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7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7
30.알몸이 된다는 것에는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그러나 아
담과 이브는 어떻게 했었는가? 그들은 무화과 잎사귀들로 자신들의 성기를
가렸다, 인류 최초의 옷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세상은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대는 에덴 동산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대의 무화과
잎사귀들을 벗어던져라!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하는 말이다, 그는 이것이 낙원
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그대는 옷을 벗을 수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그대 내면의 깊은 곳도 옷을 걸치고 있다,
그대는 숨기고 있으며 열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알몸은 아직 알몸이
아닌 것이다, 옷을 벗었는지는 모르지만 순수한 알몸이 된 것은 아니다.
알몸이 된다는 것에는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무 부끄러움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에 대한 어떤 구별이나, 마음속의 어떤 비난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알몸이 되는 것이다, 마하비라는 벗는 것을 좋아한 사람이 아니
었다, 그는 나체주의자 클럽의 회원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알몸으로 살았
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알몸으로 산 것이다.
나체주의자 클럽에서 그대는 순수한 알몸이 아니다, 그대의 나체는 계산된
것이고 머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대는 반역을 하고 있다, 그대는 사회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옷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대는 옷을
집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반동일 뿐이다, 그대는 순수하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너희의 발아래 던지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듯
그것을 발로 밟는다면,
그때 너희는 살아 있는 이의 아들을 보리라,
그리고 너희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리라.
첫째, 그대는 신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대의 알몸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아무 부끄러움 없이 알몸으로 있는
것처럼, 그대는 신 앞에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그때 그대는 순수
해질 수 있다, 거기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가면이 사용될 것이다, 그럴 수밖
에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끄러움이 사라진다면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 둘
은 함께 연결된 것이다, 그대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두려움도 느낄 것이다,
그대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두려움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수치심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두려움과 수치심이 모두 사라질
때 그대의 눈이 열린다, 그때에 그대는 하느님의 아들, 또는 ‘살아 있는 이의 아들‘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가 그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때서야 그대는 붓다를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묻는다, “스승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현재 그대들의 상태로서는 깨달은 스승을 알아볼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어떻게 하면 불이 커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를 알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어떻게 장님이 그것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려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데 장님의 눈은 닫혀져 있다, 그대들은 누군가가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
지,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가 없다, 그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어떻게 그를 십자
가에 못박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를 아주 거칠게 다루었다, 그들은 예수를 억지로 바보처럼 보
이도록 만들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날, 거기
에는 병사들과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한 떼의 군중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과 비웃음을 보내며 즐거워했다.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 목수의 아들은 미쳤다!“ 그들은 가시관으로 만든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고 말했다, “보라! 여기에 ‘이스라엘의 왕’이 있다, 여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들은 마지막 조롱으로 두 명의 강도
를 예수 양편에 매달았다, 그는 두 강도와 함께 범죄자로서 처형당한 것이
다, 그리고 군중들만이 아니라 그 강도들 역시 예수를 비웃었다, 강도 중의
하나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 당신의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 우리 역시 당신과
함께 처형당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잘 좀 봐달라,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지
않느냐? 천국에서 잘 좀 봐다오, 당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못하는
게 없지 않느냐?“
그들 또한 예수를 조롱한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바보처럼 되어버렸다,
그대들은 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그대들의 눈은 닫혀 있다, 그리
고 그 눈이 닫힌 것은 그대들의 옷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몸에 걸치는 옷뿐
만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자기 혐오와 자기 비난, 그리고 겹겹으로
쌍인 죄악의 옷들 때문인 것이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너희의 발아래 던지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듯
그것을 발로 밟는다면.
어린아이에게 처음으로 옷을 입히기 시작할 때, 그는 반항을 한다, 옷은
자유를 구속하며 허위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아이는 옷 입는 것을 싫어한다,
아이의 저항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강요하고 설득할 수 있다.
그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는 벗어도 되지만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어야 한다, 사회 속에서는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우
리랑 함께 나갈 수 없어,“ 그러면 아이는 밖에 나가고 싶어서 옷을 입어야만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가 하는 일은 입었던 옷을 벗는 일이다, 옷
을 벗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짓밟을 것이다, 옷이란 아이의 적이며 그를 거
짓으로 만든다, 옷들이 거기에 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다, 이제 아이는 다시 자유가 되었다,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
고 뛰며 자신의 벌거벗음을 축복할 것이다, 그대가 만일 이 아이처럼 한다
면...... “그때 너희는 살아 있는 이의 아들을 보리라, 그리고 너희에게는 두
려움이 없으리라.“
그대의 벌거벗음 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이란 그대에게 덧붙여진
무엇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부끄러움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많은 종교들
이 죄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그대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대는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고 그 다음은 그대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준 바로 그 장본인인 종교인들을 찾아간다, 어떻게 하면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배우러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두려움을 만들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들은 그대의 두려움을 초월하게 할 수 없다.
예수는 두려움을 초월하도록 그대를 이끌어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
바탕부터 허물어져야만 한다,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 그 바탕이다, 그 바탕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31.에고는 숱하게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만
그대 자신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거기에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해야만
한다‘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이래야만 한다‘라거나 ’저래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현실 그대로 존재하고 현실을 신뢰하라, 현실과 싸우지 말라, 만일 성이 있
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만일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있
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반대의 견해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말라,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쁘다,
나는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용서해야만 한다“ 또는 ”나는 성욕을 느낀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금욕생활을 해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상반되는 것을 만들지 말라, 그대가 이렇게 상반되는 것을 만든다면 그대는 가면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분노는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대의 용서는 단지 하나의 허위적인 가면이 될 것이다, 성욕 역시 그대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움직일 것이고 그대의 얼굴에는 브라흐마차리야라고 하는 하나의 가면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과학자가 다이아몬드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연구했고 마침내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비밀을 풀어냈다, 만일 그 한 가지만 밝혀낸다면 그는 세계에서 제일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한 가지 비밀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지금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티벳에 가면 아주 현명한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들었다, 당신은 그 여자를 찾아가서 골치를 썩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서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여자는 해답을 말해 줄 것이다, 왜 여기에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가?”
그 남자는 티벳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 여행은 여러 해가 걸렸다, 그
현명한 여자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곳에 도
착했다.
아침에 그는 그 여자의 집 대문을 두드렸고 현명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습은 그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녀
의 눈은 아름답게 반짝이며 “잘 오셨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도착을 했고 나의 남편은 출타
중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당신은 오직 한 가지만 물을 수
있고 나는 그것에 대답해 줄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오직 한 가지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러자 그 과학자가 무심결에 이렇게
물었다. “당신 남편은 언제 돌아옵니까?”
이것이 바로 몇 해의 고생 끝에 그 여자를 만나서 답을 구하고자 한 과학
자의 질문이었다,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성욕은 그의 문제, 진짜 문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다이아몬드와 씨름하
면서도 그는 딴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면 모든 여인들,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은 나의 것이 될 것이
다.”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그 어딘가에 이런 생각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대는 무의식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겉으로는 계속 일을 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것은 터져 나올 것이다, 도망쳐보았자 헛된 일
이다, 오직 변형만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변형을 위해서는 있는 그대
로서 자기 자신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런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재판관이 되지
말라! 단지 그대의 본성을 신뢰하고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그리고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벌거벗음의 의미이다.
삶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든지 깊은 신뢰를 가지고 살아라, 어떤 목표도 만
들지 말라, 그대가 어떤 목표를 만든다면 그대는 허위적인 인간이 될 것이
다, 삶에는 목표란 것이 없다, 그대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삶과 대립하는 것이다.
삶은 어떤 사업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시처럼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삶은 머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로맨스이다, 신뢰가 필요하며 의심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삶은 과학적이지 않다, 삶이란 비합리적인 것이다.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논리학자들을 믿지 않는다, 삶은 사랑을 믿는다, 그것
은 시를 믿으며 신비를 믿는다, 삶이란 살아가야만 하는 하나의 신비이다,
삶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삶은 하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비밀은 열려 있는데 그대는 닫혀 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 드러나 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나뭇잎 하나하나에, 태양의 모든 빛줄기 속에 그것은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대가 닫혀 있는 것이다.
왜 그대는 닫혀 있는가? 그대는 그대 내면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외부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받아들여라! 그대 존재
의 중심으로부터 시작해라,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
대는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과
함께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가 일단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결
코 이전의 그대가 아닐 것이다.
변형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것은 스스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
신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때만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바이
다, “옷을 벗은 상태로 존재하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회가 그대에게 부여한 모든 것을 버려라.“ 옷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사회는 그대에게 삶을 주지 않았다, 사회는 그대에게 옷을 주었을 뿐이다,
사회는 그대에게 본래의 자아를 주지 않았다, 사회는 그대에게 에고를 주었다, 옷을 버려라,
그러면 에고도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벗은 몸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에브라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의 스승을 찾아갔다, 그는 왕이었지만 구도
의 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스승이 말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에브라힘이 말했다,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스승은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
으라.”
제자들은 당황했다, 에브라힘은 위대한 왕이었고 그런 일은 불필요하며
너무 지나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에게는 그런 일을 요구한 적이 없었
는데 왕에게는 왜 그런 심한 일을 시킨단 말인가? 어떤 제자는 스승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렇게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에게도 그런 것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말했다, “이제 신발을 벗어 손에 들라, 그리고 그 신발로
너의 머리를 치며 길을 걸어라! 온 마을을 그렇게 벌거벗고 신발로 머리를
때리며 돌아다녀라!“ 그 마을은 에브라힘이 지배하던 나라의 수도였다, 그
러나 그는 스승의 말에 따랐다, 벌거벗은 채, 손에는 신발을 들고 자신의 머
리를 때리면서 그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
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큰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승이 그에
게 그토록 심한 요구를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스승은 오직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한다, 그대가 가진 잠재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승은 더 큰
요구를 할 것이지만 그대의 잠재력이 빈약하다면 스승은 그렇게 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에브라힘은 많은 잠재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나중에 스스로의 힘으로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인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옷을 벗었고 또한 에고를 버린 것이다,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것을 벗어버린 것이다.
에고는 숱하게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하나의 짐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대는 그것을 다시 머리에 이고 다닌다, 수없이 그대는 실패자가 되
고, 수없이 그대는 성공하지 못한다, 수없이 에고는 저절로 떨어져나가지만
그대는 다시 상처받고, 좌절하고, 패배하고, 실패한다, 그래서 그대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에고라는 짐을 다시 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사자가 호랑이를 찾아와서 물었
다, “이 숲에서 누가 우두머리인가?”
호랑이가 말했다, “물론 당신이지요, 당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사자는 곰에게 가서 그를 움켜잡으며 물었다, “누가 제일인가? 누
가 우두머리인가?”
곰이 말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모든 동물들의 왕입니다,
당신이 우두머리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자는 코끼리에게 가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 숲에서 누
가 우두머리인가?“
그러자 코끼리는 사자를 그의 코로 말아 쥐고는 힘껏 던져버렸다, 사자는
적어도 오십 미터는 날아가 바위 위에 떨어졌다, 그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
리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답을 모
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떨쳐버리지 않을 것
이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답을 모른다고 해도 이
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왜 그렇게 거칠게 대하는 건가? ‘나는 그 답을 모른다‘고만
말하면 되지 않는가!”
그대가 실패할 때 사회가 그대에게 부여한 모든 것들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그대가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실패는 위대한 성공으로 들어가는 시작
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삶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사람이
종교적으로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패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가 성공했을 때 종교적
으로 되기란 매우 어렵다, 옷이 그대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벌거벗은 존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때 옷은 하나의 아주 좋은 투자이다, 그러나 실패할 때 그대는 돌연 알몸이 거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것으로도 그것을 숨길 수가 없다, 오직 그대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그대의 실패를 이용하라! 그리고 그대가 바위에 던져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 때, 사자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 세상에 성공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성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거짓된 얼굴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그대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그리고 징기스칸 같은 사람들도 모두 실패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본성 안에, 자신의 고유성 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라, 그리고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대가
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져 알몸이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순수해진다, 그
때 그대는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그 사과를 던져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낙원의 문은 다시 열릴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아담이 이브와 함께 인류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가 다시 그 문을 열었으므로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들어갈 수 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기독교인
이 되는 것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예수를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그대 자신이
바로 예수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32.가장 이상한 말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너희가 어느 마을이든지 그곳을 지날 때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사람들이 너희 앞에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그들 중 한 병든 자를 낫게 해주어라.
너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또한 아주 의미 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인간이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 속
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간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허위
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기도를 한다 해도 그대는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 기도를 한다, 그대
가 단식을 한다 해도 그대는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 단식을 한다, 그대 자체
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이 올바른 행위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올
바른 존재가 되는가에 있다, 그대의 존재가 올바르다면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동적으로 옳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가 올바르지 않다면,
그대가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진실되고 순수하지 않다면,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 된다.
결국 모든 것은 그대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대의
존재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어느 도둑이 기도를 한다고 할 때, 그 기도는
잘못된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훔치고, 해를 입히는
사람의 가슴에서 어떻게 기도가 흘러나올 수 있겠는가?
도둑의 가슴에서 기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기도는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도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그대가 병들어 있으면 그대의 기도 역시 병들어 있는
것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한번은 취직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신청 용지에 그는
많은 자격 조건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립 은행의 부은행장으로 추천을 받았었다, 그러나 나는 돈에 관
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다.
나는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나는 욕심이 없어서 봉급의 액수에도 관심
이 없다, 얼마를 받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일을 사랑한다, 일 주
일에 예순다섯 시간이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나스루딘의 면접을 담당한 부장은 그의 신청서를 읽고 놀라 물었다.
“이런 세상에! 아니 당신에게는 단점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까?”
나스루딘이 말했다, “딱 한 가지가 있죠,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한 가지 단점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다른 단점들은 필요하지 않다, 한
가지면 충분하다, 그대는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는 오직 한
가지 단점만을 가지고 있다, 그 한 가지 단점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나
온다, 그리고 그대는 그 한 가지 단점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대가 어디를 가든지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 행위를 물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그대가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존재’는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정수를 의미하고 ‘행위’는 그대가 하는 표면적이고 주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의, 바깥 세상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 그대 내면의 있는 본래의 자기를 의미한다.
그대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다, 행위는 이차적인 것이며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비활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존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다.
예수, 크리슈나, 그리고 붓다 이들 모두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절, 교회, 사원, 종파, 그리고 소위 종교 지도자나 선생으로 불리는 자
들은 모두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대가 만일 예수에게 묻는다면 그는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가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바티칸의 교황에게 묻는다면 그는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대하
여, 도덕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도덕은 행위와 연관이 있고 종교는 존재와 관련이 있다.
이 차이를 가능한 한 확실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이것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 같은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를 잘못 이해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에 관해 이
야기를 하고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그가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의 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이것을 이해한다면 예수의 이야기는 확실해질 것이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
으면 그것은 매우 이상하고 모순되며 반종교적으로 들릴 것이다, 예수가 이
야기를 했을 때 사제들에게는 그 말이 반종교적으로 들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종교를 파괴
하려는 인물로 생각했다.
자 이야기를 들어보자, 겉으로는 분명히 종교를 파괴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금식을 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너희가
단식을 행하면 그것을 통해서 마음이 정화된다고 종교는 되풀이해서 말해
왔다, 자이나교의 경우 그 종교의 전부가 단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이 만
일 예수가 한 이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아
주 위험한 인물이다, 유태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매우 잘한 일이
다!”
유태인들 역시 당황했다, 그런 말은 반역적이며 그들의 도덕성 전체가 상
실될 판이었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
다.” 단식이 죄가 되다니!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대가 기도를
하면 정죄를 받는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란 말
인가? 우리는 종교란 교회에 가는 것이며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매우 의미가 깊다, 예수가 말하는 것
은, 지금 그대로의 상태로는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
이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금식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자선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기도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아
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지금 그대의 상태로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
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대는 기도할 수 있는가? 그대는 사원에 갈 수 있다, 그것은 쉽다, 그러
나 그대는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하는 데는 전혀 다른 질적인 것이 요구된다,
그대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는 기도하는 것처럼 그대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사원
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단지 그들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기도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그대가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가 기도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다면 절이나 교회에 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바탕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움직이고 걷는 모두가 기도가 된다.
그대는 먹고 그대는 사랑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대의 호흡을 보라,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의 바탕은 늘 거기에 있다, 그것은 마치 호흡과도 같다,
그대가 기도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절이나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 교회와 절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기도할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데도 여전히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죄인이었다, 그는 교회에 가본 일이 없
었고 기도해 본 적도 없었고, 신부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죽
음을 앞둔 순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와달라고 애원을 했
다.
신부가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은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 남자는 정치
가였고 권력이 있었으며, 돈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신부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신부가 가까이 오자 그는 신부의 귀에다 속삭였다, “나
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가본 일이 없고
기도해 본 적도 없습니다, 나는 전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조금의 자신감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느님이
저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세상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군요,
그러나 한 가지만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저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신부가 말했다, “아마도 하느님은 용서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아는 방식으로 당신을 알고 계시지는 않으시니까, 아마도 하
느님은 당신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식으로 당신을 알
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세상을 속일 수 없으면서 과연 하느님을 속일 수 있겠는
가? 그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속일 수 없으면서 신의 마음을 속일 수 있겠는
가? ‘아마도’란 말은 매우 편리한 하나의 위안일 뿐이다, ‘아마도’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라!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기도란 그대의 본성에 속한 것이지 개성과는 상관이 없다, 개성이란 그대
가 해온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본성이란 태어날
때부터 그대에게 주어진 것을 말한다, 그것은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다, 기도는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본
질이며 그대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닌 것이다.
33.마음에 짐을 지고 있지 않을 때 지성이 생겨난다
단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단식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단
식을 하는가? 예수가 말한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마하비라가 단식에 대해
서 말한 어떤 것보다도 의미가 깊다.
예수는 매우 심오한 심리학적 진실을 말했다, 그 진실이란, 마음은 극단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쉽게 단식할 수 있다, 과식을 하는
사람은 쉽게 단식할 수 있다 라는 말은 이상하고 역설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사람만이 쉽게 단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늘 균형있는 식생활을 해온 사람은 단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대답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단식에 대한 생리학적,
심리학적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생리학적 면에서, 그것은 외면적인 층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과식을
하게 되면 많이 섭취하기 때문에 지방을 저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쉽게 단식할 수 있다, 살쪘다는 것은 지방을 많이 저장했다는 사실 외에 다
른 것이 아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쉽게 단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 것이다, 단식하는
사람들을 한번 관찰해 보라, 특히 자이나교도들의 경우, 남자 한 명이 단식을
한다면 여자들은 넷 또는 다섯 명이 단식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비율이 그러하다.
남편은 단식할 수 없지만 아내는 할 수 있다, 왜? 여성의 몸에는 많은 지방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많은 양의 지방을 축적하고 있다면 그만큼 단식을 하기란 쉽다, 단식을 하는 동안에 그대는 그대의 지방질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식을 하는 동안 하루에 1~2파운드씩 체중이 감소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
이다, 그 체중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대가 그대 자신을 먹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육식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쉽게 살이 찐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지방을 비축한다,
그것이 여자들의 몸이 남자들보다 둥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단식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살찐 사람들은 쉽게 단식할 수
있다, 그들은 또 절식을 계속할 수 있고 언제나 그럴 기회를 찾는다.
보통의 건장한 남자는 석 달 동안 단식을 해도 죽지 않을 만큼의 지방질을
비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마른 사람이고, 하루에 몸에 필요한 양만
먹는 절제된 식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단식을 할 수 없다.
필요한 지방질이 비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부자들 사이에서는 단식이 성행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단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라, 가난한 사람은 종교적인 날을 경축할 때 배불리 먹으려
축하한다, 그리고 부자가 종교적인 날을 경축할 때 그는 금식하며 그날을 지
킨다, 자이나교도들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식을
즐긴다.
그러나 모하메드교인들은, 가난한 모하메드교인들은, 또는 가난한 힌두교도
들은, 종교적인 날이 오면 배불리 먹는다, 왜냐하면 일 년 내내 굶주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그날을 금식하며 지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미 일 년 동안 금식을 하며 지낸 셈이다.
그러니 종교적인 날은 반드시 보통 때와는 달라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와
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새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그날을 축하하고 스스로를 즐길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단식과 단식에 대한 숭배 풍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
고 있다, 그것은 이미 유행이 되었다, 이제 미국은 너무 부유한 나라가 되었
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단식 풍조가 점점 유행되는 것이다, 그
들은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리학적인 측면에
서 보면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살이 쪘기 때문에 단식하기가 쉬운 것이다.
두 번째는 심리학적인 면이다, 그대는 음식에 사로잡혀 있다, 음식이 그대
의 관심사이다, 그대는 과식을 즐기며 먹고 또 먹는다, 그리고 계속 음식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어느 날 음식에 대해서, 그리고 먹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싫증을 낸다.
만일 그대가 어느 한 가지만 줄곧 생각한다면 언젠가 그것에 대해 싫증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먹는 것
을 너무나 즐겨왔다, 이제 그대는 단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단식을 통해
서 그대는 맛을 느끼며 다시 먹을 수 있다, 식욕이 되돌아온 것이다, 단식이란 이러한 것이다.
마음이란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은 반대의 극단으로는 쉽게
움직여 갈 수 있지만 그 중앙에 머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
균형을 잡기가 가장 어렵고, 극단은 언제나 쉬운 것이다.
그대가 과식을 즐겨한다면 단식도 쉽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한가운데 설 수 없다, 그대는 적절한 양을 먹을 수 없다,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다, 마음이란 언제나 극단의 성향을 가진다, 그것은 마치 시계추와도 같다.
추는 언제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추가 중앙에 정지해 있을 때 시계는 죽는다, 시계가 움직일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한가운데 있다면 생각이 정지한다, 그것은 마치 시계가
정지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대가 극단으로 흐를 때, 조만간 그 반대의 극은
다시 의미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너무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금식
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의 용어에 의하면 죄란 극단적인 것, 극단적으로 움
직이는 것을 말한다, 한가운데 머무는 것만이 죄를 넘어서는 것이다, 왜 그
런가? 극단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왜 죄인가?
극단적인 것 속에서 그대는 반은 선택하고 나머지 반은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란 전체이다, 그대가 “나는 많이 먹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절반만 선택한 것이다, 그대가 “나는 전혀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대는 절반만 선택한 것이다.
그대가 한가운데 있을 때 거기에 선택이란 없다, 그대는 몸을 위해 먹지만
과식하거나 금식하지 않는다, 그대는 결코 어느 한쪽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
며, 노이로제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취하지만 그
필요 때문에 그대는 무거운 짐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균형은 죄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불균형 상태에 있을 때마다 그
대는 죄인이다, 예수는 세상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은 죄인이며, 그렇다고
거기에 반대해서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역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
상을 받아들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초월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 초월하는 것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그대가 그 속으로 들
어간다는 것, 그대의 에고가 개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때 그대는 싸워
야만 한다.
그대가 극단에 치우칠 때마다 그대는 계속 싸워야만 한다, 극단이란 결코
편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중앙에 있을 때만 그대는 편안할 수 있
다, 극단에 치우칠 때 그대에게는 항상 긴장과 걱정과 근심이 있게 될 것이
다, 오직 한가운데 있을 때, 그대가 균형을 잡고 있을 때에만 아무런 근심이
없고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편안함을 느끼며 긴장이 없기 때문에 불안도 없을 것이다, 긴장
이란 극단적인 것을 뜻한다, 그대는 수많은 극단을 행해 왔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그토록 긴장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여성을 쫓아다닐 때 섹스는 끊임없이 그대의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그대가 여자를 멀리할 때에도 섹스는 끊임없이 그대의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그대가 섹스를 위해 살아간다면 그대의 마음속은 오직 섹스로 가득 차 있게
되고, 그대가 섹스를 적으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그대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친구보다 적은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때로 친구는 잊을 수 있다, 그대가 어떻게 그대의 적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섹스의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늘 섹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수도원 같은 곳을 가보라, 그곳 사람들은 섹스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섹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자신의 삶이 마치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먹는 것에 빠져 있는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먹는 것에 관한 생
각으로 차 있게 된다, 그리고 단식을 행하지만 또다시 먹는 것에 관한 생각
이 마음속을 채우게 된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짐이 된다,
그 여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남자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섹스가 문제인 것이다, 음식이 문제가 아니다, 음식은 먹으면 그것
으로 끝난다,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마음속에 끊임없이 여러 가지 생각이 있으면 마음은 에너지
를 낭비하게 된다, 그때 마음은 둔감하게 되고,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삶은 무
의미한 것이 되어 짐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마음에 짐을 지고 있지 않을 때, 가볍고 신선할 때, 지성이 생겨난다, 그러면
그대는 신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있다, 짐을 벗어버린, 새로운 의식
으로 세상을 볼 수가 있다.
그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바로 신이다, 그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그 살아 있음이 신이다, 그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홀하다, 모든 순간순간이 환희와 축복 속에 있다, 그 환희와 축복이 바로 신인 것이다.
34.사랑이란 기도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대는 배워야만 한다
신은 어디에선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이 세
계에 현현해 있다, 마음이 짐을 벗어버리고 깨끗하며 침묵할 때, 젊고 신선
하고 순수할 때, 그 순수한 마음과 더불어 신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
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죽어 있다,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마음을 죽인 것
이다,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움직이고, 또다시 이 극단에서 저 극단으
로 달려가고, 결코 한가운데에 머물지 못하는 그대 자신이 그대의 마음을 죽
인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남자가 술에 취해 아주 넓고 큰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그 술취한 사람이 길 가던 사람에게 물었다, “길 건너편이 어
디요?”
길은 아주 넓었으며 밤은 너무 깊었고, 가로등은 모두 꺼져 있었으며 그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는 주위를 잘 볼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물었다, “길 건너 편이 어디요?”
그러자 길 가던 사람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길 건너편까지 데려다 주었다.
길 건너편에 도착하자 그는 또다시 다른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길 건너
편이 어디요?” 길 가던 사람은 그를 다시 길 건너편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다, 그러자 술취한 사람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도대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찌된 사람들인가? 내가 저쪽에서 길
건너편을 물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이쪽으로 데려다주었고, 지금 내가 여기서 길 건너편을 묻자 저쪽이라고 말하고는 나를 다시 저쪽으로 데려가려고
하니, 도대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찌된 건가? 길 건너편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반대의 극이 저편이
되어서 그대를 유혹한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매력을 낳는 것이다, 금
욕생활을 하려는 사람에게 섹스의 매력이 얼마나 큰지 그대는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의 도를 넘는 것이다.
그대는 단식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음식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것은 경험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가 없
을 것이다, 끊임없이 한 가지만이, 음식이나 섹스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 생각은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거기에
어떤 극단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긴장이 없는 편안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극단에 치우치
지 말라, 이것이 바로 예수가 했던 말의 의미이다, 극단으로 움직여 가지 말
라! 예수는 사람들이 먹는 것에 중독이 되어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금식을 행하지 말라,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개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 무엇을 요구
하는 것, 또는 무엇을 불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이 있고 신은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부탁하러 신의 문 앞으로 간다, 그대는 마치 한 사람의 걸인
처럼 가는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서 기도란 구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절대로 구걸이 아니다, 기도는 오직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가 기도이다.
감사는 구걸과 완전히 다르다, 그대가 구걸하러 갈 때, 그대의 기도는 결과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대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기 때
문에 전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지 기도 자체는 아니다, 그대는 여러 번 기도하지만 그대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대는 기도를 중지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소용없는 짓이야!” 그대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기도는 절대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절대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랑이란 결과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는 단지 사랑을 한다, 사랑 그 자체 속에 어떤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그대는
단지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통해서 추구되는 어떤 결과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구걸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기도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대가 그대를 존재하
게 해준 것에 대해서, 그대를 숨쉬게 해준 것에 대해서, 이 아름다운 색채들
을 보게 해준 것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면 그대는 대단한 환희와 기
쁨을 느낄 것이다.
신은 그대가 들을 수 있도록, 그대가 자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대가 그것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그대에게 준 하나의 선물이다, 그대는 깊은 마음으로, 오로지 감사의 기도만을 드리기 위해 사원에 간다,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분에 넘칠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면에서 그대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지 않다 해도, 그대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선물일 뿐이다, 그것은 신의 사랑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신은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그대가 이것을 이해할 때 하나의 바탕이 그대
안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감사를 느끼는 마음의 바탕이다, 그때 그대는 오직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에게 간다, 그대는 오직 감사의 마음만을 느끼는 것
이다.
감사가 곧 기도이다, 신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사를 느끼는 것은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는 그대 행복의 절정이다, 그것은 결코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
면 그대들의 기도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대들이 사원에 기도
하러 갈 때마다 신에게 무엇인가 구걸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도는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대가 기도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죄이다.
그대의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통해서 그대는 기도 속에 무엇이 일어나
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그대는 사
랑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는 않은가? 서로
에게 감사하고 있는가?
그대가 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그대는
상대에게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주는가? 아니면 단지 사랑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대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이용한다, 그것이 섹스를 위한
것이든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든 그대들은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상대방이 “안 돼요, 나를 이용하지 말아요!”라고 말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끝이 날 것인가?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대체 뭘 이용한다는 거야?” 만일 상대방이 그대를 인정한다면, 만일 아름다운 여자가 그대에게 호감을 가진다면 그대의 에고는 만족을 느낄 것이다.
어느 아름다운 여자가 그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대는 처음으로 그대가 남자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그대를 인정하지 않고, 그대를 쳐다 보지도 않는다면 사랑은 사라져버린다, 만일 한 아름다운 남자가,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듯이 그대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그대에게 호감을 보낸다면 그대의 에고는 충족이 되고 그대는 만족해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착취이다, 그대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떤 지옥 같은 상황을 만든다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
다, 그것은 지옥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한낱 이름뿐이었으며, 그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지옥을 만들지 않는다, 사랑은 천국 그 자체의 본질이다, 그대가 사랑을 할 때 그대는 행복하다, 그대의 행복은 그대가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연인들을 바라보라, 그들은 도무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들은 처음에만, 서로를 모른 채 의식 없이 상대방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물
을 던질 무렵에만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시와 그들의 낭만과 그리고 모든 터무니없는 행동들은 단지 서로를 끌어 들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일단 그물에 걸려들면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속박 받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서로의 에고는 하나의 속박이 되고,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정죄를 받게 된다, 그대들의 사랑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대들의
기도 역시 올바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도란 곧 전체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평범한 인간과의 사랑에 실패를 했다면 어떻게 그대가 신과의 사랑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바로 기도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대는 배워야만 한다, 그대가 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된다, 물론 그것은 수백만 배나 확대된 것이지만 똑같은 열쇠가 신과의 사랑에도 사용된다, 그 차원은 훨씬 크지만 열쇠는 같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결과이며 그 속에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에고가 사라질 때 거기에 사랑이 있다, 그때 그대는 요구하지 않고,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단지 주기만 한다, 준다는 것이 그토록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때 거기엔 어떤 거래도 없다, 어떤 거래도 없고, 에고도 없을 때, 사랑이 흐른다, 이제 그대는 얼어 있지 않다, 그대는 녹아 있다, 바로 이 녹아 있는 상태를 배워야 한다, 그때 그대는 비로소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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