불리는 흰 우산 모양의 식물은 우기에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따서 말리고 일 년 동안 저장해 둔다, 그것이 그곳 사람들의 유일한 채소였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독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 가난한 사람은 붓다를 위해 쿠카르무타를 모았다, 그는 그것을 말리고
요리해서 붓다에게 대접했다, 그러나 붓다가 먹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독이
퍼져 있었고 매우 쓴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남자가 준비한 유일한 음식
이었고 만일 붓다가 “이것은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 남자는 달리 준비한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먹기를 계속했고 그것이 매우 쓰며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난한 사람은 매우 행복해 했다, 붓다가 돌아왔을 때 독은 붓다의 몸 속에 퍼지고 있었다, 의사가 와서 말했다. “매우 위험한 상태 입니다, 독이 이미 혈관 속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치료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붓다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때 붓다가 했던 최초의 말은 이것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모았고 그
들에게 말했다. “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 남자는 특별한 사람이
다, 나에게 처음으로 음식을 준 사람은 나의 어머니이지만 마지막 음식은 그
가 주었다, 그는 마치 나의 어머니와도 같다, 그러므로 그를 존경하라.
이런 일은 아주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 만에 한 명의 붓다가 나타
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이런 희귀한 기회를 가질 것이다, 첫 번째는 어머니로서 그녀는 붓다가 세상에 오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 남자인데, 그는 내가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돕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가서 이 남자를 숭배해야 된다고 일러라,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모두 물러간 후 아난다가 붓다에게 말했다, “저
희들에게 너무하신 말씀입니다, 그 남자를 존경하라니요, 그는 살인자입니
다, 그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왜 그런 말
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알고 있다, 너희들은 그 남자를 죽일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가서 그 남자에게 경의를 표
하라, 붓다에게 마지막 음식을 주는 일, 그것은 세상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아주 드문 기회이다.”
붓다에게 독이 주어졌지만 거기에서 사랑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연금술
이다, 그는 자기를 거의 죽게 한 그 사람에게 자비를 느꼈다.
깨달은 자에게는 비록 독이 주어진다 해도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사
랑뿐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독이라 할지라도 그대를 더럽힐 수 없다.
“그러나 너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힐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누가 그대를 모욕했다
면, 그는 그대에게 모욕을 먹인 것이고 그것이 그대를 더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어떻게 그 모욕을 변
형 시키겠는가? 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미움인가?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을 기억하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신경쓰지 말라.” 그리고 그대들 역시 이것을 기억해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의 진리에 대한 접근 방식 전체가 잘못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줄곧 생각을 한다면 그대는 결코
사물을 변형시킬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모
든 것이 외면적으로 된다, 정결한 음식, 이런 종류의 음식, 저런 종류의 음
식, 아무도 그대를 만져서는 안 된다.
그대는 브라민 계급이고 순수한 영혼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핵심은 그대에게 들어온 것을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38.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대 존재의 질과 향기를 나타낸다
이런 일이 있었다, 샹카라차리야가 바라나시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갠지스 강에 가서 전통적인 브라만 방식대로 갠지스 강이 자신을
정화시켜 준다고 생각하면서 목욕의식을 했다, 그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천민 계급인 한 수드라가 그를 만졌다, 그는 매우 화가 나서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가서 다시 목욕을 해야겠다, 네가 나를 더럽혔다.”
그러자 그 수드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갠지스 강은 전혀 쓸모 없
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갠지스 강이 당신을 정화시켜서 이제 당신은 새롭고
청결해졌는데 내가 당신을 만져서 다시 더럽혀졌다고 한다면, 내가 갠지스
강보다 더 위대한 것이 아닙니까?”
그 수드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아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나는 당신이 모든 사람들 안에는 오직 ‘하나(the one)’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내 몸이 당신 몸에 닿은 것이 당신을 더럽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내 몸이 당신의 영혼을 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육체는 하나의 환영이며 꿈이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꿈이 실체
를 만질 수가 있겠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실재하는 것을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만일 당신이 ‘당신을 더럽힌 것은 나의 육체가 아니라 나의 영혼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영혼을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브라마(Brahma:궁극의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바로 당신이 말한 그 ‘하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도대체 누가 당신을 더럽힌 것인지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샹카라는 그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에 대해서 오직 생각만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
지 하나의 철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저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
쳐주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는 알았습
니다, 하나는 존재하고, 그 하나만이 존재하며 그와 똑같은 것이 내 안에 존
재하고 그와 똑같은 것이 당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에 샹카라는 그 수드라가 누구인지 찾아내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
러나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결코 밝혀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마도 신 자신이었는지도, 존재의 근원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샹
카라는 변형되었다.
그대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대를 더럽히지 못한다, 그대에게 들어가
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의 육체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그
대 자신에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대의 순수성은 완전하다.
그러나 그대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대의 질과 그대 존재의 향기를 나타낸다,
만일 그대에게서 분노가 나온다면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대에게서 미움이 나온다면 그대의 내면은 전체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일 그대에게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빛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대가 전체를 성취했음을 보여준다.
부디 예수의 이 이상한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오해하기가 쉽다, 그리
고 예수와 같은 인물은 언제나 오해를 받기 마련이다, 이해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인 것인데
그대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아직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그대들은 마음을 통해서 이해를 하는데 마음은 많은 것들로 뒤섞여 있어
서 혼란한 가운데 그것을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말은 위험한 말이
된다, 나는 그대들에게 예수의 이 말이 공인된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임
을 말해 두어야겠다.
이것은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한 말들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
록이 되었지만 성경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믿는 성서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가 한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이 이야기 역시 기록되어 살아남았다, 이 도마 복음서는 불과 이십 년 전에 이집트에 있는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말들은 바로 그 사본에 기록된 것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공인된 성서에서 인용한 것들이 아니다, 공인된 성서는 결코 옳
은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종교가 조직화되면 그 본질은
죽는다, 조직이 되면 그 실체는 죽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거기에 이권이 개
입된다.
어떻게 바티칸의 교황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만일 그가 이 말을 한다면 아무도 금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교황이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가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헌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토록 거대한 교회 조직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가장 큰 조직을 가지고 있다, 카톨릭 사제만도 120만 명이나 되
며 수많은 교회들이 전 세계에 세워져 있다, 카톨릭은 가장 부유한 조직체이
다.
정부조차도 그렇게 부유하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부든지 파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티칸의 교황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전
세계에 걸쳐 가장 큰 조직망이 있는 유일한 국제정부를 가지고 있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조직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모두 헌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
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주지 말라, 주면 너희의 영혼은 사악하게 될 것이
다”라고 하는 예수의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는 기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가 “기도하지 말라,
너희가 기도하면 너희는 정죄받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과연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교회에 기도가 없고, 금식도 없고, 종교의식도 없고, 헌금도 없다
면 어떻게 성직자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말은 모든 조직화된 종교
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그러면 거기에 예수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들은 공인된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
드시 제외되어야 했다, 그대들 역시 그것을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내
가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기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고 나누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대의 거짓된
얼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가 그대의 존재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
대는 변화되어야 하고 변형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
더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 된다.
누군가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
니까? 저는 못 배운 사람이니 가능한 한 짧게 말씀해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말할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사랑한다면 물론 그때는 모든 행동이 올바른 것으로 된다, 그
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 모든 행동은 잘못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에고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이란 중심을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이란 지복 속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그대의
행위에 의해 살지 말고 그대의 존재를 통해 살라는 뜻이다, 행위는 표면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는 그대의 내면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존재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게 하라, 그대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조정하지 말고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켜라, 진정한 실체는 그대의 행위가 아
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인 것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39.길 잃은 양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마치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와도 같다.
그 중 한 마리가, 가장 큰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
지칠 대로 지쳐 양을 찾은 후
그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지금까지 가장 곤란한 문제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문제는 죄인들,
즉 길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신과 죄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과연 죄인은 벌을 받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지옥은 존재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모든 성직자들은 죄인은 지옥에 던져져서 징벌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과연 누구든지 벌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신에게 자비는 없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신에게 용서가 없다면 도대체 누가 용서를 해줄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대답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예수의 답변이 가장
아름답다, 예수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는 많은 것을 이해해 두
어야 한다, 그 이해들이 그대들에게 기초적인 배경을 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벌을 줄 때 우리는 어느 것이든 합리화하기를 좋아한
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이유는 그것과는 다르다, 여기에서 이 합리화라는
말과 이유라는 말의 차이를 잘 기억하라, 그대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하고 그대의 아이가 그대가 인정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
아이가 옳은 행동을 했는가 그른 행동을 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이 된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인정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물의 옳고 그름은 그대가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가 길을 잃고 그대의 관점에서 보아 잘못된 짓을 하면 그대는 아이에
게 벌을 준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이에게 벌을 주는 진짜
이유는, 아이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깊은 이유를 보면 그대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그대와
맞서게 되었다, 아이는 자기를 내세웠고 아버지, 권위, 힘 있는 자에게 아니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아이에게 벌을 준 것이다, 이유는 그대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며 벌은 일종의 복수인 것이다.
그러나 합리화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대는 아이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아
이를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벌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벌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아이를 바로 잡아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면 그대는 아이를 벌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그대 말에 잘 따르면 그대는 아이에게 상을 준다, 이것이 올바른 생활을 위해 아이에게 주어지는 조건들이다, 바로 이것이 합리화이며 그대 마음속의 독백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 속에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이유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아이를 일정한
자리에 묶어두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우두머리이고 아이 자신은 그렇지 못
하다라는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는 그대가 결정하는 것이며, 아이를 지도 하는 일도 그대가 하는 것이며, 아이에게는 자유가 없고 그대가 아이를 소유하며 그대가 아이의 주인이라는 것을 아이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복종하지 않으면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심층심리학자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든 행동 속에서 이러한
이유와 합리화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합리화는
매우 교활한 속임수이다, 그것은 진짜 이유를 숨기고 그대에게 거짓을 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비단 아버지와 아이, 또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만 일어 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와 길 잃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감옥이 존재하고, 법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복이다, 사회에 의해서 가해지는 보복인 것이다.
사회는 반역자에 대해서 관대할 수가 없다, 그가 사회 전체의 구조를 파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옳다 하더라도 아테네 사회는 소크라테스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전적으로 옳
았다.
만일 아테네 사회가 그를 그냥 둔다면 아테네의 전체 사회구조는 파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사회에 의해서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 것은 그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
문이 아니었다, 지구상에서 그런 진리를 말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그가 말하는 방법과 그가 행동한 방식이 사회 구조를
위험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관대하게 보아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그들
에게 벌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합리화이다, 사회는 벌이란 그대를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그대를 위해서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들은 수천 년 동안 범죄자들을 말해 왔다, 그러나 그 범죄자들이 벌을
통해서 변형되었는지 아닌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범죄는 나날이 증가
한다, 감옥이 늘면 범죄자들도 늘어나며 법률이 많아질수록 범죄도 많아진다,
법원이 많이 생길수록 징벌도 더욱 늘어나게 된다, 결과는 완전히 불합리하다, 범죄만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범죄자 역시, 자신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는 것은 하나의 합리화이며 진짜 이유는 자기가 붙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 역시 자신의 합리화를 갖는다, 다음에는 더 교활하고 영
리해져야겠다는 것이다.
이번에 잡힌 것은 그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아서
이다, 사회가 자기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한번 보자, 그는 이전보다 더 교활하고 영리하고 지능적이 되어서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죄를 지어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는 언제나, 자기가 감옥에 있는 것은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그가 벌을 받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오직 다음에는 붙잡히지 말아야겠다는 것뿐이다.
죄수가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그는 전보다 더 뛰어난 범죄자가 된다, 그는
감옥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더욱 노련하고 지능적이며 중
벌을 받은 경험이 많은 사람들, 다양한 범죄 경험을 가지고 있고 범죄 수법
이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면서 제자가 되어 여러 가지를 배운다, 그는 다음에는 붙잡히지 않을 방법을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 그는 노련한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벌을 받는다고 범죄를 그만두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잘못은
중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벌을 준다, 둘 다 잘못되어 있다, 사회는 또 다
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복이다.
그리고 범죄자들 역시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에고는 아무리 무의식
적일지라도 서로의 언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범죄자 역시 이렇게
생각을 한다, “좋다, 때가 오면 나도 복수하겠다, 어디 한번 보자.” 이렇게 해서 범죄자의 에고와 사회의 에고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도 같은 것일까? 마치 재판관이나 판사처럼, 또는 아버지나 우두머리처
럼, 신도 같은 것일까? 신 역시 사회가 하는 방식처럼 가혹한 것일까? 신 또
한 우리가 에고를 가지고 있듯이 그 깊은 곳에 어떤 에고를 가지고 있는 것
일까? 만일 그대가 불복종한다면 그는 보복할 것인가? 그대를 징벌할 것인
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와 같이 보통
의 인간일 뿐이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신은 길을 잃은 죄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는 친절을 베풀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정의롭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비를 가질 수가 없다, 정의와
자비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의는 그렇지 않다, 정의에는 무조건적인 용서란 없다.
어느 성자가 그의 전 생애를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자기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감금시키고 살았다,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며 덕망 있는 생활을 했다.
그 어떤 감각적 쾌락도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금욕 생활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음에 끌리는 것이면 무엇이든 탐닉하는 방탕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자신의 감각이 이끄는 대로 살고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겼다, 모든 종류의 쾌락과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았다, 그리고 그 둘은 신에게 불리어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만일 성자가 상을 받지 않고 죄인이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할 것이다, 만일 둘 다 상을 받는다면 그것 역
시 불공평할 것이다, 성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선한 생활을 하며
살았는데 그것에 대한 특별한 보상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구나.”
죄인 역시 같은 식으로 보상받는다면 성자 같이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것이 헛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신은 자비로운 신일지는 모르지만 정의로운 신은 아니다.
만일 신이 정의롭다면 그 계산은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명확할 것이다, 그
죄인은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 성자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렇게 되면 신은 자비를 가질 수가 없다, 정의로운 사람은 가혹해야 한다, 그
렇지 않으면 정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가슴으로 살지
않고 머리로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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